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무지하게 아팠다. 날아다니는 망치들의 세레나데였다. 지금이 무슨 요일인지, 아침이지 저녁인지도 생각이 안 났다. 벌에 쏘여 날뛰는 말 뒷굼치에 채여 의식을 잃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나 하는 생각을 들 정도였다.
위는 뒤집어졌다. 날카로운 갈퀴발이 내장을 긁고 지나간다. 어이구야 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었다. 허리와 다리, 그리고 어깨가 통증을 호소하며 짜부라졌다. 한 마디로 말해 죽기 일보직전이다. 입안은 텁텁했고 숨을 쉴 적마다 싫은 냄새가 났다.
그래. 나 어제 술 많이 먹었다..........

라고 생각했다가 움찔했다.
술? 내가?

주먹으로 이마를 눌러봤다. 명품 포도주 산지인 제피리아가 바로 내 고향이다. 거기다 내 아버지는 포도주 대 상인이다. 따라서 우리집엔 늘 술병이 넘쳐 흘렀고, 환경의 영향으로 어릴적부터 술을 입에 대는 일이 잦았다. 식탁 위로 포도주가 올라가는 건 당연지사였다. 우리 식구들은 포도주 없이는 저녁을 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코가 비뚫어지도록 마신 적은 거의 없다. 우리 아버지는 의식불명이 되도록 술에 취한다는 건 인간 말종이나 하는 짓이라며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생각이 짧고 자제력이 부족한 인간들이나 그런 멍청한 짓을 하는 거였다. 진정한 음주는 풍류다. 그 맛과 향을 즐겨야 함이 마땅하다. 혀가 마비되도록 술을 들이킨다? 기껏 최고의 포도주를 만들어 자랑스레 내놓았더니만 맛도 모르고 삼켜? 그런 놈은 목을 칵 졸라버려야 한다.
나는 교육을 잘 받고 자랐다. 아버지의 신념을 존중하여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난 숙취로 정신 못차리고 있다 이거지? 어쩜.
그것도 필름이 끊기도록 마셔댄 것 같은데...
여기서 몸이 차가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술을 마신 기억이 없다.

뭐야. 그렇다면 이건 숙취가 아니라 약에 취한 것?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나에겐 적들이 많다. 원한 깊은 상대도 많고.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며 복수를 다짐하는 자들을 일렬로 세워놓으면 그 길이가 제피리아에서 세일룬까지 닿는다. 따라서 내가 먹는 식사에 몰래 약을 타려는 자들이 아주 없지는 않다. 당장 생각나는 놈들만 한 다스가 넘는다. 빈집털이의 제왕 쟈크와 벤 형제, 붉은 혁대단 두목인 로얄 벨트, 폭력단 RTD의 창시자인 에덤 브라운, 결혼 사기단의 일원이었던 쥬시스 콜린...
다 이해할 수 있다. 정면으로 덤비면 승산이 없기 때문에 비겁한 방법으로라도 복수의 기회를 잡겠다 이거지? 누가 비겁자 아니랠까봐.

그러나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약에 취한 건 아니라고 봐야 옳았다.
흘끔 보아하니 내가 누운 이곳은 평범한 여관방이다. 이런 종류의 여관방은 안에서 문을 걸어잠굴 수 있어도 밖에서는 잠구지 못한다. 그런 문제 시설을 했다간 그 즉시 소방안전국 담당자가 수갑을 들고 나타나 주인장에게 묵비권과 변호사 선임 제도를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게 된다. 따라서 나는 언제든지 문 저편으로 걸어나갈 수 있다. 한마디로 정체불명의 악당에 의해 감금되지는 않았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적잖게 안심이 되었다. 최악의 위기 상태라면 인적이 드문 헛간이나 물레방앗간 같은 곳에 내던져졌을 거다. 그것도 온몸이 밧줄로 칭칭 감겨서 말이다. 하지만 내 손은 자유롭다. 이렇게 얼굴을 쓰다듬을 수도 있고, 콧물 흐르는 콧잔등을 훔칠 수도 있고.......... 헉.

