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편 열 둘 - 인형놀이와 검정색의 스펙트럼

그녀는 업계 용어로 말하자면「잘 팔리지 않는 상품」이었다.
그만하면 얼굴이 반반했고 근방에서는 보기 힘들다던 희귀한 빨강 머리였어도 그랬다.
치렁치렁 늘어진 머리카락만으론 시선을 끌 수 없었다. 앙상하고도 짧막한 두 다리와 빈대떡 한 장을 달랑 붙여놓은 납작한 가슴, 골반 뼈가 다 드러나 보이는 볼품없는 엉덩이... 전쟁 고아로 자라난 탓에 어려서부터 잘 먹지 못한 나머지 발육이 엉망인 여자에게서 창부의 매력을 찾는 일은 힘들었다.

여자는 8등신의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동료들 틈새에서 묵묵히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다. 하룻밤의 달콤함을 찾아 인형들을 사냥하는 거리의 남자들에게도「이런 자리에 왜 나왔느냐, 주제를 알아라」라며 괄시를 받기 일수였다.
튼실한 살집의 블론드의 미녀들 무리 속에서 비루먹은 전쟁 고아는 생리적 혐오감을 자극했다.
못 생긴 잡초가 아니다. 하도 밟아서 망가진 꽃이다. 내가, 너가, 그리고 우리가 밟아댄 꽃이다.
한 번 때리면 당장 숨 넘어가게 생긴 이 전쟁 기념비적인 창부는 그리하여 아물지 않은 상처에 뿌려진 소금과도 같았다. 가볍게 품고 자기엔 너무 쓰라렸다. 

때문에 팔리지 않았다. 추운 길바닥에서 속이 훤히 다 들여다 보이는 얇은 네글리제 하나만 걸친 채 새벽 5시까지 손님을 기다려도 매번 헛탕을 치기 일수였다. 이를 덜덜 떨며 나를 데려가 달라 아무리 떼를 써도 돌아보는 이 없었다. 그런 빈약한 몸으로 뭘 할 수 있겠느냐며 남자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에서고 따스함은 없었다. 대신 엉망으로 취한 사내들에게 한바탕 오줌 세례를 받는 것으로 화풀이 대상이 되었고, 이유 없이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 맞았으며, 무수한 손가락질과 난잡한 농담, 그리고 가래침이 날아왔다.

그럴 적마다 여자는 바짝 메말라버린 눈을 들어 세계를 증오했다.
그것은 무척이나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어주는, 대단히 불길하고 시건방진 눈초리였다.

『그래요? 하지만 전 그런 당신의 도전적인 눈빛이 마음에 드는데요. 표정이 아주 좋아요. 게다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군요.』

