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술가들이 흔히 장사 시작 전에 액땜으로 쓰는 기호가 있다.
제르가디스는 그저 버릇인 것처럼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다 세 개의 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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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점술가들의 액막이 도형으로, 직선상에 그려진 세 개의 점은 모두에게 공평정대한 운명을 의미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상징이기도 하다.

공평정대라.
제르가디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점술가들이 대로변에서 칼침을 맞아 뒈지는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공평정대 좋아하시네. 순 공갈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다. 전설에도 나오지만 공평정대의 신은 술을 석 잔을 겨우 얻어 마시고 운명의 신은 술을 무려 일곱 잔을 마셨다. 헤라클레스는 이 사실을 알고부터 공의의 신을 홀대했다. 왜냐면 정의는 인간의 편이 아니니까. 하여 집 잔치에도 초대하지 않았다.

아울러 변형.
제르가디스의 손가락이 다시금 움직였다.
이것은 예전에 만났던 백색의 예언자가 보여주었던 액막이 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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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 왜곡. 흐트러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의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종말.
소년이 찾아낸 백색의 예언자는 회의주의자였다.
발버둥쳐서 무엇을 하려는가. 어차피 망할 놈은 망하고, 흥할 놈은 흥한다. 죽을 놈은 살고, 살 놈은 사는 법. 죽을 놈이 애써봐야 결론은 무덤밖에 없다. 그러니 포기하고 마음이나 편해지도록 하라. 예언자는 그렇게 말했다.

『누구는 앉아서 사본을 구경하는데 누구는 성자의 유골단지를 거꾸로 뒤집어도 찾질 못한다 이거지. 어쩜.』
성물을 파괴하는 악장을 타파한다며 돌팔매질을 던지는 한 무더기의 신자들과 보름하고 한나절을 싸우기도 했다. 덕분에 뺨의 일부가 돌멩이에 맞아 함몰된 적도 있다. 용족의 유적을 박살내어 지명수배를 받은 적도 있었고... 제로스와 험하게 다툰 적도 있었다. 요컨대 험한 산을 수백번은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득은 제로. 먼지 끄나풀 하나 건지질 못했다.
그런데 어떤 놈은 누군가가 집으로 일부러 찾아와서, 현관 문을 두둘기고,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한 다음,「사본을 가져가지 않으실라오」하고 묻는다.
이런 환장할 일이.
공평정대라는 건 진정 유토피아적 망상임이 분명하다.
갑자기 벽에다 대고 주먹질을 실컷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저쪽에서는 리나가 휴대용 관광지도를 꺼내들고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표정이 뜻하는 바는 이렇다. 괴물 인형이고 마네킨이고 뭐고 드래곤 슬레이브 한방이면 작살이 날 것이다. 이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드래곤 슬레이브 주문의 파괴 반경이 워낙에 넓다보니 인가가 밀집된 대도시에선 사용이 무지 곤란하다는 점이 문제다. 마왕이 날뛰고 있다면야 또 모른다. 마수 자나파가 부활했다면 주문 연타를 날린다 해도 눈감아줄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는 어디까지나 인간 - 정확하게는 인간이라고 하기 뭐하겠지만 - 이다. 이러니 무작정 드래곤 슬레이브를 던져놓고「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불가항력이었습니다」라고는 변명 못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상대를 인적 드문 야산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소리인데...
이쯤해서 얼굴이 구겨졌다. 끙 소리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옛날부터 이곳 주변으로는 귀금속 세공업이 발달해 있다. 이를 다시 설명해주랴. 운송업에 금융, 상업, 디자인 산업, 나아가 기술업이 골고루 발달하여 사람이 억수로 바글거린다는 거다. 30분은 걸어야 사람 사는 지붕 나온다는 외진 시골과는 사정이 정 반대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빈 땅이 안 나온다. 인구 밀집도는 여름날 불쾌지수를 훨씬 웃돈다. 드래곤 슬레이브를 휘갈겨도 괜찮을 정도의 한적한 장소라는 건...
한숨과 함께 들고 있던 지도를 사분의 1로 접었다.
사흘 내내 쉬지 않고 걸어야 공터 다운 공터가 등장한다.
『완전히 망했군. 이래선 드래곤 슬레이브로 승부를 건다는 건 무리야!』

