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전 십이국기를 애니로만 접했습니다. 따라서 내용을 정확히 집어낼 수 없습니다. 순전히 엘님의 사이트 오픈 기념물로 발버둥을 친 것이고...;; 지나가는 투로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려줄 거라 기대를 막대히 했음이다) 요청한 라크슌 팬아트가 떠덕 올라갔음에 상당히 기뻤음이고... 기브 & 테이크, 강탈의 역사에 상당히 길들여져 있음을 다시금 실감했고... 뭐, 그렇다는 겁니다.


세계는 달라도 비슷한 건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왕은 멋대로 자기 나라를 떠나 여행할 수 없다」는 것이랄까... 왕도 그렇고 재보도 그렇다. 바지가랭이 걷어올리고 명산유수 구경한답시고 놀러 나가는 것도, 공식적으로 예의를 갖추어 타국을 방문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왕은 개인이 아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다. 그 몸은 나라를 품고 있다. 따라서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신발이 없다. 덕분에 멀리 나가고 싶어도 현관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신세다. 맨발로 어디를 갈꼬, 나라의 무게를 지탱할 신발부터 찾는 일이 급선무다.
뭐, 격식을 차리기 싫어하는 엔타이호야 신발이 없어도 잘만 돌아다니지만.

요코는 조심해가며 복숭아 접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기억에 의하자면 엔타이호는 복숭아를 아주 잘 먹어치웠다. 성장이 멈춘지 이제 500년, 성수가 된지도 500년이나 지났건만 과일의 살즙을 집어 삼키는 모양새만 보자면 한창 자랄 나이의 청소년처럼 보였다. 점잖케 말해 그렇다는 것이고, 리얼하게 말하자면 게걸스럽게 먹었다는 얘기다.
요코는 손에 묻은 과즙을 닦아내라며 깨끗한 수건을 앞으로 내밀었다.
당연히... 라고 적는게 다소 속상하지만 엔타이호는 옷자락에 손을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요코의 배려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입가는 소매춤으로 슥삭 닦아 버렸다.

요코는 아- 하고 뭔가를 말할까 말까 잠시 갈등했다. 그러다가 관뒀다. 한 나라의 재보에게 「그러면 더럽잖아」라고 어떻게 말하나. 그녀는 잠자코 미소지으며 쥐고 있던 수건을 슬그머니 등 뒤로 감췄다.

『그래서 말인데... 경왕.』
반말하는 재보... 어쨌든 말은 이어졌다.
『이거. 쇼류가 이거 가져다 주라고 했어. 보자기로 잘 싸가지고 왔으니 아직 식지는 않았을 거야. 맛있게 잘 먹으라고?』
『이것은...?』

만두였다. 보자기를 끌러봐서 안 것이 아니다. 저 안으로부터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다. 고기 다진 만두인 걸까... 손바닥에 와서 착 감기는 온도가 여전히 기분 좋게 따스하다. 희한한 일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요마를 타고 와도 안국에서 경국까지는 족히 하루는 걸리는 거리라던데,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만두는 이미 오래 전에 식어서 꾸덕꾸덕해졌을 거다.
재주도 좋다. 기린도 요술을 부리나?
글쎄. 채 마르지 않은 엔타이호의 젖은 앞 머리카락이 모든 것을 설명할련지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요코는 조심해가며 보자기의 매듭을 끌러보았다.
와아.
안에는 고색창연한 네모 도시락이 반듯하게 놓여져 있었다. 뚜껑은 군청색으로 칠해졌고 표면은 조개의 껍질을 붙여 한껏 모양을 냈다. 오는 도중에 열리지 말라고 든든한 끈으로 옆구리가 단속되었다.
요코는 웃었다. 연왕의 성격은 의외로 섬세한가 보다. 젓가락은 물론이고 덜어서 먹을 수 있도록 작은 접시도 하나 넣어 두었다. 아기자기한 것이 흡사 소꿉장난 세트 같다. 그 자리에서 뚜껑만 열어서 잠자코 먹기만 하면 되었다. 날씨 좋은 날에 야외로 싸들고 나가면 한껏 콧대를 세울 수 있는 그런 도구들이었다.

