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을 어루만지며 벼룩시장 가판대 위로 올려진 오리 인형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얼핏 보자면 어린애 손때 가득한 인형을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듯한 눈치다만.
부탁받은 솜사탕 두 개를 품안에 끼고 리나에게로 돌아가던 제르가디스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첫째, 표정이 굳었다.
둘째, 호흡이 불규칙하다.
세째, 통나무인양 뻣뻣하게 등을 펴고 있다.

상기 육체적 반응이 나타날 법한 요소라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소년은 솜사탕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가장 그럴 듯한 가정으로는「주머니로 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갖고 싶은 물건이 나타났는데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다. 쇼핑 중독자들이 분신사바를 외치고, 오필리어가 발광하여 냇물에 떠내려갈법한 비극이다. 그럴 적에 리나는 가끔씩 - 사실은 매우 빈번하게 - 히스테리 비슷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갖고 싶어, 어떻게 해, 갖고 싶어, 주문 외듯 읊어댄다. 발을 동동 구르며 허리를 꼰다. 그 안타까움과 초조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시험지를 나눠받은 학생이 갑작스런 복통을 호소하며 새파랗게 질리는 것과 모양새가 매우 흡사하다. 이른바 강박관념에 의한 일종의 스트레스성 발작 증상인데... 여기서 그는 도리질했다.

비싼 물건을 앞에 두고 있다면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리나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건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진귀한 왕관이 아니다. 어디서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오리 인형이었다. 아무리 비싸봐야 댓푼이면 충분히 뒤집어쓴다. 과자 값을 아끼면 살 수 있다. 따라서 호주머니 사정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으며 저렇게 아우성을 치지 않아도 된다.

제2의 가정을 설정해 보았다.
그렇다면 뭔가 범상치 않은 오리 인형이라는 것?
예를 들어보자. 문제의 오리가 리나가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것과 똑같은 배꼽 상처를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별 생각 없이 뒤적거렸다가 눈에 익은 흠집에 소스라치듯 깜짝 놀랐을 수 있다.
어랍쇼, 이것 좀 보게. 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이랑 국화빵이네.
그리고 불가사의하게 겹쳐지는 그 우연성에 기겁한다. 

그렇다고 해도 손님 눈치를 살피는 장사꾼이 겁을 집어먹도록 이를 악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
제르가디스는 잡념을 떨어내곤 애정을 가득 담아 리나의 이름을 불렀다.
『리나?』
『빨리! 제르가디스, 오른쪽이다! 오른쪽으로 달려!!』
『어?』
『쫓아가! 놓치기 전에 어서!』

리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르가디스의 몸을 뒤로 확 떠밀었다. 그리고는 어딘지 모를 골목길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정말로 다급했었는지 제르가디스가 들고 온 솜사탕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하늘이 뒤집힐 대 사건이었다.
리나 인버스가 먹을 걸 등한시하다. 그 귀한 걸 땅바닥으로 흘리다.
소름이 돋았다. 이런 그녀의 반응이 무척이나 두렵게 느껴졌다.

『제르!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알았어. 간닷.』

이렇게 되면 생각은 나중이다. 무얼 쫓으라는건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전력을 다해 달음박질해 나갔다. 리나가 가리킨 골목을 향해 먼지가 나도록 몸을 던졌다. 하나, 둘, 셋. 손안으로 마력을 모으고 정면을 주시했다. 그게 사람이든, 지나가든 강아지든, 살아 움직인다 싶으면 들입다 마력구를 날리고 볼 작정이었다. 잔뜩 긴장해서 어깨를 비틀었다. 자, 적은 어디냐! 솜사탕을 바닥에 흘린 사나이가 지금 간다!

『어디냐구.』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꾸겨진 맥주 깡통이 굴러갔다. 구석으로 틀어박힌 마른 거미의 꺼풀이 먼지와 함께 하수구로 흘러갔다. 어찌된 영문인지 골목 안엔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제르가디스는 노골적으로 드러난 허탈감과 냉소를 가리고저 손바닥으로 코 밑부위를 가렸다.

