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힌트를 드린다면 지나치게 번쩍거리는 진주는 싸구려 가짜라는 겁니다.


마차가 다닐 법한 너비의 도로인데 정비는 엉망진창이다. 쑥대밭이 따로 없었다. 여름철에 한차례 태풍이 쓸고 지나간 이후로 만사 포기한 채 손을 놓아버린 듯한 형상이다. 큰 비에 휩쓸려 깊이 30cm의 작은 웅덩이가 곳곳에 패여있다. 한눈이라도 파는 날엔 아차하다가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기 쉽게 말이다. 때때로 무너져내린 토사가 작은 산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었다. 잡초와 넝쿨들의 습격은 말 다했고.
리나는 어쩜 이럴 수가 있느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래서는 버려진 유적과 해골바가지가 당연스럽게 연상되고야 만다. 사람이 잘 다니는 길이라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으니까.
그런 까닭으로 일행은 그간 고이 접어두었던 지도를 다시 꺼내들었다.

『이거 마을로 올라가는 길 맞냐, 리나.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언니가 들고 있는 것이 200년 전의 고지도인 건 아닌가요.』
『우리들 어쩌면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 들어온 건 아닐까. 남쪽인데 남서쪽으로 틀었다던가... 그게 아니라면 표지판을 하나 놓쳤다던가... 어떤 거 같아?』

모두의 아우성에 리나는 헤- 하고 머리를 긁었다.
알게 뭐냐. 어쨌든 주변엔 사람 그림자란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있다. 길을 물어볼만한 상대가 없으니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방도가 없다. 하다못해 이정표라도 보이면 좋으련만... 친절하게 화살표를 그려놓고「마을까지 앞으로 5km」라고 적은 표지판 같은 건 반나절동안 걸어오면서 단 하나도 보질 못했다.
그거 참 답답하다. 지도상으로는「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음」이라지만, 그놈의 닷푼짜리 지도가 정확할지는 아무도 장담 못한다는 점이 바로 함정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얼굴을 들어 주변을 살펴봤다. 벌써 서쪽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늦가을을 지나 이제 초겨울, 해는 짧아졌고 반대로 밤은 길어졌다. 낭패다. 근방으로는 밥 짓는 연기 올라오는 굴뚝은 하나도 없고, 밤 까마귀들만 스산하게 날개를 접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놈들의 눈빛에 갑자기 등가죽이 쭈삣거린다.
쥐고 있던 지도를 구겨버렸다.
『에휴- 어쨌거나 지금으로선 노숙 할 준비나 해야겠다.』
골머리 아프다는 표정을 채 감추지도 않고 리나는 선언했다.
일단 해가 지고 나면 만사 끝이다. 사람 사는 마을은 내일 아침에 찾도록 하자. 오늘도 길바닥에서의 하룻밤이다.

『도로 가장자리로 깔린 돌무리를 보면 아주 오래된 길은 분명 아닌데 말예요.』
불을 피우고자 근방에서 조달해온 나뭇가지들을 와르르 쏟아내면서 아멜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로와 우창한 수풀을 가로지르는 기준점이 되는 편돌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장자리서부터 깨져나간다. 하여 처음에는 네모반듯하던 모양새가 둥글넙적하게 마모가 되고, 심각해지면 두쪽으로 갈라지기도 한다.
『더 심각하게 오래되면 고운 흙에 파묻혀 흔적도 남지 않고요.』
여기서 아멜리아는 발을 툭툭 굴러 편돌 위로 올라간 흙더미의 두께를 가늠했다.
몇 번의 발동작으로 쌓였던 흙이 치워졌다. 이미 예상했던바 그대로 흙은 편돌 위에 살짝만 올라가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드러난 돌의 모양은 깨진 곳 없이 반듯하고 가지런하다.
『버려진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이 길은.』

그렇게 결론이 나자 기분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샛길도 아니고 마차가 다닐 만한 크기로 확장한 도로이다. 집 한 채 세우는데만 아무리 짧아봐야 석 달이다. 하물며 도로다. 천문학적인 금전과 시간, 그리고 막강한 노동력이 동원된다. 그런데 애써 길을 닦고나서 헌신짝처럼 버린다? 에비, 에비. 행정 당국과 관계기관 공무원의 무능력이 하늘을 찌르고 나서 이어 우주로까지 돌파한다면야 가능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라던가.』
여기서 제르가디스가 말한「부득이한 사정」으로는 그 첫 번째로 전쟁이 있다.
일부러 멀쩡한 다리를 무너뜨리고, 둑을 허무는게 바로 전쟁이다. 도로 봉쇄 정도는 약과다.
『전쟁이 아니라면 전염병.』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을 입구에다 금줄을 치고「이제부터는 아무도 여기서 나갈 수도 없고, 밖에서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라고 팻말을 만들어 다는 것이다. 통제야말로 혼란을 수습하는 지름길이다. 큰 도시들도 콜레라 같은 법정 전염병이 창궐하면 성문부터 걸어 잠구는 것으로 사람들의 왕래를 원천봉쇄 시킨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니 병균도 움직이지 않는다. 효능 좋은 약초보다 금줄 하나가 전염병엔 더 효과적이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공주마마는 습관상 인민의 안전이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둥글게 무릎을 모으고 앉아 슬픈 표정을 지었다.
『뭔 일이 있었던 걸까요?』
『흐응. 글세다, 아멜리아. 지금으로선 그 어떤 것도 확인할 방법이 없지. 어쨌거나 근방으로 내전이나 폭동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어.』
『배고프다... 밥...』
『이이잇! 가우리! 분위기 좀 깨지 마라!』
밥 타령을 하는 남자에게 얼른 핀잔을 준 뒤, 리나는 다시금 표정을 달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전염병이라면 이쪽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된다. 타고 난 건강 체질이라 할지언정 코앞으로 장티푸스 환자와 대면하라는 건 사절이다. 게다가 윽박지르는 병사들에게 떠밀려 이도 저도 못하고 마을에 갇히기라도 하는 날엔... 리나는 음습한 얼굴로 장작 하나를 딱 하고 부러뜨렸다.

