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브님만 등장하는 납량 특집 슬레이어즈 패러디


그래... 인간의 껍질이라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때가 되면 적당하게 밥을 먹어야 하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어야만 한다. 바보라고 생각이 들 지경으로 추위와 더위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조금만 격하게 움직이면 피곤함이 압도한다. 조건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귀찮은 고통이 한바탕 휘몰친다. 짜증스럽다.
예전엔 미처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하찮은 것들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다고나 할까... 꼴꼴하다.

그리하여 지금처럼 밤 이슬이 부슬부슬 내린 추접한 상태에서 변변한 잠자리 하나 찾지 못한 채 길바닥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절로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다. 몸만 아픈게 아니라 마음마저 불편해진다.
일이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날 이 꼴로 만들어 놓은 수룡왕의 그 빌어먹을 상판떼기가 눈앞에 어른거릴 수밖에. 자동으로 걸걸한 욕이 튀어나온다.

『우라질 퍼런 용 새끼! 할 수만 있다면 그 잘난 면상을 다시 한 번 콱콱 짓밟아주고 싶군. 위대한 날 이 모양 이 꼬라지로 만들어 놓다니. 천벌이다. 잘도 뒈졌다. 우웨취!! 어, 춥다. 젠장.』

코가 콱 막혔다. 어깨 위로 축축한 이슬이 잔뜩 내려서인지 몸이 차갑다.
그러나 그게 문제냐. 무엇보다도 피곤했다. 두 다리가 묵직한 것이 커다란 모래 주머니를 양쪽에 다섯개씩 매달아 놓은 것 같다. 비록 알맹이가 마왕이라고는 하나 껍데기는 인간. 일주일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철야로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과로엔 대책 없다고.
덕분에 공간을 뛰어넘어 장소를 이동하는 일도 버겁다. 산삼이라도 먹는 건데, 아무래도 정력이 딸려... 이러다간 본격적으로 쌈질을 하기 전에 지레 죽게 생겼다.

하는 수 없다.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어깨를 돌리다 말고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내 명령을 받들고 디루스 왕국에서 일을 추진하고 있는 랄타크 녀석과 예정대로 합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금쪽처럼 아까운 것이 현실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잠시 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뭐, 한 두어 시간 정도 눈을 붙이는 정도라면... 그 정도의 사치는 누려도 상관 없겠지.
그래, 다 내 맘이야. 누가 나에게 감히 뭐라고 그럴 것이야? 쉬자구. 디루스 왕국의 전력을 손에 넣는 일과 용족과 요정들에게 협력을 구하는 일이 뭐 대수야? 가끔은 여유도 부리면서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볼 필요도 있다구. 음.

그때였다.
어, 어엇!!
순간적으로 나는 약한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사람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별안간 등줄기가 서늘한 것이 기분 좋다. 흡사 참았던 쉬야를 시원하게 싸고 난 다음의 그 쾌감처럼... 짜릿하다.

무엇이었을까? 달콤쌉싸름한 느낌이 가슴 안쪽으로 안개처럼 밀려 들어왔다.
인간은 본디 이것을 끔찍히 싫어하지만... 마족으로서의 나의 본성은 그것들을 엄청 환영하는 바이다.

끔찍스러울 정도의 살기, 증오심, 그리고 매서운 독기.
100년 묵은 피로가 확 가시는 느낌이다. 이거 좋다! 마치 브랜디 한 잔을 시원하게 목구멍 안으로 들이 부운 것 같다. 심장이 활활 불타오르면서 피가 뜨거워졌다. 옳거니, 생활의 활력이로고!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 달콤한 느낌을 향하여 가랭이가 찢어져라 걸어갔다. 장소가 그리 멀지도 않다.
그렇게 숲속으로 한 20분 정도 걸어 갔을까?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곳에 [그.것.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똥파리 한 마리가 앵앵 거리며 주변을 한가롭게 날았다. 시커멓고 둥글다.
나는 히죽 웃으며 옆구리에 차고 있던 장검으로 그것을 툭 건들여 보았다.
덕분에 둥글게 생긴 그것이 옆으로 빙그르 돌아섰다.
초점을 잃은 회색 눈동자를 치켜 뜬 젊은 여인네의 얼굴이 만 천하에 드러났다.

