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유리관 속에서 잠자는 미녀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고자 찾아왔을 적에 정중히 거절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몸이 제법 편찮으시답니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시는데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며 이렇게 박대하기냐. 튼튼한 돌덩이 몸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아플 리 없다고 한껏 비꼬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감기 한 번 앓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전언을 가지고 달려온 맑은 다갈색 눈동자의 소년은 이래저래 난처하다며 가만히 인상만 찡그릴 뿐이었다.

그래, 말단의 비애라는 것이지... 위에서 그렇다는데 감히 무어라 그럴 것이여. 치잇.
마음만 먹으면 입구를 막아선 이들을 실력으로 밀어젖힌 다음, 안으로 돌진해 들어갈 수도 있었다. 살짝 공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직접 그의 방문을 노크하는 것으로 별다른 소동을 일으키지 않은 채 상기 목적을 이루어도 괜찮을 터였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회는 언제든지 있었고... 주어진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다.
자고로 예의라는 건 중요하다. 싫다는데 억지로 만나자고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지금은 이대로 얌전히 돌아가지요.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전국을 방랑하던 떠돌이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제르가디스가 텐세이라 지방에 위치한 작은 수도원에 들어앉아 칩거에 들어간지 이제 만 3년.
이상할 정도로 그는 움직이질 않았다. 수도원 밖으로 외출하는 적도 없었고, 하다 못해 햇빛을 쬐러 앞마당에 나오는 법도 없었다. 분명 그곳에 있다는 건 확실한데 심각하리만치 얼굴을 밖으로 드러내질 않았다.
뭔가 수상쩍다 싶었다. 지하 3천미터 아래로 땅굴을 파들어간 다음, 이상한 마법 수련에 들어간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쪽에서도 나름대로 더듬이질 이라는 걸 해보았다.
드디어 키메라 분리술이라는 걸 해보는 건가? 클레어 바이블은 찾지 못했다지만 고대 성인들의 지식이라도 전수 받았나?
나는 수하의 부하들 가운데 쓸만한 녀석들 몇을 텐세이라의 수도원으로 위장 잠입까지 시켜보았다. 덕분에 건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수행사제 서넛이 졸지에 희생당했지만 그게 대수냐.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린 수행사제들을 대신해서 새하얀 법복을 몸에 걸친 채 일주일 가량 수도원 곳곳을 이 잡듯 돌아다녔다. 그리고 나에게로 돌아와 허심탄회하게 보고 하길,
《진지하게 묻겠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뭘 알아내야 하는 건가요? 수신관님.》
이라 하였다... 젠장.

예전부터 친분을 쌓아오던 신족들이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야말로 얼굴 좀 보자며 잠시 시간을 쪼개어 들린 것에 불과했다. 차 한 잔 마시고는 그걸로 끝. 우리들이 주시할 만한 사건이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뉘앙스는 어디에서고 느낄 수 없었다. 미르가지아가 실수로 진귀한 골동품 도자기를 깨어서 대판 소동이 났던 것을 빼면 왔다가 갔다는 흔적조차 찾아내기 힘들 지경이었다. (문제의 도자기는 리나 인버스가 피리아로부터 구입한 물건이었다. 그 가치보다는 추억이 소중한지라 미르가지아는 드래곤 로드의 신분이고 뭐고 그만 된통 혼 났다...)

신족 외의 손님은 또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세일룬의 막내 공주가 책 보따리를 잔뜩 껴안고 수도원의 문을 두둘기곤 하였다.
막내라고 해도 왕족이다. 접대를 소홀하게 할 수는 없었다. 양이나 치고 돼지나 잡던 시골뜨기 사제들은「왕실 법도 입문」책을 들고 우아하게 허리 굽혀 절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여 몸에 익혀야만 했다. 연습은 은밀하게 화장실에서, 아무도 없는 뒤뜰에서, 똥 냄새 지독한 외양간에서 진행됐다. 파스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파랗게 질린 사제들이 허공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는 이상한 광경은 세간의 화젯거리로 부각되었지만... 하여간에 공주마마는 당차게도 수도원 문짝을 통통 노크했다.

