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ans to: 엑토플라즘
♠ 파편 열 다섯 - 전갈과 같이 하는 사막의 숨박꼭질 놀이 2

제르가디스가 그렇게 빡빡 소리를 내며 모래 위를 힘차게 걷고 있는 것과 비슷한 시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도 비슷한 기척이 사막을 횡단하는 바람을 타고 어렴풋이 들려왔다. 군용 담요처럼 생긴 뻣뻣한 질감의 쑥색 망토를 아무렇게나 뒤집어 쓴 거구의 사내였다. 남자는 먼지가 들어간 콧구멍이 제법 쓰라렸던지 재채기를 해댔다. 콧잔등이 빨갛다. 감기 환자처럼 훌쩍이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행색이 지나치게 초라하다는 점은 무시하자. 어디서고 여행자들은 텁텁한 맛의 흙먼지를 홀라당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사막의 누런 모래가 잔뜩 묻어난 여행용 로브 밑으로 얼핏 보이고 있는 남자의 얼굴 표정은 평범한 여행자라고 하기엔 뭔가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별로 영리해 보이지 않는, 까발려 말하자면 바보 티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은 별도로 하고...
뭐랄까. 간단히 말하자면 생기가 없다. 혼이 다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눈동자가 흐릿하다. 흡사 뇌가 없는 사람처럼 움직임이 단순하다. 팔이 앞으로 나가니까 그 반동으로 다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죽은 사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정상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 단정짓기가 꺼림직하다. 약 100여년 동안 사막을 방황해온 길 잃은 유령처럼 보인다. 무작정 앞만 보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터벅터벅 걷기만 했다. 심지어 그의 앞으로 신장이 무려 5m가 넘는 엔카이 거인족들이 떼지어 자기들만의 언어로 무어라 쑥덕거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발의 사내는 보기만 해도 살이 떨리는 거인들의 무리를 무슨 사이프러스 나무 보듯 가볍게 지나치고 있었다.

낯선 인간의 등장에 오히려 놀란 건 엔카이 무리였다.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걸 기대한 건 아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엔카이들은 어슬렁 걸어가는 인간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그들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무리 중 하나가 어른 팔뚝만한 크기의 송곳니를 위 아래로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인.간.인.가.? 하.지.만.뭐.야.? 저.놈.뭔.가.이.상.하.다》
《맞.아.우.릴.보.고.도.아.무.렇.지.도.않.다.는.듯.이.걸.어.가.잖.아》

그간 여행 중에 만났던 다른 종족들이 자신들을 보고 보여준 다양한 히스테리 반응을 이참에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트롤 뺨치도록 험상궂은 얼굴 인상에다, 대낮에도 번쩍번쩍 빛을 내뿜는 커다란 고양이 눈, 그리고 코끼리의 어금니처럼 밖으로 돌출된 송곳니 덕분에 천성이 상냥하다고 알려진 엘프마저 눈을 부릅뜨고 화살을 마구 쏘아대기 일수였다. 대화도 필요 없었다. 그들의 발꿈치를 보기가 무섭게 겁에 질려 돌을 던졌다.
하는 수 없었다. 이건 다 팔자다. 떡 벌어진 어깨를 펼치면 저 높은 하늘의 구름도 가릴 지경이다. 산을 덮고 지붕을 부순다. 오로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돌도끼를 휘두르며 들소떼를 사냥하는 것만 빼면 얌전한 그들이었지만 덕분에 아무도 그들의 착한 천성을 안 믿어주었다.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설명해도 무작정 덤벼든다. 엔카이들이 다른 종족들과 잦은 전투를 벌이는 까닭은 순전히 그들의 억세게 생긴 생김새를 다들 엉뚱한 방향으로 오해한 나머지 그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오기 때문이라는 처참한 사연이... 아, 못생긴 것이 과연 죄로소이다!

그런 고로 위대한 왕 아드소의 뜻을 받들어 성지를 순례하고 있는 이들 젊은 엔카이들은 성지에서만 구할 수 있다던 환몽석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보물을 구하러 온 오크 무리와 세 번 다퉜고, 모험가를 자칭하는 험상궂은 인간 남자들과는 여섯 번 힘 겨루기를 했으며, 그냥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렛셔 데몬과는 한 번, 겁 먹은 엘프 무리와는 두 번, 마지막으로 커다란 항아리를 수레에 실어 이웃 나라로 운반하던 붉은 털의 애꾸눈 여우에게 억울한 폭탄 세례까지 받았다. 참고로 그 여우는 사제품임이 분명한 노란색의 연막탄을 한꺼번에 수십 발이나 터뜨리고 나서는 콜록거리며 기침을 터뜨린 엔카이들이 이게 뭐냐 마구 화내기도 전에 꽁지털이 빠져라 허벌나게 도망쳐 버렸다.

