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셋이라는 숫자를 세면 당신은 최면 상태에서 깨어납니다. 하나, 둘, 셋.

그 즉시 무덤가에서 처녀 귀신과 딱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한기가 들었다.
팔뚝으로 용의 비늘 모양의 소름이 쫙 돋았다.
눈을 번쩍 뜨고 보니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 장소였다.
여기는 어디? 차갑게 식은 팔을 장갑 낀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려봤다.

바닥이 대리석처럼 맨질거렸다. 그 말인 즉, 인공 구조물이라는 소리였다.
넓직한 방?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장소가 컸다. 좌우를 둘러봐도 벽이라 짐작되는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앞을 봐도 운동장, 뒤를 봐도 뻥 뚫린 운동장이었다. 아련하게나마 수평선이 보였다. 대단한 크기다. 그러나 장담하건데 야외는 아니다. 바람 한 점 없는데다 오랫동안 환기를 시키지 않은 다락방에서나 맛볼 수 있는 특유의 텁텁한 기운이 느껴졌다. 콧구멍 안으로 고운 먼지가 날아들었다.
뭐니뭐니 해도...
고개를 뒤로 젖혀 한참동안 위를 바라보던 제르가디스는 참았던 끙 소리를 내고 말았다. 도무지 믿기질 않는 일이었는데 구름이 엷게 깔린 저 하늘 위로 누군가 마분지로 오려붙인 듯한 둥근「구멍」이 나 있었다. 지나가는 비행접시에 햇빛이 굴절된 것이 아니라면 저런 건 자연 상태에선 절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건 말도 안돼.』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지붕으로 동그란 채광창이 달린 걸 떠올리면 아마 비슷할 게다.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천국으로 향하는 입구가 달렸다. 보름달 형상이다. 그곳을 통해 희뿌연 빛이 스며들었다. 우윳빛의 부드러운 광선은 일직선으로 똑바로 내려와 제르가디스가 발을 딛고 선 바닥 부분까지 적셨다.

자, 그럼 여기서 생각을 해보자.
우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첫 번째 가설은 발을 헛디뎌 우물 밑바닥 비슷한 곳으로 추락을 했다는 거였다. 대형 깔대기를 연상시키는 전반적인 모양새는 그 가능성을 짐작케 했다.
여기서 문제.
우물치고는 물기가 말라버린 흙바닥이 지나치게 넓었다. 크기로 봐서는 우물이 아니라 전체 서울시 시민을 먹여 살리는 팔당 저수지였다. 운동장 크기는 그렇다 치자. 정작 그의 몸으로 추락의 흔적이 눈꼽만치도 없음이다. 구석구석 더듬거려 봐도 긁히거나 멍든 자국 일절 없었고, 욱씬거리는 상처자국하나 없었다. 저만한 높이에서... 웃기는 얘기였다. 운이 좋아 삼단 매트리스 위로 떨어졌다고 해도 갈비뼈 정도는 부러져야 맞다. 그런데 얼룩하나 묻지 않았다.

