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하지 않고 단검을 높게 치켜 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서늘한 외기에 닿아 쩡 소리를 냈다.
아아, 괜찮다. 그것으로 사람 찔러 죽이겠다는 건 아니니까 긴장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이건 횟불 대용품이다.
일찌감치 라이팅 주문을 걸어놓은 검은 칼집에서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환한 빛을 내뿜었다. 덕분에 어둠에 익숙해진 모두의 눈이 잠시나마 일그러졌다.
오래된 유적일수록, 그리고 지하 깊은 곳일수록 공기 중에 가스가 차 있을 확률은 높다.
그것은 무색무취의 암살자... 등잔에 불 붙여보겠다면서 부싯돌 꺼내들었다가 펑 소리와 함께 뼈도 추리지 못했다는 도굴꾼 이야기들은 그래서 주변으로 흔하게 널렸다.
때문에 리나 일행은 - 이라 적고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전문적인 유적 털이범이라 읽어야 옳다 - 처음부터 마법의 힘으로 어둠을 물리치는 쪽을 선택했다.

『여어? 이 정도면 괜찮지?』
리나는 단검을 횟불처럼 들고 제르가디스 옆으로 가까이 붙어 섰다. 지도로 여겨지는 종이를 들고 있던 제르가디스는 가볍게 픽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리나는 생각했다. 이 정도면 글자를 읽기에 불편함은 없을 터, 단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사람의 의지에 영향을 받아서일까, 단검이 내뿜는 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제르?』
속단이다. 잘 보이긴 뭔가 잘 보이이냔 말이다. 그답지 않게 짜증을 냈다.
『좀 더 가까이. 잘 안 보인단 말이다.』
『농담이겠지. 이걸 더 가까이 들이댔다간 콧구멍을 푹! 찌르게 생겼다는 걸 잊지 마시길.』
『그럼 찔러.』
『어이?』
얘가 미쳤나. 반응이 험악하다. 리나는 정색을 하며 표정을 달리했다.

어쨌든 날카로운 칼 끝으로 콧구녕을 찔러대라는 건 질 나쁜 농담이 분명한 것 같다만...
흠흠, 지도 내용이 잘 안 보인다는 점만은 틀림이 없는 듯 싶다. 인상파 스타일의 찡그려진 눈썹에 난처함과 당혹스러움까지 양념으로 더해졌다. 쓰레기통 속의 알루미늄 맥주 깡통처럼 위 아래 살갗이 납작하게 맞붙었다.
약간의 한숨- 정말로 안 보인다는 거다.
『제기랄, 안 되겠다. 그러지 말고 가슴 안 주머니 속에서 안경을 찾아 꺼내주겠어? 뭔 놈의 지도가 이렇게 꼴통으로 생겨먹... 왓왓- 리나! 그렇게 더듬거리지는 말고!』
시키는 대로 안 주머니에서 안경을 찾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제르가디스의 반응은 도를 넘었다. 리나가 손을 뻗어 셔츠 자락을 살짝 건드리자마자 기겁을 해대며 옆구리를 틀었다.
- 이 자식이!
만져서는 안될 부분을 건드린 것도 아니다. 농을 부리며 노골적으로 쓰다듬은 것도 아닌데 여자 치한 나타났다 과장을 하다니. 그런 태도에 리나는 상당한 불만을 품었다.
- 그래, 예민하다 이거냐
어렵게 찾아낸 안경을 콧잔등에 씌워주다 말고 그의 발을 있는 힘을 다해 꽉 밟아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우왓?!』
『아아, 별 거 아냐. 발 아래로 독충 한 마리 지나가는 것 같아서 말이지.』

여하간 그들은 그리 기분이 좋지가 않은 상태였다.
일단 쓸데없이 말을 많이 했다. 입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손과 발을 휘저어댔다. 당연히 누적되는 피로감은 여느 때의 곱절 이상이었으며, 그에 따라 신경도 곤두섰다.

