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박차고 들어와 황야의 무법자인양 실내를 휘저었다. 눈자위 밑으로 검은 달무리가 진 세 사람이 장중한 레퀴엠을 배경삼아 테이블에 앉았다. 이어 방금 전에 부모님의 원수를 일도에 참살하고 돌아왔다는 투로 이렇게 말한다.
『진한 커피 곱배기.』
『쓴 커피 만땅.』
『독한 커피 가득.』
식당 주인은 진절머리를 내며 들고 있던 유리 주전자를 통째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리필은 무료다.

생각해보니 새벽부터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질 못했다. 필연적으로 피부가 까칠했다. 고양이처럼 물을 묻혀 세수는 했으나 졸음이 금붕어 똥처럼 눈꺼풀에 매달렸다. 까치집으로 변한 머리카락, 비참하리만치 하얗게 변한 혀. 입술도 바짝 말랐다. 그나마 겉가죽으로 보아 제일 말장해 보인 제르가디스도 지나치게 멍한 표정인 것이 매우 수상쩍었다. 눈 뜨고 졸고 있다? 가능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도 주인장은 손님의 정체와 외모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원래 이 바닥이라는 건 다 그렇고 그렇지 않던가. 젊은 여자가 하나, 젊은 남자가 둘. 셋은 밤새도록 싸운 듯한 분위기로 머리를 긁어대고 있다. 하여 삼각관계를 다룬 통렬한 연속극 대본이 절로 쓰여진다. 주인장은 가볍게 콧김을 내뿜었다. 누가 오입질 당한 남편이고, 누가 애인인지는 관심 없다. 알게 뭐냐. 어차피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 남의 사생활엔 관심 없다. 매출만 팍팍 올려라.
식당 주인이 앞치마에 연필을 꽂고 받아쓰기를 준비했다.
그럼 주문에 들어가자.
『뭘 드릴까요.』
이들 일행의 식사 스타일에 대해 사전 학습을 끝낸 주인장은 아예 두툼한 전표책을 들고 나왔다. 그럼 본격적으로 들어가볼까. 갗 구워낸 치즈롤 5인분, 오믈렛 4인분에 베이컨을 넣은 갖은 야채 무침이 2인분, 버섯이 들어간 수프가 3인분에 생강 절임 돼지고기 6인분, 버터 감자구이가 8인분에 마카로니 소스 특제 그라탕이 3인분, 엄마 아빠 생선튀김 모듬접시가 2인분... 날아가듯 받아적었다.
예보관은 말한다. 오늘도 주방 화덕에선 용암이 펄펄 끓겠다.

리나가 턱에 손을 괴고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해물 잡탕 찌개...』
『몇인분?』
『그건 2인분만. 입가심으로 할 거니까 그건 제일 나중에 부탁해요.』
『오늘은 주문이 적은 편이군요.』
『입 맛이 없어서요.』

입 맛이 없댄다.
식당 주인은 안 믿는 눈치였다. 그래도 혓바닥에 모래가 달라붙었다고 주장하는 리나는 독약이라도 들어간 것 같은 커피를 반사적으로 들이켰다. 무척이나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흐르자 조금은 정신이 드는 듯하다. 그래봤자 눈꺼풀은 여전히 까끌거렸지만... 병든 닭처럼 고개를 조아리는 짓은 하지 않을 터이니 그 정도로 위안을 얻도록 하자.
새카만 빛의 액체를 다시 컵에 따라부었다.
마시자. 깊은 밤의 악몽처럼 뱃속에서 거칠게 부글거릴 내 청춘아.
『제길, 수면부족은 피부미용에 나쁜데.』
리나는 모두의 컵에 커피를 콸콸 들이부으며 -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 터져나오려는 하품을 억지로 참았다.
가우리가 딱 소리를 내며 오이를 분질러뜨렸다.
제르가디스는 잠자코 버터 바른 감자만 씹어댔다.

『도대체가 황당하기 이를데 없다니까. 이 마당에 전생(轉生)이라니.』

전생.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남을 일컫는다.

연신 두 눈을 꿈뻑거리던 제르가디스가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신이나 고위 악마가 인간으로 육화한다는 강생(降生) 이야긴 들어봤다. 그런데 인간이 다른 인간의 몸으로 전생할 수 있던가.』
『난들 아나.』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내 생각으로는 그렇겐 안될 걸, 제르.』
의외였다. 저 문장에는「아마」, 내지는「어쩌면」이라는 수식어가 빠져있다. 커피잔을 들어올리려던 제르가디스의 동작이 딱 멈췄다.
길 가다 무심코 던진 조약돌에 불쌍한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다 조약돌을 던지면 운명의 개구리는 죽게끔 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 차이는 대단히 크다.

