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품에 넣고 다니는 수첩을 꺼내들고 낱장을 소리내어 넘겼다. 깨알같은 글자들 속에서 파란 눈동자가 어지러이 헤엄을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던 바를 찾아 페이지를 넘기는 동작이 멈췄다.

물체에는 어떤 형태로든 사념이라는게 남는 법. 유리컵에 지문이 남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만 기억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다. 정보는 어떤 형태로도 남는다. 입고 있던 옷에 체취가 스며드는 것처럼 일상은 형식을 달리하여 저장된다.
100만분의 1이라는 기적적인 확률로 태어나는 리딩 능력자들은 책상 모서리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지난 밤에 무슨 일이 서재에서 벌어졌는지를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까닭은 각각의 사념이 물건에 남기 때문이다.
탐색견이 냄새를 맡아가며 범인의 꽁무니를 따라가는 것을 상상해주기 바란다. 개는 인간이 맡지 못하는 냄새를 맡는다. 마찬가지로 리딩 능력자들은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하는 사물 속의 기억을 특유의 재능으로 해독한다. 수목학자가 나무의 절단면을 보고「10년 전에 이 근처로 대단한 가뭄이 들었습니다」하고 읊조리는 식이다.
유명한 리딩 능력자로 에지나 칼리워라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손수건, 사진, 반지, 신발 등등의 것으로 상당히 많은 걸 투시해내는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칼리워는 사람의 기억력과 물건이 갖는 기억력은 거의 동등하다고까지 주장한다. 심지어 시간이 흐를수록 정보가 모호해지는 것까지도 닮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칼리워는 쓰레기장에 버려진 물건이거나 오래된 골동품, 공공장소에 놓인 물건을 리딩하는 걸 싫어했다. 이런 것의 기억들은 조잡하고, 흐트러져 있고, 왜곡되었으며, 망가져 있었다. 리딩에 완벽한 물건들은 결혼 반지처럼 소중하고 의미있는 개인적 물품이었다. 그것들은 거짓 없는 인생 기록장치나 마찬가지였다.

이쯤해서 제르가디스는 수첩에서 잠시 눈을 떼고 모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리딩 능력자는 선천적 재능으로 그 모든 걸 가능케 하지. 하지만 나처럼 보통 사람은 마법진와 약간의 구속어구(拘俗語句)로 그걸 일부나마 할 수 있어.』

말도 안된다며 리나가 잔소리했다.
『네가 어디 보통 사람이냐.』
『이봐? 난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이야.』
소년은 약간 발끈했다. 피부색이 파랗고, 귀가 뾰족하고, 피부에 돌이 좀 박혔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면 무지하게 섭섭하지.

어쨌거나 제르가디스는 심기가 불편한 듯 두어번 헛기침을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수중엔 상대방에게서 갗 떨어져 나온 손목이라는게 있지. 여기에 비교하자면 화장실에서 손 씻다가 무심코 세면대 위에 놓고 간 결혼반지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 모르긴 몰라도 최상의 리딩이 가능할 거다.』

그렇고 말고.
리나와 가우리는 긍정의 강조형으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정신 나간 인디언 인형처럼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퍽이나 괜찮은 계획이다. 제르가디스의 설명대로라면 언제 결혼해서, 자녀를 얼마나 두었고, 부부관계는 어떠하고, 화장실은 매일 가고는 있는지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 = 범인 체포다!
리나는 기대에 가득차 미소지었다. 이참에 그가 만성 변비 환자라는게 밝혀지면 이죽대며 놀려줄테다.

『아하하...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어.』
소년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해 하는 모두를 향해 멎적게 웃었다.
『문제라니?』
『마법진을 다 그리는데 적어도 3시간은 걸릴 것 같아.』
『뭐야!』
어이가 없다며 입을 벙긋 벌렸다.
마법진을 구성하는 일은 무척 섬세한 작업이다. 그건 알겠다. 하지만 원 하나 그리는데 3시간이나 걸린다고 하면... 문제 있다.