첫 번째, 장소.
아치 형의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습도가 상당히 높아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고 해도 그런가 보다 믿게 생겼다. 덕분에 바닥은 이끼가 잔뜩이었으며, 필연적으로 미끄러웠다. 조심해서 걷는다고 주의를 하고는 있지만 5분에 한 번 꼴로 주룩 미끌어져 그때마다 벽에다 손을 짚어야 했다.
『더러워!!』
벽에는 습기를 좋아하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 잔뜩이었다. 어두운 곳에 적응한 생물답게 시력은 발달하지 않은데다가, 껍질은 물렁거리고, 축축한 분비물을 잔뜩 뿌리고 다니는 그런 녀석들이었다. 돈을 거져 준다고 해도 만지기 싫은 놈들이었다. 리나는 죽는다 치를 떨었다. 장갑이 더러워지는 건 둘째 문제다. 어딘지 모르게 이런 생물들은「치명적 병균」을 연상시켰다. 소화가 덜 된 피자를 고스란히 게워낸 듯한 토사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장갑에 잔뜩 묻었다. 그 혐오감에 리나는 절규했다.
『으으, 이런 건 질색이야!』

여기서 두 번째.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그들은 현재 앞으로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세 시간 넘게 같은 장소에서 헤메고 있는 중이시다. 동서남북은커녕 왼쪽 오른쪽도 헷갈리고 있는 판국이다. 손으로는 지도가 들려져 있고, 제르가디스의 소지품 속엔 나침반까지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었다.
『제르, 지도는 그만 쳐다보고 나침반 좀 읽어 봐.』
소용 없다. 나침반의 바늘이 뱅글뱅글 돌고 있다. 제르가디스는 도리질했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원인으로는,
1) 나침반의 고장 (이런 물건을 돈 받고 판 만물상 주인은 감히 저주를 받을지어다)
2) 근처에 강한 자력을 지닌 커다란 돌이 있다
3) 주변으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마법진이 있다. 이 경우에도 나침반은 제 기능을 잃는다
등이 있다.

『지금 이 상황으로 보자면 세 가지 원인 모두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제르가디스는 착 가라앉은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교양 넘치는 화술일세. 세 가지 모두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까놓고 말해 원인을 전혀 모르겠다는 얘기잖아!』
리나는「그깟 싸구려 나침반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렷!」고함을 질러댔다.

허나 여기서 가만히 비난만 받고 있을 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도는 뭐냐. 어린애가 장난치며 그려댄 낙서라든?』
이에 질새라 소년은 그간 차곡차곡 쌓여온 분노를 조용히 드러냈다.
객관적으로 분석하자면 그들의 방향 상실은 나침반 때문이라기보다는 리나가 가지고 온 지도 탓이 더 컸다. 제르가디스는 기회다 싶었던지 이참에 드러내놓고 화를 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지도는 어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그려진 모양을 한 번 보자. 바위 입구로부터 시작된 지하 통로는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 내려갔다. 굵은 겹선으로 그려진 터널은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두 갈래로 나눠졌다. 한쪽은 암반에 가로막혀 도중에 길이 끊겼다. 다른 한쪽은 보물 창고의 입구다. 단순하기 그지 없다. 어린애라도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림만 보자면 여기서 길을 잃어버린다는 건 가우리 뺨 치는 치즈 해파리가 아닌 이상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재 조난자 로빈슨 크루소 흉내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시다.
할 말이 있으면 해봐라, 제르가디스는 지도를 활짝 펼치고 리나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네가 가지고 온 지도는 세상에서 둘째라고 하면 이가 흔들리도록 억울한, 지상 최대의 엉터리야, 리.나. 인.버.스.』
이름을 풀 네임으로 불렀다. 그것도 또박또박 힘 줘서 말했다. 이건 상당히 성질이 났다는 증거...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그는 리나의 이름을 풀 네임으로 욾어대지 않는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리나는 본능적으로 목을 움추렸다. 풀 네임을 딱딱거리며 불러대는 제르가디스는 어딘지 모르게 고향에 있는, 차가운 성격의 언니를 연상시켰다.

