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편 열 다섯 - 전갈과 같이 하는 사막의 숨박꼭질 놀이 1

어지간한 길은 걸어서 돌아다니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고는 하지만... 과부 쌈짓돈을 빌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나 당나귀, 또는 낙타, 그것도 아니라면 바이서스의 길시언 왕자처럼 쟁기 끄는 소라도 구할 걸 그랬다.
촘촘하게 짜여진 두꺼운 천으로 틀어막았다 해도 고운 먼지 알갱이만한 크기의 사막의 모래는 한치의 용서도 없이 입과 콧구멍 속으로 파고 들었다. 조개 껍데기 속의 진주처럼 입안을 엉망으로 굴러다니는 작은 알갱이는 그렇다 쳐도 숨을 쉴 적마다 가슴이 답답한 것이 여간 곤욕이 아니다. 참다참다 못해서 가슴을 손으로 두둘겨가며 가래침을 뱉어보지만 윽 죄어오는 듯한 폐의 통증은 나아지지 않는다.
결국은 말기의 폐병 환자처럼 한참을 콜록거리는 것으로 사막의 먼지 바람에 얌전히 항복을 표시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전의를 상실하고 무기를 내려 놓은 적군 포로에 대한 사막의 대접은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여전히 모래는 여행용 로브 아래로 얼핏 드러난 눈자위의 살갗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긁어대고 있었으며, 더러는 아예 눈 속에 들어가 눈물샘을 끝내주게 자극하고 있었다. 덕분에 굵은 기침을 하는 것으로도 모질라 콧물과 눈물을 바가지로 좍좍...
『콜록콜록. 으켁켁. 너무 지독하잖아. 숨 쉬기 힘들어서 이러다간 죽겠어.』
마른 기침을 해대며 힘들게 발걸음을 옮기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이젠 더 이상 못참겠다며 거친 욕설이 섞인 불평을 퍼부어댔다.

두 다리로 부지런히 걸어 초원지대를 벗어나 사막 한가운데로 접어든지 이제 이틀.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은 지난 느낌이다. 주위의 풍경은 한 시간 전에나 두 시간 전에나 그렇고 그런 모습으로 변하지도 않는다. 간간히 눈에 들어오는 모래의 둔덕은 마치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넌 사실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란다 - 모래 둔덕은 거짓말을 재잘거리며 이곳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단단히 약 올렸다.

결국 부아가 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소녀가 다시 짜증을 부렸다.
『제르가디스? 귀 먹었냐. 나 힘들어 죽겠다.』
『그래? 그럼 죽어.』
얼레리? 얼음 송곳 두동강이 나듯 딱 부러지는 대답이다. 이게 어쩐 일이라냐. 상대의 반응이 눈물겹도록 쌀쌀맞다.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었나? 눈치를 좀 보자.
『무시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 거냐. 이 인간이... 너무하잖아!』
『됐군. 신경질을 부리는 걸 보니 아직 팔팔하네. 죽으려면 아직 멀었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남극 대륙 저리가라로 못말리게 냉담한 걸 보니 말이다. 평소 냉정하기가 둘째라면 서러운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이죽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여자라면 더더욱... 그래도 그는 예의 바른 위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달랐다.

소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던 제르가디스는 볼 것도 없다며 그녀를 앞질러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찌는 듯한 더위와 먼지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다른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있다. 사막을 횡단하고 있는 사내의 발걸음은 처음부터 나중까지 그저 가지런하기만 했다. 보폭은 일정했으며 모래 위로 찍힌 발자국엔 흐트러짐이라는 것이 요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경쾌한 동작에서는 한줌의 낭비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싹싹 소리를 내며 모래 위를 걸어가는데 저녁 먹기 전에 동네 한바퀴 산책하는 사람처럼 편안하다.