턱을 어루만지면서 목 윗 부분만 남은 그녀의 외모를 즐겁게 감상했다.
음, 이만하면 못 생기진 않았다. 사방으로 뻗은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도 명주실처럼 풍성한 것이 꽤나 부드러워 보인다. 살짝 벌린 입술이 섹시하다. 비록 새하얀 혓바닥이 턱 아래까지 삐져나왔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살아 생전엔 미인이란 소리를 들었겠다. 입술도 도톰하고 눈썹도 보기 좋게 잘 났다. 코도 오똑한 것이 귀티 있게 생겼다.
이야, 전반적으로 내 취향이야.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것이 엄청 성깔 있게 생겼는데? 깐깐해 보여.
흠흠. 그래서 살해당했나? 아깝군. 나이도 아직 젊어 보이는데 말이야.
어디 보자. 그런데 이년의 몸뚱이는 도대체 어디로 갔나...

호기심에 숲 주변을 찬찬히 둘러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남자로서의 호기인지, 아니면 마족으로서의 당돌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 이래가지고는 점수를 정확하게 매기기가 어렵잖아. 자고로 여자를 정확히 보려면 잘 빠진 엉덩이랑 풍만한 가슴은 필히 봐야 하거든. 목 윗부분만으론 어림도 없지. 그런데 이게 대체 어디로 굴러다니고 있는 거냐. 엉.』

이상했다. 생각과는 달리 주변이 지나치게 말끔하다. 풀 위로 마른 핏방울이 한 두 개 떨어져 있을 뿐, 피에 흥건히 젖어 질척거리는 흙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목을 절단했다면 선혈이 낭자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건 지나치게 깔끔하다.

만족할테니 어디서 잘라진 손목이라도 나와라.
살짝 이마를 접으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뭐냐고. 목만 썰어 이쪽으로 내다 버렸나. 쓰레기처럼? 에구구.

툴툴거린 뒤에 검집을 머리카락 사이로 찔러 넣어 여자의 목을 위로 들어 올렸다. 몸뚱이는 아직 못 봤지만 상관 없다. 내 호기심을 자극한 것만으로도 족하다.
가늘고도 기다란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쥐고 그녀의 머리를 내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동공이 풀린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나의 두 눈과 마주쳤다. 그 즉시 주변으로 농염한 독기의 냄새가 확 퍼져 나갔다.
독이 든 초컬릿처럼 달콤한 향기...
흠흠, 만족스럽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주제에 썩은 생선처럼 맥이 탁 풀려버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니, 평범한 시체는 분명 아니로구나. 게다가 할 말이 잔뜩 있다는 투로 도톰한 입술을 움찔움찔 움직이고 있다.

물론 인간의 사체라는 건 죽은지 약 70시간이 지나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원래대로 축 늘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 여잔 - 정확하게는 머리통은 얼핏 보기에도 사후 경직이 풀리면서 부패하기 시작한 근육과 신경 조직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말하고 싶어한다? 뒈진 주제에? 장하다. 칭찬해주고 싶다.

그러나 어쩌리. 목으로 연결된 허파가 날아간 이상 숨을 토해낼 수가 없으니 입술을 어렵게 움직인다고 해서 제대로 된 말소리가 만들어질 리가 없었다. 그건 눈물겨운 발버둥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봐. 안 들린다. 뭐라고 떠드는 거냐. 응?』
여자의 머리통을 좌우로 무지막지하게 흔들어 봤다.
《그를... 죽여... 버릴... 거다... 날... 감히...》
입술이 그렇게 움직였다.
『호오∼, 죽어도 그냥 자빠질 수는 없다는 거냐? 그렇게도 억울했었냐? 참으로 대단한 집념이로군. 그 정신 상태가 마음에 든다. 아무렴. 누가 죽였다고 그대로 내뻗을 수는 없는 것이지. 나 역시 수룡왕이라는 작자에게 멋지게 난도질 당해봤던 경험자거든. 그러니 귀신 아가씨? 선배로서 말하는건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귀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든, 살고 싶다는 그 의지 하나만 붙잡고 너의 존재를 이어가도록 해라. 그건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야. 아무렴. 내가 장담하지.』

이쪽에서 고개를 끄떡거려 주자 여자의 썩은 동태같은 눈이 다시 빙그르르 돌았다.
이런, 내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왜 자기가 귀신이냐고 묻고 있는 듯 하다. 미이라처럼 말라붙은 눈으로 매섭게 흘겨보기까지 다 하다니... 귀 밑을 손가락으로 북북 긁다 말고 멎적게 웃고 말았다. 이 여잔 정말 재미 있다.

