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을 愛로 읽어야 할지, 哀로 읽어야할지는 각자의 판단에...


악몽의 왕의 그림자여 하늘을 가르는 무서운 힘...
얼음같이 차가운 허무의 칼...

흠칫해서 눈을 떴다.
부엉이조차 입을 다물어버린 숲속 한 가운데서 때 아닌 암흑의 주문이 열창되는 중이었다. 높은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 대충 엉덩이를 붙인 채 한가롭게 다리나 흔들던 제로스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실 근위병은「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음악이 연주되면 차렷 자세를 취하여야 함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그 신분이 마족인 자는 무조건적으로 혼돈의 힘에 절대적 경의감을 표시해야 한다.

아니, 아니. 그 이전에...
제로스는 죽어가는 애완 문조를 손에 쥐고 필사적으로 동물 병원을 찾는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라그나 블레이드 주문이 발동하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적? 적이 나타났다? 어디? 어디에?

첫째, 주변으로 수상한 기척은 아무것도 없다. 반경 5Km 안으로 렛셔 데몬 한 마리 없다는 건 고위 마족의 자긍심을 걸고 보증할 수 있다.
첫째, 이 상황에서 리나 인버스가 죽어라 노려보고 있는 대상은 100년 넘은 떡갈나무로, 생육 상태가 대단히 양호했으며, 귀신 붙은 징조는 전혀 없었다는 거다. 나뭇가지에 산림청 직원이 매달아 놓은 노란색 메시지가 선명했다.「산불조심」, 건조기를 맞이하여 산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주의문은 무슨 크리스마스 트리인양 바람에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첫째, 야생동물 수준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내 가우리가 모닥불을 쬐다 반쯤은 졸고 있었다. 저 사내가 완벽하게 긴장을 풀고 있는 걸 봐선 렛셔 데몬은 물론이고 주변으로 산적이나 변질자가 한명도 없다고 봐도 괜찮았다. 칼집을 멀직히 풀어놓은 모양새로 봐서는 졸고 있는 척 하면서 적의 눈을 속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지금은 평화 상태다.

그렇다면 도대체?

눈으로 핏발이 섰다. 굳게 다물린 리나의 어금니 사이로 빠드득 소리가 새어나왔다. 안색은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창백했다. 턱은 덜덜 떨렸다. 이마엔 시퍼렇게 힘줄이 돋았다. 이 모든 것들은 그녀의 자제력과 마력 사용량이 한계를 훌쩍 넘어서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풀 파워로 덤비고 있었다. 훈련 상황 같은게 아니다. 실전이었다.

신들의 영혼조자 베어 버리는 암흑의 검...
『라그나 블레이드~~!!』

검은 빛의 검은 늘 숭고한 파괴미로 충만해 있다. 칼날의 크기는 약 4미터에서 5미터, 상당히 큰 편이다. 그것이 중량감을 지닌 쇳덩어리였다면 똑바로 들고 상대방의 머리를 겨누지도 못했을 거다. 인간의 힘으로는 제어가 잘 되지 않아 만들어진 날의 형태는 말쑥한 편이 못된다. 끝도 없이 방전하며 흔들린다. 때로는 폭발하며 황금빛의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때마다 마법 구현자의 표정은 구둣발로 신나게 얻어터진 비루먹은 개가 되어간다. 당연한 일이다. 이때 빨려 들어가는 마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절단된 상처에서 다량의 혈액이 빠져나가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구토, 오한, 발한, 어지럼증, 이명... 순식간에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오고 가면서 육체는 쇠진한다. 말 그대로 흡혈귀의 키스를 받은 장미꽃이 되어버린다.

『흡!!』

리나는 늘 이런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누군가 파이프를 꽂고 심장 제일 깊숙한 곳으로 자리한 생명의 엑기스를 몇 드럼통씩 뽑아가는 것 같다고...
겉으로는 늘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죽을 맛이라는 얘기다. 마룡왕 가브와 맞붙었을 적엔 마력 폭주 비슷하게 간 적도 있었으니 괜한 엄살 부리는게 아니다. 코와 입으로 시뻘건 피를 한바가지 이상을 토하고 나면 징징거리며 우는 소리조차 못내게 된다.

죽음으로의 한 걸음.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적들에게 최대의 위협인 라그나 블레이드는 주문 발현자에게조차 마찬가지로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1분 40초, 2분 12초, 3분 1초...
리나는 여전히 떡갈나무를 노려보고 있었다. 살기는 더욱 깊어졌다. 반면 칼날은 크게 흔들렸다. 제어력이 무뎌지기 시작했다는 징조 그 첫번째. 주문을 움켜쥔 리나의 손이 바들바들 경련을 일으키며 요동치는게 보였다. 앞으로 길어봤자 1분을 채 못 버틴다.

