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바로 이거야. 고향의 맛 다시다가 따로 없구나~』
어릴적 집에서 맡던 냄새다. 가득 껴안아도 부족하다. 눈물이 나도록 그리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가슴 안쪽이 뭉클~ 하고 떨렸다.
제피리아산 포도주를 병째 굴리면서 리나는 벌겋게 웃었다. 코로 숨쉴 적마다 콧구멍으로 시큼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수도 꼭지 패킹이 헐거워졌는지 맑은 콧물도 약간.

원래 제피리아산 포도주는 빈 입으로 즐기기엔 알콜 농도가 제법 강하다. 기분 좋게 즐기려면 소량을 혀끝으로 굴렸다가 살살 집어삼켜야 한다. 삼켰을 적에 꿀꺽 소리가 난다던가, 목젖이 위 아래로 크게 움직이면 안된다. 심심풀이 맥주 마시듯 벌컥거렸다간 곧바로 죽음, 장의사가 두 손을 마주부빈 채 대문 밖으로 서서 입장 신호를 기다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잘 알고 있다. 모르는 바 아니다... 리나는 웅얼거렸다.
순간 고춧가루가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눈알이 톡 쏘면서 아파왔다.
그녀는 정신없이 눈가를 문질러 눈물을 달랬다.
기왕 문댄 손, 덤으로 콧물 가득한 콧구멍도 닦았다.

『윽, 디러! 지금 고향의 맛을 즐기고 있는 거... 확실한 거예요?』
『그럼 네 눈엔 뭘로 보이는데? 제로스.』

난처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순간 제로스는 인상을 구겼다. 이럴 경우에도 평소의 신념에 따라 - 사기는 쳐도 거짓말 만큼은 하지 말자는 -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행동일까. 자칫하다간 구둣발로 머리를 얻어맞을 수도 있다. 몰라서 그렇지 밟히면 제법 아프다.

신관은 눈치를 살피며 모기 목소리로 슬그머니 대답했다.
『망나니 폭음.』

그녀의 아버지는 말했었다. 혀가 마비된 상태에선 제대로 향을 즐길 수 없음이다.
취하도록 포도주를 마신다는 건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무식한 짓이라고... 포도주 상인인 인버스씨는 꼬장꼬장한 성격상 그런 무식한 짓을 참지 못했다. 소매춤으로 딱딱한 질감의 부채를 하나 숨겨서 가지고 다니면서「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놈들」의 머리통을 죽어라 때리곤 했다. 그래서 포도주 산지라는 특성상 술통 가득한 동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서 만큼은 엉망으로 취해 널부러진 인간들은 보기 힘들었다.

격언은 낭랑한 목소리로 한결같이 읊어졌다.
맛있게 먹자. 포도주는 어디까지나 맨 정신으로 정성껏 음미하며 마시자.

리나는 베시시 웃어 버렸다.
아부지, 못난 딸네미를 용서하십셔.

이것이 그녀의 거짓말 하나.
『나 안 취했다니까아앙~ 구왠찮아~ 나는 맨 정신이에용~ 말짱하다니까~』

그녀의 신관은 벌컥 고함질렀다.
『으이그!! 내가 못 살아. 혀가 꼬였는데 뭐가 제 정신입니까! 도대체가!』
『도대체가 뭐.』
『그렇게 못 견딜 거라면 왜 가우리씨를 혼자 떠나게 했나요.』

리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 못했다는 편이 옳다.
그녀는 왜 가우리를 혼자 떠나게 했을까? 그건 리나 인버스 본인도 모른다.



한 번 망하는 것도 서러운데 무려 세 번씩이나 밑기둥이 싹뚝 잘리운 곳이다. 비유하자면 어젯밤 불이 나서 살림살이를 몽땅 쓸어버렸고, 겨우 화재가 가라앉아 한숨 돌렸다 싶었는데 돌연 범람한 강물이 덮쳤고, 물이 빠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강도가 들어와 사람을 죽인 꼴이다.
마수 자나파에다가 복제 레죠, 거기다 피브리죠까지... 철저하게 짓밟혀도 이렇게 밟힐 수는 없었다.
그래도.
묘하게 끈질긴 구석이 있어 사일라그는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았다.
여전히 사일라그라는 이름이 콱 박혀져 지도는 인쇄되었다.