이야아! 기다리다 보면 쥐구멍에도 볕뜰 날이 있다더니만 오늘이 그랬다.
그녀는 이런 행운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로 호주머니 속의 금화 5개를 만지작거렸다.
꿈이 아니다. 체온으로 덥혀진 매끄러운 금속의 감촉이 나는 여기에 있소, 하고 소리쳤다.
금화. 그것도 5개... 반년치 방세가 한꺼번에!
생전 처음으로 만져보는 거금이다. 목구멍이 콱 막혔다. 이게 환상이라면 제발 깨지 말았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삐그덕 하고 마룻바닥이 움직였다. 흰개미 떼에게 무자비하도록 뜯겨 먹은 싸구려 여관방 복도는 숨 죽여 걸어도 저런 식의 소음을 내곤 했다. 그게 꼭 귀신이 우는 것 같아 그녀는 좋아하지 않았다.
긴장하여 귀를 바짝 세웠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곧 이어 덜컹 문이 열렸고, 여관 주인과 요금 계산을 끝마친 사내가 열쇠를 채우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목구멍 속을 틀어막은 정체불명의 솜뭉치에 대해 반복하여 생각했다. 왜 이다지 목이 타는 것이다냐.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혓바닥 위로 파란 불길이 타올랐다.
금화. 금화 5개.
보통 사람이라면 거리의 싸구려 여자와의 하룻밤에 이런 거액의 금액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 미안해요. 하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리진 않았지요?』
사내는 문의 걸쇠를 흔들어 확인하곤 뻣뻣하게 굳은 소녀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여자는 대답을 생략하고 간단히 고개만 까딱였다.
『다행이군요.』
네, 아니오 대답마저 할 수가 없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긴장하여 어깨가 위로 올라간 상태다. 여자는 겁에 질려 그가 가죽 채찍이나 몽둥이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나 유심히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두 손은 비어 있었다. 적어도 곤봉으로 여자의 등짝을 마구 두둘겨 패는 고상한 취미를 가진 남자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럴 일 없습니다.』
그녀의 걱정을 눈치 챈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남자가 어깨에 맨 갈색의 가죽 가방을 그녀는 무슨 폭탄이라도 되는 것인양 쳐다봤다. 여행용 가방은 그리 무거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솔직히 두려웠다. 예전에 한 번은 그 속에 뱀을 넣고 다니는 사람도 봤었다. 뱀은 그 남자의 성기 대용품이었다. 그딴 걸 남의 몸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인간도 세상엔 다 있다.
『...』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사내는 소지품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곤 곧바로 등을 돌렸다.
무엇인가를 꺼내는 대신, 섬세하게 생긴 가냘픈 손가락으로 어깨에 닿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제서야 여자의 마른 입안으로 침이 돌았다. 
휴우, 최소한 뱀 나올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겠다. 남자는 가방에서 물건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보니 참으로 묘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나이는 스무 살 전반? 여자처럼 곱상한 외모다. 근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달들과는 많이 달랐다. 입은 옷도 그렇다.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민무늬 검정색 셔츠와 바지는 너무나 정중해서 죽은 자를 위한 상복을 연상시켰다.
어쩌면 정말로 상복일지도 모른다. 사내의 이마 밑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에선 익숙한 냄새가 났다. 죽음이라고 하는, 어려서부터 내내 맡아온 싫은 냄새다.

그녀는 땀을 흘리며 금화 5개를 생각했다. 도망쳐선 안된다. 2주일 하고 나흘만에 맞는 손님이었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가 옷을 벗을까요, 아니면 그쪽이... 어, 그러니까 절 벗기고 싶으신가요? 저기, 아니면 제가 서, 선생님 옷을 먼저 벗겨드릴까요?』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는 걸 깨닫자 얼굴에 피가 확 몰렸다.
「이 생선의 비늘 좀 벗겨주세요」
「그럼 이 오징어 껍질도 벗겨드릴까요, 손님?」
이래선 어물전 주인의 말투다.

『예? 제 옷을 벗겨요? 그게 무슨? 아이고... 이런! 그거요.』
그런데 남자도 긴장한 모양이다. 배꼽이 빠져라 웃는 대신 그 역시 갈팡질팡했다. 여자랑 자보긴 생전 처음이라는 듯 끙 소리를 내뱉으며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확실히 수상하다. 무어라 툴툴대면서 곰팡내 나는 딱딱한 나무 침대 위로 훌쩍 걸터앉는 모습에서 당혹감이 보였다. 남자와 여자가 살을 섞기 전에 대관절 무엇부터 하면 되는 걸까나. 그는 순서를 고민하는 듯했다. 포응부터? 아님 악수라도? 정 뭐하면 맞절이라도 해볼까. 책에는 어떻게 적혀 있었더라. 데이트를 하기 전엔 통성명부터 하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치만 이건 데이트가 아니잖아.

어색한 침묵이 그들 사이로 흘렀다.
한참 후, 그가 부드럽게 손을 저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려면 어떠냐. 나는 상관 없으니까 당신이 좋을 대로 하세요.』
『아, 알았어요. 그, 그럼...』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주의해 가면서, (이건 업계의 규칙이다) 기계적으로 상의를 목덜미 위까지 치켜 올렸다. 옷 벗는 동작은 최대한 크게 하라. 그것이 상대를 흥분시킨다... 아울러 있는 그대로 훌렁 벗지 말고 잠시 뜸을 들이는 것으로 손님의 입맛을 당기게 하라. 그것이 거리를 떠도는 수 많은 마리아 브라운*의 교본 제1장.