우물 어쩌고 생각은 버렸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맙소사,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름은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 가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혈혈단신 외토리에다가 열 다섯 살 생일이 지난지 약 200여일이 지났을 무렵에 증조 할아버지뻘 인간에게 대단위 사기를 당해 흉측한 키메라로 개조당했다. 특기는 라 틸트,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고저 클레어 바이블을 찾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이쯤해서 소년은 손가락 하나를 지그시 빼어 물었다. 적어도「내 이름이 뭐지?」수준은 아닌 셈이다. 부분적인 기억력 또한 멀쩡해서 어제 저녁으로 반쯤 익힌 계란과 누룩 넣은 빵 한 덩이, 말린 육포 약간과 한 줌의 건포도를 먹었다는 걸 고스란히 생각해냈다. 식욕이 없어 아침 식사를 건너 뛰었다는 것도, 대신 차를 마셨다는 것도, 물이 끓는 동안 소일거리한답시고 닳아 빠진 소매춤을 바느질로 대충 꿰매 고쳤다는 것까지.
그런데 그뿐이었다. 이런 황당한 장소로 떨어지기 전까지의 소솔한 기억이 없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탈색되었다는 기분이다.
『제길, 상황으로 봐선 아무래도 고약한 마법 결계 안에 갇힌 느낌인데...』
이쯤해서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자질구레한 고민은 나중이다. 일단은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보는 게 순리였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정상적인」땅을 밟는 것이 급선무,「사방이 뻥뻥 뚫린 특수 형태의 감옥」이라는 상황에서 걸어서 산을 넘어간다는 식의 스토리가 진행될 수 없는 고로, 제르가디스는 관심을 저 높디 높은 하늘 위의 구멍으로 두기로 하였다.
문이 있으면 열어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라던가, 어쩌면 창문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그리로 통해 빠져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레이 윙-』
마력을 모으고 주문을 영창했다. 몸이 둥실 떠올랐다. 구두 밑창이 지면으로부터 떨어졌다. 허리를 똑바로 펴고 정신을 집중했다. 공기가 그를 받쳐 들고 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다소 조급한 심정이 들었다. 좀 더 빨리...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깊은 바다로 가라앉은 어부가 한 줌의 산소를 갈망하듯 허공을 갈퀴짓했다.
그렇게 한 10여분?
말이 10분이다. 웬만한 산을 세 개 쌓은 높이 정도는 올라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저 위로 달린 구멍의 크기는 조금도 변하질 않았다. 애시당초 그렇게 보이게끔 못박혔다는 듯,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느낌은 일절 없었다.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되도다. 그의 노력은 한바탕 비웃음을 당했다.
수상하다. 날아 오르기를 멈추고 잠시 허공에 둥실 떠서 돌아가는 상황을 저울질했다. 이게 아니다 싶었다. 멈칫, 기분상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그는 자지러지게 깜짝 놀랐다.
거짓말처럼 지면에 발이 닿아있었다.
그렇게나 높이 올라왔건만 아차하는 사이에 거리는 제로가 되었다.
『뭐야, 이건!!』

하지만 당황해하고 있을 틈도 없었다.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음에 허둥대고 있는 와중에 또 다른 스트레이트 펀치가 재차 날아들었다.
사각의 링에서 권투 선수는 코피를 흘렸다.
상대방 선수는 그를 코너로 밀어 넣고 정신 없이 밀어붙였다.

찌릉, 차라랑.
꿈에서조차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왔던 익숙한 소음 하나가 그의 귀를 자극했다. 차라랑... 고양이를 부르는 주인의 신호음이었다. 그것은 단단한 쇠붙이에 은구슬이 튕겨 오르면서 만들어지는 깊이 무거운 울림이었다. 충성을 시험하고, 복종을 다짐하며, 맹신을 조장한다. 차라랑... 본능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다고 울림이 그칠리 만무하겠으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공포심으로 인해 온몸의 신경이 마비될 참이었다.

레죠.
그의 주인이라 자신을 명명했던 동안의 늙은이.
소년은 미친 듯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제르가디스, 한참 찾았습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겝니까.》
귀신 나왔다.
백옥의 피부를 가진 이 빼어난 미모의 붉은 악귀는 언제나처럼 근엄하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었다. 곱슬기가 남은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은 손질이 덜 되어 옆으로 살짝 삐져 나갔다. 하지만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 제멋대로인 머리카락은 맹인 특유의 생기 없는 이마에 활력을 덧칠하고도 남아 그의 전반적 이미지를 모호하게 비틀어 놓았다. 꽉 막힌 이론주의자의 입매에 엉뚱하게 장난기 가득한 코가 붙어있다. 근엄하다 싶은 표정에 얼핏 개구쟁이의 엉뚱함이 섞여 있다.
제르가디스는 생김새만큼이나 성격 또한 불가사의했던 이 사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징하다, 적법사... 일국의 왕에 버금가던 높으신 위엄은 고추장을 덧발라 양념으로 버무려졌다. 황공하옵게도 그는 빨간 팬티 한 장 달랑 걸친 채 지팡이를 흔들어대고 있는 중이셨다.
커다란 키의 사내가... 보이고 싶은 내의 광고를 표절했다.

