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젓글인《아침업무》를 읽고 난 다음에 연속으로 보셔야 합니다.


미술사 전공 서적을 뒤적거리다보면 간혹가다「드래곤 양식」이라는 항목이 나올 때가 있다. 이걸 본 학생들은 거의 전부 다가 머리를 쥐어뜯는다.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가 약 10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만큼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지레 짐작을 한 탓이다.
하지만 걱정도 팔자다. 그들의 미학을 거론하는 글은 어김없이 짧다. 충분히 질렸다는 어투로 글은 이렇게 적혀져 있곤 하다.

- 쓸데없이 퀭하고 넓적하다

앞에다가「망할」이라는 욕말이 붙으면 딱일 것 같은 뉘앙스.
어딘지 모르게 원망이 담겨져 있는 듯한 평가 단 한줄.
학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이것이 드래곤 양식의 정의다.

『질릴 법도 하지. 내 충분히 이해한다니까. 하여간 드래곤족을 누가 말려...』
인간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들의 미학은「공간낭비」라는 악평에서 헤어나올 재간이 없다. 노동집약적 사회 구조를 환영하여 좁은 곳에 옹기종기 모여 살기를 선호하는 인간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센스를 따라갈 수 없다.
그들이 지은 건물 내부를 걸어본 사람만이 안다. 비능률, 비효율을 넘어 이건 부도덕함의 극치다.
가로 세로 100m 사이즈의 방에 달랑 의자 하나 가져다 놓고 문짝에다「휴게실」이라 문패를 붙여놓는 엽기성! 완전히 미친 짓이다. 피곤한 다리를 접으려고 휴게실의 문을 열었는데 까마득히 먼 100m 저편으로 의자가 보인다. 그것도 방의 한 가운데다 의자를 배치하지 않고 꼭 반대편 벽에 바짝 붙여놓는다. 올테면 와보라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약올라 죽으라는 건지, 뭔지...
결국 앉기를 포기하고 열었던 문을 도로 쾅 소리가 나도록 닫아버린다.
여간한 마을 하나 사이즈의 사원 속에는 이런 요지경 방이 하나 둘이 아니다.

리나 인버스는 아까부터 저려오는 장딴지 근육의 통증을 애써 무시해 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헛된 바램이다. 저릿거리는 통증은 논두렁을 타고 번지는 낮은 불길인양 서서히 허리 위로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느린 속도였으나 동시에 꾸준한 속도였다.
신경줄이 구겨진다는 느낌이 아마 이런 것이리라. 돌돌 말아서 발로 밟고, 다시금 짓이겨 주름을 만들었다. 원래대로는 다시는 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당연한 결과로 걷는 동작이 눈에 띄게 어색해졌다. 옆에서 보면 양반님 팔자 걸음, 앞에서 보면 펭귄 걸음, 뒤에서 보면 발톱을 다친 나머지 고통에 겨워 절룩거리는 프리마돈나였다.

뭐, 불가항력적이지 않을까.
화장실 한번 다녀오는데 1시간 반 소요, 아래층으로 사람 부르러 가는데 3시간, 목이 말라 물 마시러 왔다갔다 하는데 2시간 40분... 그것도 총총걸음으로다. 화장실 다녀왔을 적엔 그나마 정신 없이 뛰어서 갔다와서 그렇다.

완전히 정신 나간 짓이다. 그간 계단을 얼마만큼 오르락내리락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있다. 걷는 일엔 도가 튼 몸이라지만 이래서야 누가 견디느냔 말이다.
리나는 두 팔을 벌리고「악」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통제불능으로 감정이 붇받치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보다 조금만 덜 야무졌더라면 십중팔구 맨 바닥에 주저앉아 한바탕 목 놓아 울었을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나는 이런 때야말로 울면 더 지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는 것 대신 허공을 향해 종주먹만 쥐어보였다.

터-벅-터-벅.