자, 그러니 지금의 엔카이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 어떠한지는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얌전히 그들을 무시한 채 지나가고 있는 인간의 남자가 어쩐지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뭔.가.기.분.나.빠.》
《그.러.게.말.이.다.요.상.하.다.다.른.인.간.과.는.반.응.이.틀.려》
《설.마.저.것.이.말.로.만.듣.던.마.법.사.가.만.든.좀.비.아.닐.까.?》
다소 유식하다고 소문난 엔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무리는 곧 시끌벅적한 소음에 둘러싸였다. 파란 고양이 눈동자가 기름으로 더러워진 바다처럼 반짝거렸다.
《으.엑.?! 좀.비.? 좀.비.라...!! 그.런.데.좀.비.가.무.엇.이.더.라.?》
저런. 아직 나이가 어린 편에 속하는지라 지식이 짧았다. 집채만한 몸을 자랑한다지만 인간으로 치자면 겨우 사춘기에 막 접어든 소년일 뿐이다. 그러니 뭘 제대로 알겠는가. 바랠 걸 바라자.
《좀.이.쓸.지.않.기.위.해.서.쓰.는.약.?》
머리를 맞대며 고민에 빠졌다.
《그.건.좀.약.이.고.몸.이.작.고.좀.스.러.운.사.람.아.닌.가.?》
《아.냐.그.건.좀.팽.이.고... 저.기,좀.비.가.뭐.지.?》
《멍.청.이.!! 좀.비.는.마.법.사.가.마.법.으.로.되.살.린.인.간.의.시.체.를.말.하.는.거.잖.아.》
예의 머리 좋은 엔카이가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우.악.! 시.체.그.러.면.귀.신.이.라.는.거.네.?!! 에.궁.!》

그들이 자리하고 있는 장소가 신과 마의 힘이 서로 묘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한다던 성지라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실감 났던 적이 과연 있었던가? 성지에선 유령에게 홀리는 일 따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다던 그들의 왕 아드소의 경고가 이 정도로 뼈마디에 와 닿았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일찍이 없었다. 자신이 죽었는지조차 몰라 무작정 사막을 방황하는 무서운 귀신들이 곳곳에 우굴거린다던 이야기는 그저 넓은 평야를 하릴없이 방황하며 하프나 뜯어대는 뜨내기 시인들이 아무렇게나 지어낸 이야기일 거라고 방금 전까지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농담이 아니다. 생전 처음으로 좀비라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엔카이들은 자신들의 어머니가 사냥에 나가는 아들들에게 돌도끼를 쥐어주면서 항상 들려주곤 하던 교훈 한 가지를 떠올렸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무조건 조심하라.
허나 죽은 것은 더더욱 경계하라.
게다가 죽어서조차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그때는 두말없이 튀.어.라.
엔카이들의 얼굴에서 일제히 핏기가 싹 달아났다. 쑥덕거리는 소리도 딱 멈추었다. 다들 손으로 자기들 뺨을 주물럭거리며 입을 둥굴게 말았다. 뭉크가 그린「절규」라는 작품 속의 등장 인물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그만 다들 겁에 질린 것이다.

《아.냐.! 애.들.아,정.신.차.려.좀.비.가.무.서.운.것.이.아.니.다.저.런.귀.신.이.문.제.가.아.니.라.구.진.짜.무.서.운.건.저.걸.조.종.하.는.마.법.사.다.마.법.사.가.근.처.에.없.다.면.좀.비.는.움.직.이.는.넝.마.에.불.과.해.그.러.니.까.다.들.침.착.해.저.건.지.나.가.게.내.버.려.둬》
역시 똑똑한 놈은 다르다. 침착하게 무리를 다독거리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그는 금발의 인간 남자와 거리를 두며 동료를 한 곳으로 모이게 했다. 좀비로 여겨지는 사내가 제 갈길을 떠나갈 때까지 조심스럽게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할 거라고 판단했다. 일부러 싸움을 걸 이유도 없잖는가. 아무래도 그 편이 가장 현명하리라.
물론 좀비를 부리는 마법사가 나타나 마구 난동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흥! 역시 이런 곳에 잔뜩 모여 있었구먼. 역시 내 코는 보통이 아니라니까. 에라이, 자식들아!! 내가 왔다!!』