악몽이 따로 없게 되어버린다.

사무가의 팔자라는 말이 있다. 왕년에 유명했던 방랑시인 사무가는 우연히 전염병이 돌던 마을 근처를 지나다가 통행금지령에 그만 목덜미를 붙잡혔다. 영문도 모른 채 남자는 빗장이 굳게 걸려진 마을 안으로 집어 던져졌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상황이 제법 심각한 걸 깨달은 사무가는 자신은 병에 걸리지 않았을뿐더러 외지인이 분명하니 그만 보내달라고 병사들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사무가의 애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돌아온 건「누구든 움직일 수 없다」는 싸늘한 대답 뿐이었다.
그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사무가는 일주일 뒤에 그 마을 공동묘지로 몸이 던져졌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새 병이 옮았던 것이다. 그를 후원하던 제인스빌의 백작이 사실을 알았을 적엔 어이 없게도 고름 투성이의 면포만 달랑 하나 남고 말았다. 10만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하다는 예술인이 쓰다 만 걸작 노래와 애용하던 엘프의 하프가 어디로 던져졌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우리라고「사무가 팔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차라리 왔던 길로 되돌아갈까.』
제르가디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안 되면 되게 하라」라던가,「없던 길도 뚫어서 가라」는 직업 군인 특유의 무대뽀 정신을 고집할 까닭이 그에겐 없었다. 그는 마광부, 아니, 마검사였다. 가뜩이나 세상은 위험한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저 앞에서 빨간 깃발을 흔들어대고 있으면 돌진하지 말고 피해서 가도록 하자. 미친 황소도 아닌데 뭐 하러 달겨드나. 인간에게는 신으로부터 빼앗은 지혜가 있음이니 불난 곳에 불구경 가다 머리카락 홀랑 태워먹는 일은 없도록 하자.

『잠깐, 잠깐. 기다려. 지금 전염병이라고 판정난 것도 아니잖아, 제르가디스.』
일단 왔던 걸음이 아까워서라도 돌아가자는 의견을 각하하고 보는 리나 인버스였다. 무의식중에 자기 몫의 커피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허둥대는 모양새는「사실 나도 갈등은 제법 되고 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는 있었다만... 추론만 가지고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기엔 평상시의 신념이 제동을 걸고 있었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군다? 그거 참 잘 하는 짓이다. 마도사 정도가 되려면 그 구더기를 입에 넣었다 뱉는 배짱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들 마도사가 싸우는 대상이라는 건 드래곤, 마족, 골 빈 부자들, 침으로 찔러도 반응 없는 왕족들이 대다수다. 겁 난다고 후둘거리는 무릎을 가지고 있어선 이름 높은 마도사가 될 수 없다.

『그치? 내 말이 맞쟈?』
『하지만, 리나. 갈대 밭 바람이「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속삭이고 있어.』
『어허! 정말로 당나귀 귀인지는 임금님을 직접 눈으로 보기 전 까지는 모르는 거라고. 진위를 파악하고 난 다음에야「정말로 당나귀 귀구나~」하고 맞장구를 쳐야하지 않겠어?.』
『저기... 밥...』
『시꺼, 가우리! 이 마당에 밥이 문제야?! 하여간 분위기 깨는 데엔 뭐 있어요.』
『저어...』
『또 뭐!』
『아니오. 이번엔 가우리 씨가 아니라 접니다.』
『음?』

화들짝 놀라 돌아다보니 그간 있는지 없는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던 제로스가 손을 들고 있었다. 맘모스가 얼어죽을 추위에도 빙긋 웃을 녀석은 모닥불에 가까이 앉아 온기를 쬐고 있는 중이었다. 애용하는 가방은 옆으로 내려놓았다. 웃기게도 바케트 빵 모양의 신발은 벗은 채였다.
양말 바람으로 모닥불을 즐기는 건 인간들에게나 해당되는 거 아니었던가. 리나는 잠시 갈등했다. 무좀도 없고, 각질도 없으며, 냄새나는 땀도 없는 주제에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따뜻한 열기를 좋아라 하는 저 마족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정말로 제로스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미르가지아 씨가 저 모습을 봤더라면...』
『순전히 사기야- 라고 말씀하셨겠죠.』
저놈의 귀는 소머즈 귀 내지는 육백만불의 사나이의 귀다. 어쨌든 듣기는 잘 듣는다. 게다가 짐짓 너스레를 떠는 것도 평상시와 똑같다. 제로스가 맞구먼... 리나는 칫 소리를 내고 쥐고 있던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여기에 대해 뭐라도 아는 것이 있는 거야? 제로스.』
『예. 그게 말이지요.』
『어허. 뜸 들이지 말고.』

재촉을 한 번 받고 제로스는 또 웃었다. 동전을 집어넣고 장난감 구슬 뽑기 놀이를 하는 어린애처럼 말이다.
어랍쇼. 리나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저 녀석, 재미있어 하고 있다?

