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 The Crystal Method, Starting Over

『리나!』
세 걸음만으로 옆방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동시에 검집에서 칼을 뽑아 가로 방향으로 길게 그었다. 저 앞으로 시커먼 것이 보이고 있으니 그렇게 해야 했다.
파리다. 커다란 똥파리가 리나의 침대 위에 내려앉았다. 파리는 리나를 깔고 앉아 털 투성이의 두 다리를 싹싹 비벼대고 있었다. 그러니 똥파리를 내쫒기 위해선 파리채를 길게 휘둘러야 함은 마땅하다. 다시 말해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의미에서라기 보다는 리나로부터 적을 떼어놓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렇게 했다.

『@#)(#*$&(~~!!』
그동안 리나는 해석 불능의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열심히 발길질만 하고 있었다. 입에 수건이 틀어막힌 상태이니 하기사 제대로 된 말이 가능할 리가 없었지만... 아무튼 나름대로 반항이라는 걸 충직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꽤나 꼴불견이었다는 건 숨길 수가 없다.
열 여섯 시골 촌색시도 잠결에 괴한이 얼굴을 들이밀면 적어도 손톱으로 할퀴기라도 한다. 더러는 불알을 쥐고 무자비하게 비튼다. 그런데 명색이 마도사라면서 괴한의 얼굴을 할퀴기는커녕 그렇게나 순식간에 제압을 당했다고 하면... 가우리는 쯥 소리를 내며 불쌍한 동생 쳐다보듯 했다. 마도사 자격증이라는게 있다면 당장 반납해야 한다. 보아하니 왼쪽 손목도 침대 모서리에 결박당해 있겠다, 형편없다. 불의의 습격이었다 해도 저래가지고는 너무나 바보스럽다. 놀래가지고 발버둥만 치면 그게 마도사냐.

『리나, 너 정말...』
『(@&#&^#^*(~~!!』
수건을 입에 문 채 서럽게 울부짖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래. 자기는 잘못이 없다 이거 아냐.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훌쩍이지 마.
상대가 초 고수라는 거지? 이 오빠, 잘 알아 들었어.

다시 한 번 칼을 파리채인양 허풍을 담아 휘둘러봤다. 상대는 흠칫해서 얼른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의도했던 바 그대로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벽쪽으로 달아났다.
몰아세웠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베어들어간다.
한 걸음에 2미터는 족히 뛰었다. 보통 사람이 보면 사람이 홍길동이 축지법을 쓴다고 착각했을 거다. 동시에 45도 각도로 해서 검을 밀어붙였다. 아까의 것이 단순한 위협이라면 이번의 것은 순수하게 죽이기 위한 동작이었다.

일도즉살.
물론 가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를 무력화 시키는 일에 주력했으면 했지, 직접적으로 급소를 찌르거나 베는 동작은 잘 하지 않았다. 공격을 해도 주로 손이나 다리 같은 부위를 노렸다. 가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건「나중에 두고 보자!」라는 고전적 멘트를 중얼거리며 적들로 하여금 뒤돌아 도망가게 만드는 거였다. 지금처럼 숨 쉴 틈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공격해 들어가면서 적의 목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짓은 여간해선 하지 않았다. 상대의 실력이 너무나 뛰어난 나머지 죽기 살기로 덤비지 않으면 안될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다.
살생은 업보의 중량감을 한층 더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질식하게 만든다. 일단 목이 졸리기 시작하면 성당의 연봇함에 거금을 쑤셔넣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건 짜증스럽다. 업보에 눌려 질식사하는 건 모양이 좋지가 않다. 반 미치광이가 된 아버지의 임종을 마지막까지 지켜봤던 가우리는 그런 최후만큼은 사절하고 싶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이 자는 소름끼칠 정도로 호흡이 없군. 고도로 훈련받은 암살자도 저렇게 숨소리를 죽이지는 못할 터인데.」
가우리의 눈빛이 바람을 탄 민들레 꽃씨처럼 흔들렸다.
「반면 동작은 무지 둔하다. 뭐야, 이 녀석은. 도무지 파악이 안 되잖아.」
망설임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지금쯤은 맞대응할 검날이 튕겨올라야 정상이다. 쩡 하고 금속성이 울리면서 매서운 불꽃이 튀어야 한다. 그런데 저 자는 무기를 꺼내기는커녕 여전히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한심스럽도록 오물짝거리고만 있다.

