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딩에서 짐작가셨겠지만 길이가 제법 심각합니다. 하지만 일부러 글을 토막내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이 글은 한번에 읽어내려가야 합니다.
내용도 칙칙... 이래서는 흡사 장마를 기념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미리 주의를 드렸으니 내키는 분만 읽기를 시도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설정이 칸자카 하지메씨의 슬레이어즈 답지는 않습니다. 제 팬픽션을 꾸준히 읽어주신 분들은《아, 이거!》하실 수 있지만, 처음 접하신 분이라면 먼저 이곳에서 빠져나가《수은의 공주》,《피빛의 월광》,《악당 3인방 part 2》같은 초기 단편을 찾아서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 복제 레죠가 즈나위, 제르가디스가 블루스타스가 됩니다.


『리나님.』
『응.』
『일이 있어 들려야 할 곳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장소도 그리 멀지 않으니 함께 가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즉시 리나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너, 쥐약이라도 먹었냐」식의 눈빛을 하고 제로스를 쳐다보았다.
애시당초 데이트 신청이었다면「어디 시원한데 가서 띵까띵까 합시당~♡」라고 말했을 터, 이런 식의 제의는 처음이었다.

그들이 불쾌하면서도 끈덕진 인연을 맺은지도 시일이 제법 되었다. 그동안 리나는 이 수수께끼 신관에 대해 한가지 확실하게 알게 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솜털보다 가벼운 엉덩이를 가진 주제에 그 입은 납덩이 저리가라로 무겁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리나는 그가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심각한 신체적 무게 불균형으로 인하야 몸이 거꾸로 뒤집힐 거라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내기를 해도 좋아.
침몰한 여객선 꼬락서니로 다리가 둥둥 떠오르고 머리가 가라앉을 걸.

그런 농담 아닌 농담을 입밖에 내면서 리나는 전혀 웃지를 않았는데, 실제로 제로스의 입은 뻘 속으로 푹 가라앉을 만큼의 심각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비밀입니다.

요컨데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일은 극히 드믈었다.
의식적으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건지,「마족과 인간」라는 선을 딱 그어놓고 서로의 영역을 철저하게 격리시키는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부여받은 임무라던가 상부로부터 하달받은 지시사항 같은 것들을 리나가 행여라도 알아차리는 일 없도록 조용히 차단했다. 우스토리나의 대현자를 참살하고 돌아와서도 돼지 꼬리는 왜 용수철 모양으로 돌돌 말려있는지 아느냐 태연하게 농담을 꺼내며 웃었던 그다. 632년이라는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던 요테의 도서관을 한순간에 화마의 제물로 던져놓고도 리나 옆에선 차분히 코코아나 마셨다.
그런 고로 온실 밖은 폭풍이었어도 온실 안 화초엔 피 한방울 묻는 법 없었다.

일은 일인 겁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까닭은 없죠. 알게 하고픈 생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룰이 깨졌다. 같이 가보자 말을 꺼내다니, 내일은 분명 서쪽에서 해가 뜬다.
리나는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대고는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별 일이네.』
『별 일이라뇨. 별도 일을 합니까? 별은 하늘에만 떠있으면 되지, 팔 걷어붙이고 해야 할 일 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요.』
『울라, 이 녀석 좀 봐라. 최근에 미르가지아님을 만나고 왔어? 드래곤 족 농담이나 따먹다니, 화 난다.』

말로는 화가 난다고 했지만 정작 리나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저런 식의 농담이 나왔다는 건 분위기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이야기. 물론 마족이 심각해지는 수준이라는 건 인간의 심각해지는 수준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긴 하다만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제로스의 심각한 농담에 죽을 뻔한 적도 있음이다)
에라 모르겠다~♡ 언제는 앞 뒤 따지고 덤벼들었나. 호기심 하나만으로도 빙산 조각이 설설 돌아다니는 얼음 물에 훌쩍 뛰어들고 보는 그녀다. 리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주지, 뭐. 그게 뭐 대수냐? 대신 밥 값은 네가 쏜다.』
『에엑- 너무해! 제 주머니 사정이 어떻다라는 건 리나님도 잘 알고 있잖아요!』
『숙녀를 꼬시면서 가벼운 지갑을 들고 나왔단 말이야? 어머머, 넌 예의도 자존심도 없구나.』
『저기 말입니다. 한 가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갑시다. 모름지기 숙녀라면 한순간에 남의 재정 상태를 파산 직전에 이르게끔 할 정도의 폭식은 하지 않습...』
『화이어~? (한번 맞아볼테냐?)』
『아하하하...;; 걱정일랑 하지 마세요.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아하하. 숙녀 만세.』

제로스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졌다. 이것으로 당장 내일 먹을 곡식을 걱정하게 되었다. 지난 천년간 판공비 인상이라는게 한번도 없었는고로 처절할 정도의 절약과 근검정신으로 근근히 살아남았던 그에게「리나 인버스의 밥 값을 쏜다」라는 건 사실상 무리수에 가까웠다. 사이언인만 밥을 잘 먹던가. 리나의 밥통 크기는 외계인을 후리고도 남는다. 천하제일 무술대회에서 힙겹게 우승하고 거머쥔 거금을 단 한번의 식사 대금으로 날린 무천도사의 한숨이라는 건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로스는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지 않았다.
지갑이 텅텅 비어도 좋다. 보아라, 저 탁월한 반응을. 꿈속에서 상상하며 좋아라 기대했던 바 그대로가 아니던가.
제로스는 남몰래 뒤돌아서서 만족감 100퍼센트의 미소를 지었다.

『끄아아악~~~!! 히익, 히익!!』
저것은 의무적으로 질러대는 비명이 아니다. 리나는 진저리를 치다 못해 발버둥쳤다. 흡사 삐그덕대는 마룻바닥을 딛고, 팔을 뻗어 거미줄 투성이의 창문을 열자마자, 펄럭이는 커튼자락 틈으로 시퍼렇게 색이 죽은 어린아이의 얼굴과 정면으로 떠억 마주쳤다는 식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일개 부대의 괄태충과 마주쳤다. 징그럽고, 끔찍하고, 혐오스럽고, 너무나도 무섭다. 음습한 괴성이 들려오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귀부터 틀어막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눈도 감았다. 양 팔을 감싸안고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 난 안들려, 난 안봤어, 난 모르는 일이야, 나에게 말도 걸지 마.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저 현실에서 죽어라 도피하고 싶다는 얘기다.

『얼레. 리나? 얘는 도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거야?』
가우리는 머리를 긁어대며 난처하다는 식의 표정을 감추지도 못했다. 그의 머리로는 리나의 저 태도는 이해 불가능이었다. 제로스가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평범한 마을에, 평범한 집에, 평범한 텃밭에, 평범한 아저씨가 있는 볼품 없는 장소였을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걸까.
척 봐서 굴뚝 위로「문제 없음」이란 연기가 착실하게 올라오고 있건만?

혹시나 놓치는 구석이 있나 싶어 다시 보고 또 쳐다봤다. 마을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다. 파란 기와를 얹은 이층 집이었다. 집은 약간 낡은 편이라서 매서운 폭풍이 불거나 큰 눈이 내리면 걱정거리를 만들 것 같다. 덧문은 이가 맞지 않았고 벽에는 나무 판자로 대충 땜빵한 흔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한 10년은 너끈히 버티고도 남겠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은 벌레 먹은 흔적도 없었다. 굵고 튼튼하다. 기둥만 건실하다면야 지붕에 구멍이 뚫려도 집은 살아 남는다.
전반적으로... 이상 없음.

