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겉모양은 허름하다. 군데군데 깨어져 나간 붉은 빛깔의 벽돌은 풍상에 찌든 고대적 유적처럼 습기하나 없이 앙상하게 메말랐다. 틈새를 바른 역청도 손상이 심각해 보인다. 꼬락서니만 보자면 흡사 얼기설기 엮어놓은 이쑤시개 더미로 담을 쌓은 격이었다. 죽어가는 노인네의 다리뼈를 분질러 그 안을 들여다보면 바로 저런 형상일지도 모르겠다. 신발 속에 들어간 모래를 털어낸답시며 손바닥 짚고 기대어 섰다간 낭패 당하기 딱이다. 사람 몸무게는커녕 바람만 불어도 흙먼지를 일으키곤 와르르 무너지게 생겨 먹었다.

그래서 지금 그대는 망설이고 있다. 무리도 아니다. 이래가지고는 삼풍 백화점 생각이 날만도 하다. 누군들 생매장 당하고 싶으랴.
그렇지만 컴 온, 컴 온.
때로는 에라 모르겠다 만용을 부리는 것도 괜찮다. 눈 딱 감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아보자. 조금은 어둡지만 그래도 계단 턱의 실루엣이 어떻다는 것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팅 주술을 걸어놓은 은구슬이 허멀건 빛을 뿜어대고 있기에 시각적으로 의지할 구석은 충분하다.

『그래도 을씨년스러운게 영 불안한 걸.』
아아, 왓슨. 진정하게, 이 친구야. 이런 조명 아래선 내 표정이 왜곡되어 보일 걸세. 침대 머리맡에 선 유령처럼 이상해 보이겠지. 그러니 초조해 죽겠다는 식의 경련은 일으키지 말게나. 자, 머리 조심하고... 아무렴 내가 하나뿐인 친구인 자넬 굶주린 사자 우리 속으로 집어 던지겠는가?
입구에서부터 내부로 향하는 통로는 상당히 길고 좁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내려가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저 아래서 올라오는 사람이 보이면 낭패당하기 딱이다. 그러니까 서두르자. 좁다란 곳에 몸이 끼이는 건 딱 질색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조해하는 사람 특유의 허둥거림으로 계단을 밟았다.
저 아래로 두꺼운 나무로 만든 푯말이 걸린 문이 하나 보였다.
이곳이 우리의 목적지다. 눈짓하며 손으로 가리켰다. 이제 다 왔다. 내가 그대에게 보여주고픈 장소가 바로 여기다.

『문 앞에 붙은 이 푯말은 뭔가. M...SH? 저기, 발기... 지속 호르몬?』
등을 떠밀린 왓슨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결국은 구역질 난다는 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으슥한 곳으로 가게 자리를 잡았는가 그게 의심스러웠지. 알고 보니 그게 불법 성인 섹스숍이었구먼. 이 못말릴 친구 같으니라구... 여보게!』

어둠 속에서도 그의 넓직한 이마가 땀으로 번들거리는게 다 보였다.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 찾아낸 체크 무늬 손수건으로 얼굴을 이리저리 훔쳤다. 왜 이리로 끌고 왔느냐는 비난의 빛을 띈 회색빛 눈동자가 옆으로 짝 찢어졌다. 왓슨은 그 방면엔 다소 결벽증이 있다. 여자 친구가 먼저 키스하려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걷어찬 경력의 소유자다. 섹스는 박멸해야 할 병균으로 취급하는, 창세기부터 시작된 인간의 본능을 단칼에 부정하는 것으로 아담과 이브가 저리른 원죄를 극복하려는 이상주의자다. 그런 친구이니 성인 섹스숍에 자길 데려온 날 아주 죽이려는 건 당연한 거였다.

지나친 착각이다. 억울하다. MSH가 아니라 S자가 하나 더 뒤에 붙었다. 섹스숍 같은 소리!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마지막에 따라붙은 영어의 대문자 S를 초인종 누르듯 꾹꾹 찔러댔다. M.S.H.S.! 비아그라 호르몬 따위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글자의 의미가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푯말엔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 잡상인 사절이라는 문구라고 상상을 해도 그만이다. 중요한 건 알맹이, 문 안쪽 가게니까 말이다.
그럼 이제 문을 열도록 하겠다.
도어는 안으로 밀어서 열게끔 되어있다.