『네, 그래요. 굉장합니다요. 여행이라면 이골이 났다더니만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려. 300년 묶은 산삼이라고 삶아 먹었나, 왜 그렇게 사람이 끈질겨! 아저씨? 좀 쉬었다 가자고. 이제 1시간만 더 가면 된다고 해놓고는 벌써 4시간이나 걸었잖아! 다리 아파 이젠 더 못 걷겠어. 좀 봐줘∼잉! 아잉!』
뒤쳐진 소녀는 아예 땅바닥에 털퍽 주저앉아 징징거렸다. 마구 발길질을 하며 성질을 내는데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식이다.

물론 그런다고 해도 제르가디스는 돌아다 보거나 하지 않았다. 힘들어 죽는다는 사람이 오징어처럼 몸을 비틀며 한바탕 트위스트를 출 수는 없는 법이니까. 정말로 탈진한 사람이라면 얌전하게 주저앉아 색색 숨소리만 낼 뿐이다. 아무렴, 저렇게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간질 발작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고로 제르가디스는 한없이 냉정하게 소녀를 싹 무시했다.
『모래에 파묻혀 세간에서 잊혀지고 싶나. 잔소리말고 부지런히 걷기나 해. 여기서 뒤쳐지면 무서운 전갈에게 한 입에 잡아 먹힌다.』
앵앵거리고 울면 저기에 사는 망태기 할아범이 잡아간다는 류의 협박이다.
『저∼언∼갈? 전갈이 아니라 심술쟁이 제르가디스에게 잡혀 먹겠지. 코가 꿰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하는 법이라고... 히에엑! 아, 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

이러다 버릇이라도 되면 큰일이라고 막상 생각은 하긴 했다. 그래도 제르가디스의 사팔뜨기, 효과가 좋다. 얼른 뒤돌아 딱 한 번 눈에 힘을 주었을 뿐인데 소녀는 군소리 없이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100마디의 말보다 설득력 한 번 끝내줬다.
쿨 가이? 어덜트 쿨의 이미지? 하∼이∼고! 지금은 과감하게 무시하자. 그런 거로 누가 밥을 먹여주기라도 한다냐.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거 영 한심하군. 이래가지고는 완전히 아.빠.잖.아》
아... 아, 아빠!
그것도 세 살짜리 코흘리개를 데리고 유원지에 놀러 나온 홀애비 짝이다. 절로 늙어 죽겠다.
그러나 어쩌리. 제르가디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에 슬그머니 오른 손을 뒤로 내밀었다. 이어 확실하게 그의 손아귀 안으로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앙증맞고 좋은 느낌이다.
《엄마는 시장 가고, 아빠는 일 하러 가고∼♬》
다시는 놓고 싶지 않은 부드러움이었다. 제르가디스는 자신도 모르게 생긋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아빠... 나쁘진 않았다. 항상 생각해오던 기분... 아빠, 그리고 그의 딸네미. 상상했던 바 그대로다. 괜찮았다.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당황하여 고개를 숙여 미소를 숨겼다.

정신 차려. 여기서 아빠 놀이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야.

그는 지옥의 검둥개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면서 어그적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무척이나 작고... 찹쌀떡처럼 부드럽고... 그리고 엿가락처럼 추욱 늘어지면서... 어랍쇼. 애호박에 말뚝 박는 놀부처럼 심술맞고!

마음 속으로 두부를 썰며 10까지 숫자를 세었다.
『이봐. 난 지금 썰매 끌기 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앙?』
제르가디스의 팔을 껴안고 그대로 늘어진 소녀가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지금 나랑 놀자는 거냐. 빨랑 일어나! 내 팔을 붙들고 그렇게 폭삭 주저 앉으면「나 끌고 가쇼!」라는 소리밖에 더 되냐구.』
『끌고 가기 싫어? 알았어. 그럼 업어줘. 응? 업어주라.』

맙소사.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녀는 역시 리나와 똑같았다. 뻔뻔한 점에 있어서는 특히 더. 떡 내놔라 감 내놔라 하는 뱃장은 영락없는 오리지널 복사판이다. 이쪽에서 뭐라 떠들든 말든 자기 좋은대로 하겠다며 떼쓰는 것까지 국화빵이다. 단순히 얼굴만 똑같을 뿐이지 생판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소녀의 말은 이런 경우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도대체 뭐가 다른 사람이냔 말이다! 하는 짓이 똑같은데!