바로 그때였다.
철썩.
어느 틈엔가 다가온 키메라 소년이 있는 힘을 다해 리나의 뺨을 후려쳤다.

가볍게 때리는 정도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제로스는 한 번 놀랐다.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릴 정도로 힘을 줘서 손을 휘둘렀다. 그 정도라면 눈 앞으로 별이 반짝이는 것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실제로 리나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추측하자면 그 충격은 말의 뒷다리에 걷어차인 것과 거의 비슷했을 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그 천하의 리나 인버스가 그렇게나 힘껏 얻어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건 거의 천지개벽 상황이었다. 어떻게 여자의 얼굴을 때릴 수가 있느냐, 내가 왜 맞아야 하느냐, 네놈이 무슨 종로 바닥의 폭력배라도 되느냐, 기타 등등의 항의는 일절 없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묵묵히 땅만 쳐다봤다. 가볍게 꿀밤 한 대 맞아도 엄살의 눈물을 마구 쏟아내며 왁왁거리던 평소의 모습은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그저 침묵했고, 순응했다.
제로스는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

이 경우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가지다.
맞은 사람에게 다가가거나, 아니면 때린 사람에게 다가가거나.

잠시 생각했다.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왜? 덜레덜레 리나에게 달려가지 않고.』
노골적으로 제로스의 등장이 달갑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보는 제르가디스였다.
『저리로 가. 그냥 내버려 둬.』
그렇다고 신경을 쓸 마족은 아니었다. 뚜렷한 이유 없이 박해받는 것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던가. 제로스는 고개를 가만히 옆으로 기울였다.
『리나님에겐 가우리씨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에겐 아무도 없잖아요.』

당연히 소년은 발끈했다.
그게 무슨 망언이래?
제르가디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로스의 저 말 그대로라면 리나는 가우리에게 위안을 얻고, 제르가디스는 그로부터 위로를 받으면 된다. 다행이 남는 사람 없이 짝이 딱 맞아 떨어지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슬레이어즈 만세란다. 웃기는 소리였다. 이건 넌센스였다. 때린 사람에게 다가가 기운 내라고 하는게 어디 정상이던가. 가해자를 위로한다?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그 가치관은 비뚫어져도 너무 비뚫어져서 납득이 어렵다.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여자를 때렸다. 비난받을 각오는 단단히 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도 이 마족은 손을 내밀어 위로를 해주겠다고 한다. 상자 속에 넣어져 비오는 날에 버려진 강아지 쳐다보듯 하며 허리를 숙이다니, 곤혹스럽다는 단계를 지나 묘한 분노감이 치밀어 올랐다.

어째서?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여? 내가 그렇게나 가엾어?

부르르 주먹을 쥔 소년을 향해 신관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가시돋친 말을 함부로 내뱉으면서 엉뚱하게도 그 가시에 스스로 찔림을 당하더군요. 부메랑을 던져 사슴을 잡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회전하며 돌아오는 부메랑에 가슴을 한방 얻어맞는 격이랄까. 비슷해요.』
『내가 그런 멍청이에 답답이로 보인다는 건가.』
『아니오. 따지고 보자면 그보다 더 형편 없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던진 부메랑에 상처받았다는 것조차 숨기려 하니까요. 그래서 진작에 곪아터진 사람입니다. 당신이란 사람은.』

그렇게까지 정색해서 말하면 반격이 쉽지 않다.
제르가디스는 피곤하다는 투로 두 팔을 휘저었다. 말다툼을 하며 에너지를 낭비하기엔 오늘 밤은 지독하리만치 춥고 스산했다. 그냥 가엾다고 해라. 만사 포기하며 으슥진 자리로 기어 들어가 앉았다.
사람 인기척에 놀란 벌레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분주히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낙엽 두장 깔아놓고 둥지를 틀었다.
하나도 아늑하지 않은, 그래서 마음에 드는...

