★ 오전 6시 27분
꿈을 꾸었다. 그녀는 작은 배 안에 홀로 갇혀있었다. 폭풍을 만났는지 선체가 심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몸을 똑바로 겨누기 어려웠다. 배가 침몰하기 전에 여기서 어서 나가게 해달라고, 나 좀 제발 살려달라며 주먹으로 문을 마구 두드렸다. 하지만 밖으로 사람이 아무도 없는지 별 반응이 없다. 배는 계속해서 기우뚱 춤을 추며 10m의 대형 파도를 넘었다.
아아, 뒤집힌다... 쿵.
워낙 잠버릇이 험하다 보니 침대 모서리로 간당간당 붙어 있다 결국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지탱해줄만한 걸 주먹으로 움켜잡았지만 얇은 홑겹 이불이 튼튼한 동앗줄 역할을 해줄 리 만무하다. 말 그대로 온갖 잡동사니들과 함께 와르르 쓸려 내려갔다. 끝 마무리로 시트 자락이 천사의 깃털인양 머리 위로 사뿐 떨어졌다.
아프다는 건 둘째치고 창피하다. 납작하게 짓눌려 시뻘개진 코를 문지르고 있노라니 목덜미 뒤로 수건 하나 걸친 가우리가 놀란 토끼 눈으로 안을 빼꼼 들여다보고 있었다.
죽었니, 살았니. 개구리 바아-안찬.
『여- 좋은 아침? 살아 있어?』
널부러진 자세 그대로에서 리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 오전 7시
칫솔을 꺼내 무의식 중에 입에다 물었다. 그런데 거울을 보니 손잡이 모양이 미묘하게 틀렸다.
딱 꼬집어서 이거다 싶은 건 없지만 하여간 달랐다. 귀신은 속아도 리나는 안 넘어간다. 같은 노랑색일지언정 평소 쓰던 물건이 아니었다.
얼른 퉤 뱉어서 칫솔모의 구부러진 정도를 확인했다.
역시나. 바꿔치기 당했다.
『제로스!! 이 나쁜 놈, 내 칫솔 당장 내놔!!』
창문을 열고 벌컥 고함 질렀으나 도둑맞은 칫솔의 행방은 이미 알 길이 없음이다.

★ 오전 7시 13분
배를 움켜쥐고 생쇼를 다 해봤음에도 화장실에 못갔다. 변비는 처녀들의 흉적이다.

★ 오전 8시
경건하고 거룩한 아침 식사.
다섯 번째의 미트볼 접시를 기다리면서 오늘의 스케줄을 잠시 점검했다. 일단 마도사 협회에 들러 심심한 일거리가 있는지 알아볼 예정이었다. 괜찮은 아르바이트 - 단기, 수고비는 비쌀 것 - 가 손쉽게 걸려들 거라곤 감히 기대하지 않았으나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식대는 여전히 대량으로 방출되는 상황이었고, 나라는 강건하여 도적이 줄었다. 비극의 요순시대라. 산을 뒤지고 계곡을 훑어도 산적 하나 보이질 않았다. 내심 걱정하는 게 현실로 다가왔다. 어쩌리, 도둑의 씨가 말랐다.
- 아아, 황금 주머니가 주렁주렁 매달려 끔찍하게 무거워진 망토를 입어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어깨가 부러져도 좋으니까 따악 한 번만이라도 걸쳐 봤으면.
한숨을 내쉬면서 포크를 깨작였다.
『리나!』
『아차!』
가우리가 얼른 주의를 주었지만 늦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그만큼 실수도 증가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놈의 얄미운 미트볼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가슴께를 수직으로 굴렀는지, 무릎에까지 도달하면서 만든 걸쭉한 소스의 궤적이 어떤 모양새였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 밥을 먹어 배가 부른데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손빨래를 하기란 그리 만만한 노릇이 아니다.
아아, 접혀진 뱃살아.