『불가능하다?』
『응. 한계 이론에 의하자면.』
그녀는 힘들어 죽겠다는 투로 눈꺼풀을 비볐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한계가 있다.
비유를 해볼까.
가우리에게 하루 말미를 주고 카더프만의「강마 전쟁사」를 몽땅 외우게 하자.
제르가디스는 콜라에서 김 빠지는 듯한 픽~ 소리부터 냈다.
『안돼, 안돼. 불가능해. 당연히 못 외우지. 죽인다고 협박해도 못할 걸.』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리체프의 짧은 동요「엄마는 아빠를 사랑해」노래를 외우라고 시키면?』
소년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아무리 해파리라고 해도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첫 소절, 엄마는 아빠를 사랑해. 두 번째 소절, 아빠도 엄마를 사랑해. 세 번째 소절, 엄마 좋아 아빠 좋아...』
접시 위의 계란 후라이에 소금을 치다 말고 리나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단순한 가락의 도돌이표로 이루어진 리체프의 저 노래는 일명 닭살가다. 엄마 좋아, 아빠 좋아. 그걸 따라 부르면 점점 더 기분이 나빠진다. 바보스런 텔레토비 연애가 같아서 소름 돋는다.
리나는 그만하라는 시늉으로 제르가디스의 커피잔 속으로 소금을 툭툭 쳐 넣었다.
짠 맛으로 죽어버리라지.
『우왓!』
『여하간 그게 한계 이론이지. 사람이 내장이 터질 것을 각오하고 음식을 쉬지 않고 먹어댈 수 있는 량은? 게걸스레 먹고 배가 터져 죽은 사람을 해부해 봤더니 약 8.7㎏정도의 음식이 위에 들어가 있었대. 대략적으로 5,000리터 정도면 위는 터져버려. 그렇다면 숨을 안쉬고 버티는 시간은? 훈련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의 뇌는 산소공급이 중단된지 약 8분 정도 지나면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어. 잠을 안자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개인차가 있지만 사흘 정도... 이런 식으로 사람은 철조망으로 만들어진 넓은 울타리 안에서만 살 수 있어.』
혀를 달래고저 당근 하나를 들어 입어 넣고 씹었다. 달고 시원한 물이 개운했다.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자! 그렇다면 왜 전생이 불가능할까. 간단해. 1분 이내에 온 몸의 피를 다른 사람의 피로 모조리 갈아버린다고 상상을 해봐. 펌프질에 못이겨 혈관이 터질 걸. 마찬가지야. 사람의 혼과 혼을 교체하는데 소모되는 에너지라는 건 사람의 몸이 소화해낼 정도가 아니야. 강제로 가우리의 머리에 카더프만의「강마 전쟁사」를 입력시킨다고 상상을 해봐. 머리가 돌겠지? 발광하겠지? 그런 고차원 에너지를 호락호락 받아들였다간 후환이 두려워져.』
미치거나, 또는 죽거나.
그녀는 희극적으로 팔을 벌려 보였다.
『따라서 고차원 에너지 집합체가 아닌 껌 같은 인간에게 있어 전생은 불가능.』
속물에겐 속물의 팬티가 어울린다는 거다. 다이아몬드 팬티는 비너스에게나 바쳐라.

그러나 여기서「절대로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마법사들의 세계는 어둡고 지저분하다. 그 속에서 무슨 판이 벌어지는지는 상상이 곤란하다. 금기와 터부를 극복한다. 저 너머의 진리를 해부한다. 먹는다. 괴물이 된다. 마법사의 욕망은 억겹의 지옥만큼은 된다. 어쩌면 불가능의 선을 넘은 마법사가 있을 수도 있다.

리나는 딱 소리를 내며 씩씩하게 생선 튀김을 포크로 찍었다. 그녀가 쓸데없이 기합을 보이는 까닭은 경쟁자인 가우리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쉽게 말해 침 발라 놓겠다는 얘기다. 레이디 퍼스트 정신에 호소하느니 이편이 더 효과적이다. 나름대로 눈독을 들이고 있던 가우리가 그 기백에 눌려 움찔하며 물러났다.

