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에프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반듯한 외형을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런 동료의 태도에 인버스는 할 말을 잃었다.
『가우리 형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지럼증을 느꼈다.
무시라. 처음 뵙겠습니다?

실상은 그 또한 제로스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그것도 보행자 신호를 대기하고 있다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식의 단순한게 아니다. 참혹한 사건 현장에서 정면으로 부딪쳤었다.
글쎄올시다. 인버스 형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당시에는 제로스가 범인이 아니고 피해자 입장이었는데다, 시체를 넣는 검정 비닐백에 들어가 있는 제법 고약한 상태에서 마주쳤으니 가브리에프 형사의《처음 뵙겠습니다》인사가 아주 큰 흉은 아닐 수도 있겠다. 비닐 백 속의 시체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나와 악수를 청할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래도 정작「이 사람은 누구야?」반응이 나오자 인버스는 크게 당황했다.
- 가브리에프, 넌 닭 대가리냐?! 처음 뵙겠습니다가 뭐냐구!

제로스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신종 합성 마약인 마즈문 사건에서이다.
당시 그녀에게 내려진 임무는 마약 중간 거래상인인 산도리아 뷰란을 뒤쫓는 것.
제로스는 그의 애인이었고 - 무려 애인이었다! - 자연스럽게 산도리아 뷰란과 한 세트로 그를 밀착 미행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얼굴을 익혔을 때가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꽤나 고약스러운 첫 인상이었다. 처음엔 머리카락이 허리를 덮을 정도로 길어서 유니섹스 모드의 근사한 여자라고 멋대로 착각했었다. 그런데 웬 걸, 호텔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가슴이 납작했다!
A컵은 아니고! 아랫도리에 이상한게 달렸고! 남자! 우어어~!!
망원경 너머로 본의 아니게 남의 누드를 바라본 리나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래, 나랑 똑같은 A컵이 아니었지. (중얼)』
뿐만 아니다. 조심스럽게 미행하던 자신을 철저하게 농락하며 따돌리는데 성공, 그녀가 분에 못이겨 게워낸 하얀 거품 속에서 비너스가 탄생할 정도였다.
포말이여 춤춰라, 조개 껍질 위로 여신이 태어난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망원경으로 관찰하던 사람을 향해 키스를 날려 보내는 시늉을 해보이질 않나, 낡은 모텔에 투숙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던 인버스 앞으로 특대 피자를 배달시키지를 않나. 기왕 배달된 것, 맛있게 먹어치운 것과는 별도로 화가 치밀었다. 당시에 된통 당한 원한은 제법 깊었다.

슬슬 눈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리나 인버스의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걸까, 제로스는 기분 좋게 씨익 웃었다.
바로 저 입이다. 저 입이 산도리아 뷰란과 키스한 입이다. 리나 인버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르르 떨었다. 동성간 결혼이 이미 합법화 된지 오래지만 역시 싫은 건 싫은 거다. 성적인 취향 차이로 인간을 차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머리로는 구호를 신나게 외쳐도 팔뚝으로 진한 소름이 돋는 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아무리 특수사법관으로서의 임무였다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서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음란한 소리를 내던 그.
망원경으로 리나 인버스가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면서 산도리아 뷰란이 하자는 대로 몸을 편안히 맏기고만 있었다.
거기다 그 시선의 방향은 이쪽으로 고정시키고.
삽시간에 관음증 환자 취급을 당한 그녀가 입을 오- 둥굴게 말며 경악해 하는 걸 은근히 즐겨가면서.
재수 없다.

『소금 뿌리실 겁니까?』
『뭐?』
『아니, 눈치가 그런 것 같아서요.』
『말도 안돼! 네가 무슨 삶은 달걀이라도 되냐? 소금을 뿌리게.』
허겁지겁 부정을 하며 찡그렸던 이마의 주름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켰다.
뭐, 어쨌든 임무는 임무인 거다. 좋으면 좋다고 받아들이고, 싫으면 싫다고 거부할 입장은 분명 아닐 것이다.
존재조차 잘 알려진 적 없는 특수사법관. 양날의 검으로 상징되는 그들.
법 위의 법이다. 임무로 주어진다면 암살도 서슴치 않아야 하는 마당에 베드 서비스가 무슨 대수랴.

그녀는 미안한 감정을 담아 제로스의 등허리를 가볍게 툭 때렸다.
경멸해 하는 표정을 짓다니, 안 된다. 댓가는 이미 치뤘다.
마즈문 사건 때, 그는 산도리아 뷰란이 휘두른 칼에 찔렸다.