『허허허, 정말이지 깜찍하구나. 알았다, 알았어. 귀신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은 취소하마. 그럼 되었지? 그런 것 가지구 신경질을 부리긴.』
《죽인다...》
이번에도 퍼렇게 변색된 입술이 옴짝달짝 움직였다.
『날 죽이고 싶다는 거냐? 하, 좋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해라. 맘대로 해 보라구. 하지만 난 그렇게 호락호락 죽어주진 않는다. 뭐, 그러나 도전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말리진 않으마.』

이쪽에서 투덜거리기가 무섭게 부드러운 촉감의 머리카락이 나의 손가락에 죄여오듯 감겼다. 여자의 눈꺼풀이 가만히 내려 앉았다. 신경질적이면서도 동시에 풀 죽은 그런 모습이다.
《아...냐. 틀려. 당신은... 내 상대는... 당신이... 아냐...》
이번에는 그녀의 헤 벌려진 입에서 쉬익 하고 바람 같은 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무래도 나의 마기에 이놈의 시체가 반응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응? 지금 뭐라고 했나? 귀신 아가씨.』
《또! 아까 취소한다고... 해 놓구는... 난 귀신...이 아냐... 미워... 왜 날 이런 꼴로... 만들었나. 원망...스럽다. 이런 걸 원한... 것이 아닌데.., 미워. 증오해. 죽여...버리겠다... 기필코... 죽여 주마. 각오... 하...》

저∼런. 깜빡 했군. 여자는 원래부터 생겨 먹기를 말이 많게끔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잊어 먹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생각이 난다. 언젠가 해왕 다루핀이 모두가 모인 가운데 우스개 소리처럼 다음과 같이 주절거린 적이 있었다. 붉은 용신 쉬피드란 작자도 잘 빠진 생김새와는 달리 입심이 엄청나게 걸다나 뭐라나. 까마득한 오랜 옛날에 있었던 신마 전쟁 시절, 작은 호흡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산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그 여자는 이성을 잃은 나머지 천둥 같은 목소리로 샤브라니구드님과 말빨 드세게 싸워댔다는 것이다. 덕분에 곤드와나 대륙은 우리들 마족이 손가락하나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전멸... 목소리 하나로 대륙을 청소하는 신이라. 잘났어. 그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대단한 신이지. 샤브라니구드님도 결국 당신 누님의 따발총 입씨름엔 참다 참다 못 견디고 귓구멍을 재빨리 틀어막았다고 했으니까...

이야기의 진위는 잠시 뒤로 미루자. 아무튼, 여자라는 건 절대 강적이야, 강적.
그녀가 주절주절 떠드는 광경은 그리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니었다. 색이 변한 죽은 입술을 부들부들 떠는 것으로도 모자라 길게 내어민 혓바닥을 좌우로 흔든다. 완전히 도깨비다. 평범한 인간이 이걸 봤다면 당장 오줌부터 쌌을 거다. 물론 시체를 가지고 장난질하기 좋아하는 그 시건방진 헬 마스터 피브리죠 녀석이라면 이게 웬 신기한 장난감이냐며 박장대소를 했겠지만... 난 아니라고.

『시끄러워 죽겠군. 저기, 원래부터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이었나?』
《응?》
나의 목소리의 색채가 뒤바뀐 걸 깨달은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안심해라. 아가씨. 너의 살기 가득한 집념을 봐서라도 네 대갈통을 박살내지는 않으마. 그냥 이 정도로 얌전하게 작별 인사를 하지. 그럼.』

여자가 깜짝 놀라 머리카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구. 나는 시원 섭섭하게 그녀의 머리통을 꽈악 잡고 온 힘을 다하여 저 머나먼 남십자 별을 향하여 힘차게 던졌다.
앗, 하고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통이 검은색 야구공처럼 하늘을 날았다.
괜찮아. 운 나쁘게 뾰족한 바위 틈에 떨어지면 그 길로 끝장이겠지만 또 알아? 푹신거리는 잔디밭 위로 낙하할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면 강물 속으로 첨벙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지. 다 네 팔자야. 그러니 알아서 하라구.