가우리는 초조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하고 앉았냐. 초 고수라며.
이름만 고수고 정작은 초보냐?!

『칫!』
이대로는 머리를 찍는다. 뇌수가 튀고 뼛조각이 날릴 거다. 그런 건 별로다.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날아가던 칼날이 도중에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
틈을 주었으니 달아난다. 검은 옷을 입은 괴한은 꽃병을 집어던지며 반격했다. 물과 꽃이 사방으로 튀면서 굉장한 굉음을 냈다. 가우리는 엉겹결에 팔을 들어 날아드는 꽃병을 튕겨냈다. 팔뚝에 맞은 화병이 쨍그렁 소리를 내며 깨졌다.

『하여간 넌 마음이 너무 물러터졌어.』
불평을 내뱉은 쪽은 제르가디스였다. 신발을 찾아 신느라 약간 지체했다. 그렇다고 뒤에서 느긋하게 남들 굿판 벌리고 있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을 성격은 아니다. 보아하니 이미 칼을 빼어든 자세 그대로에서 왼손으로 마력을 모으고 있었다. 마검사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검술과 마법의 양쪽 수단으로 공격을 개시할 작정인 듯 싶다. 닥치는대로 갈기고 본다. 이것의 평상시 그의 신념이다. 따라서 칼이 먼저일지, 마법이 먼저일지는 순전히 기분에 달렸다.

점차 커져가는 폭탄 터지는 소리에 잔뜩 졸은 기다란 금발의 훈련병은 뒤를 돌아다 보았다.
『제르가디스? 너무 거칠겐 하지 마.』
『웃기는 소리.』
제르가디스는 일요일 오전 시간에 단상으로 올라간 교회 목사님처럼 훈계하며 - 악마는 사정 봐주지 않고 걍 죽여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 공격을 개시했다.
『저런 놈은 그냥 한방에 날려버리는게 최고라고.』
이번에는 마법부터 날리기로 정한 모양이다. 주먹으로 맹렬한 냉기를 하나 가득 끌어당긴 다음, 목표물을 조준하고 쏘았다.
『프리즈 에로우!!』

괴한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꽃병 폭탄은 바닥났다. 그렇다면 다음으론 무엇으로 방어할까. 궁리 끝에 홑겹의 테이블보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걸 바다속 물고기에게 그물 던지듯 제르가디스에게 덮어 씌우려 했다.
『제길. 성가시게!』
제르가디스는 짜증을 내며 날아드는 홑이불을 걷어찼다.
『이 자식! 적당히 좀 해!』

적당히 있으라고 가만 있으면 범죄자의 체면이 살지 않는다. 게 섯거라 소리친다고 소매치기가 도주를 포기하냐. 하여 다음으로는 머리빗이 날아왔다. 그 다음으로는 액자가 던져졌고 그 뒤로는 벽시계가 하늘을 날았다. 손에 잡히는대로 무조건 던지고 있는 것 같다. 마무리로는 슬리퍼까지 총알로 사용되었다.
가우리는 조금은 실소했다. 이래서는 개그였다. 부부싸움 중에 남편이 밥그릇을 던지면 그런가보다 하고 다들 넘어간다. 하지만 은행 강도가 손님을 직원들을 위협한다면서 재떨이를 던져봐라. 그건 모양이 우습다.
따라서 이 마당에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아무래도 저 친구, 강도가 아니다.

검날이 위로 가도록 해서 손잡이를 고쳐잡았다. 쓸데없이 사람 봐준다고 잔소리를 퍼붓던 제르가디스가 불같이 화를 낼 일이었다만... 가우리는 생각했다. 슬리퍼를 집어던지는 은행강도를 엽총으로 위협해서야 쓰나. 선심 쓰는 척 하고 칼등으로 다리를 노리자. 정 뭐하면 코에다 주먹을 한방 먹이는 거다.
그렇게 결심을 굳히고 스탭을 밟았다. 하나, 둘...