- 네 놈! 특수사법관인 거냐?!
- 아이구, 이제야 겨~우 들켰군요
- 나에게 접근한 건 마즈문 판매 루트 정보가 탐이 났었기 때문인가?!
- 그럼 당신의 침실 테크닉이 마음에 들어서인줄 아셨습니까? 어리석군요
- 용, 용서 못해!! 죽여버릴테다!
그리고는 퍽-

리나 인버스가 코앞에서 지켜 보는 앞에서 그는 참살되었다. 아니, 참살당할 뻔 했다고 해야 맞을 거다. 복부가 가로로 베여 거의 두동강이 났지만 결과적으로 죽지는 않았으니까.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진작에 의사가 사망신고서에 서명했다.
그는 유전자 강화 인간이다. 그래서 치명적 상처에도 불구하고 두 눈은 멀뚱 뜨여 있었다. 시체로 오인받아 검정 비닐 백 속에 담겼지만 현장에서 무사히 도망쳤다. 피가 홍수처럼 흘렀는데도 두 다리로 걸어 나갔다.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다리가 후둘거린다.

장난기가 발동한 걸까, 그가 상체를 귀울여 리나 인버스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그때 당신은 날 응시하며 펑펑 울었더랬죠.』
그야 톱날에 갈려 사람 배가 가로로 찢기는 걸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나에게 키스해 줬어요.』
CPR, 인공 호흡이었다.
『내 셔츠를 허겁지겁 벗겼죠.』
상처를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전후 사정 모르는 제3자가 듣기엔 남녀간의 진~한 대화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거다. 울었어? 뽀뽀했어? 옷도 벗고?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조심스럽게 그들의 대화를 귓동냥 하던 가브리에프의 얼굴이 확 변했다. 이어지는 건 당혹감 녹아들어간 어흠 헛기침 소리. 시선을 피했다. 코를 만지작대며 등을 돌렸다.

『그랬구나. 인버스의 남자 친구였구나.』
『아냐!』
그리고 동시에,
『예!』
제로스는 작정하고 리나 인버스와 팔짱을 꼈다. 이제는 누가 봐도 한 쌍의 연인이다.
뭐, 남자쪽에서 지나치게 적극적인 것이「아직은 멀었군」느낌을 자아내긴 했다만서도... 여자 쪽을 보면 경계하고 있다라기 보다는 당황하고 있는 모양새다. 따라서 전반적 뉘앙스는「둘이서 갈 데까지 갈 확률, 제법 높음」
가우리 가브리에프는 늙은이마냥 헛헛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인버스 녀석,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저런 취향의 남자를 좋아했구나

선이 가냘펐다.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부드러웠다. 옷만 잘 입으면 훤칠한 키의 멋진 모델로도 보일 거다. 냉장고를 한 손으로 번쩍 치켜 올리게 생긴 가브리에프와는 정 반대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랄까, 인디언 식의 작명 센스로 치자면 이쪽은「몽둥이 들고 뛰어」, 저쪽은「레몬 한 조각 입에 물고 아항~」이다. 맛으로 치자면 이쪽은 보리차, 저쪽은 최고급 홍차였다.
평소엔 다부진 자신의 몸매를 자랑스러워 하던 가브리에프였지만 왠지 이번 만큼은 기가 팍 죽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바람에 버들가지 휘는 듯한 날렵함은 흉내낼 수 없다. 어릴 적부터 우유를 매일 1리터씩 마셔 굵은 통뼈가 된 자신이 어쩐지 싫어졌다.
- 뭐야 그럼, 나는 리나의 타입이 아니었던 거잖아
순간 박하 사탕을 한꺼번에 수십 개씩 씹어 삼킨 듯한 싸한 느낌이 혀를 꿰뚫었다.
아하하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브리에프는 뒷통수를 벅벅 긁어대고 보았다.