거기다 문제는 더 있다.
어떤 경우엔 사본을 형성하는 단어들이 일종의 카오스 워드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예전에 리나는 오용된 마법약이 폭발을 일으킨 솥단지 속에서 낱장 하나 타지 않은 사본을 끄집어낸 적도 있다. 심각해지면「날씨가 맑다」라고 서술된 기록을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 실제적으로 흐린 구름이 갠다는 말씀. 말씀이 곧 검날이며, 아울러 힘이다. 사본 자체가 수룡왕의 파편이다보니 마법적 조작에 의해 말 그대로 천하무적이 될 수 있다. 달랑 남은 유서 한장이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의 파워라는 건 때때로「무섭다」라는 수준을 훨씬 상회한다. 적법사 레조가 석판에 기록한「사본」은 닭마족 하나를 한방에 가루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했었으니까.

『염파 문자다 이거지. 제기랄. 그렇다는 건 가만히 있기만 해도 화이어볼이니 프리즈 에로우니 하는 주문을 튕겨낼 수준이라는 거 아냐.』
『아마도.』
따라서 어중간한 주문으로는 승부를 낼 수 없다.
필살기를 사용하자니 주변에 끼치는 민폐가 장난이 아니시고.
발버둥치며 리나는 괴로워했다.

그렇다면 라그나 블레이드로?

제르가디스는 쌈빡하게 잘라 말했다.
『관두시게.』

라그나 블레이드로 베어지지 않는 건 없다. 말 그대로 신들의 영혼마저 타파한다. 그러나 주문이 발동되면서 소진되는 마력이라는 건 거의 생명을 갉아먹는 수준이다. 아울러 주문이 유지되는 시간이라는 것도 찰나에 가깝다. 다시 말해 찬스는 딱 한 번이다. 상대방이 칼날을 피해버리기라도 하는 날엔? 이쪽이 알아서 자멸하게 되어 있다.
어리석은 마법사들의 도착지. 마력폭주.
코피 펑펑 쏟는 정도로는 절대로 안 끝난다.
그러니 당연하다. 이 정도의 일로 라그나 블레이드를 사용하려 한다면 두 팔 걷어붙이고 반대한다.

『그럼 어쩌라고!』
리나는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흘러간 뽕짝「얄미운 그 사람」노랫말을 중얼거렸다.
게다가...
팔짱을 끼고 제르가디스를 흘끔 쳐다봤다.
『왜.』
그녀의 시선을 느낀 제르가디스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졌다.
『왜 내 눈치를 보는 건데?』

이 경우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리나는 생각했다.
다른 물건이 아니다. 사본이다.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사본이다.
『저기 말이지. 내가 찾는 사본은 사과 쥬스 칵테일에서 사과 원액만 추출해내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렛셔데몬 만들기 레시피 같은 건 난 그렇게 필요하지 않거든.』
『그래도 사본이라잖아.』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잡상이 뱅글뱅글 돌았다. 사본에 대한 제르가디스의 집착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래서... 이다지도 심란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됐어, 됐어. 없애버려.』
아니... 그렇게 산뜻하게 말씀하시면 무지 곤란하옵니다.
『그럼 어떻게 말해주랴. 이 몸께서 무지 가지고 싶으시니까 녀석이 가진 사본에 흠집 나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시라 말해주랴?』
아니... 그런 식으로 차갑게 말씀하시면 소인 당혹스럽사옵니다.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약간 뜸을 들인 뒤에 리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지. 제르가디스.』
『왜.』
『너에게 주먹으로 얻어맞고 이가 부러질 각오를 하고 말하는 거지만...』
『말해봐.』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거라 판단되었다면 나와 반목하고 그쪽으로 붙어도 뭐라고 하지 않겠어.』
『호오.』

타고난 자제력을 발휘, 평정심을 가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르르 떨리도록 주먹을 꽉 쥔 모양새로 보자면 그 자제력이라는 건 종이 한 장 두께에 불과했다.
소년은 소름끼칠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간단히 말해 이참에 널 배반하고 저쪽에 붙어도 크게 불평하지 않겠다는 것?』
『네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사본이잖아.』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해. 그쪽에서 클레어 바이블의 사본을 걸고 너와 교섭하려 한다면 응해도 좋아. 동료애에 호소해서 널 강제로 붙잡지 않겠어. 그러니까...』

순간 커다란 손바닥이 머리 위로 사뿐 내려와 앉았다.
별다른 말은 없다.
그런데 이게 더 무섭다.