아이쿠! 그만 일이 커졌다. 담벼락을 넘는 도적처럼 갑작스럽게 사람이 나타났다. 좀비를 부리는 마법사가 으르렁 소리를 내며 손가락질을 했다. 햇볕을 등지고 있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살기등등한 것이 영 느낌이 안 좋다. 엔카이들은 누구라고 말할 것도 없이 죄다 프라이팬에 눌러 붙은 식빵이 되어 하염없이 오그라들었다. 힘으로라면 무서울 것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다시 한 번 더 말하건데 그들은 아직 나이가 어렸다.

『야!! 너희들! 그리고 너!!』
여자 마법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
금발의 좀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들... 말.이.야.?》
엔카이들은 뻣뻣하게 굳어 서로를 끌어안았다.

헐렁한 망토에다 무릎 근처로 구멍이 뚫린 바지, 싸구려 면 티셔츠... 복장은 비록 형편없긴 했으나 팔찌로 찬 마혈옥을 보아 마법사임은 분명하다. 그런 인간의 어린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 너희들, 그러고 금발머리 너!! 이상하게 생긴 저런 떨거지들을 끌고 다니는 걸 보니 꽤나 어깨 넓은 마족인가 보구나? 흐음. 네 등 뒤의 떨거지들이 아주 좋아 보이는데? 녀석... 보통이 아니군. 게다가 네 외모... 제르가디스가 말해주었어. 마족은 상급의 힘을 가진 자일수록 인간과 비슷한 외모를 취하는 법이라고 말이야. 그래. 그랬던 거야. 빌어먹을 마족... 도대체 언제까지 내 뒤를 졸졸 뒤쫓아 다니려는 거냐!』

엔카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들이「마족의 떨거지」로 전락했다는 사실까진 신경쓸 수 없었다. 대신 짧은 금발의 좀비와 그를 향해 삿대질 하기에 바쁜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생소한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좀비... 아니지. 여자 마법사의 말에 의하자면 마족이라던 사내는 비틀거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얼굴을 이상한 색채로 물들이고 - 혹자는 그 색을 썩은 똥색이라 말한다 - 두 눈을 깜빡였다. 대단한 충격을 받았는지 공포와 경악의 표정이 하나 가득이었다. 곤히 잠들어 있다가 뾰족한 못이 박힌 몽둥이로 한바탕 찜질이라도 당한 사람 같았다. 상처 투성이의 뺨이 경련을 일으켰다. 눈썹이 이마 위로 팽팽히 당겨졌다.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던 때가 과연 있기는 있었는지 실감이 안 났다.
그렇다. 지금의 그는 펄펄 끓어오르는 용암 같았다.

《무, 무.서.워》
엔카이들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제르...가디스...? 마족...?』
금발머리 사내가 콱 막힌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서서히 죽음에서 깨어나, 아니. 갑작스러운 정신적 충격을 견디다 못해 다시 마비 현상을 일으키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우선은 낯익은 이름이 그를 놀라게 했고, 이어 자신이 마족이라 불리운 것에 무척이나 당황해 했으며, 마지막으로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를 혼란의 도가니로 사정없이 몰아넣었다.