『그러니까... 으음. 나온 답니다.』
뭐가. 곰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일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로스를 쳐다봤다. 장작개비 하나를 모닥불에 던지려던 제르가디스는 작은 불똥 하나가 바지춤에 튀는 것도 모른 채 쳐다보았다. 가우리 몫의 커피잔에 설탕을 넣으려던 아멜리아도 자신이 지금「인간은 감히 입을 댈 수 없는 설탕 진국」을 만들고 있다는 걸 까마득히 잊은 채 제로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리나는 뜨거운 커피에 혀가 데이는 것도 잊었다.
나온다니. 뭐가?

『진짜로 곰?』
『에이, 여러분들은 상상력이 빈곤하군요. 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니까. 산적이라도 나온다는 거야?』
『이번엔 지나치게 현실적이네요, 리나님. 다른 방향으로 조금 더 부풀려봐요.』

뭔가 느낌이 영 안 좋다. 리나는 고개를 움추렸다.
설마.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지는「그건」아니겠지?

제로스는 모닥불에 가까이 대고 있던 오른발을 내려 신발 속으로 집어 넣었다. 발은 그만하면 되었다. 양말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손바닥을 말려볼까. 장갑을 벗어 허리춤에 집어넣고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아아, 열기가 따끔따끔 한 것이 느낌이 제법 괜찮다. 평소 리나가 하던 그대로 손가락을 마주부비며 깍지를 꼈다. 불빛을 받아 마족의 투명한 피부는 무엇보다도 더 붉게 반짝였다.

『5년 전쯤 말이죠. 요 앞 마을에 인쇄공인 한 청년이 살았는데요...』
『이봐. 네 커피엔 설탕을 얼마나 넣어줄까.』
『아앗~!!! 제르가디스 씨! 지금 일부러 말꼬리 자른 거죠!』

당연히 일부러다. 알아서 프림과 설탕을 챙겨줄 친절은 가지고 있지 않다. 생각 같아서는 쥐약이라도 먹여서 무덤가에 내다 버리고 싶은데 그 무슨! 제로스가 클레어 바이블 사본을 눈앞에서 불태운 것이 엊그제다.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마법의 램프가 있다면 「제로스의 머리도 똑같이 불태워 주쇼!」라고 말했을 거다.
제르가디스는 표정을 굳히고 휴대용 봉지 설탕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너, 지금부터 무서운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그렇다면 좀 삼가줬으면 하는데.』
『왜요? 재미있을텐데.』
『넌 겁 먹은 아멜리아로부터 목이 졸릴 일 없잖아. 하지만 난 있다구.』
목만 졸리던가. 얼굴에 조개가 붙었을 적엔 무서워하는 공주로부터 코브라 트위스트에다가 뒤로 틀어 엇십자 다리 꺽기, 스플렉트 홀드 등등의 화려한 기술로 제압당하기도 했다. 짜부러진 마차 바퀴가 되어 바닥을 기어라? 사절한다.

『에비- 그런 것 정도는 사내답게 참으라고요. 자, 어쨌거나 말입니다...』
키메라 소년의 보람도 없이 끊겼던 이야기는 다시금 이어졌다.

인쇄공인 청년이 있었다. 가진 건 튼튼한 몸과 젊음, 그리고 명공이 붓으로 그린 듯한 얼굴 뿐이었다. 부모는 일찍이 죽어버렸고, 일가친척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가난하기까지 하여 모아둔 재산이라고는 입고 있는 의복과 신고 있는 신발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운 지식도 짧겠다, 그의 인생은 쥐구멍과 상한 치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의지할 곳 없던 사내는 운명을 탓하며 삶을 포기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낮에는 열심히 일했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나.』
『땡-』
『그럼 밤에도 일해서 돈을 모았나요?』
『그것도 땡-』
정답. 밤에는 열심히 놀.았.다.

남자는 핸섬했다. 흐르는 꿀처럼 노랗게 빛나는 머리카락, 그리고 호수처럼 새파란 눈동자. 키는 컸고 어깨는 벌어져 있었다. 당연히 여자들이 가만 놔두질 않았다. 아울러 남자도 그 상황을 배로 즐겼다.

『뭐야. 속으로 염려했던 것처럼 무서운 이야기는 아닌 듯하네.』
『헤에- 과연 그럴까요.』
슬그머니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녀를 보고 제로스는 슬그머니 눈꼬리를 치켜 떴다.

남자는 마을 최고 부자의 딸을 꼬셨다. 그는 탁월한 바람둥이었다. 열 여섯의 순진한 처녀는 깨끗하게 속아 넘어갔다. 그 결과로 덜컥 임신하고 말았다.