그런데 갑자기 피부가 싸늘해졌다. 순간 가우리는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이 고개를 움추렸다. 그것은 너무나도 하얀 손이었다. 핏기 하나 없고 포동포동한 젊은 여자의 손. 그런 끔찍한 것이 발목을 꽉 잡고 있었다.
『우왓!』
경련을 일으키며 급히 다리를 털었다.
싫다. 싫어. 저리 가!
그리고 퍼득 깨달았다.
잘못 보았다. 여자의 희디 흰 손이 아니라 아까 내던져진 흰색 테이블보였다.
『어레. 내가 미쳤나.』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로 2초 후에 행성 충돌이었다. 수상한 사내가 가우리 쪽을 향해 정통으로 달겨들고 있었다. 좁은 방에서 제르가디스가 던진 마법 주문을 피하려다 방향을 잘못 틀은 모양이었다. 이 마당에 주먹을 날려 괴한의 콧뼈를 부러뜨린다는 건 넌센스다. 당연하다. 주먹이 나가기 전에 박치기가 먼저니까. 가우리는 두 번째로 우왓 하고 소리 질렀다.
『브레이크!』
바로 그때, 이미 발동한 프리즈 에로우 주문이 기술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엎친데 덮쳤다. 하여간 장소가 좁으면 만사가 말썽이었다. 그제야 가우리가 어디쯤에 서있는지를 파악한 제르가디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도장치가 달린 미사일을 발사했더니만 그게 적함이 아닌 아군의 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자살골을 넣어도 축구선수 생명이 위태로운 판국에... 동료를 냉동 생선으로 만들었다간 국물도 없을 게다.
하필이면. 제르가디스는 신음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검으로는 누구든 상대가 안된다. 그러나 마법에는 별 대책이 없는 가우리였다. 게다가 지금 가우리가 가지고 있는 검은 튼튼하기만 한 일반 철검이다. 하찮은 마법부적도 검에다 부착하려고 하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싸구려 부적도 그러한데 미스릴 코팅 같은 건 먼 나라 요정들의 노랫가락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지금의 가우리로서는 다가오는 마법 공격을 방어해낼 방도가 전혀 없었다. 평범한 철검으로 프리즈 에로우 주문을 반토막으로 가를 수 있으면 진작에 그렇게 한다. 못하니까 문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틴다. 그런데 그 잇몸조차 없으면 어쩌라고? 그저 황망한 표정으로 달겨드는 마법을 멀뚱 쳐다볼 수밖에.

『가우리! 피해!』
『피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그대로 맞고만 있을 거냐.』
『날 더러 어쩌라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우리는 반사적으로 바닥에 누웠다.
행성 충돌 시 행동 요령. 우주선을 타고 탈출하시오.
그런데 이번에는 눈만 동그랗게 뜨는 것이 아니라 입도 쩍 벌어질 일이 생겼다. 괴한이 몸을 비틀어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더니만 별 주문 외우는 기척도 없이 프리즈 에로우를 단번에 튕겨냈다.

제르가디스는 놀라 숨을 죽였다.
단순히 손바닥을 펼치는 것으로 마법을 되돌린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해봤다. 고위 마족의 경우 고유의 아스트랄계 파동으로 일종의 결계와 같은 막을 형성해 별다른 데미지 없이 마법을 차단시키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래도 빛을 반사시키는 거울인양 마법을 거꾸로 되돌려 보내지는 못한다. 마법은 테니스 공이 아니다. 받아친다고 네트 건너편으로 돌아가는 법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한은 별 거 아니라며 침착하게 손을 거두었다. 프리즈 에로우 주문을 맨 손바닥으로 튕겨냈음에도 그 어떠한 신체적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싶다. 이를 악물지도 않았으며 고통의 숨소리조차 없었다. 대신 장롱을 훌륭하게 거꾸로 뒤엎고 나서 반대편으로 달아나려 했다.

