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마법사는 만능이라는 소리를 한다. 협곡 사이로 다리가 끊어지고 없으면 가볍게 어깨를 한번 으쓱인 뒤에 하늘을 슝 하고 날아간다. 바위가 길을 가로 막으면 주문을 날려 가루로 부순다. 호수를 가로질러 가야 하는데 배가 없다? 물 자체를 통째로 얼려버린 뒤에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을 질러간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행복한 족속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신이 아닌지라 전지전능 하지는 않다. 세상은 공평하다고, 가끔씩 건전지 닳은 전자제품 신세로 전락하는 일도 생긴다.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처럼 말이다.

제르가디스는 가냘프게 웃었다.「망할」이라고 쇳소리를 내뱉은 까닭인 즉, 손아귀 안의 나침반 바늘이 미친듯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다. 시계 초침의 속도로 까딱까딱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윙- 하고 고속 모터 회전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빠르기다.
이러한 증상이 설명하는 건 딱 하나, 만물상에서 손님에게 불량품을 속여 팔았다... 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 특수한 결계가 펼쳐져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레이윙이고 닭날개 핫 윙이고 간에 모조리 무용지물, 마법력은 순수한 제로로 돌아간다.

미친 척 하고 어디 한번 시험을 해볼까나.
『댐 브러스.』
하하하. 조용하다.
먼지 하나 날리지 않았다.

까닭은 모른다. 그러니까 마족이 만들었던 결계 속, 한때 빛의 기둥이 서있던 곳으로부터 안쪽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있었다는 보고는 없다. 제르가디스도 결계 안에서 살았을 적에는 이런 희귀 현상 때문에 골머리 썩은 적 없다.
이와는 정 반대로 결계 바깥쪽 세상에서는 마법력이 제로로 떨어지는 특이 지역이 말 그대로 지뢰밭처럼 곳곳에 널려있다. 멋지게 날아가던 마법사가 총 맞은 독수리처럼 추락하는 일도 부지기수, 고대 유적지가 가깝거나 하면 마법력 교란 증상은 한층 더 심각해진다.
속칭「성지」라는 장소는 (추락해서 죽었기에) 아예 마법사들의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자, 그럼 고민해보자.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데?
마법에 대해 무지한 대륙 주민들로서는 눈만 동그랗게 떠보일 뿐이다. 알게 뭐냐, 먹고 사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 이렇다 할 연구는 이제껏 이뤄진 적 없다.

『후욱-』
크게 숨 한번 몰아쉬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일찌감치 포기하는게 낫다. 알 수 없는 주소로부터의 오류가 발생했다는 메세지와 함께 파란 화면을 띄우고 보는 컴퓨터는 그냥 재부팅 해버리는게 상책이다. 울고 불고 신이여 굽어 살피소서 기도해봤자 시간 낭비다. 어쩌다 정상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원숭이가 비행기를 완벽하게 조립할 확률이 차라리 더 높다.

『이러다간 마검사가 아니라 마광부가 되겠군.』
괜한 투덜거림이 아니다. 커다란 곡괭이 하나 둘러메고 옆구리로는 대형 부삽까지 대령시킨 꼬락서니만 보자면 창백한 합성수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박살이다. 한술 더 떠서 웃통은 일찌감치 벗어 던졌다. 입과 코는 수건으로 틀어막고 손에는 빨간 반코팅 장갑을 꼈다. 콧잔등을 부적부적 비벼대다 말고 으라차차차~ 기합을 넣고 곡괭이를 들어라. 그리고 내리쳐라. 고대 유적의 벽을 깨고 바닥을 부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마법력이 무용지물이라면 그 다음으로는 사나이의 주~먹이 있다.

