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편 열 넷 - 그에게로 배달된 선물 상자 한 가지

결코 뛰어가서는 안될 것 같은 분위기의 어둡고도 넓은 복도였다. 그 흔해 빠진 촛불 하나 켜있지 않은 탓에 마치 납골당 같은 스산함이 곳곳에서 풍겨 나왔다. 어지간한 모험가들이라도 머리털을 쭈삣 곤두세우면서 고개를 가로저을 만한 한줄기 차가운 냉기가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솔솔 올라왔다.

그런 곳을 거의 15cm에 육박하는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발목께를 살짝 덮은 녹색의 긴 드레스 자락이 북극의 밤하늘을 장식한 오로라처럼 기괴한 윤광을 내며 하늘거렸다. 여자는 턱을 아래로 밀어넣은 채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양손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은쟁반을 가슴 위로 치켜 올렸다.
추측하자면 아마도 주인에게 오후의 간식을 나르는 중인가 보다. 포도덩굴 무늬를 음각한 은쟁반은 지나가던 바퀴벌레가 미끌어져 허리를 분지를 정도로 반질반질 광이 났다. 그 위로는 색색의 향기로운 꽃들과 식욕을 자극하는 녹색의 브로콜리를 풍성하게 장식한 타원형의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크림 빛깔의 접시에는 입맛을 다실 정도로 탐스럽기 그지 없는 커다란 수박이 통째로... 이런!

두 눈을 부비고 자세히 보니 수박이 아니다. 녹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드리운 소년의 머리통이다.
소년의 머리는 헤롯에 의해 잘려 나간 뒤 의붓딸 살로메에게 헌상되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연상시켰다. 성그럽고 성스럽다. 그러니까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것이리라.
눈꺼풀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뽀얀 빛깔의 뺨마저 실룩거렸다. 하긴, 삼국지를 읽어보면 상자 속에 넣어진 관우의 머리 역시 속눈썹을 깜빡거림으로써 소금에 절이려고 신나라 덤벼 들던 조조의 기를 팍삭 꺾어버렸다고 하지 않더냐. 일설에 의하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루이 16세 역시 머리카락을 쭈삣 곤두세우는 것으로 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슬케 만들었다고 하고... 그러니 머리가 잘려진 소년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도, 눈썹을 살짝 찡그리는 일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당신은 이 모든 것이 사후 경직이 진행되는 동안 우연히 벌어지는 근육들의 떨림이라 주장해도 된다. 아울러 사자의 입술이 크게 벌어지면서 버럭 고함을 지르는 일도 정상적인 일이라고... 음, 미안하다.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겠다.

『도대체가 말이다. 내가 무슨 오후의 간식 거리냐?! 날 이딴 접시에 올려놓다니!』
소년의 머리가 비명을 질러대며 자신을 운반하던 여자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그리고는 호박 빛깔의 눈동자를 최대한 뒤로 돌려 상대를 매섭게 쏘아보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서는 얼굴을 돌려 그녀를 정면에서 노려보고 싶은 눈치다. 허나 회복을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비축해둬야만 하는 그에겐 목을 돌리는 동작은 일종의 에너지 낭비였다. 고로 그는 안구를 감싸고 있는 작은 근육들과 신경이 엄청나게 당겨지고 있는 것을 억지로 무시한 채 흰자를 다 드러내 보이면서 자기 뒤통수 안쪽을 힘들게 응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해신관님?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당신을 모시고 갈 수가 없잖습니까. 불경스럽게 다루안님의 두 귀를 붙잡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죠.』
은쟁반을 들고 가던 여자가 별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한마디 했다. 자기는 주인이 시키는대로 할 따름이니 어쩔 수 없다는 거였다.
『그, 그거야 물론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꽃들과 브로컬리는 뭐냐구. 도대체 누구 취미야! 접시 맨 밑바닥에 상치 잎사귀를 쿠션처럼 깔아놓고 내 주위로 딸기를 장식한 센스를 나는 죽어도 납득 못 하겠다. 이래가지고는 완전히 강남 룸싸롱의 특A형 과일 안주잖아!』