『어머... 예쁘다.』

잠깐만.
그런데 엔타이호는?
평범한 일본 중산층 가정에서 착한 아이로 교육받고 자란 요코는 하나뿐인 접시와 젓가락에 내심 당황했다. 혼자서 먹으면 나쁜 아이다. 그것은 무례한 짓이다. 손님을 마주한 주인된 자의 행동은 그래선 안된다. 손님이 케이크를 싸들고 오면 조각을 잘라 같이 맛을 봐야 하는 것이다.

『아, 권하지 않아도 괜찮아. 쇼류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하지. 기린은 편식하는 나쁜 동물이라고.』
요코는 흠칫했다.
『그렇구나... 고기... 안되는구나. 저어... 케이키와는 같이 식사하지 않아 그런 걸 미처 몰랐어. 미안. 부주의 했어.』
『미안하긴!』

엔타이호는 신경쓰지 말라며 팔을 휘휘 휘둘렀다. 기린은 금수의 왕이자 자비의 생명체다. 육식은 체질상 하지 못한다. 단지 그뿐이다. 인간들이 고기의 맛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하게 이쪽은 싫어하는 것뿐이다. 어느쪽이 옳고 그르고의 수준도 아닌데 요코가 미안해 할 까닭은 없다. 채식만이 신성하고 육식은 잔인하다고? 농담이다. 어차피 생명이라는 건 희생을 바탕으로 쌓아 올리는 금자탑이다. 그 기둥 재질이 소나무냐 잣나무냐를 따질 가치는 없다. 높이만 쌓이면 되는 거다.
엔타이호는 외모와는 다르게 할아버지와도 같은 몸짓으로 어서 먹으라 재촉했다. 만두는 식으면 맛이 없어진다. 기왕이면 맛있게 먹어주길 바랬다.

『잘 먹겠습니다.』
한입 가득히 베어물었다.
『맛있어?』
『으응...』
『다행이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요코는 이쯤해서 슬그머니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들은 적이 있어. 안국이 어려웠던 시절에 연왕이 손수 만두를 만들어 팔아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이걸 어쩌면 좋을까.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버스를 발견하고 핸들을 꺾었더니만 그게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승용차는 추락했다.
- 쿠울럭!
엔타이호는 정말로 당황해서 잔기침을 터뜨렸다.
『요코...;;』
엉겹결에 호칭도 까먹었다. 건방지게스리 남의 나라 왕 이름을 불러대다니.
어쨌거나 엔타이호는 정색을 하곤 자세를 바로 잡았다. 하여간 이래서 순진한 사람은 곤란하다는 거다. 먹을 쌀도 없어 나무 속껍질을 물에 불려 얼굴이 훤히 비치는 멀건 죽을 만들어 먹었을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 자고 일어나서 하는 걱정이라는 것이「돈! 돈! 돈!」이었던 때가 분명히 있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만두는 왕이 만들고 팔기는 재보가 팔았다」는 식의 무용담(?)은 맹.세.코. 없었다. 워낙에 격식을 따지지 않았던 왕과 기린의 찰떡궁합이고 보니 [만두장사를 하면 체면이 손상당한다] 식의 인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쇼류는 앞치마를 걸친다고 부끄러워할 타입의 남자가 아니다. 해야 한다면 삭발도 가능하다. 그는 진정한 수치를 알고 있었다. 부끄러움이라는 건 진정으로 지켜야할 것들을 잃어버린다는 것... 봉래에서 처절한 수치를 한번 입었던 소류는 따라서 여간한 것엔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앞치마? 입는다.