『도대체?』
『나도 알아. 아무도 없다는 거.』
『그런데 어째서?』
『묻지 마.』

리나는 불안정한 소리로 크게 외치고 나서 바지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은 듯 싶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제르가디스를 뒤로 밀치고는 불량스러운 팔자걸음으로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한층 더 불량스럽게 침을 퉤- 하고 뱉었다. 희멀건 타액을 발로 밟아 비비면서 입으로는 연신 저주의 글월을 읊어댔다. 그 과격한 욕설은 거친 뱃 사나이들의 낯 뜨거운 걸죽함과 무척이나 흡사한 것이어서 순간 제르가디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꽃다운 미소녀 타이틀은 잠시 접었다. 지금은 완전히 굵은 소금 맛 강렬한 깡패였다.

분위기 사납다.
이럴 적의 리나에게 무슨 영문으로 그러는 거냐 물어보기는 쉽지 않다. 사납게 눈빛을 번득일 적의 그녀는 깍두기 머리의 큰 형님보다 더 살기등등하다.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당장에라도 상대의 염통을 그어버리겠다는 식의 흉폭함이 가득하다. 전자렌지 안에서 한도 이상으로 뎁혀진 싸구려 프랑크 소시지다. 건드리면 벌컥 터진다. 그러니 물러나자.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의 맹수에게 목덜미를 보여줄 수는 없잖는가.
길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솜사탕이 눈에 들어왔다. 더럽혀진 분홍색이 웬지 모르게 불쌍했다. 그것은 흡사 인생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도 반짝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휴지통으로 던져져야할 쓰레기였다.
『아깝군. 다시 사와야 하잖아, 이거.』
심드렁하게 동전 지갑을 챙겼다. 심부름 값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는데 추가 지출만 늘은 셈이었다.
그 와중에도 리나는 여전히 애꿎은 돌멩이를 향해 화풀이 중이었다.

『뭐냐. 그러니까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건가, 리나 인버스. 누군가 불미스러운 감정을 담아 댁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으시다?』
리나는 혼자서 끙끙거리는 걸 무척 싫어했다. 나아가 자신의 고민에 남을 끌어당기는 건 무척 좋아했다. 따라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친애하는 신사분들을 향해「같이 머리털 빠져 봅시다」라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점심 테이블에 착석한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청나게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멋대로 짐작했더니 정작 나온 이야기라는 건「나에게 반한 어떤 멍청이가 졸졸 따라다니며 스토커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라는 거였다. 나무 뒤에서, 건물 옆에서, 화장실 앞에서 누군가 예의 주시하고 있댄다.
이러니 제르가디스 입에서 비꼬는 말투가 튀어나올 법도 했다.
스토커? 어연 스토커. 들어는 봤나, 스토커.

가우리가 모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이마를 접었다.
『나 그거 알아. 미친 남자가 홀딱 발가벗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거지?』
『그건 스트립킹.』
『어, 그럼... 못된 남편들의 부인 바꾸기.』
『그건 스와핑.』

제르가디스는 젓가락을 부리나케 쥐어잡고 탕 소리가 나도록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자의식 과잉이다, 리나. 누군가 항상 널 주목하여 쳐다보고 있는 것 같지? 어디를 가든 시선이 느껴지고. 그거 병이다.』
리나는 절실함을 담아 부정했다.
『나도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어, 제르가디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단 말이야. 시선이 느껴진다구. 그것도 노골적으로... 뭐랄까. 버터 썩는 느끼함을 가득 담아 여자 몸을 위 아래로 죽 훑어보는 그런 느낌 있잖아. 무지하게 불쾌하고 엄청나게 기분 나쁜 거. 아슬아슬한 비키니 차림새의 여자를 비밀스레 마음으로 발가벗기고 이런 짓 저런 짓 다 시도해 먹는 그런 시선 말이야.』
『비유가 너무 노골적이다. 아줌마? 여기 단무지 좀...』
제르가디스는 주방 쪽을 향해 눈치껏 신호한 뒤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 버터 썩는 느끼한 시선이 느껴진다는 건가. 하지만 우린 아무 것도 느끼질 못했는데?』

오늘의 점심은 라면이었다.
최근들어 그들 일행은 잘 닦여진 포장 도로로만 다니고 있다. 번화가가 밀집된 곳이다 보니 야산이니 들판이니 하는 것과는 인연이 닿지 않고 있다. 이를 달리 해석하자면 산적이나 노상강도가 나타날만한 지역에서 멀리 벗어났다는 얘기다. 리나들 입장에선 재앙이었다. 나무에 열매가 없으니 따먹을 수가 없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엔 소가 없으며, 포도원엔 빈 포도통만 굴러다녔다. 배고픈 시절의 도래였다. 강도의 등을 등치는 것으로 비과세 수입을 짭짤하게 올리다가 갑작스럽게 건수가 팍 줄어버렸으니 주머니 사정이 쪼들리게 된 것은 당연지사. 하는 수 없이 그들은 값 싸고 부피 많은 음식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심심찮게 결정되곤 하던 메뉴가 라면이었다.