『저기, 그런데 말이죠, 가우리 가브리에프 형사님. 부탁이 하나 있어요.』
『응?』
제로스는 짐짓 애교를 부려가며 두 손을 공손히 합장했다.
『집이 이 근처이긴 한데 인적이 드믄 길을 걸어가려니 갑자기 겁이 좀 나서 말예요. 뉴스를 보아하니 근방으로 흉악범이 돌아다니고 있다면서요.』
『아.』
『기왕 이렇게 만났으니 인버스 형사님께서 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으면 합니다만. 네? 부탁드려도 괜찮겠지요?』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듣기엔 뭔가 하나 놓친 구석이 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겁이 많다는 작자가, 으슥한 장소에 덩그마니 서있는 자동차 앞으로 다가가서,「여차하면 경찰을 부르겠어요」하며, 유리창에 노크를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수상한 사람들이 정.말.로. 이상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면 총에 맞았을 수도 있었다. 예전에도 그러하고 지금도 그러하다. 괜한 참견으로 병원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되는 일은 흔하다. 강심장 아닌 이상 수상쩍은 사람들에게 접근기란 쉽지 않다. 상대가 마약 상인이거나, 무기 밀거래 상인이라면 어쩔 건데? 바람 구멍 난 다음에 후회하면 너무 늦다.
- 새빨간 거짓말쟁이
나는 겁쟁이입니다~ 식으로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있는 제로스를 곁눈질로 흘겨보며 혀를 끌끌 찼다. 겁쟁이 좋아하네. 눈동자를 뒤로 굴리며 탄식했다. 사자가 고양이 흉내를 내고 있다. 그런데 완벽하게 고양이다. 저만한 연기력이라면 과거의 대 배우도 울고 간다.

『인버스? 저 친구를 데려다 줘.』
『에에?!』
『시민 보호는 우리의 할 일이다.』
『겍-』
당연히 가브리에프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어이구.

리나 인버스는 드러내놓고 으르렁댔다.
『30분이야.』
『뭐가요?』
『너에게 할애된 시간.』
『에게, 겨우?!』
『겨우가 아니라 30분 씩이나야. 나로선 최대한 양보한 거니까 울상짓지 말아. 원래대로라면 어림도 없단 말이야. 파트너 혼자 남겨두고 자리를 이탈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닌 거란 말이다.』
아무렴, 당연하다. 아직은 근무 시간인데다, 지금은 비상 사태다. 언제 어디서 약에 미친 괴물이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긴급한 상황이다. 그런 불안한 마당에 동료를 멀뚱 내버려두고 저 혼자 데이트 흉내를 내서는 안...
- 데이트!
눈이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라 붙잡혀 있던 팔을 뿌리쳤다. 특별한 사이가 아니다. 단지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스치고 지나가는 수백 수만 번의 인연 중 하나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이 사람과 잘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리나 인버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 해봐야 그가 특수 사법관이라는 것, 이름이 제로스라는 것 정도 뿐이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집 주소도, 전화 번호도 모두 백지다. 따라서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공원을 산책할 수는 없다.
흠칫 깨달았다.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녀는 놀랐다.
순진하리만치 뺨을 붉히고 있는 건 어째서?

『리나씨는 째째해. 30분 가지고 뭘 하느냔 말예요.』
『시끄러! 그 정도의 시간이면 애도 낳을 수 있겠다.』
『헤에~』
『뭐, 뭐야... 그 찐득찐득한 표정은...』
『결정했다. 애 낳으러 갑시다.』
『뭐어?!』
『30분이면 애도 낳는다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자자, 그게 가능한지 아닌지 실험이나 해보자고요? Let's Go 호텔~』
『멍청이!!』
거의 비명처럼 해서 소리가 나왔다.
답지 않다. 저런 농담에 발끈하다니, 원래대로라면「그래, 애를 한 다스 낳아보자!」내지는,「호텔 값은 네가 쏜다」식으로 웃고 넘겼을 거다. 직업이 직업인 만큼 걸죽한 농담엔 제법 익숙한 편이다. 콘돔에 수돗물을 잔뜩 채워넣고는 물총 대용품으로 써먹지를 않나, 펜트 하우스 잡지에서 오려낸 야한 사진에 급히 전화번호를 메모해서 옆 자리로 돌리지를 않나... 비뚫어진 동지애 표현 중 하나로 생일 선물로 정력 팬티를 주고 받기도 한다. 한 술 더 떠서 축하 카드 메세지로「발기 12분 초과 달성! 만세! 힘 내라!」휘갈겨 놓기도 한다.
물론 느낌은 아무렇지도 않다. 부끄럽다거나 피부가 화끈거린다는 기분은 없다.
-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거냐고!