여자는 불안하게 이리저리 시선을 움직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서늘한 방의 공기가 팔꿈치에 와 닿으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여자는 얼른 상체를 앞으로 구부정하게 숙이고 양팔로 가슴을 가리는 동작을 취함으로 조금이나마 체온을 잃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엄격히 말해 따뜻함이 전부가 아니다. 그렇게 자세를 취함으로써 유일한 자랑거리인 붉은 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은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 새가슴을 능숙하게 가려주었다. 어쩐지 색스럽다. 이런 자세로 있으면 사내들은 시각적으로 흡족해 했다.
보라, 침대 위로 올라가 앉은 사내 역시 먹잇감으로 찍은 참새를 응시하는 들고양이처럼 두 눈에 영롱한 빛을 발하였다. 정직하게 말해 일반적인 욕정과는 종류가 살짝 다른 것 같았지만... 그 눈빛이 쉰 나물이든 아니든, 대단한 흥미를 보이고 있는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멋있군요. 아름다워요.』
『그,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어깨를 덮은 자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분명 그는 기뻐하고 있다. 칭찬받은 그녀 역시 매우 흐믓했다.
『그래요. 전 당신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까 당신? 옷 벗는 일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이리 가까이 오세요. 내 곁으로 와요.』
남자가 손을 뻗었다.

여자는 수줍어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공단 브라우스를 땅바닥에 스륵 던졌다. 그리고 신발을 벗어 구석진 곳으로 놓아두고 애원하는 태도로 침대로 걸어갔다.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들의 손이 서로를 찾았고 마침내 만났다. 남자의 손가락이 그녀를 휘감았다. 사내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뺨과 목덜미 안쪽을 쓰다듬게 했다. 자신의 피부를 타인이 쓸어내리는 촉감이 좋은지 남자가 눈을 감은 채 웃었다.

반대로 그녀는 이상한 기분을 맛보았다. 조금 섬짓했다고나 할까.

『어. 왜 그러죠? 좀 놀란 것처럼 보이는데요. 눈이 동그랗게 변했어요.』
『당신 손... 이상하리만치 차가워요. 그리고 그 뺨도... 엇.』
「너무 매끄러워서 기분 나빠요」라고 말하려다 그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래요? 차갑다라. 바깥에 오랫동안 서 있어서 아마 그럴 거예요. 그리고요?』
『아, 아니예요. 아무 것도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그녀는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았다. 일단은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남자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쥔 채 그녀의 배꼽 위로 가만히 뺨을 부비대고 있었... 가 아니라 살갗에 코를 바짝 가져간 채 킁킁 소리를 내며 새끼 강아지처럼 냄새를 맡았다.
냄새? 냄새를 맡다니? 그녀는 경미하게 몸을 떨었다.

『비누 냄새가 나는데요? 향수는 쓰지 않는가 보군요.』
『저기. 그러니까, 저는 향수를 즐길 만큼 돈이 없어요. 죄송해요.』
『아녜요. 전 마음에 들어요. 그녀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비누 냄새가 나곤 했었거든요. 향수 냄새가 나는 적은 거의... 가 아니라 단 한 번도 없었어요. 후후후.』

여전히 상냥하게 말하며 그가 한쪽 손으로 침대 가장자리를 짚었다. 덕분에 낡은 침대가 삐그덕 비명을 질러대며 요동쳤다. 이제 그는 다리를 꼬고 편안히 앉아 여자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꾸중을 당하는 어린애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얌전히 옆으로 가서 앉았다.
심장이... 기괴할 정도로 느리게 뛰었다.

『오라. 표정을 보아하니 그게 누구였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눈치로군요?』
『아, 아녜요. 저희들은 그런 걸 물어볼 수 없어요. 그러니까 뭐냐, 고객에게 서비스에 관련된 것이 아닌 일반적인 질문을 던지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요.』
그녀는 서둘러 아니라고 대답하고 고개를 돌려 벽을 응시했다. 후, 하고 가볍게 숨을 쉬고 실크 스타킹을 벗기 위해 한쪽 무릎을 침대 위로 끌어올렸다. 긴장감으로 인해 어깨가 딱딱했다. 이래가지고는 곤란했다. 여자는 천천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번호를 매겨 조목조목 따져가며 생각했다. 익숙해지려고 기를 써도 이 순간만 되면 긴장하는 버릇은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 침착해지자. 일단은 양말을 벗은 다음, 팬티를 마저 벗는다. 그가 허리를 움켜쥐면 일을 치룰 준비는 끝. 눈을 감고 침대 뒤로 벌러당 드러눕는다. 숨을 죽이고 다리를 벌려라. 상대가 묵직하게 몸을 겹쳐오면 적당히 알아서 흐느끼면 된다. 간단하다. 절정에 이른 남자가 사정을 하고 나면 그 즉시 몸을 일으켜 세워라.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겁 먹지 말고 당당해지자.
옷을 벗는 움직임에 침대가 삐그덕 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여자의 동작을 즐겼다.
음, 즐긴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을 수 있다. 솔직히 쏘아보는 것 같아 무척이나 거북살스런 시선이었다.