『너는 말이지, 리나.』
『응.』
『무지 재수 없어.』

감히 부정은 못한다.
리나의 뺨에 고운 빛깔의 홍조가 일었다.
『어떻하냐, 제르. 재수 없는 여자와 한 팀이 되서.』
『하는 수 없지. 팔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넌 신경 쓸 것 없다.』
그녀는 조금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분위기를 바꿔보자. 가볍게 헛기침을 해보였다.
『마법으론 승부를 내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단순한 물리력은 먹혀 들어갈 것 같아.』
가우리가 휘두른 칼날에 맥없이 잘려진 손목을 떠올렸다. 직접적 타격은 분명 효과가 있다. 
『빌어먹게 원시적 형태의 싸움이 되는 거지.』
찌르고 베며 주먹을 휘날린다. 세상에서 둘째라면 서러운 마도사가 참 잘 하는 짓이다. 리나는 우울한 얼굴로 애용하는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깡패들과 맞장 뜰 정도로 주먹질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녀이지만 역시 치고 받고 싸우는 일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몸 움직임이 민첩하고 뱃장도 두둑한 편이라고 해도 역시 주먹질은... 아이구.
천재 미소녀 마도사와는 영 안 어울린다.

가우리가 나 좀 보라며 자기 가슴을 두둘겼다.
『내가 있잖아, 리나. 싸움질엔 이골이 난 몸이니까 내가 녀석을 흠씬 두둘겨 패줄게.』
『됐네요, 가우리. 거꾸로 요상한 할배에게 암시나 걸리지 마셔.』
『안 걸려.』
『그 근거 희박한 자신감의 근원은 도대체 뭐야.』
『난 감기에도 잘 안 걸리잖아.』
『틀려!』
검날에 기름칠하다 말고 헝겊을 집어 던졌다.
하여간.
아무튼 믿어달라니 일단은 믿어준다.

『연습이라도 해볼까.』
휙휙 소리가 나도록 검을 좌우로 휘둘러 봤다.
느낌이 영 아니었다. 손잡이가 착 붙지 않고 있다. 감각이 무뎌졌다. 으아~ 걱정된다.
『벼락치기가 과연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안하는 것보다야... 가우리? 미안하지만 검술 지도 좀 해주지 않겠어?』
『우리 사이에 미안할게 뭐 있냐. 웃쌰. 몸 좀 풀어보실까? 아참, 리나. 매번 말하는건데 말이야.』
『방어한답시고 왼편으로만 도는 버릇 말이지?』
『우와. 기억하고 있었네. 그런데 하나도 안 고쳐졌어.』
『미안.』
『사과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버릇을 고쳐야지.』
『아하. 미안, 미안.』
『그러니까 사과하지 말고 집중부터 하라니까.』

하지만 마음이 콩밭에 있는데 집중이 될 리가 있나.

어쨌거나 시곗바늘은 돌고 돌아 오후 5시가 되었다.
그런데 어떤 정신 나간 자장면 배달원이 밀린 돈을 당장 갚으라며 문을 두둘겨댔다.
저런 미친 경우가. 리나는 분통이 터진 나머지 의자를 들어 거꾸로 내던졌다.
24시간이라는 약속은 진정 휴지덩이였다.
재수 없다. 눈치도 없이 나타난 작자에 대고 가운데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이봐. 고개만 끄덕이곤 점심시간에 불쑥 나타나지 말라고 강조해서 말했잖아. 나에게 24시간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했던 거 기억 안나요?』
『하여간 점심 시간에는 안 나타났잖는가. 지금은 저녁 시간이야.』
『그래봤자 그때부터 대충 해서 7시간 지났잖아! 너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수?!』
『안 드네. 게다가 24시간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네는 이미 결심하지 않았나.』

그야 그렇긴 하다. 이런 문제를 길게 생각한다는 거 자체가 바보스럽다. 당신의 다리를 잘라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나올 답은 하나이다. 24시간 여유따윈 필요가 없다. 네놈의 다리부터 잘라보자. 답은 늘 그렇게 나오기 마련이다.
리나는 단검을 빼들고 스산하게 웃었다.
내 몸을 달라고?
바꿔 말해볼까.
차라리 네 몸을 우리에게 내놓으시지.