안되겠다 싶었다.
화제 전환이다.
일부러 눈을 한층 더 표독하게 치켜뜨고.
공격~

『그나저나 용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네? 설마, 우연히 지나가다 봤습니다~ 라는 건 아닐 터이고.』
『물론 우연이 아니죠. 당신과 저와의 일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이.』
제로스는 별 거 아니었다는 식으로 리나 인버스의 오른쪽 가슴, 정확하게 심장이 뛰는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렀다. 잠시나마 그녀가 깜짝 놀랐다는 식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납작하다지만 가슴은 가슴, 여자의 가슴은 남자들에게 있어 성역과도 같은 장소다. 손가락 하나 뿐이라고 해도 남정네가 여자 가슴을 만졌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허나 곧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건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쟈켓의 안쪽 주머니로는 포켓북 사이즈의 전자 수첩이 들어가 있다. 하나 하나에 고유 아이디가 들어가 있는, 그러니까 신분증 겸용의 다용도 수첩이다. 색상은 검정. 두 번 접혀져 있고 위 아래로 펼쳐진다. 상 하를 포함하면 그 크기는 약 10cm 정도, 무게는 가볍고 내구력은 자동차가 밟고 지나가도 안 망가진다. 고유한 파장을 가지고 있어 위치 발신기 역활도 담당한다. 따라서 바람 피우러 나가면서 신분증을 들고 나갔다간 낭패를 당하기 딱이다. 업무차 우체국 간다 했는데 발신 위치가 R 호텔로 나와서야 변명도 안 통한다. 옷깃에 케첩 묻히고 피자 안 먹었다고 해봐야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그걸로 위치 추적을 좀 해봤죠.』
제로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인버스는 헉 하고 경악했다.
『세상에... 아무나 그런 거 막 해도 되는 거야?!』
『전 그「아무나」가 아닌 걸요. 대통령 각하가 직접 액서스 하는 핵 스위치 제어 시스템을 빼놓곤 어디든 프리 패스입니다.』
『그래. 네가 특수 사법관이라는 건 잘 알아. 그러니까 내 말인 즉, 사적인 걸로 경찰청 마더 시스템을 주물러도 되느냐고!』
『어머? 아무리 제가 특수 사법관이라고 해도 기계를 안마할 수 있는 건 아녜요. 주무르다뇨.』
『그런 걸로 정색하지 말아! 표현이 그렇다는 거지!』
『뭐, 어쨌든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드, 들키지만 않으면... 어이.』
『어쨌든 이번이 처음이었다고요. 그러니 리나씨, 용서해 주세요.』
『그게 내가 용서하고 말고의 일이냐?!』
『쉿쉿, 목소리 낮추세요. 남들이 쳐다보잖아요.』
『쳐다보고 자시고!!』
골치가 아파왔다.
『에잇!!』
이쯤해서 리나 인버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소리를 지르면 체력이 많이 소모된다. 가뜩이나 수면 부족인데다 배도 고픈 상태였다.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해서 현기증을 일으키기엔 자신의 처지가 너무 가여웠다.
켓세라세라.
들켜서 경을 칠 사람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아니다.
남의 일이니 신경 끄도록 하자.

지긋이 눈을 감고 손가락 하나를 척 들어 보였다.
『웃고 떠는 사이에 15분 지났음.』
『에엑!』
『타임 리미트 15분이다.』
『너무 짧아!』
『사실 말이야, 15분 뒤가 아니라 당장에라도 난 자리로 돌아가야 해.』
『예, 예... SPP 때문이죠.』
『뭐야, 잘 알고 있구먼?』
『아무래도... 그러니까... 저어...』
제로스는 흥이 깨진 얼굴로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보았다.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남은 15분이 어떻게 흘러갈지 너무나 뻔했다.
좀 더 사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포응은 야무진 꿈이라 쳐도 손 정도는 한 번 잡아봐야... 한 낱 희망 사항이었나. 가벼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완전히 형사의 얼굴로 굳어졌다. 그렇기에 사랑스럽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날카롭게 반짝거리는 양날 검의 눈빛으로 지긋이 올려다 보는 여자를 상대로 달콤한 밀어를 속삭일 수는 없다. 확 그어버리겠다는 식의 강렬함이다. 그 앞에 장미꽃을 들이대봐야 갈갈이 찢길 것이다.
- 하는 수 없지.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은 그냥 느긋하게 가볼까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고 가볍게 코를 찡그렸다. 그리고는 친절하게 말했다.

『피해자 이름이 루디아 캐널이라고 했던가요... 용의자인 하르시폼과는 고교 시절부터 사귀어 왔답니다. 서로 열렬하게 사랑했다고 하더군요. 다들 그 두 사람이 결혼할 거라 의심치 않았답니다.』
『얼레?』
『그로부터 12년인가요... 하르시폼이 먼저 헤어지자 요구를 해왔답니다.』
『얘기가 워째 틀리지 않아? 듣던 것과 틀린데. 루디아 캐널이 결별을 선언, 분노한 남자 쪽에서 여자를 참살했다고...』
『그러니까 남녀의 애정이란 건 이상한 겁니다, 리나.』
제로스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낯빛을 띄웠다.