『하지만 마을 최고의 부자는 자신의 딸의 생리가 끊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딸을 건달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하진 않았어요. 누가 봐도 그 남자가 재산을 노리고 접근했다는 건 불을 보듯 뻔했거든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부자는 고민 끝에 둘을 결혼시키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그래서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집으로 찾아온 인쇄공 남자를 걷지도 못할 정도로 흠씬 두둘겨 패서는 거적에 싸서 마을 어귀에다 내다 버렸죠.』
『알았다! 그래서 남자가 죽어 원한 사무친 귀신으로...』
『땡-』

골든 벨을 울려라 시간도 아닌데 땡 소리 영롱하다. 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쨌거나 부자는 살인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적당히 손만 봐줬다. 아울러 약간의 현금을 남자 호주머니에 찔러줬다. 물론「내 딸에게 또 접근하면 알지?」하고 으름장을 놓는 걸 잊지 않고서 말이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야?』
『여자가 문제가 되었죠. 당연하잖아요?』

딸은 임신 3개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직은 표가 나지 않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슬슬 아랫배가 나오기 시작할 터였다.
비상 사태였다. 집에서는 서둘러 결혼식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부자가 고른 딸 아이의 상대는 이웃 마을의 나이 지긋한 사업가였다.

『이번엔 진짜 맞춘다! 대머리 늙은이에게 시집을 가긴 싫다면서 여자가 자살했다!』
『역시나 땡-』
의기양양한 종소리 묘사에 리나의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았다.
이번에도 아닌 겨? 거 참.

어쨌거나 어린 소녀가 부모가 정해준 결혼 상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돈만 많다고 1등 신랑일 수는 없다. 그녀는 아직 꿈을 먹고 살아가는 10대 철부지, 뱃살이 붙고 술 잘 먹게 생긴 아저씨를 남편이라 부르긴 싫었다. 거기다 자신의 뱃속에는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소녀는 맹물 마시고 까무라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잘은 몰라도 생판 남인 남자를「아버지」라 부르게 될 아이가 나중에 커서 지 엄마에게 어떤 욕설을 퍼부울 것인지에 대해 상상만 해도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 와중에도 예단은 척척 도착하고 있었고 드레스와 면포는 이미 옷장에 걸렸다. 내일 모레면 꽃다발에「결혼을 축하합니다」라는 카드가 꽂혀 배달되어올 차였다.
하는 수 없었다.
벼랑에 몰린 여자는 고민은 나중으로 미루고 식구들 눈을 피해 달아났다.

『가엾어라. 하여간 이런 일엔 여자만 피해를 본다니까.』
『그럴지도.』
『그래서 어떻게 했다든. 맨발로 애기 아빠부터 찾아갔다든?』
『예.』
『와아- 처음으로 맞췄다. 자, 그래서? 여자 아버지가 추적대를 풀어놓았고?』
『아뇨. 그 이전에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문제라니.』
『기껏 탈출에 성공해서 인쇄공을 찾아갔더니만 그는 넉살 좋게도 마을에서 두 번째로 부자인 집의 딸을 꼬시고 있었지 뭐예요.』
『그헉!』

모두가 경악했다. 머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림이 그려졌다.
돈만 바라보고 접근한 남자. 배반당한 여자. 뱃속의 아기. 연속극이다. 일일 드라마다!

아멜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먹을 쥐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늑대가 맞다! 여자의 적! 퇴치해야 할 해충! 사회의 악!
『용서할 수 없어요! 겨~얼~코~ 용서할~ 수~ 없어요~!!』
『네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될 일이냐, 이게.』
『여하간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만 진정하고 자리에 앉으라니까, 아멜리아. 같은 여자 입장에서 네가 흥분한 건 충분히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올라갈 나무부터 찾는다는 건 넌센스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무에 올라가서 뭘 어드라케 하겠다는 건지. 리나는 뚱한 표정으로 자신의 무릎뼈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정의를 설파하는 대국민 일장 연설 끝에 점프, 애꿎은 목뼈를 부러뜨린다고 그 남자가 벌을 받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진정하라.
가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리나의 눈빛을 읽어낸 검사가 공주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지금 부러뜨릴 것은 아멜리의 목뼈가 아니라 인쇄공의 다리 몽둥이다.

『그거... 싫군.』
배반을 좋아하지 않는 제르가디스는 쓰게 한마디 던졌다.
모닥불을 쳐다봤다. 붉은 불꽃이 넘실대며 작은 티끌을 토해냈다. 딱- 하고 소리가 났다.
진짜라고 믿었던 사랑이 정말은 사랑이 아니었음에 사람은 슬퍼하게 될까?
아니다. 아마도 인간의 생리적 반응은「분노」에 가까울 거라고 소년을 상상했다. 속았음에, 속임을 당했음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하며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그 원초적인 분노는 맹렬하게 타올라 삽시간에 혼과 넋을 재로 만들어 인격을 붕괴시킨다. 자제심이 무너지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남은 것은 살기 뿐이다. 죽음으로서만 정화되는 최후의 감정... 그리하여 오른손으로 죄의 도구를 들어 상대를 친다. 눈을 똑바로 뜨고 비명을 지르는 그의 입을 찢는다.

