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 첫 배경으로「식당」을 손쉽게 꼽는 원인으로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나. 물론 그대들은 패러디 작가의 매너리즘을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놈의 슬레이어즈 세계에선「먹는 장면」의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걸 먼저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하루 세 끼 식사라는 건 틀림 없다만 대본 정 중앙으로「여기는 식당」이란 문구가 박히지 않으면 리나 일행의 눈초리가 새초롬하게 변하는 건 어디까지나 기정 사실! 대본 속에 그런 글귀가 정 안보인다 싶으면 손수 빨간 볼펜을 들고「지글지글 전골 냄비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혹은「따스한 스튜가 식탁 위로 도착하길 기다리는 가운데」, 내지는「입맛을 다시며 메뉴판을 펼치다」등등의 자기 멋대로의 멘트를 기꺼이 휘갈기고 보는 것이다.
보아라, 만족스럽게 웃는 저 귀녀(鬼女)를...;;
『암, 이래야 정상적인 대본이지.』
리나 인버스의 고집은 천하의 수신관도 못꺾는다.

『뭐야, 그 만사 통달했다는 식의 눈빛은. 불만 있어?』
알게 뭐람. 모든 건 주인공 마음대로다. 대충 가도록 하자. 자, 조명 준비하시고!!
하여 오늘도 어김없이 이야기의 시작은 식당.

일행의 식사 시간은 평소때보다 훨씬 늦어져 밖은 이미 날이 저물었다. 종업원들은 다 먹은 빈 접시를 주방으로 나르다 말고 허겁지겁 등잔 심지에 불을 붙였다.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와중에 리나는「대본에 적혀진 그대로 (한숨-)」메뉴판을 집어 올렸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허기는 배로 더해졌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글자들의 나열을 죽 훑고 지나갔다. 기왕이면 양 많고 맛도 좋을 것, 소시지 볶음 알파 양상치 샐러드 특대형이라는 제목의 항목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시작은 거나하게. 옳커니.

『밥! 밥! 밥! 아저씨~ 주문 받아요~』
여기까지는 큰 무리가 없었다. 가우리는 기분 좋게 손바닥을 싹싹 비볐고, 제르가디스는 무심함을 가장, 옆구리에 찼던 검집을 풀어 의자 옆으로 기대어 놓았다. 침실에서조차 떼어놓지 않는 검집이었다. 제르가디스의 이런 행동을 본 리나는 그래서 한층 더 기분이 좋아졌다. 키메라 가라사대, 주변으로 수상한 기척은 일절 없댄다. 자, 그렇게 안전 싸인도 떨어졌겠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맘 놓고 밥 좀 먹게 되었다.
생긋 웃으며 손을 뻗어 따끈따끈한 찻잔을 쥐었다. 식전 목을 축이는 행동은 침샘의 분비를 돕는다고 한다. 간결한 동작으로 엽차를 쭈욱-

『푸웃!!』
동시에 망나니가 칼날 위로 막걸리를 뿜었다. 분수처럼 날아가는 파편을 뒤로 하고 리나의 눈망울이 커다란 금붕어처럼 변했다.
『읏!』
『뭐야, 리나...;; 뜨겁다 싶으면 삼키질 말아야 할 거 아냐.』
빤히 눈 뜨고 앉아 뜨거운 물을 된통 뒤집어쓴 사내들의 표정은 저마다 일그러졌다.
한쪽 방향으로만 파편이 튀었다면 그나마 피해 상황이 적었을 수도 있었을 것을, 리나가 내뿜은 폭포수는 얄미울 정도로 가우리와 제르가디스가 앉아있던 방향을 정확하게 조준하고 있었다. 불의에 당했다 싶었던지 가우리는 아예 넋 놓고 앉았다. 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소매춤을 가져가던 제르가디스는 숨기지도 않은 채 버럭 화부터 냈다.
찰나이긴 했다만 그는 리나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자신을 흘깃 바라보던 걸 결코 놓치지 않았다. 아무렴, 보통 사람은 재채기를 터뜨릴 적에 두 눈을 꼭 감는 법이다.
고의다. 고의가 맞다.