뭐, 가끔씩은 국물 얼큰한 걸 먹고 싶어지니까 딱히 불만은 없다.
제르가디스는 미리 나온 단무지 반찬을 아작아작 씹었다. 차가운 촉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것 같다. 먹는 모습이 무척이나 맛있어 보인다. 가우리는 단무지 접시에 초도 넣지 않았는데 성급하게 먹기부터 한다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제르가디스는 코가 찡해오는 신 맛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아저씨의 입맛을 가진 가우리가 초가 들어간 병을 반찬 위로 기울이려던 찰나 젓가락으로 병을 탁 밀쳐내며 이를 제지했다.

『짐승과도 같은 본능으로 살아가는 가우리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기척이라는 것엔 제법 민감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 최근들어 불온한 기색이라는 건 느껴보지도 못했어. 그리고 그건 이쪽에 있는 가우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그렇지?』
동의를 구하는 그 질문에 가우리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나저나 초를 넣으면 안될까. 딱 몇 방울만 떨어뜨리면 괜찮을 거 같은데.
『수상한 사람? 없었어, 없었어.』
『거봐. 없었다잖아.』

하지만 리나는 자신의 주장을 쉽게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단순한 착각이라고? 자의식 과잉이라고? 있지도 않은 일 가지고 소동을 피우는 거라고?
그녀 또한 젓가락을 들었다. 그걸로 쾅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을 내리쳤다. 젓가락이 도끼였다면 아마 테이블은 단번에 두쪽이 났을 거다. 그녀는 불만 가득한 표정이 되어 뺨을 하나 가득 부풀렸다.
카메라에 찍히지 않는다고 귀신이 세상에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거냐. 그녀는 세차게 도리질했다. 그것은 분명한 존재감이었다. 증발되고 사라진 드라이아이스라고 할지언정 몸서리치도록 차가운 공기는 남는다. 냉기와 추접함은 의외로 닮은 구석이 있다. 손으로는 만져지지 않지만 사한 기운이 피부를 덮는다.

『스토커! 분명 있단 말이야!』
『아아.』
『얘들아. 단무지에 식초 좀 넣으면 안될...』
『내 말 좀 들엇! 있다니까! 스토커!』

한쪽 귀로 흘렸다. 거인 걸리버의 바지춤에 매달린 리리파트 소인들 보듯 리나를 쳐다봤다. 제르가디스는 이제 그 이야긴 그만하자며 팔을 벌려 보였다. 마침 주문한 라면이 쟁반 위에 올려져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시다. 잘 익은 라면 위로 맛깔스런 뜨거운 증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반으로 쪼갠 삶은 달걀이 면발 맨 위에 올려져 환하게 빛을 발했다. 채 썬 당근에 부스러뜨린 김. 호박도 들어갔다. 가우리는 입맛을 다시며 젓가락을 챙겼다. 기가 막히게 좋은 냄새 때문에 그의 콧구멍이 리드미컬하게 벌릉거렸다. 종업원이 그릇을 내려놓기도 전에 쟁반 쪽으로 팔을 뻗었다. 아예 빼앗아 들었다는게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다. 골치 아픈 이야긴 잊어버리자.

『어서 먹자.』
『잘 먹겠습니다.』

라면 같은 종류는 불기 전에 허겁지겁 먹어야 제맛이다. 논쟁으로 입을 바쁘게 하리, 아님 먹고 즐기는데 써먹으리. 당연히 후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이어 목구멍으로 면발 들이키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껄떡껄떡 국물이 넘어가고, 젓가락들이 사자를 교련하는 채찍인양 춤을 추었다.
그래서 리나가 꺼낸「괴이한 기척」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마지막 한 가닥의 라면을 돌돌 말아 입안에 넣고 난 뒤에도 리나는 더 이상 그 화제를 끄집어내지 않았다. 그저 입가심용 물을 마셨고, 고춧가루가 잇몸에 끼지는 않았는지 슬그머니 머리 숙여 그 점만 확인했을 뿐이다.
다음으로는 딸기 무스와 바닐라 치즈 무스 중에 어느게 더 맛있느냐는 걸로 모두와 말싸움을 벌렸고... 그 다음으로는 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커피 둘 중에 어느 것이 고구마 케이크와 어울리느냐를 놓고 맹렬한 설전을 벌렸다.
따라서 스토커니 하는 건 완벽하게 잊혀진 이야기처럼 보였는데...