『흐응. 힘으로 승패를 가르자고?』
『당신이 이기면 내 몸을 가져가도 좋아.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이기면 나는 당신 몸을 절단낼 거야.』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흥! 무척이나 자신만만한데 말이야, 할아범.』
『비겁하게 1대 3으로 나오니까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젊은이.』
『누가 비겁하다는 거얏!!』
『찔리니까 그렇게 소리지르지. 하여간 노인네의 연륜을 무시하면 큰 코 다칠 걸.』
『전혀~ 전혀~ 큰 코 다치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입니다.』

양쪽 모두 필사적이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덤벼들고 본다.
『우오오오~!!』
달려나가면서 옆구리에서 검을 빼어들었다. 뽑으면서 친다. 아울러 보너스로는 발길질이라는게 있다. 남의 갈비뼈를 아작낸다는 각오로 죽을 힘을 다해 걷어찼다.
하지만 죽을 각오라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재빨리 몸을 비어 피했다. 목적지를 잃은 리나의 다리가 허공으로 뚝 떨어졌다.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한 사내가 납작 엎드렸다. 몸을 움추렸으니 다음으로는 이완시킨다. 다리를 쭈욱 피고서 무식하게 머리로 받으며 돌격해왔다. 보기와는 달리 꽤나 과격한 공격이었다. 벽돌로 얻어맞았다는 통증에 리나는 욱 소리를 내며 배를 잡았다.

『제, 제법 하는데. 할아범.』
『칭찬 고맙군.』
『하지만 아직 멀었어!』

주먹을 쥐고 후려갈겼다. 빡- 하고 나무통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멈추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남자의 몸을 벽쪽으로 밀어던졌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보다는 가벼운 몸이다. 남자는 맥없이 날려갔다.

『가우리! 저 자의 수족을 베어버렷!』

그렇지만 그 명령을 수행하기엔 문제가 좀 있어 보였다.
하여간 중요한 순간에 도움이 안된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가우리는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으로 - 똥 밟았다는 얼굴로 옷걸이를 향해 수작을 걸고 있었다. 걸려져 있는 외투를 향해 기합 넣고 찌르기, 그리고는 옆으로 흘려베기.
통나무를 향해 연습 중인 건가.
어째서인지 본인도 잘 모르겠다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홀렸다, 홀렸어!
『감기에도 안 걸리니까 암시에도 안 걸릴 자신 있다며! 이 해파리야~~!』

자신의 할 일을 남에게 미뤄서는 안된다는 오늘의 교훈을 되새기며 직접 타격에 들어갔다. 그럼 오른팔을 베어볼까. 도끼로 나무장작 패던 기억을 떠올리며 검날을 수직으로 내려쳤다. 쩍 소리를 내며 칼날이 박혔다.
그러나 그게 바로 실수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몸인 만큼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피도 안 나오고 뼈도 안 끊긴다. 따라서 남자의 움직임은 여전히 자유롭다. 반면 리나가 휘두른 칼날은 그 남자의 어깨에 박힌 그대로 잘 빠지지 않았다.
켁.
리나의 안색이 달라졌다. 형세의 역전이었다.

『어허라, 빈 틈!』
남자가 팔을 뻗어 리나의 옆구리로 가져갔다. 실수이다. 너무 가깝게 접근했다. 아차 싶어 몸통을 비틀었지만 움직이는 것과 거의 동시다 싶게 타격이 날아들었다. 텅 소리와 함께 갈비뼈가 지끈거렸다. 정통으로 맞았다. 비명도 못 질렀다. 리나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리낫!』
놀란 제르가디스가 재빨리 공격에 들어갔다.
『프리즈 에로우!』
물론 저것은 마법력의 직접 타격을 기대하고 던진 것이 아니다.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으로 리나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던지고 보았다. 당연한 결과로 프리즈 에로우는 엉뚱한 벽으로 가서 꽂혔고 쉬익- 하고 희뿌연 냉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지금이다 싶었다. 넘어진 리나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아니, 끌어당기려 했지만 정작 당겨지지 않았다.
『...!!』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일세, 청년. 자네는 손 놓게.』
프리즈 에로우 정도로는 틈조차 만들지 못한다는 건가.
당황해서 리나의 두 다리를 더 힘줘서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양쪽에서 잡아당기니 무척 아팠을 거다. 리나가 꺅 소리를 내며 발버둥쳤다. 물거기가 펄떡거리니 어부는 실수한다. 덕분에 놓쳤다.
『고맙네, 젊은이. 양보해줘서.』
『아니, 아니! 내가 하려던 건 그게 아니라! 자, 잠깐! 기다렷!』
막 반박하며 항의하려던 찰나 시야가 칠흙처럼 어두워졌다.
당했다.
암시에 걸렸다.
시야 확보 제로.
이래서는 장님 신세이다.