『야! 리나 인버스!!』
『미안, 미안!』
답지 않았다고나 할까. 리나는 순순히 사과하면서 부처님께 합장하듯 손을 모았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면서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종업원을 부르려는 걸까, 사방을 두리번 거리더니 이윽고 선생님께 질문하듯 손을 번쩍 들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여기요, 여기, 수건이 필요하다고요. 리나는 정말로 큰일 났다는 투로 한바탕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박수를 짝 쳤다.
『아니다. 차라리 옷을 갈아입는게 더 낫겠어. 일어나, 모두. 그렇게 젖은 옷을 입고 있다간 감기에 걸릴 거야. 어서, 어서!』
『하지만 리나. 상관 없잖아? 이런 건 금방 마른다구.』
『상관이 없다니, 그 무슨 섭섭한 소리!』
리나는 막무가내로 가우리를 끌어당겼다. 팔을 잡힌 가우리는 불만을 담아 찡얼거렸다. 식탁에 앉았다가 먹지도 않고 일어난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빨리 일어나라는 재촉에도 불구하고 가우리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기분이야 영 찝찝하지만 배고픔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하찮다. 뭐가 어때서. 먹고 보는 것이다.

『가우리.』
그래서 리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동시에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발을 짓이겼다.
옷을 갈아입을 거지? 척척한 셔츠를 입고 있으면 기분이 꼴꼴해진다구. 그치?
『응응!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못 말릴 통증에 허겁지겁 동의하고 보는 가우리였다.

그렇게 해서 가우리, 리나, 제르가디스 3명은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뭔가 수상쩍다는 투로 종업원들이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리나는 뒷통수에 매달린 땀방울을 훔쳤다.
침착, 침착하게.
계단을 오르다 말고「금방 돌아올 거예요~」주방을 향해 보란 듯이 큰소리도 쳤다.

그렇다고 그들이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물벼락 뒤집어쓴 셔츠를 벗어 던졌던가?
『어라. 벗어 던지는 거 아니었어?』
『바보!』
리나는 화급히 가우리의 머리통에 알밤을 먹이곤 살벌하게 눈을 치켜 떴다. 어째서 이 잘생긴 남자 친구의 머리는 천치에 둔치인 걸까. 리나는 제발 다른 사람 좀 본 받으라며 제르가디스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한 키메라 소년은 이미 창문을 활짝 열고 발 하나를 그 위로 올려놓은 상태였다. 왕년에 뭔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를 쉬 짐작케 해주는 능숙한 포즈여서 내심 보는 사람을 놀래키고도 남는... (콜록-) 하여간 요점은 제르가디스가 사람 눈을 피해 기꺼이 창문을 타 넘었다는 것이고, 리나 또한 기꺼이 같은 방법으로 여관방 지붕 위를 향하여 몸을 던지고 보았다는 거였다.

바람이 쌀쌀한 가운데 차가운 기왓장으로 손톱을 틀어 박았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경사 가파른 처마에 발을 얹었다. 아차하다간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딱이었으나 애시당초 겁을 모르는 일행이었다.
리나는 혓바닥을 날름 내밀어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런 곡예 놀음이야 식은 죽 먹기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도둑질에 꽤나 소질 있음을 그들은 꽤나 다양한 방법으로 증명하곤 했다. 육체파인 가우리야 10미터 간격의 지붕 틈새 정도는 가뿐하게 뛰어 넘는다. 제르가디스는 만능 열쇠 따기 선수, 마법으로 가로막았든 자물쇠가 걸려져 있든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를 총 지휘하는 건 대 괴수 리나 인버스. 초반부터 무리하게 대본이 고쳐진 탓에 기분이 나빠졌다고 이렇게 사람을 깎아내리는 건 절대 아니다... 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객관적인 진실이다. 벽을 타넘고 지붕을 뛰어넘고... 콤파스는 짧은데 점프력 하나만은 벼룩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다. 자태는 더할나위없이 훌륭해 눈가로 검은 가리개를 씌웠다면 더도 말고 괴도 13호이다.