『그렇다면 그 늙은이는 전생을 성공시켰던 걸까. 어떻게 생각해, 리나.』
『성공 여부는 잘 모르겠다만 적어도 시도는 했나 보지.』
물 마시듯 또 한 모금의 커피로 입술을 축였다.
『아니면 새롭게 시도를 하려는 건지도. 아하하... 그 망할 영감탱이. 내 몸으로 신체를 갈아치우겠다 이건가.』

불쾌감으로 인해 속이 더부룩해졌다.
지금껏 별 소동을 다 겪어봤다고 자부한다.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옛 두목의 원수를 갚겠다고 덤벼든 녀석들도 부지기수다. 가지고 있는 보물을 내놓는게 신상에 좋을 거라며 넌지시 독약에 쩔은 양말(왜 하필 양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을 소포로 보내온 자도 있다. 더러는 흥정하자며 입던 팬티를 벗어보인 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몸 내놔!」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 이해는 가. 내가 워낙에 미소녀인데다가, 허리도 잘록하고... 눈독을 들일 법도 하지. 이 완벽한 엉덩이, 이 허벅지.
『가슴은 납작하잖아.』
『시끄럿! 가우리.』

챙강거리며 준 전쟁 수준의 난리를 치는 포크를 피해 -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 제르가디스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친구가... 렛셔 데몬 어쩌고라고 말을 하던데.』
『아아. 나도 들었어. 렛셔 데몬 만들기. 일명 저급령 혼 씌우기.』
수프를 찍어바른 버터롤을 입에 넣었다. 두어번 씹었더니 봄바람에 눈사람 녹듯 없어졌다.
그렇다면 새롭게 봄바람은 불지어다. 허겁지겁 또다른 빵을 집어 다시 입에 넣었다.
『흐음. 혼 씌우기라.』
리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테이블을 주욱 흝었다.
『렛셔 데몬과 전생이 그런데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야.』
대답은 엉뚱하게도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상관 있지. 간단허이. 넓게 봐서 이론상 비슷하는 걸세.』

만년빙처럼 꽝꽝 얼어붙었다.
언제부터였던 걸까. 제3의 인물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한적스럽게 버터빵에 단풍나무 시럽을 발라대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깨달았나 보다. 그가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들 그러나? 어서 식사들 하시게.』
그리고는 시럽을 꼼꼼하게 바른 빵을 가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도깨비가 나타나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 같다. 가우리는 질겁하고 뒤로 물러났다.
『누구야, 당신!』
『이봐. 청년. 난 나이가 많아. 그러니까 존댓말을 사용하게.』
『누구세요, 할아버지!』
『바로 그거야. 그렇게 나와야지.』
지금 개그하나. 리나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이봐. 지금 댁에게 존댓말을 하느냐 반말을 하느냐 따위는 문제가 아니잖아!』

확실히 그렇다.
지금 제일 먼저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쥐도 새도 모르게」,「쿼터엘프도 키메라도 모르게」테이블에 합석한 저 침입자에 대한 것일 것이다. 리나는 표정을 달리하고 상대를 매섭게 노려봤다. 나름대로 반사신경 뛰어나고,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라고 자부해왔다. 소매치기가 준비운동 한답시고 손가락만 까딱거려도「저 앞에 경찰 지나간다!」라고 고함지르던 그녀다. 지금처럼 코앞으로 사람이 다가왔는데도 그걸 깨닫지 못한 경우는 없었다.
이런 스토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라면...
설마, 결계?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만든 결계에 별안간 갇혀버렸다는 위화감은 들지 않았다. 다소 짜증에 겨워 인상을 찡그린 웨이츄리스가 메뉴판을 들고 스쳐 지나갔다. 쟁반을 든 종업원이「예! 금방 갑니다!」하고 소리를 질렀다. 저 앞에서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여자가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남편의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힘주느라 벌개진 아이의 표정을 봐선 기저귀에 굵은 똥을 쌌다. 전반적으로 시끌벅적한... 리나는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휙 돌렸다.
이렇게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가득찬 결계가 있던가.
답은 하나다.
결계 같은 건 없다.

『당신, 무슨 요술이라도 부리는 거야?』
『이보게. 요술이라니. 난 사기나 치는 마술사가 아닐세.』
상대는 쯧쯧 하고 노골적으로 이죽거렸다.