마당은 넓은 편이었다. 아니, 마당이라고 하기엔 좀 뭐하고 밭이라고 하면 맞겠다. 서른 평 정도 넓이의 밭에는 이름도 모를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야채 종류는 아니었다. 화초? 글쎄... 관상초라고 하기엔 너무 지저분하다. 잡다스런 모양은 잡초처럼 보이고도 있다. 종류도 가지가지고 자라난 길이도 제멋대로다.
그렇다고 그게 쑥대밭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딱 꼬집어 이거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풀들 사이로는 묘한 질서감이 자리를 잡고 있다. 혼돈 속에 조화라고 할까, 바람결에 씨가 날아와 아무렇게나 자라난게 아니다. 기계적으로 손질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흐드러지게 사방으로 뻗어나간 씩씩한 잎사귀들은 분명 사람의 손을 탔다. 식물이라는 건 가만히 냅두면 그야말로 오히려 시들어 버린다. 질투심 많고 경쟁력 강한 그들은 한줌의 햇빛을 위해 옆에 선 어린 싹을 목졸라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물어뜯는 뿌리, 감아죄는 덩굴, 서로를 할퀴는 잎사귀... 사람이 교통 정리를 해주지 않으면 서로를 미워한 나머지 필연적으로 상처를 입게 된다. 모두가 건강하기 위해선 강력한 재판관, 내지는 정에 휩쓸리지 않는 엄정한 중재자가 필요하다.

가우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밭 한가운데를 쳐다봤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 사이로 그들만의 재판관이 정원 도구로 물을 뿌리며 지나다니고 있다.
나이는 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어깨는 넓은 편. 키도 훤칠하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빨간 장화를 신었으며 작업용 에이프런을 가슴에 둘렀다. 바깥 일을 자주 하지 않는 편인지 피부는 많이 하앴다. 콧잔등을 가릴 정도로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밭 일에 한창 열중이다. 일이 고된지 등짝이 땀으로 푹 젖어들었다.

『아는 남자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가우리는 그렇게 질문했다.
그 순간 리나는 멍- 한 표정으로 자신의 멍청한 파트너를 쳐다봤다. 그렇게 질문할 줄 알았다는 투였다. 동시에 어떻게 그런 식으로 물어볼 수 있느냐는 힐난의 빛이 섞여 있었다.

『저 사람... 누군지 모르겠어? 기억 안나? 가우리.』
『글쎄... 딱히 이 사람이다 싶은 건 없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던가?』
『어이구.』

리나는 머리가 아프다면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동시에 실성한 사람인양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난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어. 가우리가 해파리 사촌이라는게 비단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잖아? 제르가디스의 이름 다섯 글자를 외우는데 꼬박 다섯 달이 걸렸더랬지. 매번 제르디가스, 그것도 아니면 젤리가스라고 말해서 나마저 헷갈리는 사태가 벌어졌었잖아. 어디 그뿐이야? 자기 생일이 몇월 몇일인지도 몰라, 자기 고향이 어딘지도 몰라... 출신지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동쪽 방향을 가리키면서 막연하게「저기」라고 대꾸하곤 하지.
이러니 기대하는 내가 바보라니까. 아멜리아가 쌀집 아가씨가 아니라 공주였느냐며 눈 똑바로 뜨고 깜짝 놀라기도 하는데 하물며 지금에와서 무슨... 이런 반응은 당연해. 그러니까 그렇게 실망할 것 없어, 리나 인버스...

그렇게 쓴 눈물을 목구멍 뒤로 삼킨 뒤 가까스로 기분을 바꿨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리나는 기분을 바꿨다. 사실 가우리가「내가 아는 사람이란 말이야?」라고 말할 법한 까닭이 하나 있다. 눈썰미 좋기로 유명한 리나도 아주 잠깐 동안은 저 남자의 얼굴을 정확히 못 알아봤다.
왜냐고?
그들이 기억하는 얼굴과 지금의 저 사내의 얼굴은 아주 똑같진 않다. 성형 수술로 콧날을 세웠다거나, 눈썹을 문신했다거나, 쌍꺼풀을 만든 건 아니고... 그게...

시간에게 잡아 먹혔다.

『50대 나이에 육박한 나이 먹은 적법사 레죠라. 기절초풍할 노릇이군, 그래.』
이쯤해서 리나는 제로스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말 그대로 물어볼 것이 산더미였다.
그 맹렬하고도 차가운 시선 - 혹자는 굶어죽은 귀신이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세트를 발견한 눈초리라고도 한다 - 을 온 몸으로 용감히 되받아치며, 우리의 마족 군은 한가롭게 어깨를 들썩였다.

『저라고 뭘 알겠습니까. 제 주머니도 텅 비었답니다.』
『너! 그거 허풍이지!』
『이런, 이런... 우리 달링이 날 안 믿어주네. 섭섭하게스리.』
『거짓말 하지 마! 하나도 모른다면서 날 이리로 끌고 와?! 그런 수상한 짓을 네가 할 리가 있냐.』
『수상한 짓을 저질러 죄송하네요. 하지만 저도 리나님과 그리 다르지 않답니다. 아는게 없다니까요. 자~ 흥분하면 미워요~ 그러지 말고 직접 가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어봅시다.』

제로스는 싱긋 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해줄 터이니 빨리 저리로 가보자는 거였다.
신사 분의 제안은 썩 나쁘진 않았다. 그렇다고 리나 입장에서 보자면 내어민 그의 손을 덥썩 잡을 수는 없었다.
사교계에 데뷔하는 아가씨처럼 손 잡고 앞으로 나아가서 뭘 하겠다는 건가.
그녀의 표정이 난해한 수학 공식처럼 복잡해졌다. 당연하지 않은가. 적법사 레죠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뒤돌아 생각해보면 이건 등줄기가 서늘해지다 못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이다.

적법사 레죠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유일무이한 소원은 자신의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필사적으로 백마법을 섭렵했고, 그것으로도 일이 잘 풀리지 않자 흑마법에까지 손을 댔다. 소환한 마족을 흡사 종처럼 부려가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는《빌.어.먹.을》시각 장애인이었다.

당신들이 내 심정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보지 못하는 내 절망을 과연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최후의 수단이었다고 한다. 큰 도박이었다. 자칫하다간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레죠는 상관 안했다.
그는 막대한 마력을 품은 현자의 돌을 찾고 있었다. 그 돌로 전설의 마왕을 부활시키고, 그 댓가로 자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겠다고 했다.
그거 참.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대상이 김첨지댁 정화수 바위라면 오죽 좋겠느냐만은... 그 상대가 탑의 마왕인 이상 세계 멸망 임박이었다. 그것은 바로 천년 전에 사라진 마왕 샤브라니구드의 일곱 조각 중 하나...《질투》였다.

거기다 더 고약한 문제가 겹쳤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놈의 마왕이라는건 다른 장소도 아닌 레죠의 떠지지 않는 두 눈 속에 숨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순식간에 대 현자라고까지 칭송받았던 사내는 몰락했다. 남자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졌다가 마법진 안에서 다시 재조립되었다.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그것이 끝이었다. 레죠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대신 붉고도 차가운 눈을 가진 마왕이 다리를 벌리고 서서 가엾고도 버러지 같은 인간을 냉소적으로 내려다보게 되었다.

으윽. 생각만 해도 위가 따끔거리며 아파왔다.

하필이면 상대가 샤브라니구드 본인이었단 말이야.
샤브라니구드가 누구냐고, 바로 마족들의 아버지잖아! 어떻게 해!

그 무시무시한 상대를 상대로 허무의 칼날을 들이댄 간덩이 분 인간 계집이 이곳에 있다. 마족인 제로스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결코 유쾌, 상쾌, 통쾌 스토리가 아니다. 금기시 된 금빛의 마왕의 힘으로 샤브라니구드를 눌러버렸다. 문제의 인간 계집은 천년만에 애써 부활한 마왕을 한순간에 도로아미타불로 만들어버렸다. 물거품처럼 사라진 마족의 영광이여...
그것이 적법사 레죠의 최후, 다시는 기억하기도 싫은 이야기.
리나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
기억하기 싫다고 해도 그놈의 적법사랑 비슷하게 생긴 인간이 떠억~ 하고 나타난 마당엔 아무래도 엣날 생각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거기다 제로스가 옆에서 웃고 있다.

