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한 어린이는 일찍 일찍 잠자리에 들어가 코~ 하고 자는 거예요.
달리 표현하자면 엉덩이에 뿔이 난 아이는 늦게까지 싸돌아다녀도 괜찮다는 말씀.

야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시곗바늘은 9시를 넘어 10시로 달음박질하는 중이시다.
주당들의 천국인 마을 술집에서야 한창 물이 오를 시각이다만 여행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숙소 사정은 정 반대다. 외관으로 봐도 이미 불 꺼진 집이다. 1층 구석켠에 자리를 잡은 초라한 음료수 코너로는 신문 읽는 거미와 절반은 졸고 있는 토끼가 자리를 잡았을 뿐이다. 한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혈안이 되었을 여관 주인의 묵언의 폭력에 의하여 가게 종업원이 테이블을 정리할 시간이라는 건 지금보다도 훨씬 먼 미래의 이야기겠다만 분위기만 보자면 이미 파장한 거나 마찬가지다. 발바닥이 고달픈 사람이 반기는 건 역시 술 보다는 따뜻한 목욕물과 폭신거리는 침구 쪽이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되려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유령처럼 우왕좌왕하고는 있다고 해도 덕분에 내부는 스산했다.

『이쪽입니다.』
신관은 돌아다 보지도 않았다. 걷는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개체 구분은 충분히 가능하니까. 그래서 여전히 음료수 잔을 손에 쥔 채 등쪽을 향해 가볍게 신호만 보냈다.

『얼레. 혼자서 마시고 있었냐? 재미 없게스리.』
대답은 생략, 제로스는 유리잔 속에 남은 약간의 액체 - 하필이면 그건 요사스런 핑크빛이었다 - 를 홀짝거리며 음미했다.
『임마. 치사하게 옆에 와서 앉으라는 얘기도 안 하기냐?』
『이미 의자를 끌고와서 앉았으면서 뭘 그러슈. 그나저나 어째서 혼자? 가우리씨는?』
순박한 의문에 답하여 리나는 손등으로 자기 아래턱을 살짝 쳐올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 의미는「완전히 뻗었음」, 권투선수가 어퍼컷을 얻어맞고 기절하듯 넘어갔다는 뜻이다.
『피곤하대.』
『아이구야, 젊은 사람이 형편없군요.』
『동감이야. 겨우 트롤 마흔 아홉마리를 잡고 늘어지다니. 스테미너 부족이라니까.』

제로스는 한참을 투덜대는 리나를 지긋이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간단한 티셔츠와 바지 차림새였다. 미처 감지 못한 더러운 머리카락은 끈으로 대충 동여 묶고 여기 저기에 실핀을 꽂아 넣었다.
본인은 알고 있을까, 그 탓에 한층 더 어려 보인다. 슬리퍼를 발에 꿰차고 나왔다면 영락 없이 동네 슈퍼에 과자 사러 가는 꼬마다. 거기다 확인 사살이라고 총총 잰 걸음 걸이다.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가슴 풍만한 언니들과는 천지 차이다. 주머니에 죽은 개구리가 들어가 있고 정체불명 딱총이 허리춤에 꽂혀져 있으면 더도 말고 딱인 그런 걸음 걸이다.

그렇다고 진짜로 코흘리개 어린이는 아닌지라 손가락을 탁 튕겨가며 종업원을 향해 낼름 내뱉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아저씨? 여기 주문이오. 위스키 한 잔. 얼음에다 레몬 넣...』
『버블 소다 한 잔.』
리나가 넣은 주문을 귀신 같이 자르고 보는 제로스였다. 살기등등한 시선이 꽂혔으나 이미 간이 배 밖으로 나온지라 뒷 감당은 전혀 상관 없었다. 아니, 내장 자체가 없는 신체이고 보니 그놈의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오든, 남산 만큼 부풀든 큰 지장을 받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으르렁거려도 괜찮다. 제로스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이 한 행동은 하나도 잘못되지 않았다. 미성년자가 술과 담배를 삼가야 함은 지당하다.

