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쥔 자유의 여신상이던가, 제르가디스가 하얀 비누덩이를 높게 들고 나타났다.
우우우-
그 즉각 항의성 소음이 온 천지에 들끓었다. 하지만 입을 열어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내뱉을 수 있는 뚝심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추워 죽겠는데 산속에서 뭔 놈의 얼어 죽을 목욕이냐 투덜거렸다간 후환이 두렵다. 제르가디스의 등 뒤로 눈 부라리고 선 후원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나 인버스다. 가우리고 제로스고 그래서 고개를 푹 떨구었다.
틀렸다. 반항은 꿈도 못꾼다.

『우리가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사흘! 그동안 발바닥으로 물방울 하나 묻히지 않고 버텼다는게 말이나 되는 줄 아나.』
『우우- 된다고 하자! 제르가디스.』
『이의 제기는 기각되었음을 알린다, 가우리. 자, 그럼 제군들? 속히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날 따라 오도록.』

위생 문제에 대해서 만큼 각별한 철칙을 고수하고 있는 제르가디스는 서둘러 일행을 잡아 끌었다.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는 특수한 몸이라고 울부짖던 마족군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리나는 기꺼이 제르가디스를 도와 비누칠 못하겠다 반항하는 제로스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덤으로 때 수건으로 목을 졸라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머리도 안 감는 마족은 인간 모습을 취할 자격이 없는 게야!』
『하지만 난 비듬도 없고 때도 없단 말예요! 크억- 크- 숨, 숨 막혀-』
『제로스? 자꾸 반항하면 빨래통에 넣고 30분 강 세탁 버전으로 돌려 버린다.』

설득 - 포장만 그럴 듯한, 진실은 위협 - 은 끝났다.
그렇게 해서 남정네 셋은 줄을 나란히 맞춰 계곡 어딘가의 으슥한 장소로 함께 떠났다.
자! 모두 보냈나?
그렇다면 작전 시작이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덩그마니 혼자 남은 리나는 속으로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아무리 길어봤자 15분이다. 그동안 미리 생각해 두었던 일을 끝마쳐야 한다. 리나는 속으로 「반짝반짝 별님, 핑크빛 하트~ 제발 들어주세요, 소녀의 이 마음~」노래를 중얼거리는 것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이 노래를 침착한 박자로 모두 여덟 번 반복해서 부르면 타임 아웃이 된다. 계획 실행에 앞서 제르가디스가 직접 확인까지 해주었으니 (그는 음치다. 따라서 확인 작업은 매우 괴로웠다) 이 점은 틀림이 없다.

『옳지, 옳지...』
목표물이 앞에 있다. 일보 앞으로, 그녀의 시선은 제로스가 구석 한 켠으로 얌전히 내려 놓은 가방에 가서 정통으로 꽂혔다. 혀로 입술을 축여가며 목표물을 확 잡아챘다.
오늘의 작전 명은 이름하야 [마족의 가방 털기] 라는 것이었다.
야이야~ 방망이질 하는 심장이 당장에라도 뚝 멈출 것만 같았다.

- 손을 가방 안에 넣어서 마구 휘젓지 말 것

일전에 제르가디스가 미리 주의를 주었던 내용이다. 리나는 명심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추를 열어 겉 뚜껑을 열었지만 그래서 손은 그 속으로 집어 넣지 않았다.
가방 안 내용물이 뒤섞이면 나중에 들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건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제로스의 가방은 펑퍼짐한 디자인이다. 이런 식의 가방은 조금만 흔들어대면 차곡차곡 넣어진 공책도 마술사 손아귀의 트럼프 카드 신세가 된다. 고로 누가 그 속을 뒤져봤는지 표시가 잘 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리나가 기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그 안을 들쑤신 것은 가방의 소유자가 인간이 아닌 마족이라는 점에 기인하고 있다는 말씀.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노련한 뒷골목 들치기 하나가 제로스의 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 그러나 제로스는「도둑이야!」고함 지르지 않았다. 잠시 난처하다며 머리를 긁었고, 느긋하게 뒤돌아 걸어갔고, 가볍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허둥대며 이걸 어쩌면 좋으냐 소리를 질러댄 건 오히려 가우리 쪽이었다.
「어이. 뛰어가 붙잡지 않아도 괜찮겠어?」
「별 일 없을 거예요, 가우리씨. 천천히 가지러 가면 됩니다. 자, 이쪽입니다.」
제로스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가방은 으슥한 골목 쓰레기통 옆에서 무사히 발견되었다. 아울러 그 옆으로는 절반 가량 타다 남은 신발 한짝이 놓여져 있었다. 뇌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고무 밑창은 후줄근 녹아 있었다. 그 신발의 주인공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그 주변으로 가득했던 역한 냄새가 대신 설명을 해주었다. 엑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나 일행을 뒤로 하고 제로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방만 챙겼다. 두어 번 먼지를 툭툭 털고는 별 일 없다는 식으로 그걸 다시 어깨에 걸쳤다.
「자, 그럼 가던 길을 마저 가십시다~」
마족의 가방은 그 자체가 흉기임은 분명했다.