『문의 맞은 편! 가우리!』
『알았어. 도망가게 놔둘까보냐!』
화급히 정신을 수습하고 검 손잡이를 고쳐잡았다. 거리가 더 멀어지기 전에 무작정 검을 휘둘렀다. 여지껏 숨소리도 내지 않던 사내가 짤막하게 앗 소리를 내며 몸을 움추렸다. 가우리는 표정을 달리하고 무릎 걸음으로 카펫 위를 뒹굴었다. 쥐고 있던 검 손잡이로 감각이 있었다. 깊지는 않았어도 분명 닿았다. 좋았어, 상처는 냈다 이거지. 기합을 잔뜩 넣고 튕겨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놀라 경기를 일으켰다.
순간 툭 소리를 내며 괴한의 오른쪽 손목이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이게 뭐야! 난 그저 살짝만 그었다구!』
짐짓 위협을 한답시고 하늘을 향해 총알을 발사했는데 코앞에 있던 여자애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털썩 쓰러져봐라. 그것처럼 억울한 일 없다. 가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느꼈던 감촉으로는 분명 살짝만 베었다. 사람의 근육과 뼈가 얼마나 질긴데! 그런데 그게 왜 썩뚝 잘려! 전날 밤에 가지고 있던 철검을 숟돌에 죽어라 갈아댔던가? 아니다. 그와는 정 반대로 철검은 한도 이상으로 베어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 종이를 검날 위에 살짝 올려도 두짝으로 잘라진다는 전설의 명검 같은 건 저리 치워라. 이가 빠지고 울퉁불퉁했다. 조만간 돈을 보태 대장간에서 대대적인 수리를 할 작정이었다. 당연히 온 힘을 다해 내리찍어도 상대방의 손목이 절단되는 일 같은 건 절대 안 생긴다. 그런 일이 생기기엔 철검의 날이 너무 무뎠다.

그래도 괴한의 손목은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미안해서 이걸 어쩌나.

가우리도 그렇고 제르가디스도 그렇고 공격 의사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괴한은 두말하지 않고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어둠은 곧 그의 몸을 집어 삼켰으며, 바람결에 커튼만 요란하게 흔들렸다.

『^(*&&**#(@_@~!!』
그때까지도 리나는 파악이 불가능한 괴성을 질러대며 침대 위에 몸이 묶여 발버둥만 치고 있었다.
한심한지고.

입에 물려있던 재갈을 벗어던지자마자 날카롭고도 걸죽한 욕설부터 튀어나왔다.
『이 멍청이들아. 뭘 그렇게 허우적대는 거냐. 그런 자식은 한방에 죽여버렸어야지! 멀뚱 놓치면 어쩌자는 거니. 아이구, 등신. 너희들 말이야...』
시끄러웠다. 제르가디스는 리나의 입으로 다시금 수건을 틀어박았다. 어려운 산수 숙제를 힘줘서 풀고 있은데 옆집에서 고성능 스피커로 뽕짝 노래를 틀어대면 5 더하기 8의 답을 무심결에 15로 적게 되는 법이다. 조금 진정이 되면 그때 가서 풀어줘도 늦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 밤의 희생자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깨진 화병 조각부터 주웠다. 도자기 파편은 모서리가 날카로워 밟으면 발바닥을 다칠 염려가 있다. 아니, 그보다 신경에 거슬렸다. 쓰레기가 널려있는 걸 보면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두어 개 정도를 주워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이를 지켜보고 가우리는 근심으로 인해 그 키를 석자 늘렸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선 깨진 파편을 손으로 줍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답지 않은 현명한 지적이었다. 제르가디스는 묵묵히 동의를 표하며 손을 털었다.

『맞아. 손으로 하나하나 언제 줍겠어. 빗자루로 몽땅 쓸어내도록 하자.』
『아니,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렇다면 이 마당에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온 흔적은 없어. 출입문의 걸쇠는 안쪽에서 걸려져 있었고. 그런데 창문 쪽은 주의가 부족했었군. 건물 높이가 있다고 해서 잠굼 장치를 소홀이 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는 법이지. 내가 보기엔 범인은 지붕을 타고 내려와 창문 쪽으로 침입한 것 같아. 남아있는 발자국은 없지만 바로 위쪽으로 기왓장이 몇 개 흘러내렸군. 오호라, 이 흔적. 보이나, 가우리. 녀석이 균형을 잡는답시고 발버둥도 쳤던 것 같아.』
그것은 바로 범죄 현장 분석이었다.
소년은 창틀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몸을 밖으로 길게 빼고 주변을 살폈다.
『그렇다고 해도 지붕에서 바로 내려오기엔 각도가 힘들텐데 말이야. 가파르다못해 이건 흡사 깎아질렀군. 그렇다는 건 보조 장비를 사용했다는 뜻이렸다. 옳커니. 그럼 그렇지. 여기 밧줄 등장이오. 밧줄 한쪽을 굴뚝에다 고정시킨 뒤에 나머지 반대쪽을 허리춤에 묶어서 이 아래로 몸을 던지셨구먼.』