『내 잘못이 아냐, 원래 이렇게 생긴 거 맞아. 난 그대로 베낀 것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여기서「아, 그렇습니까」라고 대꾸할 그가 아니다. 차갑게 눈을 부라리며 건조한 목소리를 내는 그의 모습은「거짓말 하지 마!」식으로 윽박지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대로 베꼈어? 하지만 우린 직선의 도로가 아니라 완만한 곡선의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어. 똑바로 난 길은 어디에도 없었고 말이다.』
여기서 제르가디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벽에다 못을 박을 적에는 적당한 리듬이 필요한 법. 일단 한 박자 건너뛰고 난 다음, 다시 망치로 힘 줘서 쾅 후려갈긴다.
『뭐, 그런 건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자구. 파르테논 신전의 지붕 처마는 멀리서 보면 반듯하게 잘린 직선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자로 재어보면 완만한 곡선이라잖아? 그게 구부러졌든 아니든, 기울기야 눈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 허나!』
망치질이다. 쾅 때려 박는 거다.
『그렇지만 이건 어떻게 설명할까. 이것으로 우린 네 번째 갈래길에 도달했다고. 지도에선 갈래길은 딱 하나만 있다고 했는데 말이지... 이번으로 네 번째야, 네 번째!』
『누가 그걸 모른대?! 왜 나에게 화내는 거야, 제르가디스!』

작전 명, 마족의 가방 몰래 털기.

쉬운 일은 아니다. 마족은 잠을 자지 않는다. 따라서 자는 틈을 타서 가방을 몰래 뒤진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갈겨 잠시 기절시킨 뒤에 그 틈을 노려 가방을 더듬으면 어떻겠느냐고? 포부를 접어라. 마족이라는 존재를 그깟 몽둥이로 가볍게 기절시킬 수 있다면 왕궁 마도사들이 죽어라 해가며 드래곤 슬레이브 주문에 탐닉할 까닭이 없다. 자고로 아리랑 치기라는 건 약해빠진 인간들에게나 먹히는 거다.
하지만!
포기는 이르다.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의외로 간단한 꼼수가 있었나니.

- 목욕을 하면서까지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있을 수는 없지

리나가 내놓은 아이디어는 아주 그럴 듯 했다. 제르가디스는 박수까지 치며 응수했다.
- 그거 좋은 생각인데
- 난 천재라니까~ 우호호호~♡

최대한 꽤재재한 몰골이 되기까지 인가가 드문 야산을 돌아다녔다. 방금 지나쳤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어디서 봤던 나뭇가지를 분지르고, 반나절 전에 타고 넘었던 그루터기를 다시금 밑으로 기어서 통과하고... 사흘을 강행군을 했다. 적당히 썩었다고 생각이 들 때까지 산속을 헤집고 다녔다. 겨드랑이에서 된장 익는 냄새가 진동하도록, 발바닥에서 계란 썩는 악취가 풀풀 풍기도록 참고 참았다. 견디기 힘들었으나 참았다.
그럭저럭 발효(?)가 되기까지는 약 사흘의 시간이 꼬박 걸렸다.

리나는 눈짓했다. 제르가디스는 기다렸다며 비누를 높게 들고 외쳤다.
「사흘이나 되도록 발바닥에 물방울 하나 묻히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나!」
「우우- 된다고 하자!」
「잔소리 말고 일동 앞으로! 제로스, 너도 빠지지 말고 따라와」
「왜요?! 저는 체질상 땀을 흘리지 않습니다. 전 괜찮습...」
「땀은 안 흘렸다고 해도 먼지는 충분히 뒤집어 썼잖아. 잔소리 말고 때 빼!」
「우엥-」

재주가 좋다고 해도 가방을 들고 목욕할 수는 없다. 위생의 이름 앞에 물가로 끌려간 제로스는 얌전히 발가벗지 않을 수 없었다. 소지한 가방은 옷가지 옆으로 내려놓았다.
- 뒷 일은 네게 맏긴다, 리나.
- 나에게 맏기고 넌 등목이나 실컷 즐겨. 우호호~
어서 먹어주세요 기다리고 있는 걸 뒤엎는 거야 식은 죽 먹기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보물 지도도 덤으로 나오거라.
마족의 가방은 그렇게 해서 털렸다.