하여간 바람을 가르다 말고 제르가디스는 흘깃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 망할 놈의 엽차에 뭐가 들어가 있었던 거지? 리나.』
일행과 보조를 맞추어 고양이처럼 허리를 굽힌 리나는 쉭쉭 손가락을 흔들었다.
『초강력 설사약.』
『용케도 알아차렸군.』
『내 혓바닥을 속이려면 10년은 일러.』
『어련하시겠수.』

잠시 잠깐의 한숨, 어지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쓸어 넘기고- 제르가디스는 폴짝폴짝 뛰던 동작을 멈춘 채 남의 집 꼭대기 부근에서 때아닌 차렷 자세를 취했다. 결심했다며 획 돌아서는 그의 눈빛은 영 심상치 않았다. 허리에 손을 얹고- 가볍게 훗 숨을 내쉰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을 내뿜고- 벌려진 입 틈새로는 송곳니가 드러난다.
참았던 숨을 모은다. 자,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를 질러 보자.

『어쩌다 내가 이런 꼴을... 그러기에 내가 뭐랬어, 적당히 하랬잖아! 이렇게 치사한 공격을 받고 허벌나게 도망을 가야 하다니! 대체 이걸 어떻게 수습할 거얏!!』

슬레이어즈 세계엔 아더 왕의 전설따위는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다. 따라서 원탁의 기사나 왕의 아내와 놀아난 뻔뻔한 기사 트리스탄에 대한 이야기가 장중한 가락의 노래로 만들어져 음류시인들의 애창곡으로 불려지는 일은 일절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더왕을 연상시키는 전설이 딱 하나 전해지고 있는데...
그 인기는 상상을 초월하리만치 상당한지라 많은 나라와 도시에 커다란 검이 꽂혀진 바위가 상당수 전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멀린이 누군지, 보검 엑스칼리버가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지만 하여간 주술에 걸린 보검은 진정한 주인을 기다리며 오늘도 끈기있게 바위에 꽂혀있다.
물론 대단한 보검이「나 좀 뽑아주-」애원하며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다고 생각하기엔 상황이 너무 허황되다. 그래도 유명한 관광 명승지라는 곳으로 가보면 그런 보검 하나씩은 히든 카드인양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준비물로 은화 여섯 닢 정도를 준비하면 누구든지 볼 수 있다. 지정된 금액을 제시만 하라. 그러면 시장, 읍장, 동장, 통장들은 하나같이 의기양양해하면서 관광객들을 그리로 안내해줄 것이다.
- 자,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전설의 보검입니다! 혹시 압니까? 당신이 주인일지.
여기서 다시 적당한 금액의 은화를 보태면 바위에 달라붙은 검을 몸소 뽑아볼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뭐. 난 그저 뽑으라고 해서 뽑은 것뿐이야, 제르가디스.』
리나는 억울하다며 악을 썼다.
『말은 똑바로 해라, 리나 인버스. 그게 뽑은 거냐?! 부러뜨린 거지!』
『앞뒤로 흔들었더니 금이 살짝 가잖아. 그래서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것, 읏샤 기합을 넣었을 뿐이야!』
『흐응, 그랬수?』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네가 피노키오였다면 나무로 만든 코가 지구를 다섯바퀴 반을 돌았어.』
앞뒤로 흔들어? 온몸으로 찍어 누른 것으로도 모자라 마법까지 사용한 주제에.
제르가디스는 보란 듯이 투덜대며 단단히 팔짱을 끼었다.