리나 입장에선 대성통곡할 일이었다. 현장에 출동한 수사대가 희생자는 내 알 바 아니라며 지문이나 채취하면 쓰나.
웩웩거리며 노력했다. 필사적으로 마른 목젖을 꿀럭거려 한참만에야 수건을 토해내는데 성공했다.
뚫렸다? 그럼 외친다.
감정이 한층 격앙된 리나는 입이 뚫리기가 무섭게 지붕이 무너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야! 임마! 제르가디스! 나 좀 풀어!!』
『그래서 말인데.』

제르가디스는 피해자에게서 여전히 시선을 돌린 채 형사 콜롬보의 표정을 지었다.
상황증거로 보아 괴한은 전문가가 아니다. 지금껏 보여주었던 엉거주춤한 움직임도 그렇지만 범인이 놔두고 간 밧줄의 매듭만 봐도 엉성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단단히 묶었다라기 보다는 온갖 노력을 다하여 질끈 동여맸다. 정성은 갸륵하다. 허나 열심히만 묶는다고 끝나는게 아니다. 매듭이 허술하면 묶어놓은 배도 파도 몇 번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제르가디스는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매듭을 만드는 일엔 모름지기 기술이라는게 필요하다. 추정을 해봤다. 밧줄에 매달린 사람의 몸무게가 80kg이 넘었다면 이런 매듭은 툭 소리를 내며 쉽사리 풀려버렸을 것이고, 거기에 매달린 자는 어 소리도 못내고 자유낙하를 해버렸을 거다. 비명을 질러봐야 늦는다. 땅바닥에서 부러진 다리를 부둥켜 쥐고 아야야.

『그런데 넌 밧줄 매듭도 제대로 매지 못하는 작자에게 왼손을 결박당하고, 입에 재갈이 물려서, 무릎으로 몸통을 눌러대든 말든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었다 이거지?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해 기왓장에 손톱을 틀어박았던 그런 사람에게 말이다.』
지금의 제르가디스 표정은 이러했다.
너 저녁에 약 먹었지.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리나는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뒷통수를 매섭게 긁어댔다.
『추정이 틀려 미안하구먼.』
맹세한다. 감기약이나 수면제, 내지는 아스피린도 먹지 않았다.

그래?
제르가디스의 뺨이 살짝 홍조를 띄었다.
그렇다는 건... 어흠. 서로 합의 하에 그렇고 그런 걸 하기로...

순간 우뢰매의 벼락이 내리쳤다.
『틀려! 합~의?! 병신 육갑 떠는 소리! 아무튼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이미 팔이 묶여있었단 말이야. 내 감각이 그렇게 둔할 리도 없고... 처음엔 그저 꿈인 줄만 알았다고. 그런데 눈 뜨고 보니까 지옥이었다 이 말씀이야. 기척 하나 안 들리고. 쳇.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사실이다. 맞장구치듯 가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아. 그 작자, 이상하리만치 호흡 소리가 없더라고. 방에서 나갈 때까지 단 한번도 숨 쉬는 소리를 내지 않았어.』

이쯤되면 괴기 시리즈나 마찬가지이다.
호흡 소리가 없다?

제르가디스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는 것으로 잠시 계산에 들어갔다. 신발을 찾아 신느라 그는 가우리보다 약 21초 정도 늦게 이 방에 도착했다. 아울러 싸움은 최소 3분간 지속되었고. 그렇다는 얘기는 최소 3분 21초 동안 이 괴한이 숨을 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도 리나들 입장에서 본 가정이다. 시점을 바꿔 침입자 쪽에서 보면 그 이전에 잠입하는 시간이 다시 들어가니까... 제르가디스의 손가락이 꼼지락 움직였다.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왼손을 결박하는데만 최소 40초가 들어갔다고 치자. 40초 안에 그런 일이 가능할지는 자신 없지만 일단 그렇다고 치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된다. 도합 4분이 넘어간다.