세상엔 세 종류의 마법사 타입이 있다.
리나를 포함한 다수의 마법사는 입으로「힘 있는 말」을 하는 것으로 혼돈의 힘을 구축한다. 이때「힘 있는 말」을 일컬어 카오스 워드, 혹은 주문이라 한다. 팔을 뻗는다던가, 손바닥을 모은다던가 하는 동작이 부수적으로 따라가는 경우가 없잖아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다수의 마법은 언령계다.
신이나 악마와 혼신일체가 되는 강령계 마법은 여기선 설명을 하지 않겠다. 딱 잘라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완전판 기가 슬레이브는 예외다)
이와 달리 또 다른 자들은 마법의 힘을 구현하기 위해 특수한 그림이나 문자를 쓴다. 소환진이나, 봉마진 종류의「힘 있는 그림」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기본적으로「부적」을 다루는 자들이 화령계다. 그러나 그 숫자는 달나라 토끼의 개체 수 만큼이나 적다. 약 1만년 전에는 다양한 부류의 화령계 마도사들이 살았던 것 같다만서도 오늘날에는 명맥도 잇지 못하고 있다. 마법진의 운용으로 납을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긴 지금에 이르러선 하나의 전설이다. 지금은 그 이론조차 남아있지 않다. 약간의 파편만이 그 흔적만을 암시할 뿐, 봉마진의 대가였던 레이 마그너스가 화령계의 실질적인 마지막 마도사라고 알려져 있다.

『나... 그거 이해가 가. 멸종할만 하잖아?』
리나는 눈을 꿈뻑거렸다. 허공에서 마법진이 쨘~ 하고 나타나는게 아니라면... 끔찍하다. 3시간씩이나 걸려 그림을 끄작거린다면 마을에 나타나 지붕을 부수며 난동을 피워대는 악마와는 도대체 언제 싸운다는 건가. 그들더러 잠시 차를 마시면서 옆에서 기다리라고 할까.
『무슨 마법진 하나에 3시간이나 걸려! 얼마나 무지막지한 마법진을 그리려는 건데.』
『무지막지한 마법진 맞는데 뭐. 마법진이 동그라미 하나 대충 그려 완성되는 거라면 지구는 무모한 마법사들의 교만에 의하여 이미 열 다섯 번 정도 재창조 되었을 거다.』

마법진을 그린다는 건 어머니 뱃속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진이 빠지고 간이 메마른다. 자연 섭리의 역행을 가능케 하기 위한 에너지를 그림으로 그려내는 거다. 고행은 당연히 요구된다.

옷이 땀으로 푹 절었다.
3시간은커녕 5시간 째 작업 중.
거의 초죽음 상태였다. 몸을 낮추고 앉아 다리에 쥐가 나든 말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도형과 문장을 적어 넣어야 한다. 콤파스와 자를 대고 그리는 것도 아니겠다, 왕년의 미술 솜씨란 솜씨는 모조리 총동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은 찌그러지지, 선은 비뚤어지지... 초조하면 할수록 작업은 더디게만 진행되었다. 분필로 그린 문장을 수십번 검토하고 확인, 틀렸다 싶으면 헝겊으로 깨끗이 닦아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엄청난 인내심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작은 쌀알에다 부처를 그린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제르가디스는 호흡을 가다듬어가며 의식의 지평선을 보았다. 쌀알에 부처를 그리기 이전에 부처를 살해할 위기도 두어번 넘겼다. 팔이 저리고 무릎이 아파왔다.

그동안 리나와 가우리는?
얄미운 자기는 고기완자 접시를 서로 갖겠다고 투닥거리고 있었다.

『쳇. 방해는 하지 않고 있으니 그거 하나는 좋군.』
불평한다고 누가 떡을 준다냐. 동료들의 무신경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각다귀처럼 고기완자를 먹어대라지. 무척이나 아름다운 비밀의 레이스 조각보를 바닥에 펼쳐놓다 말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렴. 그의 얼굴에 촘촘하게 세로빗줄금이 그려진 까닭은 일이 피곤해서이지 동료가 원망스러워서가 결.코. 아니다.

후둘후둘 떨리는 손으로 드디어 수첩을 닫았다.
완성이다.

『에게게.』
그런데 리나 녀석 하는 말 좀 봐라. 에게게?
제르가디스의 눈으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지금 무어라 했나. 에게게?

『그치만 제르가디스.』
리나는 뒷통수를 긁어가며 조심스러워 했다. 죽도록 고생한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이래서는 상상했던 것과의 갭이 너무 컸다.
마법진의 크기는 겨우 그 지름이 60㎝. 맛있는 수박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정작 눈앞에 나타난게 방울 토마토여서는 배반감을 만끽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고 그녀는 생각했다. 수십차례나 정교하게 교차된 무늬들이 대단하다는 건 인정한다. 원 속에 삼각형, 다시 오각형, 그리고 다시 원 속에 삼각형... 이중의 서클 위로는 quidquid latet, apparebit 라는 글이 로만체로 적혀 있다. 그리고 역으로 황도십이궁의 기호가 나열되었고, 각각의 궁성 위치로 이에 호응하는 정령들의 이름이 역시 같은 로만체로 적혀졌다. 이를 에워싸고 다시 원 속에 삼각형, 다시 오각형...
하지만 리나가 보기엔 귀족 나으리님의 대들보 장식보다 덜하면 덜하지 더하지는 않다.