『아뇨, 아뇨. 죽이지 않았어요.』
혼자서 너무 앞서 가는 거 아니냐며 제로스가 핀잔을 주었다.
『이내 그들은 말타툼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겨우?!』
『겨우 말다툼이라니오. 아이구~ 당신의 지나치게 격렬한 감수성은 어떻게 안 되는 겁니까, 제르가디스 씨.』
말도 안된다며 눈을 똑바로 치켜뜬 소년을 향해 손바닥을 흔들어대며 마족은 웃었다.
이건 진짜다. 인간은 그렇게까지 쉽게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비록 그게 본성이라고 해도 말이다. 살인으로 일을 마무리하기엔 뒤돌아 올 업보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그렇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말다툼이었습니다.』
흥분한 여자가 어찌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도망간 신부를 찾는다며 맨발로 달려나온 집안 식구들이「다행히 멀리는 안 갔구먼」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가족들은 다시 집에 돌아가 이번에는 신발을 찾아 신고 나왔다.
그동안 소동은 더욱 커져서 창문으로 고개를 내어민 마을 주민의 수는 전 거주자 수의 절반을 돌파하고 있었다. 물론 그 나머지 반은 집 밖으로 나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내가 하는 싸움은 비극이고 남들이 벌이는 싸움은 눈요깃거리다. 드디어 주먹다툼으로 번지기 시작한 인쇄공과 처녀를 둥글게 에워싸고 모두들 한마디씩 훈수를 던졌다.
처녀가 남자의 얼굴을 향해 손톱을 세웠을 적엔 온 동네 여자들이 꺄악 소리를 질러댔다. 남자가 허리를 비틀어 용케 공격을 피하자 이번엔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번졌다.
「물러서지 마! 남자의 자존심을 보여줘!」
「한 대 갈겨!」
「잘 한다, 피오나! 멈추지 말고 돌격~!!」
흡사 최고의 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 싸인회장 같았다.

『가만 있어 봐. 결국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지금 제로스가 말하는 거, 무서운 이야기 아니었어?』
이쯤해서 리나는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과연 이 이야기에서 억울하여 원념이 된 희생자는 나오긴 나오는 건가.
바람둥이 남자와 아기를 밴 여자가 말다툼을 벌렸다. 그래서 뭐. 각자 전치 3주의 진단서를 끊어가지고 서로를 고발하다? 심심하잖아. 그거랑「나온다, 으흐~!」와 과연 연관이 되기는 되던가. 워째 잘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녀는 머리통을 벅벅 긁으며 서로의 상관 관계를 저울질했다.

『아뇨. 연관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엘비스 프레슬리를 환영한 건 아니었다. 헤비메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대로 클래식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법. 하여 모두가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싸움판에서 신경질을 내며 시끄럽다 펄펄 뛰는 인간도 당연히 나왔다.
밤에도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이 연약한 신경증의 환자는 그리하여「모두 입 닥치고 조용히 하지 못하겠나!」욕설을 퍼부운 뒤, 근방에 놓여진 꽃병을 집어 2층 창문으로부터 불특정 다수를 향해 집어 던졌다.
말이 그렇지 돌로 만들어진 꽃병이었다. 그 무겁고 장중한 놈이 빙글빙글 돌면서 커다란 타원형 궤적을 그리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하강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다행히 사람이 맞지는 않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지나가던 개가 머리를 맞았다.
깽 소리를 내고 개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개는 곧 숨이 끊겼다.

『개?!』
『네. 개 입니다.』
『개?!』
『다시 한 번 확인해 드려요? 개 맞다니까요.』

개란다.
어허허 하고 리나는 아저씨처럼 웃었다. 그리고는 곧 정색했다.
『개란 말이야~~?!』
출세의 욕망이 있고, 배반의 장미가 있으며, 버림받은 사랑이 있어...
개가 죽었다?

드라마의 결말이 이렇게 흘러가면 개그다. 그것도 처참하게 썰렁한 개그이다. 뉴욕이 물에 잠기고, 고베에 대 지진이 발생, 런던으로 낙석이 떨어졌는데 알고보니 일장춘몽, 모두가 꿈이라고 해봐라. 쓴웃음도 안 나온다. 적어도 외계인의 음모 정도는 되야 하지 않는가.

리나는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동시에 일행 모두가 목을 움추렸다.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음이다. 주먹을 쥐는 저 모양새를 보아라. 때린다. 때릴 것이다. 어쩌면 있는 힘껏 걷어찰 것이고, 어쩌면 꿀밤만 때릴 것이다. 그러니까, 제로스. 저 혼자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왜 성가시게 벌려놓았느냔 말이야. 가우리는 질끈 눈을 감고는 황야를 갈퀴로 긁어대는 저 무시무시한 폭풍이 얌전히 지나가기만을 기도했다.