과일 안주, 과일 안주... 특A형 모듬 안주... 스스로 말해놓고 멋대로 상처받은 다루안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부패된 포도주 빛깔로 변해갔다.
할 수만 있다면 머리를 벅벅 긁어대고 싶었다. 그러나 현재 그에겐 무안해진 얼굴 표정을 가려줄 팔도 없었고, 머슥해진 나머지 콧잔등을 문지를 손가락도 없었다.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던 상관의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무턱대고 왕의 권자로 나아간 바로 그 순간, 아쉽게도 그의 몸은 샐러드용으로 준비한, 세로로 찢어발긴 오양맛살 모양새로 엉망이 되어버린 고로... 목 위로 붙어있는 것이 현재 그의 남아있는 신체의 전부였다.

《그래. 아차 하는 사이에 죽는 줄 알았지. 제기랄.》
처음엔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랬다. 그것은 바람이었다. 장마철 무렵의 지하실에서나 맡을 수 있는 퀴퀴한 냄새에다 바짝 말라버린 오래된 과자에서나 맡을 수 있는 방부제의 달큰한 내음이 섞인 그런 바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바람인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톱날이기도 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허락을 구하지 않고 왕을 알현하고자 한 어리석은 자에 대한 일종의 징벌.
쉬익 소리와 함께 몸통에서 분리되어 나가던 자신의 육체... 질리려 한다. 허공을 향해 질주하는 자신의 두 팔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목이 콰악 잠겨왔다. 어깨죽지로부터 싱겁게 안녕을 고한 채 낚시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던 오른 팔,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 뒤 정확히 8조각으로 찢어져버린 왼쪽 팔... 끄윽 신음하며 당시의 고통을 음미했다. 순간 광대뼈 근처의 신경이 펄떡거렸다.
끔찍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종이로 만든 인형을 갈기발기 찢어버리는 것 같았다. 가루가 된 양팔에 이어 시커먼 벌레같은 것들에게 휩싸여 서걱 소리를 내던 자신의 허벅지, 다 짠 스웨터의 올이 풀리는 형상으로 변신하던 하반신...

흉한 몰골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투명한 톱날은 한 치의 용서도 없이 그의 몸뚱이를 뭉텅뭉텅 깎아버렸다. 생전 처음으로 연필을 다듬는 어린애의 서툰 솜씨로 무엇하나 남기는 법이 없었다. 기다란 연필 한 자루를 순식간에 몽땅 연필로 만들어 버리는 그 무모한 힘은 세탁기 안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는 물줄기처럼 다루안을 안쪽으로 몰아세웠고, 억세게 반항하며 도망치기에 바빴던 다루안은 필사적으로 공간을 이리저리 건너뛰는 것으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기를 썼다.
그나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수신관이 생명의 은인이었다. 제로스는 골대 앞을 막고 선 유능한 골키퍼처럼 머리통만 남은 그를 축구공인양 냅다 걷어차는 것으로 다루안을 왕의 권자로부터 떼어내는데 성공, 남은 머리통마저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막아냈다.

허나... 이 부분에서 다루안은 한층 더 심란해졌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했다고는 하나 까마득한 나이의 어린애에게 그런 식으로 발길질을 당하다니. 모욕도 이런 모욕은 없다. 이얍, 기압 소리와 함께 천년동안 갈고 닦은 공차기 실력을 자랑하던 제로스. 나아가「그러기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바보 놈아」라고 말하려는 듯한 낭창낭창한 얼굴 가죽... 다루안은 자신도 모르게 으득 이를 갈았다. 이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오장육부가 마구 뒤틀렸다.