이쯤해서 리나는 잠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라 해가며 물건을 하나 빼내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 뒷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다.
리나는 시선을 슬그머니 옆으로 돌려 제르가디스가 손으로 움켜쥔 문제의 지도를 곁눈질 했다. 지도 상의 목적지, 그러니까 커다란 F자로 굵직하게 표시된 부근이 시야 한 가득 들어왔다. 순간 다급한 갈증을 느꼈다.
F다. F... 보물이 있는 장소다. 저 F는 fortune의 약자가 분명.
희미하게 그 모습이 떠오른다. 막다른 방에 상자가 놓여져 있다. 둥그런 뚜껑이 달린 무거운 상자다. 자물쇠가 단단히 채워져 침략자의 손길을 노여워한다. 상자의 표면엔 희뿌연 먼지가 가득하다. 좋은지고, 버진이다. 아무에게도 아직 안털린 보물이다.
리나는 단단히 타들어가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긴장으로 인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잘 들어, 제르가디스. 물론 이건 보물 지도의 원본은 아니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제로스가 눈치 채지 못하게끔 원본을 훔쳐가지고 나올 용기는 없었어. 그래도 난 최대한 노력했단 말이야.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있는 그대로를 베꼈다구. 원본과 사본이 완전히 똑같을 거라 장담하지는 않겠어. 내가 무슨 인간 복사기냐, 그 짧은 시간에 지도 하나를 뚝딱 복사하게... 하지만 거진 비슷하게는 흉내를 냈다고. 장담할 수도 있어.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거진 비슷해. 비슷하다구.』
『그러니까 내가 화를 내는 거 아니겠냐. 너, 미술 점수 40점 이하 맞지?』
가슴에 콱 박히는 날 서린 화살촉 느낌에 리나는 버럭 고함 질렀다.
『실례잖아! 뭐야, 그러니까... 못봐줄 정도로 엉터리로 베껴왔다는 거냐?』
『넌 아니라고 해도 지금의 이 현실은 네 미술 실력의 형편없음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고. 40점, 아니면 30점, 그것도 아니라면 20점...』
점수는 계속해서 내려갔다.

비난은 역시 싫다. 리나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야! 그렇게 날 가지고 몰아세우지는 말아. 애시당초 지도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잖아! 모든 것이 내 잘못이냐?!』
제르가디스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10점?』
『카악!』

리나에게 잘못 대들었다간 후환이 두렵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평소 기름칠 잘 해두었던 두뇌가 끼걱거리며 제 위치에서 탈선이라도 한 모양... 높은 습도, 거기다 벌레 많음, 어두컴컴한데다 밀폐된 공간이라는 특이성이 그의 이성을 살살 흔들어 놓은 것 같다. 짜증스럽다는 걸 이다지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모습은 확실히 낯설다.
『5점!』
『카악!』
『1점!』
『죽엇!』