일이 고약스럽게 되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이 마을은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은 읍 단위의 작은 동네였다. 근근하게 살아가면서 소득의 다수를 문제의 보검에서 얻었던 듯 싶은데... 지나가던 나그네들로 하여금 한 번 뽑아보라며 충동질, 그 요금으로 배를 채우던 마을 주민들이「빛나는 보검, 어연 여자 마도사의 손으로 바위에서 뽑히려다 말고 댕겅 부러져 순식간에 고철이 되다」라는 사태를 달가워할 리는 만무했다.
전설이 조작되었든, 가짜이든... 그런 건 뒷전이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건 금전적 손실이 막대하는 점이다. 보검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도, 그들에게 판매하는 기념품들도 헛된 안개로 사라졌다. 당연히 주민들 눈이 곱지 않게 변할 법도 하다. 당장 굶게 생겼음에랴. 식탁 위로 설사약이 들어간 엽차가 오르는 것도 그래서 가능하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도망치는 거야?』
『웃기는 소리! 설사약에 대한 보답은 톡톡히 해줘야지, 도망치긴 어딜 도망을 가. 내가 그렇게 물러 터진 여자로 보여, 가우리?』
『흐응, 그렇다고 단단한 것도 아니잖아. 만져보니 뱃살은 물렁한 걸.』
『이, 이익!! 어딜 만지는 거야, 어딜!!』
철썩 소리와 함께 지붕에서 추락한 가우리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자. 어쨌거나 우리는 원한이라는 걸 잊지 못하는 어느 여자 마도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

『후우. 레죠를 배반하고 애시당초 이쪽에 붙길 정말 잘 했지. 한 번 작정했다 싶으면 끝장을 보는 성미니까...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복수하고도 남겠지.』
제르가디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릴 법도 했다. 리나는 돌연 방향을 바꿔 마을 광장 쪽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단순한 기분 탓만은 아닌 듯, 실제로 그녀의 몸은 불가사의한 오라를 풀풀 풍기고 있는 중이었다.

감히 설사약을 먹이려 한 놈에게 죽음을.

그래서 광장 한 구석으로 모닥불 피워놓고 대장장이 로키씨와 심각하게 의견을 주고받던 마을 읍장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몸소 내려오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기에 이르렀다.
돌풍을 동반하고- 기꺼이 읍장의 머리 위로 착지- 10점 만점을 부르짖으며- 한바퀴 반 회전한 뒤에- 한껏 으스대며 등장했다.

발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채 길바닥 한 가운데로 짜부러진 읍장은 울컥해서 소리 질렀다.
『누, 누구냣?!』
『설사약이다.』
제르가디스는 얼른 헛기침했다.
『리나, 소개가 틀렸다.』
『쌩큐, 제르- 다시 정정하도록 하지. 설사약을 먹을 뻔한 리나 인버스 님이시다!』

화려하게 자기 소개를 끝마친 뒤, 리나는 뜯어보는 시선으로 읍장의 안색을 살폈다.
시계를 보자면 저녁 8시 반이 좀 지난 시각이었다. 아주 늦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읍장과 대장장이가 만나 마을의 중요한 일을 논하기엔 그리 적당한 시간대는 아니다. 제3자의 입장에선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는 도중이라 의심을 해볼 법도 하였다.
뭐니뭐니해도...
그들의 선 자리 뒤로 바위로 만든 대좌가 놓여졌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가지각색의 공구들이 어지럽게 널렸다. 주물을 두둘기는 망치에, 날을 가는 줄에, 쇠붙이는 들었다 놓고 하는 집게에다가 구멍을 뚫는 드릴도 굴러다녔다. 어디 그뿐이던가. 쇳가루와 돌가루가 주변으로 수북하다. 시험삼아 발을 굴렀더니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먼지가 하나 가득 피어 올랐다.
보시는 그대로. 방금 전까지 쇠와 돌을 다루는 일을 하고 있었다는 충분한 증거.
리나의 표정이 살벌하게 구겨졌다.