제르가디스의 턱 관절이 하마의 그것처럼 쩍 벌어진 바로 순간, 레죠 - 또는 레죠의 환영이라 의심되는 그것은 다시 한 번 더 지팡이를 휘둘러 쩌렁 울림을 만들었다.
《제르가디스, 답답하군요. 제 신관복의 다림질은 다 끝마쳤나요.》
『뭐여?!』
차라리「당신은 이제 곧 키메라가 될 겁니다. 레드 썬!」이라 말했다면 덜 놀랐을 것을.
《제 신관복 다림질... 맏겨놓은지 한참이잖습니까. 내놓으세요.》

최근에야 겨우 알아낸 사실이다.
레죠를 낳은 여자는 격식을 매우 중요시하는 보수적 경향의 집안에서 자랐다. 허영심과 자존심은 그녀의 가진 것 전부여서 당장 굶어죽을지언정 우아하게 촛불을 밝힌 집안 구석구석을 최신 유행의 가죽 구두를 신고 누벼야 비로소 만족했다. 그러니 당연한 결과였다. 참나무를 연상시키는 이 고집 센 여인은 앞이 보이지 않는 아들이 팔을 앞으로 내밀고 사방을 더듬거리기라도 할려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호된 매질을 가해 그 창피스러움을 징벌했다.
- 장님인 척 하지 마세요. 그건 아주 추한 짓거리입니다.
아들이 진짜 맹인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애써 부인했다. 피가 나도록 아들의 등짝을 후려갈기는 것으로 레죠가 못된 장난질, 일명 장님 흉내를 내지 못하게끔 막았다.
- 우리 아들은 고약한 버릇을 가지고 있어요. 눈이 안보이는 척 하거든요.
이런 식의 학대는 그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델루이스 지방의 사원 소속 어린이 고아원으로 낼름 버려질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반복되었다. 그 결과, 레죠는 눈을 감고도 보통 사람들처럼 팔 다리를 각게로 흔들어가며 자연스러운 자세로 거리를 누비는 놀라운 재주를 터득했다. 그러나 흉터 또한 만만치가 않아 평생 남 앞에서 자기 몸을 드러내는 일 없도록 세심하게 주의했다. 뭐, 자기 입으로는「나는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데 남에게는 공짜로 내 몸을 보여준다는 건 아무래도 형평성의 법칙에 어긋난다」라고 주장했지만... 노출 노이로제는 상당히 심각하여 찌는 듯한 한 여름에도 복숭아 뼈를 덮는 기다란 옷을 고집했다. 하느님이라 해도 그의 맨 가슴 살로 손을 얹을 수는 없을 거라 다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빨간 사각 팬티의 레죠는... (여기서 제르가디스는 울었다) 정말로 근엄하게... 말도 안되게 근엄하게 자신의 신관복 다림질을 채근했다.
당신의 가슴털은 어린애 솜털처럼 하얗군요, 옳커니! 배꼽 위로 점이 하나 있고.

『끄악! 이건 꿈이야, 악몽이라고!!』
반사적으로 뺨을 꼬집었다.
어랍쇼.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세상에나, 정말로 꿈이었다.
망연자실.
헉 하고 숨을 들이킨 바로 그 때, 이번에는 부산을 떨며 뛰어오는 어연 정신 사나운 총각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누군가 개구쟁이 스머프의 트랄랄라 스텝으로 춤추며 다가왔다.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큼직한 키에 머리로는 벌꿀이 잔뜩 발라져 노랗게 반짝거렸다. 파란 눈동자엔 상냥함이 가득해 흡사 바른 생활 공익 광고에 등장하는 정치꾼 모델 같았다. 익살스러운 몸집으로 트랄랄라, 허리를 비틀고 장난을 가득 담아 트랄랄라, 모듬 발로 껑충.
여어, 안녕하쇼.