골치 아프다고, 이런 건! 우와악!

외면하고 싶다... 본능은 속삭였다.
차라리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이대로 돌아가는 편이... 정신 건강상 이롭다.

『뭘 꾸물거려요. 냉큼 이리 오세요.』
순간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제로스가 뒤에서 떠다 민 탓이다.
『야! 제로스! 놀랐잖어. 갑자기 그러지 말라고!』
『자, 빨리요, 리나님. 저 남자가 텃 밭에 물 주기를 끝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기다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
그러든 말든 제로스는 막무가내로 리나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맛선을 보라는 것도 아니고, 예방 주사를 맞으러 가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마음의 준비가 왜 필요하우?』
『필요해. 내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거야. 아무튼 좀 기다리라니까~!!』
완강하게 반항했다. 어쨌든 풀장에 뛰어들기 전엔 준비 운동부터 하는 거라고 전문가들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를 예방하기 위해선 준비 운동이 댓길이다. 리나는 필사적으로 심호흡을 해봤다. 두 팔도 이리저리 흔들어봤다. 시험 삼아 두 다리를 오무렸다 폈다 해봤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자 제자리 뛰기라는 것도 해봤다. 헛둘, 헛둘.

『여차하면 뒤돌아 달아나려고요?』
웃긴다면서 제로스가 한마디 툭 던졌다.
빨간 머리카락의 마도사는 눈에 띄게 말을 더듬거렸다.
『서, 설마. 내, 내가 그, 그렇게 쪽 팔리는 지, 짓을 하겠냐.』
『쯧쯧... 리나님. 거짓말이라는 건 남이 눈치 채지 못하게끔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누굴 속이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뒤, 들입다 리나의 등을 떠다밀었다.
『자, 갑시다! 빨랑빨랑 가자고요.』
『밀지마! 가면 되잖아, 가면!』
완전히 코너로 몰렸다. 하는 수 없었다. 리나는 맑은 콧물을 줄줄 흘려가며 남의 집 현관 위로 올라가 섰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막상 도착해서 보니 집에 초인종이 안 달려 있다.
『크아아악!!』
마치 찾아올 사람 자체가 없다는 식으로 집의 분위기는 한껏 냉랭했다. 이런 황당한 경우를 봤나~
헤슥해진 모습을 감추지도 못한 채 곳곳을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을 낼 만한 도구를 찾아봤다. 그냥 터프하게 맨 주먹으로 문짝을 두들겨? 하지만 그래가지고는 너무 무식한 방법이었다. 경찰도 아니고 빚 독촉하러 온 해결사도 아닌데 주먹으로 쾅쾅? 넌 양심도 없냐. 예의는 물 말아 먹었냐? 절대로 그렇게는 못한다.
콜록- 하고 헛기침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가우리가 제안했다. 나쁘진 않았다. 이리 오시오~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헛기침을 했고, 여보세요~ 하고 소리도 질렀다.
빌어먹을... 반응 전무. 조용했다.

이쯤 되자 제로스는 저 혼자서 슬그머니 건물 옆으로 돌아가 집 안팍의 분위기를 살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하다. 마치 애시당초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집처럼 말이다. 정말로 그렇다는 듯이 창문으로는 커튼이 길게 드리워졌다.
잠시 발 밑으로 드리워진 그림자의 길이를 헤아려봤다. 아직 시간은 오후 3시... 오늘의 날씨는 약간 더운 편이다. 이대로 숨막혀 죽겠다고 유언장에 적어놓지 않은 이상, 원래대로라면 창문은 열려 있는게 맞다. 인간은 환경에 민감하다. 보다 쾌적한 환경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편이다. 리나의 경우, 몰려드는 한기를 물리기 위해 무작정 저만치 앞에다가 화이어볼을 날리는 일도 곧잘 저지르곤 한다. 명백한 범죄 행위지만 삼가는 일 없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생긴 나약한 생물이다.
그런데도 창문 꼭꼭 닫고 숨어 있다 이건가?
제로스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가며 다시 리나 쪽으로 돌아갔다.

『어때요? 현관 문은 잠겨져 있습디까?』
『그건 아냐. 잠겨 있진 않아. 손잡이를 돌려봤는데 그냥 돌아가더라고. 이래서야 원.』
시큰둥하게 대꾸한 채 이것 좀 보라며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너라면 이리로 들어가고픈 맘이 들겠냐. 나는 배 째겠다고 해도 싫다.』

흐응.
안으로 들어가기가 영 내키지 않는다며 이쪽에서 마냥 주저할 법도 하다. 텃밭에서 일하던 사람이 방금 전에 장화를 털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기엔 내부의 공기가 지독하게 텁텁했다. 안으로 쭉 뻗은 복도는 시커멓게 검은 그림자로 뒤덥혀 있었다. 환한 구석이라곤 요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흡사 귀신 나오는 집의 전형 같았다. 여기다 거미줄만 있으면 공포 영화 촬영 세트장이다. 그만큼 살벌하고 삭막하다. 여느 집처럼 그림 장식 하나 걸려져 있지가 않다. 일부러 사람 냄새가 싫어 치워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입구엔 그 흔한 구두 주걱 하나 안 놓여져 있다.
가구도 없고, 생기도 없고.
거기다 결정적으로 어두웠다.

제로스는 신중한 태도로 벽면을 손가락으로 훑어봤다. 묻어나오는 이물은 없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청소는 깔끔하게 되고 있다는 얘기렸다... 가볍게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는 리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긴장 푸세요. 집안을 어둡게 하고 있는 건 이 사람의 직업 탓이겠지요, 뭐.』
『직업?』
『텃밭에 심어져 있는 작물을 눈여겨 보셨습니까? 하나같이 약재들이던데요. 만나리 풀, 코카란사스, 들재바퀴, 로만나야, 히스날리지크...』
『아하. 약재라 이건가.』
리나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가게에서 파는 오렌지 쥬스엔 비타민 C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병이 투명하기 때문이다.
비타민 C는 빛에 파괴된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짙은 갈색으로 착색이 된 병에 넣어서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무튀튀한 병에 든 생과일 쥬스를 달갑게 여기는 법이 없다. 새카만 병은 어딘지 모르게 치명적인 약품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장사꾼들은 손님들의 입맛에 따라 무색투명한 병에 쥬스를 담아 환한 실내에 전시를 해놓는다. 그리고 뻥을 친다. 신선한 냉장 쥬스... 비타민 C 플러스 만땅이라고. 사실은 빛에 다 파괴되고 남아있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습니다. 대다수의 약재들은 밝은 곳에선 그 품질이 변질되기 쉽죠.』
『맞는 말이야.』
리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임으로 제로스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음지에서 잘 자란다는 코카란사스 같은 풀은 몇일씩 증탕을 해서 암죽색의 즙으로 만들어 만성 통증에 복용한다. 이 약재는 빛을 보면 냄새만 역해지고 효과가 줄어든다. 그래서 시중 약재상들도 가게 선반 위로는 가져다 놓지를 않고 지하실에 보관을 해둔다. 혹시나 부정탈라 보자기까지 씌워가며 금지옥엽 다룬다.
로만나야는 달콤한 과즙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일종의 향료다. 차에 넣어서 마시면 머리가 맑아진다고 해서 음용하는 사람이 많다. 이 역시 빛에 민감하다. 현명한 주부들은 양철 깡통에 넣어 찬장 깊숙이 넣어두고 필요할 때만 조심해가며 뚜껑을 연다.
조금만 둘러보면 빛을 싫어하는 약재는 사방에 널려있는 셈이다.

『옳커니. 그러니까 이 집에 사는 사람이 약재상이다 이거지? 그래서 창문이란 창문엔 모조리 커튼을 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나의 말투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놈의 집에는 약재상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발톱 달린 현명한 뱀」의 그림이 안붙어 있다. 대신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의 철판이 현관 머리에 떠억 하고 붙어 있다.
무슨 철판이냐고?
그걸 어떻게 아나.
어쨌거나 이미 짐작했던 바 그대로 거기에 새겨진 문구는「약 싸게 팝니다」는 아니었다.