『그놈의 위대하신 귀족 나으리님의 대들보 장식은 그렇다면 어떻게 생겼다는 것?』
당연하다. 소년은 얼굴이 벌개져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아니 뭐. 내 말인 즉슨...』
내심 뭔가 더 엄청난 걸 기대했던 걸까. 리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가슴 빵빵한 여자가 포도송이를 들고 우-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거나...』
『마법진에 왜 포도송이가 나오는건데?』
『햇님이 방긋 웃고 있다던가...』
『그러니까 마법진에서 왜 햇님을 찾는 거냐고.』
『꽃이랑 나비가 날아다니고...』

앞서 말했지만 리나는 구어서술제어자, 카오스 워드로 마법력을 구사하는 언령계 마법사다. 당연히 뭔가를 땅바닥에 그려서 혼돈의 힘을 지상에 불러내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그녀의 미술 센스는 낙제점에 가깝다.
하지만 말이다. 제르가디스는 두통이 심각하다며 머리를 짚었다. 
『그게 정통파 마법사가 할 대사냐!』

머쓱하게 웃었다. 확실히 마법사가 할 대사는 아니다.
대신 이런 건 어떠할까. 리나는 장난스레 웃었다.
『화음과 금성과 대기에 호응하는 에테르 정령... 화답하여 운행하소서. 여기에 스펠링 틀렸다~♡ 확답하여 운행하소서, 라고 적었잖아.』
『아차!!』
화답. 시나 노래로 맞받아 답함.
확답. 확실히 대답함.
비슷할 것 같아도 두 단어는 엄연히 의미가 다르다.
부랴부랴 수리에 들어갔다. 소년은 다시 엉덩이를 하늘로 들어올리며 한참을 끙끙거렸다. 이런 기초적인 부분에서 실수를 다 하다니. 쌀알에 부처를 그렸는데 알고 보니 그게 마호메트였다.
『마호메트가 누구야? 리나.』
『그냥 그런 사람이 있나 보다 하고 무시해. 어차피 우리 세계엔 안 사는 사람이야.』

10여분쯤 뒤, 손등으로 땀을 훔쳐내고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었다.
자. 그럼 준비가 슬슬 다 되었나. 최종 검토를 마무리했다.
가우리는 멀찌감치 뒤로 물러서게 했다. 검술에 뛰어나긴 해도 일반인인 건 맞으니까.
리나는 일이 잘못되어도 맞대응이 가능하니까 바로 코앞으로 자리를 잡겠다고 나와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제르가디스와 반대편 위치로 가서 여차하면 드래곤 슬레이브라도 날리겠다는 기백으로 두 다리를 벌리고 섰다. 신호만 하란다. 그럼 퍼부울 것이다. 그것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줄 수 있을지, 아니면 자살 폭탄이 되어줄지는 나중에 쉬피드에게 물어보자.

『그럼 시작하자.』
마법진 위로 잘려진 손목을 올려놓았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오른쪽 검지손가락을 원 가장자리에 두었다. 마력을 한곳으로 집중하고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부웅- 하고 미세하게 공기가 떨렸다. 동시에 작렬하는 새파란 불꽃이 마법진 기호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불꽃은 얼굴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거나 하지 않다. 오히려 그와는 정 반대로 영혼이라도 얼어붙을 것처럼 차갑다. 그렇다고 손을 가져가 만져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게 좋다. 동상에는 걸리지 않겠지만 몇 달은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게 될 테니까.
전문 용어로는 에테르 플레어라고 부른다. 고차원 에너지 역행 운동으로 인행 대기가 발광하여 빛을 내는 현상을 통칭한다. 보통은 푸른 색조의 괴기스런 빛을 낸다만 아주 가끔은 검게 타면서 주변의 빛을 빨아먹기도 한다. 그럴 적의 에테르 플레어는 귀신이라도 토해낼 것처럼 무척 무서워진다. 아무튼 사람의 몸에는 안 좋은 빛이다. 인간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에테르 플레어가 발생하는 공간에서는 물이 아래에서 위로 치솟는다. 세계의 법칙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몸에 쬐는게 나쁘다.

