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목에 뭔가 걸렸다.
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자그마한 참깨 씨앗이 보드라운 혀 안쪽 살속에 깊숙이 파묻혔다. 안 보여도 그놈의 존재감이라는 것이 있다. 다행히 생선가시를 잘못 삼켰을 때와는 달리 통증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물감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속이 컬컬한 것이 영 편안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를 강렬하게 느꼈다. 살얼음이 진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면 정체 모를 답답함이 시원하게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입술에 살짝 닿기만 해도 가슴이 뻐근해지는... 그렇게 차가운 물.
하지만 수중엔 휴대용 물통이 없었다. 젠장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근처엔 우물은커녕 개울물도 흐르지 않았다. 맥이 탁 풀리는 일이었다.

『후우.』
바다 신기루를 향해 얄궂은 돌팔매질이나 해대는 사막의 낙타 몰이꾼의 이목구비가 제르가디스의 얼굴에 고스란히 복사되어 올라갔다.
보이는가. 달구어진 모래는 바작바작 튀겨버리겠노라 으르렁대고 있다. 날카로운 매의 부리를 닮은 바람은 사람의 살갗을 찢어 발긴다. 태양은 가마솥 안의 호박죽 저리가라로 펄펄 끓고 있다.
아... 차가운 물이 필요하다. 목이 타들어 간다. 오래 전에 모두로부터 잊혀진 이름 없는 망자는 뼈만 남은 누더기의 팔을 들어 멀쩡한 남의 목을 움켜쥐고 탈탈 흔든다... 목 마르다.

입안으로 끈적이는 허멀건 분비물을 최대한 모으고 힘들게 침을 넘겼다.
꿀꺽 소리만 컸다. 짜디 짠 바닷물 삼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호호호, 그것 참 낭만적인 이야기네요? 아저씨.』
『그렇쟈? 그래서 요정은 동굴의 정령 아살라가에게 귀한 보석을 선물하면서 맘속에 품어오던 사랑을 그제야 고백했다 이거여! 어때. 끝내주지?』
『오~예!! 보석, 보석!』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두 명의 인간은 사이좋게 히죽 웃으며 눈을 맞췄다. 둥글게 구부린 등이 오랑우탄을 연상시켰다.
리나는 번들거리는 입술을 뺨 위로 끌어올리며 파리처럼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노골적으로 좋아 죽었다. 장사가 너무 잘 되어서 금전통으로 동전이 하나 가득이라 비명 지르는 무더운 여름날 아이스크림 장사치의 야만적 환호가 머리 꼭대기로 걸렸다. 깃발은 나부꼈다. 그것은 어두컴컴한 바다 위를 비추는 등대의 환한 전구 불빛과도 같은지라 제르가디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눈이 부셔 견딜 수가 없었느냐고?
찡그린 모양새만 보자면 그런 것 같기는 하다만.

- 그래, 네가 가장 좋아하는 보석 이야기다 이거냐? 리나 인버스.

사내의 솥뚜껑 사이즈의 손바닥이 리나의 등을 거칠거칠 두드렸다. 제르가디스의 목 울대가 한층 더 급하게 꼴깍꼴깍 춤을 추었다. 손바닥으로 살짝 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탄력을 줘서 분명히 쓰다듬었다. 신경에 거슬렸다. 그런데 정작 리나의 반응은? 낯선 사내가 몸을 만졌음에도 그다지 상관 없다는 투다. 보물 이야기에 넋이 나가 응응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요정은 보석을 받아서 어쨌나요? 네? 반지로 만들었나요, 왕관으로 만들었나요, 목걸이로 만들었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벽걸이? 허리띠? 귀걸이? 네??』
『아가씨. 숨 넘어 가겠다. 진정 좀 해.』

지나가던 사람 붙들고 얘기 좀 하자고 수작부리던 남자는 리나가 보여주는 뜨거운 반응에 되려 놀랐다. 굶주린 새끼 고양이는 입맛을 다시며 우유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접시 속으로 앞발을 올려다 놓았다. 어서 내놔. 눈빛만으로도 무섭게 채근질했다. 들고 있는 지도로 얼굴을 불쑥 들이미는데 이쪽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 부싯돌로 나뭇잎에 불 붙이기는 예정된 사고일 것이다.
사내는 허리를 뒤로 젖히고 멋쩍게 헛헛 웃었다. 진정하라구, 이 친구야. 일단은 양 손바닥을 들어 가만히 있어보라는 식의 제스츄어를 취했다.

