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동화책에 나오는 도란도란 그림을 떠올렸다.
엄마는 아빠 셔츠를 다림질하고. (정작 엄마는 눈 부라리며 구멍난 자기 양말을 꿰매고 있었지만)
아빠는 신문을 읽고. (사실은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메모하느라 바빴지만)
우~와. 겁나게 사이 좋은 우리집.

머뭇거리며 내뱉은 가우리의 그 말에 제르가디스는 박장대소했다.
누가 엄마이고 누가 아빠라는 것?
평소 소리내어 웃는 법이 없는 그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어댔다.

『엄마, 저 얘기 들었수?』
『시끄럿, 제르가디스.』

핀잔과 함께 양말짝이 날아들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도저히 못 꼬매겠으니 제발 좀 도와줘.

여자라고 바느질에 능숙할 거라 지레 짐작해선 큰 코 다친다. 엉뚱한 엄지손가락으로 바늘을 푹푹 쑤셔넣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느질과는 인연이 멀다. 굵은 실로 X자를 그리다 못해 갈지(之)자를 그려놨는데 구멍이 좁아지긴커녕 워째 옆으로 더 늘어났다.
제르가디스는 인상을 쓰고 실과 바늘을 집어 올렸다. 성차별에 근거하여 비난했다.
여자가 양말도 하나 꿰매지 못해서야... 쯧쯧.

『하지만 난 드래곤 슬레이브를 사용할 줄 알거든.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 없어요.』
『드래곤 슬레이브가 찢어진 옷을 바느질 해준다냐. 말도 안돼.』
『괜찮어. 바느질 같은 거 못해도 내 옷에 구멍이 나면 누군가, 어디선가, 틀림없이 쨔쨔쨔쨘 하고 나타나니까.』
『어이. 지금 미스터 홍반장 이야기 하나.』
『아~니. 난 지금 바느질 무지 잘 하고 성품 좋은 한 청년 이야길 하고 있어.』

혀가 길어 아부는 잘 한다.
제르가디스는 웃음의 잔향을 풀풀 날리며 - 역시 아부는 아무리 들어도 기분 좋은 것이다 - 리나를 대신하여 양말에다 바늘땀을 하나 하나 넣기 시작했다. 모닥불을 조명으로 바느질을 한다는 건 조금은 어려웠다. 그래서 그의 표정이 사자 잡아먹는 전설의 괴수 이플리스처럼 일그러졌다. 안경을 써야 할까. 갈등하다 귀찮아서 관뒀다. 에라, 모르겠다. 바느질 정도야 눈 감고도 헤엄친다.

봤어요? 아들. 엄마와 아빠는 이렇게 서로 협동해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해요.

『닭살 돋는다. 엄마 아빠 이야긴 그만해라아~』

리나는 뒤로 데굴렁 누워 하늘을 쳐다봤다.
비가 오고 갠 하늘엔 별님이 가득하다. 이 경우엔 쏟아진다는게 맞는 표현이다. 오리온의 세 형제들을 손가락으로 꾹꾹 찍어가며 그림을 그려봤다. 이에 화답하듯 별들은 신의 은총을 담아 아름답게 빛을 발했다.
평화 있을지어다. 세계는 여전히 아름답다.

멀리서 늑대가 애 끊어져라 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결혼하고 싶어, 결혼하고 싶어~
가우리가 멎적게「그놈 참 요란하다」라며 한마디 툭 던졌다.
근처로 암컷 늑대가 전멸이라도 했다냐. 수컷 늑대의 울음소리엔 서글픔이 담겼다.

『그러고보니...』
『응.』
『우린 그 남자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어.』
갑자기 영문을 모르겠다며 제르가디스가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남자? 무슨 남자.
『있잖아. 그 망할 영감탱이. 나더러 몸 내놓으라 했던 사람.』

순식간에 양말 구멍을 말끔하게 메우고 - 아무래도 이쪽이 엄마다 - 이빨로 실을 끊으려던 합성수 청년이 드러누운 리나를 향해 흘끔 시선을 던졌다.
모닥불 탓일까. 소년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그의 이름은 아마도 파울로가 아닐까 싶다.』
리나는 놀라 까무라쳤다.
『에에? 무슨 재주랴. 천리안이라도 생겼나.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제르가디스.』
『재주라고 할 것도 없지. 그 영감이 말한 56명이라는 숫자에서 힌트를 얻었을 뿐이야. 기억 나? 자기 가족 56명을 팔았다잖아. 한 두명이 아니라 성씨가 같은 일가족 56명이라고. 이 정도면 기록에 남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
『음.』

짐작했던게 맞았다. 사흘간 도서관을 뒤져 기록을 찾아냈다.