『그래. 제르가디스가... 이곳에 와 있어?』
한참만에 남자가 겨우 정신을 수습했다.
『호오∼ 뭐야. 이젠 나만으론 만족 못하시겠다? 제르가디스까지 노리겠다고? 웃기지 말아. 이 더러운 마족아! 정말이지 너희들 행동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아냐. 틀렸어. 그게 아냐. 내 이름은 마족이 아냐. 나는 가우리야.』
정말로 안타까운 듯, 그가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쳤다.
『가우리! 나는 가우리야!』
그는 탄원하고 있었고, 동시에 울부짓었다.
『시끄러! 누가 네 이름이 마족이라고 그랬어? 네 정체가 마족이라고 그랬지. 게다가 시치미 뗀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아?! 너도 날 잡으러 온 거지! 그렇지?! 하지만 난 그곳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울러 네놈들이 바라는 대로 그냥 죽지도 않을 거야. 난 살 거야... 누가 뭐래도 죽고 싶지 않아! 살아서 행복해지고 싶어. 가지고 싶은 건 가지고, 원하는 건 다 해볼 테야. 싫은 건 없어버리고 방해하면 모조리 다 죽일 거야. 우어어!! 그러니까 덤벼! 나는 강하다!』
보아하니 여자는 살짝 이성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가 정신 나간 귀신 소리를 내든 말든, 금발의 사내는 고개를 숙여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종이 조각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너무 오랫동안 만지작거려 가장자리가 다 헤어진 편지였다. 남자의 손아귀에서 닳아 빠진 종이가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러댔다.

《좋은 소식이 있다. 약속대로 조만간 우리 만나자. 친우 제르가디스》

내용은 보잘 것 없었다. 게다가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어 종이에 구멍이 뚫릴 지경이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가우리는 그놈의 편지지를 손아귀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보듬고 쓰다듬고 냄새도 맡아보고... 지금도 그는 망토 밑으로 그 편지지를 무슨 부적인양 꼬옥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만세. 부적 이상이었다!
『제르가디스... 나쁜 놈. 이건 그저 좋은 소식이 아니라 환상 그 자체잖아!! 맙소사! 내가 지금 허깨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좀 말해줘.』
사내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어 금색으로 빛나는 것이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리하여 주먹 쥔 팔을 휘두르며「덤비려면 어서 덤벼!」라고 허풍 치던 소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혔다. 갈비뼈가 으스러질 지경이다. 단단한 남자의 가슴에 어느새 포위되었다.
신종 공격이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 데인 사람처럼 펄펄 뛰며 그 악명 높은 무쇠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꺄악~!! 떨어졋!』

그러나 남자는 한층 더 격렬히 포옹했다. 그가 내뿜는 뜨거운 콧김이 소녀의 뺨을 데웠다.
『나는 가우리야.』
무슨 마법의 주문일까? 그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가우리? 마름모꼴에다 몸이 넓적한 가오리라는 생선은 알아도 가우리는 몰라!』
소녀가 잠시 두 눈을 멀뚱거렸다.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생각해 봐. 나는 가우리야.』
거의 키스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다.
『글쎄, 모른다니까! 이 아저씨가 왜 이러는 거야! 당신, 리나에게 돈 빌려줬다가 뜯긴 거야, 뭐야?! 으이그∼. 리나라는 계집애, 마계에서 돈 놀이까지 했나?!』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주먹을 들었다. 빈틈을 노려 남자의 명치에다 주먹을 찔러 넣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중간에서 가로막혔다. 사내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자기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질식의 압박이다. 사내의 체취가 코를 타고 올라왔다.
여자가 참다 못해 악을 썼다.
『뭐야. 숨을 못 쉬게 만들어 날 죽게 만들려는 거 같은데... 젠장! 이놈의 마족!』
『아냐. 나는 가우리야. 가우리...』
그의 목소리에 울음소리가 묻어 나왔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거짓말 말어! 네놈이 마족이 아니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냐! 에이잇!!』
악에 받친 소녀가 가우리의 팔뚝을 와락 깨물었다. 순간 비릿한 맛이 입안 가득히 베어나왔다.
깨갱... 찝찔한 피 맛을 본 소녀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실수했다. 마족이 아니다. 피 흘리는 마족은 없으니까. 이걸 어쩌면 좋노.

『그래. 이제 기억나니? 나는 가우리야!』
가우리는 키 작은 그녀를 끌어올린 뒤, 뺨을 무지막지하게 비벼댔다.
따끔거리며 피부를 자극해오는 수염 때문에 그녀는 고통받았다. 누군가가 쑤세미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대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그건 못말리게 싫은 느낌이었다. 여자는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우아악!! 알았어. 너는 가우리야! 알았으니 그만 떨어져. 저리 가!』
『잘 돌아와 주었어. 나, 정말 너무 많이 기다렸어. 너무 기다려서... 금방이라도 미칠 것만 같았어. 정말이야. 나... 너무 오래 기다렸다구. 어서와, 어서와. 잘 돌아왔어.』

주변을 빙 둘러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거인족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역시 이 땅은 성지다. 좀비가 마족이 되었다가... 다시 인간이 되는 곳. 사내는 여자 마법사를 그야말로 집어삼키듯 포응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환희의 눈물이다. 기쁜 나머지 그는 오열했다.