『여보셔? 나의 곧뻗은 다리를 보셔. 이 섹시한 다리가 어린애의 것으로 보이셔?』
리나는 희극조로 팔을 허벅지 부근으로 가져간 채 항변했다.
강조를 더해 두어번 탁탁 두둘겨도 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증거 대상이 잘못 채택되었다. 날씬하다는 건 인정한다. 그녀가 평상시 입는 하의라는 건 다리의 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신축성 끝내주는 타이즈다. 근육이 덕기덕기 붙은, 이른바 무우와 사돈 맺은 이들은 감히 입어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런 종류다.
하지만 그게 어떻다고?
제로스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각선미가 아무리 뛰어나봤자 길이에서 불합격, 어린애 다리다. 키가 작으니 당연히 다리 길이도 짧다.
이런 말 하기 진짜 미안하지만 리나는 남들 다 넘는 징검다리도 제대로 못 뛰어 넘는다. 언젠가 한 번은 가우리를 따라 울타리를 넘다 도중에 걸려 넘어진 적도 있다.

『보태준 거 있냐!!』
리나는 분을 못 참고 씩씩거렸다.
『그래! 난 다리 짧은 어린애다! 어쩔래!』
『어쩌긴요. 느긋하게 지켜봐야죠. 들들 볶는다고 순식간에 어른이 되어줄 것도 아니고...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긴 있지만 기왕 기다린 거 끝까지 기다려...』
『스톱, 스톱!』
한줄기 불안을 담아 얼른 물어봤다.
『기다려서 뭘 어쩌려고.』
『아앙~♡』
『얼버무리지 말란 말이야!』

무색투명한 음료였다. 버블 소다의 냉기 가득한 기포는 잔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와 소리도 내지 않고 터졌다. 순식간에 잔 표면으로 이슬이 맺혔다. 어느새 유리잔은 누군가의 혓바닥 만큼이나 촉촉해졌고, 당장에라도 정복당할 처녀의 그곳처럼 충분히 물기를 머금었다.
리나는 성질이 난다는 표정으로 나즈막하게 욕말을 중얼거렸다.
『지기럴. 버블 소다라니. 목구멍에서 미끌어지면 남는 건 강렬한 단맛 뿐이잖아.』
『알콜의 쓴 맛보다는 괜찮은 거 아닌가요?』
『너야말로 어린애다. 술이 쓰다니. 그건 쓴게 아니고 멋스런 맛이라는 거다.』
『흐응.』
이래서 인간은 이상하다. 쓴 맛을 일컬어 멋스럽단다. 매운 고추맛에 원더풀을 외치기도 하니 마족의 입장에선 충분히 헷갈린다. 자학하는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고민하는 신관이 잠시 침묵하자 기회를 틈탔다. 리나가 벼락같이 외쳤다.
『여기 위스키 한 잔!』
『어허! 버블 소다 다시 추가! 여자가 튼튼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음주와 흡연을 삼가야 함은 지당하다!』
『이보셔! 훌쭉한 내 배를 보셔. 게다가 난 아직 결혼도 안했어.』
『속도위반이라는 말이 달리 나온줄 아십니까.』
『무슨 소리야?! 난 결백해! 가우리와 난 아직 일 안 저질렀다구.』
『쯧쯧... 애인이랑 매일 붙어다니면서 지금까지 아무 일 없다고 떠드는게 더 창피한 거랍니다, 리나님. 지금까지 키스 한번 안하고 손만 붙잡았다고 주장해 보세요. 누워서 침 뱉깁니다.』
『윽!』
『아무튼 독한 술은 안됩니다.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한다고 생각하세요. 버블 소다나 마시고 얌전히 물어나주세요.』

이쯤해서 제로스는 리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가우리씨도 없는 이상, 지금의 당신 보호자는 바로 납니다.』
『와악!! 짜증난다!!』

새카만 밤, 엉덩이에 뿔난 어린 양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닌다.
그렇다고 자유던가? 노노. 그런 양에게도 (불량) 양치기 소년이 철석 붙어 있음이다.


*** 저희 집 컴퓨터 방, 엄청 춥습니다. 현재 체감 온도는 10℃ 정도 됩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외벽인데다 21층 꼭대기 외풍을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있고, 평소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살지 않는다고? 단지 침대만 없을 뿐이지 않던가?) 난방 장치를 잠궈두죠. 손이 꼽아서 자판도 만지기 힘들군요.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죽치고 놀아볼까 했더니만 결론은 못 참겠습니다. 추워... 얼어죽을 것 같다...
이런 불평불만을 후기로 남기다니, 하하하...;; 정작 중요한 제목 선정에 대한 뒷 이야기는 생략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