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수?!」라고 그의 눈이 말했다.
비록 입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남들이 그 메세지를 알아듣기엔 별 무리가 없었다.

『우리, 얘기 좀 해요.』

제로스는 커다란 벽을 느꼈다. 지금의 그는 그놈의 빌어먹을 콘크리트 벽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려나가고 있는 중이었... 아니. 방금 전, 뿌작 굉음을 내며 그대로 처박혔다.
이럴 수가! 담벼락은 높고도 튼튼하다. 산산이 부숴지는 건 되려 마족의 연약한 몸뚱이었다. 사람 모양 실루엣의 음각 조각을 아로새기고는 덩어리진 두부 조각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무릎이고 가슴팍이고 무지하게 답답했다. 뺨이 얼얼하게 짓눌린다는 느낌이 너무도 생생하다.
제로스는 이대론 도저히 못참겠다며 손바닥을 들어 마른 세수를 부지런히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이지 않는 껍질을 벗겨내야만 했다.

『빌어먹... 리나님?』

대꾸도 없다. 콧소리도 내지 않는다. 쭈그리고 앉아서는 지나가는 개미 관찰에 열중했다. 맘대로 떠들어라, 내는 모른다. 한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이 너무나도 얄미웠다. 그녀는 진정으로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제로스는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석장으로 땅바닥을 꽉꽉 찍었다.
『황금이고 다이아몬드고! 흡혈귀 잠자리로 기어들어가는 처녀라니요!』

흡혈귀의 본성이 아니던가, 인간 처녀의 피를 밝히는 건 말이다. 따지고 본다면야 적혈구에 백혈구에 다량의 혈장에... 남자든 여자든 피의 성분은 똑같다. 건강 상태에 따른 개인차는 분명히 있겠지만 성별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흡혈귀가 여성 희생자를 선호한다는 건 넌센스가 맞겠으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들도 희생자의 미모를 엄청 따진다. 목 굵고 어깨 건장한 청년의 멱을 따는 건 남들 보기에도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아니다. 하지만 어리고 가녀린 처녀의 목에다 송곳니를 들이박는 건 상당히 색다른 느낌이다. 전자가 상한 고구마 같은 분위기라면 이쪽은 은밀하고도 섹시하다. 즉, 그림이 된다는 말씀. 따라서 최불암을 보고 낯을 붉히는 변태 흡혈귀가 아닌 이상 그들이 처녀들을 낚아챌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는 건 공인된 정설이다.

『그런데 관 뚜껑 열고「여, 흡혈귀씨. 처음 뵙겠습니다♡」인사를 하시겠다고요? 그래가지곤 나 잡아 먹으슈~ 하는 거랑 뭐가 틀리느냐고요.』

리나 정도의 수준이라면 그까짓 흡혈귀는 심심풀이 땅콩일 수도 있다. 바로 옆에서 리나의 실력을 두 눈으로 봐왔던 제로스다. 그녀만의 비기인 라그나 블레이드라면 고위 마족인 그의 몸조차 두 동강이 날 수 있었다. 얌전이 손 내리고 맞아준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하여튼... 그녀는 인간계에선 손가락에 꼽히는 몇 안되는 최고위 실력자였다. 하급 마물인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는 수치는 당하지 않을 거다.

그래도... 제로스는 턱이 떨리도록 불안했다.
『저기요. 저기, 저기. 내일 모레가... 저기.』
창피하지만 꼭 말해야만 했다.
『있잖아요. 그거.』

제발 돌아다 보기나 해라. 이쯤 되면 눈이라도 흘겨 떠야 정상 아냐?
미칠 지경이었다. 리나는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꼼짝도 안했다. 제로스는 울상을 지으며 손가락을 질겅질겅 씹어 물었다. 정말 말해도 되나. 스스로 느끼기에도 씩씩 숨소리가 커졌다. 금기를 건들인다는 건... 내키지 않았다.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면 영락없이 흡혈귀가 되요. 모르진 않지요?』
가뜩이나 무시 당해온 세월이었다. 안생겼다, 재수 없다, 샐샐거린다, 쓸모 없다, 기타등등.
그런데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리나가 흡혈귀가 된다면 상황은 더 나빠질 거다. 왜냐고? 당연하잖아. 피 한 방울 없는 마족은 영양가 없을 터였다. 당연히 그녀는 식사거리와는 거리가 먼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바닥 휘휘 내저어 멀찍이 내쫓을 것이다.

- 안돼!
제로스는 느끼한 현기증을 느끼곤 주먹을 꾹 쥐었다.
『리나님의 실력은 저도 인정합니다만... 지금의 리나님은 상태가 좋지 않아요. 마력이 약해지고 있다고요. 그, 그러니까... 내일 모레가 예.정.일.이잖아요.』

얻어맞을 걸 각오하고 내뱉었다. 남자가 할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에티켓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여자 앞에서 그토록 멍청한 짓거리는 없었다. 잠시 약국에 뭘 사러 가야겠다고 말하는 여자친구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는 얼간이라면 또 모를까!
그러나 예의고 뭐고 지금은 망토 뒤로 치우자.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말려야만 했다.

『리나님!』
여전히 개미 관찰 중이시다. 신이여, 악마여.
이렇게 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갈갈이 날뛰었다. 바닥을 구르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석장으로 베르디 오페라를 지휘했다.
『흡혈귀 황금관 찾으러 가지 마요. 네?!』
그래도 리나는 죽어라 개미만 관찰했다.
『마족의 말도 좀 들으란 말이야아아아아!!』
계속해서 개미만 들여다 봤다.
제로스는 말 그대로 꼴깍 숨이 넘어갔다.

한참 뒤에... 뭔가 조용해졌다 싶어서 리나는 고개를 흘끔 들었다. 이미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로 손을 가져가며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뭐야. 남은 배가 아파 죽겠는데 저 녀석은 죽어라 시끄럽게 떠들다 가고. 아윽! 최근 들어 고구마 푸딩을 너무 먹었나 봐. 사흘 동안 화장실에 가질 못했더니 뒤집힐 것처럼 아랫배가 꼬이네. 으으. 사람 죽는다!』
새파란 안색으로 그렇게 그녀는 딱딱해진 뱃가죽을 움켜쥐었다.

저런. 하나도 안듣고 있었구나! 이걸 워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