『4분 동안 한번도 숨을 안쉬고 그렇게나 힘차게 사람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고래와 같은 폐를 가졌다면 아주 불가능하진 않겠지.』
『아까 그 사람이 고래처럼 보이든? 가우리.』
『글쎄. 고래치고는 덩치가 호리호리했지.』
『그렇담 너도 그 인간이 고래 사촌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는 거겠지?』
『일단은... 으음.』

고래 사촌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귀신이냐.
리나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왕은 때려잡을 수 있어도 귀신은 질색이라는 그녀다. 거금 오천만냥을 제시했어도 고성의 유령 퇴치를 정중히 거절한 적도 있다. 귀신을 퇴치하느니 차라리 불도저로 저택을 밀어버리라는게 그녀의 평상시 신념이다. 괄태충 다음으로 싫은 것이 몽달귀와 달걀귀신이다. 옵션으로 따라붙는 처녀귀신은 쳐다보기도 싫어했다.
당연한 결과로 리나는 무척이나 불안한 시선으로 모두를 쳐다봤다.

『어쩌면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침입자는 단순히 손바닥을 펼치는 것만으로 프리즈 에로우를 가볍게 튕겨냈다. 그런 어려운 일을 해내면서도 입으로 주문을 외우는 기색은 일절 없었다.
『거기다 이 잘려진 손목.』
제르가디스는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피가 전혀 튀지 않았어. 그리고 너무 쉽게 끊겼고.』
이 상황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답은 하나다. 피부와 근육, 그리고 뼈로 이루어진 진짜가 아니다.
가우리가 이마를 접었다.
『의수?』
『아닐 걸. 의수에 달린 손가락이 그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거 봤냐.』
소년은 문제의 침입자가 꽃병과 액자를 사방에 집어던지는 걸 상기시켰다. 의수로는 불가능한 동작이다. 물건을 잡고, 그것을 쥐고, 다시금 던진다. 쉬어보여도 결코 쉽지 않다. 전문가가가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할지언정 의수로는 숟가락도 못 잡는다. 애시당초 모양만 그럴 듯하게 흉내냈을 뿐이다. 섬세한 손가락 움직임을 재현해내는 의수는 여전히 꿈에 가깝다.
『너도 봤지? 이불을 잡고 나에게로 던졌다고.』
『그거 분명 오른손으로 그랬지.』
『그랬다니까. 이 손으로 잡고 던졌어.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이거 볼래?』
제르가디스는 짐짓 손수건을 사용해서 잘려진 손목을 모두가 볼 수 있게끔 들어올렸다.
달가닥 소리가 나면서 손가락 관절이 아래로 축 쳐졌다.
『재질이 나무야. 내가 보기에도 잘 만들어졌군. 이 친구... 피노키오야.』

피노키오가 스토커 짓을 하고 있다. 피노키오가 여자를 노리고 있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피노키오가 이번엔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마왕이었으면.
리나는 하얗게 질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다니까. 그러니까 여기 앉아. 응?』
흥분상태인 리나를 데리고 식탁에 가 앉았다. 진정제를 투여하자. 먹을 걸 가져와라.
새벽 3시가 좀 넘은 시간인지라 주방을 깨워 떡 내놔라 감 내놔라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런 규모의 여관에선 뜨거운 차는 항시 대기 중이다. 운이 좋으면 팔다 남은 닭꼬치를 화덕에 데워먹을 수도 있다. 찬장을 뒤지면 바퀴벌레약 말고 든든한 무언가가 나올지도 모른다. 희망을 접지 말자. 내심 기대를 해가며 구석에 숨어 들어가 꾸벅꾸벅 졸고 있을 직원을 찾으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잠시 일어났다. 거나한 성찬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약간의 도넛과 고기완자를 얻을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다.
『그럼 뭣 좀 가지고 올게.』
『응.』
기사가 떠났으니 공주를 위로하는 건 광대의 몫이다. 가우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제르가디스는 쟁반에 뜨거운 엽차를 가지고 와서 리나 앞에 대령했다.