★ 오전 10시 정각
『담당자가 아직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이 몇 시인데!』
일부 마도사들이 배부른 공무원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 오전 11시 8분
여행 중인 마도사에게 구미에 맞는 일감이 떨어지기란 하느님의 기적과도 같다. 서류 뭉치가 캐비닛으로 하나 가득이라고 할지언정 그것들의 내용을 잘 읽어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생활 정보지 식의 절망을 만끽할 수 있다. 노래방 아르바이트, 술 취한 남자가 허벅다리 안쪽을 쓰다듬어도 마이크 붙잡고 신나라 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 한다, 서빙, 시간 당 1,800원의 저임금이다, 재택 근무, 모두가 사기라고 보면 된다, 배우면서 일하실 분, 학원비만 챙기고 일자리는 결코 주지 않는다, 막노동, 그나마 확실하지만 육체적 피로감은 지옥을 방불케 한다... 기타등등.
리나의 표정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게다가 요인 보호와 같은 짭짤한 수입의 아르바이트는 이쪽에서 사양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보디가드라는 건 적어도 1년 계약 직이다. 자유롭게 방랑하는 여행자 신분으론 선택의 폭은 아무래도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고성에서의 유령 퇴치나 했으면 좋겠다만... 모든 성에 유령이 사는 것도 아니오, 어쩌다 유령이 나왔다고 해도 사람에게 해꼬지를 입혀 말썽이 난 경우의 수는 턱없이 적다.
한숨-
지금까지 모두 백 마흔 여덟 건의 의뢰서를 보았다. 슬슬 눈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나이가 많아지면 참을성이 배가 된다던가. 호호백발의 꼬부랑 마법사는 질증도 내지 않고 계속해서 서류철을 넘겼다. 콧잔등 아래로 흘러내린 무거운 돋보기를 1분에 열 번 꼴로 끄집어 올림과 동시에 손가락으로 침을 묻혀 낱장을 넘겼다.
자, 보시지요. 이것으로 백 마흔 아홉 번째의 의뢰서였다.
곁눈질로 제목을 본 리나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젠장. 진흙 끈적이 괴물 퇴치...』
『우리가 가진 서류들 가운데선 가장 고가의 의뢰입니다. 은화 20개가 보수죠. 어쩌시려우? 해볼 생각 있어요?』
『저기, 가까운 곳으로 해서 마왕은 살지 않나요? 나, 마왕을 아주 잘 잡는데.』
『뭐셔.』
『하하하... 그냥 해본 소리예요. 신경쓰지 마세요.』
일감은 그럭저럭 하나 잡았다. 허나 썩 내키지는 않았다.