『어느 세월에요.』
이런 멍청한 짓을 언제 또 보겠느냐며 제로스가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옛 속담에 마저작침(磨杵作針)이라는 말이 있다. 도끼를 갈아 바늘로 만든다는 얘기다. 끈기와 노력으로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인데... 글쎄올시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지만 그야말로 천 년의 세월은 족히 걸리는 일이 아니더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불사의 인생이 아닌 이상 시도하기는 좀 그럴 것 같은데...?
사암 같은 퇴적암은 손으로 으깨도 바스라진다. 하지만 대다수의 돌이라는 건 곡괭이로 내려칠 적에 불똥이 튕기는 법이다. 흔하지는 않은 돌이지만 섬록암 같은 녀석은 얼마나 단단한지 끌로 조각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 강도는 쇳조각 저리가라다.
다행히 제르가디스가 씨름하고 있는 바위는 섬록암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바위다.
맨 몸으로 씨름하시겠다? 무모하다. 제로스는 도리질했다.

『뭐야... 제로스, 넌 내가 바보로 보이든?』
설마, 곡괭이 하나로 세계를 제패하겠다고 덤벼들까.
『폭약이 들어갈 정도로만 구멍을 만들면 되는 거다.』

최근들어 레죠에 대해 다른 생각이 들곤 한다. 뼛섬까지 씹어먹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더니만, 그래도 휭하니 죽어버리고 나니 그 많던 원한이 조금은 누구러졌다.
죽은 사람을 두고 두고 미워해봤자 영양가 하나 없다는 리나의 충고도 있었더랬고...
뭐니뭐니해도 그로부터 배운 여러 지식들을 유용하게 써먹게 되면서부터다.
머리핀으로 자물쇠 풀기, 눈 감고도 남의 지붕 뛰어넘기, 순금 황금과 가짜 황금 구별하기... 날 도둑놈으로 키울 거냐고 언성 높이고 싸웠던 것도 이제는 좋은 추억이다.
덧붙여 폭약 만들기까지... 사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물론 지라스가 곧잘 만들곤 하던 폭약과는 그 모양과 성능이 다소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화약 제조법은 결계 바깥쪽에서 더 발달되었던 것 같다. 드래곤 슬레이브 격의 폭약까지 만들어댔던 지라스와 비교하자면 이쪽은 새발의 피다. 안전성도 떨어지는데다 성능도 뒤쳐진다.
뭐, 그래도... 제르가디스는 고개를 으쓱였다. 딱히 불만은 없다. 바위에 사람 하나 기어들어갈 구멍을 뚫는 일 정도는 어떻게든 해치울 수 있으니까.

레죠에게 신세를 졌다.
잠시 곡괭이를 내려놓았다. 벽을 마주보고 서서 짐짓 자세를 가다듬었다.
경건하게... 박수 두 번 짝짝.

제로스는 깜짝 놀라 목을 움추렸다.
『뭐, 뭡니까? 갑자기?』
『나 안 미쳤다. 이 근방에선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을 추모한다고 해서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인고? 마족은 바닥을 굴렀다.
『제발 부탁이니까 아무 곳에서 이상한 거 함부로 배워오지 마세요! 가뜩이나 괴짜 같은 사람이 더 이상하게 보이잖습니까!』
『괴짜? 내가? 그건 또 무슨 소리?』
『아닌 척 하긴. 당신은 괴짜가 맞아요.』
그러면서 제로스는 세일룬 발행 주간 마도사 일보를 높게 들어 보였다.
보아라, 이것이 그 증거이다.

- 미켈레 왕국 고문서 도서관으로 괴한 나타나다. 관계자는 일체의 논평을 거부

고문서 도서관의 평사서인 피터슨씨(가명, 나이 35세)는 숙직 도중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지하 문서 보관실로 내려갔다. 불은 꺼져 있었으며 문은 정상적으로 잘 잠겨져 있었다. 겉으로 얼핏 보기엔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날짐승 뺨치는 본능은「분명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왔다. 얼마나 뚫어져라 쳐다봤던 걸까. 마침내 어디가 잘못된 건지를 깨달은 피터슨씨는 새파랗게 질려서는 황급히 사람을 부르러 달려나갔다.
소매춤이 붙잡혀 억지로 끌려나온 도서관장은 눈만 부벼대었을 뿐이다. 몇 권의 책들이 서가에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사서들이 어쩌다 실수한 거 아니냐고 그는 반문했다.
그러나 뒤집어진 책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를 잡아 묘하게 수상쩍은 느낌을 만들고 있었다. 피터슨의 설명을 듣고 도서관장은 돗보기를 벗었다. 멀직히 물러선 뒤에 서가를 노려봤다.
오호라, 보인다. 보인다! *

내용을 읽어낸 도서관장은 한방 맞았음을 깨달곤 그 자리에서 게거품을 물었다.