제르가디스가 이 장소에 서있었다면 본능에 가까운 호기심에 의해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콧잔등에 올려놨을 거다.
드래곤족이 쓰는 신성어는 분명 아니다. 고대어인 크랍수시아어도 아닌 것 같고... 리나는 가만히 인상을 썼다. 전반적으론 신관 문자 비슷하지만 그녀의 실력으로는 단정 짓듯이 이거다 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파베 (신관) 문자는 백마법 저서에서나 주로 사용되고 있고, 따라서 흑마법 전공자 입장에선 그다지 흥미를 못 느낀 탓이다.
제기랄, 죽어라 일본어를 공부했더니 텍스트는 중국어다? 이런 쏴죽일 일이.
눈을 부릅뜨고 보며 한마디 퍼부어댔다.
『뭐라고 씨불렁댄 건야, 저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제로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오래 살아온 만큼 습득된 지식은 박사 못지 않았다. 전문가는 아니래도 흉내는 비슷하게 낼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어가며 판독에 들어갔다.
『어디 볼까요. 첫번째 부분은 음절 문자. 소리내어 읽으면 위타프... 파이 45라는 의미죠. 그러니까 4분의 1이라는 거네요. 거기에 타- 라는 타원형의 특이 부호가 덧붙여 있군요. 일반적으로 타- 는 강조에 사용되죠. 봐요. 이어지는 뒷 부분은 당신이 좋아하는 숫자예요. 서른 둘. 그러니까 1년을 4등분 했다고 치면... 으음. 특정 날짜를 기념하는 거 아닐까요? 4월의 서른 두번째의 날. 대충 봐서 이런 뜻이 아닐까 싶은데요.』
『말도 안돼.』
리나의 목소리가 한 음절 아래로 내려갔다.
『1년은 열 두달, 한 달이 삼십 일이라는 걸 잊지 마. 서른 둘째 날? 그게 말이 되냐.』
제로스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리나의 지적을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는 순순히 자신의 해석이 잘못된 거라고 인정하며 넘어갔다.
『듣고 보니 이상은 하군요. 죄송합니다. 제 머리가 짧았습니다. 그러니 제 의견은 가볍게 무시해 주시고 그냥 앞에 서 계신 집주인 분께 그 뜻을 직접 여쭤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뭐? 직접?』
어눌하게 반문하는 리나 앞에서 제로스는 짓궂게 웃었다.
『직접. 그 자세에서 고개만 쪼오끔~ 돌려보세요. 손님 맞으러 우리가 궁금해 하는 그.분.이. 나오셨습니다.』
『히엑~~!』

어느 틈엔가 문제의 사내가 밖으로 나와 뒷짐을 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진 리나는 본능적으로 짐짓 뒷걸음질 쳤다. 남의 집 입구에서 그렇게 소란을 피워댔으니 안에서 사람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이다지도 머리카락이 쭈삣 곤두서는 건지는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뭔가 도움이 필요한 겁니까? 여기서들 뭐하고 계십니까. 무슨 일이오, 여러분?』
『아... 그러니까 그게...』
리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제대로 대답도 못했다.

레죠가 맞다... 예의 적법사가 무사히 살아남아 나잇살을 제법 잡수게 되면 바로 저런 얼굴이 될 것이다. 뺨에는 가냘프게 주름이 졌고, 입가는 탄력을 잃어버렸다. 목에도 여러 겹의 층이 졌다. 뱅글뱅글 도는 두꺼운 안경을 걸치고 있어 눈썹 아래 부위는 잘 보이지 않고 있다만 분명 눈 밑으로도 주름이 졌을 거다.
그렇다 쳐도 저 망할 이목구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저 얼굴! 맹목적이고도 공격적인 성격을 커버하는 저놈의 가식적인 미소! 결정적으로 옆으로 살짝 삐친 머리카락!
소름이 죽죽 돋는다. 늙은 레죠다!

리나는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도망가고 싶다. 아니, 도망가야 한다.
그것도 모르고 등 뒤에 선 제로스는 옆구리를 찔러대며 채근질에 돌입했다. 뭐라고 말 좀 건네보라는 건데... 어떤 식으로 입을 뻥긋거리면 좋단 말인가. 머리가 윙- 소리를 내며 공 회전만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혀가 바짝 말라붙었다. 손바닥 안으로 땀이 고여 축축해졌다. 이런, 빌어먹을. 평상시의 그 당당한 기백은 어디다 말아먹은 건지... 가게에서 솜사탕을 도둑질을 하다 주인에게 들킨 여린애처럼 마냥 땅만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전 리나 인버스라고 해요.
제가 바로 적법사 레죠를 저승으로 보내버린 당사자지요.
그런데 당신은 놀랍게도 그 적법사 레죠를 많이 닮았군요.

농담이 아니다. 이렇게 대책 없이 나갔다간 돌아올 대답은 분명 딱 하나다.

그래서 나도 죽여버리겠다는 거요, 뭐요?
그거 참 무서운 사람일세. 경찰서는 저쪽이니 자수는 알아서 하시구려.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렇다면 좀 더 부드럽게...!!

처음 뵙겠습니다. 전 리나 인버스라고 합니다만.
당신, 혹시 평소에 적법사 레죠를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지 않아요?

여기서의 문제.
「자주 듣고 있소이다만」라고 대답하면?
앞 뒤 콱 막히는 줄거리다. 그 다음으로 뭘 물어볼 건데?
「그거 참 잘되었네요」라고 맞장구 치고 말어?
반대로 상대방이「그런 이야긴 들어본 바 없소이다」라고 하면?
「유감이네요」하고 베시시 물러서?

다시, 다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악수를 청하라.
리나는 기계적이다 싶을 정도로 자세를 딱딱하게 굳혔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리나 인버스입니다. 혹시 저에게 무슨 할 말 없으신가요?』
『...』

하느님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 누가 봐도 최악이었다.
언제 창백하게 질려 있었느냐는 식으로 리나의 뺨이 사과 빛깔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옥동자가 너스레 떨다 바나나 껍질을 밟고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였다. 등 뒤에선 제로스와 가우리가 동시에「아?」라는 얼빠진 소리를 합창했다. 그들 역시 허탈하게 옆구리를 찔린 것이다. 차라리「도를 믿으십니까」라고 말했으면 그나마 덜 웃겼을 것을... 이래서는 신흥 종교 전도단보다 더 황당하게 보였을 거다.
뭐? 나에게 해줄 말은 없으신가요~ 라? 그런 촌스러운 멘트라니.
아니나 다를까, 늙은 레죠 씨가 정색을 해가며 반문했다.
코에 걸친 그만의 안경 알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당신... 이상한 사람이군요. 내가 당신에게 뭔 말을 해줘야 합니까?』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음. 저기...』
『이봐요. 혹시 당신과 나 사이에 어떠한 채무 관계라도 있는 거요?』
『아뇨. 당신에게 돈 빌려준 적 없는데요.』
『그렇다면 뭡니까. 설마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거요?』
약간은 통통한 리나의 아랫배를 손가락질 하며 그렇게 말했다. 리나는 자지러지게 악을 쓰고 울고 싶은 걸 참았다.
『그럴 리가요. 전 아직 새파란 처녀인데요.』
『엑설런트 하군요. 그럼 결론은 나왔네요. 문제는 없음. 오케이. 깨끗한 거죠?』

대놓고 눈썹을 찡그리지는 않았다. 목소리도 여전히 평정을 가장했다. 아직까지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해 그레이워즈 가문의 남자가 어떻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이상, 저 업소용 미소에 여전히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저 남자가 정말로 레죠와 한 핏줄인 관계라면... (얼굴을 봐선 그 추측을 부정할 길이 없다) 리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쪽 집안 남자가 확실하다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웃어가며 문 손잡이를 돌려 무방비 상태의 손님 얼굴 위로 문짝을 쾅 박아댈 거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말할 것이다. 문이 안쪽으로가 아니라 바깥으로 열린다는 걸 내 잠시 깜빡했소. 그나저나 당신, 코피가 좀 나고 있구려... 대단히 Sorry 하오만 이것은 모두 부처님의 뜻이라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리나는 덤비듯 문 손잡이를 거머 쥐었다. 상대가 공격하기 전에 먼저 방어부터 한다! 매달리다시피 해가며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문을 갑자기 확 닫거나 하지 마세요. 우리는 결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습적으로 문을 닫으려는 거 맞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사람 모두가 동시에 문틈 사이로 손을 끼고 밀거니 당기거니 힘을 내고 있었다. 리나의 반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문짝은 분명 적의 이마를 깨부순 뒤에 굳건히 잠겼을 거다. 재빨리 대응했으니까 망정이지... 휘우.
자신의 깜짝 작전이 보기 좋게 간파당했음을 깨달은 사내는 한층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 몸부림쳤다.