『가, 가우리?』
『여어, 친구! 바쁘다, 바빠. 아차하다가 그만 파티에 늦고 말았어. 아가씨들을 기다리게 하는 건 신사의 도리가 아닐 터인데 말이야. 그치?』
의기양양해하며 다이아몬드 어금니를 반짝이는 사내가 치즈 해파리 두뇌 가우리와 동일 인물이라고 그 어느 누가 인정할 것인가. 제르가디스는 거의 넋을 잃었다. 제임스 본드의 작업복 - 일명 턱시도라 하는 것을 입고 빨간 나비 넥타이를 매었다. 의상에 한껏 멋을 부린 가우리는 손으로 재킷의 깃을 바로잡고는 목에다 힘을 잔뜩 주었다. 구두는 파리가 미끌어져 뇌진탕을 일으킬 만큼 번지르르 했다. 커프스로 사파이어 보석이 장식되어졌다. 갗 면도한 뺨은 금방 삶아 건져 올린 달걀을 연상시켰다. 강렬한 향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오호라, 주의해서 보니 명찰이 가슴팍에 걸려 있었다. 거기엔 카사노바라는 글자 네 개가 선명하게도 박혔다.
6시엔 주디, 7시엔 맨디, 8시엔 아코디, 9시엔 브레들린... 12시엔 브라보 콘을 만나요.
가슴 큰 여자들이 키스를 날려보냈다. 줄은 길게 늘어졌다. 스케쥴은 만원이었다. 가우리는 인상을 쓰며 입맛을 쩍쩍 다셨다. 몸이 두짝으로 분열하면 소원이 없을 터인데, 품 안에 안을 여인들의 수가 바닷가 조가비처럼 너무도 많음이었다.

『그쪽은 파티에 늦지 않았나요?』
두툼한 수첩을 뒤적거리던 가우리가 이번에는 레죠를 향해 돌아섰다.
『이거 참 황망스럽습니다. 신관복 다림질이 늦어지는 바람에...』
『신관복 같은 소리! 의상실에 가서 새로 장만해요. 바로 나처럼! 저 아래로 죽 내려가셔서 좌측으로 턴하시면 됩니다. 왕실 공인 재단사 마크가 부착된 집이 있지요.』
레죠는 잘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거기서 토끼 오빠 인형 옷을 맞춰 입을 수 있을까요?』
『카드로 긁으슈. 12개월 할부도 가능할테니 부담도 없을 게요.』

이들 대화는 못 들은 걸로 치부했다. 방정맞은 두 사내를 외면하고 선 제르가디스는 차분하게 구구단을 암송했다. 소년은 지금에서야 정신 공격의 심각함을 깨달았다. 아울러 그 파급 효과의 막강함까지... 물구나무 서서 코코넛 열매를 한꺼번에 열 다섯 개를 집어삼켰을 적에야 맛보았던 울렁거림이 다시금 재현되었다. 흥분한 나머지 수족이 바들바들 떨렸다.
토끼 오빠 레죠라니! 카사노바 가우리?

제르가디스는 얄궂은 이를 벅벅 갈아댔다.
『어렴풋하게 짐작이 간다, 짐작이 가. 현실과 정 반대로 나타나신다 이거지? 불가능한 것들이 실체처럼 보인다 이거 아냐. 망상의 나락이구나, 망상의 나락이야! 내가 드디어 지옥으로 떨어졌구나!』
뇌가 흔들리도록 도리질했다. 다음으로 나타날 게 무언지 너무나 뻔했다. 아멜리아다. 정의의 용사가 아닌, 밤의 예술가이자 어둠의 지배자인 아멜리아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남의 가슴에다가 Z글자를 박아 넣는 쾌걸 조로이자 귀신처럼 남의 금고를 털어먹는 괴도 루팡이다.「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다는 건 이미 오래 전에 유행이 지났거든요.」당신은 조직의 쓴 맛을 알고 있는가? 탄탄한 몸에 들썩 달라붙는 섹시한 가죽 옷을 입은 공주님은 담배 하나 질겅 깨물 것이다. 허전한 손으로 기관총 하나 들고 이렇게 외치리라.
자! 이제부터 공주라 하지 말고 나를 여왕님이라 불러라~

《제르가디스씨?》
『썩 물러가, 아멜리아!』
《어머! 누가 아멜리아라는 거예요. 저예요, 저, 당신의 제로스.》
『샤브라니구드시여!』
버지니아 울프는 노래한다. 너무도 아름다웠던 소년 올란도는 상기된 뺨을 살짝 숙이고 여왕 엘리자베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장미수에 꽃잎을 띄워 여왕의 손을 적신다. 폐하께서 지배하시는 위대한 대 영국 제국의 일부로서 미천한 소인이 우리 왕께 사랑을 바칩니다... 소년의 가슴은 작은 울새처럼 방망이질 했다. 하여 여왕은 축성했다. 영원히 시들지 말지어다, 그대 올란도.
제로스는 어린애처럼 환하게 웃어 보이며 제르가디스 앞으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신성 문자로 전면이 조각되었고 금박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오래된 호두나무 상자였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그가 뚜껑을 열었다. 심한 방부제 냄새와 함께 좀이 쓸어버린 낡은 종이 뭉치가 나타났다. 제르가디스는 몽둥이로 얻어 맞았다며 펄쩍 뛰었다.