일명 침묵의 대회랑으로 불리우고 있다. 높이만 5층 건물에 육박한다. 그렇다보니 복도 자체가 일종의 공명관처럼 작용한다. 작은 소리는 여러번 반사되어 크게 울린다.
신발 밑창이 매끄러운 바닥돌을 차는 소리 정도는 심벌즈 두둘기는 굉음에 버금간다. 걷기가 송구스러워질 정도의 음파 확장이다.

그렇다면 여기서「침묵의 대회랑」이라는 명칭이 잘못 지어진거 아니냐고 의심할 법도 하다. 하지만 과거, 대현자 레이 마그너스가 쓴 웃음을 지으며「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그거 참 이름을 멋들어지게도 잘도 지었네」라고 감탄했던 바 그대로다.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작게 헛기침만 해도 그 소리는 쩌렁쩌렁 울린다. 덕분에 움추러든다.
잔머리를 굴렸다고 할까, 이 회랑은 은연중에「네가 내는 소리가 영 시끄러우니 좀 조용히 하라」꾸짖는 듯하다. 그러니 저마다 설설 기어다닐 수밖에.
『이런 미친.』
리나는 평소의 두곱절 이상으로 퉁퉁거리는 자신의 구둣발 소리에 넌더리를 냈다. 그 소음의 강도는 흡사 피로에 곰삭 젖은 제르가디스가 졸린 눈을 비벼가며 여관방 2층으로 올라가는 소리를 연상시켰다. 그만큼 크고... 무거웠다.

『와악, 짜증나~~!!』
홧김에 고함을 질러봤다. 에코는 빵빵하게 공간을 흔들어댔고 덕분에 시대를 초월한 굵은 먼지가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100년은 족히 묵은 듯한 거미 시체도 덩달아 같이...
『켁-』
확실히 이들 드래곤족은 청결이라던가, 위생이라던가, 봄맞이 대청소라던가 하는 것들과는 담을 쌓았다. 수신관 제로스가 보다 보다 못참고 먼지 털이개 잡는 법을 일장 연설했을 정도로 곳곳에 대형 먼지들이 굴러다니고 있는 판국이다. 흙먼지들은 공처럼 한데 뭉쳐서 발로 차기 적당한 크기로 곳곳에 숨어있다. 바닥이 이러한데 천장인들 오죽할까. 큰 바람이라도 부는 날엔 부스스 떨어지는 부산물이 농담이 아닐 거다. 말 그대로 눈송이처럼 날릴 터다.

『빌어먹을! 도대체 왜 이렇게 엉망으로 해놓고 사는 거야?! 거미줄 보면 행복해지기라도 한다는 겨?! 왜 안치우고 사는 겨!! 으아아, 내 머리!』
머리카락 속으로 엉켜들어간 거미 시체 뒷다리를 끄집어내며 리나는 한바탕 울부짖었다. 껍질만 남은 거미는 털의 모양새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리나의 얼굴 위로 극도의 혐오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일손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등 뒤로부터 나타났다.
눈부신 금발머리였다. 키는 대중해서 약 160㎝ 정도? 곱슬머리는 어중간하게 자라나 어깨를 덮었다. 찡그린 인상만 아니라면 커다란 인형을 연상시켰을 외모였다. 특히 눈이 아주 컸다. 매우 동그랗고 파란 눈동자였다.
『에... 또, 그러니까... 당신... 이름이 뭐였더라...』
아주 모르는 얼굴은 아니다. 이파로스라던가 뭐라던가...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보았다. 그의 풀 네임은 기억력 좋은 리나의 머리로도 입력이 불가능할 정도로 길다. 차근 차근 노트에 적으면 열 여섯 글자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 금발의 드래곤은 애시당초 풀 네임 소개를 과감히 생략한 상태다.
「이쪽은 내 보좌관 중 하나로 이파로스 군일세. 그 이름으로 부르기가 뭐하다면 그냥 편하게 보좌관이라고 부르시게나. 자, 인사들 하시게.」
미르가지아는 친절하게 손바닥으로 그를 가리키며 그를 이렇게 소개했더랬다.
「무척이나 유능한 잔.심.부.름.꾼.이지.」
칭찬을 하겠다는 건지, 욕을 하겠다는 건지.