여자는 승승장구했다. 유명 잡시사의 편집장으로 승진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반면에 남자는 별 다른 진전이 없었다. 유전공학 분야를 전공했지만 박사 코스에서는 탈락했다. 그는 혹독한 좌절감에 휘둘려야 했다. 중소기업 연구소에 가까스로 취직, 흰색 가운을 벗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학력을 이유로 연구팀의 리더는 될 수 없었다. 나이는 자꾸 먹어만 갔다. 몇 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성과도 내놓지 못했다. 인생에 실패한 거 아니냐는 의심이 그를 좀 먹었다.
그 동안 여자는 강렬한 스포트 라이트가 내려쪼이는 곳에서 다이아몬드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빛나는 곳에서 아름답게 피어났다.
하르시폼은 견디지 못했다.
- 나와 헤어지는 게 좋겠어, 루디아. 부탁이야. 이대로 나와 헤어져 줘
루디아 캐널은 무거운 침묵으로 대답했다. 예스도, 노도 아니었다. 침묵이었다.
불쌍하게 여김을 받았다.
동정의 눈초리.
그것으로 그 남자는 완전히 미쳐버렸다.

『난 이해가 가지 않아.』
『그래요?』
『차라리 헤어지겠다고 말을 했다면 그가 이렇게도 요란한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하진 않았을 거라는 얘기야?』
『아마도.』
『어째서!』
『헤어지자고 대답했다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으니까... 자존심을 내던지고서라도 날 다시 사랑해달라 매달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긍정도, 부정도 아니라면 그것으로 끝인 겁니다.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속이 보이지 않아. 그 생각이 읽히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날 내려다 본다. 굳게 입을 다물고... 단절. 그것은 진정한 끝. 소름 끼치는 일입니다. 마음을 걸어닫고 밖으로 밀쳐낸다... 차라리 미움 받는게 더 좋은데... 증오하는 대상이 되어서라도 마음에 남아있을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게 더 좋은데... 완전히 버림 받는다는 건... 그래서...』
잠시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내장을 뱉어내듯 억지로 뒷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죽이고 나도 죽을 수밖에.』

이 말에 리나 인버스는 에에- 쓴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멍청한 짓이야!』
『그래서 사랑이라는 겁니다.』
『얼간이 놀음이야!』
『그 얼간이 놀음으로 인간은 종족을 보존해 왔지요.』
『끔찍해!』
『그럼요, 끔찍하고 말고요. 그 힘은 파멸에 가까워요.』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리나 인버스와 똑바로 마주 보고 섰다.
그렇고 말고, 파멸의 힘이다. 전혀 달갑지 않은 힘으로 인간을 쥐고 흔든다.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을 거라 맹세를 해도 소용이 없다. 폭풍은 대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지나갈 뿐이다.
『왜, 왜...? 어, 어라? 제로스?』
웃고는 있다. 그러나 그 눈빛이 무섭다. 리나는 다시 한 번 더 뒷걸음질 쳤다.
『이게 바로 파멸하는 힘이죠.』
부드러운 입술이 예고도 없이 그 목적지를 향해 가볍게 내려 앉았다.
담배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쓴 향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진다. 오른손으로 그 턱을 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가로 막았다. 누르는 힘은 더 강해졌다.
『...!!』
짧은 쾌락.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 흉터가 남을 화인은 이미 찍혔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판단이 들자 얼굴을 천천히 떼어냈다.
『당신도 저와 같은 얼간이가 되어 주시길, 전 마음 깊이 바라고 있어요.』
『히익!』
『당신을 좋아해요.』
『누, 누, 누구...!』
『응? 누구?』
『누구 있으면 도와줘요!』
잘 하는 짓이다. 그게 경찰관이 할 소리던가. 리나는 속으로 자기 머리통에 알밤을 쥐어 박았다.