『저어... 제가 당신의 그녀와 쏙 빼 닮은 모양이죠? 금화를 다섯 개나 주시고.』
『헤에. 뭐지요? 고객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는 건 금지라고 아까 분명히 그랬잖아요.』
그녀가 벗어던진 스타킹을 무슨 미역줄기인양 손가락으로 집어 올린 남자가 은근히 비아냥거렸다.
『그,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저.』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여자는 남자의 별난 옷차림을 다시 한 번 눈여겨 보았다.
검정색.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어둠의 빛깔로 옷을 만들어 입은 남자.
그것은 암흑. 죽음의 색.
『괜찮아요. 만약 제가 그녀를 연상시키고 있는 거라면... 절 그녀라고 생각하고 즐겨도 좋아요. 특히 좋아하던 포즈가 있었다거나 하면 미리 말씀하시구요. 그녀가 어디를 주로 만져주곤 했었는지 가르쳐 주시면 그것도 알아서 해드리죠. 이제는 당신 곁에 없는 그 사람을 나에게서 찾아가세요.』

《나는 울지도 않는 착한 인형. 기꺼이 당신 곁에 없는 애인의 환영이 되어드리겠어요》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
흥분한 걸까? 그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정말이고 말구요. 이 하룻밤 동안 나는 온전히 당신의 장난감이예요.』
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그의 품에 살포시 안겼다.
계피향? 싸한 향기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그녀는 그의 옷자락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툭... 툭...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건 땀이 흘러내리는 소리다. 아니. 머리 속으로 기름이 흘러가는 소리다. 그녀의 손바닥 안으로 쌀쌀맞은 초겨울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주저하면서도 부채꼴 모양으로 손을 둥글게 움직이는 것으로 호수에 잔물결을 일으키면서 그에게로 더욱 가까이 접근했다. 허리에서 등으로, 다시 엉덩이로. 그리고 천천히 어깻죽지를 향해 미세하게 피부를 자극하는 손길을 부지런히 놀렸다.
향기가 난다. 새로운 갈망이자 동시에 그 갈망을 깨끗하게 말소시켜 버리는 듯한... 그녀는 질끈 눈을 감고 사내와 포옹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여자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사내는 인형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았고 호흡을 흐트러뜨리지도 않았다. 가만히 눈을 아래로 내려 바지춤을 살펴보니 그것이 크게 부풀지도 않았다.
어째서. 갑자기 그녀의 시야가 하얗고도 투명하게 변해갔다.
뭘까. 목이 타고 있다. 불타고 있다.
코로 새로운 자극이 느껴졌다. 이것은 피의 냄새. 비릿하다.

이제 그녀는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갑작스런 충격이 뇌를 후벼팠다.
『아?!』
『전 그저 그녀와 비슷하게 생긴 시간 끌기용 시체가 하나 필요했을 뿐인데. 고마워요. 이렇게 절 기쁘게 해 주시니 말예요. 그래요. 그것은 단 한 번의 엑스타시. 무섭도록 황홀하고도 짜릿했어요. 그녀와 내가 하나가 되었을 적에... 그때의 쾌감을 무엇으로 설명할까요? 난 잊을 수가 없어요. 얼마나 그 느낌이 신선했던지, 그 연약한 피부를 찢고 들어가는 나의 몸이 어떻게 반응했었는지... 네. 그래요. 뼈를 부수고 살점을 찢고... 내 안에서 움직이던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것은 단 한 번의 엑스타시... 좋아... 못 견디게 당신이 좋아!!』
『이게 뭐...야?! 당...신...!! 살...려...줘!』