언제는 지나치게 사이가 좋아 보여서 사람 속을 긁어대더니만 이번에는 너무 싸워서 옆에 있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가우리는 질렸다는 표정을 채 감추지도 않고 옆구리로 손을 터억 얹었다.
조금만 더 하면 머리카락 잡아당기며 발길질을 퍼붓게 생겼다. 죽을 뻔한 위기를 수십 차례나 같이 넘기고, 한 솥밥 먹은지가 오래인데다, 피의 맹세까지 거쳐 우리는 한 가족이라 선언까지 한 사이인데 아무려면 설마 그럴 리가 있느냐 말하진 말기 바란다.
몰라서 하는 소리. 요는 누가 먼저 시작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그런 무식한 방식으로는 절대 싸우지 않는다고 못을 박을 수 없다는 점에서 심히 유감이다만... 일단 싸운다 싶으면 할퀴고 물어뜯는 건 여전하다.
두 사람, 리나와 제르가디스 모두 톱 클래스의 마도사 (하나는 마검사지만) 답게 자제력은 꽤 있는 편이다. 그러나 자제력이 그들이 가진 장점 전부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저 두 인간은 저 잘난 맛에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남이 뭐라고 한 마디 하는 걸 참지 못한다. 쓴 소리 한다 싶으면 울컥한다. 자존심이 높은 고로 누가 반박이라도 할려치면 극도로 싫어하는 표정을 짓는다. 남에게 무시당한다 싶으면 무섭게 화를 낸다.「발육부진의 마도사」라고 실언한 우후테 왕국의 고위 장관의 뺨을 후려갈긴 적도 있는 리나다. 비슷한 케이스로 제르가디스는「뜨네기 검사인 자네가 뭘 아는가」라고 비아냥거린 아델린 학사의 대현자의 입에다가 고무 지우개를 무려 열 다섯개나 처박아 버린 적이 있다.

『엉터리 나침반이나 가지고 다니는 바보!』
『그대로 보고 그리는 것도 잘 못하는 미술 점수 낙제생!』
『깍쟁이!』
『둔댕이!』

원시로의 회귀다. 삿대질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아야 할 지경.
마침내 보다 못한 가우리가 나섰다.
『야! 너희들 자꾸 그러고 싸우면~』
이것은 최후통첩, 믿기지 않겠지만 이게 바로 가우리식 으름짱이다.
『나 먼저 앞으로 열 다섯 발자국 걸어가 버린다!』

소란은 다소 가라앉았다. 가우리는 진실로 으르렁댔고, 제르가디스나 리나 모두 가우리의 둔한 성격 - 밟으면 바닥이 꺼지고, 벽돌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면 화살이 날아오고, 등을 기대면 기둥이 무너지고, 가볍게 쇠고리를 만지면 돌들이 비오듯 쏟아지는 등등의 온갖 함정은 하나도 남김 없이 모조리 건들이고 보는 아둔함 (어째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죄다 건들이고 보는 것인지는 쉬피드도 질색할 일이다), 그것도 이걸 만지면 다음에는 뭐가 나올까 하는 호기심 때문에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 본다는 멍청함 (궁금하다고 독약마저 집어 먹을까, 그놈의 호기심으로 언젠가는 망하고 말리라) - 을 잘 알고 있었다.

『앗앗! 그러면 안돼!』
『우왓, 그러지 말고 참아, 가우리!』

「너희들은 냅두고 나 먼저 앞으로 가버릴테다!」라는 협박을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보는 리나와 제르가디스였다. 그깟 바위가 날아오면 마법으로 튕겨버리면 그만이던가, 아니다. 마법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요구된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질량의 구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마도사가 카오스 워드를 중얼거려야 한다는 거다. 바위의 돌진이 마법 기술의 전개보다 더 빠르면 마도사의 몸은 납작하게 바닥에 깔려 연탄불에 말린 오징어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십중팔구 사람의 혓바닥보다 바위가 더 빨리 구른다. 바위의 질량과 가속도는 침발 튀기기의 수백 배는 앞서간다. 나란히 놓고 비교를 해봐라. 그 크기니 뭐니, 바위에 혀가 눌리는 건 지당하다. 필연적으로 마도사는 바위에 희생당한다.
리나와 제르가디스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가우리의「여차하면 함정 발판을 밟아버릴테다!」라는 협박은 그래서 상당히 심각했다.