★ 오후 12시 40분
크기는 강아지만 하다.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해서 나무 그늘이나 바위 틈에 서식한다. 전반적 형태는 후라이팬에 눌러붙은 채 한 달 간 그대로 방치한 밀가루 부침개를 떠올리면 된다. 그런 체구에 달팽이 눈 같이 생긴 조그마한 발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한마디로 상종도 하기 싫다. 썩은 진흙을 주로 먹고 사는데 소화 능력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따라서 왕성하게 집어삼킨 내용물 대다수를 그대로 배출한다.
지방에 따라 사람들은 이 검푸른 괴물의 이름을 각각 다르게 해서 불렀다.
깔딱이, 끈적이, 찝쩍이, 나쁜 놈, 죽일 놈... 찢어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은 놈.
『위험한 녀석이야?』
『보고도 모르겠냐. 당연히 위험하지. 사람 혈압을 올려 결국엔 사망에 이르게 하니까.』
나무 위에서 거대한 썩은 진흙 똥이 푹푹 떨어진다고 상상을 해보길 바란다. 재수 사나워 그게 머리 꼭대기를 정통으로 맞추기라도 한다면 과연 그 기분이 어떠할지 짐작이나 가시는지? 예고도 없고 미리 경고하는 법도 없다. 어느날 갑자기... 똥은 떨어진다.
『날벼락이지.』
사람에게 그다지 해를 끼치지 않는 이 얌전한 작은 짐승이 퇴치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서 명확해진다. 누군가 양동이 하나로 물을 퍼부었다고 해도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는 법이다. 뺨 맞은 듯한 충격은 그렇다고 치자. (힘은 중량 곱하기 가속도다. 나무 위에서 다량으로 떨어지는 오물이라는 건 일종의 흉기다) 그 내용물이 끈적끈적 한데다, 말도 못하게 더럽고, 세탁을 해도 잘 지워지지 않는 검회색 얼룩을 남기며, 끝내주는 냄새를 자랑한다면야 말은 다한 거다. 피부 미용에 좋은 머드 팩도 아닌데 그 엄한 걸 얼굴에 뒤집어 쓰다니. 분노는 한 마리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승천한다.
『우산이라도 들고 나오는 건데.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었어.』
턱 밑으로까지 줄줄 흘러내리는 오물을 손으로 대충 걷어내던 리나는 이를 박박 갈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모조리 죽여버릴 테다. 그것도 처참하게 죽여주마.
『가우리! 엉덩이 내리고 땅바닥에 엎드려!』
기록으로는 이 기술을 대현자 레이 마그너스가 최초로 사용했다고 되어있다. 이계의 신을 부르거나 빛의 방주를 소환하는 등, 고난도의 특별한 주문은 아닌데... 세 종류의 각기 다른 마법을 동시에 제어해야 하기에 고도의 기술력과 정신력이 요구된다. 난이도는 톱 클래스. 마도 입문서에는「실력을 과신하여 함부로 시도하지 마라, 결과가 끔찍스러울 수 있다」고 엄중 경고하고 있다.
『시작한다!』
처음엔 커다란 김칫독 크기로 에어 실드를 만든다. 보호막은 최대한으로 탄탄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드워프의 도끼로 골백번 내려찍을지언정 금이 가서는 절대 안된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리나는 신중에 신중을 더했다. 마법의 성공 여부는 여기에 달려있다.
이 정도면 되었겠다 싶은 에어 실드를 완성시켰다면 다음으로는 화이어볼 주문을 방어막 안으로 조심해가며 접목시킨다. 고난도의 정밀도가 요구되는 기술이다. 이제 막 뜨겁게 폭발하려는 기운을 공기의 막으로 살짝 누르는 거다. 모양새는 혀에 쓴 약을 설탕의 막으로 감싸는 것과 유사하다. 쉽게 말하면 두께 1mm로 코팅된 섭씨 8천도의 고성능 화염 폭탄이다.
『크윽!』
팔이 잿더미가 되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멀리서 보면 흡사 불덩이를 이고 가는 태양신의 배와 같다. 머리카락이 오그라들고 있었다. 눈썹이 타고 있다. 서둘러야 한다. 리나는 얼른 세 번째의 주문 영창에 들어갔다.
『모든 힘의 근원이여, 하늘과 땅을 스쳐 지나가는 위대한 바람이여!!』
드디어 마법의 완성이다. 리나는 들고 있던 불덩이 속에서 세찬 폭풍이 튀어나오게끔 조정했다. 칼날같은 바람이 사방으로 회오리치며 솟구치기 시작했다. 상당히 뜨겁고 세찬 바람이었다. 이 정도면 반경 200m 내에 존재하는 모든 수분을 일시에 건조시키고도 남는다. 화이어볼이 직접적으로 토사를 펄펄 끓게 만드는 것에 비해, 이 복합 주문은 일종의 즉석 미이라 제조기와도 같다. 소용돌이 모양새를 그리는 건조한 바람의 운동 궤적은 그 위력을 배로 증폭시킨다. 레이 마그너스는 이 기술로 밑 바닥이 무려 300m에 달하는 거대 호수를 일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울러 전설에 의하면 그는 그 일에 대한 댓가로 은수룡의 저주를 받아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러니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습하던 지대의 나뭇잎들은 뻣뻣하게 말라붙고도 남았다. 나무 그늘에 숨어 신나게 활개치던 깔딱이 괴물들도 딱딱해진 진흙덩이 모양새로 최후를 맞았다. 우르르 떨어지는 저 짙은 갈색의 덩어리를 보라. 화덕에 구운 밀가루 전병 모양새로 가로 두짝 갈라지고 있다. 쩍쩍 쪼개지는 모양이 고소하기 그지 없다.
『이여엽!!』
마지막으로 그때까지 제어시키고 있던 화이어볼을 공중 높게 띄어 올려 안전하게 폭파시키면 일은 끝난다.
『헉헉... 자식, 까불고 있어.』
그녀는 잔인하게도 깨진 밀가루 전병들(?)을 발로 짓밟아 고운 가루로 아예 갈아 버렸다.

★ 오후 1시 2분
요식업에 뛰어든지 오늘로 경력 30년! 음식 만들기의 배테랑 리코씨는 주장한다. 길고도 험한 야성의 숲을 지나 힘들게 인가로 내려온 사람들이 식당 마룻바닥을 밟기가 무섭게 보여주는 행동 패턴은 거기서 거기다.
『모든 분들이 손과 얼굴을 씻습니다. 화장실이 어디냐고 넌지시 물어보지요.』
여기서 당연히 리나는 화부터 냈다. 식사 전에 비누로 손을 씻는 것이 미덕 아니냐고?
웃기지 마라. 배고픔 앞에선 설교는 무익하다.
일찌감치 카운터 위로 번쩍이는 은닢 올려놓고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식당 주인을 협박했다.
『스페샬 런치 5인분씩! 무조건 많고 푸짐하게. 빨리 부탁해요.』
때가 덕기덕기 묻은 더러운 손으로 푸짐한 닭다리를 뜯는 무신경의 소유자! 머리에 새똥이 묻었든 말든, 주린 배를 채우고 보자는 실속파! 불결한 냄새와 비위생적 옷차림에 신경쓰는 건 나중이다. 집중해서 접시로 코를 박고 입으로 호흡한다. 옷에서 나는 냄새라는 건 돼지 우리의 악취 저리 가라지만... 그걸 리나는 가우리의 방귀 냄새라며 애써 부인했다.