잠시 뜨거운 바람이 몰아쳤다. 그들의 망토가 바람결에 거칠게 춤을 추었다.
그 뜨거운 열풍 아래서 그들은 잠시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가슴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소녀의 눈은 이미 살살 녹아내린 설탕과자처럼 촉촉해져 있었다. 그야말로 끔찍한 정신 공격이다. 제르가디스는 한층 더 후드를 깊숙이 눌러 쓰고 끙 하고 이 앓는 소리를 냈다.
예전의 리나는 살기를 마구 뿜어대며 뱁새 눈을 치켜뜨는 것으로 그를 위협하곤 했었는데... 차라리 그 편이 훨 낫다. 이거, 눈물이 그렁그렁 해져서「절 불쌍히 여겨주세요!」라며 애원하는데 웬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등가죽에 닭살이 돋는 것이 절대 무.섭.다.

『총각? 죽은 사람 부탁도 들어 준다던데 산 사람 부탁도 들어 줘. 제발∼!』
잠시 쉬었다 가자는 소녀의 앙탈 부리기는 끈덕지게 계속되었다.
『하, 하지만 이런 장소에서 주저 앉았다간 햇빛에 말라 비틀어진 개구리 미이라 꼴이 될 거야. 그러니까 안돼.』
음. 설탕 과자 눈빛에 넘어갔나... 그냥 빨리 가자는 말에서 1단계 후퇴다.
『핑퐁! 그럼 잠시 쉴 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아내면 되겠구마. 응? 그러니까 제르가디스가 근처에 바위산 같은 것이 보이나 안보이나 확인하러 가보는 거야. 나는 여기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늘진 곳을 찾아서 다녀 오라구.』

호오, 듣고 보니 그만하면 보편 타당한 발언이다. 신발을 벗고 저울에 올라간 제르가디스의 속마음은 미풍에 왔다갔다 움직이는 나뭇가지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그래도 괜찮을까. 그는 잠시 입을 굳게 다문 채 이마를 찡그리는 것으로「나 지금 망설이고 있소」라고 잠자코 자기 의견을 밝혔다.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음. 그야 그렇긴 하지만...』
옳커니! 주저하는 것이 이번에는 2단계 후퇴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제르가디스는 잠시 쉬었다 가자는 그녀에 의견에 이렇다 할 불만은 없었다. 솔직히 뜨거운 햇살 아래서 언제까지고 걷기만 한다는 것도 뭐했다. 괜히 고집을 피웠다가 나중에 탈수증이라도 일으키면 큰일이다. 가끔은 그늘에 들어가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을 식힐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째 영 찜찜하다. 이런 걸 두고 반복 학습의 결과라고 말하면 적당하려나, 지금과 비슷한 상황은 전에도 한 번 일어났었고... 에, 뭐냐. 누가 말했더라?
《잘못될 가능성이 있으면 일은 결국 벌어진다.》
그리하여 제르가디스는 까딱거리는 손가락을 턱에 가져가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단지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은데. 반나절 전에도 골치 아픈 숨박꼭질 놀이가 지금과 비슷한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았었나?』
은연 중에 힐난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잠자코 눈을 감았다.
『분명히 말이야, 남녀의 자연적인 생리현상과 그 처리방안에 관한 일상적 에티켓에 대하여 장황하게 토론을 벌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네가 나를 아예 바보로 만든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이지. 내 기억이 이상한 건가? 그건 아니지?』
점잖케 말해서 생리현상과 그 에티켓에 대한 토론이지... 솔직해지자. 그건 어디까지나 적나라한 말들이 사방으로 불꽃을 튀겨가며 난무하는 원색적인 말싸움이었다. 싼다, 싸라, 이대로는 못 싼다, 그럼 날 더러 어쩌라는 거냐. 그렇다. 초조한 기색으로 아랫도리를 움켜잡은 소녀가 발을 동동 글러댔을 적부터 일은 꼬였다.