「여기가 나의 고향입니다...」

대낮에도 귀신 나온다는 땅이라지만 어디까지나 실피르에겐 태어나고 자란 땅이었다. 그 애착은 상상을 초월, 실피르는 묵묵히 정령의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마도를 공부한다는 사람들 다수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라면서 뜯어 말렸어도 고집을 부려댔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지가 되어 버렸다고? 틀렸다. 그녀는 늘 입버릇으로 말하길, 생명은 잠시 숨만 죽이고 있을 뿐, 언젠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대지는 그 풍성한 생명력으로 인해 결코 죽지 않는다고 그녀는 믿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돌아온다 하였다.
그래서 금빛의 마왕, 로드 오브 나이트가 강림한 저주의 땅 위로 부활의 영창이 매일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초라한 움막 생활이 전부였다. 얼굴이 훤히 비치는 멀건 죽이 식사의 전부였다. 그래도 실피르는 사일라그에 머물렀다. 말라 비틀어진 땅에 쉬지 않고 밀과 보리를 심었다.
힘든 나날이었다. 마법력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음에도 식물은 생각대로 잘 자라지 않았다. 닭이나 염소 같은 가축도 여차하면 죽어나갔다. 사람도 영향을 아주 안 받을 수 없었다. 손톱은 죄다 갈라지고 발바닥엔 굳은 살이 박혔다. 모아둔 빗물에다 옷가지를 열심히 비벼 빨아도 땀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어느 틈에 그녀는 거친 피부와 깊게 팬 주름살을 가진,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전형적인 고행자가 되어 있었다. 그 작은 어깨가 어찌나 가냘퍼졌는지 금방에라도 반으로 쪼개질 것처럼 보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조마조마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행복해요.」

그렇게 해서 다섯 채 남짓하게 집이 들어섰다.
파견나온 신관 둘과 가난뱅이 무녀 셋. 주민 수는 그게 전부.
허나 그렇게 하기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벽돌로 신전을 세웠어요. 다섯 명이 같이 둥글게 앉아있기도 힘들다지만 그래도 지붕으로 머리를 가리고 신에게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드디어 생겼어요」

중대 결단이었다. 신전 건축 기념으로 조촐하게나마 마을 잔치를 열기로 했다.
실피르는 제일 먼저 가우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실 거죠?」

닭을 다섯 마리 잡아놓을 터이니 꼭 들려달라 글을 적었다. 반드시 리나랑 사이좋게 손 붙잡고 오라고... 깨끗한 기름에 닭다리 튀겨놓고 기다린다 하였다.

편지를 손에 쥔 가우리는 해밝게 웃기만 했다. 오랜만의 초대장이었다. 그는 실피르가 시킨 그대로 리나의 손을 꼭 붙잡고는 출발을 종용했다.
맛있는 닭고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사모님.

여기서 거짓말 둘.
리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간단했다. 잔치에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으음... 역시 닭 다섯 마리로는 배 채우기가 힘들죠. 제로스는 이해합니다.』
『어쭈. 이 자식 하는 소리 좀 봐라. 그래, 네 눈에 나는 그 정도의 인간으로 보인다 이거냐?』

10년만에 어렵사리 집 장만에 성공, 친구들 모아놓고 잔치를 할테니 꼭 와달라는 사람 앞에서「너네 집은 너무 좁은 것 같아서 좀 그렇단 말이야? 미안, 나는 집들이에서 빼주라」고 말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당장에 인격을 의심받는다. 세상에 그런 싸가지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년은 맞아 죽어도 싸다. 리나의 눈이 히번득거렸다.

『에... 그러니까... 닭 다섯 마리가 적어서가 아니라...』
『죽엇!!』
시커먼 빛깔의 신관 한 마리를 가뿐하게 때려잡은 뒤, 리나는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따라갈 수 없기에 가우리의 팔을 힘 주어 뿌리쳤다.
동시에 화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누구 염장지를 일 있냐?!』
『어?』
『이걸 보시라. 본인의 이 아름다운 가운데손가락이 벌겋게 부어오른게 안 보이나. 물집 잡혀서 쓰라리다구. 마도사 협회에 제출할 연내 개인 동향 보고서 마감 날짜가 바로 사흘 뒤야! 어젠 겨우 세 시간 잤다구. 팔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쓰고 또 썼단 말이야! 이젠 잉크만 봐도 폭발할 거 같다구.』
가우리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리나가 밤새 밝은 호롱불 아래 앉아 있었다는 건 익히 잘 알았다. 그렇지만 가계부 정리가 아니었던가? 주판알이 딱딱 굴러가는 소리를 분명 들었다. 그걸 자장가 삼아 눈 감고 깊게 잠들었다. 따악, 따악. 정겨웠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그의 마음은 금세 편안해졌다. 리나만 주판알 튕기는 소리를 좋아하는게 아니다. 몰라서 그렇지 가우리도 은밀한 주판알 극성 팬이었다.

『호오. 따닥 소리를 들으셨다? 펜 대에 힘줘서 그걸 부러뜨리는 소릴 들었구먼.』
『하하하... 리나.』
마도사 협회? 연내 개인 동향 보고서? 긁적긁적. 그런 걸 왜 써야하는 걸까.
가우리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며 계속해서 멀뚱거렸다.
중요한 건가? 그걸 꼭 지금 내야만 하나? 나중으로 미루어도 그리 큰 문제는 없지 않...