『뭐야 이 사람들. 포기 못하고 또 바위에다 칼을 박아둔 거야?』
『또라니 그 무슨 망발! 게다가 박긴 뭘 박았다는 건가.』
이에 질새라 읍장의 눈빛 또한 부리부리해졌다. 탁, 가슴을 주먹으로 치고- 당당하게 외쳤다. 내용인 즉슨 다음과 같았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120년 전에 전설의 마법사 무사시무사가 봉인한 요도(妖刀) 부터라 검! 마물을 베고 귀신을 잡는 거대한 힘을 가졌지만 이를 훌륭하게 다룰 만한 재주의 사람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바위에 일시 봉인을 하였다! 진정한 주인이 나타나면 그때야말로 부터라 검은 바위에서 풀려나 세상의 악의 무리 모두를 평정하리니~!!』
받아쓰기를 한 공책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는 건 그리 듣고 싶지가 않았다. 리나는 서둘러 참견질했다.
『잠깐. 120년 전에 박혔다는 보검 치곤 아직도 뜨거운 걸.』
『그야 품고 있는 에너지가 막대하니까 그렇지. 방금 전에 용접을 하거나 해서 뜨거운 건 절대 아니라네.』
『흐응. 입술에 침은 바르셨수?』
연극조의 연설은 지겨웠다. 어차피 내용이라는 건 거기서 거기다.

사흘 전 레퍼토리.
이 전설의 보검으로 말씀드리자면 우연히 이 부근을 지나가던 전설의 용자 무싸무싸가 블루 드래곤을 퇴치하기 위해 무려 석 달을 담금질한 최강의 강철 검~! 이름하야 어림어슈 검! 드래곤의 가죽을 뚫고 그 피를 뒤집어 쓴 채 바위에 처박힌지 오늘로 딱 80년!

어제 급조된 다른 내용.
모래속에 파묻혀 세간에서 잊혀졌으나 다시금 부활한 전설의 명검, 차르싹 검! 요정의 눈물과 마물의 피로 더렵혀졌으나 그 위대함만은 3시간이 지난... 이 아니고, 30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큰 변함이 없도다.

그날 오후에 새롭게 첨가된 다른 줄거리.
그 가족을 베고, 연인을 베고, 자신마저 베어버렸다! 눈물 없이는 결코 뽑을 수 없는 슬픔의 보검 그냥보틸래 검~!!

더 이상의 각색은 사절이다. 리나는 얼른 읍장의 말꼬리를 잘랐다.
『그래서 얼마?』
『한 번 뽑아보는데 금화 스물 다섯 개.』
『메야?! 금화 스물 다섯?!』
『싫다면 돌아가시오. 아무도 말리지 않을 거요.』
『이게 치사하게... 정말!!』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카락이 죄다 곤두선 가운데 리나는 이를 갈며 서럽게 지갑을 열었다. 빛의 검을 500원 주고 사겠다고 나선 짠순이 여사께서 순순히 금화 스물 다섯 개를 내밀었다는 점에서 제르가디스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말이 그렇지 금화 스물 다섯 개다. 저 가공스런 집착, 그리고 원한! 사방으로 방전되는 시퍼런 살기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얼핏 곁눈질로 리나를 보아하니 도끼날처럼 서슬이 퍼래가지고는 눈에 검은자위가 하나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이런, 이런.
제르가디스는 잠자코 가우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신호를 받고 가우리도 뒤로 물러났다.

『뽑아볼거유?』
읍장이 으르렁댔다.
『두말하면 잔소리!』
손바닥으로 침을 퉤퉤 뱉었다. 눈치는 말짱한지라 바위 대좌는 눈속임이고 검과 대좌 자체가 하나의 금속으로 단단하게 연결되어져 있다는 건 리나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앞서 부러뜨린 전설의 보검과는 차원이 달랐다. 힘을 줘서 부러뜨릴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이음새는 전혀 없다. 먼젓번 것은 교묘하게 갈아낸 금속의 ㄱ자형 갈고리가 바위 속 ㄴ자형 틈새와 맞물려 단단하게 고정된 것이었지만... 이번엔 잘 만들었다. 아예 작정하고 용접으로 붙여버렸다. 흔들어서 될 것도 아니고 쥐어뜯는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 녹여버릴 수밖에. 퉷퉷!

손잡이를 움켜잡고 자세를 잘 잡았다.
모든 힘의 근원이여, 붉게 타오르는 빛나는 불꽃이여...
카오스 워드를 좔좔 읊었다. 동시에 이글거리는 열기를 받아 머리카락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눈조차 뜨기 어려웠다. 걸죽해진 칼날이 물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되었거니 싶었다.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어가며 칼의 손잡이를 탁탁 털었다. 모양새가 영 이상하긴 하다만서도... 칼날 끝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든 말든, 대좌에서 쇳국물을 질질 흘리며 몸체가 빠져 나온 건 분명 맞다.

