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야숙이냐 툴툴거리긴 했어도 의외로 적응이 빠른 일행이었다.
귀신같이 빠른 솜씨로 불을 피웠다. 긁어모은 마른 낙엽 위에 망토를 이불대신 깔아 폭삭거리는 임시 침낭도 만들어 놓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르가디스는 주전자에다 끓일 물을 받아왔고, 리나는 나뭇가지에다 고구마를 끼워 굽기 시작했다. 가우리는 토끼라도 잡겠노라 덫을 만들러 나갔고, 아멜리아는 세수를 하고 오겠다며 개울가 아래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며 모닥불에 주저앉은 리나는 하품을 참아가며 베낭에서 머리빗부터 끄집어냈다.

빗질하기는 그녀의 하루 중 마지막 일과이다.
커피를 끓이던 제르가디스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앉아 리나가 머리 빗는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머리카락이 엉켰네. 바람이 많이 불면 골치가 아파. 요즘 같은 때는 귀찮다니까.』
리나가 손가락으로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끌어당기며 툴툴거렸다.

『음, 그렇군.』
약간은 시큰둥한 대답이었다.

제르가디스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모닥불이나 뒤적거렸다.
위 있는 부근이 울렁거리는 것이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 네가 봐도 그렇니? 한심해... 먼지나 잔뜩 뒤집어 쓰고 이게 뭐람.』
엉켜 붙은 머리카락을 눈가로 가져가며 그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갈라지진 않았나, 빛깔은 괜찮은가... 제르가디스가 보기엔 멀쩡하기만 한데 리나는 속상하다는 시늉을 해보이며 머리빗을 부지런히 휘둘러댔다.

풍덩 빠져버릴 것만 같다. 제르가디스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 벌어졌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그녀의 머리카락은 정말 예뻤다. 잘 익은 사과 껍질처럼 반질거리는 붉은 빛의 홍수, 어깨 너머로 황홀하게 물결치는 매끄러운 질감이 절로 쓰다듬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빗질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최면이라도 거는 듯 하다.
위가 죄여오는 느낌이다. 그것은 일종의 미약과도 같아서 사람을 일시적으로 행동 불능으로 만들어 버린다.
제르가디스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리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하였다. 조금만 더 방심했다면 지독한 포도주에 취한 얼간이처럼 손을 내밀어 붙잡으려 했을 것이다.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었다. 마른 나뭇잎에 불이 붙었다. 고운 빛깔로 서서히 사그러져 가고 있었다. 상념이... 타들어가고 있다.

통제되지 못하는 것은 경멸스러운 것이다. 제르가디스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또다른 나뭇가지를 손에 쥐었다. 무언가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진정된다는 건... 약간은 우스운 일이지만... 에라, 모르겠다.

리나의 툴툴거림은 그 다음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졌다. 일단 머리 손질이 어렵게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거칠거칠해진 얼굴 피부에 대해 또다시 궁시렁거렸고, 다음 순서로는 자동적으로 납작하게 생겨 먹은 자기 가슴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여자의 매력이 커다란 가슴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좁쌀 만한 크기의 자기 가슴에 대한 원망은 가히 하늘을 찌를 지경이다. 그녀는 제르가디스가 옆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으로 공기사발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 이 정도만 되었으면.

그녀의 소리없는 하소연이 그의 마음속까지 흘러 들어왔다.
제르가디스는 민망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짐짓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만해. 단지 신체의 일부분만으로 사람이 달라지는 건 아니야.』
『하지만 조각난 부분만으로도 그 인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걸. 얼굴, 다리, 허리, 엉덩이!! 특히 가슴!!』
『좋아하시네. 인간이 무슨 낱개로 굴러다니는 단세포 아메바냐?』

틀린 말은 아니다. 어깨를 으쓱거리던 그녀는 짐짓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현실은 어디까지나 냉혹한 법이다.