『와따따!』
가방 안에서 푸른 불꽃이 번쩍였다. 슬그머니 찔러 넣었던 나뭇가지가 딱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리나는 기겁을 해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순간 폭죽에 불 붙었나 싶어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잘려져 나간 나뭇가지의 단면으로 노랗게 불꽃이 일어나고 있었다. 리나는 서둘러 나뭇가지를 내던지고 흙더미를 끼얹었다. 쉭- 쉭-

『쉽지는 않겠구나.』
슬그머니 가방의 표면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안에는 분명 내용들이 들어가 있다.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부분은 네모난 상자나 책을 연상시켰다. 지갑으로 여겨지는 물컹한 것도 느껴졌다. 짤랑거리는 것도 하나 들어가 있다. 동전 몇 개가 밖으로 흘러나온 듯 하다. 하여간 칠칠맞은 성격이다. 더듬거리며 만져보니 연필로 여겨지는 뾰족한 것도 몇 개 잡혔다. 나머지는... 파악이 어렵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탈탈 털어볼까나.

가방을 거꾸로 매달고 마구 흔들어 봤다. 예상 외였다. 무게는 제법 되는데 쏟아져 나오는 건 하나 없었다. 탁탁 소리가 나도록 털었음에도 가방 속의 내용물은 껌으로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본드로 붙들어 놓은 밥상 위의 나물 접시와도 같아 옆으로 흔들고 뒤집어 털어도 꼼짝 안했다.
『...』
가방 틈을 최대한 크게 벌렸다. 그리고 슬그머니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시커멓다.
그 속은 흡사 어두운 밤 하늘을 연상시켰다. 겉 가죽은 밝은 갈색인데 반해 안감은 검게 물을 들인 보드라운 천으로 처리가 되어 있었다. 죄악의 깊이 만큼이나 짙은 검정이었다. 그것도 매우 깊었다. 따라서 안을 들여다 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제 시간은 7분 가량 남았다.

「마족은 정신체야. 그게 힌트가 되지 않을까?」
리나는 절을 하듯 다소곳이 앉았다. 짝, 손뼉을 한 번 치고 기도하듯 자세를 잡았다.
『큰 거 나와라, 큰 거 나와라! 뭐든 좋으니까 큰 거 나와라!』
리나는 상상했다. 묵직한 것, 듬직한 것, 가치가 큰 것, 커다란 것, 그러니까 금화가 가득 들어간 궤짝 같은 것... 집요하게 머리 속으로 이미지를 그려봤다. 그리고 강렬하게 소원했다. 큰 거 나와라.
반응이 있었다. 가방이 옆으로 기울어지더니만 한쪽 귀퉁이 틈새로 뭔가 툭 떨어졌다.
배를 정박시킬 적에 쓰는 닻이었다.
아주 크고 무거운 놈이었다.