★ 오후 1시 48분
언제까지나 가려운 머리를 긁어댈 수는 없다. 숙녀의 피부는 상당히 섬세하다. 오물이 묻은 팔뚝으로 벌써 시뻘건 발진이 돋고 있었다. 식당에 도달하기 전에 한 차례 냇가에 뛰어들어 대충 행궈냈다지만 점액질의 끈적거림이 쉽게 씻겨 떠내려갈리 만무했다.
리나는 한숨을 내쉬고 욕조에 들어갈 준비를 서둘렀다. 그녀의 어머니가 늘 강조했던 것, 그러니까 물만 찌깍 바르는 간단한 샤워라 할지언정 식후 30분 뒤에나 하라는 교훈은 잠시 옆으로 접어두기로 했다. 위경련이나 심장 발작의 위험은 어디까지나 몸이 허한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거라 나름대로 자위하면서 말이다. 아무렴, 그녀의 팔뚝은 황소를 잡아 끌고도 남음이 있었다. 과식(정확하게는 폭식)으로 인해 배가 더부룩했지만 기꺼이 옷을 걷어 부쳤다. 갈아입을 옷가지와 포푸리 비누, 아울러 고무 튜브로 만들어진 노란 아기 오리 인형도 옆구리에 꿰찼다.
드륵-
입실이다.
의외라고 하진 말기 바란다. 리나는 욕조에 들어가 풍덩거리길 즐기는 편이다. 그간 쌓였던 피로를 말 그대로 물로 씻어보내는 거다. 적당히 뜨거운 물, 보드라운 비누 거품... 극락이다. 성가신 머리카락을 끈으로 묶어 상투 틀어 말아 올린다. 발가락으로 물장구를 치는 재미도 솔솔하다. 뭐니뭐니해도 오리 인형을 둥둥 띄워놓고 입감을 호호 불어대는 장난이라는 건 무엇과 견주기 어렵다. 어릴 적에 종이 세어가며 시장 놀이 하던 것 이상으로 즐거웠다.
『음?!』
따라서 방해받으면 상당히 열 받쳤다.
끼이- 살금살금.
원래 좀도둑들은 그런 틈을 잘 노리기 마련이다. 생각을 해봐라. 목욕 도중에 발가벗은 몸으로「도둑 잡아라!」외치며 도중에 뛰쳐나올 수는 없잖는가. 여차하면 몸싸움이 벌어질 터인데 실터럭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론 제 아무리 날고 기는 무인이라도 반격하기가 어렵다.
잊지 말자. 욕조에서 마라는 암살당했다.
그렇다고 천하의 리나 인버스가 가만히 앉아서 귀만 쫑긋 세우고 있을소냐.
보통은 창문을 통해 사람 살리라 고함을 치는 것이 정석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라고 해. 하지만 난 그렇게는 못하지.』
때로 용감한 여성들은 바가지 들고 도둑을 향해 몸을 날린다. 수치심이니 창피함이니 하는 것들의 무게가「돈」보다 가벼운 까닭이다. 커다란 타올을 몸에 감고 냅다 욕실 문을 박찬다. 어느 자식이냐 버럭 고함 지른다. 물기에 주룩 미끌어져 바닥으로 넘어졌어도 울상은 짓지 않는다. 눈앞으로 별이 번쩍이는 것과 동시에 창문으로 시커먼 그림자 하나 넘어가고 있음에랴.
사람은 긴장하면 고통을 잊는다.
『누가 놓칠 줄 알고!』
리나는 기꺼이 창으로 몸을 날렸다.
『저놈 잡아라!! 도둑이야!!』
몸에 두른 것이라고는 얇은 타올 하나 달랑 한 장, 아무래도 다리를 쩌억 벌리고 창틀을 뛰어넘기는 무리였다. 치마가 펄럭이는 것과는 아무래도 차원이 틀렸다. 밑으로 시원하니 바람이 부는데 벌어졌던 다리가 다시 오므라들지 않으면 비정상이다.
부르르 한 번 떨고.
『에잇!』
두 다리를 꼬옥 붙인 채 스프링처럼 튀어올라 기술적으로 벽을 넘었다.
토끼와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깡총 뛴다고 전부가 아니다. 따라서 리나가 취한 자세는 문제가 컸다. 착지 순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로지 고개를 땅바닥으로 처박기 위해 그러했다고 남들이 착각을 일으킬 만큼 무식했다.
쾅-
어쨌거나 요점은 막대 사탕 하나 입에 물고 있던 제로스가 턱 벌어짐을 감히 수습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 아까운 걸 흙바닥에 흘리고 안타까운 비명을 마구마구 질러대었다는 거다.