루우브 720년.
리돈 왕국에서 새로운 병기를 시험하다.
10미터에 한명씩 사람을 세워놓고 그 파괴력을 짐작하다.
48명째 파울로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52번째 파울로가 크게 다쳤으나 이튿날 사망하다.
55번째 파울로는 전신불구가 되어 1년 후 사망하다.
56번째 파울로는 왼편 팔이 잘렸으나 회복하여 살아났다.
병기의 이름은 살아난 남자의 이름을 따서 「파울로의 대차」라고 불렀다.

누워있던 리나가 소금 만난 지렁이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파울로의 대차에 대해선 그녀도 아는 바가 약간 있었다.
살상력이 너무 무서워 일부러 폐기처분 했다는 전설의 병기.
10미터에 한명씩. 48명이 즉사했으니 완전 살상력 반경이 480미터.
물 분자를 진동시켜 확장시키는 원리를 사용했다. 다시 말해 수분 78%의 육체가 안쪽에서부터 터져나간다.
소나 말을 사용하는 불문율을 깨뜨리고 살아있는 사람을 사용하여 실험을 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 후로도, 전으로도 살아있는 인간을 놓고 폭탄을 터뜨린 건 이것이 유일하다.

『정확히 56명의 파울로야. 뭔가 그림이 떠오를 듯하지?』
『켁. 그렇담 그 남자 일가족 전부가 군부 실험에 차출당했다는 것?』
『자원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팔려갔다면야 가능하겠지.』

글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56명 전원이 정말로 팔려가서 그런 흉한 모습을 당했다고 결론짓긴 싫었다.

일렬로 늘어서 죽음을 기다린다.
「시작」이라는 깃발이 올라감과 동시에 혈족들이 모조리 죽어 넘어진다.
그냥 넘어지는 것도 아니다. 풍선처럼 뻥뻥 터져나간다.
중간에 서있는 사람은 죽어라 기도한다.
저 괴물이 내가 있는 곳까지는 오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그리고 스스로 상처받는다.
나만 살겠다고? 그래서 뭐할 건데. 모두 죽고 나만 살아서. 그래서 뭐가 달라져?
차라리 다 죽어버리는게 공평하잖아.
어차피 팔려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신을 저주해봐도 살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구원을 기대한다.

살려주세요.
이렇게는 죽고 싶지 않아.

리나는 심란함을 가득 담아 땅바닥 위를 다시 한번 데굴렁 굴렀다.
싫다. 뭔가 낭만적인 상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틀려. 해적선에 팔려간 거야.』
『뭐?』
『해적선에 팔려갔다고.』

배에는 노를 저을 사람들이 필요하다. 따라서 해적들이라도 - 불법이냐 합법이냐는 이 경우엔 중요하지 않다 - 돈을 주고 육지로부터 배를 저어댈 인부들을 사간다.
리나는 꿈을 꾸었다.
56명의 일가족이 해적선에 실려 배를 조정한다.
풍랑을 만나고, 고래도 만나고, 가끔은 해군을 만나 줄행랑을 치고...
그러다 마음 고쳐먹고 정식으로 해적단에 입단한다.
칼 들고 나도 남의 배를 털겠노라.
검은 해골의 깃발을 휘날리며 바다를 탐한다.
보다 더 자유롭게, 보다 더 탐욕스럽게... 보물을 찾아 파도를 가른다.

모닥불을 향해 잔가지를 던졌다.
따스한 온기가 어깨를 감쌌다.
새빨간 빛깔의 불티가 탁탁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춤추며 날아올랐다.

『그렇군. 해적선에 팔려갔군.』
제르가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가설이다.
해군에게 잡혀서 모조리 교수형 당했다 - 라는 결말만 아니라면.

소년은 다 꿰매진 양말을 리나를 향해 휙 집어 던지면서 말했다.
『56명의 일가족 해적들이 있는지 한번 찾아봐줄게.』
『응... 찾아줘. 꼭이야.』
『찾아줄게.』
『그런데 제르.』
『왜.』
『양말 구멍 메운 모양이 왜 하트야?』
『괄태충 모양보단 예쁘잖아. 그러니까 하트야.』
시치미를 뚝 잡아떼고 -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었지만 - 소년은 말했다.

잠시동안 죽을래, 말래 말다툼 소리가 요란했다.
어쩌다 퍽퍽 하고 주먹질 하는 소리도.
그동안 가우리는 호호- 소리를 내며 다 구워진 감자의 껍질을 벗겼다.

문득 생각났다며 하늘을 올려다 봤다.
달은...
3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소리를 내지 않고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 3천년 뒤에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으리라고 가우리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