사실 수도원 입장에선 공주의 방문이 매우 귀찮았다. 빗자루질에, 걸레질, 예의범절 나부렁에 허리 휘는 잡무가 파도처럼 닥쳤음이다. 행여라도 공주의 마음이 상하는 일 없도록 단체로 이발도 했다. 목간통에 물 받아놓고 염소 냄새 진동하는 겨드랑이도 닦았다. 사제들의 한숨은 하늘을 찔러댔다.
그러나 과거의 인연을 존중하여, 제르가디스는 기꺼이 세일룬 공주의 과외 선생님 역할을 허락한 모양이었다. 강의는 지하 깊숙이 어딘가에 있는 그만의 방에서 약 2시간 길이로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무척이나 어려웠던 것 같다. 나는 세일룬의 막내 공주가 자괴감에 못이겨 엉엉 울어대면서「현대 철학」이니 하는 골치 사나운 전문 서적들의 낱장을 꾸기꾸기 구겨버리는 모습도 종종 보았다.「그래, 내 머린 돌이다앗!!」이라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는 것도 꽤나 여러 번... 그러면서도 그녀는 정기적으로 수도원을 방문하는 아주 귀한 손님이었다. (장하다, 세일룬!)

그러든 말든.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그는 저 시커먼 쥐둥지 속에 처박혀 무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들의 방랑벽은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다. 아울러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그는 여행하는 걸 그만두었다. 그 대신 음습한 지하로 기어들어갔다. 바람을 쐬러 나오지도 않는다. 식사도 방안에 틀어박혀서 혼자서 따로 한다. 도서관에도 가지 않으며, 기도를 하러 회랑으로 나오는 법도 없다. 잔 심부름을 하는 소년이 하나 붙어서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을 열심히 주워 나른다. 그는 독방에 감금당한 죄수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궁금해 미치겠다. 도대체 저 인간이 왜 저런 다냐... 나는 불안했다.

『안녕, 또 왔어요. 청현자님은 안녕하신가요?』
이번에는 누가 뭐래도 직접 얼굴 좀 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는 얼굴 한 번 보는 것으로 만사가 설명되어질 수도 있다. 표정만 봐도... 사람은 눈빛만으로도 꽤나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주곤 한다.

『어라. 안녕하세요, 수수께끼의 사제님.』
제르가디스의 수발을 들곤 하던 어린 수행사제 하나가 쪼로록 달려나왔다.
『하하하, 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요?』
『그럼요∼』
덩그마니 떨어진 외진 곳에서 앞뒤 꽉 막힌 답답한 노인네들만 상대하며 사는 어린애에겐 수상한 손님마저 반가운 법. 겨우 몇 번 얼굴 본 게 전부이건만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사탕 하나 달라며 달겨드는 코흘리개처럼 아이의 얼굴은 밝았다. 마치 헤어졌던 친구를 다시 만났다는 투다. 때마침 정원에 떨어진 낙엽을 청소하던 꼬맹이는 자기 키 만한 커다란 빗자루를 두어번 땅바닥으로 탁탁 내리쳤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창을 쥐고 우뚝 선 청년 기사처럼 씩- 웃었다.

『오늘도 우리 현자님 만나시러 오신 거예요?』
『예, 그렇습니다만.』
『현자님은 주무세요. 코- 하고 주무시는데요.』
『아이고오. 설마하니 낮잠 시간?』
『몰라요. 하여간에 피곤하니까 절대 깨우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그러니 어쩌죠?』

으음. 그거 참 해괴하다. 낮잠? 어연 낮잠? 내가 아는 제르가디스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신경이 예민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태어나길 잠이 짧아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정신 없이 골아 떨어진 모습을 본 기억이 여태 없다.「바삭」소리만 내어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발딱 일어난다. 한밤 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나머지 달빛에 의지해 책이나 읽어대는 적도 많았고, 어렵게 잠이 들었어도 작은 인기척에 귀를 쫑긋 세우며 곧바로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 낮잠?
늙었다는 징조일까?
하지만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잠이 줄어든다고 그러질 않던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수행사제 꼬마는 헤헤 웃으며 빗자루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어댔다.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한 채 나름대로의 빗자루질에 들어갔다. 하지만 저래가지고는 먼지를 쓸어 한 곳에 모으는 게 아니라 사방으로 펄펄 흩날리는 꼬락서니다. 힘은 좋은데 요령이 없다. 잎사귀와 흙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났다. 주변은 한층 더 어지러워졌다.
이봐요? 빗자루를 털이개처럼 사용하진 말아줘요. 내가 시범을 보여주지.
나는 짐짓 두 팔을 흔들어 아이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슬프게도 나에겐 청소에 관해서라면 다소의 강박관념이 있다. 난간은 뽀득뽀득 소리를 내어 닦아야 하고 창틀에 손가락을 대어 얼룩이 묻으면 그 즉시 실격∼
아랫 입술을 지긋이 빨아들이고서 인간 아이의 체온이 여전히 남아있는 빗자루를 빼앗아 쥐고 싹싹 비질에 들어갔다. 한쪽 방향으로 일정한 힘을 주고, 각도는 비스듬히 해주는 것이 포인트이다. 옴폭하게 갈리진 틈새에 낀 먼지는 약간 후벼 판다는 기분으로 손목에 탄력을 주어서 빙글 돌리듯이 비질을... 싹싹싹-