★ 오후 2시 30분
소식을 전해듣고 헐레벌레 달려온 마을 경비대장 모모 씨. 급히 달려오느라 투구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사실 그는 투구를 포함한 일체의 전투 장비에 불만이 컸다. 그것들은 지나치게 무거웠으며, 무쇠를 소재로 삼은 제품의 특성상 통기성 제로인지라 여름엔 습진으로 고생케 만들었다. 단단함은... 그거 하나는 만족스러웠다. 칼로 가슴을 쳐도 피부가 찢어지지 않는 놀라운 방어력은 오래 전부터 입증되어져 있었다. 허나 27kg에 육박하는 쇠붙이는 필연적으로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어 석 대 맞으면 될 주먹을 여섯, 일곱 대씩 꼭 맞게끔 만들었다. 가끔씩 그는 술취한 동네 주민들을 상대하다가 동네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곤 했다. 이웃한 소라다에서는 무두질한 가죽 방어복에 고운 쇠사슬을 엮어 만든 가벼운 팔뚝 가리개를 새롭게 도입했다던데 왜 우리는 아직도... 푸념이 나온다. 오늘도 무거운 중장갑을 몸에 걸치고 한바탕 달음박질을 한 모모 씨는 서러움의 눈물을 삼켰다. 장비의 노후화는 예산 문제와 맞물려 그를 고문했다.
『아아, 갈증 난다. 여기 물 좀 주시게!』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오다가 벌써 지쳤다. 그는 나 죽는다 시늉하며 시원한 냉수부터 찾았다.
카아-
『그래, 문제가 뭐요, 주인 양반.』
『예! 그게 우리 여관에 묶던 젊은 처자가 2층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자살 미수는 아니다. 2층에서 뛰어내린다고 죽을 인간은 없다.
『상대가 젊은 처자라 하였소? 옳커니, 그럼 변질자가 나타나 추행을 하려 했겠구먼.』
경비대장 모모 씨는 험악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사기꾼이니 도둑놈이니 하는 범죄자들도 그러하다만 자고로 변질자만큼 혐오스러운 건 없었다. 아울러 변질자의 등장 소식은 마을 분위기를 단박에 망쳐버린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여자들이 지레 겁을 먹으면 남자들은 한술 더 떠서 질겁을 하게끔 되어 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남편, 아버지, 오리버니, 남동생 앞에서 길거리가 무서워 감히 시장도 가지 못하겠노라 언성을 높이게 된다. 하소연은 침실에서, 부엌에서, 마루에서 쉬지 않고 반복된다. 이윽고 남자들은 필연적으로 짜증을 부리게 되며, 그 결과는 곧장 마을 경비대장인 모모 씨에게로 달겨들게 되어 있었다.
사회적 불안 요소를 일시에 말소하라, 민중은 탈수기처럼 사람을 쥐어짜는 놀라운 재주를 보여주게 된다.
모모 씨는 수건으로 급히 얼굴을 닦았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급히 처자를 만나야겠소. 어디에 있소? 병원으로 실려갔소?』
『아뇨, 주방 안쪽 방에 있습니다. 안내해 드리지요. 그런데 대장님?』
『뭐요.』
요기서 여관 주인은 목소리를 낮추며 앞치마 모서리를 살살 쥐어 뜯었다.
『그게 말이죠... (쉿!) 변질자가 아닙니다.』
가끔 그런 뜨내기 손님들이 있다. 도둑이 들어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카운터 앞에서 한 차례 소동을 벌이는 것이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가며 울고 불고 벽에다 머리를 찧는다. 물론 죄다 연극이다. 체크 아웃을 해야 할 터인데 땡전 무일푼일 경우, 상당 수의 사람들이 앞으로 닥칠 위기를 모면하고저「도둑이 들었수다」라고 거짓말을 풀어놓곤 하였다. 분실된 지갑이라는게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경우가 그래서 가끔 있다.
『그게 정말이오?!』
경비대장 모모 씨의 얼굴색이 확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궁여지책으로 하는 수 없어 발가벗고는 도둑이야 소리치며 2층에서 뛰어내렸다?』
여기서 여관주인은 그의 말을 얼른 정정했다.
『아주 발가벗지는 않았어요, 수건 하나로 국부는 가렸으니까.』
졸지에 리나는 치사꾼으로 지목되었다.