누구 있으면 도와줘요.
사랑을 고백했더니만 돌아온 여자의 대답이 바로 저거다.
제로스는 대놓고 어이 없어 했다.
상대가 특별난 사람이라는 건 미리 각오하고 있었지만 상상을 초월해서야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제가 무슨 치한이라도 됩니까!!』
그래서 굳건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벌컥 고함 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게 뭡니까, 사람 살리라뇨!』
『아, 아니... 사람 살리라곤 말 하지 않았어.』
『그렇게 말했잖아요!』
『아니... 난 그저 누구 도와줄 사람 없느냐고...』
『그게 그거죠!』
『저기,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아뇨!』
『여기서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 아냐?』
『당신이 아니라 내가 화내야 하는 거 맞아요!』
『이봐, 사람 살리라고 한 건 맞는데 쥐어짜면서 소리 지른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난 상처 받았어요!』
『어이, 어이.』

괴이하다. 키스 당한 건 어디에 누구인데 정작 화를 내는 건 저지른 쪽이다?
『이것 봐. 난 그저 귀엽게 소리를 지른 것 뿐이야.』
『사람 살려! 누가 있으면 좀 도와줘요!! 꺄아악~!!』
『마침 잘 되었다. 누가 또 비명을 지르는구먼. 들어 봐. 직접 듣고 비교를 하라구. 난 저런 식으로 사람 죽는다 악을 쓰며 비명 지른게 아냐. 아니... 라...』
『도와줘요~!!』
『헉!』

리나 인버스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휙 돌아갔다. 본능적으로 오른쪽 허리춤으로 손이 내려갔다. 안전 장치 해제까지 0.3초, 신경이 곤두섰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인간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다. 그것도 치한 만났다는 식이 아니라 칼을 든 변절자를 눈 앞으로 마주쳤을 때의 사람 살리라는 외침이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가 담겨 있는 그런 고함 소리였다.
일이 급하게 되었다. 시간에 늦으면 큰일 난다. 십중 팔구 이런 식의 비명을 지른 사람은 몇 분 내로 살해 당한다. 때를 놓치면 아까운 생명 하나가 꺼진다.
『제로스! 넌 얌전히 돌아 가!』
『리나씨는?!』
『따라오지 마! 위험해!』

- 타앙!
총격 소리. 직감으로 깨달았다. 가브리에프가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 겨우 단 한 발? 위협용 사격이라고 해도 한 발 뿐이라는 건 말이 안된다.
『가우리잇!』
숨도 안 쉬고 달렸다. 호흡이 가빠진 상태로는 이쪽이 불리해질 터인데 하는 수 없다. 헐떡거려서는 조준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건 애써 무시했다. 젖 먹던 힘을 다해 죽어라 뛰고 보았다. 예감이 안 좋다. 차가운 땀이 흘렀다.

『가우리?!』
『조심해, 리나!』
『!!』

최악이다. 비명을 지른 건 여자 쪽인데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건 남자 둘이다. 여자는 도망쳤나? 이 남자들은 뭘까. 일행이었을까? 아니면 생판 모르는 타인?
알게 뭐람. 하나는 이마가 깨졌다. 힘껏 밀쳐져 쓰러지면서 보도블럭에 머리라도 박은 모양이었다. 줄줄 흐르는 피가 콧잔등을 타고 가슴팍을 흥건히 적시고도 남았다. 놀란 눈동자는 크게 벌벌어져 흰 자위가 있는대로 다 들어났다. 충격 탓인가, 넘어진 자세 그대로 잘 움직이질 못하고 있다.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다리가 풀려 말을 듣지 않고 있는 듯 하다. 기껏 움직이는 건 손가락이 전부인 건지 손톱이 부러져라 땅만 후벼 파고만 있다.

『놈이야, 놈이라구! 리나!』
쓰레기통 옆으로 작은 생쥐가 나타난 수준이 아니다. 눈이 있으니 그녀도 하르시폼이 나타났다는 걸 단박에 알아 봤다. 대단한 거인이었다. 개인 파일엔 신장 182cm라고 적혀져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2미터에 육박했다. 이스트를 넣고 반죽한 식빵 같았다. 부풀어 올라 당장 터지게 생겼다. 바람을 가득 집어 넣은 가죽 주머니 인상이다. 늘어난 살갗이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곳곳이 터졌다. 갈라진 틈새로 벌건 살이 드러났다. 가뭄에 거미줄 모양으로 벌어진 흙밭 느낌이다. 입술도 갈기 갈기 찢겼다. 뺨도 핏발이 곤두서서 벌거죽죽 했다. 안구는 돌출되어 앞으로 쏟아지기 일보 직전이다. 모세혈관이 터져 그 안으로 핏물이 고여 있었다.
『이미 2차 증상에 돌입했어!』
이미 인간이란 자각은 없다. 돌진하는 전차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의식도 없다. 남아 있는 건 본능, 그리고 잔혹성 뿐이다. 하르시폼은 왼손으로 남자 한 명을 붙잡고 기괴한 쇳소리나 흘려 보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추측하자면 자기가 누군가를 움켜 잡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을 거다.
『삽시간에 저 남자를 잡아 채서 말릴 수가 없었어!』
가우리가 우는 소리를 냈다.
『제기랄!』
리나는 이미 눈치챘다.
시체다.
허리가 뒤로 꺾여졌다. 골반의 흔들거리는 모양새를 보면 알 수 있다. 척추가 부러졌다. 고통에 못이겨 크게 입을 벌린 그대로 심장이 멈췄다. 억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끝났을까. 그건 알 수 없다.