제르가디스는 비교적 자유로운 왼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발광하는 빛이 지나치게 거셌다. 아무래도 그쪽 방면으로는 초보자 신세. 겁이 조금 났다. 그렇다고 실패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곁눈질로 놓여진 부산물 - 범인이 놓고 간 손목을 관찰했다. 별다른 변화는 아직까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어이~ 제르가디스. 가만히 있지만 말고 무슨 주문이라도 외워야 하는 거 아니야?』
멀리서 구경꾼으로 전락한 가우리가 훈수랍시고 그렇게 외쳤다.
내 팬티, 네 팬티, 공장장 팬티, 간장 팬티, 된장 팬티. 뭐, 그런 것 있지 않던가. 정 아니면「좋은 사료는 오렌지 향, 나쁜 사료는 소가 싫어해」등등. 외우는 것이다. 알리바바의 동굴을 열기 위해선「열려라 참깨!」하고 외쳐야 한다.
아무도 자길 돌아다 보지 않으니 (다들 무시하고 있다는 건 용케 알았다?) 내심 속이 탔나 보다. 가우리는 손바닥을 입가에 대고 한 번 더 외쳤다.
주문이다. 주문을 외우도록. 내 팬티, 네 팬티. 아빠 팬티, 엄마 팬티...

『쉿! 슬슬 변화한다.』
턴 테이블에 놓여진 음판 위로 바늘이 올라갔다. 바늘은 두어번 탁탁 소리를 내며 튀었다. 시작이다. 녹음되어져 있던 곡이 다소 불안한 모양새로 연주되기 시작했다.
스즈즈즈.
에테르 플레어가 순간 황녹색으로 변했다. 조금은 위험했다. 리나와 제르가디스는 동시에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제르가디스는 최대한 눈을 가늘게 뜨고 에테르 플레어의 상태를 관찰했다. 여기서 빛이 진주색으로 더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면 리딩을 멈추는게 좋다. 폭주는 실패보다 더 나쁘다. 본인의 능력을 자만했다간 결과를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여차하면 마법진의 원을 끊어버릴 태세를 갖추고-

『아냐, 기다려. 실패하지 않았어. 저기. 나왔다!』
리나가 눈을 반짝이며 마법진의 한 가운데를 손가락질 했다.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매우 불안해 보이면서도 무척 작은 것으로... 다시 흔들렸다.
제르가디스가 인상을 쓰며 리나가 가리킨 그것을 노려봤다.

『노~~오~~인?』
신장 크기 약 40㎝. 바늘구멍으로 들여다본 파노라마였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어깨가 작았다. 백발의 머리카락도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피부는 검버섯 투성이, 이도 다 빠졌는지 턱과 입 사이가 쪼글거렸다. 그 인상이라는 건 한마디로 말해 말라 비틀어진 파뿌리였다. 300년 전에나 유행했을 것 같은 커다란 망토로 몸을 감쌌는데 옷이 지나치게 커서 되려 사람이 추레해 보였다. 손바닥으로 등을 치기만 해도 그 즉시 심장마비로 죽게 생겼다...
리나는 입을 동글게 말아 오- 하는 소리를 냈다. 믿기지 않는 그림이었다.

『한밤중에 몰래 방으로 들어와 나에게 액션의 장미꽃을 가져다 바친 작자가 바로 이 할아범이라고?』

바로 그때 마법진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말이 목소리였지 그 내용을 알아듣는 건 쉽지 않았다. 베르디의 요란스란 오페라와 시장터의 각설이 타령,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로큰롤이 한꺼번에 울려퍼지는 듯한 엄청난 잡음이었다.
무의식중에 귀를 막았다. 고장난 라디오는 두어번 때리면 어쩌다 잘 작동한다고 한다. 리나는 별다른 악의 없이 제르가디스의 머리를 두어번 휘갈겼다.
옳거니, 소리가 쪼뫼 커졌다.

허리가 아파... 어제 점심에 먹은 오물렛이 또 먹고 싶어...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하더니만 구름만 잔뜩... 왕성 기사단에게 편지를 보내 봉급을 인상시키라고 압력을... 마누라 생일이 내일 모레라서 오늘은 일찍 퇴근을... 다리가 저려... 난 상어 지느러미 요리를 싫어해... 내가 지시했던 건 어떻게 되었나... 분홍색의 벽지라니, 촌스럽잖아... 두통약이 어디에 있더라...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몇 건졌다.
마법진 속의 노인은 쉬지 않고 불평을 중얼거렸다.
허리가 아파, 다리가 저려, 삭신이 쑤셔...