안은 의외로 넓은 편이다. 약 20평 정도의 크기? 노란 빛을 내뿜는 기름 등잔이 적당히 불을 밝혀 실내는 전반적으로 아늑하다는 기분을 자아내고 있다. 뭐, 조명만 보자면 그렇다. 좁다란 계단을 내려와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라면 약 3초 가량은 긴장을 풀 수도 있을 것이다. 몸이 꽉꽉 끼이는 찜통 지하철에서 겨우 내려 지상으로 올라서면 아스팔트 위로 부는 뜨거운 바람조차 상쾌하게 느껴지는 법이 아니더냐. 하지만 내 장담하건데 그 상쾌함이라는 건 역시 순간의 마법, 찰나에 불과하다.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면 이곳이 편안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장소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리게 된다.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해서 비정상적이었다.

『왜 이렇지? 너무 조용하군. 한눈에 보아하니 사람은 제법 많은데 말일세.』
왓슨의 지적은 정확하다. 이래가지고는 성당 참회실 분위기였다. 무작위로 배치된 듯한 네모난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머리 수는 어림잡아 서른 명은 되었다. 구석구석 둥근 자갈이 복병처럼 깔렸다. 그런데 소곤거리며 귓속말을 간간히 주고받는 것이 전부, 죄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양 입을 다물었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신문을 읽는 사람도 없었고 찻잔의 딸그락 거림도 없다. 도회지 레스토랑의 소음 수준은 돼지 우리와 엇비슷하다며 투덜대던 왓슨이었지만 막상 지나친 침묵에 휩싸인 곳으로 떨어지고 보니 돼지 우리 레스토랑이 훨 낫다는 걸 깨닫고 보는 그였다.

거북살스럽다. 푹신거리는 의자에 파묻혀 하나같이 눈동자만 반짝거리고 있을 뿐, 여느 찻집에서 쉽게 맛볼 수 있는 공기가 아니었다.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건네받은 불치병 환자들만 모여 앉았나... 3개월 뒤엔 반드시 죽게 된다는 사망 선고에 넋이 나간 거라면야 또 모르겠다. 앞니로 손가락 마디를 맹렬하게 물어뜯고 한 인간을 물끄럼히 지켜보던 왓슨은 본능적으로 넥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잡아 풀었다. 누가 목을 조르지도 않았건만 갑갑해진 모양이었다.

『여보게. 나는 말일세...』
『쉿!』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날 돌아다 보는 그의 어깨를 얼른 잡았다. 왓슨. 그런 식으로 머뭇거리고 서면 위험하네. 잠자코 당황해 하는 그를 이끌고 구석 자리로 장소를 옮겼다. 아무튼 이곳에선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하는 편이 좋았다. 그간 경험으로 미루어 봐서 그건 확실하다.

덤벙대는 우리들 움직임이 신호였을까,  처량맞도록 가냘픈 목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다음 손님.』
우측으로 치우쳐 있는 카운터는 좁고도 작았다. 딱 하나뿐인 지방 은행의 금전 출납구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드는 그런 곳이었다. 사무적이고도, 동시에 은밀한 비밀스러움이 연한 향기를 피워 올렸다. 몇 개의 유리컵이 진열된 장식장이 전부인 그곳에서 제법 살집이 붙은 (제법? 사실은 상당히 붙은!) 젊은 여성이 고해성사를 기다리는 신부님처럼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이는 스무살 전반? 중반? 나잇살에도 불구하고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버릇처럼 귀밑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가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카운터 위에 올려놓은 노트 위로 뭔가를 적다 말고 틈틈이 손을 올려 머리를 만졌다. 그러길 여섯 번? 결국은 짜증을 내며 싸구려 검정 머리핀을 머리카락 속으로 찔러 박았다.