『강도가「난 강돕니다」라고 말하는 거 봤습니까. 사기꾼이「내가 바로 사기꾼이오」라고 주장하는 거 봤어요? 미안하지만 이제 이 문을 닫고 싶습니다만... 이잇! 안녕히 가세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나가는 길은 저쪽이오.』
『잠깐, 잠깐!』
『잠깐이고 뭐고 없습니다. 매주 화요일은 가게 문을 닫는 날이고, 오늘이 바로 그 화요일이오. 하느님도 천지창조 이후에 하루를 쉬었다는데 나라고 하루를 쉬지 말라는 법 있소? 나는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고, 그 누구로부터도 방해를 받을 까닭이 없소.』
『당신의 휴일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이미 방해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자, 그럼!』
『제발! 그레이워즈 씨!!』

순간 사내는 리나 일행을 내쫓는데 주저했다. 아니, 머뭇거렸다기 보다는 완벽하게 얼어붙었다. 보아하니 속으로 꽤나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멍- 한 표정을 짓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로 리나를 내려다 보았다. 큰 주먹으로 콧잔등을 완전히 얻어맞았다는 식이었다. 헤 하고 입을 벌린 채 그는 절반은 기절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그랬소...?』
그는 질겁해서 리나를 힘주어 뒤로 밀쳐냈다. 무척이나 징그럽고, 엄청나게 무서운 걸 봤다는 투였다.

동시에 남자는 깨달았다.
겁에 질린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여자 또한 그와 비슷하게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어깨를 움추리고 있었다.
그들은 거울 속에서 각자의 모습을 확인한 셈이었다.
두렵고, 도망가고 싶고, 이대로 울고 싶고...
이것은 공포다. 순수하다 싶을 정도의 원초적인... 그런 공포.

『그레이워즈 씨?』
『안돼! 그 이름!』
남자는 펄쩍 뛰었다. 흥분해서 그랬는지 약간의 호흡 곤란 증상이 있었다. 남자는 각고의 노력 끝에 가까스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빌어먹을. 어째서 그 이름으로 날 부르는 거요!』
그거야... 외모가 적법사 레죠를 닮았다.
레죠의 성(性)이 그레이워즈였다. A는 B고 B는 다시 C다. 단순한 추론이었다.
『강아지의 꼬리는 길다. 고양이의 꼬리도 길다. 고로 그 두 동물은 같은 짐승이다?』
같은 내용으로는《클레오파트라는 여자다, 나는 여자다, 고로 내가 클레오파트라다》가 있다. 삼단 논법이 엉터리로 흘러가면 얼마나 웃기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일종의 예제였다.
꼬집어 비트는 듯한 지적에 리나의 뺨이 확 붉어졌다.
『어, 어쨌든... 저기...』
이쯤해서 남자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봐라, 목소리가 커졌다.
『맙소사. 진짜 모르고 있는 거요, 알고 있는 거요. 적법사 레죠는 자기 스스로는 그레이워즈라는 이름을 일부러라도 쓰지 않았소. 내가 알기로 적법사 레죠의 성이 그레이워즈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인데?』
『에?』
『뭡니까 정말. 아무래도 당신에게 내가 해줄 말이 있는게 아니라 거꾸로 댁이 나에게 여러가지를 말해줘야 할 것 같군요.』

이것은 먼 옛날 얘기다.
레죠의 어머니는 신분이 높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여기서「같다」는 추측성의 어휘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이것은 무려 300년 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몰락 귀족 출신으로 대단한 허영심을 가진 여자였다. 얼굴이 훤히 비치는 멀건 죽을 먹을지언정 은식기에 포크를 준비해서 정해진 시간에 풀밭 풀 코스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당대엔 꽤나 유명했던 모양이다. 평민 출신의 남편이 넌더리를 내며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여자였다.
당장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옷깃에 주름은 펴고 죽어야 했다. 여자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열 달을 품어 세상으로 내보낸 아들은...
하필이면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다.

당신이 뭘 잘못 봤겠죠. 내 아이는 완벽해요.
그저 저 아이는 성격이 고약해서 눈이 안보이는 척 연극을 하고 있을 뿐이죠.
물론 나도 인정해요. 그건 무척 나쁜 장난이지요.
버릇을 고칠 필요가 있어요. 매를 들어야겠죠.

무려 8년간, 그녀는 회초리를 들고 아들을 호되게 때렸다.
장님 흉내는 안된다고,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장님인 척 하지 말라고, 어머니를 망신시키려 하는게 아니라면 당장 장난을 그만두라며 윽박질렀다.
아이는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이런 식의 학대는 그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델루이스 지방의 사원 소속 어린이 고아원으로 버려질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반복되었다.
상황이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침내 여자는 자기 아들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아들의 등짝을 100년 묵은 떡갈나무 껍질처럼 만든 다음, 신관들 앞으로 집어 던졌다.

이제 더는 못 참는다. 넌 내 아들이 아니야. 네 장님 놀이에 어미는 지쳤다.
장님 놀이가 그렇게 좋다면 거기서 실컷 하다가 그냥 죽어버리렴.

그 날 이후부터 레죠는 문서상으로《라시드》라는 호칭을 따로 얻게 되었다. 라시드의 뜻은「보호를 받는 자 (성 없음)」, 다시 말해 시설에서 키워지는 고아가 되었다는 얘기다. 부모는 친권 포기, 원칙적으로 그날 이후로부터 소년은 그레이워즈라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잃게 되었다.

『그랬단... 말예요?』
리나는 다소 머엉- 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레이워즈라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박탈당해? 금시 초문의 이야기였다.
『실상은 레죠 라시드(성 없음) 였다고요?』

사내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농담하오~?! 그 어미에 그 자식이란 말도 모르오? 그 콧대 높은 자존심에《라시드(성 없음)》이라는 이름을 썼을 것 같소? 천만에!』
그리고 목을 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말 보다 더 효과적인 제스츄어였다.
『그 사내가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걸 인정했을까? 절대로 아니지. 그 어머니라는 여자가 나가서 죽어버리라고 쌍욕을 퍼부었을 적에 그럼 죽어버리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을까? 결코 그럴 일 없지. 그 여자나 그 아들이나 똑같은 세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말이오. 자존심과 명예욕으로 똘똘 뭉쳐서... 빌어먹을.』
남자가 대놓고 화를 냈다. 그리고는 머리를 벅벅 긁어대기 시작했다.
『당신이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만 않았어도 언제나처럼 모르는 척 하고 도망갔을 터인데... 제기랄. 잠깐만 기다리시오. 미안하지만 맨 정신으로는 더는 못 있겠소. 타임 아웃을 선언하는 바이오.』

음주는 그렇게 권장할 만한 습관이 아니다. 하루 한잔의 포도주가 암을 예방한다느니 뭐라느니 떠들어도 알콜이라는 녀석이 가져다 주는 효과라는 건 역시 장기적으로 보면 인체에 결코 유익하지는 않다. 위벽은 공격받아 속이 쓰라려오고, 혈관이 확장되어 혈압이 올라간다. 몸이 따뜻해진다는 느낌을 받지만 실상은 속임수, 신경은 둔해지고 판단력은 흐려진다. 대뇌피질을 마비시켜 사람을 바보로도 만든다. 심각해지면 간이 썩거나 췌장에 말썽이 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술을 마셔야 할 때가 있다.
지혜서에도 나오지 않던가. 술이여, 나의 벗. 마음에 상처를 위로하는 좋은 친구... 공포도 잊고 슬픔도 지운다.