『뭐야?! 이 손은!!』
순간 맛본 공포라는 건 가히 엽기적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북실거리는 털이 손등을 덮었다. 손톱은 네모랗고 속으로 때가 끼었다. 관절은 울퉁불퉁... 혈관과 힘줄이 거미줄처럼 뻗어있다. 손바닥은 무척이나 빳빳하다. 핸드 크림이 발명되기 이전의 손이다.
겁에 질려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모양으로 봐선 분명 남의 손인데 내가 생각하는데로 움직이는게 가증스럽다.

『이건 거짓말이야!!』
남자의 손이다. 그것도 뱃살 나온 중년의 남자 손이다.
『내 얼굴!!』
반사적으로 뺨을 어루만졌다. 갗 자라난 수염이 만져졌다. 따갑다 못해 살갗을 찔러댄다.
아하하. 이건 만우절 농담이야. 절대로 그래야만 해. 굵은 목에 아담스 애플이 볼록 튀어나온 리나 인버스라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적어도 난 못해.
『거울!!』
벼락같이 튕겨나가 거울 앞으로 달려나갔다.
『맙소사!』
「나홀로 집에」라는 영화에서 맥컬리 컬킨이 보여준 표정이 거울에 반사되었다. 이 모습을 표현주의 작가가 붓을 잡고 그대로 그리면 뭉크의「절규」가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퀭한 눈이 눈에 띄었다. 숙취이든, 약물 후유증이든, 그 어느쪽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머리는 짧게 깎았다. 그런데 기름기가 끼어 더럽다. 목덜미 부근의 셔츠에도 땀 얼룩이 고스란히 남았다. 갈아입지 않은 옷에서 나는 더러운 냄새도 났다. 얼굴은 각이 진 편으로 인상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이미 확인한 바 그대로 뺨에 수염이 자랐고...
아니, 아니. 지금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다시 한번 왁 비명을 질러댔다. 내가 전혀 모르는 얼굴이 거울 저편에서 덩달아 입을 벌린 채 숨을 토해냈다.
싫다. 이 굵직한 똥 싼 목소리... 그리고 입냄새!
『난 이런 얼굴 모른단 말이야! 으아! 이게 뭐야?!』

기다려.
잠시만 침착해지자.
정말 모르는 얼굴이던가.

아니. 난 알고 있다. 이 남자의 갈색 눈동자... 봤어, 봤어. 어제 내 뒤에 앉아 있었거든.
우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자리를 잡았을 적에 녀석은 바로 뒤쪽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어. 그러다가 우리 일행을 보고는 반색을 하며 다가와 자기 멋대로 합석을 했지. 직업이 모험 소설가라고 했어.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글쟁이라 했단 말이야. 엘프니, 드래곤이니, 마법사니 하는 이야기 말이야. 그리고 자신의 최근 히트작인「엘리스 섬의 괴상한 연인들 - 오징어 왕자와 마녀 키르케」를 읽어봤느냐고 물어왔지. 생각 나! 생각 난다고.

손톱을 깨물었다. 그리고 최대한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남자는 새로운 모험 소설 주제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마도사에 검사 일행을 만난 것이 무척 기쁘다고 했다. 사내는 자기 이름이 왈렛 레이먼드라고 밝혔고, 이어 우리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손가락을 튕겨 가재가 들어간 특제 모듬구이를 주문했다. 순전히 자기 멋대로였다. 나는 양송이 소고기 찜을 먹고 싶었는데 말이다.
하여간 그 남자는 통쾌히 웃어가며 제안을 하나 했다. 자기에게 괜찮은 얘깃거리를 제공할 의향이 있다면 밥 값을 기꺼이 쏘겠다는 거였다. 남자는 금방 은행에서 찾아온 것 같이 생긴 반짝거리는 금화 하나를 허리춤에서 꺼내보이며 유혹하듯 다시 웃었다.

기브 앤드 테이크.
남자는 새 소설의 소재를 원했고, 우리는 밥을 원했다. 찰떡이었다.
대화는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남자는 약간 질렸다는 표정이 되어 늘어만가는 빈 접시의 탑을 보았다. 그러든 말든 나는 계속해서 포크를 놀려댔고... (물론 이야깃거리를 늘어놓으며 입도 놀렸다. 나도 양심은 있다. 공짜로 밥만 먹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회는 이때다 해가며 주방으로 식사 주문을 넣...