『빨리 오세요, 다음 손님!』
그녀는 부스스한 얼굴을 들어 날카롭게 외쳤다. 웬지 그녀의 몸 상태가 안좋아 보인다. 나쁜 징조다. 말 못할 불길함이 담배 연기처럼 허공을 맴돌았다.
『냐항항! 죄송함다. 제 차례인데여~』
주인의 호령에 허겁지겁 카운터 앞으로 달려나가는 건 열 댓살이나 먹은 애띈 소녀였다.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로 오른손엔 어연 종이 쪽지 하나를 꼬옥 쥐고 있었다. 자기 순서가 되었음에 아이는 용기를 내어 들고 나온 종이를 카운터 앞으로 공손히 내어밀었다. 주인되는 여자가 그걸 받았다. 오오, 아이는 희색이 만연하여 카운터 앞에 서서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그간 얼마나 기다렸던가! 젖 내음이 가시지 않은 뽀얀 피부 위로 물 오른 화사한 꽃씨가 가득했다. 급한 맘에 마른침을 꼴깍 넘기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동적으로 아이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아이는 친근감을 어필하며 주인 여자와 눈을 맞추었다. 건강한 시선이었다.

『전 제롯상과 리나님이 참 조아여. 제롯님이 리나랑 러브했음 조케써여. 케케케- 내용은 아무거나 게안아여. 캬캬. 하트 빼먹음 안돼. 와~ 살앙하는 제롯니양...』
하지만 아이는 말이 미처 끝내지도 못했다.

퍽.

주인되는 여자는 생각할 것도 없다며 커다란 손도끼를 들어 상대방의 머리통을 가차없이 두쪽으로 갈라버렸다. 수박 쪼개졌다. 은백색의 흉기가 위로 번쩍 올라갔다가 전속력으로 떨어지는 광경은 가히 압권이었다. 숲속의 괴물 오크가 300년 묶은 나무 뿌리 뽑아대는 괴력에 버금가는 파워로... 0.2초도 채 걸리지 않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대다수는 슬로우 모션으로 도끼 날이 움직이는 걸 자세히 보았다. 짧막한 비명과 함께 용암처럼 솟구치는 선홍빛 핏물, 그리고 회색 빛 뇌세포가 덩어리로 분해되어 한 여름날 강변에서 터뜨리는 싸구려 중국제 폭죽처럼 어지럽게 튀어오르는 것도 남김없이 다 보았다. 굉장했다. 누런 뇌수가 줄줄 흘렀다.

『혀짧이 말을 쓰면 죽음이라고 내 누누이 강조했지!!』
카운터를 지키는 여자가 더러운 침을 내뱉듯이 말했다. 이어 그녀는 아이가 건네어준, 지금은 달랑 남은 단 하나의 유품이 되어버린 종이 쪽지를 채 읽지도 않고는 갈기갈기 찢어 바닥으로 그냥 버렸다. 티끌은 티끌로, 먼지는 먼지로 아멘.
여자는 관심 껐다며 바닥을 구르는 시체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음 손님!!』
갑작스런 살육에 왓슨은 넋이 다 나갔다.
아이고, 아파! 내 팔목을 붙잡은 그의 손으로 불현듯 힘이 들어갔다. 정체불명의 으득 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
괜...찮네. 와, 왓슨! 규칙을 지키는 한 모두는 안전하다네. 자네 생각처럼 머리가 맛이 간 나머지 멋대로 날뛰는 여성이 아니라네. 안심하고 그, 그만 내 팔을 놔주게.
가볍게 왓슨의 손을 찰싹 후려쳤다. 거칠게 숨을 헐떡거리고 선 친구의 상태를 확인하고저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단정하게 회색 원피스를 입은 20대의 처녀가 카운터로 또각또각 걸어가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카운터에서의 부름에 응답한 이는 바로 저 처녀였다. 우아한 팔놀림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왼편으로 일제히 이동했다. 처녀는 값이 꽤 나가 보이는 핸드백을 열고 익숙한 자태로 종이 쪽지 하나를 꺼냈다. 서두르는 기색도, 머뭇거림도 없다. 자연스럽게 카운터를 지키고 선 여자의 손에 가지고 있던 종이를 곱게 쥐어주었다. 보고 있자니 냉장고에서 갗 꺼내온 수박의 속살을 혀로 맛보고 있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음 차례는 접니다.』
『어디 보자, 손님은 해파리 클럽에서 오셨군요?』
언제 어린애 하나 잡았느냐는 식이었다. 주인 여자는 인사조로 턱을 끄떡거렸다. 말투도 예의 바르게 착 가라앉았다. 놀라운 일대 변신이었다.
『진지 가우리를 보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만.』
『어렵진 않아요. 넉넉잡고 준비할 시간을 10분만 주시겠어요?』
『예, 저기 앉아 기다리죠. 10분이라고요?』
『그 이상은 걸리진 않을 거예요.』
『좋아요. 그런데 가격은 얼마죠?』
『80 디나르 입니다. 현금 일시불 지급시 5% 할인되고 3개월 분납 가능합니다.』