내심 신경이 쓰이긴 쓰였나 보다.
하나, 둘, 셋, 소리와 함께 가위 바위 보를 했다.
가우리가 주먹. 제르가디스는 보자기였다.
칫 소리를 내며 가우리가 뒷통수를 긁어댔다. 곤히 자는 중에 억지로 깨어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장 졸려 죽을 것 같은데 무작정 참는다는 건 그보다 몇 곱절 더 힘들다. 내가 주먹을 냈다 이거지. 어디엔가 있을 누군가에게 애꿎은 원망부터 던지고 보는 가우리였다. 아무리 강철의 팔뚝이라고 해도 졸음엔 털 깎인 삼손이 되어 버린다.
『그럼 너는 밤 1시부터 새벽 3시까지. 나는 새벽 3시부터 5시까지.』
잊으면 안된다며 제르가디스가 딱딱 어조를 끊어 강조했다.

무슨 시간 약속이냐고? 바로 불침번 약속이었다.
일부러 방을 나란히 잡았다. 리나가 5호실, 남정네들은 그 옆방인 6호실이었다.
여관방 벽이라는 건 어디를 가나 얄팍한 편이다. 두께 3미터의 기암성 흉내를 내는 여관방 있으면 어디 한 번 나와보라고 해라. 대다수는 얄팍한 합판에 벽지만 살짝 바르고 끝낸다. 그게 불법이라고 해도 그렇다. 건축법과 소방법은 뇌물로 무마시키고 최대한 자재를 아끼고 본다. 따라서 옆방에서 부부싸움이라도 나는 날엔 그 층의 숙박객 눈자위가 불면으로 인해 시뻘겋게 변한다. 이런 마당에 뭐하러 복도 한 가운데 버티고 앉아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등을 밟히냐. 거기다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에 비해 귀가 예민한 편이다. 구태여「문 앞에서 극악의 죄수 지키기」식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 그냥 건너편에서 수상한 기척이 들리지는 않나 그것만 신경쓰고 있으면 충분하다.

『보온병에 커피 챙겨놨다, 가우리.』
『야식은?』
『배가 부르면 더 졸린 법이다. 참아.』

제르가디스는 낮에 입었던 셔츠에 면바지 차림으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 여관방에서 제공한 잠옷은 그대로 개켜서 테이블 위에 고스란히 놓아두었다. 기분상 께름직스럽지만 이 모든 건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애용하는 검도 침대 모서리에 세워두지 않고 아예 이불 속에다 집어넣었다. 이쪽이 여차하면 휘두르기 편하다. 그나마 예의를 차린다고 신발은 벗어 카펫트 위에 나란히 놓아두었다. 구두까지 신고 침대에 눕는 건 행동파인 그에게도 다소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게다가 자면서 신발을 안 벗으면 새벽 무렵엔 발이 퉁퉁 붓는다. 

『먼저 잔다. 그럼.』
드러눕자마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숫자를 다섯까지 세지도 않았는데 꿈나라다. 여차하면 스프링처럼 튕겨오르겠지만 이쪽에서 먼저 신호하지 않는 이상 새벽 3시까지는 깊은 수면을 취할 것이다. 기술이라면 기술, 능력이라면 능력. 다재다난했던 일생이 그러한 기적의 수면을 가능케 했다. 독충 가득한 동굴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눈을 붙인다. 축제판 벌어진 시끄러운 난장판 속에서도 평온하게 잠들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누구처럼 불면증으로 고생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망치로 얻어맞았다며 의식의 선을 끊고 모선(뇌)과의 연락을 두절시킨다. 그 다음에는 정돈된 숨소리를 내뱉고 침대 밑으로 가라앉는다.