사내는 조그마한 유리잔 세트를 테이블 위로 쾅쾅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냄새 지독한 위스키를 말 그대로 잔 속에다가 왈칵 쏟아부었다. 그걸 다시 허겁지겁 자신의 입에다 틀어 부었다. 한 여름에 목이 말라 냉수 한잔 들이킨다는 식의 속도였다.
지나치게 빠르다.
포도주 대 상인 집안 출신의 리나는 단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저런 식의 폭음을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짓거리라며 손가락질을 아끼지 않았다. 술은 신수(神手)로부터 전해받은 맛있는 음식이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즐겨야 함은 마땅하다. 혓바닥 위로 살살 올려놓고 그 향과 보들거림을 최대한 즐겨야 한다. 누구처럼 무식하게 물 삼키듯 해서는... 미친 짓이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 군. 괜찮다면 여기서 딱 한잔만 더 마시겠소.』
호흡이 약간 거칠어진 상태에서 그는 그렇게 선언했다. 좋은 판단이었다. 그 속도와 그만한 량이라면 분명 취해버릴 터다. 취한 사람과 정상적으로 대화하기란 받들어 총이 전부인 군인과 꽃의 왈츠를 추는 것과 비슷한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양하고 싶었다. 무도회장에서 파트너와 함께 90도 각도로 좌향좌를 한 다음에 다시 일보 앞으로 전진... 흥겹게 악기를 켜다 말고 악사들은 넌더리를 내며 보따리를 챙길 것이다.
거기서 그가 술을 더 마시겠다고 나왔다면 리나 또한 집에 갈 차비를 했을 거다.

『후...』
절제력을 되찾은 건가. 사내의 손이 마침내 술병에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스스로가 민망하다는 투로 쓴 웃음을 지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완전히 추태였다.
평생에 걸쳐 이런 식으로 자기 억제력을 잃어버렸던 적이 모두 몇 번이었더라... 속으로만 세어봤다. 왜냐하면 손가락으로 그 횟수를 세기엔 손이 지나치게 덜덜 떨리고 있었음이다. 하나, 둘 하고 손가락을 세기 위해선 먼저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손부터 다잡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에선 무리였다.
『흉하군.』
그는 일부러 깍지를 끼고 바르르 떨림을 멈추지 않고 있는 손을 무릎 사이에다 끼워 넣어 아예 고정시켜 버렸다. 손을 무릎에 낀 자세로 앉는다는 것이 상당히 흉하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런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등이 앞으로 둥글게 굽는다. 허리를 꼿꼿하게 한 채로는 손바닥을 무릎 사이에 낄 수 없음이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가끔 그렇소. 먼 길을 마다않고 날 찾아오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지. 그들은 어떤 고귀한 현자와 날 착각했었지요. 빨간 옷에다 은빛 나는 석장을 짚은 그 현자 말이오. 하하하... 그들은 묻곤 했소. 적법사 레죠님이 아니십니까. 제발 자비를 내려 주세요. 우리 아이의 눈을 고쳐주세요, 우리 어머니의 눈을 고쳐 주세요...』
남자가 가볍게 실소했다.
『하지만 난 적법사가 아니라서 그런 고단위의 치료 행위는 할 수 없었소. 매달리며 울어도 별 수 없었지. 나는 그대로 뒤돌아 달아났소. 아하하... 정말이지... 그건 무척이나 더러운 기분이 드는 일이었소. 적법사 레죠님, 적법사 레죠님... 하느님의 아들인양 그 이름을 불으면서 날 에워싸곤 하는 사람들을 밀치며 어떻게 해서든 도망갈 궁리를 해야 했으니까.』
넌더리가 난다며 고개를 흔들어댔다.
집단이라는 건 무섭다. 옷자락만 잡아도 병이 낫는다고 믿는 사람은 실재하니까... 분위기에 휩쓸리면 진짜 심각해진다. 할퀴고, 때리고, 심지어 머리카락도 뽑아댄다. 이 모든 행위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뭐, 그래도 어쩌겠소. 그 빨간 옷에 은빛 석장을 짚고 있는 빌.어.먹.을. 현자와 나의 외모가 국화빵인데.』
사내는 씨익 웃었다. 덕분의 그의 외모는 적법사 레죠와 한층 더 닮게 되었고, 바로 그 까닭으로 리나는 한층 더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반면 사내는 대놓고 욕을 퍼붓자 기분이 풀어진 것 같았다.
그 증거가 뭐냐고? 입이 헤퍼졌다.
『그렇지요. 국화빵...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소. 오래된 이야기이긴 한데, 피조테스* (신관이 되기 위해 수련중인 자. 피조테스는 여성형의 표현으로 남자는 피조텐이라 한다. 수련사라고도 한다) 의 법복을 입은 여자가 반색을 하며 악수를 청하는 거요. 한참을 뭐라 떠들면서 눈을 반짝거리는데 솔직히 그녀가 하는 말의 절반도 못 알아 들었소. 아덴 학사에서 어쩌고, 본초학 수사님이 허리를 삐셨는데 어쩌구, 여름철 봉사활동에서 당신이 태워먹은 클라크네 신전 지하 바닥에서 금붙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지옥의 개 누베를 닮아서 소동이 났다느라 어쨌드라... 그리고서 눈을 가늘게 뜬 채 이러는거요. 못 보던 사이에 고생을 좀 하셨나 보오, 형제. 그 곱디 고왔던 얼굴에 어연 주름살이오, 불쌍하게 삭았구려, 금식수행을 잘못한 후유증이라도 앓고 있는 거요... 기타등등.』
『민망했겠네요.』
『나보다는 그 사람이 더 민망했지. 생각을 해봐요. 그토록이나 그리워했던 학사 선배를 오랜만에 만났다며 반색했는데 정작 알고보니 생판 모르는 남남이었다 이거요.』
『가엾기도 하지, 대로 변 한가운데서 미친 년 취급 받았겠군.』
『미쳤다라기 보다는 기억력이 어떻게 된 사람으로 취급 받았죠. 적당히 알아서 내쫓았소.』

그러나 그게 어디 잘못 본 사람 탓이냐. 시력이 좋은 사람도 충분히 헷갈릴 법한 비슷한 외견인데!
리나는 정색했다.
『사촌이라서 닮은 거예요, 아니면 그 사람의 숨겨둔 아들이라도 되는 거예요?』
『그 질문을 거꾸로 해서 당신에게 던져주리다. 사촌들 중에 당신이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하나라도 있소? 숨겨둔 자식도 좋고 조카나 이종사촌, 이모나 외숙모나 기타등등 아무 관계나 좋으니 당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면 한 번 소개시켜 주시구려.』

불가능하다. 없으니까. 사돈에 팔촌까지 뒤져봐도 같은 외모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쌍동이가 아닌 이상에야... 아, 쌍동이! 쌍동이가 있었군!