『에... 그러니까... 이파로스씨?』
『예.』
아무튼 유별나게 홍차를 잘 탄다는 이 잔 심부름꾼은 옆구리로 결재판 비슷한 걸 하나 꿰차고 있었다. 두번 접어 말아올린 소맷부리 속으로도 척 보기에 메모지로 보이는 종이가 잔뜩 꽂혀져 있었는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아귀 안으로 구겨진 쪽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하여 전체적인 인상은 아주 바쁘다는 것...
리나는 속으로「덕기덕기 메모지」라는 별명을 즉석에서 붙여주었다.
이파로스는 리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수머리 속에서 말라 비틀어진 거미의 몸뚱아리를 끄집어내 그걸 바닥에 버렸다.
리나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혐오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미 시체 정도는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천년 전에 있었던 항마전쟁 이후부터 저희들의 개체수가 형편 없이 적어졌다는 거... 잘 알고 계시죠?』
상대는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멸종위기라는 설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실제로 그들 드래곤족이 항마전쟁 시기에 제로스로부터 받은 타격이라는 것은 전후무일한 것으로 역사상 그런 학살의 전례가 없었다. 개체수는 절망적이다 싶을 정도로 줄어 버렸다.
그런데 재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엎친데 덮쳤다고 종족번식마저 쉽지 않았다.
드래곤족의 절대적 다수가 수컷으로 태어난다. 수컷 1,000마리 대 한 마리 꼴로 암컷이 태어난다. 다음 세대가 무럭무럭 태어날 환경 자체가 아닌 것이다. 거기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짝짓기에 대해 관심이 적다. 암수가 만나 알을 만드는 일에 무신경하다. 젊은이들은 굳이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 무감동, 무반응... 로맨틱한 사랑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오로지 무대 위에서만 존재한다. 그들은 통나무였다.

『인력 부족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다. 신전 바닥을 쓸고 천장에 붙은 거미줄을 치울 잉여 노동력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게다. 당장 지붕이 무너진다 해도 망치와 공구통을 들고 밖으로 달려나갈 숫자가 형편없이 적은 실정이다. 그런 마당에 청소? 사치다.
오죽하면 드래곤 로드의 보좌관이라는 이가 새까맣게, 아니. 새파랗게 어린 청년일까.

- 잠깐, 잠깐만 기둘려라, 리나 인버스. 단정하긴 이르다고. 새파랗게 어리다고? 정말?

퍼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리나는 순간 실례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먹고 상대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극심한 피로 탓이다. 몸만 솜방망이던가, 머리도 곤죽이었다. 평소라면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삼갔을 것이나 누적된 피로 덕분에 머리가 살짝 맛이 간 상태였다.
흐응... 손가락으로 턱을 괴고 상대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살펴봤다.
겉가죽만 보자면 열 여섯에서 열 여덟. 점수를 후하게 줘도 열 아홉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리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모든 건 속임수다.
원래 인간 형상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을 외견만으로 판단한다는 건 우물에 동전 하나 던져보고 깊이가 얼마인지 가늠해 보자고 덤비는 짓과 비슷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2m 짜리 줄자를 들고 대륙붕 깊이를 재어본답시고 덤비는 꼬락서니다.
항마전쟁의 기억으로 노골적으로 제로스를 향해 불쾌감을 표시하던 미르가지아의 외모는 기껏해야 30대 후반, 확실하게 천 살은 잡수신 노인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용모는 수려하다.
인간의 가치관이나 그 척도와는 계산이 맞지 않는다. 이들 종족은 세월의 찌듬이라는 걸 모르고 살고 있다.