목소리로만 보아선 50대 후반의 남성.
그러나 이쪽에선 얼굴이 잘 안 보이고 있다. 불쾌한 느낌을 자아내는 쥐색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데다 고개를 푹 숙인 탓이다. 리나는 더럭 겁이 났다. 고개를 들었더니만 뻥 뚫린 구멍만 있다거나, 아니면 눈구멍이 푹 파묻힌 해골이 나타난다거나... 이 사내는 점성술사들이 장사에 애용하는「죽음」의 카드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등장한 쌍두의 검은 마차. 하늘에는 까마귀, 반쯤은 박살나 스러져가는 성벽, 그리고 눈가림을 한 야윈 말. 단 한번의 채찍실 소리가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를 가른다. 영광의 관을 땅바닥에 내려놓은 현자는 야윈 손을 들어 구원의 이름 없음을 저주한다.
리나는 다시금 몸서리쳤다. 머릿속으로 비루먹은 검은 말들이 그려진 죽음의 카드 이미지가 뱅글뱅글 춤을 추었다.

하지만 그 불쾌하고도 오싹한 느낌은 오로지 리나 일행에게만 해당되는 거였나 보다.
갓난아이를 안은 여자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서 오물 묻은 기저귀를 처리하려는 것이리라.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이가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과 모자를 챙겨들고 있었다. 그 건너편으로는「소동은 그만 피우고 빨리 주문이나 하라」며 빨간 머리의 여자 종업원 한 명이 껌을 짝짝 씹었다. 그런 그녀를 스치듯 해서 식당 주인이 커피 주전자를 들고 테이블을 한바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수상한 사람?
그런게 있긴 있었어?
해리포터에 나오는 디멘터처럼 생긴 사람?
난 잘 모르겠는데.
아무도 그들을 보려 하지 않았다.

짐작가는게 있었던 것 같다. 제르가디스가 턱을 괴었다.
『알겠어. 모두에게 암시를 걸은 것 같군.』
『아하. 정답일세. 그나저나 여보게? 청년. 난 나이가 많으니 존댓말을...』
제르가디스 대신 역정을 부린 사람은 리나 쪽이었다.
『칵! 그깟 나이 자랑을 하려고 나타난 거라면 주소를 잘못 골랐어. 존댓말은 무슨!』
『하여간 요즘 젊은이들이라니. 노인을 경시하면 못 써.』
『존경받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노인답게 행동해야지. 한밤중에 아녀자 방을 습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다음날 식탁에까지 나타났으면 이미 존경은 물 건너간 거야. 상식이라는게 있잖아! 저녁에 강도짓을 했으면 좀 쉬었다 할 것이지 아침에 또 나타나 도둑질까지 하려는 건 지나치지 않아? 악당이 다시 나타나리라는 예감이 적중해서 사흘밤이 지나자 다시금 수상한 바람이 불었다, 이런 식으로 내용을 진행시켜야지! 노인이라면 노인답게 행동해. 창문으로 도망친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정말 이러는 거야. 허락도 없이 왜 우리랑 합석하는 건데?! 나, 무지 기분 상했어!』
『먼저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선 할 말이 없군. 그거 미안허이. 그럼 부탁하겠네. 같이 앉아도 되겠는가.』
『이미 앉았잖아! 당신!』
『음. 분명 서있는 건 아니지. 여하간 허락했다고 생각하겠네.』
『크악! 진짜 제멋대로인 사람이군.』
사내는 리나의 비난을 쉽게 인정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곧잘 하더군. 제멋대로라고. 부정하진 않겠네. 성격이 원래 그런 걸 어쩌라고. 음, 그건 그렇고... 처자. 이 노인네가 차에 설탕을 좀 넣어줄까?』

정말 자기 멋대로였다.
리나는 분노에 가득차 이를 부드득 갈아댔다.
『그 전에 두건이나 벗이시지. 망할 영감탱이. 식탁에서의 예절이 아니잖아.』
『아, 예절은 아니지. 하지만 자네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
『뭘 놀라게 한다는 거야. 정수리 꼭대기로 식인 꽃이라도 피었대?』
『꽃은 피지 않았지만 사정이 이렇다보니 말일세.』
안 놀라겠다는데야.
남자는 홀가분하다며 쓰고 있던 망토의 깃을 내렸다.
『확실히 해두겠네. 벗으라고 말한 사람은 바로 자네야.』

『...』
후회했다.
그냥 그대로 있으라고 할 것을.
리나는 포크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식욕은 이미 흔적도 없이 달아났다.
가우리나 제르가디스도 상황은 엇비슷했던 것 같다. 절반 정도는 입에 들어간 고기 완자를 그대로 뱉어내는 걸로 봐서는 배고픔이니 하는 단어와는 담 쌓은게 분명했다.
각오는 했었다. 그러나 역시 충격적인 건 충격적이었다.