★ 오후 3시
주민들 열댓 명이 모여들었다. 대충 되었거니 싶자 상황 조사라는게 시작되었다.
수첩과 연필을 들고 준비 자세를 취한 경비대장 모모씨 앞에서 제일 먼저 손을 든 사람은 잡화상 주인 A씨였다. 급하게 저요, 저요, 부르짖는 모양새가 봉숭아 학당의 맹구 같은지라 갈등은 좀 되었다만 일단은 연필 끄트머리로 그를 지적했다. A씨의 가게는 큰 길을 두고 여관과 마주하고 있었다. 무료함을 달래고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행인들을 관찰했다면 무언가 본 게 있을 터였다.
『말씀하시오.』
『큰 사슴 만물 가게입니다. 없는 거 빼고 다 있습니다.』
『그저 가게 PR을 하실 의향이라면 공무 집행 방해 죄로 긴급 체포하겠소.』
『아뇨, 아뇨, 아뇨!』
하여간 잡화상 주인 A씨의 증언에 따르자면 이거다 싶은게 없었다. 날이 더운지라 길거리는 한산했다. 어슬렁 지나가는 개들이 있었고, 가끔 가다 더위에 지쳐 숨을 헉헉대는 사람들이 느린 발걸음으로 스쳐 지나갔다. 하품이 절로 나오는 하루였다.
특이한 게 있었다면 어느 젊은 여자가 도둑 잡아라 하고 앙칼지게 비명을 질렀다는 것, 이어 알몸으로 창문에서 뛰어내렸다는 거였다. 여기서 A씨는 머리를 긁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길거리로 사람이 그리 많이 돌아다지질 않았다. 누군가 황급히 도망치려 했다면 눈에 확 들어왔어야 옳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도둑 잡으라는데 도둑처럼 보이는 사람이 부근으로 없었다.
『도둑이라 짐작되는 사람은 없었다라... 누가 수상한 사람을 보진 않았고?』
이 질문에 나이 많은 할머니가 대답했다. 그녀는 정육점 주인 G씨의 모친이었다.
『있었수.』
『그게 누굽니까.』경비 대장 모모 씨는 황급히 연필에 침을 발랐다.
『저~기서 검은 여행용 망토를 걸친 신관을 봤는데 다 큰 남자가 어린애들 막대 사탕을 쪽쪽 빨고 있었다우. 내 손주 새끼들이 잘 먹는 건데 말이여. 이거야말로 수상한 일이지. 아암!』
『어무이.』
당황한 정육점 주인 G씨가 모친의 팔을 황급히 끌어당겼다. 경비 대장 모모 씨의 한쪽 눈썹이 활처럼 치켜 올라간 걸 정육점 주인은 눈치껏 경계했다.