『최단시간 2분 14초, 최장기록 6분 9초.』
『에?』
제로스는 잠시나마 얼 빠진 표정을 지었다.
시간? 뭔 시간? 지금 밥 먹는 시간을 말하고 있는 건가? 마족은 골똘히 생각에 사로잡혔다.
대량의 음식을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일시에 해치워버리는 것이 그들의 식사 타입이 맞기는 맞다. 그러나 평균적인 식사 시간을 놓고 리나가 라그나 블레이드 주문을 영창했다고 가정하기는 영 어색하다. 물론 지나치게 빨리 밥을 먹는다는 건 건강에 좋지 않을뿐더러 외관상으로도 충분히 혐오스럽다. 제르가디스가 이 점을 지적하고 주의를 주었을 가능성은 있다. 허나「그래, 내가 밥을 빨리 먹는다고 뭐 보태준 거 있냐! 이 웬수야!」이러면서 라그나 블레이드 주문을 휘둘러댄다? 그것도 당사자인 제르가디스가 아닌 떡갈나무를 상대로 씩씩거린다? 이상하다.

그렇다면 다른 각도로 상상을 해보도록 하자.
최단시간 2분, 최장기록 6분... 아항. 손바닥 위로 주먹을 탁 내리쳤다.
발기 지속 시간!
그렇게 따지면 코드가 딱딱 맞는다. 그래가지고는 성적으로 만족을 못했을 것이고, 당연히 리나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운 남편 머리를 쥐어박았다간 심리적 부담으로 인한 후환 - 늘상 풀 죽어 있는 남편의 정력 - 이 더 두렵다. 그러니까 가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떡갈나무에 대고「뒈져버렷!」외친다.
그거 참. 쿼터 엘프에게 비아그라가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의 보고도 없는데... 제로스는 지갑을 꺼내들고 한참을 뒤적거렸다.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구입이 가능한지는 나중에 알아보도록 하고 일단은...

『너도 참 구제불능이다, 제로스. 그 빈곤한 상상력은 어떻게 안되는 거냐.』
『아닌가요.』
『당연하닷!』

여기, 혼돈의 힘을 사용하는 여자가 있다.
어디까지나 최초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 여자가 유일하다.

금빛으로 몸을 휘감은 어둠의 마왕... 흔들리는 혼돈.
유와 무로 일통하는 것.
영원의 뫼비우스.
시간의 지배자이며 세계의 알. 언젠가는 깨어질... 무한이자 유한의 가능성.
그 힘은 신들의 혼마저 타파한다.

『분명 최강이다. 치명타는 아니었으나 마룡왕 가브의 몸을 갈랐기도 했고 엔션트 드래곤의 결계마저도 베어버렸지. 어쩌면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될... 그런 레벨의 힘이다.』
『그건 확실합니다.』
『허나 최단시간 2분 14초, 최장기록 6분 9초. 리나의 마력으로는 그게 한계이다.』

다시 말하자면 실전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소리다. 리나는 곧 죽어도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라그나 블레이드.
최강의 비기.
그러나 정작 위기 상황에선 하등의 쓸모도 없는 필살기였다.

저 앞에서 술 먹고 머리가 돌아버린 코끼리가 달려오고 있다. 총을 들어 조준한다. 신중을 가해서 빵- 그런데 그놈의 코끼리는 민첩하게 몸을 옆으로 굴려 총알을 피해버렸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13미터. 당신은 곧바로 두 번째의 총알을 발사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이냐. 검지손가락을 당겼건만 둔탁한 철걱 소리만 난다. 알고보니 가지고 있던 총은 단 한발의 총알만이 장전되는 종류였다. 으악 비명을 지르지만 너무 늦었다. 코끼리의 눈빛이 번득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대의 시야로 코끼리의 시커먼 발바닥이 빈틈 하나 남기지 않고 꽉 들이차게 될 것이다. 관세음보살.

『마찬가지다. 라그나 블레이드 주문으로 적을 무찌르기 위해선 적이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미리 가정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회는 단 한 번. 실패하면 다음은 없다. 이 마법은 마력을 지나치게 소모시키기 때문에 연거푸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다. 거기다 더 최악인 건 이 주문은 근접 전투에서나 가능하다는 거야. 멀리 있는 적들의 머리 위로 분노의 벼락을 내리는 식이 아니거든. 가까이 달려나가 베어버려야 한다. 위험성이 다분히 높지. 다시 말해 라그나 블레이드가 적의 어깨와 상반신을 베어버리는 동안 상대가 촉수 비슷한 걸 뻗어 이쪽의 머리를 두동강이 낼 확률도 없잖아 있다는 얘기다. 종합하자면...』

실전에서 써먹을 일이 별로 없다는 것. 완벽하게 장식용이라는 거다.