『진정같은 소리! 관심이 아~아~주 많이 가는 얘기니까 쉬지 말고 계속해요.』
『어이. 그렇게 서두를 건 없잖아? 마도사 아가씨.』
『아뇨. 분명히 말하지만 급.해.요. 그러니까 빨랑 말해요.』

장난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보물 지도를 손에 쥐고 일행에게 접근한지 이제 겨우 1분.
보통의 여행객들이라면「일 없수다! 저리로 가쇼.」라며 등을 떠다밀었을 터인데 그녀의 반응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리나는 눈에 불을 밝히곤 사내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결론이 뭐야? 결론부터 말해. 보물이냐. 보물이지. 내 말이 맞지.

『헛헛- 그러니까 이게 그 보물이 있는 곳을 그린 최신판 지도라오.』
『오~ 일명 요정이 자기 애인에게 선물한 보석이 잠들어 있는 사랑의 동굴!』
리나는 박수를 짝 쳤다.
『뭐, 전설로는 그렇수다. 동굴의 정령 아살라가는 선물받은 보석을 아주 소중하게 여겨서 평생 몸에 지니고 살았고... 죽어서도 그 보석과 같이 동굴에 묻혔거던.』
『그래서요? 그래서요?』
『글쎄올시다... 어쨌거나 꽤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아직껏 문제의 보석을 찾아낸 사람은 없어요. 그간 보물 찾기에 도전한 사람들 머릿수도 농담이 아닌데 말이야. 듣자하니 정령의 혼백이 동굴 안쪽까지 들어온 사람들을 홀린다나 뭐라나?』
『홀려요?』
『자세한 건 나도 모르이. 다만 갑자기 으악 비명 지르며 도망쳐 나온 사람이 구신을 봤네 팔신을 봤네 어쨌네 하더라고.』

사내는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고저 짐짓 어금니로 고깃덩이 무는 시늉을 해보였다.
으릉. 내 이빨 무섭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게 고향에 있는 언니이고, 세상에서 가장 떨떠름한 존재가 유령이라고 주장하던 리나는 본능적으로 찔끔 떨었다.

『귀신?』
『응, 아가씨. 귀신.』

그러나 리나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며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주먹을 위로 들어 보이며 힘을 주었다. 허세라고 해도 주먹은 주먹, 발돋음을 하면 키는 커진다.
『흥이다! 그깟 정령이 장난치는 것 따윈... 난 마왕하고도 젓가락 들고 싸우거든. 한 방에 때려눕히면 그만이야. 정령이든 귀신이든 다 나오라고 그래!』
『역시. 애시당초 아가씨는 다른 사람과는 뭔가 달라 보였어.』
『당연하죠. 모두가 실패해도 나는 달라요. 그 보석의 임자는 바로 나!』

일이 이 정도로 흘러가면 다음으로 벌어질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리나는 동전 지갑을 꺼내들었고, 지도 한 장 팔고자 나선 장사치는 재빨리 손가락을 다섯 개 들어 보였다. 지도의 값으로 은화 닷 냥을 내놓으라는 거였다. 물론 우리의 대 상인의 딸은 그 손가락 중 셋을 뒤로 훌렁 꺾어버리는 무지막지함을 과시하였고... 으악 비명 지를 틈새도 주지 않은 채 두 푼의 동전이 장사치의 앞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장하다, 상인의 딸!)

『이봐!』
제르가디스는 결국 한 마디 하고 늘어졌다.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 사기꾼처럼 생겨먹은 작자랑 사이좋게 얼굴 마주보고 소곤거리기나 하구...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 건가.

『이 바보야! 사람 말을 좀 들어.』
『안.들.려.요.』

저 옛날 로마의 집행관 본디오 빌라도는 대야에 담긴 물에 그 손을 씻는 것으로 성자를 징벌한 자신의 극악무도한 죄값을 유대인에게 돌렸다. 피값은 나의 손을 이미 떠났노라.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두 손을 탁탁 털던 리나는 가볍게 콧방귀만 뀌었다.