리나는 눈을 뒤집었다.
『말도 안돼. 그렇게나 힘차게 방안을 휘젖고 다닌 작자가 저런 꼬불랭이 노인이었다고?』
노인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노환으로 인한 육체적 통증은 그 한계점에 임박한 것 같았다. 내장이고 뼈고 제대로 굴러가는 건 하나도 없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가락 뼈가 바스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심장은 너덜거리고 허파는 말라 비틀어진다. 입에 붙었다. 아프다, 아파 죽겠다...

『사람이 틀린 거 아냐? 체격도 한밤 중의 세레나데와는 차이가 큰 걸.』
리딩이 잘못되었다. 그녀는 확신했다.
『틀려, 제르. 날 습격한 자와 이 할아범은 동일 인물이 절대 아니야.』

마법진 속에 나타난 노인은 주먹을 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대로 늙어서 죽는 건 싫어. 절대로 싫어... 새 몸을 가질 수만 있다면... 다리가 아파... 소화가 안돼... 젊고 싱싱한... 생선 수프... 카레엔 단무지는 생략하라... 건강한 육체... 그럼 다시 편안해질까... 마법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포기할 수 없어... 쉰 감자는 집어치워... 분홍 커튼을 갈아버려... 계약으로 성립된... 전생의 가능성을...

이런.
리나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전생이라고?!

휘이이 하고 공기가 다시금 흔들렸다. 에테르 플레어가 노란 색으로 변해갔다. 제르가디스는 땀을 비오듯 쏟아내며 어떻게 해서든 그걸 제어해 보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별개다. 마음 먹은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마법진 속에 나타난 노인의 환영이 두 개로 분리되었다. 흡사 초점이 맞지 않은 그림처럼 두 겹으로 겹쳐져 보이기 시작했다.
제르가디스는 칫 소리를 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조짐이 안 좋았다.

『이대로는 얼마 못 버텨.』
『조금만 더! 힘 내.』

노인이 졸립다는 식의 멍한 톤으로 말을 띄엄띄엄 이어 나갔다. 소리는 매우 작았다.

렛셔 데몬의 태어남을... 부차적인 방법으로... 늙어서 죽는다는 건 싫어... 회색의 이불... 회계장부를 가져와라... 하급정령을 영혼에 덧씌워...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제르가디스는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귀를 바짝 기울였다. 단서가 있다. 지금의 저 말에 단서가... 조금만 더 들을 수 있다면.
속상하게도 고장난 축음기의 바늘이 탁탁 튀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더 잦아들었다.

『그만둬야할까.』
『아니, 그대로... 아앗! 멈춰! 잠깐! 조심해!』

순간적인 일이었다.
에테르 플레어의 불꽃이 폭발하듯 천장 윗부분까지 치솟았다. 지붕이 들썩거렸다. 노인의 환영이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묘하게 생생해졌다. 노인의 눈빛이 별안간 살아났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리나는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웠다.

「허어~ 훔쳐보기라는 건가. 그거 참 깜찍한 짓을.」

차가운 불꽃 속에서 노인의 모습이 춤추며 날아올랐다. 놀란 가우리가 검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벨 수 있는 상대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 점에서 가우리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환영의 키가 실제 사람인양 쑥쑥 커지기 시작했다. 40㎝의 환영이 거의 2미터 가까이 크기였다. 노인은 묘한 미소를 지어가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고약한 장난을 친 학생들을 회초리로 혼내키려는 선생님처럼 말이다.
마법진 위에 놓여진 나무 손목이 덜걱덜걱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붕괴의 조짐. 손목이 하얀 증기로 변해갔다. 어느덧 그 물건은 빨려가듯 노인에게로 흡수되었다.

「그쪽인가. 보인다... 거기인 건가... 가까이. 가까이에...」

『뭐해! 제르가디스! 서둘러 마법진을 끊어!』
리나가 앙칼지게 비명을 질러댄 것과 동시에 마법진의 가장자리에서 맴돌고 있던 제르가디스의 손가락이 옆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애시당초 분필로 그려진 원이었다. 슬쩍 비벼대는 걸로 그림을 뭉갰다.
마법진이 파괴되자 에테르 플레어가 사라졌다. 그것으로 노인의 환영도 끝이었다.

가우리는 여전히 검집에 손을 가져간 상태였다.
『지금의 것은...?』
기운이 다한 제르가디스는 그대로 소복히 무너져 내렸다.
『뭐긴. 우리가 제대로 된 상대방을 만났다는 증거지.』

이 말에 댓구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