은쟁반 위로 그의 머리를 담아가던 여자는 순간 멈칫했다. 세차게 맥박치며 뿜겨져 나오는 증오의 기운에 다리 힘이 풀리려 했다. 실수로 은쟁반의 손잡이를 놓치는 날엔 끝장이다. 기를 쓰고 손아귀로 힘을 주었다.
『아앗?! 다루안님!』
마음 깊은 곳으로 응축된 증오의 마음은 실제적으로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여 푸른 번개를 만들었고, 방전된 힘은 그대로 벽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산산조각난 벽돌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천장이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린 엿가락처럼 이리저리 뒤틀렸다. 폭풍 몰아치는 겨울의 바다의 한 가운데로 이제 그들은 섰다. 지진이 일어났다. 어딘가에서 무거운 물건이 엎어지는 쿵 소리가 들려왔다. 연인들이 마주보고 누운 침대처럼 복도의 바닥은 아예 한쪽으로 눈에 띄게 기울어졌다. 곧게 뻗은 대리석 타일들이 파도치며 헤엄쳤다. 금방에라도 공간이 원시의 시대로 붕괴할 것 같았다.

녹색 드레스의 여자는 날카롭게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건 어디까지나 둘째 문제다. 쟁반 위의 접시가 와들와들 떨고 있음이다. 까딱하다간 메인 요리가 - 다루안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가버릴 것이다. 진짜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간? 이번엔 그녀 자신이 머리가 모가지에서 분리된 채 천만마리의 쥐떼들이 우굴거리는 시궁창 속으로 집어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낚시줄에 미끼 대용품으로 매달려 피라냐가 우굴거리는 아마존 강물 속으로 던져지리라. 탐욕스러운 물고기들이 살점을 입에 물고 죽죽 잡아당기면 그 느낌이 어떨지... 그런 꼴을 당하긴 죽어도 싫다. 여자는 눈을 부릅떴다.

하나는 포기하고 다른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하자. 제법 육중한 무게의 은쟁반이 자신의 발등을 가차없이 찍어버리든 말든, 크림색의 과일 안주 접시에서 메인 요리만을 꺼내 품에 안았다.
텅, 하고 쟁반이 땅에 굴렀다.
『아이고, 내 발! 다루안님~! 여긴 해왕궁도 아니고 수왕궁이잖아요! 당신의 위대한 왕의 체면을 생각하신다면 이러지 마세요. 이곳이 붕괴되면 우리 수왕님께서 당신의 왕에게 필시 항의하실 거라구요! 부탁드립니다, 다루안님!』

아슬아슬했다.
바닥이 좌우로 입을 벌리며 홍해처럼 갈라지려던 찰나, 과일 안주(?)가 다시 감았던 눈을 떴다.
『아차, 내 정신 파동이 너무 강했었나 보구먼. 이거 남의 집에서 성질 부렸다고 다루핀님에게 혼나겠는 걸... 게다가 괜히 힘이나 쓰고.』

주변은 다시 역사 깊은 도서관 안의 열람실 안처럼 조용해졌다. 언제 그랬느냐며 차가운 대리석 기운이 발 밑을 자극했다. 충격을 받은 천장으로 가느다란 실처럼 생긴 촉수들이 튀어나와 길게 패어진 자국 위로 정체불명의 허연 액체를 분비하기 시작했다. 흡사 사람의 타액같아 보이는 액체는 이내 주변의 공기와 반응하여 딱딱하게 말라붙었고, 일단 굳자 매끄러운 느낌의 대리석처럼 모습이 바뀌었다. 축축한 즙액을 뿌려대던 촉수들이 조용히 가라앉으면서 무너진 면적은 다시 완벽하게 재구성되었다.

『휴우, 겨우 끝났나... 이러다간 지레 죽겠네.』
송글송글 맺힌 식은땀을 털어내던 여자의 속삭임은 개미 목소리보다 훨씬 작았다.
짧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금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언제나의 무표정으로 돌아가 소중한 것인양 다루안의 머리를 두손으로 공손히 받쳐 올렸다.
이제 복도의 막다른 곳까지 이르렀다. 그래도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볍게 속눈썹을 떨었고, 15cm의 하이힐 굽이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지나쳤다.