『리.나. 인.버.스.?』
진지하게 풀 네임을 부르는 그는 심상치 않다. 여기서 리나는 어깨를 으슥였다.
『알았어, 알았다구. 얌전이 대답할게. 안 믿어. 이제 됐냐?』
『그런데 왜?』
『혹시나 하는 거지, 뭐.』

생각할 것도 없었다. 리나는 든든한 (단단한?) 제르가디스의 뱃가죽을 화장실 문 노크하듯 두드렸다. 이어 삐딱하게 위를 올려다보며 불만 가득한 소년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튕겨냈다.
슬프다. 미묘한 반사각 차이로 아폴로 우주선은 대기권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그대로 우주의 미아가 되고 말았다. 소년은 이런 식으로 나오는 소녀에게 꼼짝을 못했다.

목이 말랐다.
제르가디스는 뻣뻣한 동작으로 턱을 내려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한 한 떨기 장미를 바라보았다.
향기롭고 자존심 강하다. 그의 장미는 무적이라 할 수 있었다. 짐이 곧 국가다.

『이름하야 소녀의 꿈이라는 거야. 알겠어? 제르가디스.』
『아니. 그런 건 난 모르겠는데.』
『당연하지. 넌 남자 아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연약한 소녀의 꿈을 박살내려고 하면 용서 못해. 그런 나쁜 남자랑은 같이 안 놀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무시할 거야. 어때. 무시당하고 싶어?』
『쳇! 맘대로 해. 이 고집불통아. 가짜 지도에 속아 고생이나 터지게 해라.』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
저주섞인 거친 욕 말을 내뱉었지만 정작 그의 어깨는 무기력하게 아래로 축 처졌다.


자정이 좀 넘은 시각.
희미한 달빛마저 구름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시험삼아 손바닥을 활짝 펼쳐 앞으로 내밀었지만 실루엣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이 주위를 감싸 안았다. 시각은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동물적 본능이 보내오는 약간에 정보에 몸을 의지한 채 몸을 움직였다.

털 대신 피부 위로 촘촘히 박힌 돌이 곤두섰다. 포도주병 코르크 마개가 유리병 내부의 가스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위로 슬그머니 들여 올려진 듯한 형상이었다. 바짝 긴장을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시야를 보완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을까... 평상시의 다섯 배 크기로 콧구멍이 벌어졌다. 냄새의 분자 하나하나를 죄다 포착해 내겠다는 욕심은 결국 그렇게 결실을 맺었다.
모양의 흉측함을 언급하지 마라. 막 균사체를 방출하는 버섯의 촉촉함마저 생생하게 느껴졌다. 물방울의 흐름과 작은 곤충들의 부산스러움이 피부로 느껴졌다. 제르가디스는 부드럽게 손을 내저어 습기로 흥건히 젖은 동굴의 벽을 쓰다듬었다. 보지 않았음에도 이해는 충분했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바늘처럼 예민하게 작동하며 정보를 습득, 뇌세포 안쪽으로 분석 가능한 정보를 산더미처럼 밀어 보냈다. 그는 눈을 감고 슬그머니 웃었다.

「바로 코앞으로 함정 발판이 있군.」
주의하지 않으면 그대로 밟기 딱이었다. 발판은 납작했고 면적이 넓었다. 표면은 리나 앞가슴 정도 만큼...만 볼록했다. 결국 튀어나온게 거의 없다는 얘기다. 고운 먼지와 외부로부터 흘러 들어온 모래에 이 틈새가 가리워진 상황에선 무엇이 누름 장치이고 무엇이 평범한 바닥 돌판인지 구분해내기 힘들었다.

「때로는 눈에 의지하지 않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말이 맞구나.」
자리에 멈칫거리고 선 제르가디스는 들었던 오른발을 다시금 원 위치로 내려놓았다. 생각을 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점프를 해야만 하나? 새까만 어둠 속에서 제르가디스의 코가 다시금 벌어졌다. 옳커니! 냄새로 파악해낸 문제의 답은 절대로 안.된.다. 였다.

「교활하잖아. 상대의 허를 찌르는 이중의 함정 발판이군.」
몸무게에 반응하는 함정 발판이 저 앞으로 있다고 치자. 가정을 할 필요도 없이 진짜로 눈 앞에 있지만... 하여간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보통은 큰 걸음으로 훌쩍 뛰어넘으려 할 것이다. 하나, 둘, 셋, 구령을 붙인 다음에 팔을 크게 휘두르며 다리 가랭이를 찢을 것이다. 그렇게 건너뛰고 나서는 더러워진 손바닥을 탁탁 털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때문에 함정 발판의 설계자는 묘한 심통을 부려 상대를 농락하는 장치를 하나 덧붙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훌쩍 건너뛰기? 그렇게 했다간 죽음이었다.