『지랄 같은 일이지만 사실이잖냐. 남자들은 신체 일부분만 보면서 여자를 평가하지 않니? 저 여자 허리 정말 가늘다, 오, 저 아가씨 다리 죽인다. 이마아∼한 가슴 끝내준다! 그런 식으로 다들 좋아하잖아.』
그러면서 리나는 수박만한 크기로 둥글게 팔을 오무리며 출렁이는 거대 가슴을 흉내냈다.

그 황당한 과장에 어이없다는 식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한 가슴을 가진 여자라면 괴물이 아니던가! 허리를 펴고 걸어다닐 수도 없을텐데. 상상만 해도 기분이 언찮다. 제르가디스는 불편하게 헛기침을 했다.

『웃기는 소리. 아무리 그래 보았자 결국은 거기서 거기야. 만약에 말이다... 너에게 목이 잘린 시체가 배달되어 온다면 누군지 알아볼 수 있겠니? 그 사람의 목덜미가 어떻게 생겼더라, 배는 얼마나 튀어 나왔으며 다리는 어떻게 뻗었는지, 손과 발의 모양새는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 그런 것으로 누구라고 판단을 내리기는 무척 어렵지. 한 번 생각해 봐. 넌 알 수 있겠어? 목이 잘려져 나간 상태에서 발가벗겨진 시체는 거의 다 비슷비슷해. 일종의 고깃덩어리지. 그러니까 가슴이 커봤자 하나 소용 없어. 몸뚱아리가 어떻게 생겼든 솔직히 거기서 거기라고. 중요한 건 사람의 가슴 크기가 아냐. 너도 잘 알잖아.』

표현이 너무 과격했나.
리나가 무섭다며 펄쩍 뛰었다.

『에엑?! 목이 잘려진 시체라니?! 네가 말하고자 하는 건 잘 알겠지만... 생각만 해도 싫다. 끔찍하잖아!』
그녀는 어깨를 움추리고는 엉덩이 걸음으로 불가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불꽃이 불똥을 토해내며 그것 참 시끄럽게 떠든다고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닥불이 내지르는 항의에 잠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우리는 덫을 놓는다면서 구덩이까지 파고 앉았나, 아멜리아는 세수만 하고 온다더니 멱까지 감고 있나. 왜 다들 오지를 않나.

리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제르가디스를 곁눈질했다. 그리고는 머뭇머뭇 손가락을 들어 그의 옷자락 한 구퉁이를 붙잡았다.

『저기... 그런데 말이지... 정말이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 진짜 그래?』
어린애마냥 호기심에 가득찬 질문이었다.

제르가디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턱으로 손을 가져갔다. 잠시 그는 무척이나 골똘히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길 한 1분?
마침내 그의 청은색 눈동자로 깊은 고요가 떠올랐다.
리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뒷통수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강렬하게 바라보면서 제르가디스는 너무나도 진지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했다.

『대부분은 그렇지. 하지만... 리나? 난 네가 악당에게 살해당한 뒤에 목이 잘리고 한바탕 발가벗겨져서 소포로 부쳐진다고 해도 널 알아볼 거야.』

당연한 일이다. 자신 있었다. 어디까지나 이건 그의 마음의 고백이자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표. 현. 이. 영. 틀. 려. 먹. 었. 다.

단박에 리나의 얼굴 위로 불길하다 못해 섬뜩한 살기가 떠올랐다.
『으흐흐. 그게... 세상에서 가장 납작한 가슴 때문인 건 아니겠지? 응, 아저씨?』
리나는 두 손에 극대 분노 화이어볼을 만들어 보이며 제르가디스를 지긋이 응시했다.
음, 글세.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데... 으음.

신발짝으로 가차없이 머리를 얻어맞으면서 제르가디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과연 어디서부터 단추가 엇갈리기 시작한 걸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심란한 마음으로 턱이나 괴었다. 불길에 시커멓게 그슬린 뺨이 얼얼하게 아파오고 있었다. 덧붙여 머리를 후려갈기는 리나의 종주먹은 좀처럼 기세가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아무튼 가끔씩 남자들은 엉뚱하게 자기 마음을 표현해서 스스로 매를 벌곤 한다.
그건 어디까지나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