『진정은 좀 되었나.』
『그런 건 진작에 되었지.』
『그런데 손은 왜 떨고 있는 거냐.』
『그, 그, 그건! 무지무지 화가 나서 그런 거야. 다른 이유 같은 건 없어.』

여기서 그렇습니까 하고 말하면 바보다.
제르가디스는 눈을 크게 떴다.
야, 야. 거짓말 하는 거 다 보인다. 무섭지,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 너.
그러나 모양만 멀더라고 진실을 고백하라 다그치는 짓은 안했다.
잠결에 눈을 부스스 뜨고 보니 생판 모르는 사람이 열심을 다하여 찍어누르고 있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니까 재갈이 이미 입에 물려있다. 몸무림치며 반항할려니 팔이 침대 모서리에 묶여있다. 순간 XX염색체를 가진 자가 맛볼 공포라는 건 거기서 거기다.

잠자코 찻잔을 들이밀었다. 이럴 적엔 몸을 따스하게 덥히는게 중요했다.
『마셔. 기분이 나아질 거야.』
리나는 얌전히 시키는대로 했다. 찻잔을 쥐고 한번에 원샷.
『앗, 뜨거!』
『저런. 조심해야지. 혓바닥 삶아먹으려고 그래.』

자.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보자.
제르가디스가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처음으로 느낀 것이 언제냐.』
『나흘 정도.』
나흘 전이면 렌토라 시티 외곽을 지나고 있었을 때다.
그러고보니 아주 가끔씩 리나가 불편한 표정을 지어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저 용변이 급해서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옷을 벗기는 듯한 시선이라 했던가.』
대답하는 리나의 목소리 톤이 더 올라갔다.
『썩은 버터 같았다니까. 느끼함의 원조였다고, 그건!』

100년 묶은 버터의 강렬한 느끼함.
그렇다면 목적은 역시...
제르가디스는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로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이건 어쩌면 축하할만한 일일지도 모른다.
육욕에 찬 피노키오가 여자를 노린다. 리나를 노린다.
『키도 작은데다 가슴도 덜 자라 나무판에 꼭지 하나 달린 것 같은 여자를 말이지.』
즉석에서 발길질이 날아왔다. 감정이 담겨져 있는 탓에 상당히 아팠다. 제르가디스는 윽 소리를 내며 소복히 무너졌다.
『이 자식이 정말!』
억울하다. 왜 그러나. 괜찮은 일 아니던가. 자신감을 가질 일 아니냐. 빈약해도 근사하면 그만이지. 오늘에 이르러 옷을 벗기고 싶어하는 작자가 나타났으니 대 경사다. 축하한다, 리나 인버스.
『임마! 그게 어디 축하할 일이냐?!』
길게 대꾸할 것도 없었다. 답례로 재차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조, 좋아. 그 남자가 무슨 말은 하지 않든.』
『딱 한마디 하긴 했지.』
『뭐라고?』
『이 몸에 상처를 내긴 싫다. 얌전히 있어라.』

그다지 힌트를 주는 대사는 아니었다. 강간범이나 흉악범이 입에 담을 법한 대사 그대로였다. 움직이지 마. 시키는대로만 하면 죽이지는 않겠다. 교과서적이라 그대로 넘겼다.
다른 부분으로 들어가자.
『목소리는 어떻든.』
『그냥... 남자였어.』
『냄새 같은 건 없었어?』
『별로.』
『특이하다 싶은 건 기억이 안 나?』
『체격은 보통인데 몸이 어린애처럼 가벼웠음.』
『마족이겠다 싶은 느낌은?』
리나는 절망적인 느낌을 담아 어깨를 으쓱였다.
『나라고 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열심히 생각해봤어. 그런데 답은「잘 모르겠음」이야. 마족이라고 하기엔 그 독특한 기운이 없었어. 상당한 고위 마족이라 자신의 정체를 교묘하게 숨기고 있었다고 가정하기에도 무리가 좀 있고... 결정을 내리기 곤란해.』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범인을 추적할 단서가 딱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잘려진 손목 - 나무로 만들어진 그것 말이다.

나를 가만히 두라며 아우성치던 종업원을 다그친 보람이 있었던 것 같다. 저만치에서 전리품 획득에 성공한 가우리가 고기완자 접시를 들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제르가디스의 판단에 의하자면 지금 이 상황에선 고기완자가 아니라 분필이 더 필요했다.

『부~운~필? 갑자기 그게 왜 필요한데.』
『필요하니까 필요하지.』
소년은 이상한 걸 물어본다며 되려 정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