사내의 몸을 껴안은 상태에서 그녀는 꺽꺽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남자는 여전히 두 팔을 편안하게 침대 위로 올려놓은 자세 그대로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송곳처럼 날카로운 그 무엇인가가 그녀의 목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벽 반대쪽으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충격을 못이긴 그녀가 앞으로 쏠리면서 남자의 양팔을 있는 힘껏 붙들었다. 공포에 질린 눈망울이 학교에 처음 들어가는 어린애의 그것 같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의식이 몽롱해졌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답답하고... 끔찍했다. 참을 수 없이 아팠다!

남자가 발버둥치는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탐욕, 바로 그 자체였다.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부탁이예요. 절 더욱 꽉 붙잡아 주세요. 나에게 매달려줘요. 그녀가 그랬듯이 나에게 그렇게 해주세요. 나를 잡아요. 그리고 나를 매섭게 노려봐줘요.』
더할나위없이 쾌감에 떨면서 그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허공에 나타난 검은 색의 송곳은 이제 어른 손가락 만한 크기에서 아이 팔뚝만한 사이즈로 커져 있었다. 그것이 여자의 목을 후벼 파면서 천천히 회전하며 움직였고... 동작은 서서히 거칠어져 마침내 미친 듯이 뱅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방안 전체가 이미 피에 젖었다. 천장에까지 날아간 붉은 핏방울은 벽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기괴한 줄 무늬를 만들어냈다. 붉은 생명이 가랑비처럼 내렸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그녀가 자지러졌다.
살이 벌려지면서 근육과 뼈가 뭉개졌다. 송곳의 크기가 더욱 커졌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여자의 목이 몸통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반쯤 벌거벗은 몸이 미끌어지듯 쓰러졌고 얼굴은 반대쪽으로 굴러갔다. 여자의 입은 손님을 맞이하는 잔칫집의 현관처럼 크게 벌려진 채였다. 그 입에서 마지막으로 공기가 푸시시 새어나왔다.
남자는 양 팔을 껴안은 자세로 거칠게 헉헉 신음했다. 쾌감이다. 당장 죽을 것 같은 짜릿함이었다. 진동하는 피 냄새도, 최후로 악마를 보았다고 외치고 있는 그녀의 부릅뜬 눈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사내는 황홀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뜨거운 입술에 침을 발랐다.
『좋아, 당신... 멋져.』
찰라 밖에는 지속되지 않는 이 충족감... 아아. 사랑하는 당신.

『뭐요, 손님. 거기 무슨 일 있소? 빨랑 문이나 열어봐! 여보셔!』
종잇장처럼 얇은 벽을 타고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놀란 여관 주인이 집채만한 풍채에도 아랑곳 없이 허벌나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군데군데 벌레 먹은 문짝을 마구 두둘겨댔다. 사람 하나 죽은 모양이라고 짐작했던 것 같다. 얼굴이 누런 빛이었다.

『왜 그러세요? 여관 무너지겠어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준 남자는 수줍은 듯이 방긋 웃기만 했다.
『사, 사람이 죽는 소리가 나던데... 윗층에서 다들 기겁을 했지라.』
『그래요? 사람 죽는 소리라... 분명 죽이긴 했지요. 훗.』
누런 기름이 뜬 눈으로 방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주인을 향해 사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주인은 주먹코를 문질러대며「그것 참 이상하네...」라고 중얼거렸다.
방안? 깨끗했다. 침대 시트가 조금 구겨져 있긴 했지만 그거야 별 것 아니고... 의심했던 것처럼 바닥에 깨진 유리컵이 사방으로 널려있진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은은한 세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단순히 기분 탓인가, 고백하건데 석 달이나 빨지 않은 커튼도 오늘따라 꽤나 청결해 보였다. 침대 밑으로 깔린 발판엔 그 흔한 커피 얼룩 하나 보이지 않았다.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한 상태다.