『이곳입니다, 다루안님. 여기에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장소를 안내했다.
단단한 벽이 딱 한 번 앞뒤로 흔들렸다.
동시에 소년의 머리를 품은 여자의 몸은 수십마리의 늑대 인간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또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문이나 창문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 방이었다. 하지만 전면 유리로 만든 채광창이 천장에 달라붙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위는 매우 밝았다. 바닥으로는 마법진으로 추측되는 이상한 글자들이 나선형의 무늬를 그리며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문양의 가운데로 짙은 보라색 포장지로 싸여진 상자 하나가 마치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단을 연상시키며 우뚝 솟아 있었다.

문제의 상자가 불편했던 것 같다. 늑대 인간들은 자기들끼리 낮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의미심장한 눈짓을 교환했다. 밝은 방안에서조차 오렌지 빛깔의 눈동자가 번쩍번쩍 빛났다. 할로윈 축제를 장식하는 호박등이 하나 가득 모여 있다는 인상이다. 그들의 철사같은 털들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가로로 길게 찢어진 입 언저리에서 크릉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심란한 마음을 반영하듯 두 귀가 뒤로 모두 젖혀져 있었다.

『자, 여러분?』
여자가 짐짓 헛기침을 하며 모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해신관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늑대 인간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높으신 분을 향해 경의를 표시했다.
소년의 머리가 높게 들렸다. 막 강의가 시작된 교실처럼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늑대 인간들은 최대한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좌우로 흩어졌고, 그 가운데로 대장 격으로 여겨지는 은색 털갈기를 가진 놈이 무리를 대표하여 앞으로 나왔다.

약간의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로 은색 늑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크르르릉...다루안...님...어서...기다리고...크르르릉...이쪽으로...가르릉.』
『뭔대 이 난리들이냐. 이 지리멸렬한 것들아.』
몸이 아픈 관계상 다루안이 약간 짜증을 부렸다.
『인간계에서...크릉...제로스님의...당신과 당신의 왕께...일단 보고를... 크릉. 크르르릉...해왕님의 명령...제19번 실험체...의...크릉...처리를 완료...여기 그 증거를...크릉....크르릉...명령 종결...크르릉...당신에게 보내는 물건...가릉.』
용케 말을 마친 늑대 인간의 대장은 그러면서 보라색 포장지로 덮힌 커다란 상자의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든 내용물을 다루안이 직접 볼 수 있도록 했다.

겉뚜겅을 벗기기가 무섭게 피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동시에 다루안의 얼굴로 노여움과 수치가 황혼을 덮는 땅거미들처럼 툭 불거져 나왔다.
악몽을 꾸다 깨어난 어린애처럼 눈동자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불안감에 떨던 늑대 인간들 역시 호흡을 들이마신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가느다란 구슬땀이 늑대 인간들의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이걸 어쩌나. 역시 화났다.》
보라색의 공단 위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소녀의 몸뚱이가 올라가 있다. 나른한 오후의 편안한 낮잠이라도 즐기는 듯한 포즈로 한쪽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있다. 푹신한 쿠션을 끼고 누운 그 몸을 흔들면 금방 깨어날 것 같다. 하지만 연출상 무리가 있는 것이... 목 위로 텅 빈 공간만이 남았다.

덧붙여 시체 위로 아무렇게나 휘갈긴 짙은 보랏빛의 글귀 하나.
「다루안님 위로용 선물. 완쾌를 빌어요♡」

하나는 목만 남았고, 다른 하나는 몸뚱이만 남았다.
메세지는 분명했다.

『이 자식이 도대체 무슨 허튼 수작을 부리는 거야!!』
그것은 표효하는 목소리였다. 다루안의 머리카락이 죄다 위로 곤두섰다. 그의 눈동자 속으로 푸른 번개가 쳤다.
여자가 다시 고함을 질러댔다.
『여기는 수왕궁! 여기는 수왕궁! 진정, 진정하시라고요!』
늑대 인간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느라 바빴다. 수북하게 털이 돋아난 발들이 땅바닥을 동동 굴러댔다. 그들의 꼬리에 누군가 부싯돌을 가져가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 뛰었다.
죽일 것이다. 다루안이, 해신관이 부정한 짐승의 족속을 벌할 것이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다루안은 웃었다. 뒷걸음질 치는 늑대들을 향해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들은 한편으로 어리둥절해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폭풍 전야의 공포감을 아낌없이 맛보았다.
웃었다! 그 깡패 다루안이... 그가 웃었다!