눈과 코와 입은 있었다. 하지만 근육과 피부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다. 엷게 미소를 짓고 있는 등신대 사이즈의 옷걸이 인형, 성인 남자의 목소리를 내는 우아한 여자 인형이라. 기가 막혔다. 옷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였다. 가게 셔터문 열고 눈에 보이는 거 아무거나 꺼내온 것 같았다. 리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상대방을 아래서 위로 올려다 보았다. 짐작했던바 그대로 콧구멍이 없었다. 코는 있지만 콧구멍은 안 뚫어놨다. 미완의 미라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내버려둔 걸까. 하긴, 마네킹에 콧구멍을 리얼하게 만들어 놓으면 그게 더 징그럽긴 하다. 눈 부위는 가느다란 붓으로 모양을 그려넣었다. 눈썹의 길이는 약 2㎝, 눈동자는 옅은 퍼플 그레이였다. 머리카락은 없었다. 그는 가발을 쓰고 있지 않았다.

『자자, 여러분. 그만하고 날 다시 보시게나.』
남자가 나무공이의 딱 소리를 냈다. 손가락을 튕긴 건 아니었지만 호두까기 인형이 껍질을 깨부수는 그런 소리가 났다.
순간 그의 얼굴이 변했다. 리나는 손등으로 눈을 부볐다. 한순간 잘못 봤나 싶었다. 하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이제 그는 뒷머리로 차갑게 서리가 내린 50대 후반 남자로 변해 있었다. 중후하고 점잖은 외모에 약간 말랐다 싶은 체격이었다.

『에, 에?』
『별 거 아닐세. 잠시 그대들의 시각 정보를 교란했을 뿐이야.』
『오호라. 암시.』
『맞네. 바로 그게 내 장기지. 암시 걸기. 하지만 걱정 말게. 오래지 않아 곧 풀릴걸세. 그것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거기다 자네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암시가 잘 걸리지 않는 타입이더군. 특히 아가씨... 어젯밤엔 배로 공들여 고생했는데도 맥 없이 풀려버려 이쪽도 당황했었어.』
『아. 그랬군.』
그러니까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보고 손을 결박당한 까닭이 있었구먼.
리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이 방엔 나 이외엔 아무도 없다, 나는 지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난 지금 움직일 수 없다」는 내용으로 암시에 걸렸다면 말 그대로 꼼짝 못했을 거다. 마취약에 취한 개구리나 마찬가지다. 집게로 혀를 길게 잡아빼도 모른다. 개구리는 그저 죽어있을 뿐이다. 리나의 경우 도중에 정신을 차리고 발버둥을 쳤다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다.

기분이 나빠졌다. 신경질적으로 포크를 흔들어 보였다.
『그래서 뭐야, 할아범. 암시까지 걸어가면서 남의 침실에 침입한 이유라는 건.』
『아. 그거? 자네 몸이 필요했거든.』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남자가 대뜸 말했다. 흡사 50원짜리 뽑기 놀이에 대해 말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되려 화가 안 났다.
『네, 네. 내 몸이 필요하시다고요.』
화가 안 났기 때문에 쥐고 있던 포크로 상대방의 목 한가운데를 찌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포크를 식탁에 콱 찍어박았을 뿐이었다. 포크는 쾅 소리를 내며 약 1㎝ 깊이로 테이블에 박혔다.
『뭐에다 써먹으시려고? 남의 몸뚱이를?』
그녀의 허탈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뭐에다 써먹긴. 새 몸으로 내가 쓰려고 그러는 거지.』
『아항, 그러니까 전생을 하시겠다?』
『이해가 빨라서 정말 좋군. 바로 그걸세. 그러니까 말이지... 주시게.』
『뭘?』
『자네 몸.』
『지금 당장?』
『당장 주면 나야 기쁘지. 그럼 결정된 거지? 잘 됐군. 얘기가 잘 끝나서.』
『이봐, 이봐!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거예요?!』
『농담은 무슨. 이보게. 결정한 거 아니었어?』
『이 영감탱이가 정말!』

결국은 버럭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로 남의 몸을 내놔라 마라 하는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사람의 몸이 떡이나 감처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는 물품도 아니거니와, 설상 그렇게 하자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뭘 어드라케 할 건데?
베니스의 재판장은 말한다. 피는 안된다. 살만 골라서 정확히 1파운드만 베어가라.
비슷하지 않을까. 이런 경우엔 준다고 허락을 해도 속수무책이다. 인간에겐 전생은 불가능하다. 몸을 준다고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리나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넘어갔다.