마침내 주인은 바짝 쫄아든 가슴을 훨훨 쓸어내리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이어 그는 남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짓궂은 눈빛으로 보라색 단발머리 사내의 옆구리를 찔렀다.
『얼마나 죽여줬으면... 뭐야. 꽤나 신났었나 보지? 소리가... 엄청 컸어. 이봐? 보기엔 흐믈흐믈하게 생긴 녀석이 능력이 좋은가 봐? 저기, 몇 번이나 즐겼어?』
『그거요? 단 한 번의 엑스타시였죠. 하지만 대단히 만족스러웠어요.』
음흉한 수작을 주고받으며 사내와 여관 주인은 함께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좋았겠어, 정말 좋았겠다. 그런데 여보게, 총각. 여자는 벌써 돌아갔나?』
『네. 그녀는 이제 여기에 없어요. 방금 전에 늑대들의 섬으로 향했거든요?』
『옳커니! 늑대라! 그 말이 진리일세. 세상의 남자들은 모두 늑대이지. 핫핫핫!』

늑대의 섬이라. 검정 옷의 사내가 한 말은 단순한 비유만은 아니었지만 주인은 여자가 다시 다른 남자들을 만나러 거리로 다시 돌아간 모양이라고 간단히 추측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헛헛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죄다 잊었다.

밤은 아직 많이 남았다. 여자와 남자가 살을 섞을 시간은 충분했고 욕망을 해소하려는 손님은 여관 밖으로 길게 줄을 서있었다.
『좋은 밤입니다. 좋은 밤!』
『그렇고 말고요. 좋은 밤입니다.』
제로스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가방을 다시 집어들었다.
까르르 웃는 인간들의 소리로 도시는 여전히 활기찼다.
사람 하나 없어져도 표시 하나 나지 않는다.
세계는 윤활유를 뿌린 기계인양 잘 돌아가고 있다.



♠ 파편 열 셋 - 악마를 잡으러 숲으로 갈까요

악마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조~오~았~서~!』
남들은 에그머니나 소리를 내며 황급히 소매춤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당근 빛깔의 머리카락을 한 소년은 엉뚱하게도 눈을 반짝였다.
『여보쇼? 악마라니까요. 이봐요.』

당황해서 손을 뻗었지만 이미 안 듣고 있다.
신나서 방금 구입한 지도를 펼치고 빨간 색연필로 X자를 그렸다. 해적이 숨긴 보물을 찾으러 나선 모험가의 휘파람이 코에 걸렸다. 자칫하는 날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날 수 있다는 경고는 한쪽 귀로 흘렸다. 헤죽 웃는 저 모습을 봐라. 신났다, 신났어.

『가만 있자, 그럼 필요한 물품이... 물파스랑 대일 밴드.』
악마라니까! 라고 마음 속으로 소리 지르며 만물상 주인은 인상을 썼다. 지금 모기 물린데 바를 약이 대수야?! 최소한 만델린 신전에서 파는 성수 폭탄 정도는 되어야 할 거 아냐! 정 뭐하면 은 닷냥짜리 체력 부활약이라도 사던가. 그런데도 소년은 싱긋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발 깔창이랑 휴대용 물통 둘, 나침반 하나, 로프 셋.』
『악마라니까. 손님.』
『아참, 혹시 이 근방으로 도시락 가게는 없어요? 괜찮은 가게 있으면 소개시켜줘요.』
전혀 안 듣는 거냐. 만물상 주인은 다이아몬드 창이 시뻘겋게 변한 심즈 게임 속 캐릭터를 흉내냈다. <- 게임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어드바이스. 제 성질을 못 참고 온 몸을 비틀어댔다는 얘기다.

『악마라니까!』
『잘 들려요. 소리 지르긴.』
『그럼 알아 들었다는 시늉을 해야 할 거 아뇨!』
성격이 못 됐다. 소년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금 평상시 어조로 주문에 들어갔다.
『나무 젓가락 두 개, 물수건 둘.』
『으아아~앗!!』

그 정도로 울긴.
멀직히 떨어져 뒷짐을 지고 서서 어린이용 캔디 바를 구경하던 키 작은 소년이 흥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불타는 남의 가슴에 수십 개의 장작을 훌쩍 던졌다.
『리카익? 나 이거 메론맛 사탕 하나 사줘.』
『이빨 썩어.』
『하나 정도론 안 썩어. 괜찮으니까 사주라.』
『안돼, 테일러. 다른 거 골라. 아저씨? 주문 안 받고 뭐하세요. 물수건 달라니까요.』
『악마라니까아~!! 숲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족족 죽어서 발견되는~!!』
『리카익? 사탕...』
『안된다고 내가 그랬지. 바르테일러. 저번에도 어금니가 아프다면서 힘들어 했잖아.』
『그땐 실수로 돌을 깨물어서 그랬고. 충치가 생겨서 아파했던 건 아니다.』
『이눔들아! 제발 사람 말 좀 들엇!』