『당신, 레죠와 쌍동이?』
쯧쯧 하고 내놓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농담도 심하군. 그 사람이 무려 327년 전에 태어났다는 걸 상기시켜 줘야겠구려. 당신의 추측이 맞다면 난 무척이나 늙어빠진 할아버지라는 소리인데... 그것도 자신의 생체 시간마저 왜곡시킬 정도로 대단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할아버지... 그렇게 보인단 말이오?』

글쎄...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닐까.
그동안 리나는 쓰디 쓴 경험에서 한가지 교훈을 배웠다. 그것은 외모를 믿지 말라는 거였다. 산적 두목처럼 생긴 왕자님도 있었고, 어린애의 탈을 쓴 대 마왕의 충복도 있었다. 같이 자리를 한 제로스를 봐도 그렇다. 풀빵처럼 한가롭게 생긴 저 사내도 실상은 랭킹 상위의 고위 마족이다. 가만히 서서 숨 소리도 내지 않고 남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얌전한 사람이군」생각했다간 큰 코 다친다. 외모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그러니 여기서 넙죽「그렇게는 안보여요」라고 대꾸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신중하게 눈치를 살폈다.

『모르겠어요.』
그리고 생각나는 그대로를 덧붙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신과 싸워보지 않는 이상 당신이 대단한 마력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사실 그렇잖아요? 검도 마주대야 실력을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거라고요. 커다란 장검을 들고 다니니까 저 사람은 대단한 실력자이겠거니 하고 지레 짐작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해요.』
『흐응. 그런가? 실력자들은 척 보면 상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간파해낸다던데?』
『점쟁이도 아닌데 한 눈에 척 봐서 알긴 뭘 다 알아요. 대충 눈 감고 코끼리 다리만 만지는 거지.』
『어쨌든 코끼리 다리라도 만져본다는 거 아니요. 그래서 당신의 판단은? 당신 눈에 난 어떻게 보이오?』

그거 참 끈질긴 사람일세. 리나는 가볍게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녜요. 그래도 난 당신이 마법사가 아니라는데 100원 걸겠어요.』
사내는 슬그머니 웃었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져 100원을 찾아냈고, 그 100원을 리나가 잘 받아낼 수 있게끔 솜씨 좋게 해서 던졌다.
『당신이 이겼소. 옛소, 100원을 받도록 하오.』
결국 쌍동이도 아니라는 얘기다.

리나는 100원을 공짜로 벌었다고 좋아하기 이전에 인상부터 찡그렸다.
『어쩐지 가장 생각하기 싫은 최악의 가정이 기정 사실로 넘어가게 되는 것 같네요.』
『음... 그러니까 당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끔찍한 가정이라는 건?』
리나는 주저 없이 대꾸했다.
『레플리카. (replica)』
정답이었나 보다. 남자가 지긋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필멸의 땅으로 불리우는 사일라그... 풀 한포기 나지 않게 되어버린 그 땅에서 적법사 레죠가 정체불명의 악당들이 부활시킨 마수 자나파를 손수 봉인한 뒤 죽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설이다.
물론 사실은 아니다.
그래도 리나는 딱이 무어라 하는 법 없었다. 원래 소문이라는 건 그런 거 아니던가. 그냥 내버려 두면 되었다. 그 이야기가 거짓말이네, 진실이 아니네 떠들고 다닐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리나였다.
제르가디스는「뭐? 레죠가 자나파를 봉인하고 거기서 죽어? 말도 안돼. 이래서야 완전히 성인군자 취급이잖아. 불쾌해!」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만...
리나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했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일부러 긁어 부스럼 만들 까닭이 없었다.
마도사 협회로 가서《사일라그 멸망의 진실》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이라도 하라는 거냐? 웃기지 마라.

리나가 레죠를 죽였다. 이 사실을 안 제자가 복수를 꿈꾸고 리나 일행을 끌여들였다. 복제 레죠를 앞세워 마수 자나파를 부활시키고 싸움을 걸어왔다. 그 와중에 실피르를 제외한 주민 전부가 몰살당했다... 이런 이야기를 당당하게 떠들고 다니라고? 쇠고랑 찰 일 있냐.
그런 이유로 모든게 비밀이다.
거기서 죽은 건 본체 레죠이고, 명실공히 현자인 그는 자나파를 봉인하고 죽었다.
새로운 전설의 탄생이다. 차라리 이야기는 그렇게 왜곡되는 것이 좋았다.
아리스가 만든, 레죠의 복제가 있었다는 건 리나와 가우리, 제르가디스, 아멜리아, 실피르만이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은 그런 세세한 내용을 모른다...

『아리스? 이상하군. 그런 이름의 레플리카 마스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귀 기울이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인상을 찡그렸다.
『아리스는 레죠의 제자였어요.』
한창 과거 속에 빠져있던 리나가 가볍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랬나? 제자였나보지, 뭐. 그 사람을 거쳐간 제자는 제법 되었으니까...』

어이, 어이- 그런 내용의 혼잣말을 하면 이쪽은 곤란하다고-

『당신의 마스터가 아니예요? 아리스는?』
『글쎄. 어쨌든 난 그런 이름의 레플리카 마스터는 모르오. 그리고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댁이 한가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거 같군요. 말해볼까요. 복제는 분명 쉬운 일은 아니지. 그리고 마물과 융합하는 복제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오. 마물에게 씌워진다... 라는 것. 당신은 마법사니까 잘 알고 있겠죠? 마물은 고도의 정신체요. 그 고도의 정신체가 인간을 덥치면 사람은 십중팔구 미치게 되어 있소. 육체는 남을지언정 영혼은 쑥대밭이 되는 거지.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선 마물을 능가하는 정신력, 더러는 마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쉽게 말해 먹히느냐, 먹느냐의 관계라고 볼 수 있지요. 따라서 마물과 융합할 수 있는 레플리카는 일반적인 복제 기술로는 만들어지는게 아니오. 거기다 엄연히 금기이기도 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대충 짐작이 갑니까?』
『대충은. 그러니까 그때 나와 싸웠던 복제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나이 어린 레플리카 마스터가 만들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
『예스. 그저 잠들어 있었던 걸 깨웠다면 또 모르겠지만... 십중팔구 그럴 거요.』
『으에? 잠깐, 잠깐만! 그 말은...!!』

질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상인가. 버섯이 일렬도 늘어서 있다. 똑같이 생긴 버섯... 머리가 새빨간... 그런게 들판에 수두룩 하다. 그 버섯을 캔다. 레죠가 하나, 레죠가 둘, 레죠가 셋... 어느 틈에 바구니에 버섯이 가득 찬다. 우어어어~ 싫다.
『혹시... 혹시?! 그러니까 복제들이 많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굳이 아리스가 아니었다고 해도 누구든지 깨울 수 있는 복제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단추 하나만 누르면 움직이는 그런 복제가!!』
『아. 안심해요, 절대 다수가 이미 파기되었으니까. 남은 건 위타프의 서른 두번째 아이인 나, 그리고 생사가 불분명한 즈나위 (절반의 파이) 의 쉰 세번째. 그리고 하나뿐인 오리지널 블루스타스... 이 정도요.』
『공장이라도 세웠답니까?!』
『공장이라... 표현이 과격은 하지만 비슷은 하오.』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 그건 모른다. 너무나 오래 전의 이야기니까.

그래! 좋은 생각이 났다.
너의 보이지 않는 눈을 보이는 멀쩡한 눈으로 바꿔넣도록 하자.

그러나 인간의 몸은 이질적인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법이다. 이식이 잘못되면 조직은 썩는다.
그렇다면 그 해결 방법은?
본체를 가지고 복제를 만든다. 그리고 그 복제에서 필요한 부분만 떼어다가 쓰면 된다.

생각은 나쁘진 않군요.
하지만 망가진 부분을 복제해봐야 역시 망가진 채로 나올 뿐 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복제하면 열의 열은 장님일 겁니다.

해보지도 않고 그럴 것이다 포기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일단 시도는 해보는 거야.

아이를 만들어봤다. 역시나. 앞을 보지 못하는 쓸모 없는 아이들 일곱 명이 만들어졌다.
실망해서 토막쳐 없애 버렸다.
사이퍼, 이것이 파이의 제로.
혹시나 싶어 또 한 번 만들어봤다. 이번엔 뭔가 달랐다. 성과가 있었다. 마흔 두 명의 아이들 중에 하나가 눈을 떴다. 이것이 진제레, 파이의 10.
좋아하기엔 일러 아이는 거의 장님이었다. 이래서는 본체에 이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만 뽑아 보관하기로 나머진 땅에 묻었다.