『괜찮네. 나에겐 가능한 이야기일세. 그러니 걱정 말고 몸만 주시게.』
『메야?!』
『이그벳타의 제2북방 마도서, 일명「사본」이라는게 내 손안에 있거든.』

사본!
리나와 제르가디스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사본」이라는게 클레어 바이블의 사본이라는 걸 모르는 그들이 아니다. 특히 제르가디스.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었다는 식이 되었다. 쥐고 있던 물컵이 옆으로 기울어져 담겨있던 액체가 바닥으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어도 깨닫지 못했다. 그저 눈을 커다랗게 끈 채 방금 자기 어머니가 사고로 목이 잘린 걸 목격했다는 식으로 굴고 있었다.

『사, 사, 사, 사, 사...』
『숨 쉬고 천천히 말하게. 사본일세.』
『그래. 사본. 당신이 사본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남자는 당당히 미소를 지어가며 자기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응. 여기에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고이 들어 있다네.』

태어날 적부터 동안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늘 10년은 젊어보인다고, 아무래도 나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사는 것 같다고 말을 건네곤 했다. 언제까지고 청춘이었다. 스스로 거울을 봐도 빈 말은 아닌 듯 싶었다. 간혹가다 잔주름이 눈에 거슬리기도 했었지만 나이 사십이 되어가도록 젊은 여자들이 추파를 던지곤 했었으니까. 그래서 늘 자신만만 했다. 생은 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렇다고 천년 만년 살아갈 수 있었던 것 아니었다. 늙음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천형(天刑)이었다. 어느날 정신을 차려보니 허벅지가 말라 있었다. 여자들이 그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며 손가락질을 하였다. 보기 싫게 허리가 굽어갔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쇠었고, 입가에 주름이 자글거렸다. 언제까지고 빛날 것 같았던 인생이 회색으로 변해갔다. 몸이 늘 아팠고 기운이 없었다. 균형을 잡지 못해 꼴사납게 길 한가운데서 넘어진 적도 있었다. 엉겹결에 바닥을 손으로 짚었는데 손목이 부러졌댄다. 고통에 겨워 의사를 찾아갔더니「영감님, 잡수시는 나이엔 대책 없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부러진 뼈는 다시는 붙지 않을 거라 하였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늙는게 싫었다.
다시 젊어질 수만 있다면.

어떤 책에서 젊은 처녀의 피를 마셔보라고 했다. 기대에 젖어 세 명의 처녀를 잡아 그 피를 마셨다. 웬 걸. 젊어지기는커녕 소화불량에만 걸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철분이 가득 들어간 혈액은 위에선 소화가 잘 안되었다. 요컨대 피라는 건 흡혈귀에게나 반가운 거였다. 인간에겐 그다지 유용한 먹거리가 아니란다. 나중에 검붉게 굳은 피를 한 바가지나 다시 토해냈다. 흡혈귀가 아닌 이상 피를 먹는다는 건 무척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참에 아예 흡혈귀가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 했던가. 결심도 했다. 부랴부랴 짐을 꾸려 흡혈귀의 고향이라는 트랜실바니아로 여행을 떠났다. 재산을 정리해서 황금 130㎏을 궤짝에 실었다. 자기를 흡혈귀로 만들어준다면 거두절미하고 소유한 황금을 모두 건네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트랜실바니아에 도착하고 보니 흡혈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 봤더니만 반 헬싱이라는 교수가 보이는 족족 잡아다가 심장에 말뚝을 박아버렸댄다.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역정을 내며 그 망할 놈의 헬싱 교수를 교수형에 처해버리겠다며 날뛰었다. 그러나 마땅한 죄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대 사회에선 흡혈귀를 죽인다고 살인죄가 성립하지는 않으니까.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146세.
지팡이에 의지하고도 걷기가 힘들었다. 가족들이 조만간 그가 묻힐 장지를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제 인생은 회색도 아닌 시체 썩은 검정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시 젊어질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아, 틀려. 영혼은 안 팔았어. 대신 손자 손녀에 며느리와 사위까지를 포함한 가족 전부를 팔았지.』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깊은 푸른색의 눈동자를 가진 흥미로운 청년이 찾아왔다. 성격이 개구쟁이일 것처럼 생긴 청년은 허리를 살짝 굽히고는 자기를「은둔하는 철학자」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한가지 흥미로운 제안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책 한권과 인간 56명을 맞바꾸자는 거였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드래곤들도 쉽게 구해다 보기 힘들죠.」
그는 머리가 복잡해서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뭐요. 책 한권과 가족과 대신하자고?」
「그렇습니다.」
「말도 안돼. 일가족 56명을 뭐에다 써먹겠다고? 노라도 젓겠다는 거요?」
「아아, 각하. 그건 시시콜콜 묻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청년은 가족들의 미래에 대해선 묻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귀띔하길, 아무래도 좋은 일은 당하지 않을 거라고 비밀스레 웃었다. 