『제로스... 개란 말이지.』
뭘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제로스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네. 개 입니다.』
『너어~!』
『어라. 단순하게 생각하면 큰 코 다칩니다, 리나님.』
『단순 복잡하게 생각하고 자시고가 어딨어. 그저 개일 뿐이잖아!』

리나가 마족의 머리통에 분노의 한방을 먹이려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터엉- 하고 바위 하나가 굴러와 남의 집 대문을 박살내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일행 모두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이나마이트가 폭발했다? 소리의 크기로 보자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가우리는 매를 닮은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분명 어딘가로 광산이 있을 것이다. 사람 살리라 고함을 질러대는 광부들이 곧 나타날 거다. 곡괭이를 들고 모자를 쓴 광부들이... 다시금 텅- 소리가 났다. 광산이 무너진다, 무너져.

『광산 같은 소리!』
제르가디스가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면서 키 작은 아멜리아를 자기 등 뒤로 돌렸다. 이미 그의 검날은 마력을 담아 새빨갛게 물이 들어 있었다. 여차하면 갈길 태세다.

『광부...』
『똑바로 보라고, 가우리!』

움직임이 지나치게 빨라 그 형체가 흐릿하게만 보이고 있다.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림 뒤에 벽에 대고 죽 문지른 듯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뭔지 알아볼 수는 있었다. 어어- 하고 가우리가 놀란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갈색의 털이 달린 짐승이다. 정확하게는 살아있는 짐승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 속도로 태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연 상태로의 동물은 존재하지 않음이다) 귀의 뾰족한 모양이나 독특한 주둥이, 길다란 몸통과 꼬리가 연 연상시키는 건 다음과 같았다.

개다.

『맙소사. 진짜로 개?!』
보라색의 혀가 길가 빠져 나왔다. 뚝뚝 흐르는 건 물인지 곤약인지 좀처럼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리나는 실눈을 뜨고 재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개를 쳐다봤다. 누렇게 빛나는 눈동자가 맹렬하게 열기를 내뿜는 듯하다. 미쳤다. 돌았다. 더위에 맛이 간 짐승보다 느낌이 더 나쁘다.
이쪽의 시선을 알아차린 걸까, 개가 컹컹- 하고 크게 짖었다. 동시에 크게 도움닫기, 점프하여 한 입에 베어먹겠다는 투로 날아들었다. 리나는 벌려진 개의 아귀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송곳니를 보았다.
『우왓?!』
넘버 원의 마도사가 참 잘 하는 짓이다만, 엉겹결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터엉-
천만다행으로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에 가로막혀 개의 몸뚱이가 반대편으로 날려갔다. 아니, 그렇다라고 하기 보다는 엄청나게 강력한 힘에 떠밀린 듯하다. 흡사 부처님 손바닥으로 얻어맞고 태산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작은 원숭이 같았다.
리나는 한쪽 눈만 빼꼼 치켜뜨고 눈치를 살폈다.

『결계?』
글쎄올시다. 저편에서 제로스는 느긋하게 커피잔이나 들어 올렸다. 어쩌다 그가 주장하곤 하는,「이번 딱 한 번만 서비스」라는 의미일까. 설명도 귀찮은 모양이다.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리나 몫의 쿠키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남의 떡을 한 입 베어물었다.
『아앗?! 내 과자!!』
『내 사전엔 공짜는 (우물) 없어요. 음, 이거 맛 좋은데요. 체리 맛?』
『블루 스트로베리 맛이닷!! 그게 하나에 얼마짜리인데!!』

분노에 겨워 몸을 떨었다. 하지만 마족의 입을 벌려 그 어금니에 못을 박는 보복 행위는 나중으로 미루자. 부리나케 도움닫기하여 옆으로 굴렀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개의 앞다리가 지나갔다. 땀이 흐르고 있다. 단검을 뽑아들었다. 속도를 가늠하고 재빨리 던졌다.
『샤도우 스냅!』
켁- 실패. 그림자 포박으로 묶어두기엔 저쪽의 움직임이 환상적으로 빠르다.
『제기랄, 놓쳤다. 가우리! 그쪽으로 간닷!』
『알았음!』
정통으로 목을 겨누고 베었다. 정확한 타이밍과 속도, 아울러 기술. 100점 만점이다.
그렇지만 철검으로 유령을 벨 수 있으면 이쑤시개로도 스테이크를 썰 수 있다. 가우리가 내지르는 허탈한 외침 소리를 뒤로 한 채 악귀로 변한 개의 누런 눈빛이 비웃음을 담아 번들거렸다. 개의 목은 정확히 둘로 갈렸다가 언제 그랬느냐며 다시 하나로 붙어버렸다.
가우리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며 손사레부터 쳤다.

그래. 딱히 기대는 안 했으니까... 라고 해도 어쩐지 화가 치민다.
해삼, 멍게, 말미잘. 리나는 이를 갈고는 재빨리 원위치로 돌아왔다.

상태가 안 좋다. 크르르 이를 가는 소리만 들어도 머리카락이 쭈삣 곤두서려고 한다. 거기다 녀석의 입가로 뚝뚝 흐르는 것이 거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모양만 봐도 완전히 정신 나갔다. 들판에서 광란하며 달밤을 향해 뛰어오르는 미친 개다. 격정에 못이겨 제 스스로 벼랑으로 돌진하여 결국은 머리통을 부수어버리게 생겼다.
으으 신음소리를 내며 일행 모두가 뒤로 물러섰다. 물리면 10년은 재수 없겠다.
리나가 곁눈질로 마검사를 찾았다.