리나의 눈동자 속으로 노골적인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녀는 대단한 실례라는 점을 깨끗하게 망각한 채 선뜻 질문을 던졌다.

『당신, 몇 살이예요?』
- 움찔

선량하게 생긴 드래곤 총각의 이마로 순식간에 숯검댕이 같은 검은 돛이 올라갔다.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는 진실로 충격을 받은 듯한 눈치였다. 수면의 파도가 거칠어졌다. 배는 흔들렸으며, 선창 위로 후두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파로스는 일주일 전에 읽은 책 한권을 떠올렸다. 제목은「알아두면 좋은 상식 - 인간의 풍습」, 그 책의 권말부록편 이해하기 쉬운 지방 사투리... 자잘한 내용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그의 표정은 한층 더 기괴한 빛깔로 변색되었다.

당신과 함께 (찌인~한) 밤을 보내고 싶어요.
이 말을 경도 지방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투리로 표현한다.
니 몇 살이고.
자, 정확한 발음으로 다시 한번 들어보시죠. 니 몇 살이고.

이제 그는 금방에라도 악 소리를 지를 것처럼 뺨을 굳혔다. 어디 그뿐이던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런 대 재앙이라니.
그래, 내가 오죽 잘 생겼어? 너무 눈부셔서 거울을 보기 힘들 정도지. 그러니 이런 건 하나도 이상한 일 아니야. 이파로스는 혼잣말했다. 모든게 내 죄다. 완벽한 미모로 인간의 처자를 홀리다니... 죄가 무겁다.

하지만 아니된다. 그는 힘차게 도리질했다. 인간과 드래곤과의 이종혼은 고대적부터 터부시 되어왔다. 인간 여자에게 알을 낳게 해서는 안된다. 인간 여자에게 반했다고 함부로 청혼하는 건 곤란하다. 인간 여자가 노골적으로 잠자리를 요구해왔다 한들 그것에 쉽게 응해서도 안된다. 이종혼은 대다수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어떻게 한다... 그는 진정으로 곤란함을 느꼈다. 하필이면 상대는 리나 인버스, 희대의 대 마도사로 마족 측에서조차 눈독을 들이고 있는 실력가다.
대놓고 거절해서 그런 무시무시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 좋을 것도 없겠고... (드래곤 슬레이브는 곤란하다)
빙빙 돌려서 완만하게 거절하는게 상책일 것이다.
이파로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순간 리나는 뜨억하는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손톱을 입에 물고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의 이파로스의 모습은 생일이 언제냐고 물어봤을 적에 짐짓 이쪽을 무시한 채 신던 양말을 벗어 공처럼 돌돌 마는 일에 열중하던 가우리와 너무나 흡사했다.

- 생각을 한참 해봐야 나이를 셀 수 있다는 건 쿼터 엘프에게만 해당되는 거 아니던가?

아무래도 기존 관념을 벗어버릴 때가 되었나 보다. 쿼터 엘프 뿐만이 아니라 드래곤 족들도 자신들 나이엔 까막눈이다?
하긴, 곰곰이 따져보니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저렇게 젊어 보여도 한 400살이나 600살은 가뿐하게 먹었을 터, 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댔다. 인간이라면 신선이 되어 장기말이나 가지고 놀았을 나이다. 충분히 헷갈릴 법 하다. 동전 500개를 주고 하나 둘 세어보라고 하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머리가 아파질 거다. 동전과 마찬가지로 나이 500도 세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터...