생각이 짧은 바보에게 대응하기 위해선 허리춤으로 손을 턱 소리나게 올려야 할 것이다.
리나는 두 말 없이 그렇게 했다.

『한 가지 예를 들지. 용병 길드에서 나온 자격증 갱신을 뒤로 미루면 어떻게 되지? 자, 대답해 봐.』
가우리는 정색을 해가며 얼른 대꾸했다.
『쪽박 차지.』
자동차 운전 면허증 갱신을 제 때 하지 않으면 당신은 트럭을 몰 수 없다. = 쪽박이다.
『맞아, 바로 그거야. 감동스러울 정도로 자~알 알고 계시는구먼.』

이쯤해서 가우리는 끙 소리를 내뱉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맛있는 치킨이여, 안녕. 꿈에서나 너를 맛볼 수 있으리.
그래도 명색이 보호자다. 리나를 홀로 남겨두고 사일라그로 떠날 수 없었다. 리나가 안 간다면 가우리도 안 간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통닭들의 환상에 눈물이 왈칵 솟구쳤지만 남자답게 참기로 했다.

『뭘 모르는 말씀. 너는 반드시 가야만 해, 가우리.』
여기서 리나는 다시 한 번 더 표정을 달리했다.
『그건 왜?』
『세상엔 죽었다 깨어나는 한이 있어도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거든.』

밥 먹기 싫으면 라면을 먹으면 된다. 입 맛을 잃었을 경우엔 과자로도 충분히 그 허기를 달래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리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닷물로는 목을 축일 수 없으며 식초로는 찌게 국물을 낼 수 없다. 시한 폭탄의 빨간 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멋대로 파란 선을 잘랐다간 그 즉시 관세음보살이다. 피할 수도 없고, 대신 할 수도 없다.

『이웃집 할매 증손녀 결혼식장엔 안 가도 그만이지. 그러나 어려서 기저귀 갈아주던 사촌 누나 결혼식이라면 홍해를 가르고서라도 반드시 가야만 해. 그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거야.』
리나는 마음을 가득 담아 가우리의 머리카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우리가 실피르에게 신세를 진 걸 생각해 봐. 양심이 있지! 어떻게 안 간다고 할 수 있니. 나도 못가게 되어 미안해 죽겠는데 너마저 덥썩 안가겠다고 하면 곤란하다구. 자, 가우리! 알겠으면 어서 일어나. 내 걱정일랑 접어둬. 나 대신 많이 먹고 돌아오는 거야. 알았지? 안부 인사도 대신 해주고...』
『하지만 껄끄러운데. 제르가디스도 마침 자리에 없잖아. 녀석이 있으면 널 부탁하고 잠시 떠나도 안심이겠지만...』
『걱정 뚝. 너 없는 동안 제로스더러 같이 있어달라고 말할게.』

순간 가우리의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다. 엉거주춤 일어서다 말고 다시금 폭싹 주저 앉았다. 아니, 아예 작정하곤 땅바닥에 배 깔고 드러누웠다.
『끙... 안 갈란다!』

대놓고 안 가겠다 발버둥치던 가우리를 쫓아보내는 일은 그래서 어려웠다.

『하하하... 하지만 전 이렇게 잘 하고 있잖아요? 그죠? 리나님. 가우리씨는 뭘 그렇게 못믿겠다고 생 난리를... 부끄럽게스리!』
무릎 걸음으로 리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간 제로스는 그녀의 입으로 술 안주용 고기완자를 슬쩍 들이밀었다. 한 입에 쏙 드세요~ 아~ 옳지! 그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들었다. 소스를 잘 묻혀서, 읏샤. 기교적으로 포크를 돌려 접시 바닥에 깔린 고기 국물을 싹싹 긁어 모았다. 그걸 리나에게 야금야금 다 먹여주었다. 번들거리는 입술은 손가락으로 쓰윽- 간간히 손수건으로 턱을 눌러주기도 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마도사 협회에 올릴 보고서를 쓰느라 잔칫집에도 못가고. 속상하시겠어요. 홧술 생각이 나는 것도 당연하겠네요. 하지만 리나님, 술만 그렇게 계속 드시면 속 버려요. 여기 고기 완자 하나 더. 아~』

그런가? 그럴지도.
리나는 쓰게 웃고 말았다.
보고서, 보고서... 보고서라.
누가 알까. 그제도 쓰고 오늘도 써서 종이는 백지다. 펜촉이 갈라져라 휘갈겨서 종이는 투명했다. 그걸 마차 짐칸으로 하나 가득 실어 나르라지. 목적지도 없이 노새의 등으로 짐을 실어 보내는 거다. 리나는 오른손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펜대에 눌린 자국이 벌겋다. 종이에 스친 살갗이 반질반질 닳았다. 그러나 잉크가 스며든 자국은 없었다. 하얗고... 투명했다.