『하르시폼! 그 남자를 내려놔!』
소리에는 반응한다. 그러나 말 하는 내용을 알아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리나 인버스는 다시 한 번 더 크게 해서 외쳤다.
『하르시폼! 남자를 내려놔!』
『크어어어~~!!』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한 행동은 아니었을 거다. 그 증거로 하르시폼은 리나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쨌든 소리에 반응해서 들고 있던 남자의 시체를 내려 놓았다. 아니, 내려 놓았다는 건 지나치게 얌전한 표현이고 실상은 거칠게 집어 던졌다. 그것도 패대기질을 쳤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힘을 줘서 말이다.
『가우리, 조심해! 날아간다!』
『욱!』
사람의 몸은 결코 가벼운게 아니다. 실험 삼아 지나가던 성인 남자의 몸을 껴안고 위로 들어 올려 보라. 그대들은 아마도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사람의 몸은 무겁다. 군살이 붙지 않은 체형이라 할지언정 그 뼈의 무게 하나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그런 걸 힘 줘서 집어 던졌으니 폭탄이 따로 없다. 나무 몽둥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날아오는 시체에 정통으로 얻어 맞은 가브리에프가 가볍게 뇌진탕을 일으키고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지독히 당연하다. 무게에다 가속도, 충분히 흉기다.
『콰아아!』
『안돼!!』

생각할 것도 없었다. 넘어진 가브리에프 쪽으로 팔을 뻗는 하르시폼을 본 인버스는 슬라이딩 하듯 뛰어들었다. 타앙, 타앙, 타앙! 세 발의 총성이 그 뒤를 따랐다.
『크어~~!!』
『이런! 총알을 먹고도 끄떡 없어?!』
복부를 향해 정확히 세 발의 총을 발사했다. 가까운 거리였으니 분명 바로 맞췄다.
그러나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하르시폼은 쓰러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다. 아픔은 느낄 수 있는 건지 거대한 노성을 질러가며 팔을 휘둘렀다.
『컥!』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머리를 맞았다. 망치로 한 대 얻어 맞았다는 기분이었다. 고통은 그렇다치고 허리에서 힘이 풀렸다.
- 휘청
동시에 우두둑 뼈를 끊는 듣기 싫은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 뭐냐구, 이 소린... 여기서 나는 죽는 거야?
허망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신용 불량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코스모 시스템의 스페샬 디너 세트를 모조리 다 먹어보는 건데... 슬프다.

『리나씨! 정신 차려요, 리나씨!』
다급한 목소리.
흘끔 실눈을 떠보니 제로스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아니다, 하르시폼이다. 하르시폼의 찐빵 얼굴이 눈을 부릅 뜬 제로스와 그대로 하나로 겹쳐졌다.
누구지, 저건... 제로스인 건가, 하르시폼인 건가. 리나 인버스는 생각할 수 없었다.
『누...구?』
『리나씨! 뒤로 피해주세요!』

정답은 둘 다.
어느 틈엔가 제로스가 하르시폼의 오른 팔을 뒤로 잡아끌고 있었다. 듣기 싫었던 우두둑 소리는 하르시폼의 팔이 꺾여지면서 난 소리였던 것 같다. 제로스는 들고양이처럼 입술을 다시고 묘한 미소를 흘렸다. 하르시폼의 살갗에 단단히 박힌 그의 하얀 손가락이 한 층 더 죄여졌다. 가느다랗지만 약하지 않다. 버들가지의 가냘픔? 그런 게 아니다. 저 손은 창백한 무기다. 하얗고 아름다운 죽음의 손이다.
『제로스!』
하르시폼이 망치질하듯 남은 팔을 다시 휘둘렀다. 리나는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저런 것에 정통으로 맞으면 두개골이 부셔질 거다. 순간 겁이 더럭 났다.
『전 괜찮아요, 리나.』
그런 걸 기꺼이 가로 막았다. 이어서 호흡 하나.
『이얍!』
공기를 가르는 가파른 소리.
검정의 궤적을 그리며 큰 원이 그려졌다.
멋진 발차기였다.
하르시폼의 거대한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어서 텅 소리와 함께 바위처럼 추락했다.
『후우.』
운동 한 번 잘 했다며 제로스는 숨을 골랐다.
『잡았어요, 리나씨!』
그는 순진하게 기뻐했다.