『이런 거 말고!』
열 받아 발길질했다. 가방은 사람의 말귀를 알아 듣더니만 다시 닻을 원래대로 술술 집어 삼켰다.
『좋아, 좋아... 뭔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군. 이번엔 진짜다. 사본 나와라, 사본... 클레어 바이블의 사본 나와라.』
순간 제로스의 가방이 반대편으로 획 돌아갔다. 마치 돌아앉은 지장 보살 같았다.
『얼레. 토할 건덕지가 없다는 것?』
그렇다 라고 대답하려는 것 같다. 모서리 부분이 삐죽 내려갔다 다시 올라왔다.
리나는 눈에 띄게끔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래서 고지식한 마족은 문제가 되었다. 그녀였다면 하나 정도는 몰래 소지하고 있다가 다른 곳으로 빼돌려 괜찮은 수입원으로 잡았을 터다. 강한 골렘 만드는 법이라던가, 마력 부적의 주술이라던가... 보이는 족족 불태우기만 해서는 너무 아깝지 않던가.
『돌 대가리! 융통성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다니!』
제로스 본인에게 말해주듯 가방을 째릿 노려봤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손바닥을 들어 몇 대 때려주었다.

『어라, 제로스. 갑자기 왜 얼굴 찡그리고 그래. 바위 모서리에 발바닥 찔렸니?』
『아, 그게... 조금 따가워서 그래요, 가우리씨.』
좍좍 찬물 끼얹는 소리가 요란한 계곡에서 남자들이 수다를 떠는 소리는 여전했다. 혹자는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했지만... 남자 셋이 모이면 지붕이 꺼지는 법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수건으로 국부만 가린 가우리는 야생 곰이 놀라 도망칠 정도로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산에도 게가 살고 있나?』
『가재라도 돌아다니는 모양이지.』
『아직 3월인데? 게다가 여긴 물도 제법 깊고. 가재는 얕은 물에서만 살잖어.』
『난들 아나, 따갑다고 말하고 있는 본인에게 가서 물어 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거품 투성이의 발을 물에 헹구느라 정신이 없던 제르가디스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얘기인데 돌 박힌 발바닥은 티눈 박힌 각질 투성이의 발바닥보다 사정이 훨씬 나빴다. 조금이라도 관리를 게을리 하면 그 날로 죽음이었다. 때문에 발을 씻는 그의 자세는 전투적이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겨드랑이 씻어가며 별 얘기를 다 떠들어대는 금발의 검사와는 가급적 먼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
날 내버려 둬. 난 바빠. 소년은 차가웠다.

『제로스- 괜찮냐?』
어쨌거나 가우리의 질문에 제로스는 다소곳이 웃기만 했다.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좋게 말하자면「소동을 피울 까닭이 없습니다」라는 거였고, 직설적으로는「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하시죠」라는 거였다. 실제로 별 일 없다는 투다. 표정은 온화했고 - 냉탕에서 멱 감고 있다는 생각은 그래서 들지 않았다 - 풍덩질하며 얼음처럼 차가운 물 속에서 유유히 팔을 저었다.

- 푸드덕!
가우리는 잠시 놀랐다. 새들이 일시에 날아 올랐다. 리나가 기다리고 있는 쪽에서였다.
거기다 희미하게 들려온 여자의 비명 소리... 가우리의 눈매가 가냘퍼졌다.
『뭐지?』
『별 거 아닐 겁니다. 지나가던 벌레나 뱀이나... 그런 거였겠지요. 그나저나 가우리씨, 제가 등을 밀어 드릴까요?』

그와 동시에 저만치 떨어진 장소에 자리하고 있던 리나는 혼자서 악을 쓰느라 바빴다.
목에는 어연 뱀 한 마리가 목걸이처럼 대롱대롱 걸려져 있었다. 진짜는 아니고 아이들 골려 먹는 그런 장난감이었다.
『망할 놈의 가방! 빌어먹을 신관! 돌돌 말린 거 나오라고 했는데 거기서 뱀이 왜 나와! 보물 지도나 중요한 두루마리 문서 같은 거 나오란 말이야! 난 뱀이 싫어! 고무로 만든 뱀이라도 질색이라고!』

리나가 화내는 소리가 계곡 저편까지 전달되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로스는 킬킬 웃음을 터뜨렸고, 때문에 등 밀어달라 몸을 내밀고 있던 가우리는 자신에게서 때가 무진장 나오나 보다 싶어 지레 겁을 집어 먹었다.

『국수 가락 나오니?』
『흥흥, 그 정도는 아녜요.』
『그런데 왜 웃어?』
『그냥♡』

반짝반짝 별님 노래는 이제 두 번 반복해서 돌아갈 차례만을 남겨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