눈물을 닦자.
다시금 계속된다. 세 번째, 그녀의 거짓말.

『괜찮아, 괜찮아. 이것으로 다 좋은 거야. 실피르도 오랜만에 가우리 얼굴을 보면 기뻐할 거고, 가우리도 실피르가 해주는 음식은 종류를 불문하고 좋아하거든. 만사 해피라는 거지.』
『그래서요?』
『그러서라니, 임마. 두 사람이 좋으니 나도 덩달아 좋은 거지. 공식은 간단하다. 삼각형 ABC의 꼭지각 A, B, C에 대한 변을 각각 a, b, c라 하면, a=b cosC+c cosB, b=c cosA+a cosC, c=a cosB+b cosA 라는 것이지.』
『뭡니까, 그건?』
『간단히 말해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양심은 있다. 리나는 다시는 사일라그 땅을 밟지 않을 것이다. 속죄마저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외면해 버리는 것이 속 편하다. 범인은 반드시 범행 장소에 다시 나타난다고? 그것도 어느 정도다.

나는 죄인.
사일라그에 내 죄가 남아 있다.
리나는 얼른 얼굴을 감쌌다.

『왜 그래요. 새파랗게 질려가지곤. 토할 거 같아요? 리나님?』
제로스는 이크 놀라 포크를 쥔 팔을 접었다. 등을 두둘겨야 하나? 아니다. 그 전에 먼저 준비할 것이 있다. 방바닥에 대고 왈칵 토하게 할 수는 없었다. 판단이 서자 자리에서 부랴부랴 일어섰다. 망토를 벗자. 그리고 그걸 깔개로 삼아서...

『아니. 좀 기다려. 가만있으면 가라앉을 거야. 조금 있다가... 조금...』
호흡을 가라앉혔다. 가슴이 거칠게 방망이질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얹힌 고깃덩이가 식도를 타고 힘겹게 내려갔다.

무거운 납덩이... 천근보다 더 무거운 금속이 심장에 가득 찼다.
그래서 불쾌한 것이리라.
리나는 가슴을 툭툭 쳤다.

『기분이 안 좋아 보입니다. 체한 것 같습니까?』
『설마. 내 강철의 위장을 만만히 보지 말아줘.』
순진하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마족을 그녀는 퀭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제로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이, 예이. 강철의 위장입지요. 알아 모시겠습니다. 자자, 그래도 술은 그만 드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아직 미성년이다 이겁니다. 음주 자체가 범죄인데 한술 더 떠서 취한다는 건 문제 있어요.』
『내 남편도 아니면서 잔소리 하지 마. 듣기 싫어.』
『물론 저는 당신의 남편은 아닙니다. 그래도 난 당신의...』
『시끄러~~!! 네가 나의 뭐가 되는데! 머리 울린단 말이야. 옆에서 떠들지 좀 마.』

머리가 아프댄다.
그러면서 아픈 부위는 말짱 내버려둔채 연신 손바닥으로 엉뚱한 눈가만 눌러댔다.

한편으로는 그를 보내고 싶어한다. 눈부시게 하얀 곳으로 그를 보낸다.
그러나 저 깊은 곳으로는 아무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숨어있다.

이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그게 너무 두려워.

제로스는 기계적으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예, 예... 머리가 아픈 거군요.』
리나의 이론 대로라면 머리가 아파도 사람의 눈에선 짠 기운이 도는 물이 흐른다.

이것이 당신의 거짓말 넷.

『난 그저 머리만 아픈 거라고.』
『예... 당신은 그저 머리만 아픈 겁니다. 그래서 이마가 아니라 눈가를 손으로 덮고 있지요.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눈물도 뚝뚝 흐르고요. 왜냐? 머리가 아프니까.』
『시비 걸지 마. 자꾸 그러면 진짜로 울어 버릴 테다.』
『그거 무섭군요. 가짜로 우는 당신도 충분히 무서운데... 안돼요. 난 감당 못해요.』
『무섭냐. 무서우면 잠시 어깨나 빌려줘.』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래도 어쩔텐가. 지금은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이 최선이다.
신관은 나즈막히 한숨을 쉬었다.
술 취한 여자의 벌어진 입으로 진득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것이 마지막 거짓말.
『푸우... 술 기운 오른다. 졸음이 다 쏟아지네.』

다만 그녀가 오늘도 잠 한숨 이루지 못할 거라는 건 누구도 부정 못할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