『괜찮아. 침착해야 한다. 그저 눈만 잘 안보이게 되었을 뿐이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흥분된 마음을 가다듬었다. 기척을 읽는다. 청력은 아직 멀쩡하니까 방법은 있다. 뭔가 움직인다 싶으면 갈기고 보자.
『거기냣! 댐 브라스!』
『우어헉!』
미안하지만 가우리였다.
『사과는 나중에 하마!』
그렇다면 리나는 어디에?

어디긴.
괴한 밑에 무척이나 흉한 모양새로 납작하니 깔려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얼굴을 돌리지 못하도록 머리를 단단히 고정당한 채 강제 입맞춤이라도 당할 찰나였다. 지평선으로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사내의 머리가 가슴 아래서부터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입을 벌려 제법 깊어보이는 구멍을 보여주었다. 리나의 입장에선 구토라도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지금 이 마당에 입을 벌리면 무척이나 고약한 짓을 당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호흡을 멈추고 입을 꽉 다문 채 그나마 자유로운 두 손바닥으로 마룻바닥을 철썩 때렸다.
댐 브라스!
쿵 소리가 나면서 바닥이 꺼졌다. 동시에 두 명 모두 아래층으로 와르르 굴러 떨어졌다. 건물 자체가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요동쳤다.

콜록하고 기침을 터뜨렸다. 등이 매우 아팠다. 아니, 등이 아프다는 건 단순한 착각이었고 사실은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피부가 찢어졌다. 아무래도 부러진 판자 모서리에 긁힌 모양이었다. 고통에 겨워 눈물을 줄줄 흘려가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래도 계속 움직여야 한다. 포기하고 누워만 있다간 당하게 되어 있다.

『뭘 하고 넘어져 있는 거냐, 리나. 일어나!』
익숙한 실루엣의 하얀 소맷부리가 나타나 팔목을 움켜잡았다. 제르가디스였다. 소년은 힘주어 리나를 일으켜 세웠다. 상냥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무슨 짐보따리 끌어안는 듯한 동작이어서 내심 기분이 꿀꿀했지만... 럭비공처럼 옆구리에 끼고 가겠다고 해도 현 상태에서는 크게 불평 못한다. 리나는 터져나오는 기침을 억지로 참아가며 그저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아무래도 발목을 접지른 것 같았다. 통증이 너무 격심해 발에다 체중을 실을 수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은 접었다. 영양분을 모조리 빨아먹는 덩굴처럼 들러붙고 보았다.

『어레?』
바로 그때, 똑같은 하얀 소맷부리가 하나 더 나타나 소년을 등 뒤로부터 와락 덮쳤다.
이래서는 눈 뜨고 꾸는 악몽이었다. 제르가디스가 제르가디스의 목을 졸랐다.
어느 쪽이 진짜?
『당연히 내가 진짜지.』
목이 졸린 제르가디스가 읍 하고 기합을 넣더니만 상대를 어깨로 메다 꽂았다.
하지만 내던진 쪽도 만만치 않았다. 충격은 좀 받은 눈치다만 좀비처럼 벌떡 일어났다.
『거짓이다. 내가 진짜고 이쪽이 가짜다. 어딜!』
그 다음부터는 엎치락 뒤치락이었다. 쌍둥이처럼 생긴 두 명이 서로 으르렁대며 목을 졸라대고 팔을 비틀어댔다. 눈알을 뽑아버리겠다며 손가락을 세차게 움직여댔다. 주먹으로 때리고 몸싸움을 벌렸다.

이럴 때 리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가지이다.
가까이 놓여진 의자를 들어 모두의 머리를 향해 붕붕 휘둘렀다.
이때 경악의 표정을 지으면 가짜. 체념의 표정을 지으면 진짜이다.
『옳커니. 이쪽이 가짜로군!』
의기양양해 하며 가짜로 짐작되는 작자를 의자로 후려갈겼다.
퍽 소리를 내며 의자로 얻어맞은 자가 쓰러졌다.
『잠깐. 그런데 왜 머리에서 빨간 피가 나오는 거지?』
그야 상대를 잘못 골랐으니까.
리나는 에-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명 이거다 싶었는데 어쩌다가?