흘끔 돌아다 보는 시선이 짜증난다. 아침부터 계속이다. 경탄의 빛이 섞인 눈초리가 위 아래로 흝고 내려간다. 가끔식 휘우~ 하는 휘파람 소리도 들려왔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나 인버스의 입이 책상 서랍 만큼이나 튀어나왔다.
『여어, 몬스터 슬레이어!』
『죽을래!』
뇌진탕을 일으켰으니 당분간은 절대 안정에 안정이라 강조를 더하던 의사의 충고도 무시하고 책상에 그냥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몬스터 슬레이어라니! 귀신 잡는 해병도 아닌데 이건 너무 심하다. 숙녀에겐 크나 큰 실례의 발언이다. 인버스의 눈초리가 살기등등해졌다.

『너무하잖아. 내가 무슨 다곤 신상 망가뜨린 삼손이라도 되는양 눈 동그랗게 뜨고 보기나 하고!』
『뭐, 실제로 너 혼자 괴물을 잡은 건 맞잖아.』
같은 자리에 있던 가우리 가브리에프는 전치 2주의 상처를 입었다. 짐짝처럼 내던져진 시체에 얻어맞고 갈비뼈에 살짝 금이 갔댄다. 덕분에 기절까지 해서 당시 일도 잘 기억 못했다. 가까스로 의식을 차린 건 엠뷸런스로 실려가는 도중이었다. 따라서 하르시폼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 그의 입장에선 아는 바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머리를 가로 저었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남는 건 너 하나 뿐이잖아, 몬스터 슬레이어.』
『제발, 그레이워즈... 그렇게 부르지 좀 말앗.』
덕분에 모든 공적은 리나 인버스에게 쏟아졌다. 어쨌든 현장에 있었던 건 형사 두 명 뿐이었고, 그 중에 하나는 범인과 우격다짐 도중에 기절했다. 나머지 하나도 본부에다 지원을 요청하자마자 쓰러졌는데 다행스럽게도 이미 그때 범인은 숨이 끊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공식이 간단해진다.
형사 하나 다운, 다음에 범인 다운, 나머지 형사 뒤 이어 다운이다.

『차례가 그렇게 되는 거 맞잖아. 그렇다면 하르시폼은 네가 쓰러뜨린 거 아니냐?』
『...』
그녀는 무의식중에 시퍼렇게 색이 변한 이마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여기서 무어라 답을 하면 좋을까. 내가 그런 게 아니라 마침 근처에 있던 특수 사법관이 잡은 거라고? 농담이 아니다. 아무리 철부지라지만 해서 괜찮은 말과 안될 말은 구분할 줄 안다.
리나는 끙 소리를 내뱉고는 멍 자국을 가볍게 쓸었다.
특수 사법관에 대한 이야기는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모조리 탑 시크릿이다.
결국 괴물을 잡은 건 보고서로 제출한 내용 그대로 리나가 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이다.

『몬스터 슬레이어라니... 제기랄.』
울컥- 하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그녀의 동료들은 리나를 괴물 중의 괴물 취급을 하면서 골려댈 것이 뻔하다.
최강 중의 최강.
괴물을 잡는 키 작은 여자.
함부로 건들이면 뼈도 추리지 못한다.

『뭘 먹으면 그렇게 힘이 세어지지? 미스 인버스!』
『네 거시기 고기를 먹으면 힘이 솟는다. 어쩔래!』
『아이구, 무서워라~』
와하하하 웃는 거친 소리.
리나는 뚱한 표정을 짓고 단단히 팔짱을 꼈다. 어차피 놀림을 당해야 한다면 당해 준다. 까짓 것!
대머리만 안된다면야 무엇이든 참을 수 있다.
『어쨌든 크게 다치지 않고 돌아와서 다행이다.』
『뭐...』
『귀환을 환영한다, 몬스터 슬레이어.』
『칵-』
한 동안은 재기 불능이다. 진짜로 망해버렸다.
다음에 언제 만날 지도 모르는 고양이 덕분에...
아니, 고양이인척 위장하는 사자 한 마리 덕분에...

- 제로스, 언젠간 널 붙잡아 뜨겁게 복수해주겠다
바짝 약이 오른 상태 그대로에서 사팔뜨기 시선을 하고 정면을 응시했다.

어쩌면.
그나마 위안인 건...
복수의 날은 멀지 않았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