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는 날에 끝 모양이 둥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바람의 냄새... 초목의 산들거림을 모방한 그늘이었다.

『왜요? 가우리씨.』
『잠시 옆에 앉아도 될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제로스는 쭈그리고 앉아 신발끈을 묶다 말고 씨익 웃었다.
사실 그가 만들어 보일 수 있는 얼굴 표정이라는 건 그리 다양하질 못하다. 난처할 때도 웃었고, 화가 나도 웃었고, 토라질 적에도 웃었다.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고 해서「웃었다」라고 말하기 곤란한 까닭은 바로 그 점에 있다. 오랜 훈련으로 인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가식적인 표정일 뿐, 가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가우리는 그날따라 심하게 짜증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된다는 거야, 안된다는 거야.』

제로스는 만지작대던 신발끈으로부터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는 어랍쇼 하는 식으로 가우리를 응시했다. 성격 좋은 쿼터 엘프가 언성을 높여가며 신경질을 다 부린다라... 흔치 않은 일임은 분명하다.

『좋으실대로.』
『그럼 앉을게.』

입술 위로 일직선의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었다기 보다는 화가 치밀어 경직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 하다. 상냥한 미소와 부드러운 눈빛도 과감하게 생략, 어린 아이가 굵은 크레용으로 찍 그어버린 듯한 일자 눈썹이 콧잔등에 가까이 가서 달라붙었다. 뭐니뭐니해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벌릉대며 움직이는 콧구멍이었다. 격한 호흡이라... 제로스는 적나라하게 콧털의 떨림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가우리씨?』
『아냐, 별 거 아냐. 신경쓸 것 없어.』

옳커니. 제로스는 재빨리 눈치를 챘다.
저건 혼잣말이다.
가우리는 먼 곳을 바라보며 풀밭 위로 털썩 주저 앉았다.
이런 때에 무슨 일 있었느냐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건 바보 짓이다. 제로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신발끈이 원래대로 잘 묶여졌는지만 확인했다. 어차피 질문을 던져보았자 가우리에게서 제대로 된 설명을 듣기는 어렵다. 그는 지독하리만치 말재주가 없는 사내였는데다가, 의외로 입이 무거운 남자였다. 부어라 마셔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술좌석에서 저 혼자 입 다물고 앉아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가우리다. 그는 술에 취했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아는 노래가 없다는 사실은 별도로 하자) 속칭 맹꽁이 자물쇠, 이런 스타일의 사람은 저 혼자 고민을 싸들고 끙끙 앓지, 남에게 속 사정을 쉽게 내비치지 않는 법이다.

아이구, 내 팔자.
여기서 제로스는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구슬르고 얼러도 고민을 털어놓지는 않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는 안된다. 화가 풀어질 때까지 같이 옆에 있어줄 사람은 필요하단다. 비가 오니까 우산이 필요하다는 식이랄까... 제로스가 없었다면 지나가던 곰이라도 붙들어 놓고 강제로 앉혀놨을 거다. 곰도 없는 사막이라면 도마뱀이라도 붙들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검집을 장승 인형인양 땅바닥에 박아놓고 그 옆으로 앉았을 거다. 옆구리가 허전하면 배게라도 껴안는다고 한다. 전혀 다르지 않다.
그렇게 제로스를 옆에 두고 가우리는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동그라미와 세모, 그리고 다시 동그라미. 의미 없는 모양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었다.

구석진 곳에 틀어박혀서 둘이서만 몰래 귓속말을 주고 받는걸 보면 누구라도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 두 사람이 굳이 리나와 제르가디스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오크와 드워프가 귓속말을 주고 받아도 보는 사람은 불쾌할 거다. 비밀 이야기라는 건 원래 그런 것이다. 그렇고 말고... 제르가디스의 입술이 리나의 귀에 닿았다고 감정이 폭발한 건 아니다. 둘이서 뺨을 마주댔다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건 절대 아니라는 말씀. 리나의 어깨를 감싼 파란 손? 소리 죽여 킬킬 웃던 리나? 지긋이 눈 맞추던 두 사람?
아니고 말고,
문제는 귓속말이다.

『내가 질투하는 거로 보여? 제로스.』
『누가 당신더러 질투를 하고 있다 합디까?』
『아니. 아무도 그런 말은 안했는데...』
아차 실수했다 깨달았는지 가우리는 잠시 횡설수설해 했다.
『어쨌든...』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누구라도 따돌림 당한다고 생각이 들면 화가 나는 거 아니겠어?』

무릎 사이로 고개를 박고 있던 제로스는 눈치를 슬슬 봐가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화 나죠.』
『그렇다니까.』
『예, 조금 화만 났을 뿐이예요.』
『바로 그거야.』

응어리진 것이 조금은 풀렸나 보다. 가우리의 일자 눈썹이 원래의 모습대로 두 개로 갈라져 나갔다. 컵 라면에 딸려 나오는 나무 젓가락이 두 개로 짝 쪼개지는 모양새 그대로였다. 거칠던 호흡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주름도 펴졌다. 이어 그는 뒷통수를 벅벅 긁어대기 시작했다.

리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강조를 하곤 했다. (워낙에 잘 잊어먹는 가우리다) 그녀는 신경을 써서 가우리를 가르쳤다. 손가락으로 하나 하나 가리키면서 딱 부러지는 어조로 설명을 했다.

- 가우리, 너는 나. 우리는 하나
- 제르가디스, 저건 가족. 우리는 형제
- 제로스, 저건 업보.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 평생 끌고 가야만 하는 골칫덩이
- 이 셋은 절대 잊지 마

다행스럽게도 잊어먹지 않았다.
『그래, 형제끼리는 비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납득했다. 가우리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슬그머니 폈다.

우리의 능구렁이 제로스는 그제야 슬그머니 가우리를 떠보았다.
『제르가디스만 끼고 돕디까? 리나님이.』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줘도 한순간에 까먹는다고 나에겐 자초지종을 잘 말해주질 않아.』
『제르가디스씨에겐 열심히 얘기하고?』
『갠 머리가 좋잖아.』
『흐음.』
『왜 그래? 눈을 가늘게 뜨고.』

오늘은 날씨가 좋다. 그래서 아주 먼 곳까지 잘 내다볼 수 있었다. 제로스는 한층 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하면 망원경이 없어도 산 너머까지 훤히 살펴볼 수 있다.

『제가 충고 하나 하지요. 그 키메라를 멀리 내쫓는게 좋을 걸요. 나중에 오쟁이 지고 후회하지나 마시라고요.』
『응? 오징어를 먹으면 후회해야 하는 거야? 그건 맛있는 건데.』
『...』

툭툭. 제로스는 어린애 다루듯 가우리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뭐,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다. 천 살도 넘은 삶을 살아온 존재에게 있어 20년 넘게 살아온 인생이라는 건 가련하기조차 하니까.
제로스의 목소리는 밝았다.
너무 밝아서 그게 영 어색했다.

『어쨌든 가우리씨, 리나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신발끈도 다 묶었겠다, 제로스는 영차 일어나 석장을 짚었다.
『어디 가?』
『아아- 볼 일이 생겼거든요. 뭐, 금방 돌아오긴 할 겁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
바람의 냄새... 초목의 신선함.
따사로운 햇살 너머로 사람 하나가 스릉 녹아내려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날씨다.

『그럼.』
언제나 그러하듯,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나갈 마족은 손도 흔들어 주지 않고 그렇게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