걸죽해진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아내면서 그렇게 일을 대충 마무리를 지었다.
그래, 잘한 일이다. 혹시라도 목이 잘려져 나간 여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는 내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해봐. 그것도 옆구리에 커다란 검을 꿰차고 말이다. 그런 남자를 누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나. 열이면 열이 미치광이 살인자라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도 남지.
할 일도 많아 죽겠는데 귀찮은 문제를 일부러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니 이 정도에서 그만하지 뭐.
능글맞게 휘파람을 불어대며 저 멀리 언덕 아래로 아련하게 보이고 있는 작은 불빛 하나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많이 걸은 것 같은데 마을은 아직 멀었다.
그래도 외진 산골 기슭에 웬 오두막 하나가 보이고 있다. 모진 풍파에 견디다 못해 칠이 벗겨진 낡은 지붕 위로 안개 느낌의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렸다! 멋진 행운이다.
라고 해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다.
건물 자체가 삐그덕 비명을 지르고 있다. 길게 드리워진 음습한 그늘이 할 말을 절로 잃게끔 만들어 주었다. 현관 앞으로 걸려진 노란 등불이 도깨비 불빛 같아 기분 나쁘다. 서늘한 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양새가 성질 고약한 유령이 숨어서 못된 장난을 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수상해. 절대 수상해.
얼굴을 찌푸리며 현관을 향하여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등불이 흔들리면서 뻣뻣한 그림자가 한층 더 길게 늘어났다.

『자, 잠깐! 누, 누구요? 멈춰요! 거기 서 있는 건. 사람이요, 도깨비요?!』
미풍에 슬그머니 흔들리는 거실의 커튼 안쪽으로 사람의 인기척이 등장했다.
뭐냐, 엄청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 아이고, 처절하게 궁상맞다.
순간 비가 개이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싹 맑아졌다. 밝혀두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반어법이 아니다.

『누구긴. 사람도 아니고 도깨비도 아니다. 난 마왕이다!!』
내 딴에는 놀려주려고 한 말에 상대방이 흡,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마셨다.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흡사 캐스터네츠 같다. 딱딱, 딱딱딱. 박자에 맞추어 춤이라도 추라는 건가? 한심하다.
어쩔 것이여. 그 즉시 현관 계단을 한 걸음에 뛰어 올라갔다. 그가 내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등불 아래로 비스듬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보는 사람 편안하라고 짓는 미소는 일부러 생략했다.
때로 어떤 종자의 인간은 웃을 때가 더 지독하게 수상해 보일 수도 있다. 아쉽지만 나 역시 그 특수한 종자에 해당되었다.
하긴, 정확히 말해 난 인간이 아니지.

『휴우, 사람이잖아. 농, 농담이셨군요. 짓궂기도 하시지. 난 또 뭐라고...』
무거운 쇠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초췌한 안색의 남자가 코만 내밀었다. 엄지 손톱만한 너비로 현관문을 열고는 그 이상은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그래도 그 정도 틈이면 보이는 건 다 보인다. 아무리 밤이라고는 하나 옷차림이 눈에 띄게 흐트러져 있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바지도 대충 걸쳤다. 덕분에 누렇게 절은 더러운 속옷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다음으로는 땀에 절어 있는 덥수룩한 적갈색 머리카락... 뺨도 수척하고 혈색도 거의 없다.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로는「양심도 없지, 도대체 이런 나에게 뭘 원하슈?」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양심이라는 것이 없다.
내가 뭘 원하느냐고? 원하는 거야 많지.
나는 그 사내가 잘 볼 수 있도록 해서 금화 두 개를 꺼내보였다.
역시 황금은 강하다. 그게 무슨 뜻이냐며 사내의 눈이 곧장 휘둥그레 떠졌다.

『깨끗한 침대가 필요해.』
『하, 하지만 우리집은 여관이 아닌데요. 아...! 잠깐만요.』

못난 놈. 말은 그렇게 하면서 부시럭거리며 현관문은 왜 열고 있나.

인간 남자가 걸쇠를 서너 개 만지작거린 뒤에야 드디어 문이 열렸다.
잔소리 할 것 없었다. 신발 바닥에 묻은 흙을 털고 안으로 들어섰다. 비아냥거리듯 엷은 입술을 살짝 비틀며 주인 남자의 손아귀로 금화 두 개를 집어 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집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내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

『저기, 금화는 괜찮고요... 굉장히 커다란 검입니다요. 나그네님. 그것도 매우 좋아 보이는...』

어랍쇼. 이거 의외의 일이다. 그 남자는 금화보다는 내 옆구리에 매달린 장검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무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구원 받았노라며 마른침을 삼켰다.
침을 삼켜도 목이 탔던 것 같다. 안절부절해 하면서 목을 만졌다.
저러단 두 눈도 금붕어마냥 툭 튀어나오게 생겼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사내의 뺨으로 잠시나마 혈색이 돌아왔다.