시간은 매우 더디게 흘러갔다. 다루안은 여전히 미소를 띄고 있었다. 비록 녹색의 머리카락이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하늘 위로 곤두선 것만은 여전했지만, 여하간 웃고 있었다.
『크르르릉...저기, 다루안...님? 크르르릉.』
늑대의 목은 콱 막혀 있었다.
『대충 보아하니 너희들의 왕 제라스님에게는 이미 보고가 올라갔겠지?』
다루안은 냉정했다. 아직까지는.
『크르르릉...그렇...습니다만...크릉?』
노골적으로 공포감을 드러낸 떨림이 섞인 음성으로 그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알았다. 수고했다. 그렇다면 나는 해왕님께로 가겠다. 너희들은 남아서 그 추잡스러운 것을 치워버려.』
『크르릉? 하지만...해왕님의...실험실로...이걸...콰르릉...운반...크르릉?』
『허튼 소리! 실패작 따위를 가지고 놀 시간은 우리에겐 없어. 그러니 너희들이 알아서 이걸 먹.어.버.리.든.지. 말.든.지. 해.』
『먹...어? 크르릉? 그래도...될...까요?』
대장 늑대는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그∼래. 간식으론 그만이겠구먼. 흥! 추잡스러운 것들.』

말을 다 마친 후, 다루안은 몸... 이 아니라 목을 일으켜 허공 속으로 부웅 떠올랐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띈 채로... 그렇기에 오히려 더 소름끼치는 모습이었다.
그의 머리통은 푸른 불빛과 함께 신기루처럼 스륵 녹아내렸다. 자신의 왕이 있는 곳으로 아무런 말 없이 잽싸게 날아가 버린 것이다.
동시에 벼락이라도 칠 것 같던 분위기는 어두운 회색으로 차분히 가라앉았다.

은색 털의 늑대 인간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가슴이 벌렁거리는 것이 당장에라도 멀미를 일으킬 지경이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10년 목숨이 한꺼번에 소요된 듯한 느낌이었다.
『크르르릉...살았...다...크릉! 살았다...!!』
한바탕의 소동을 짐작했던 은빛 털의 늑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부하들이 신나라 이빨을 놀리느라 와작와작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그는 오늘 해왕궁에 사는 머맨이 몇 마리나 죽어나갈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잘은 몰라도 푸른 피가 흥건한 복도를 닦아내려면 사흘은 바지런을 떨어야 할 것은 분명했다. 멸종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은빛 늑대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콰르르릉...벨릭스? 넌...이게...무슨 일...인지...짐작...가나? 크르릉!』
『나도 몰라. 도대체 다들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시는 건지. 나 참. 골치 아프군.』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여자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예나 지금이나 윗분들의 다툼에 피해를 보는 건 언제나 그들 같은 힘 없는 존재들이기 일수였고...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엘렐? 넌 저거 안 먹니?』
벨릭스가 생각을 해준답시며 은빛 늑대를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난 식성이 까다로워. 불량식품은 배가 고파도 사양이야. 크르르아....랑.』
저편에서는 후루륵 짭짭 소리가 엄청 요란했다. 은빛 늑대와 여자는 나란히 어깨를 으쓱였다. 곁눈질로 돌아보기도 싫었다. 벌건 살점과 하얀 뼈가 사방에 튀는 모습은 아무래도 우아하지가 않았다. 사람을 먹으려면 뒷덜미로 코를 박고 마이너스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것이 최고였다. 저런 방식은... 우엑.

『크라라라랑... 그나저나 크랑... 제로스님은 왜...?』
『엘렐? 입 다물어. 말단은 침묵해야지. 윗분들의 모종의 음모 진행엔 우리들은 그저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최고야.』
그렇다. 침묵만이 최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말단 관리직인 그들은 알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