『잡담은 이 정도에서 그만하지요, 이파로스 씨. 아무튼 절 찾으신 거 맞죠?』
『예.』
정말 다행이라면서, 그러니까 곤란한 화제에서 벗어나 대단히 기쁘다는 내색을 감추지도 않은 채 이파로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미르가지아님의 전언입니다. 당신께 이걸 전해드리라 하시더군요. 받아주세요.』
『엑?!』
『이 결재판 속의 파란 봉투는 장녹색의 방으로 가져가시면 되고요, 다음으로는 이 메세지를 욜세파리거나리히스틴 님에게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욜세파리거나리히스틴 님이 즉석에서 답장을 하나 써주실터인데 그걸 다시 미르가지아님에게 가지고 오시면...』
『스톱, 스톱.』
『장녹색의 방이 어디인지 잘 모르시겠죠? 찾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으실 겝니다. 앞으로 500m를 쭉 걸어가신 뒤에 옆으로 보면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거든요? 그 계단을 한 160개 정도 밟고 올라가면 옆 건물로 옮겨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나오는데, 그걸 지나 다시 2km를 걸어가면 아래로 내려가는 나선형의 통로가 나와...』
『이봐요. 스톱이라고 그랬잖아요!!』
『죄송하지만 아직 설명 다 못드렸어요. 나선형의 통로를 지나가면 중앙 복도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왼편으로 돌지 말고 반드시 오른쪽으로 돌아야...』
『제발 그만 하라니까! 거기서 더 들어가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멀진 않아요. 여하간 오른쪽으로 돌면 이번엔 올라가는 계단이 나와서...』
『말도 안돼! 또 계단?!』
『3층까지 쭉- 올라가세요. 한 층 올라가는데 계단이 100개밖에 안되요. 금방 올라가실 수 있어요.』
혈색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금방? 농담이겠지. 그 전에 이미 다리가 떨어져 나갈 거다.

『안색이 나쁘군요. 어딜 어떻게 찾아가는지 잘 기억 못할 거 같아요? 그럼 지도라도 하나 만들어서 드릴까요?』
『아하... 아하하하... 지도...』
건물 내부에서 돌아다니는데 웬 지도?
리나는 기운 없다는 식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드래곤족들은 여차하면 공간 이동법으로 자리를 옮겨다닌다. 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선 공간 이동법을 흉내내기 어렵다. 혼돈의 힘을 사용할 줄 아는 대 마법사라고 해도 그렇다. 공간과 공간을 넘나들 때 실수로 몸이 반으로 잘릴 수도 있을 뿐더러, 본인의 정신 세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때문에 순간이동 마법은 물건을 옮길 적에나 사용한다.
말이나 개 같은 동물을 가지고 실험했을 적에 그 성공 여부는 딱 절반.
인간의 힘으로는 공간을 뒤트는 건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레이윙으로 날아갈까?
아서라. 어쩌다 기둥이라도 튀어나오는 날엔 처참하게 부딪쳐 그 즉시 황천행이다.

『하여간 저로서는 다행입니다.』
눈치도 없이 이파로스는 해맑게 웃었다.
『인버스씨가 자진해서 저희 업무를 공.짜.로. 도와주시겠다 했을 적에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하여간 보시다시피 손이 부족해서 말이죠.』
『...』
『참~ 인버스 씨가 무너뜨린 저희들 신전 일이라면 걱정 안하셔도 될 거라고 로드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뒷 마무리는 알아서 처리해 드릴 겁니다. 그 대신... 앞으로 사흘 간 저를 도와 서류 정리 일을 더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 사흘입니까.』
『괜찮아요, 괜찮아.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요. 하하하.』

어렵진 않죠, 하지만 가뜩이나 짧은 제 다리가 찢어집니다.

건축학 서적을 뒤적거리다보면 간혹가다「드래곤 양식」이라는 항목이 나올 때가 있다.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가 약 10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만큼 복잡한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지레 짐작을 하기 쉽다.
하지만 당신은 곧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그들의 건축 양식을 거론하는 글은 어김없이 짧다. 충분히 질렸다는 어투로 글은 이렇게 적혀져 있곤 하다.

- 돌아다니다 죽기 딱이다

앞에다가「망할」이라는 욕말이 붙으면 딱일 것 같은 뉘앙스.
진득진득한 저주가 담겨져 있는 듯한 평가 단 한줄.
학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이것이 드래곤 양식의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