작은 모래들과 부숴진 마른 잎들의 파편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있노라니 아이가 환호성을 질러대었다.
『와아, 재주가 좋으시네요, 수수께끼의 사제님. 순식간에 다 쓸었어!!』
『그럼요, 연륜을 무시하면 안 되요. 달리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랍니다.』
정원으로는 햇살이 따스했다. 하얀색의 평평한 돌이 깔린 바닥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평화롭기 그지없다. 근심 걱정 다 털어버리고 세월의 찌꺼기마저 한 순간에 정화되는 듯 하다. 소박하고 진솔하고...
빗자루를 건네어 받은 꼬맹이 수행사제 녀석이 뺨을 붉히며 웃었다. 뭐랄까, 연약한 동물의 수줍은 미소였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련지요!》
63년 전에 만났던 다른 꼬맹이는 나만 보면 훌쩍훌쩍 울기만 했었는데...
나는 짐짓 고개를 들어 새하얀 구름이 둥실둥실 흘러가는 멋진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그 때의 하늘엔 먹색 구름이 짙었었다...
레비테이션 주문으로 시커먼 하늘 위로 올라가고 또 올라가기만 하던 제르가디스의 모습은 작고도 흰 점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하얀 불꽃을 점화해서 쏘아 올리기라도 한 형상이었다. 반은 미쳐서, 반은 맹목적인 집착으로 똘똘 뭉쳐서... 그렇게 날아 올라가서는 뭐가 그리 잘났는지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일부러 마법력을 도로 거두어 들였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삼척 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뭐긴 뭐겠수, 운석 낙하이지. 진귀한 푸른 빛을 띈, 사람 형상을 취한 거대 바위가 지상을 폭격하는 것이외다.

기가 막혀서. 옆에서는 비명 지르지, 누구는 울지...
그걸 잡아내느라고 한바탕 난리법썩을 떨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자고로 자살하는 일에도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만장하신 가운데 공개적으로 널리 민폐를 끼치는 방법으로 죽으려고 하다니, 지금도 용서가 되질 않는다. 그놈의 무거운 돌덩이를 받아내느라고 근처에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졌다는 것과 (민가 다섯 채가 박살났다), 갈비뼈 없는 내 가슴이 두 짝으로 갈래갈래 찢어졌다는 사실에서 그는 비난받아 마땅했다.
청현자 좋아하시네. 비웃음이 절로 나온다.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겠지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그토록 살리려고 애를 쓰는 것이야.
《지독한 마족 녀석.》
때로 어떤 인간은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으로 생생한 지옥을 선사할 수 있다.

나는 먼지 뭍은 손을 탁탁 소리 내어 털어내었다.
『고맙습니다아!!』
『고맙긴... 그런데 제르가디스... 청현자님은 언제나 만나볼 수 있을까요.』
『오.늘.도. 우.리. 현.자.님. 만.나.시.러. 오.신. 거.예.요.? 현.자.님.은. 주.무.세.요. 코. 하.고. 주.무.시.는.데.요.』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다며 그렇게 말했다.
순식간에 내 얼굴빛이 싹 변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어째서 아까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지?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치켜뜨고 있노라니 꼬맹이 수행사제 녀석이 다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아이의 조그마한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하.여.간.에 피.곤.하.니.까. 절.대. 깨.우.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그.러.니. 어.쩌.죠.』

뺨이 파들 떨렸다.
『이런! 정신 조작을 당했어. 마법에 걸려 있었군!!』
이제는 예절이고 나발이고 챙길 이유가 없었다. 깜짝 놀라 허둥대는 인간들을 뒤로 밀어버리고 수도원 본관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달음박질해 나갔다. 문은 안에서 잠겨져 있었지만 강제로 열어 버렸다. 무거운 쇠사슬이 두쪽나면서 찰크당 아래로 떨어졌다.
지하... 지하로 향하는 계단은 어디에... 초조한 마음으로 뛰어나갔다.
원래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공간이동을 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개의치 않고 공간을 접었다. 1각이라도 더 빨리!! 귀신을 보았다며 울부짖는 녀석을 손등으로 가볍게 쳐 벽쪽으로 날려버렸다. 앞길을 가로막는 건 무조건 발로 걷어찼다. 수십 차례 계단을 돌아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가 머물고 있는 방문 앞에 섰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람은 지하에선 살지 않아. 수도원 지하엔 의례 납골당이 있는 법이지.》

숨이 막혔다. 가슴이 답답했다.
언제부터... 그는 이렇게 나를 상대로 대단위 사기극을 벌렸던 걸까.