표정을 달리한 채 주먹으로 거울을 내리쳤다.
『그런데 놈의 정체는 소설가가 아니라 마법사였던 거야. 이런 빌어먹을!』
새 소설을 구상 중이라는 건 아마도 거짓말이었을 거다. 즉흥적으로 꾸며냈겠지. 최고의 히트작인「엘리스 섬의 괴상한 연인들 - 오징어 왕자와 마녀 키르케」를 읽어봤느냐고? 견문이 많다고 자랑하는 나라고 해도 그런 우스꽝스런 소설 제목은 듣지 못했어.
카아악! 부주의했어, 리나 인버스. 밥을 산다, 술을 산다 해가며 우리로 하여금 경계심을 늦추게 만들었을 적에 척 하고 알아봤어야지. 신발을 도둑맞으면 1년동안 재수가 없고, 지갑을 도둑맞으면 한 달간 재수 옮 붙고, 옷을 도둑맞으면 일주일간 재수가 없다는 말도 있잖아. 그런데 몸을 통째로 도둑맞았으니 이걸 어쩌면 좋느냔 말이다. 10년동안 재수 없다는 말로는 절대 안 끝난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해결이 안날 수도 있다. 평생 각진 얼굴에, 수염이 나는 턱에, 허벅지 위로 볼썽 사나운 고추를 달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아름답고 고결한 10대 소녀에서 갑자기 뱃살 두둑한 40대 아저씨로 화끈한 변신이라. 차라리 밧줄에 목을 맨다.

『내 몸! 반드시 되찾아야 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서두르자. 내 몸을 빼앗은 녀석이 이대로 멀리 달아나면 난 끝이다. 생판 모르는 놈이 리나 인버스 행세를 하고 다니며...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녀석의 몸은 분명 리나 인버스 본인이 맞으니까... 마음이 복잡하다. 여하간 놈이 전국을 주름잡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이 소식이 고향에 있는 언니의 귀에까지 들어가기라도 하면?
아하하. 현기증이 일어났다. 차라리 생으로 매장당하라고 구박을 받을 거다.
구박만? 실제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야 할지도.
유서는 대필로 작성된다. 나아가 묘비엔 이런 문구가 박힌다.
이 멍청이는 절대 내 친동생 아님.

그러니까 빨리 신발을 찾아라. 양말도 신고. 눈꼽은 나중에 떼자. 세수는 생략이다. 허겁지겁 셔츠자락을 바지춤에 꾸셔박았다. 내 안경, 내 안경... 찾았다. 서랍장 위에 놓여져 있군. 살짝 돗수가 들어간 안경을 재빨리 콧잔등 위로 올렸다. 뿌옇던 시야가 그나마 밝아졌다.

그런데 말이야.
나.......... 안경 썼었어?

뭔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아까도 말이지.
신발을 도둑맞으면 1년동안 재수가 없고, 지갑을 도둑맞으면 한 달간 재수가 없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거 순서가 거꾸로 아냐? 신발보단 지갑이 먼저 아니냐고. 왜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지갑보다 신발이 더 귀중한 것인양 생각했지? 신발 같은 건 은화 몇푼이면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다. 신발에 방마 주문을 걸겠어, 비싼 부적을 달겠어. 당연히 지갑이 우위다. 지갑을 잃어버리면 한달은커녕 3년은 재수가 없다. 그래야 맞다.
그런데도 난 아까 신발을 찾아대면서 그것까지 잃어버리면 정말 큰일이라고 걱정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이 방을 떠나기에 앞서 지갑이나 가방 같은 소지품이 아닌 안경을 제일 먼저 챙겼다. 난 안경을 써본 적이 없다. 내 원래 시력은 오른쪽 2.1에 왼쪽 2.8이다.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건가.』
소름이 돋았다. 이거, 그 남자의 기억 일부를 공유했다는 얘기 아닌가.
『싫어~~~!!』
귀신처럼 비명을 질러대며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균형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질 뻔했으나 벽지를 잡아뜯는 것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수건과 침대 시트를 챙겨든 여자가 내 기백에 놀라 비상구 쪽으로 들러붙었다. 커다란 남자가, 그것도 퀭한 안색의 사내가 비명을 질러대며 뛰어나오고 있으니 살인이라도 났나 보다 생각했을 거다. 여자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리고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아가씨, 이해해줘요. 지금 불 났거든.