그래도 나와 거래하시겠습니까.
이 책엔 당신이 찾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이그벳타의 제2북방 마도서는 이제 당신의 것이 됩니다.

그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아기를 포함한 가족 전부를 데려가라고 말했다.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56명의 일가족은 그렇게 해서 영원히 사라졌다.

『영혼을 안 팔긴 뭘 안 팔아. 충분히 팔았잖아!』
리나는 이를 갈아댔다. 이 작자, 완전히 미쳤다.

『왜?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네. 후회는 하지 않아. 새로운 나... 젊음과 영생의 가능성이 바로 옆에 있었네. 내가 왜 그걸 마다해야 할까?』

맘대로 하셔.
리나는 바닥에 대고 침을 퉤- 하고 뱉었다.
귀신은 물러가라.

『아아... 사본이었단 말이지.』
여전히 넋이 나간 제르가디스가 웅얼거렸다. 그는 극대 혼란 상태였다.
어느 날 수상쩍은 장사치가 나타난다. 장사치는 레몬쥬스와 사과쥬스의 혼합물에서 사과쥬스만 완벽하게 뽑아내는 내용은 알려주겠다고 한다.
장사치는 말한다. 그 대신 당신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난폭한 여자의 목을 잘라다가... 맙소사.
절망에 가득차 머리를 쥐어뜯었다. 목이 컬컬해졌다.

『사과쥬스 추출법이라 이거지.』
『도대체 뭔 소리랴. 아닐세, 청년. 그건 렛셔 데몬 만들기 내용이었다니까.』
『렛셔 데몬... 만들기...?』
『말 그대로일세. 하급동물에게 하급정령을 덧씌워 괴물을 만드는 방법.』

그게 도움이 될까.
모르는 소리. 당연히 도움이 된다.
레시피의 기본만 알고 있으면 응용은 껌이다. 원리만 제대로 터득한다면 상급령을 상급 생명체에도 씌울 수 있다.

『얼씨구? 한계 이론은 어쩌고.』
눈동자를 데굴 굴리는 리나를 향해 노인이 응응 소리를 냈다.
『바로 그게 문제이긴 했지.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당의라는 걸 아는가. 아주 쓴 약을 설탕의 옷을 입혀 먹기 쉽게 만드는 걸세. 이해가 가나.』
『대충. 마법으로 영혼을 코팅하여 육체에 천천히 흡수되게 한다?』
『처자는 머리가 무우~지 좋군. 바로 그걸세.』
『그래도 이론대로 쉬워보이진 않는데.』
『그렇긴 하지. 어마어마한 마력 수용량을 가진 육체가 필요하니까. 정말로 어마어마한 마력 말일세. 마족에 버금하는 그런 마력 말이야.』

적당한 대상을 물색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법사들이 길거리에서 쉽게 밟히는 흔한 종족이던가. 눈을 씻고 쳐다봐도 안 보였다. 게다가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양초는 닳고 닳아 금방에라도 꺼질 기색이었다. 조건에 맞는 육체를 찾다가는 금새 게임 오버가 될 판국이었다. 그는 초조해졌다. 사신이 안방 손잡이를 잡고 막 돌리려고 하고 있었다.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방법이「건너뛰기」였다.

『사람을 구할 수 없으니 어쩌겠나. 대신 의상실에 가서 등신대의 마네킨 하나를 훔쳐왔지. 그리고「사본」의 내용을 염파 문자로 새겨 넣었어. 임시방편이었지, 임시방편. 그래도 썩 나쁘진 않았어. 때가 되면 옮겨가겠지만 아직은 유용하게 잘 써먹고 있네. 그게 현재의 나야.』
남자는 좋아라 웃었다.
『하지만 이제 이 지긋지긋한 가짜 몸뚱이와도 안녕이야. 이제 그 적당한 육체를 찾아냈으니 다시 옮겨가기만 하면 그만이지. 어렵게 찾아낸 몸이 여자라는 점이 마음에 다소 걸리지만... 뭐, 이런 몸보다는 훌륭하겠지. 자! 그럼 아가씨? 줄거지?』

이쯤되면 할 말도 하지 못한다.
제르가디스는 어이가 없어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어쩜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투로 말할 수 있는 거냐.