『검사이시군요, 나그네님. 그것도 실력이 대단하신가 봅니다. 그렇죠?』
『검사라.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두지. 왜, 내가 검사라서 불만이냐?』

귀찮다는 내색을 확실히 하고 난 다음, 실내를 한 번 휘휘 둘러보았다.
음,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그럭저럭 깔끔하다. 밀납의 등잔이 그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타올랐다. 그 가운데 잘 정돈된 가구며 오래된 낡은 집기들이 카펫 아래로 무겁게 뿌리를 내렸다.
면 재질의 긴 커튼이 빈틈없이 드리워진 탓일까, 전반적으로 실내 분위기가 탁하다.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코를 만졌다. 먼지 내음이 강했다.
이러니까 쥐가 있는 거겠지? 무엇인가가 지붕 위를 재빠르게 뛰어갔다. 그 탁탁탁 소리가 쥐라고 생각하기엔 좀 더 묵직한 느낌이었지만... 그게 쥐가 아니라 고양이라고 해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

『저기요, 나그네님. 그렇다면 그 커다란 검으로 싸움도 잘 하시겠지요? 대충 뵈어도 대단하실 것 같습니다. 저기... 그러니까 절 좀 도와주세요. 제 마누라가... 여자가 있는데 말입니다. 실은...』
『에잇. 집어치워. 귀찮다.』

엿가락처럼 끈적거리는 것은 딱 질색이다. 일언지하로 그의 말을 딱 잘랐다.
이쪽의 차가운 반응에 사내의 표정이 엄청나게 어두워졌다. 그러나 뭐가 그리 다급한지,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애원하며 달라붙기 시작했다.
진짜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보다. 나는 그의 몸에서 애간장 녹는 냄새를 맡았다.

『안돼. 안돼! 그, 그렇지. 술.., 술 좋아 하시지요? 저에게 최고급 적포도주가 있습니다. 저랑 같이 마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나그네님. 아주 독하게 빚었지요. 피의 냄새, 아니. 술의 향기가 아주 일품입니다. 여느 가게에서도 이런 건 보기 어렵지요. 어떻습니까. 네?』
『호오∼ 어떻긴. 당장 가져 와라. 그거 좋지.』

술이라.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지. 즉각 나의 눈이 새우 등처럼 휘어졌다. 거실을 그대로 지나치려다 말고 Back, 몸을 빙글 돌려 거실 소파 위로 그대로 털썩 앉았다.
이야, 독하게 빚은 포도주라. 벌써부터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내가 시원한 자세로 두 다리를 쭉 뻗고 나오자 사내는 좋아라 반색했다. 급히 장식장을 열고 부산을 떨었다. 잔을 챙길 생각도 못하고 아예 병째로 한아름 안아서 뛰어왔다.
저런, 그렇게 허둥대다간 그 아까운 걸 다 깨 먹을라!
보다 못한 나머지 내가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그 가운데...

달그닥.

조용히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한 젊은 여자가 우리들에게로 다가왔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공기가 방 한가득 흘러 넘쳤다.

『여보? 도대체 무슨 일이죠? 이 오밤중에 누가 왔어요? 손님인가요?』

새침하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동백꽃을 연상시키는 새빨간 입술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을 하늘하늘 늘어뜨리고 어깨 위로는 검정색 숄을 걸쳤다. 가느다란 목에는 커다란 진주 목걸이를 풍성하게 묶었다. 등잔 불빛을 받은 진주가 우윳빛 광채를 뿜었다.
헤에, 미녀다. 눈꼬리가 서늘서늘하게 살짝 치켜 올라간 것이 어디서 많이 본 인상이다.
뭐, 당연하지. 우린 방금 전에 만난 적이 있으니까.

내 시선을 당돌하게 되받아치며 그녀가 보일락말락 고개를 까딱였다.
좋다, 이거야. 콧김을 흥 내뿜으며 테이블 위로 두 발을 올려 놓았다.
돌아가는 꼴이 엄청 재밌다.
박수칠까.
잘 해보라구, 동지.