《제르가디스씨에게 필요하실 것 같아 이 몸이 직접 죽을 고생을 해가며 힘들게 찾아왔습니다. 클레어바이블의 사본이예요. 제발 저의 정성을 생각해서 거절하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일이 이렇게 되면 허탈한 웃음만 나오는 법이다. 제로스가 누구던가. 드디어 사본을 찾아냈다 좋아라 하면 등 뒤에서 낼름 빼앗아 쥐고 박박 찢어 갈기는 위인이었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가장하고 온갖 심술이란 심술은 다 부렸다. 병 주고 약은 안 줬다.
『차라리 날 기절시켜라. 이 나쁜 놈아.』
주먹을 쥐고 제로스의 얼굴을 한 대 후려갈겼다. 볼 것도 없었다. 제르가디스는 등 돌리고 서서 이 기분 나쁜 곳으로부터 당장 탈출하겠노라 맹세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머리도 식힐 겸 3차원 공간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사실 이건 어린애 놀이처럼 간단하다. 공간 구조라는 건 위와 아래,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으로 대표되는 주변 둘레라는 게 있다. 뚜껑이 덮인 네모난 상자곽을 상상하자. 제르가디스는 지금 그 상자곽 속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6개의 면으로 가로막힌 이곳에서 입구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천장으로 출구라 의심가는 구멍이 하나 달렸으나 확인 결과 그 위에까지 도달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출구가 달렸을 법한 다른 벽면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긴데... 이게 좀 그렇다. 일단 공간의 끝이 안보였다. 좌우로든 어디든, 벽을 찾으려면 미친 듯이 이 세계의 끝을 찾아 방황을 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쯤에서 소년은 검을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은백색의 날이 번득였다.
좌우로 벽은 보이지 않는다. 천장으로는 손이 닿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그는 공간의 한 측면에 몸이 닿아 있다. 그걸 부수면 된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진실... 저 아래로 바닥이 있다.
『아스트랄 바인.』
이제 칼날로 땅바닥을 내려치기만 하면 된다.

《아빠?》
휘청-
넘어질 뻔한 자세를 가다듬고 목구멍 위로까지 튕겨 오른 심장을 겨우 집어삼켰다. 환장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 온몸의 장기를 입 밖으로 꺼내 물로 씻는다라는 게 어떠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프고 끔찍했다. 혼백마저 씻겨져 물에 떠내려갔다. 불꽃은 살을 태우고 뼈만을 남겼다.
태양 옆으로 하얀 달이 떠오른다. 낮에 뜨는 달이다.

《이제 오세요, 당신. 수고하셨어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끈으로 묶어 위로 틀어 올렸다. 전형적인 가정 주부의 소탈한 모습이었다. 앞치마에 손을 부비면서 여자는 까르르 웃었다. 두툼한 살집에 약간 부어 오른 얼굴... 전날 밤에 라면을 끓여 먹어서가 아니라 임신 8개월째라 그렇다.
《파피, 마미가 해물 전골 요리 만들었어요. 오시면 같이 먹자고 지금껏 기다렸어요.》
《우리 귀한 아들네미가 배고파 죽는답니다. 여보? 손 씻고 어서 오세요.》
《저기... 손 안 씻어도 안 죽어요. 그러니 빨리 오세요.》
마냥 졸라대는 아이는 제 엄마를 속 빼다 닮았다. 불타는 듯한 빨간 머리다. 고집스런 눈썹이라든지, 가느다란 선의 턱 모양도 제 어미 모습 판박이었다. 다만 안어울린다 싶도록 눈동자만큼은 깊은 바다색이었는데 그것은 키메라가 되기 전에 제르가디스가 거울 속에서 반갑게 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아빠?》
날 죽여라.
《아빠아-》
모두 죽어버려라.
그들 - 허깨비들을 쫓아 망각의 강바닥 아래로 기꺼이 가라앉겠다는 욕망을 억지로 떨궈내는 일은 그리 쉽지는 않았다.
아이의 머리에 키스해주고... 몸이 불편한 마누라를 위해 설겆이를 자처하고...
그게 현실에선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란다.
발 아래를 향해 검날을 찔러 박을 적에 어지럽게 흩뿌려지던 물기가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대략적이나마 그의 허탈감과 분노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이제야 깨어나셨습니까?』