『화장실 가고 싶어. 어이, 싼다니까...』
『알았어. 그럼 싸. 이 드넓은 곳 전체가 다 화장실이잖아. 얼른 볼일 봐.』
『이봐용, 아저씨. 듣기 민망해요. 사막 곳곳에 바람에 둥둥 떠다니는 변기가 엄청 돌아다니고 있다는 식의 말투는 삼가해줘. 자고로 숙녀는 아무 곳에서나 엉덩이를 깔 수는 없다고. 여긴 앞을 가려줄 잡목이랑 나무들이 하나도 없잖아. 훤히 다 보이게 뻥 뚫렸는데 어디 숨어서 바지춤을 내리라는 거냐구. 야! 듣고 있냐? 들었으면 들었다는 시늉을 해!』
왁왁거리던 그녀의 목소리는 거위 같았다.
『제길. 그러면 날더러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마법으로 즉석 수세식 화장실이라도 만들라는 거야?! 이봐, 내 능력 밖의 일을 요구하지는 마.』
『어쩌긴. 즉석 복권... 이 아니라 즉석 수세식 변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아∼주 간단하다구. 그저 제르가디스가 그놈의 토끼 귀를 얌전히 틀어막고 멀찌감치 가줬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야. 훠∼어∼이∼!! 그게 다라구요.』
『미쳤냐. 내가 널 놔두고 어디로 가! 싫어. 미안하지만 거절한다.』
『뭐야. 젊은 여자가 앉아서 싸는 걸 멀거니 구경하겠다고? 이거 순 변태 아냐?! 호색한! 여자 오줌 싸는 거냐 보고 싶어하고! 메스꺼워!』
소녀가 비난을 가득 담아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누가 변태고 누가 호색한이냐!』
제르가디스는 질세라 쏘아붙였다.

그녀가 급히 볼 일을 보고 싶다며 칭얼거리길 약 20분.
사실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비록 내키진 않았지만 제르가디스는 얌전히 나즈막한 모래언덕 하나를 넘어가는 것으로 자리를 피해줄 수밖에 없었고 - 변태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는 죽어도 싫었다 - 나아가 그녀가 시키는대로 커다란 두 귀를 뺨 옆으로 찰싹 붙이고 있어야만 했다. 어디 그뿐이더냐, 군소리도 못하고 손바닥으로 두 눈도 가렸다. 생리 현상이라는데 워쩔 것이여. 하는 수 없었다.

『안 보여요, 안 들려요. 제기랄. 이게 뭐야. 한심하군.』
약간의 이죽거림은 양념으로 치고, 어쨌거나 그는 그녀가 볼 일을 다 끝마치기를 착실하게 기다리며 묵묵히, 얌전하게, 하염없이 앉아만 있었다. 엘프의 청각을 가진 뾰족한 귀도 안쪽으로 접은 이상 이미 기척 읽기는 완전히 꽝. 결국 제르가디스는 얌전히 앉아 뒤통수를 얻어맞은 셈이었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 그가 황급히 두 귀를 원래의 모습 그대로 쫑긋 세웠을 때에는 이미 기차는 오래 전에 기적 소리 한 번 내고 멀리 멀리 떠나간 뒤였다. 그가「안 보여요, 안 들려요」하며 바보 시늉을 하는 틈을 타, 소녀는 화장실 갈 생각을 하기는커녕 귀신같이 반대편으로 튀어버렸다. 그것도 발바닥에 날개라도 달았는지 모래 언덕 다섯 개를 한꺼번에 훌쩍 뛰어넘었다.