「발목 부러뜨리기엔 더도 말고 그만이잖아.」
함정 발판 뒤로는 45˚기울기로 불쑥 튀어나온 작은 돌조각 하나가 박혀 있었다. 달음박질하여 도움닫기를 하고 난 다음에 필연적으로 발바닥이 딱 떨어지게끔 되어있는 바로 그 위치였다. 장치는 매우 허술했다. 허나 효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삐딱하게 튀어나온 돌조각 탓에 발목을 접지르고 통증에 겨워 악 비명 지르는 건 잠시다. 왜냐고? 그야 몸의 균형을 잃은 인간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구덩이가 바로 그 옆으로 어깨동무 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까.
겅중거리다 못해 기우뚱 넘어지면 그대로 곤두박질이었다.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것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절벽은 그 깊이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 미묘하게 흘러가는 바람의 움직임으로 보아선 농담 수준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고... 게다가 밑은 평평한 바닥도 아니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한다?
여기서 제르가디스는 마법 주문을 사용해서 매실 먹은 슈퍼맨처럼 훨훨 날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였다. 운전 미숙으로 벽에다 머리를 박을지언정 허공을 둥둥 떠다닐 수만 있다면 이것저것 골치 아픈 여러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을 이유도 없어질 터였다. 어쨌거나 요점은 함정 발판을 밟지 않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여차하면 마력구를 집어던져 아예 함정 장치 자체를 박살낼 수도 있었다. 원래 그는 공간에 대한 예의와 건축자에 대한 존경심은 눈꼽만큼도 품는 법이 일절 없었다. 문이 없으면 천장 자체를 주저앉게끔 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후우. 제르가디스는 답답한 가슴팍을 원망했다.
「안되니까 이러는 거 아냐! 젠장맞을.」

모양새가 흉할 거라는 건 알고도 남았다. 그래도 제르가디스는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은 다음, 벽으로 달라붙어 배를 붙였다. 유명 발레리노처럼 발 뒷굼치를 힘껏 들어올렸다. 가급적 숨을 죽인 채 그렇게 옆으로 기어갔다. 조심, 조심. 엄지발가락만으로 걸었다. 깎아지른 암벽을 등반한다는 기분으로 신중하게 벽을 탔다.
욕설이 절로 나왔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이끼는 미끄러웠다. 아차싶을 적마다 손톱으로 벽을 긁어가며 한참을 죽어라 기를 썼다. 피부에 돌이 박혔다고 손톱마저 강철일 수는 없었다. 갈라지고 벗겨지는 손톱 상처는 상당히 쓰라렸다. 고통에 대한 자동적 신체 반응의 하나로 약간의 수분 덩어리가 눈가에 맺혔다. 덩달아 콧물도 약간.
그래도 제르가디스는 신음 소리하나 내지 않았다. 그렇다. 지금은 최대한으로 기척을 줄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야 찾았군. 숨 소리가 들려온다. 다섯... 아니, 여섯.」
제르가디스는 천천히 모든 몸 동작을 멈추곤 숨 쉬기마저 생략했다.
대충 보아하니 무리는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자리를 잡았다. 동굴의 가장 안쪽으로는 제법 덩치가 있어 뵈는 남자 넷이 창백한 마법의 불꽃을 가운데 두고 앉아 무어라 수구렁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목소리는 굵직했고, 아울러 크지 않았다. 머리를 맞대곤 손짓을 섞어 말했다. 내용은 그다지 심각한 건 아니어서 표정은 어둡지가 않았다. 그래도 곧잘 대화가 끊겼다. 그들은 시시각각 고개를 돌려 밖에서 망을 보고 있던 나머지 동료들과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 받았다. 밖의 인간들은 계속해서 여기저기를 서성거리며 움직였다.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손짓으로만  안쪽 패거리들과 의견을 교환했다.

「손님 왔냐?」
「아직.」
「뭐가 보여?」
「잠잠하다니까.」

장담한다. 그들은 실수했다. 자세히 보지 않았으니까 별 일 없다고 쉽게 단정을 내린 거였다. 길다란 검은 그림자가 벽을 따라 완만하게 움직였건만 아직 그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뭐, 둔해서 그렇다라기 보다는 이쪽의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였지만... 하여간 제르가디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최대한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무게감 없는 허깨비처럼 그들의 간격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잔잔하던 호수 위로 그렇게 낙엽 하나가 떨어졌다. 그 각도는 사금파리처럼 예리했다. 이제 제르가디스는 손만 내밀면 상대의 뒷 목덜미를 후려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남자들은 아직까지 저희들 할 말에만 열중했다.