『무리다. 녀석이 나보다 더 빨라, 리나. 상처를 입히는게 전부인데 그러면 그럴수록 녀석은 더 펄펄 뛰겠지?』
『그럼 어쩌라고. 제르가디스. 드래곤 슬레이브라도 날려?』
『그런 무식한 짓을... 벼룩 잡는다고 초가삼간 다 태울 거냐. 그거 말고 달리 뭐 좋은 방법 없겠나.』
『먹이를 던져보자. 아무거나 좋으니까 일단 먹이를 줘!』 
가우리가 아까움에 눈물을 펑펑 쏟아가며 먹다 남은 구운 감자를 던졌다.
감자가 데굴 굴러갔다.
아우우! 본 척도 안 한다.
『달리 미친 개겠어. 먹는 음식을 등한시 하다니. 쳇! 이거나 먹어라.』
『가운데손가락을 들이밀며 욕하는 건 나중에 하라고, 리나.』

컹컹 하고 녀석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일행은 잔뜩 긴장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르가디스가 시험삼아 외쳐봤다.
『엎드려! 앉아!』
씨도 안 먹힌다.
눈치 빠른 아멜리아가 얼른 장갑을 둥굴게 말아 던졌다.
『착하지? 워리 워리. 저리로 가서 공 가져오렴.』
오, 이번엔 반응이 있다. 역시 개들은 공을 좋아한다.
하지만 한 번 흘깃 보고는 그대로 끝. 개는 다시 맹렬하게 짖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어쩌라고~!! 카가각-』
하는 수 없다. 리나는 머리를 긁어댔다. 이렇게 되면 드래곤 슬레이브다.
황혼보다 더 붉은 자여,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자여...
『리나 언니! 그랬다간 브리짓드 바르도가! 브리짓드 바르도가!!』
아멜리아가 허겁지겁 리나를 뜯어 말렸다. 개를 잡는답시고 드래곤 슬레이브? 혹시라도 이 이야기가 밖으로 퍼져나가는 날엔 애완동물 협회에서 날이 선 식칼을 포장해 우편등기로 보내게 된다.

『개가 싫어하는 건 뭐가 있죠? 싫어하는 걸로 쫓아보내자고요.』
『싫어하는 거라. 음... 원숭이.』
『에?』
『견원지간이라는 말도 있잖아.』
『미묘하게 틀린 거 같은데. 원숭이라니. 에이, 아냐.』
『그렇다면 나비!』
『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사실이지만 고양이가 달아나지 개가 달아나지는 않잖아.』
『그렇다면 목 줄?』
『목걸이를 싫어하는 녀석들도 제법 있지. 허나 그걸로 협박하긴 뭐 할 것 같은데. 더 그럴 듯한 것을 생각해내봐. 이대로는 물리겠다!』

뭐냐고, 정말.
리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화부터 냈다.
애시당초 공격 대상이 틀렸다. 돌로 만들어진 꽃병에 맞아 비명횡사한 걸 두고 가엾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원념을 가져 견귀(犬鬼)가 되었다면 자신을 죽인 놈을 찾아가 밤새 으르렁거려야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엉뚱하게 마을 밖으로 나와 영문도 모르는 죄 없는 나그네들을 위협하는 걸로 분을 풀려고 하다니.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 낸다더니만, 꼭 그 꼴이구먼. 췩췩- 이 멍청한 개야.』
가우리가 근심하며 리나의 소매춤을 잡아 당겼다.
『너무 자극하지 마, 리나. 그러다 정말로 저 원귀가 마을로 돌아가 자기에게 꽃병을 던진 사람을 찾아내 물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어쩌긴. 그 인간의 장례식장에 찾아가 공짜 밥이나 먹을란다.』
『말을 해도...;; 넌 진짜 인간성 하나 야박하구나, 리나.』
『그래. 나, 무지 야박하다. 하지만 가우리. 지금 내 인간성 따지고 있을 때야?! 아차하다간 생판 모를 남들이 우리 장례식장에 몰려와 공짜 밥을 먹게 생겼다구~!!』

저편에서 마족이 한심하다며 웃고 있다. 아아, 자존심 구겨진다.
다른 방법을 생각하자.

리나가 손가락을 딱 소리내어 튕겼다.
『알았다! 동물들은 대부분 물을 싫어하지. 아쿠아 붐~!』
작은 물의 폭탄을 만들어 무차별로 집어 던졌다. 효과는 좀 봤다. 사방에서 터지는 물보라에 으르렁대던 녀석이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으니까.
단, 단점도 없진 않았다. 개들만 물을 싫어하는게 아니다. 사람도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차가운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첨벙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물벼락이 친다.
당해본 사람만 안다. 그거 진짜 징그럽다.
『읏, 차거!』
『미안.』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말은 하는데 눈으로는 엉뚱한 곳을 보고 있다.
리나는 멀직히 떨어진 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초대형의 물폭탄을 만들어 허공에 띄웠다.
역시 미친 놈에겐 찬물을 좍좍 끼얹는게 제일이다. 정신이 번쩍 드니까.
『브레이크!』
잡작스런 물 세례에 개가 펄쩍 뛰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진 차가운 물을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나니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좋다, 이거야. 리나가 손가락을 뚝뚝 꺾어댔다. 이제 남은 것은 복날에 개패듯이 하면 된다. 주제 모르고 인간에게 덤빈 댓가를 톡톡히 치러주셔야겠어~

개는 코 부분을 얻어맞으면 죽으려고 한다.
성큼성큼 걸어나간 리나는 코 부분을 정확히 조준해서 손바닥으로 찰싹 찰싹 때렸다.