말이 모래 언덕 다섯 개다. 모래 위에 듬성듬성 찍힌 작은 발자국의 길죽한 행진을 보고 그가 얼마나 당황했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그가 100m 달리기 최고 기록을 9.54초에서 8.42초로 새롭게 경신했다는 사실과 단발마의 비명처럼 내뱉은「빌어먹을!」소리가 마른 하늘에 천둥 치는 것처럼 우렁찼다는 것 정도만 살짝 밝혀두겠다.

《가지 말아. 없어지지 말아. 네가 또 사라지면 난 미쳐버리고 말 거야》

제르가디스는 다시 한 번 끙 소리를 내며 허리로 손을 올렸다.
『솔직히 말하지. 난 숨바꼭질 놀이를 좋아하지 않아. 술래가 되면 화가 난다구.』
『응? 무, 무슨 숨바꼭질을 했, 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
소녀가 눈치를 보며 실실 미소를 흘렸다. 급하게 침을 발라서 그런지 그녀의 입술이 엷은 타액의 막으로 빛났다. 그런 그녀의 입술을 지긋이 내려다보면서 제르가디스는 잠시 로댕의「생각하는 사람」조각을 흉내냈다.
『얘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처럼 알츠하이머 병에 걸렸나. 벌써 생각이 나지 않는다니. 날 그렇게 당황하게 만들어 놓은 주제에... 어이구.』

여자의 팔을 잡고 짐짓 자신의 눈앞으로 끌어올렸다. 손아귀에 잡힌 소녀의 손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빈약하고 가냘펐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 모습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마징가 제트의 무쇠주먹 저리가라로 위력 하나는 대단치도 않았으니까. 오죽하면 렛셔 데몬 한 마리를 기냥 때려 잡았을까, 모양만 여자의 팔이고 실상은 무쇠 조각이다.

환청처럼 그녀의 우렁찬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
『으흐흐흐, 난 너희들이 싫어. 정말로 네 놈이 날 추적해 온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길을 지나가고 있었던 건지는 관심 없다. 다만 너의 추잡스러운 입 냄새를 1km 밖에서도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끔찍스럽게 혐오스러울 뿐이야. 알겠어? 그러니까 그냥 죽어버리는 것으로 날 조금이나마 기쁘게 만들어다오... 이 괴물아!』
그녀는 묘한 초조감과 흥분감으로 범벅이 된 채 공기 중으로 엷은 살기를 뿜어댔다.
번쩍이는 눈동자 속으로 광기가 녹아들었다.
보통의 인간 여자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크르르릉!! 건방진 인간! 날 죽이겠다고? 크르르릉!! 웃기는 인간!』
『틀렸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너처럼 괴물이야.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지.』
말을 끝마친 소녀는 망설일 가치조차 없다는 단호한 자세로 렛셔 데몬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날았다. 마침내 날개를 접고... 당황해하는 데몬의 머리를 단단히 붙잡고 허리의 탄력을 이용해서 몸을 360° 돌려버렸다. 말린 고기를 잡아뜯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시커먼 죽음의 기운이 확 뿜겨져 나왔다. 죽이겠다고 선언한지 3초도 채 지나지 않아 멸망의 저주를 완성시켰다. 여느 왕궁 마도사도 다루기 힘들어 한다던 렛셔 데몬을 그렇게 끝장내 버림으로써 헐레벌떡 달려온 제르가디스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머리가 뜯긴 데몬의 사체는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시커멓고 끈적거리는 약간의 잔해물만이 흔적이랍시고 조금 남았을 뿐, 소녀는 옷을 툭툭 터는 것으로 언제 자기가 괴물과 싸웠느냐는 식으로 시치미를 뚝 잡아뗐다.