『우린 진정했다구요, 진정했어요~ 그치?』
『이제 안 싸워. 진짜야, 진짜.』
『그러니까, 가우리? 벽에다 손을 짚으려는 짓은 당장 그만 둬. 소름 끼친다!』
『리나가 말한 그대로다. 발 구르려고 하지도 마! 위를 쳐다보고 저 위로 뭐가 있나 살펴보지도 마! 꼼짝도 하지 마! 멈춰, 동작 그만!』

리나는 허겁지겁 팔을 흔들어 화가 치밀어 오른 가우리를 만류했다. 작은 동물의 그것과 흡사한 그녀의 직감은 뇌 언저리에서 느낀 그대로의 사실을 선언했다.
지금 가우리가 서있는 장소에서 겨우 20cm 앞으로 함정이 있다. 그것도 질이 아주 안 좋은 놈이다. 리나는 천장을 가볍게 쓰윽 흝어보았고, 그래서 땀을 흘렸다. 천장과 좌우 대들보가 맞물린 저 상임돌의 엉성함을 보라. 살짝 틀어지기만 해도 한쪽으로 무게 중심이 쏠리면서 연속으로 무너질 거다. 일단 그런 일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 천장이 내려앉는 식의 사건이 벌어진다면 - 철사줄로 높게 매달린 알루미늄 쟁반이 급강하 하여 교복 차림새의 연애인 정수리를 가격하는 수준의 장난과는 감히 비교도 안될 거다.
가우리가 조금만 움직인다면... 리나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너희들~~~!!』
『어머, 그건 오해~ 싸우긴 누가 싸우나~ 우린 사이좋게 잘 놀아요~♡ 그죠?』

가우리라는 사람은 제르가디스와 리나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서라면 천장을 와르르 무너뜨리고도 후회를 하지 않을 호인이었다. 그의 사고 방식은 상당히 단순해서 으르렁대며 싸우는 두 마리 들개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서라면 팔뚝이 물어뜯기는 한이 있더라도 뜨거운 물을 생으로 끼얹고도 남음이 있다.

- 곤란해. 장소가 장소인 만큼 이쪽이 불리해
끓는 물을 뒤집어 쓸 입장에선 이런 호인의 성격은 큰 부담이다.
하는 수 없다. 제르가디스와 리나는 신랑 신부처럼 맞절을 하고 그 자리에 똑바로 섰다.
- 지금 만큼은 그냥 넘어가주지
- 이건 본의는 아니야, 그러니 네가 이겼으려니 착각은 하지 마
상대방의 생각이 뻔히 들여다 보일 만큼 리나와 제르가디스의 표정은 딱딱했다.

뭐, 이 상태가 10분이나 갈지, 아니면 30분 정도는 갈지 아무도 장담은 하지 못한다.
어쨌든 치열한 비난 선전을 멈추고 휴전 협상 테이블로 앞으로 나왔다. 옷깃을 여미고 차렷 자세, 각자 주워진 각서에 새빨간 도장을 찍었다.
악수~ 악수~ 냉전 시대는 종식되었다. 이제부터는 (시한부) 평화의 시대다.
제르가디스는 일부러 목소리 한 톤을 높였다.

『좋아, 리나. 비생산적 논쟁은 그만 두도록 하고... 지도가 다 뭐야. 그냥 본능에 의지를 해보자구. 우리 실력이라면 이런 미로 속에서도 길을 찾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이제부터가 문제인데... 어디로 가면 좋을까. 왼쪽, 오른쪽?』
『오홋홋홋~ 나의 뛰어난 직감이 말하고 있음이야! 이번 갈림길에선 왼쪽이다!』
『흐음... 난 오른쪽이 더 괜찮아 보이는데?』
『왼쪽이야.』
『오른쪽.』
『네 주장대로 오른쪽이 맞다면 오늘 이후부터 널 오빠라고 부르마.』
『좋았어, 동생!』
『흐응, 좋아하긴 아직 일러, 제르가디스. 내 말대로 왼쪽이 맞으면 앞으로 나를 누나라 불러라.』
『까짓 것! 부르고 만다. 누님!』
『어쭈? 자신감이 대단한데?』
『당연하지, 내가 누구게.』
『록골렘과 북어의 키메라.』
『이게, 정말...』