- 깽!

『걱정된다. 애완동물 협회에서 분명 뭐라고 그럴 걸.』
『녀석들보고 미친 개에게 장딴지 물려봤느냐고 물어봐.』
『우리도 물리진 않았잖아요, 리나 언니.』
『물리기 직전이었어.』
『그래도...』
『왜. 가엾냐?』

글세올시다. 아멜리아는 대답을 회피한 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폭삭 젖은 개는 낑낑대며 울기 시작했다. 고개를 무참히 떨구고서 말이다.
이쯤되면 리나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 울고만 있으니 제법 가여워도 보인다. 덩치는 커다란 놈이 동요감을 감추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다. 갈색의 몸통을 바들바들 떨어대며 눈물까지 흘려댄다.
길도 잃어버리고, 주인도 집도 잃어버리고.
무섭고 슬프다. 화도 난다.
아우- 하고 녀석이 한껏 서러움을 담아 한 소절 길게 뽑았다.

『저 개 말예요, 언니. 자기가 죽었다는 건 알고 있을까요?』
『패닉 상태야. 저 상태로는 영원히 악귀 신세이지. 사람이라면 알아듣게 설명해서 성불하도록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상대는 개라구. 말도 안 통해.』
『그래도 시험해볼 가치는 있지 않겠어요?』

아멜리아는 고개를 돌려 달래는 듯한 나지막한 음성으로 개를 향해 말했다.
『ACUO.』
가능성은 반반이다.
신관 문자인 파베 어(語)로 발음은 아쿠-오.
길게 해석하자면「나의 목소리를 귀 기울려 들을지어다」라는 뜻이다. 짧게 해석하자면「귓밥 치우고 잘 들어」. 
아멜리아는 길게 심호흡한 뒤에 손가락 하나를 척 하고 들어보였다.

《보렴. 내가 왔단다. 네 주인이야. 알아 보겠니?》
《컹!》
개의 눈빛이 물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축 늘어졌던 꼬리가 기운을 차리고 움직였다.
되었다. 이제 개는 암시에 걸려 아멜리아를 자기 주인인줄 알고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네가 없어져서 한참을 찾았단다.》
《멍!》
《착하다. 착해. 이젠 괜찮아. 겁 먹지 않아도 돼.》
《멍멍!》
《자, 그럼 오늘은 열심히 일했으니 그만 쉬도록 할까?》
《멍~!》
《착하구나... 정말 착해. 그럼 가서 푸욱- 잠이라도 자고 있으렴.》
《멍!》

개도 웃는구나 하고 아멜리아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개는 만족해하며 꼬리를 흔들었고 몇 번을 더 짖었다.
- 멍멍
그리고 개의 모습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휴우- 하고 아멜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녀의 뺨이 새빨갰다.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리나는 늦은 저녁 무렵에 제로스를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가서는 있는 힘껏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 얘기가 틀리잖아!』

인쇄공인 청년이 있었다. 가난한 그는 재주는 없었지만 근면했다.
남자에게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소꿉친구였던 그녀는 인쇄공처럼 집안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마을 최고의 부자가 여자를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되었다.
부자는 거금을 들여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자 했다.
여자는 거절을 했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가 않아 여자의 부모가 그 돈을 받았다.
하는 수 없어 연인은 야반도주를 했고...
오래 가지 않아 그들은 잡혔다.

인쇄공은 뭇매를 맞아 일주일을 앓다 죽었다.
여자는 충격을 받아 그날 밤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들이 키우던 개가 부자를 향해 맹렬하게 짖어대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때부터였다.
부자는 매일 성가시게 굴고 있는 개를 잡아다 죽여 마을 밖에 버렸다.

리나는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왜!』
『왜라니오.』
제로스는 평상심의 표정으로 리나의 손을 뿌리쳤다.
『제가 사실대로 말했다면... 뭐가 달라집니까?』
그들은 원귀가 된 개더러 마을로 돌아가 부자를 물어 죽이라고 부추겼을까? 설마.

『당신은 무엇에 분개하고 있는 거죠? 리나님.』
『뭐가 분하냐고?! 그래. 방금 전에 뭐가 달라지느냐고 물었지? 답해줄까.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분한 거다. 됐냐?!』

버럭 고함지른 뒤, 리나는 제로스를 힘껏 떠밀었다.



개 귀신이 사라지고 나서 도로는 다시 사람들의 왕래로 활기를 되찾았다.
어쨌거나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마을은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크게 달라진 점이라면... 음.
마을 입구 앞으로 나그네가 즉석에서 돌로 만든 작은 묘비가 하나 생겼다.
돌에는 작은 글씨로《해피》라고 적혀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