《오.! 성.스.러.운.힘.이.야.좀.비.가.인.간.이.되.었.다》
《우.리.들.의.왕.아.드.소.는.이.런.걸.우.리.에.게.보.여.주.고.싶.었.던.거.다.그.래.서.성.지.를.보.고.오.라.고.우.리.에.게.명.령.을.내.렸.던.거.야.이.것.이.야.말.로.왕.이.우.리.들.에.게.내.리.는.교.훈.이.다.나, 감.동.했.다!!》
대단치도 않은 오해였지만... 뭐, 굳이 시간을 낭비해가며 그들의 환상을 깨뜨릴 까닭은 없다.
그 오해가 다시 엔카이족의 새로운 전설로 굳어갔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좀비는 기적의 성지로 간다. 성지에서는 마법이 풀려 좀비도 인간이 된다.
좋은 이야기다.
그리하여 엔카이들은 쿵쿵 소리를 내며 고향이 있는 쪽을 향해 돌아섰다. 왕이 보고 오라고 한 것을 이제 보았기에... 그들은 뿌듯한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굉장한 기적을 목격한 뒤라 하나같이 상기된 표정이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아라... 진정한 기적이라는 건 거듭남의 축복을 더해주는 법이다.

하지만.
종교적 환희는 잠시 잠깐이었다.
반대편으로 나타난 인기척에 그들 엔카이는 다시금 육중한 바위산이 되어야만 했다.
괴물 출현. 악마 재래.

『으흐흐흐... 여기서 놀고 있었군. 찾았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있... 아니,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이 시퍼런 것이 대단히 무서웠다. 빡빡빡, 소리를 내며 모래를 찼다. 소름끼쳤다. 괴물은 여자와 남자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악마는 신장 5m의 거인 따위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걸어다니는 바위들은 어서 비켜라. 악마의 눈에서 시퍼런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엔카이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튀.었.다.

『잘 돌아왔든, 못 돌아왔든! 나 화낼 테야, 그러니 당장 날 내려놔!』
『나는 가우리야... 가우리. 가우리라니까.』
『그놈의 소리... 지겹다. 당신 뇌는 구멍이 슝슝 뚫린 치즈라도 돼? 당신이 가우리라는 건 잘 알아 들었다고 했잖아! 으아아아!! 정말로 당신, 치즈야?!』
소녀가 던진 질문의 대한 답은 엉뚱한 곳으로부터 날아왔다.
『치즈? 흐응, 틀렸다. 저놈의 머리는 치즈가 아닌 요구르트로 만들어졌지.』
순간, 허공에서 마구 발을 차대던 소녀의 동작이 거짓말처럼 따악 멈추었다.
갑자기 한기가 드는 것이 단순한 기분 탓은 아닌 듯한데... 망했다.

『여, 제르가디스. 오랜만이다. 이게 얼마만이야?』
천하태평 가우리는 8년만에 다시 만난 친구를 보며 그저 방실방실 웃기만 했다.
그러나 1시간 만에 제르가디스와 재회한 소녀는 감히 웃지 못했다.
『어머, 제, 제르가디스? 와, 왔어?』
제르가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총알같이 튀어나가 가우리의 팔 안에서 소녀의 몸을 와락 빼앗아 든 다음... 두말하면 잔소리라며 그녀를 자기 무릎 위로 억지로 눕혔다. 그리고는 그놈의 손바닥...이 아니라 돌바닥으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엉덩이를 마구 두둘겨 패기 시작했다.

『몹쓸 말괄량이!! 내가 움직이지 말라고 그랬잖아!』
『아부지, 나 죽소!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 말만 하면 끝날 줄 알어?! 이것아, 걱정했잖아!』
『우아아. 아, 아빠! 따악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정말 잘못했어요! 으아앙!』
『그만해, 제르가디스! 그러다간 리나가 죽겠어!! 어이, 진정하라니까!』
『정말 잘못했어요! 으아앙!』

그리하여... 거인족 엔카이 사이로는 또 하나의 전설이 첨가되었다.
성지에서는 푸른 괴물조차 인간의 아빠가 될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