하마가 달려나가고 있으니 당연히 여관 주인도 뛰어 나온다. 주방에서 대머리 사내가 달려나와 국자를 휘둘러댔다.
『여보게. 왈렛 레이먼드! 설마, 자네 또?!』
또? 설마 또라니. 내가 뭘 어쨌다고.
아항. 숙박비를 떼어먹었나. 그럼 저 아저씨가 숨 넘어가게 지랄할 법도 하지.
『장부에 달아둬요!』
어차피 수중에 돈은 없다. 경찰서에 신고하고 싶으면 하라고 그래.

마지막으로 문을 박차고 나가기 전에 황급히 물어봤다.
『혹시 어제 왔던 여자 마법사랑 검사 두 명이 어디로 갔는지 아나요?!』
여관집 주인은 멀뚱거렸다.
『남쪽으로 간다던데. 그런데 왜?』
『붙잡아야죠!』
『자네... 이거 설마가 아니구먼. 레이먼드! 어이!』

손을 휘두르며 만류하듯 다가오려는 주인장을 뒤로하고 무조건 달렸다.
남쪽이랜다. 남쪽... 그런데 남쪽 어디? 발을 동동 굴렀다.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서쪽에 있는 주막을 찾으라고 하면 과연 찾아낼 수 있을소냐. 너무 막막하다. 나에겐 힌트가 필요하다.
기다려 봐라. 그들은... 라고 무심결에 중얼거렸다가 숨을 삼켰다. 우리다. 우리! 우리라니까. 벌써부터 제3자 취급을 하면 어쩌자는 건가.

하여간 나와 가우리, 제르가디스는 보통의 여행자들이 아니다. 바람따라 구름따라 목적도 없이 흘러가는 방랑자와는 분명 다르다. 실력 좋은 검사와, 최강의 마도사, 그리고 대단히 수상쩍인 키메라로 이루어진 한 팀이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모험, 괴물 퇴치, 그리고 보물.
갑자기 머릿속으로 필라멘트 전구가 켜졌다.
여기서 남쪽으로 사흘을 가면 성 안드레이 호수가 있다. 호수 주변과 바닥엔 수천 수백의 천연 동굴이 깔려있다. 그 속으로 빽빽이 차가운 물이 흐른다. 건기와 우기에 따라 동굴이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고 완전히 물에 잠길 때가 있다.
지금은 건기. 기암괴석은 물론이고 일부나마 동굴을 구경할 수 있다.
풍경만 구경할까. 동굴 깊은 곳으로 희귀한 워터 플라이스가 자라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는 형편이다. 호기심에 발을 들여놓는 관광객은 물론이고 횡재를 꿈꾸는 모험가들의 발길도 잦다. 실수라도 하는 날엔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지만... 투명한 수정석의 일종인 워터 플라이스는 드래곤 드롭스 다음으로 아름다운 광채를 뿜는다고 널리 알려진 보석이다. 손톱 정도의 크기의 원석을 주으면 1년동안 장사 때려치고 놀아도 된다. 동굴을 뒤질 가치는 그럭저럭 된다. 어쩌다 푸른 기운이 도는 희귀종 블루문 워터 플라이스를 발견이라도 해봐라. 5년은 놀고 먹는다.

『거기냣! 성 안드레이 호수!』
신발을 들고 죽어라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만가지 욕을 퍼부었다.
내 몸 도둑놈. 잡히기만 해봐라. 갈아버릴테다. 태어난 걸 아예 후회하게 만들어 버릴테다. 그 목을 분지르고 집게로 혀를 빼버릴테다... 기타등등.

그러다 입을 다물었다.
왜냐고?
숨이 차서.

어이 없는 이유라고?
그럼 이건 어떤가.