『이봐! 도대체 넌 누가 동료이고 누가 적인지...』
얻어맞은 이가 무어라 항의하려 했다. 리나는 재빨리 이를 제지했다.
『잠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잖아. 실수였어. 나에게 만회의 기회를 줘.』
하는 수 없이 다른 의자를 집어 들어다가 다른 한 명의 머리를 세차게 후려갈겼다.
기겁을 하며 또 다른 제르가디스가 쓰러졌다.
그런데 이번에도 머리에서 빨간 피가 나왔다.
결론은 하나이다. 둘 다 사람. 진짜다.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도망갔다. 그녀는 망연자실해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느 순간 암시에 걸렸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우리와 제르가디스가 누구랄 것 없이 각자의 머리통을 붙잡고 사이좋게 뒹굴고 있었다.
『환장할 일이구먼.』
정신이 확 들도록 손바닥으로 자기 뺨을 쳤다.
눈을 떠! 눈을 떠!

환각은 계속되었다.
바닥으로 곱게 물결이 일어났다. 이어 배경 그림이 변해갔다.
암시가 풀리는 건가, 아니면 걸리고 있는 건가. 어느 쪽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잔뜩 긴장해서 벽쪽으로 물러났다. 이래서는 눈으로 보이는 것 전부를 믿을 수 없었다. 저쪽에 가구처럼 보이는 저것이 어쩌면 적일 수도 있다. 아니면 카펫처럼 보이고 있는 저것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가까이 다가오기만 숨 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괴한일 수도 있고... 모든 걸 부정해야 했다. 동시에 의심해야 했다.
어디냐! 어디에 숨어 있냐! 거기냐! 아님 여기냐!
상당한 암술이었다. 리나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래서는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진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공의 관절은 피곤함 또한 모른다. 숨을 헐떡이며 아픈 다리를 질질 끄는 일은 없다. 움직임이 둔해지는 건 거꾸로 이쪽이다.
긴장감이 한계를 넘었다. 어디에선가 뚝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피곤에 지쳐 눈을 감았다.

저만치에서 끙끙거리며 몸을 추스르던 가우리가 황급히 외쳤다.
『안돼! 지금은 눈을 감으면 안돼, 리나!』
『크헉!』
등 뒤로부터 누군가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힘 줘서 목에 팔을 둘렀다. 힘이 장사였다. 몸이 허공으로 끌려 올라가는게 느껴졌다. 목이 아팠다. 숨 쉬기가 힘들었다. 손톱으로 죄다 잡아 뜯었다. 그러나 아무리 저항해도 졸린 목이 편안해지질 않았다.
눈이 튀어나오려 했다. 몸에서 공기가 필요하다고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불뚝거리면서 혈관이 움츠러들었다. 공기! 피가 거꾸로 흘렀다. 시야가 새까맣게 변해갔다.
『그래, 답답하지? 숨 쉬고 싶지? 그러니까 입을 크게 벌리시게.』
『!!』
누가 벌릴 줄 알고! 리나는 오기를 부리며 버티고 또 버텼다. 버티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힘들어서 더는 안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꼴불견이지 않은가.

『몸을 줘. 그 몸을 내놔.』
남자의 입이 벌려졌다. 투명하고도 희디 흰 무언가가 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게 보였다. 한 겨울날 물안개를 연상시키며 자욱한 그 무언가가 리나 쪽을 향해 이동했다. 끈적이는 흡판 같은 것이 뺨에 와서 붙었다. 차갑고도 뜨거운 에너지가 확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 하고 바람이 불었다. 길이 열리고 있었다.
프뉴마(*) 익스체인지.
(* 사람이 호흡하는 공기. 생명을 지탱하는 공기의 내재적 힘. 생명의 본질)

내가 미쳤냐. 받아들이나 봐라. 리나는 주먹을 쥐고 이를 악다물었다.

『이얍!』
가우리가 벽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검날이 깊게 들어갔다. 이번엔 제대로 찔렀다. 푸슉 하고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표정을 달리하고 검을 고쳐잡았다. 다시 베었다. 나무로 만든 사내의 얼굴 절반이 깎여져 날아갔다. 툭 소리와 함께 광대뼈 부위와 콧날 부분이 아래로 떨어졌다.
기회다. 제르가디스가 재빨리 주문 영창에 들어갔다.
『염색!』

염색? 갑자기 무슨 염색.
에르메키아 프레임 같은 공격 주문이 아니라... 염색?