『정말로 올까?』
『아따, 보물이라니까 눈이 뒤집히더라고. 숨까지 쌔근거렸는 걸. 분명히 온다.』
『어쨌거나 이걸로 한 건 잡은 건 맞겠지?』
『걱정도 팔자다. 이 몸이 장담한다니까.』

우연이었다. 마법 상점에서 리나 일행이 기어 나오는 걸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러나 한 눈에 보고 이거다 하는 필링이「딱-」하고 왔다.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주의해서 봤다. 옳커니. 봉 잡았다. 대어 낚았다.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사내가 허벅지를 벅벅 긁어가며 소곤거렸다.
『난 분명 느꼈어. 아직 나이가 어려 보이는 꼬마 마도사의 양쪽 옆구리로 두둑한 물건이 매달렸더라 이거야.』
『짤~랑 하는 소리 들었어?』
『이보라카이. 주머니에 금화가 가득차면 의외로 소리는 나지 않지. 군인들이 수통에 물을 가득 넣어서 다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거야 그렇지만... 짤랑 소리가 안 났다면 돈 주머니가 아닐 수도 있잖아.』
『으이그! 진짜로 갑갑하게 놀고 있네. 임마! 보석이나 약초라도 상관 없잖아.』
『하긴.』

약간 맹하게 생긴 사내가 네 말이 참으로 옳소 하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생각났다는 투로 양손으로 잘 잡고 있던 밧줄을 다시금 다잡았다. 흔히들 성당 종루에 놋쇠로 만든 종을 매달아 놓는 용도로 써먹곤 하는, 세 번 옆으로 꼬아 겹으로 이어 붙인 튼튼한 밧줄이었다.

제르가디스는 주의를 기울여 그가 잡은 밧줄을 잘 관찰했다. 줄은 사내의 손바닥에서 뻗어나와 불쑥 튀어나온 종유석을 도르래 삼아 한 번 감겼다. 바닥으로 길게 늘어진 뒤엔 천장으로까지 잘 뻗어나갔다. 머리 위로는 샌드백처럼 생긴 퉁퉁한 주머니가 주렁주렁 매달렸고... 붙잡은 밧줄을 놓으면 그 다음으로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 뻔해서 재미 없었다.

『야, 자꾸 손 떨지 마. 조심해서 잡고 있어.』
『잘하고 있는데 잔소리 하긴. 쳇!』
『불안해서 그런다, 왜! 녀석들이 나타났다 싶으면 뿌리라고 매달아 놨지, 저걸 우리들 머리 위로 뒤집어 씌우라고 가져다 놓은 게 아니잖냐. 마녀왕관 나무의 진액을 말린 가루야. 일단 마시면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듣는다. 실수하면 그대로 끝나.』
『잘 잡고 있다니까!』
『그러면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냐?』
『야. 성질나는데 자꾸 그러면 정말로 놓아버린다. 정 미더우면 네가 붙들고 있어!』
『싫어. 무겁잖아.』
『말이야 못해야... 씨팔.』

그들이 세운 작전은 꽤나 간단했다. 무식할 정도로 단순했다. 얌전이 기다리고 있다가 왔구나 싶으면 구석에 숨어 독 가루를 뿌린다. 마법사도 술에 취하면 늘어진 솜방망이다. 하물며 약에 취한다면야 옆구리를 털어가도 비명 한번 못지른다. 화이어볼? 프리즈 에로우? 맥주통에 얼굴 박은 신부가 성부와 성자의 이름으로 고해성사를 해주는 법 있던가? 마찬가지다. 알딸딸 취한 상태에서는 초보 라이팅 주술도 버겁다. 마왕을 잡는 것도, 도둑을 상대로 싸우는 것도 일단은 정신이 온전해야 가능하다.

『난 폭력은 싫거든. 주먹으로 때려 눕히는 것보단 이쪽이 깔끔하지.』
깔끔? 사실은 구리고 치사한 방법 아냐? 어둠 속에서 제르가디스는 침을 뱉었다.
『게다가 우리가 찍은 상대는 어린 계집애야. 좋게 좋게 하자고? 핫핫-』
좋게 좋게? 누구 맘대로.