『모두 보라구! 부터라 검을 내가 뽑았다!!』
『빌어먹을!! 하지만 이것으로 끝났다고 좋아하진 마라. 흥! 우리 마을엔 아직도 전설의 보검이 많이 남아있다 이거야!』
『좋다 이거야. 다 가져와봐요. 몽땅 뽑아줄테니.』
『누가 못할 줄 알어?! 오늘은 철야다!』

그들은 철야라지만 이쪽은 노숙이다. 제르가디스는 우울해졌다. 읍장의 표정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이 마을에서 그들을 재워줄 곳은 단 한 곳도 없을 것임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했건만... 맙소사. 문명 세계가 코앞으로 있으면 뭘 하나. 달빛 아래서 물고기를 잡고 고구마 서리를 해야 할 팔자임에랴.
『아아, 뭔가 대단히 싫어졌어.』
『나도.』
가우리와 제르가디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읍장을 갈가리 날뛰고, 대장장이는 불굴의 역작이 망가졌다고 울고, 리나는 으스대고.

그날 밤엔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는 고통스런 허기에 뱃가죽을 쥐어뜯는 3인조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잠을 청하지 못한 까닭은 배고픔 이전에 마을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음에 있었다. 땡껑 땡껑 돌을 쪼아대는 우렁찬 소리가 새벽이 다가오도록 그치질 않았다. 귀를 틀어막고 땅바닥으로 코를 박았음에도 참을 수 없는 소음과 진동은 온 숲을 흔들어댔다. 가까운 곳으로 광산이 있나 싶을 정도로 하두 소란스러워서 가뜩이나 귀가 예민한 일행은 큰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가우리는 아예 잠들기를 포기하고 침낭에서 벌떡 일어나 맨손 체조나 했다. 커다란 나무를 통짜로 베어 불을 지르기라도 했는지 부근 하늘은 불길하게 환히 빛났다. 적당한 불빛도 있겠다, 제르가디스도 그 옆에서 진득하게 커피를 끓여놓곤 쉬지 않고 홀짝 들이마셨다.
거지 3상이라고 하던가. 춥고, 졸리고, 배 고프고.
제르가디스는 커피잔을 허공으로 들어올리며 위하여! 속삭였다.
가우리도 이에 질새라 거들었다.
『정말이지... 리나. 사람이라면 적당한 선에서 포기를 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그러나 리나가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성격이던가.
『시끄러워! 일을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 할 거 아냐.』

새벽 5시 15분.
일찌감치 차가운 개울물에 세수하고 새 양말로 갈아 신었다. 그렇게 시끄럽던 땡껑 땡껑 소리도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마을 쪽에서도 어느 정도 준비를 다 끝마쳤다는 신호였다.
지친 목소리로 가우리가 물었다.
『오늘도 뽑을 거야?』
『아무렴! 뿌리채 뽑아야지. 기꺼이 뽑아버릴 거야.』
누가 말리랴. 한숨과 함께 가우리는 밤새 굶어 허기진 배를 움켜잡았다.

『새벽이 다 되어가는군요. 슬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잘 만들어 놨습죠, 신관 나으리. 보십시오, 이 웅장한 자태를. 바위에다 칼자루 하나 볼록 튀어나온 모양을 조각했습니다. 그 겉가죽으로 은을 발라 마무리를 마쳤지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 보기 전엔 어디를 봐도 바위에 박힌 한 자루의 검입니다. 감쪽같죠?』
『좋네요. 그럼 이 검의 이름은 감쪽 검으로 합시다. 저번처럼 6대 4로 나누는 거로 하고요.』
『찬성입니다, 신관님. 오늘은 초반부터 세게 나가서 금화 서른 개를 불러봅지요.』

리나가 읍장과 그놈의 썩은 신관이 꾸민 음모를 미리 알았더라면.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