심각한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가 한참만에 부스스 눈 뜨고 일어난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몸은 여기저기 걸렸다. 차가운 바닥에 꽈배기처럼 몸을 비틀고 누워 한참을 기절해 있었으니 관절이란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도 남았다. 실제로 제르가디스는 손가락하나 꿈쩍일 수가 없었다. 어깨를 움직이자 칼날이 뼛 속을 긁어대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굳은 근육들이 내지르는 통증의 비명소리가 어찌나 요란뻑적스럽던지 의지만으로는 옆으로 돌아누울 수조차 없었다. 당연했다. 고통은 한참동안이나 험하게 굴러다닌 댓가였다.

『망할 자식.』
참으로 야속하다. 사람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면 적어도 망토자락으로 몸을 덮어주던가, 반듯이 눕히던가 해야 할 게 아닌가. 나는 몰라요~ 식으로 멀뚱 앉아 턱받침을 하고만 있는 제로스를 향해 원망의 시선을 바가지로 던졌다. 무릎 베개를 해준 뒤에 뺨을 쓸어 내리며「편히 쉬세요, 달링」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정말로 제로스가 그랬다면 일부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겠지만 그는 게거품부터 물었다. 오버 서비스는 사절이었다. 허나 벌레가 콧잔등을 깨물든 말든 멋대로 내버려 두었다는 점에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멀쩡하게 숨 쉬고 있는데 거기서 제가 뭘 더 해야 하나요?』
『그래, 그래. 기절한 사람을 발로 밟지만 않아도 다행이지.』
『의식이 없어 아파하지도 않는데 뭐 하러 발로 밟아요.』
『아아, 그만해. 토론하고픈 기운따윈 없어. 그나저나 내가 뻗은지 얼마나 되었지?』
『글쎄요, 코를 박고 쓰러진지 거진 다섯 시간 정도?』

엉망으로 부셔졌던 기억의 파편이 슬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제헤나 지방이다. 엊그제부터 그는 이형제회 성직자들의 순례지에 무단으로 들어와서 봉인된 지하 무덤을 뜯었다. 비문에는 여기 아래로 고대의 신령한 제기 - 진실된 성직자라면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겠지만 위선으로 가득찬 성직자가 그걸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는다는 어느 고귀한 물건에 대한 이야기가 고대 크랍수시아어로 적혀져 있었다.
이젠 전문 도굴범들 사이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제르가디스가 어물전 앞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척 하면 삼천리, 유적의 보존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라 벽돌을 깨고 신상을 날리고 종주먹질로 인장을 깨부셨다. 그렇게 해서 머리카락 한 올 붙어있지 않은 옛날 성자들의 낡아빠진 유골 틈새로 제법 가치가 있어 뵈는 성보 상자를 발굴해냈고... 손등으로 쳐서 자물쇠를 박살냈다.

『당신이 찾아낸 거, 망상의 단지라는 거예요.』
『어쩐지. 말도 안되는 헛것이 다 보이더군.』
『호오~ 그랬어요? 재미 있었겠네요.』

제르가디스는 신난다 식의 표정을 하고 앉은 제로스를 도통 믿기질 않는다는 투로 바라보았다.
재미? 재미 같은 소리! 덜 깨우친 승려가 그놈의 단지를 두손으로 받쳐 들었다가 숨 넘어갔다는 건 어디까지나 공갈이 아니다.

『아무렴요, 오랜 금욕생활에 지쳐 주지육림을 본 승려도 있었을 것이고... 반복되는 금식에 넌더리가 난 나머지 상다리 휘어지게 잘 차린 상차림을 본 승려도 있었겠죠.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겠다 생각할 정도로 강렬한 망상일 겁니다. 그래, 그래서 당신은 그곳에서 뭘 봤나요?』

글쎄. 뭘 보았더라.
뭘 보긴 봤는데.
아, 그렇지.

『사람을 봤어.』

돌아온 대답은 그게 전부.
욱씬거리는 몸을 추스린 소년은 밑바닥 깨진 호리병을 쓰레기 버리듯 멀리 집어 던진 뒤에 가방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