그런데 왜 만두 장사를 하지 않았느냐고? 간단하다. 그런 걸 만들어 팔아봤자 나오는 건 푼돈 뿐이니까.
내일 당장 황금 400쭝이 필요하다고 가정을 해보자. 만두를 팔아 황금 400쭝을 채운다? 어느 세월에. 종이꽃을 접어 하나에 70원씩 모아 자동차를 사겠다는 포부를 가진다면 그게 제정신이냐. 차라리 옥좌에 붙은 홍옥을 뜯어낸다. 그게 더 괜찮다. 실제로 쇼류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연왕이... 만두장사를 해서 나라를 안정시켰다고, 나에게 웃으면서 말했었어. 그러니까... 저기, 난 놀림받은 것?』
그녀의 뺨이 확 붉어졌다.
요코는 만두를 집어 삼키는 척 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덕분에 목이 메였다. 그녀는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엔타이호는 허겁지겁 도리질했다.
설마, 설마. 같은 태과 출신으로 역청과도 비슷한 끈적임의 동지 의식을 느끼고 있는데다 젊은 여성인 요코에게 달콤한 호감까지 가지고 있는 연왕이 그녀를 놀려도 먹었겠다. 상대가 굳이 요코가 아니라도 그렇다. 왕을 놀려먹다니. 당장 실도할 거다.
온몸에 얼룩덜룩한 반점이 돋아난 자신의 흉측한 외모를 상상하던 엔타이호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아냐, 경왕. 틀려.』
만두를 만들어 팔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두를 만들어 선물은 했다.
나중에 쇼류는 그걸 가리켜 [정치] 라고 하였다. 자비의 금수인 기린의 머리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쇼류의 표현대로 그것은 만두 정치였다.
엔타이호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만두의 냄새와 그걸 받아든 사람들의 안색을...

아직은 어려웠던 시절, 제각각 살 궁리에 여념이 없던 각 주의 주후들은 태과 출신의 왕이 손수 싸보낸 만두를 받아들자마자 표정이 확 변했다. 그들은 지금의 요코처럼 기뻐 웃어가며 젓가락질을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벌벌 떨어가며 무릎을 꿇었다.

- 다져진 고기와도 같은 그대들이여, 연왕이라는 만두피에 의해 하나로 뭉칠지어다

충성을 맹세하면 지금까지의 허물은 눈감아 주겠다는 메세지일 수도 있었다. 일단 만두피에 싸여지면 속 내용은 잘 감춰진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잘못은 넓은 아량으로 덮어주겠으니 앞으로 잘 하라는 평화와 화해의 제스츄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의미로 해석하려니 구석으로 처박힌 옆구리 터진 만두가 영 마음에 걸렸다. 주후들의 눈엔 그것이 흡사 자신의 분신처럼 여겨졌다.

- 감추고 또 감추어봐라. 그런다고 어디 감춰지나. 그대들의 잔재주는 밀가루 반죽의 두께다. 젓가락으로 쓱 찢으면 속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몸은 그대들의 치부를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음이다. 어쩔래?

주후들 중 하나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그날 저녁에 독을 먹고 자살했다.
사람이 죽었다는 보고를 건네받던 연왕은 묵묵히 입만 다물고 있었다.
엔타이호의 기억에 그때의 연왕은 조금은 슬퍼 보였고... 약간은 화가 났으며, 더러는 침울해 보였다.

- 왕이라는 거 쉽지는 않군

사람이 죽었음에도 엔타이호가 정색을 해가며 주상을 다그치지 못했던 건, 죽도록 피곤해하던 바로 그 슬픈 표정 때문이었다...

『엔키?』
『아아.』

요코는 말한다. 이 세계로 돌아와 까닭도 모르게 요마에게 쫓기면서 모두를 의심하며 마음을 닫아걸었을 적에 지옥의 문가에까지 다다렀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옥의 입구가 아니다.
그녀는 모른다.
살아있는 아이들을 우물에 집어던지는 부모의 피눈물이라는 것을, 배고품에 살인도 불사한다는 것을... 불타는 마을과 나라를 눈으로 본다...
엔키의 눈에 그녀는 여전히 순수하고 어리게 보인다.

- 당신은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처럼은 말이야

엔키는 웃었다. 다소는 억지였지만... 그래도 웃었다.
『틀려, 경왕. 우리는 빈대떡을 팔았지 만두는 팔지 않았어. 그 소문은 잘못되었다구.』
『빈대떡?』
『그래. 빈대떡... 다음엔 문제의 빈대떡을 이마~안큼 가지고 와주지.』
요코의 어깨로 손을 올려놓는 건 케이키의 몫이다. 그래서 엔타이호는 손을 올려 경왕의 어깨를 다독거리는 대신 자기 허리로 손을 올렸다.

『걱정이 되서 그러는데... 엔키. 그 빈대떡에 나도 돈 내야 해?』
『당연하지! 세상에 공짜가 어딨누!』
『못 됐어...;;』

라크슌은 말했다. 요코가 어떠한 나라를 만들지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그건 엔키도, 쇼류도 마찬가지다.

- 힘내는 거다, 경왕

아직 경은 황폐하다.
그러나 서서히 경은 따스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