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브라니구드 앞에서 턱 치켜 올리고 바락바락 잘만 떠들던 뱃심은 이런 경우엔 하나도 소용이 없다. 수년에 걸친 반복 학습 탓이라지만... 언니인 루나의 서슬 퍼런 눈빛만 떠올려도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자신을 추스릴 수 없었다. 얼굴만 하얗게 변하더냐, 머리 속도 백지였다.

『윽-』
작정하고 책상에 앉은지 정확히 반나절, 어느새 방석은 땀으로 젖었다. 펜을 쥔 오른손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피가 몰린 다리는 쑤시고 저렸다. 한숨 한 번 내쉴 적마다 간과 쓸개, 자라, 허파까지 아래로 죄다 툭툭 떨어져 내린지라 허벅지의 붓기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땀이 찬 엉덩이가 가려웠다. 아아, 미친다.

『큰일났네.』
알려야 한다고 생각은 했었다. 좋은 사람이 생겼다고... 딱히 날짜를 잡거나 하진 않았다지만 조만간 결혼을 하게 될 상황이니 알고들 계시라 기별을 넣어야 했다.
어제 저녁, 그녀는 일행을 뿌리치고 혼자 거리로 나가 반투명 레이스가 주렁주렁 매달린 야한 분위기의 속옷을 세트로 구매했다. 감춘다는 기능보다는 남에게 보여준다는 의지가 더 강하고, 입는다는 행위보단 벗는다는 뜻이 더 강한... 에헴.
리나는 뺨을 붉혔다.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이라지만 자식 놈의 도리는 지켜야 했다. 여기서 심장은 연탄불 쬔 마른 오징어인양 오그라들었다.

- 메야, 니 맘대로?

루나가 벼락치듯 고함지를 건 지독하리만치 뻔했다. 리나는 고개를 책상 위로 처박고 열심히 끙끙거렸다.
정신적으로 (신체적 발육은 패스) 조숙하다고 쳐도 가정을 꾸리기는 아직 어린 나이, 가우리마저 리나가 스무 살이 된 해에 정식으로 혼인하는게 좋겠다고 운을 떼었다, 그걸 리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상황이다, 물론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니까 별도의 문제는 없다, 가우리는 곧 정복될 것이다, 그런데 루나 언니도 여전히 솔로인 상황, 순서가 뒤집혔다, 동생의 결혼에 좋아할 리 만무하다, 앗싸, 신나는 구나, 눈치 살피길 포기한다고 해도 여전히 산 넘어 산이다, 당장 결혼한다고 해도 어디 한 곳에 정착해 가정을 꾸릴 입장은 아니고, 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는 제피리아에 계신 리나의 부모님은 가우리에 대해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다, 내 귀한 딸자식을 훔쳐가는 도둑놈은 도대체 뉘집 자슥이냐, 그렇다고 사위 얼굴 보여드린다 인사를 드리러 갈 상황은 아니고, 현재 그녀가 자리를 잡은 위치로는 제피리아완 영 인연이 없다, 뭐니뭐니 해도 어느날 갑자기 과년한 딸자식이「남자 생겼슈~」하면 허벅지 때려가며「바로 그거야!」좋아할 부모가 없다는 것...

맙소사. 알리긴 알려야 하는데 뭐라고 운을 떼야만 할꼬.
머리가 다시금 부글부글 끓었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사람 살려.

한참을 궁리한 끝에 애원조로「언니,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결혼하면 안돼?」라고 적어보았다. 5초도 채 지나지 않아 쓴 웃음만 나왔다. 돌아올 대답이 너무너무 뻔했다.

- 안돼!
- 죽을래?
- 젓가락 보내줄까, 부록으로 마왕 한 타스다.

펜촉을 입에 물고 쪽쪽 빨기를 다시 5분, 이번에는「용서해줘요, 언니. 가우리와 결혼할 거예요.」라고 적어봤다. 윽! 상당히 맘에 들지 않았다. 뭘 용서받겠다는 건가, 축하를 받아야지! 리나는 가차없이 편지지를 구겨 버렸다. 다시! 한 장 더 써보자.

「루나 언니. 나, 남자 하나 잡으려고 해.」
지나치게 저속한 표현이었다.
「곧 일 저지를 거야.」
아버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딸 교육을 역시 잘못했다?
「언니도 나처럼 빨리 좋은 남자 만나.」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간 젓가락은 반드시 온다.

안돼!!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리나는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구원 투수가 필요했다.

『어이, 제르가디스? SOS야. 리나 인버스 호가 침몰 위기에 빠졌다.』
『남의 배가 꼬르륵 가라앉든 말든, 제르 호는 상관 없다.』
『임마! 건너 마을에 홍수 났다 이거냐?』

쾅쾅 걸음으로 다가온 여자가 귀 옆에서 한참을 왁왁거렸음에도 소년은 끄떡 없었다. 언제나처럼 고래 기름 등잔을 훤히 밝히고 앉아 한쪽 손으로는 노트를, 다른 손으로는 책을 들고 있었다. 계속된 밤 독서로 시력이 나빠진 참이라 코에는 새로 맞춘 둥근테 안경을 걸쳤다. 가끔씩 사각사각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메모에 바빴다. 앞으로 많이 기울어진 어깨가 언제나처럼 딱딱해 보였다. 집중... 집중할지어다. 손가락을 놀려 책장을 하나 넘겼다. 소년의 입가로 가냘픈 그림자가 걸렸다. 어떻게 보면 미소, 어떻게 보면 심술.
괘씸한지고. 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에에~르. 너 정말 이럴래? 그렇게 모르는 척 하면 귀 잡아당긴다.』
『알았어, 알았다구.』
뾰족한 귀는 엘프의 급소이다. 귀를 공격하겠다는데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제르가디스는 리나로부터 하얗게 빛나는 종이를 건네 받았다. 그것은 일반형 편지지, 수신자 이름은 루나 인버스이고 종이 한 가운데엔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오랫동안 반복한 흔적이 역력했다. 무어라 했는고...? 그는 제자의 시험지 답안을 채점하는 선생님처럼 근엄하게 눈썹을 접었다. 안경을 고쳐 썼다. 척, 편지지를 코앞으로 가져가 읽었다.

『막막하다구, 막막해. 여기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응? 제르.』
『바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구먼.』
삼각형의 코사인 각을 구하라, 소년은 펜을 들고 쓱쓱 몇 자 적었다. 채 3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었다.

- 꼭 행복해질게요.

정답이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구차하게 변명도 하지 않고도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었다. 행복해지겠다는데야?! 이 결혼은 안된다고 종주먹을 들이대었다가도 얌전히 도로 의자에 앉을 만한 마법의 주문이었다. 누가 반대를 하리? 행복해지겠다는데.

『오오!!』
우리의 아가씨는 기뻐 만세 불렀다. 문제의 핵심을 꼬집은 과외 선생님은 장난스럽게 자신의 뺨을 손가락질했다. 여기야, 여기. 쪽- 그녀는 기꺼이 소년에게 키스했다.
『바로 이거야! 고마워, 제르가디스, 정말 고마워!』
『별 말씀을.』
『덕분에 살았어! 언니에게 당장 편지 보내야지.』
『좋으실 대로.』

소녀가 돌아갔다.
소년은 허리를 돌리고 앉아 다시 노트로 눈을 돌렸다.
사각사각...
바위가 강판에 갈리는 작은 소음과 함께 제르가디스의 입매는 다시 한 일자로 다물렸다.
어떻게 보면 미소, 어떻게 보면...
글세올시다. 저 흉악하게 일그러진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꼬.
댁들은 짐작이 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