『다시 한 번 더 물어보지. 데몬 사냥이 변비에 좋다는 이야긴 금시 초문이다.』
제르가디스는 짜증으로 소리를 질렀다.
『데몬 사냥이 변비에 좋다니? 아니야. 변비엔 자고로 둥굴레 차가 최고야.』
『이봐? 내가 지금 말하는 건 변비 이야기가 아니잖아!』
『그럼 뭘 말하고 싶었는데? 생리통? 치질? 화장실 똥?』
『우욱! 여자애가 정말이지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리하여 소년은 짜장면에서 구더기라도 찾아낸 사람처럼 얼굴을 구겼고... 소녀는 뜨거운 햇살 때문에 현기증이 난다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외면했다.
졌다. 소년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젠장. 알았다... 나더러 쉴 만한 장소를 알아보고 오라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양새가 무척이나 지친 기색이다.
『넌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당근.』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말고 기다리겠다고? 진짜?』
확인, 또 확인이다.
『두말하면 잔소리.』
소녀가 꼬리를 흔들어대며 좋아라 했다.
『휴우. 하는 수 없군. 잠시 쉬어가도록 하자. 그럼 넌 여기서 잠깐 기다려. 쉴만한 장소를 보고 곧 돌아오마. 됐지?』
마침내 그가 항복을 선언했다.
『신난다! 야호! 이제야 두 다리 뻗고 쉴 수 있겠구나! 지화자!』
『그 대신!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여.기.서. 움.직.이.면. 안.된.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말고 기다리는 거야. 알았지! 정말이야. 움직이지 마.』
제르가디스는 우선 단단히 으름장부터 놓았다.
『네네, 그러고 말구용. 이 사람, 믿어주세요! 그럼 다녀오세용♡』

대답은 정말 잘한다.
제르가디스는 영 찜찜하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근처 바위산을 향하여 재빨리 사라져갔다. 잠시 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던지 고양이마냥 가릉가릉 목을 울려대던 소녀는 수통을 쿠션 껴안듯 가슴 안쪽으로 끌어안고 빨리 다녀 오라며 손까지 흔들어댔다.
이번에도 속고 있다는 생각이 굴뚝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딱 한 번만 더 그녀를 믿어주기로 했다.
이번 딱 한 번만 더... 젠장.
매번 속고만 살았다. 적당한 바위 그늘을 찾아낸 제르가디스가 거의 뛰다시피 해가며 서둘러 제자리로 다시 돌아왔을 적엔 이미 그곳엔 개미 그림자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새삼 뼈저리게 느끼는 거지만 아무래도 지금의 그는 앉으라면 서고, 일어나라고 하면 다시 앉아버리는 것과 함께 사막을 횡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구제불능의 말괄량이 같으니라구...!! 또야?!』
이미 화를 낼 기운도 없다. 제르가디스는 흥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숨박꼭질 놀이는 질색이다. 그래도 매번 술래는 어김없이 제르가디스 쪽이다. 그것도 가위 바위 보로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이번에는 뛰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모래를 박차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예의 삭.삭. 소리에서 빡.빡. 소리로 바뀌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빡.빡.빡.빡.
『이번에 잡히기만 해봐, 하늘에 맹세코 엉덩이를 때려주겠어.』
그의 목소리가 평상시보다 한층 더 음울하게 들려왔다.
아직 사막의 먼지 바람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 아핫핫~!! 이봐 그레이워즈의 저 머리통 잡아뜯기 기술은 나중에 유나 가브리에프에게로 곧장 이어집니다. 귀축공주 스페샬이라고나 할까. 높게 점프해서 상대방의 머리 꼭대기로 위치를 잡곤 적의 머리통을 두손으로 잡고 체조 선수처럼 공중에서 몸을 비틉니다. 그 반동으로 상대의 목뼈가 동강이 나는 거죠. 본편에선 나오지 않지만 이봐의 기술을 제르가디스가 따라했고, 그걸 보고 유나가 다시 모방했다고 보면 됩니다. 실력이 있다면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습니다. 무척 잔인하지만 피투성이 天人처럼 아름다울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