어떻게 하겠느냐며 주인 여자가 노트에서 시선을 떼고 얼굴을 똑바로 들었다. 회색 원피스 차림새의 처녀는 잠시 마음 속으로 이것저것 저울질을 하는 눈치였다. 코 밑부분을 어루만지면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이내 그녀들은 목소리를 낮춰 주거니 받거니 손동작을 곁들여가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체면 불구하고 가격을 좀 깎아 달라는 얘기인 듯 싶다. 대화는 짧았다. 주인 여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걸로 끝났다.

『손님? 죄송하오나 우리 업소에서는 가격 정찰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예에... 그렇군요. 2개월 분납 신청합니다.』
『여기에 싸인하시고요, 주문하신 진지 가우리, 곧 대령하지요.』

언뜻 보면 모른다. 그러나 카운터 바로 옆으로는 벽난로처럼 생겨 먹은 간이 무대가 하나 마련되어져 있었다. 구조를 옆으로 보자면 ⊃자 모양으로 벽이 깊숙하게 파여져서 제법 넓직한 공간을 만들었다. 중세적 수도원에서 수련사제들의 침상 만들던 방법을 고스란히 써먹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 위로는 하얀색 천을 덮어 평상시엔 맨질맨질한 평면인양 위장을 하였다. 하지만 막상 커튼을 들어올리면 체격 건장한 사내 다섯은 올라가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를 정도의 면적이 펼쳐졌다. 앞 뒤 길이가 좁아 약간은 답답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모두들 그만하면 만족스럽다며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갑자기 분주해졌다. 주인 여자는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는 부산을 떨며 한바탕 먼지를 피워댔다. 정신이 없었다. 무대 위로 드리워진 커튼을 걷어올리고 참나무로 만든 의자를 낑낑대며 들고 왔다. 조명이랍시고 고래기름 등잔도 대령했다. 특이하게도 굵기가 얇은 밧줄 뭉치도 마련했다. 10분간 기다리라고 했지만 정작 무대 준비 시간은 4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준비할 소품의 숫자가 생각 밖으로 그다지 많지 않은 탓이다.

사실 진정으로 바빠진 건 카운터 쪽이 아니라 바로 그 뒤로 자리를 잡은 작은 방 쪽이었다. 측면으로 치우쳐져 입구가 잘 보이지 않는 안쪽 방에선 갑작스럽게 투닥거리며 몸싸움을 하는 인기척이 요란했다. 누군가 접시를 집어던진 게 분명하다. 쨍그랑 소리가 선명했다.

『싫어! 내가 왜 험한 꼴을 당해야만 하는데?! 리나!!』
『가우리? 반항하면 죽음이야. 눈덩이로 불어난 식당 빚을 빨리 갚아야 할 거 아냐! 알아 들었으면 빨랑 나가란 말이닷! 가서 돈 벌어가지고 와!』

외마디 고함소리와 거의 동시에 금발의 잘 생긴 총각이 튀어나왔, 아니. 밖으로 떠다 밀려져 거의 넘어지듯 바닥을 굴렀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우와아악!!』
넘어졌으니 비명을 지를 법하다. 그러나 금발의 총각이 비명을 지른 까닭은 콕콕 쑤시는 무릎의 통증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그렇다.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몸을 묶는 밧줄이다. 준비성 있게 주인 여자는 수갑도 잘 챙겼다. 번들거리는 여주인의 눈빛이 늪지대를 방황하는 야광충의 커다란 날개를 연상시켰다. 이제부터 고문 시작이다.