『그러나 그 혼돈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입니다. 당신네들이 입을 모아 칭송한다는 레이 마그너스도 그 힘을 사용하진 않았고요... 비록 실전에선 쓸모가 없을지언정 그 사실이 리나님의 명성을 깎아먹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가지 확실히 하자. 레이 마그너스는 사용을 못했던 것이 아니라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던 거 아닌가? 블러스트 붐 주문 하나로 거대 도시를 일시에 초토화 시켰던 사람이잖아. 라이팅 주문으로 거의 레이저 브레스 수준의 파괴력도 보였고... 그런 마당에 혼돈의 힘까지 써먹을 필요는 없었던게지.』
『그랬답니까?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만서도.』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천년 전에 눈 말짱하게 뜨고 잘만 살아 있었잖아.』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건 맞습니다. 그렇다고 그 인간에 대해 제가 알 안다고는 할 수 없죠. 가까이에서 봤던 것도 아니고요. 이런 격언도 있잖습니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그 격언은 그런 의미가 아닌데... 여하튼 레이 마그너스와 비교하면 되려 이쪽이 더 비참해진다고, 제로스. 리나는 타리스만의 보조 없이는 블러스트 붐 주문을 완창하지 못한다. 그것도 파괴력이 30%도 채 되지 않는 엉성한 주문으로밖에는...』

블러스트 붐 주문은 물론이다. 서쪽 도시로 직경 20m짜리 달을 떨어뜨렸다던 메테오 폴, 천둥 벼락의 수만배 확대판이라는 구우골 플럭스 브론테스, 수천의 부정한 영혼들을 학살한다는 레퀴엠 브레스... 기록만이 현존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 누구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한다. 무리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사용했다는 걸까. 흡사 거인의 발자취를 난쟁이가 따라가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가랑이만 찢어질 뿐, 따라가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려고 한다.

『리나는 그래서 초조한 거야.』

할 수 없을 거라는 가정을 애써 부정했다. 과거에 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이라고 왜 불가능하겠느냐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을 실현 가능케 할 막대한 마력만 손에 거머쥘 수 있다면...
더욱 더 강해질 수 있다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 주장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제로스의 한쪽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살기 위해서?』
『리나의 모든 행동의 근원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모르고 있었나.』

살아야 했다. 반드시 살아 남아야 했다.
앞으로도 피브리죠 같은 놈이 덤벼올 것이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덤벼올 것이다.
살아야 한다. 살아 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그 최초의 발버둥.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렛셔 데몬의 살조각을 먹으려 했다.
마물의 살붙이를 먹으면 마력이 높아진다는 속설을 실험 해본답시고 말이다.
10년간 썩힌 토마토에 생선 덩어리를 합친 것 같은 역겨운 냄새를 참아가며 하얀 이로 적적 씹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적에.
제르가디스는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해서 리나의 머리를 밟아버렸다.

손으로 촉촉히 젖어오는 눈가를 가렸다.
저 깊은 어딘가로부터 굵게 뭉친 실타래가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같이 죽어줄테니까... 혼자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테니까 그러지 말라고 했다.
리나의 반응?
소녀는 분노를 담아 소년에게 이렇게 외쳤다.
하나도 고맙지 않네요, 얼간이씨. 넌 살아. 끝까지 살아. 날 밟고서라도. 그게 옳아.
같이 죽어줄 사람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녀는 같이 살아줄 남자를 원했다.
하나도 고맙지 않다고 했다.
거부당했다.
히스테릭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서 주먹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한심하다...
이 분노는 흡사 애달픈 사랑을 닮아있지 않은가.

제로스는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려 이유도 없이 공격당한 떡갈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달밤에 훈련하는 거였습니까?』
『그래.』
『당신은 적당히 하라고 혼내킨 거고?』
『그거다.』
『뭐야. 우리 마족과 하나가 되면 그런 건 간단한 건데. 너무하네, 리나님.』
『바보. 수영을 잘 하고 싶다고 고등어와 합체를 하는 놈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을까.』
『너무 하십니다. 긍지 높은 마족과 고등어를 같은 레벨로 놓고 말하다니오.』
『그래, 내가 실수했다. 그렇게 말하면 고등어에게 큰 실례가 되겠지.』
『뭐라고요? 하여간 당신이란 인간은!』

그러나 거기서 그들의 대화는 끝났다.
말다툼 자체가 피곤한 밤이라는 건 분명히 존재한다.
제르가디스는 무릎을 높게 세우고 눈물을 삼킨 기나긴 침묵에 들어갔다.
그 옆에서 제로스는 하염없이 별만 세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강해지고 싶어하는 한 소녀를 끝도 없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새벽은 멀었기에 그 상념이 지옥보다 깊어질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