그는 정성스레 준비된 석관에 누워 차디차진 손을 살며시 깍지끼고 있었다. 키메라 합성술의 부작용으로 여전히 그 외모는 20대 초반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죽어서도 그 시신은 썩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의 일부는 인간인지라 십자형의 깊은 상처가 난 왼쪽 가슴 위로는 검붉은 핏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징하다.
골렘의 피부를 자를 수 있는 검은 그리 흔치 않았을 터인데도.
용케 자살 도구를 찾아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출혈이 막심했었던지 석관 아래로도 붉은 기운이 상당량 베어 있었다. 콧속으로 비릿한 내음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가 흘리고 있는 미소 만큼이나 상당히 흐릿한... 나쁜 놈.

《재생의 기쁨》

분노가 치솟는다. 감히 마족을 등쳐 먹냐... 주제에, 주제에...!!

아주 먼 옛날 일이 생각났다. 드렁드렁 코를 골던 가우리 곁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내리던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심심해서. 모두에겐 비밀이다.」라고 중얼대며 잠꾸러기 아멜리아 몫까지 합쳐서 불침번을 서던... 창백한 달빛 아래에서 그의 가냘픈 손가락이 정신없이 움직이던 게 엇그제 같다. 다음날 아침,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에 새된 비명을 질러대던 가우리도, 깔깔대며 웃던 사랑스런 소녀도... 다 환상이다. 진정 짧은 기억이자 한 여름 밤의 꿈...

《우리, 기다렸다가 다시 만나자》

그들은 믿고 있었다. 아울러 나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도 그를 잡아두었건만...
아차하는 사이에 훌쩍 날아가 버렸다.
결국은... 이렇게.

『하지만 당신은 그들을 다시는 못 만나. 왜냐하면 내가 끝까지 훼방놓을 테니까.』
나는 최대한 잔인하게 웃어주었다.
그가 내 멋진 미소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약간은 섭섭하다.
서둘러야 한다.
제르가디스가 서두른 이유도 리나님이 지상으로 다시 돌아올 때가 되었기 때문...
하지만 당신? 나는 맹세합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나의 것이야.
당신에게 빼앗길 바에야 다시 한 번 더 죄를 짓겠어요.

새파랗게 질린 인간들이 납골당 밖에서 주춤대며 손톱이나 물어뜯었다.
아아, 안심해요. 시체에겐 더 이상의 관심이 없으니까. 시체를 만드는 일이라면 모를까, 숨통 끊어진 돌멩이에겐 흥미 없어요.
나는 차분하게 몸을 빙글 돌려서는 아무일 없었다며 그곳을 빠져 나왔다.

『오늘도 우리 현자님 만나시러 오신 거예요?』
『예, 그렇습니다만.』
『현자님은 주무세요. 코- 하고 주무시는데요. 피곤하니까 절대 깨우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그러니 어쩌죠?』
『괜찮아요, 오래토록 주무시도록 그냥 놔둡시다. 어차피 그의 잠 속엔 평화가 없을 터이니... 이대로 전 돌아가겠어요. 다음 번에 만나면 가만 안 두겠지만.』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 갑자기 메뚜기 생각이 왜 나는 걸까나. 흐핫. 시간차로 이야기를 진행시켰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역시 무리. 하여간에 본문을 가지고 잠깐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요.
우선 신족이 찾아오는 것. 그야말로 묘지 방문.
미르가지아가 도자기를 깨먹고 경을 쳤다고는 하지만 제르가디스에게 직접 혼났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청현자의 물건을 망가뜨렸으니 사제들이 화내는 건 당연.
세일룬의 막내 공주는...? 제르가디스에게 직접 배우고 있다고 누가 그랬남?
아울러 사제들에겐 약간의 기억 조작 마법이 걸려져 있습니다. 그건 세일룬 막내 공주도 마찬가지고요.
제르가디스가 자살한 건 약 1년 반 정도의 전 무렵. 그동안 바깥 사람들은 그가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고 보면 되어요.
이 모든 계획은 제르가디스 혼자서 실행한 것은 아니고... 신족이 개입했다고 생각을 해주시길. 원래 자살한 영혼은 다시 태어날 수 없다지만 여기선 약간 달라요. 심장 부근에 십자형의 상처가 있었다는 걸 기억을 해주시길. 일종의 주술입니다. 자세한 이야긴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