★ 오후 3시 27분
일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경비대장 모모 씨를 비롯, 모두가 리나를 - 가우리에게서 급히 빌려 입은 푸른 색 면 티셔츠 차림새의 리나를 - 둥굴게 에워싸고 한바탕 도끼 눈을 부릅떴다.
『그래서요? 아.저.씨.들.』
이런이었다. 초판부터 죄인 취급을 당한 리나는 불쾌하다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이 모든 일은 그녀의 외모에서부터 가능해진 일이다. 척 봐서 애띈 10대 소녀인데다 남자용 티셔츠를 원피스 대용품으로 몸에 걸쳤다. 옷차림이 엉망인데다 불량스런 눈매와 불만 가득한 입매가 거기에 더해졌다고 생각을 해 봐라. 껌만 질겅 씹고 있었다면 영락없는 가출 청소년의 꼬락서니였다. 따라서 그녀는 터무니 없는 선입관을 그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가볍게 헛기침한 뒤,
『여관 지붕으로 참새가 앉아 평화롭게 이끼를 쪼고 있었다고 했소.』
경비대장 모모 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시적인 표현이었다.
어쨌거나 이 문장을 해석하자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째. 도둑으로 여길 만한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목격자가 전혀 없다. 주민들은 한결같이 창문이 열린 뒤, 곧바로 발가벗은 여자가 뛰어내렸다고 증언했다. 도둑이 먼저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고 여자가 뒤따라 쫓아나간 게 아니란다. 둘 째, 그녀가 묶은 여관방의 손잡이를 조사한 결과 바깥에서부터 억지로 문을 딴 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열쇠 구멍은 지극히 깨끗했다. 세 째, 방 안 물건들도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도둑이 들어 서랍을 뒤졌다곤 보기 어려웠다.
상황만 놓고 보자면 자작극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죠. 꿈을 꾼 걸 사실이라 착각하고 소동을 피웠을지도.』
리나는 심드렁하게 말한 뒤, 고개를 한층 더 삐딱하게 기울였다.
『우선 이거 하나 확실하게 합시다. 도둑이 들었다고 신고한 건 제가 아녜요. 여기 여관집 주인이지. 제가 물건 잊어버렸다고 난리친 적 있어요? 도둑 잡으라고 소리는 질렀지만 (창문에서 발가벗고 뛰어내리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라는 걸 명심해요.』
이야기가 워째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거렸다.
『도둑 잡으라 소리만 질렀다고?』
『귀중품은 그대로 있어요. 확인해 보시면 알겠지만 내 가방은 옷장 속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잘 숨겨져 있다고요. 댁이 직접 보시구려. 문을 열면 흡사 텅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시적인 눈속임 마법일 뿐이예요. 거울의 반사광을 응용한 어린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죠.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지언정 손을 뻗으면 그 안으로 묵직한 가방이 하나 잡힐 겁니다. 열어보면 고대 엘프레야 금화 열 다섯에 보석이 다섯 뭉치, 말린 데지렐 뿌리가 한 다스, 미스릴 반지가 두 개에 카락테온 비술 가루가 32온스, 일반 은화가 일백 아홉 개, 가공되지 않은 사프랑 원석이...』
안되겠다 싶은지라 서둘러 말꼬리를 잘랐다.
『그렇담 뭐요, 도둑이 들긴 들었는데 미수로 그쳤다?』
『맘대로 생각하시구랴. 아무튼 나는 댁들에게 도둑 들었다 신고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도둑 잡으라 신고할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으니까.』
리나는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을 흉내내면서 시건방지게 다리를 꼬았다.

★ 오후 4시 18분
리나는 제로스를 향해 손짓했다. 따라와 보라는 거였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엉겹결에 따라 나서긴 했다만... 아이고오~ 제로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리나님, 리나님.』
안되겠다 싶었는지 입술을 질겅 깨물고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들었다. 도도도도 달려가서는 티셔츠 하나 달랑 입은 소녀의 몸으로 자신의 시커먼 꺼풀을 서둘러 뒤집어 씌웠다.
마른 침 한 번 꼴깍 삼키고,
『제발! 숙녀는 그런 식으로 허벅다리를 다 드러내놓고 밖을 돌아다니면 안되요.』
『시끄러. 난들 어쩌라고! 입을 옷이 없는데 뭘 어쩌라는 거냐! 앙?!』
도둑은 분명 들었다.
그녀는 옷을 도둑 맞았다.

★ 오후 4시 34분
몰라서 그렇지 마도사의 옷은 고가품이다. 옷 자체야 그렇지만 방마 주문을 건 여러 아이템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에 그러하다. 소매에 달린 연녹색의 보석 여섯 개만 해도 이곳 경비대장의 5년치 연봉 만큼의 가격에 해당된다. 어깨 방패막이라든지, 망토만을 따로 떼어놓고 봐도 눈은 핑글핑글 돌아가게끔 되어 있다. 의상은 분명 마도사들의 한 재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누군가 몰래 훔쳐갈 법도 하다만.
여기서 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면 타리스만도 같이 가져가야 정상이지. 한 눈에 봐도 그게 물건이라는 게 보일 터인데... 그것만 쏙 빼놓고 달아났다는게 말이 되냐.』
범인은 세탁실 바구니에 처박힌 - 깔딱이의 분비물을 뒤집어 쓴 더러운 상태의 옷만을 들고 부리나케 튀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행태였다.
『그런 고로 사람 짓이 아니다?』
『당연한 거 아냐?』
리나의 방 앞에 선 제로스는 허리를 굽혀 원하던 작은 조각 하나를 찾아냈다. 흔히 페이첼이라 부르는 은판인데 크기는 엄지 손톱보다 좀 크다. 고도로 순수한 은에 성스러운 드래곤의 인장이 그려져 있다. 제로스는 그걸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가 다시금 획 잡아챘다. 원래 페이첼은 어린 드래곤들의 장신구지만 상당한 방마 효과가 있는 부적으로 인간 마법사들 사이에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자신처럼 고위 마족인 존재에겐 껌과 다름 없지만...
『깨져있군요.』
『꽤나 비싸게 주고 샀던 물건인데. 쳇!』
『이런 걸로 효과볼 수 있어요?』
『막지는 못해. 하지만 지잉- 하고 꽤나 무거운 소리를 내지. 일종의 알람처럼.』
『아항. 그런 거구나.』
제로스는 이제 알았다며 가볍게 콧소리를 냈다.
리나는 그런 제로스의 어깨 위로 손을 터억 얹었다.
뭔가 살벌한 미소. 그녀의 팔이 무거웠다.
어라라. 이거 좋지 않은 걸.
『왜, 왜요? 나는 범인이 아냐요!!』
『하지만 네 동족이잖니. 마족의 명예를 걸고 알아서 잡아 와.』
『어째서?! 내가 왜 나서야 하는데요?』
『씁- 잔소리 말고 빨랑 가서 범인을 내 앞으로 대령 해.』
리나는 제로스의 궁둥이를 뻐엉 걷어찼다.