두 명의 소년들은 괴로워하는 만물상 주인의 존재 자체를 아예 망각한 듯했다.
이어지는 건 치아 건강에 대한 격렬한 대 토론.
사탕을 사달라는 쪽이나, 안된다는 쪽이나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리카익 가브리에프, 방년 17세.
바르테일러. 외견으로 보자면 13세. 실제 연령 추정 불가.
피가 절절 끓어 세상 쓴 맛을「그런가 보지」하고 넘기는 철부지 모험가들이었다.

필요한 용품은 가방에 잘 챙겨넣었다. 똑딱 단추를 닫으면서 리카익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실은 용을 잡고 싶었는데.』
용을 잡고 싶다는 말에 바르테일러는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리카익은 근방 도시락 가게를 찾아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치만 요즘엔 용을 보기가 무척 힘들어서 말이야.』

예전에는 성의 영주님이 애완용으로 키웠을 정도로 흔해빠진게 용이었다고 한다. 귀족을 모시는 집사들의 필독서로「죽지 않고 용에게 먹이를 주는 방법」이라는 책이 있었다니까 아마 사실일게다. 그런데 지금은 용의 씨가 말라 동화책에서나 구경이 가능한 실정이다. 용의 존재는 전설이 되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는게 소원인 리카익의 입장에선 식은땀 나는 현실이다. 행여 드래곤이 절대 보호종으로 지정이라도 되는 날엔「안타깝게 손가락을 빨았다」수준으론 안 끝난다. 소년은 눈이 퀭- 하게 변해 저주인지 주문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죽여야 하는데... 용.』
바르테일러는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지 다시금 목을 움추렸다.

『그래도 이번엔 썩 괜찮을 것 같은데. 마족이라잖아.』
사탕은 결국 사지 못했다. 대신 건강에 좋은 거라며 방울 토마토를 한 봉지 얻었다.
테일러는 잘 먹겠습니다 - 라고 말하고 신선해 보이는 방울 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었다.
『숲으로 들어가서 행방불명된 사람이 모두 여섯. 일부라도 찾아낸 시체가 둘. 이만하면 숲속으로 마족이 어슬렁거린다는 소문도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군.』
『그래도 또 모르는 거야. 세상엔 가짜가 많으니까. 저번에도 렛셔 데몬이라고 해서 달려갔는데 정작 나타났던 건 광견병에 걸린 곰이었잖아.』
『맞아. 곰 두 마리였지.』
『주민들로부터 보상금을 톡톡히 얻어냈긴 했지만...』
『마족이 아니어서 무지 섭섭했지.』

길 가던 주민이 우연히 소년들의 대화를 엿듣고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마족이 아니라 섭섭?
방금 쇼핑한 것이 분명한 사과가 길바닥을 굴러갔다.
툭 - 하는 소리에 반응, 리카익이 재빨리 허리를 굽혀 쇼핑 봉다리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사과를 붙잡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상큼한 미소.
『저기요? 떨어뜨린 물건...』
그래봤자 행인은 저만치 달아난 뒤다.

『뭐야, 멀정한 사과를 땅바닥에 그냥 버리고.』
리카익을 쓴 표정으로 주운 사과를 자기 품에 넣었다. 먹는 걸 등한시 하다니. 천벌을 받는다. 색깔도 고운게 맛도 좋게 생겼다. 상큼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 악마가 있다는 숲은 어느 방향이래?』
『동쪽으로 사흘 거리.』
『테일러? 그동안 우리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1시간동안 가방 모두 들고 가기 하자.』
『좋지. 가위바위보!』

그들의 인생에서 정말로 전설적 악마를 만나게 되는 순간까지 앞으로 딱 사흘.
그것도 모르고 리카익은 뺨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채 두 개의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