바싹 야윈 나무토막처럼 생긴 것이 분노를 가득 담아 제르가디스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소년은 재빨리 검날을 들어 얼굴과 가슴을 방어했다. 거침 없이 두둘겨 팬다는 식으로 주먹이 연달아 날아왔다. 주춤거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입으로는 다시 주문 하나를 영창했다.

『염색!』

헤에. 염색 주문이 맞았다.
어린애가 페인트로 휘갈긴 듯한 문자가 목표물에 가서 정확히 박혔다.
그가 남긴 글자는 이러했다.

- 도라마타

뻥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튀었다. 나무 몸뚱이는 세 번을 연거푸 튕겨나가다가 구석에 처박혔다. 심장을 찢는 무시무시한 비명이 들려왔다. 동시에 나무로 만든 나사못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사내의 어깨가 힘을 잃고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이, 이럴 수가! 이 단순 무식한 놈이!』
분노의 외침이었다. 표효하는 듯한 외침이었다. 남자가 단도를 꺼내들었다. 모든 감정을 담아 제르가디스의 가슴팍을 후벼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칼날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그 정도의 힘으로는 록골렘과 합성체인 그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없다는 거다. 제르가디스는 질렸다는 투로 저주받은「쳐키의 인형」을 힘 주어 내던졌다.
나무 장작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친 괴한이 나가 떨어졌다.

『콜록... 알겠어. 저 사내가 몸에 지닌 염파 문자를 염색 주문으로 오염시킨 거군.』
빨갛게 변한 목을 어루만지며 리나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맞아. 글자 위에 글자를 겹쳐쓰면 정보는 교란되게 되어 있지. 문장 위에 다른 문장을 베껴 적으면 원래의 글은 읽어내기 어렵게 돼.』

하지만 그 많고 많은 글자 가운데 하필이면 왜 도라마타인 걸까.

째릿하는 시선을 깨달았다. 제르가디스는 묵묵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어, 어. 그러니까... 난 그저 생각나는데로 아무거나...』
『그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가 왜 하필 도라마타인 걸까? 응? 제르.』
『리나. 저걸 봐! 녀석이 도망간다.』
『어허!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말고!』
『도망간다니까.』

괴한이 이쪽을 흘끔 쳐다봤다. 그리고는 출구가 있는 쪽을 향해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간다 이거지. 가우리가 벽에 걸린 램프를 집어 야구공 던지는 폼으로 날려보냈다. 유리등이 깨지면서 등유가 퍼졌다. 화악 하고 푸른 불꽃이 번져갔다.
『불이야~!』
가우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럼 저게 불이지. 물이냐. 제르가디스는 실소했다.

피노키오 사내는 크게 당황해서 자기 몸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기름 붓고 불 지르자 속수무책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원래의 재질이 나무라는 걸 떠올리면 이건 비극이다 못해 재앙이었다. 등유가 튄 부분으로 악마 같은 불꽃이 혀를 널름대고 있었다. 파악- 하고 머리 꼭대기로 환한 빛이 기세 좋게 튀어올랐다. 남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래서는 아무리 사본의 힘을 빌린 육체라도 남아나질 않는다. 문자의 적은 불. 글자가 그슬리면 그 힘은 한순간에 소실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남자는 악을 쓰며 달리던 방향을 바꿔 리나에게로 곧장 달겨들었다.
『몸을 줘~!! 그 몸을 줘~!!』
불 붙은 손가락이 리나의 팔을 잡았다. 리나의 얼굴로 벌건 기운이 화악 번져갔다. 등골을 찌르며 매서운 뜨거움이 지나갔다.

그래도 그녀는 눈썹 하나 꿈쩍이지 않았다.
차가운 눈으로 불타는 남자를 쳐다봤다.
『안돼. 당신에겐 아무 것도 주지 않아.』

살고자 하는 건 죄가 아니다.
그렇기에 징벌하지는 않는다.
운명을 거부하고 죽지 않으려 한 죄값은 이후에 신이 알아서 물을 것이다.