『금방 끝납니다. 가우리씨.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그럼!』
움직이지 말라는 뜻을 명확히 하면서 들고 있던 밧줄을 양손으로 잡고 팽팽히 잡아당겼다. 힘을 주자 밧줄이 무슨 고무줄인양 탱탱~ 소리를 내었다. 살기 또한 탱탱하다. 이어 그녀는 고갯짓으로 무대 위로 물건 하나를 급히 가져오게끔 신호했다. 금발의 총각 가우리는 돌아가는 꼴새를 보곤 얼굴에 핏기를 잃었다. 절규하는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세상에.

『너무 심하지 않아? 그걸 가지고 어쩌려고 그래?! 어이!』
『즉석 얼굴 표정 개조를 하려는 것뿐입니다. 단지 그뿐이예요, 가우리씨.』

미소마저 흉악하다. 의자, 밧줄. 그리고 얼음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대형 양동이... 일 났다. 순식간에 그는 양팔을 꽁꽁 묶여 의자에 강제로 앉혀졌다. 신발과 양말이 벗겨졌고 커다란 발이 얼음물 속으로 풍덩 빠졌다. 소스라치게 놀라 그가 몸을 크게 비틀었다. 하지만 여주인은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는 악착같이 가우리의 발을 얼음물 속으로 틀어넣었다.

『그럼 질문 나갑니다. 하나 더하기 다섯은 얼마입니까?』
『으으, 발 시려!! 그만, 그만! 동상 걸려 나 죽는닷!』
『답을 맞추지 못하면 풀어주지 않겠습니다. 하나 더하기 다섯은?』
『열!』
『얼음을 더 채우지요. 한 바가지 더 부어라!』
『우아아악!!』

금발 사내의 눈자위가 까맣게 변해갔다. 입술을 새파랗게 죽었고 눈은 부리부리 태양 광선을 내뿜었다. 효과가 좋다. 언제나의 바보 표정이 맑은 날 물안개 걷히듯 소멸했다. 사람 좋게 웃던 미소도 지금은 없다.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가, 그리고 경련을 일으키는 목덜미가 가련하기만 하다. 최대한으로 고민하며 산수 문제의 답을 구하는 가우리의 저 표정은 철학자의 고뇌를 그대로 복사했다. 바람의 냄새를 맡는 고산지대의 철학자 토끼가 바로 이곳에 자리잡았다. 우주의 탄생과 그 소멸의 비밀을 나에게... 사내의 목젖이 위로 올라갔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미간이 좁혀지고 입술이 단단히 뭉쳤다. 세포 하나하나가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나 더하기 다섯은?』
『이, 일곱이...다.』
고뇌하는 철학자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폐를 찢고 올라온 피는 방울방울 떨어져 바닥을 더럽혔다. 그는 세상은 썩었다며 울부짖었다. 분노가... 아픔이.... 슬픔이. 발바닥이 파랗게 얼었다. 가우리의 뺨 위로도 파란 얼음이 맴돌았다.

『흐음. 답이 계속 틀린데... 그래도 이만하면 썩 괜찮은 표정이지요?』
주인 여자가 진지 가우리를 주문한 손님을 돌아다 보며 동의를 구했다.
『네네! 꿈에서 그리던 바로 그 얼굴이예요! 정말로 저런 표정을 보게 될 줄이야!』
회색 원피스의 처녀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몸짓으로 주인 여자의 손을 잡았다.
『감동했어요. 정말입니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 자, 진지 가우리 끝났습니다. 이제 그만 가우리씨는 얼음물에서 발을 빼고 방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따악,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무대 위로 다시금 흰색 커튼이 드리워졌다.
『다음 손님!』

영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