★ 오후 5시 15분
소동 탓이다. 젖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았더니만 머리카락이 죄다 하나로 엉겨 붙었다. 부스스한 앞머리로 브러쉬를 찔러 박았지만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 걸 억지로 힘 주어 잡아당기니 눈물이 절로 나왔다. 머리를 빗는 걸까, 아니면 뽑는 걸까. 상당히 아팠다. 화장대 앞으로 수북하게 쌓여가는 머리카락이 무섭기만 했다.
『젠장! 왜 이렇게 뻣뻣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린스는커녕 샴푸를 하고 제대로 행구지도 못했다.
끄악. 리나의 얼굴색이 변했다.

★ 오후 6시 2분
누군가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실례합니다.
『뉘슈?』
문을 빼꼼 열고 보니 깨끗하게 드라이 클리닝 된 자신의 마도사 옷을 들고 선 남자가 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제로스는 아니었다. 언젠가 보기는 봤던 남자... 리나는 사내의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차근차근 잘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에 떡 벌어진 어깨, 칼 같이 잡힌 다림질 주름에 눈썹이 설탕처럼 새하얗다.
『얼레리오. 해장군?』
장군님은 씩씩하게 말했다.
『나와 계약해서 다섯 아이를 낳아주기 전까지 이 날개 옷을 돌려주지 않겠소. 어쩌시려오?』
『메요-』
『아, 잠깐만. 생각해보니 다섯 아이는 생략해도 좋을 듯 하오. 그저 당장에라도 우리들 마족과 계약만 해준다면 이 옷을 돌려 드리...』
찰싹-
가볍게 추측을 해보자면 아마도 그는 전날 밤에 선녀와 나무꾼 책을 읽었던 모양이었다.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세탁을 해줬다는 점에서 이번 한 번만 용서한 거예요. 그렇게 알고 있어요!』동네가 떠나가라 리나는 소리 질렀다.

★ 오후 7시
활기찬 저녁 식사.

★ 오후 8시 20분
가우리와 잠시 외출, 구운 감자를 사다 푸짐하게 먹음.

★ 오후 9시 19분
체한 모양이었다. 리나는 배가 아프다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당황한 가우리가 허겁지겁 손을 따주겠다며 바늘을 들고 왔다. 그런데 이 아저씨 좀 보시게, 열 손가락 손톱 밑을 찔러서 피를 내야 하는데 엉뚱하게 손등에다 바늘을 푹푹 박고 있었다.
지금 못 먹는 감 찔러나 보고 있나.
『리나 살려!!』
손이 너무 아파서 배가 뒤틀리는 고통도 잠시 잊었다. 이런 미친 짓이라니.

★ 오후 10시 7분
『안녕히 주무세요.』
힘들고 고단한 하루였다. 몸도 마음도 완벽하게 지친 나머지 일찍 잠자리에 든 그녀의 이마 위로 차가운 기운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너도 잘 자, 제로스.』
리나는 졸린 눈을 감고 가볍게 하품했다.
『리나님?』
제로스는 할 말 있다며 잠시 멈칫했다.
『왜.』
『나도 가우리씨처럼 입술에다 키스하면 안되요? 응?』
『확- 신족으로 붙어버린다.』
『알았어요, 알았어. 편히 주무세요. 이제 불 끕니다.』
찰칵- 하고 문이 닫겼다.
길었던 하루가 겨우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