리나는 매섭게 남자의 손을 찰싹 때렸다.
『나를 놔. 그리고 꺼져.』
서럽게 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 마디가 재를 날리며 타올랐다.
『이렇게 사라질 순 없어!』
리나는 묵묵히 고개만 가로저었다.
『한 번만 더 말하겠어. 나는 당식의 식량이 아니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불타는 인형은 리나의 팔을 놓았다.
그리고는 포기했다는 식으로 뒤돌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형체가 없으면서도 묘하게 존재감이 있는 불꽃의 남자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것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깊은 호숫물처럼 맨질거렸다.
화륵 소리를 내면서 천장까지 불길이 솟구쳤다.
남자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남자가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었다.
그는 계단을 천천히 걸어서 내려갔다.
낼름거리는 화염이 도마뱀이 끊어낸 꼬리처럼 그 자리에 남아 바닥의 카펫을 불살랐다.


여관 건물 3층 내부 전소. 2층 일부 손상.
다친 사람 일곱 명.
현장에 파견나온 화재 조사관은 머리부터 긁어댔다.
여관 종업원 및 그 주인은『남의 여관에서 싸움질한 마도사들은 피해액을 전부 보상하라~!!』며 확성기에 대고 분노를 외쳐댔다. 뒷 처리비는 의외로 상당했다. 더욱이 뜨내기 손님 전문인 여관 주인은 화재보험에 가입을 하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봐도 쪽박은 기정 사실인 듯 싶었다.

『좋소. 그 마도사들이라는게 누구요.』
조사관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 마도사라는 작자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만 있었다.
여자는 화상을 약간, 남자 둘은 타박상을 입었다. 가우리는 리나가 휘두른 의자에 맞아 찢어진 이마를 세바늘 꿰맸다.
화재 조사관은 모자를 벗고 병실에 들어갔다.
『실례하겠소. 당신들이 화재를 낸 범인이오?』
『어쩜, 그리 무식한 참고인 조사가 다 있노! 너무나 단도직입적이라 소름 돋는군요.』
주판알을 무섭게 튕기던 (왜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을 꼬?) 여자 마도사는 강력히 반발했다. 그리고는 경찰을 불러라, 변호사를 대령하라며 소란을 피워댔다.

하긴, 그럴 법도 해보였다. 조사관은 이미「전신에 불이 붙은 사내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는 종업원 두 명의 진술을 확보하고 있었으니까.

그곳에 수상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몸에 불이 붙은 채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남자?』
의견은 둘로 엇갈렸다.
보았다는 사람.
그리고 전혀 보지 못했다는 사람.

『흐음... 전신에 불이 붙었다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라 생각하오만.』
『나야 모르죠. 그런가요? 살기 힘드나요?』
리나는 현장에 파견나온 화재 조사관을 향해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그런 그녀는 무척이나 순진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화재 조사관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려다 흠칫해서 짐짓 헛기침만 했다.
『전신 화상은 살기 힘드오.』
『그럼 시체가 나오겠네요.』
여기서 화재 조사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없소. 시체는 전혀 없소.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시체는 없었소.』
『시체가 아니라면... 사람 비슷하게 생긴 나무토막이라도...』
『그런게 왜 나오겠소? 이상한 질문이군.』
『그냥 상상했을 뿐입니다.』
『어쨌든 사람 비슷한 나무토막도 나오지 않았소.』
마도사는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힌 듯 싶었다.
한참 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불타는 남자를 봤다는 종업원의 주장이 가짜라는 건가요?』
『그건 따로 연구를 좀 해봐야 할 문제요.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 발자국 모양으로 카펫이 눌어붙은 걸 찾아냈거든요. 그것도 그 남자는 뛰어서 가지 않았소. 어처구니 없게스리 불타는 장화를 신고 뚜벅뚜벅 걸어서 나갔소. 뜨거움이라는 걸 아예 모르는 것처럼 말이오. 그 무엇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자국이지요. 이 바닥에서 굴러다닌지 이제 만 4년인데 이런 건 처음 보오. 』
하여 사건은 X파일의 폭스 멀더가 매우 좋아할 법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싸운 흔적은 있는데 싸운 사람은 없었다.
몸에 불 붙은 사람이 있는데 시체가 나오지 않았다.

여자 마도사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창문가로 시선을 던졌다.
『당신은 엉뚱한 걸 찾으려 하고 있어요. 달은 매일 떠오르죠. 하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조사관은 연필을 들고 더 해보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녀는 화상 자국이 아프다며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화재는 원인불명의 불씨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잠정 결론지어졌다. 누군가 세탁한 양말을 난로가에 걸어두고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되었다.

그 후로부터 제로스가 겉뚜껑으로「도라마타」라고 낙서가 적힌 사본을 파기한 것은 이 일이 있고나서 제법 시일이 지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