제로스는 평상시의 잔잔한 미소를 집어치웠다. 마도사 일보를 원래대로 접어 가방에 집어 넣으며 땅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짓이잖아요.』
『내가 그랬다고?』
『시치미떼긴.』
『증거 있으면 대봐.』
『증거랄 것이 뭐 필요 있겠수. 당신 빼고 누가 그런 짓을 합니까. 예전에 드래곤족의 도서관에서도 똑같은 장난을 쳐서 미르가지아님을 웃게 만들었던 걸 제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수? 아무튼 리나님이 그럽디다. 그레이워즈 가문의 피는 구제불능이라고 말이오. 그러면서 펄펄 뛰며 화내길, 말도 안되는 장난질 덕분에 현상수배가 붙으면 절대로 도와주지 않겠노라 하셨습니다. 설령 500원을 줄테니 도와달라고 부탁해도 싹 무시할 거랍디다. 완전범죄로 끝낼 수 있으면 끝낼 것이지, 뭐하러「나라는 녀석, 이곳에 다녀가다」라는 흔적을 일부러 남기느냐는 거지요. 저도 그 의견엔 동감이라서 말입니다, 현상금 붙으면 제일 먼저 관청으로 가서 신고라는 것을 한 다음에...』
『다음에 뭐. 내 엉덩이라도 차주시겠다?』
『이봐요? 제르가디스씨.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세게 나오시는데 말이죠...』

사실 그는 맞아도 싸다. 세상에 어느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걱정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사고를 치느냔 말이다. 어리광도 이 정도 되면 민폐다.

- 날 걱정해 줘. 걱정해줄 거지? 난 문제아란 말이야. 두고 두고 곁에 두고 혼내키라구

이러니 리나가 핏기 가신 얼굴을 한 것도 당연하다.
못 말리는 어리광쟁이 남자에게 평생을 끌려다닐 여자의 팔자라는 것도 참 불쌍하기 그지 없다.

제로스는 강조에 강조를 더해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죠. 리나님이 많이 화내셨습니다. 설령 500원을 준다고 해도 안 도와줄 거랍디다. 알아 들으셨습니까아아~』

그렇다고 눈썹 하나 꿈쩍일 소년이 아니다.
경고했단 이거냐?
제르가디스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500원으로는 부족하다고? 알았어. 가서 1,000원 줄 거라고 전해.』

크헉-
마족은 졌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은 채 멍하니 입 벌리고 섰다.
1,000원?!
그 이야길 있는 그대로 전했다간 분노한 빨간 머리 마도사가 신발짝을 휘둘러댈 것이다. 아니. 한 가닥 하는 그녀의 성깔을 고려하자면 드래곤 슬레이브도 가능하다.

『나더러 지금 죽으라는 겁니까?! 이봐요!』
앵앵 우는 시늉을 하든 말든, 제르가디스는 다시금 곡괭이를 높게 들었다. 유적의 벽은 두껍다. 작업은 꽤나 오랫동안 이루어질 것이다. 폭약을 채워넣을 정도의 구멍을 뚫는 일도 만만하게 여길 수는 없다. 이곳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깡깡 소리가 요란하다. 팔뚝의 근육이 가냘프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조금은 피로하다.

『아아.』
그래도 얼굴은 웃고 있다.
근방 도굴범들이 엄청 쌀쌀맞게 군다고 해서 붙여준「쌀쌀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의 멋진 미소다.
힘이 솟는다.

- 괜찮아. 날 사랑해주지 않아도. 대신 평생 내 걱정을 하고 살면 된다

아마도 리나는 소년의 요구대로 살아줄 것이 분명하다.
분명 멋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