리나는 진절머리를 내며 테이블을 쾅쾅 두둘겼다.
『당신에게 몸을 내주면 나는! 나는 어쩌고?!』
『그야 혼핵만 남겠군. 아무래도 다소의 불편함은 있겠지?』
『혼핵만 남아? 그거, 유령이 된다는 거잖아!』
『괜찮아. 유령이 된다는 건 무척 색다른 경험일게야.』
『이봐. 그런 걸 가지고 유원지에 놀러간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거야?! 댁은 괜찮을지 몰라도 난 하나도 괜찮지 않아.』
『매년 기억하고 향불을 올려줄게. 됐지?』
『되긴 뭐가! 내가 그런 걸로 만족할 수 있을 거 같나!!』
뭐니뭐니해도 이쪽에서 순순히 그 요구에 응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괘씸했다. 리나는 불 뿜는 눈동자로 남자를 노려봤다. 도대체 그 자신만만함의 근거는 뭐란 말이냐.

근거는 있었다.
나무공이 찧는 말간 빛깔의 딱 소리가 다시 났다.
그러자 가우리가 돌연 즐거운 표정으로 변해 감자 하나를 입에 넣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즐거운 식사 시간. 리나가 있고 제르가디스도 있다. 모두와 같이 있는 이 시간이 참 좋다. 더 이상 바랄게 없다며 소세지 조각을 집어 한 입에 꿀꺽 삼켰다. 맛이 좋았나 보다. 얼굴 하나 가득 미소가 번졌다.
『얘들아, 뭐하고 있냐.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나 혼자 다 먹어버린다~♡』
분명하다. 제3의 사나이에 대해 완벽하게 망각하고 있다.
『정신 차려! 해파리!』
호되게 뒷통수를 쳤다.
『아이쿠!』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가우리는 화들짝 놀라면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거야말로 완벽한 협박이었다.
리나는 이를 갈아댔고 남자는 재수 없게 웃었다.
한 순간이긴 하다. 그러나 그 1분 1초의 틈이 저 남자에겐 큰 기회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어제처럼 모두가 합심해서 덤벼들면 항복하고 도망가기에 바쁘겠지만 화장실에 갈 적에도 모두가 손잡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그 틈을 노릴 것이고, 그건 분명 치명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 바로 코앞으로 누가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느긋하게 밥이나 먹어대고 있으면 뒤에서 도끼를 휘갈겨도 할 말이 없다. 암시가 풀린 뒤에 자기 목이 몸뚱아리에서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는 이야긴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

『당신 제안을 거절하면 동료들이 위험해질 거라는 건가요.』
『바로 그거일세.』

언젠가 빨간 옷만 즐겨 입던 괘씸한 작자가 마을 주민들의 목숨과 현자의 돌을 놓고 자기와 타협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리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때와 비교하자면 이 작자의 협박 내용은 그나마 스케일이 작은 편이었다.
하여간 노인네들이라니.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다니까.
그녀는 저주의 문장을 중얼거리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 마당에 성격상 남의 일 따위 알게 뭐냐는 식으로 도망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당장 결정하긴 힘든 문제잖수. 생각할 시간 정도는 줘요.』
『그건 그렇군. 그렇게 하겠네.』
『이봐요. 고개만 끄덕이곤 점심시간에 불쑥 나타나지는 말아요.』
『24시간이면 충분하겠지?』
『바로 그거예요.』
『좋았어. 그럼 일단 난 물러나도록 하겠네.』

사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후드를 깊숙이 눌러썼다. 유령처럼 조용한 동작이었다.

『잠깐!』
리나는 뒤돌아 가려고 하는 남자를 도중에 불러세웠다.
『무슨?』
어디 두고 보자, 내지는 나가 뒈져라 식의 욕설을 퍼붓기라도 할 것인가?
아니면 검을 뽑아들고 덤빌 것인가.
남자는 비웃음을 담아 기다렸다.

『그게 아니라 어젯밤 소동으로 화병이 깨졌잖아. 우리가 물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당신이 변상하라고.』
컥 소리를 내며 모두가 뒤로 넘어갔다.
과연 그래야 리나 인버스 답지.
그녀는 꼼꼼하게 주판을 튕긴 다음에 손가락 다섯을 들어보였다. 내일 목숨을 잃을지언정 오늘의 손해는 어떻게 해서든 해결하고 본다.
『마, 마, 말도 안돼! 화병 하나가 뭐가 그리 비싸.』
『원가는 두 푼이고 나머지 셋은 위자료야.』
받겠다는데야.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갑을 열어 은화 다섯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