『허어.』
이렇게 제르가디스가 꿈나라를 탐색하는 동안 현세에 남겨진 가우리로서는 딱히 할 일이라는게 없다. 멍하니 벽을 노려봤다가, 뒷통수를 긁다가, 옆구리도 긁는게 전부이다. 간혹가다 모닥불에 나뭇가지라도 집어넣으면 덜 심심하련만, 하다못해 부엉이 우는 소리에 따라 손가락을 까딱거리기라도 하면 무료함이 덜하련만... 난감했다. 불 꺼진 방에서 밋밋하게 앉아 뭘 하고 시간을 죽으면 좋을꼬.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천장을 노려봤다. 벽지의 얼룩이 귀신의 얼굴처럼 다가왔다. 기분이 나빠져서 벽에 걸린 거울을 쳐다봤다. 시커멓다. 하다못해 시선 둘 곳도 없단 말인가. 가우리는 약간의 짜증스러움을 느끼며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옆방에 머물고 있는 리나는「피부 미용엔 숙면이 최고」라며 1시간 전에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고롱- 하고 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소리가 규칙적이고 나지막한 걸 보아 그녀 또한 이미 깊은 수면에 잠겼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불에다 베개가 쥐어뜯기는 듯한 소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부스럭대는 기척이 너무 커서 혹시나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뭘 모르는 사람은 엉뚱하게 착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잠자면서 발차기에 주먹질을 서슴치 않는 그녀이다. 이래서는 몸부림 수준을 벗어나 광란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리나와 한 침대에 들어갔던 아멜리아는 다음날 퍼렇게 멍든 눈자위를 가지고 나타난 적도 있다. 도대체 잠결에 누구랑 씨름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공주는 탄식했다. 그리고는 감히 리나 인버스와 동침을 시도한 자신의 무지몽매함을 꾸짖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끝도 없이 얻어맞았댄다.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팔을 들었다, 놓았다. 반경 1미터 안으로 안전할 수 있는 장소라는 건 그 어디에도 없댄다. 이불을 뜯고, 베개를 물고,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는다며 시트를 질겅질겅 씹는댄다. 뿐만 아니라 옆에 누운 사람도 씹는다는 것이다. 그 아픔을 견딜 수 없어 담요를 들고 침대에서 내려와 구석 바닥에 움추리고 누웠더니만「내 푹신거리는 베개가 어디로 갔냐」라며 열심히 찾더란다. 눈 감은 채 손으로 바닥을 탁탁 치다가 목표물 발견, 흡족하게 웃더니 강제로 끌어안더라나. 그리고는 이빨로 와그작.
머리를 물렸다며 아멜리아는 생생하게 남은 이빨 자국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의도적 폭행의 흔적과 너무나 닮아, 돈 내고(?) 구경하던 가우리도 무척이나 놀랐었다.

「내가 언니를 밧줄로 묶을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요.」

나라도 밧줄로 묶는다. 머리를 생으로 물린다는데야. 가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이야, 큰일. 저래서야 누가 색시로 데려가겠어. 리나도 큰일이라니까.』
그 색시로 데려갈 사람이라는게 당사자라는 건 새까맣게 잊어먹고 그렇게나 태평스런 소리를 중얼거리는 가우리였다.

벽 건너편으로 다시금 기척이 들려왔다. 가우리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오우, 슉슉 하는 이 소리. 팔을 앞으로 뻗었다. 들척이며 이불을 찼다. 대단해, 대단해. 잠결에 권투를 한다고 해도 믿겠다. 나지막한 쿵 소리- 똑바로 누워 허리를 들어 올렸다가 물고기처럼 튕겨오르면서 두 다리로 침대를 찼다. 전기에 감전당했나, 곧바로 다리를 들어 허공을 둥굴게 걷어찼다.
쿡쿡 웃었다. 다른 때보다 잠투정이 한결 더 격렬했다.
베개가 굴러다니고 있다. 풀썩거리다 못해 이불이 아래로 떨어진 것 같다. 슉- 하고 다시 팔을 뻗는 기척이 들려왔다. 움직임이 격렬하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이래서는 불편함에 못이겨 돌아누웠다기 보다는 가위에 눌린 상태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악령과 죽어라 기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잖...

서서히 가우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혼자서 발버둥을 치고 있다고?
틀려.
저 몸놀림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그는 곧 검집을 들고 스프링처럼 튀어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