휴전 협정서에 싸인한지 1분만에 다시 미사일 발포.
갈 길은 멀다. 가우리는 눈꺼풀을 뒤집으며 폭발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 이젠 나도 몰라.』
가우리는 에라 모르겠다 해가며 성큼 성큼 앞으로 걸어가버렸다.
『아냐, 가우리! 우린 지금 싸우는 거 아냐! 이건 어디까지나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고등 화법으로서 신뢰를 돈독케 하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는...』
『우왁! 그 단추는 만지지 말고 지나가란 말이야!』
『그 끈도 잡아당기지 말앗! 안돼!!』

진실로 가야 할 갈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들이 찾고자 하는 문제의 F (리나가 상상하기로는 fortune가 있는) 장소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단 불만을 피력하고자 일부러 소동을 자처하는 가우리의 독단적 행동부터 서둘러 말려야 할 것이다.
피슝, 피슝!
리나는 비오듯 쏟아져 내리는 표창들 속에서 앙칼지게 비명을 질러댔다.

『가우리!! 그 단추는 건드리지 말랬잖아!!』
『이러다간 제로스가 숨겨다 놓은 클레어바이블의 사본을 찾아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가루가 되버리겠다!』
『잠깐, 잠깐. 이러고 말다툼할 시각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구, 제르가디스. 누가 그게 사본이라 정했대? 그건 돈이야, 돈. 마족의 한 재산이라고. 지도에 표시된 F는 금화가 분명해.』
『제로스가 돈에 환장한 거 봤어? 녀석은 워낙 띨띨해서 금전에 대한 가치관도 희박하다구. 녀석이 소중히 감춰놓을 물건이라는 건 클레어 바이블의 사본 이외엔 없다!』
『그거야 네 희망 사항이고...』
『시끄럽다. 그건 그렇고 넌 입으로 표창들을 막을 거냐? 너도 좀 움직여! 왜 나만 검을 휘두르고 있는 거지?』
『그야 이 몸은 연약한 여자니까.』
『연약해? 누가? 네가?』
『응.』
『기가 막혀. 나보다 허리가 1인치나 굵은 주제에 그 무슨...』
『죽을래!』

어쨌든 그들은 알고 있을까.
이놈의 정신 탈진화 동굴 탐험 끝에 그들이 도달할 진실이라는 것이 궤짝으로 그득그득한 금화나 귀한 클레어 바이블의 사본 같은 것이 아니라 제로스군이 애음(愛飮)하는 피로 회복 드링크, 바카스-F 한 박스라는 것을...

하여간 지금은 서늘한 곳으로 해서 고이 모셔진 바카스-F 한 세트를 발견하고 거품을 물 리나 일행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설명을 할 단계는 아니다.
지금은 그저...
헛고생 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아웅다웅 싸우고 있는 그들을 측은한 눈초리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PS: 반짝반짝 별님 시리즈의 완결편입니다.
사실 [제르가디스와 리나가 티격거리며 말다툼을 한다] 라는 내용은 저에겐 그리 익숙한 테마는 아닙니다만. 연인 이하, 친구 이상인 관계에서 저렇게 혓바닥 싸움을 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맛은 있겠거니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다툼을 할 제르가디스는 아니지요? (어색하다니까!)
정신적으로 저를 압박하여 이 글을 토해내게 만들고 본 츠다님께 원망을 하나 가득...;;
마지막으로... D는 다이아몬드의 D가 아니라 원비디, 라는 최초 설정은 특정 상표 (원비디)의 표기에서 알파벳 표기가 없었다는 점에서 바카스- F로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