『히이익!! 다, 당신!! 여보!!』
자기 마누라를 발견한 남자의 얼굴이 보기 좋게 걸레가 되었다. 몸에 난 털까지 곤두섰다. 꼭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 같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모양이 조금은 불쌍했다.

『이봐, 뭘 그러고 있나. 그러지 말고 술이나 먹자구. 응?』
나는 남자가 끌어안은 술병을 확 낚아채며 신나게 웃어댔다.
하하하. 이러면 안되는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 거지? 하하하!

『아아아, 하, 하지만!!』
『이봐. 하지만이고 두지만이고 간에 코가 삐뚤어 지도록 마시자구! 어이, 귀신 아가씨. 이 집엔 안주거리가 어디 없나? 이왕이면 고기가 좋겠는데 말이야.』
『어머, 귀신 아가씨라뇨!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뭐죠? 술만 내오고 안주가 없단 말씀입니까? 저런, 여보? 손님 접대가 엉망이군요. 그러시면 아니되어요. 이래가지고는 집안 망신이죠. 손님께서 고기가 드시고 싶으시다잖아요.』

남편을 꾸짖고 등 뒤로 숨긴 칼을 번쩍 뽑아 들었다.
엄청나게 재빨랐다. 팔이 한 번 위로 움직인다 싶었는데 나의 얼굴 위로 시뻘건 피가 확 뿜겨졌다.
투우웅.
무거운 물체가 마루 바닥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천장까지 온통 시뻘건 색으로 도배가 되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깨끗하게 절단된 남자의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여자는 우아하게 허리를 굽히며 피 한 방울 묻지 않는 칼을 다시 자기 등 뒤로 감추었다.
완벽하다!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 지경이다. 섬짓하도록 단아한 표정이라니, 부라보!

『최고로 근사한 안주다! 멋진 걸? 반할 정도야!』
여자는 검정색 숄을 손가락으로 어깨 위로 끌어올리며 다시 한 번 나와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퀭한 눈이긴 하나 이젠 더 이상 죽은 자의 눈빛은 아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캐묻고 싶진 않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법이다. 내가 상관할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내 속 뜻을 알아차린 걸까? 그녀가 히죽 웃으며 몸을 돌렸다. 2층 침실을 향해 계단으로 발을 올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적마다 그 충격으로 목이 이상한 각도로 비틀어졌다. 여자는 재빨리 손을 올려 흔들리는 자기 목을 붙들어 잡았다.

『손님? 원하던 안주를 잘 챙겨 드렸으니 제 남편과 함께 이곳에서 잠시 즐겁게 쉬시지요. 너무 과음하진 마시구요... 그럼, 전 이만.』
단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고서 그녀가 2층으로 올라갔다.

웃으며 사내가 가져다 놓은 포도주 병의 마개를 뜯었다. 병 채 나발을 불며 맛을 음미했다.
햐! 이것이야말로 피의 냄새로군. 향긋하다.

《나쁜 년... 감히 지 남편을... 손님 접대용... 안주로 삼아? 뒈질 년...》
목만 남은 사내가 심각하게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다.
나는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파랗게 질린 채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있는 사내의 머리통 위로 포도주를 콸콸 들이부었다.

『이봐. 내 한 가지 말해주지. 그대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야. 기가 막힌 포도주다. 캬아악. 이런 건 천년을 살아도 구하기 어려운 것이지. 아암!』
《그러지 말고... 혼자 마시지 말고... 나에게도... 좀 더... 주시오. 나그네님.》
『그래. 날 밤 새도록 그냥 마셔 보자구! 자, 붓는다, 부어!!』
《주방에... 소금으로... 절인 라임도 있는데... 치잇. 망할 년.》
『에잇. 소금에 절인 라임이라니. 그딴 건 필요 없다구. 이봐, 술은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야. 자고로 술이라는 것은 이렇게 화악...!!』

남자의 머리 위로 발을 콱 얹어 놓고 잠시 일장 연설을 늘어 놓았다.
바닥으로 피인지 포도주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선홍색의 액체가 흥건히 젖어 들어갔다.
오늘 밤은 형편 없이 취할 것이 분명하다.


*** 하이텔 슬레동에 처음 가입하고 선 보였던 납량 괴기물입니다. 귀신 부부 이야기... 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