제르가디스는 기척을 지우던 걸 깨끗이 포기하고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공격이다. 악당을 무찌르자. 소녀의 꿈을 고이 지키러 가자.

『누, 누구냣!』
『좋.은. 남.자.다.』

이어 동굴에선 때아닌 오리 멱따는 소리가 이어졌다. 놀란 무리들이 일제히 와 고함지르며 칼을 빼어들었지만 일순간에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납작하게 짓이겨져 바닥으로 처박혔다. 빠르다. 칼을 든 손을 올리자마자 옆구리로 화끈한 통증이 몰려들었다. 도깨비는 벼락같이 손톱으로 남자들의 갈비뼈를 긁어댔다. 나무 방망이도 아닌 돌멩이 박힌 팔뚝이 턱을 올려치고 눈두덩이를 내리찍었다. 뒤에서 덤벼들어? 힘차게 발길질했다. 썩은 돼지고기 씹히는 철썩 소리와 함께 나 죽는다 울부짖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머, 멍청아! 밧줄을 놔! 독가루를 뿌려!』
『소용없다. 독가루? 그런 건 치우면 그만이지. 봄.디. 윈.드.』
펄럭이는 망토는 악마의 날개를 닮았다.
그러나 그 표정만큼은 지독한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 바로 그 자체였다.


『제르가디스? 헤헤헤. 이걸 봐라~♡』
리나는 기뻐했다. 눈에 띄게 웃어가며 쥐었던 손바닥을 활짝 열어 보였다.
『뭐야. 코딱지만한 월장석이잖아. 그게 어때서.』
『임마!! 이건 요정의 보석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콧방귀 뀌지 말란 말이닷!』

글쎄올시다. 분명 요정의 기운이 들어간 이중 삼중의 결계를 부수고 찾아낸 월장석이었다. 천년 기술 요정족이 세팅한 보석치고는 지나치게 수수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놈의 결계라는 것이 흡사 반나절 전에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지나치게 신선했다는 점이 영 아니었으나... 신경 쓰지 말자. 리나는 가볍게 도리질하고 다시 웃었다. 어쨌거나 헛고생으로 끝나지 않은 동굴 탐험이었다. 값어치라고 하면 이틀 밥값 정도의 준보석에 불과할지언정 그래도 보석은 보석.

『이런 게? 정말로 요정의 보석 맞아?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평범하지 않냐?』
제르가디스는 언제나의 냉소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이놈의 멋대가리 없는 현실주의자...;; 그냥 넘어가 주면 어디가 덧나나! 요정의 보석이라고 맞장구 쳐주면 혓바닥에서 갈퀴가 자라나느냐구!』

그렇다, 이건 소녀의 꿈인 것이다. 제르가디스는 얼른 뒤로 물러나며 몸을 사렸다.
『그, 그렇군. 자세히 보니 싸구려는 아닌데.』
『진작에 그럴 것이지. 흥이다! 내 누누이 말하지만...』
『소녀의 꿈을 지키는 게 남자다?』
『그래, 그게 바로 남자야. 아주 좋은 남자.』

그래서 보람은 크다. 강도를 때려잡고, 남은 독가루를 말끔이 청소하고, 은밀한 장소를 찾아 잘 만든 결계를 준비하고, 그럭저럭 괜찮은 월장석을 그 안에 고이 숨겨두고... 제르가디스는 리나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의 손길은 장난을 치듯 가벼웠다. 쓸쓸한 애정은 바다와도 같아 한바탕 철썩 물보라를 일으키며 모래사장을 간질였다.
남자는 소녀의 꿈을 사수한다. 기꺼이 알면서도 속아준다. 그래서 그는 좋은 남자다.

『아참, 제르가디스?』
『응?』
『그 얘기 들었어? 산 너머 마을 어딘가에 흡혈귀가 숨어 사는데 녀석의 관이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거야♡ 순금... 순도 99.9 퍼센트! 황금의 관! 어때, 꽤나 그럴 듯 하지?』

아, 갈증 난다...
새벽이 오기 전에 분명 제르가디스는 마늘을 한 바가지 씹어 삼킬 것이다. 내기를 해도 좋다. 은으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고 그는 달빛 아래로 달음박질해 나갈 것이다.
소녀의 꿈을 사수하기 위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