- 어떻게 그 하나만 달랐던 거죠?
- 내 실수야. 표본이 오염되었어. 파라사이트... 마광충(摩光蟲) 알이 들어갔더라고.
- 오염? 마광충의 알에? 마정령과 융합했다는 것?
- 그래. 융합했어. 대단하지? 마력과 반응해서 하나로 합쳤어. 꽤 좋은 힌트를 얻었다.
- 그래서 또 아이들을? 이번엔 얼마나? 적당히 해요. 시체 냄새는 이젠 역겨워요.
- 레죠... 나는 그저 너에게 보이는 눈을 만들어주고 싶을 뿐이야.
- 그래서 이번엔 내 피를 무엇과 융합시켰습니까. 기분 나빠요.

당신은 내 피를 가지고 지나치게 장난을 치고 있어.
내 얼굴과 똑같은 괴물들이 나돌아다니는 건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적당히 하시지요. 더 이상 실험을 계속하면 다음에는 화를 내겠습니다.
나라고 심장 없는 건 아니오.
내 얼굴을 하고 갈기발기 찢겨져 해부당하는 실험체들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으라고?

실험은 중지되었다.
표본은 대량으로 파기되었다.
시체들은 모두 땅에 묻혔다. 곧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잊혀져갔다.

『그런데 그게 완벽하게 말끔한 뒷처리는 아니었던 거죠. 극히 소수지만 바로 나 같은 아이가 도망치고 말았으니까.』
위타프, 파이 45의 서른 두번째 아이가 손바닥을 들어 오른쪽 눈을 가렸다.
『그 눈? 설마?』
『아하하, 뭐랄까... 시력은 매우 약해요. 특히 빛에 민감하기 때문에 땡볕 아래선 고통스럽소.』
남자가 얌전히 안경을 벗었다.

『윽!』
순간 리나는 본능적으로 태세를 갖추었다. 여차하면 주문을 외워 날릴 기색이었다.
머리카락이 쭈삣 곤두섰다. 두꺼운 안경 뒤로 숨겨져 있던 맨 눈동자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세로로 길죽히 찢어진 동공, 그것도 둘. 휘둥글 움직일 때마다 검은 자위가 미묘하게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불투명한 색상의 아메바가 흰자위에 철썩 달라붙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 뿐만이면 그나마 참겠는데... 부드러운 즙 형태의 안개 비슷한 것이 쉬지도 않고 그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뿌리를 내린 기생충.
당장 잘라내야 속이 다 시원해질 듯한...
남자는 손가락을 들어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즙의 일부를 잡아냈다. 그리고는 솜털 하나 뽑아보겠다는 듯이 그걸 밑으로 잡아당겼다. 찌익 하고 늘어지면서 정말려 밀려 나왔다.

『우와악! 하지 마! 하지 마요!』
『이 마물은 빛을 싫어하더군. 웃기는 일이지만 어쩌겠소, 그렇게 싫다는데. 그래서 난 밝은 곳에선 잘 움직일 수가 없어요. 덕분에 집안은 항상 초상집 분위기지. 커튼을 치고 문을 닫고...』
『잡아당기지 말라니까요!』
『괜찮아요. 다 빠져나오지 않으니까. 실제로는 기를 쓰고 뽑아버리려 해도 안 나옵니다. 가위로 잘라버리려 한 적도 있는데 어림도 없었소. 이래보여도 마물이오. 쉽게 죽지도 않고, 끈질기죠. 내 힘으론 분리 불가능이오.』
남자는 한층 더 힘을 줘서 잡아당겼다. 이제 그것은 찌익- 하고 늘어진 찹쌀떡처럼 보이고 있었다.
『우와아아악!! 하지 말라니까~~!!』
리나는 거의 울다시피 해가며 가우리의 등 뒤로 숨었다.

『징그럽죠?』
『풍선껌 늘리듯 하지 말고 제발 원래대로 하세요. 안경을 쓰고 뒤로 물러나 주세요!』
『뭐 그러지요. 하지만 당신 반응이 재미있는데... 조금 더 잡아당겨 볼까요?』
『하지 말라니까! 황혼보다 더 붉은 자여,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자여!』
『알았소, 내 안경을 다시 쓰리다.』

마물이 달라붙었다. 그 결과 희미하게나마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댓가는 무지막지했다.
『융합된 마물을 억제시키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가 무너집니다. 이것이 위타프, 파이의 45의 진실이오. 나라는 몸은 마물에게 일부 씌인 상태... 현재 나의 모든 능력은 그 놈을 억제하는 쪽으로 집중되어 있소. 나의 영혼, 나의 마력, 나의 지식, 나의 전 생애... 잘 보이지도 않는 시력을 위해 모든 걸 희생당했죠.』

증오라는 단어만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거친 감정.
허탈한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견딜 수가 없어 칼로 눈을 도려내보기도 했소. 하지만 마족의 생명력이라는 건 불사체나 마찬가지라는 걸 그때마다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소. 망치로 때려 부셔뜨려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갑니다. 발광을 해도 이놈의 눈을 떼버릴 수가 없어요. 정말이지 이 눈... 이 눈...』
악 다물린 이 틈새로 진실이 튀어나왔다.
『누구는 보고자 발버둥쳤지만 난 차라리 장님으로 살고 싶소.』
바람 하나 통하지 않는 답답한 방구석에서 일행은 모두 숨을 죽였다.

해가 떨어졌다. 남자는 어둠을 반색하며 다시 호미와 삽을 챙겼다. 나가서 밭을 손볼 거라고 했다. 콩이 일종인 마미아의 수확도 다가왔겠다, 남자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장화를 신고 허리를 굽혔다.
그것이 끝이었다. 잘 있으라는 인사도, 잘 가라는 인사도 필요 없었다.
헤어지기 위한 인사가 사치스러울 정도로 그들의 만남은 짧았고, 뜻 없었다.

『에르메키아 란스 주문으로 그 눈동자를 파괴시킬 수도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리나님?』
『융합이 되었다잖아.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죽게 된다.』
『공존 아니면 공멸이라는 건가요.』
『응. 같이 살거나, 같이 죽거나... 불쌍하게도...』
『그렇다면 같이 죽게 해줄까요. 리나님이 원하시면 그 사내의 머리를 부숴뜨리고 오겠습니다.』
『관둬. 우리가 상관할 영역이 아니야.』

차가운 피를 가진 여자의 아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을 뜬다.
그것만이 복수.
최후에는 눈 시퍼렇게 뜨고 서로를 마주 노려볼 것이다...

리나는 세차게 도리질했다.
기억하려고 하지 말자. 잊어버리자.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생사가 불분명한 즈나위(절반의 파이)의 쉰 세번째. 그리고 하나뿐인 오리지널 블루스타스에 대한 이야긴 듣지도 못했군요... 아쉬워라.』
『떠들지 마. 난 그런 건 알고 싶지도 않아!』
알아서 뭘 어쩌려고? 몰라서 약인 것도 분명 있다.

게다가... 끔찍한 예감이 들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즈나위(절반의 파이)의 쉰 세 번째. 그리고 하나뿐인 오리지널 블루스타스를 이미 만났을지도 모른다.

이미 필연(악연)임이 분명한 마당에 무엇을 부정하랴.
리나는 차가워진 어깨를 껴안고 어두운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근심에 젖어 한 얼굴을 떠올렸다.
또 다른 그레이워즈 가문의 남자, 그녀가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는 소년이었다.

『블루스타스...?』
이유는 없다.
그저 소름만 돋았다.
그런 그녀를 보랏빛 눈동자의 마족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았다.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누구의 마음 만큼이나 싸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