『가우리. 제르가디스. 얘들아. 너희들은 내가 바뀌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거야?』
그간 밉고 고운정 들었던 사이다. 죽을 뻔한 위기도 같이 넘겼다. 같이 울었고, 같이 웃었다. 그간 같이 식탁에 앉아 빵조각을 나눈 횟수만 해도 얼마인데. 난 녀석들이 팬티 바람으로 침대에 앉아 검날을 헝겊으로 닦아내는 것도 봤다. 방귀를 뀌던 제르가디스, 이 틈새로 고춧가루를 묻히고 다니던 가우리... 흉한 모습도 죄다 봤다. 친구와 동료의 단계를 넘어 이미 가족이다. 하찮은 버릇도 다 꿰고 있다.
그건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적에게 불시의 기습을 받으면 항상 왼편으로 칼날을 돌리는 내 버릇 때문에 가우리는 늘 오른편을 방어한다. 무작정 치고 달리는 공격 위주의 내 스타일을 보조하고저 제르가디스는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마력결계부터 치고 나선다.
그래, 그런 건 기본이지.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소시지 치즈 스파게티. 생선구이도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가판대에서 파는 핫도그나 어묵도 무지 좋아해. 대신 날 양파를 우적거리는 건 싫어함. 선호하는 잠옷 무늬는 딸기. 양말을 벗어 둥그렇게 말아 가방에 처박는 버릇이 있음. 매일 가계부를 적는 알뜰한 살림꾼. 아울러 주판이나 슬리퍼를 원래의 용도 말고 무기로도 곧잘 써먹는 수퍼 우먼. 지금도 미모가 자랑이지만 보다 가슴을 커지게 만들기 위해 매일 운동을 빼먹지 않는 노력가... 그게 바로 나다. 그들은 그런 나를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을 잘 알고 있듯이.
언젠가 제르가디스는 말했다. 발가벗겨져 목이 잘려진 시체로 발견된다고 해도 나를 알아볼 자신이 있다고 말이다. 지문 확인 작업도 불필요하다. 그냥 알아볼 수 있댄다.

하물며 이런 마당에.
본인이랑 몸통이 바뀌었는지 아닌지 눈치도 못채고 덜레덜레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고?
내가 아닌 리나 인버스랑 같이 길을 걷고 있다 이거야? 그것도 태연스럽게?!
가우리!
제르가디스!
너희들!

한기가 들었다.
나.......... 지금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 거 맞나.

『엄마! 저 아저씨 지금 길 한복판에서 질질 짜고 있어요.』
『쉿. 본 척 하면 안되요. 손가락질 해서도 안되요. 위험하니까 빨리 지나가자꾸나.』

그래. 인정한다고. 나, 무지 보기 흉할 거야. 알아. 알고 있다고.
하지만 너희들... 당해봐. 이건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현으론 절대 안 끝나. 믿고 있던 마누라가 외간 남자랑 같이 놀아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해 봐. 너 죽고 나 죽는 거 아니겠어? 지금 내 기분이 그거랑 비슷하다 이거야. 믿고 있었는데 배반 당했어. 믿고 있었는데 배반 당했어. 나는 여기에 있어. 다른데 있지 않아. 그런데 그걸 몰라. 자기들끼리 가 버렸어. 날 두고 갔어. 껍데기만 리나 인버스인 놈이랑 웃으면서 말이야. 날 두고 갔어. 날 버렸어.
그런데 여기서 울음이 안나오면 심장에 털 달린 놈이지.

『엄마, 저 아저씨 자꾸 울어.』
『빨리 가자니까 뭐 하고 있니!』

그래. 본때를 보여주겠어. 그리고 자신들의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야.
제일 먼저 그 머리를 주먹으로 때려줄거야. 잘못했습니다 하고 사과해도 때려줄거야. 그만 용서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려도 그냥 때려줄거야.

『엄마. 이제 저 아저씨, 울지는 않고 대신 이상하게 웃어. 진짜 괴상하게 웃는다.』
『얘! 너 자꾸 엄마 말 안듣고 그럴래?!』

겁 먹은 어미와 말썽꾸러기 어린애따윈 가볍게 무시했다.
추적이 먼저다.
『남쪽!』

길은 훤히 잘 알고 있다. 베링턴 사거리에서 아래로 내려가지 말고 왼쪽으로 꺾어져 산길로 잠시 들어갔다가, 벼락맞은 느티나무가 나오면 큰 바위가 보이는 쪽으로 뱡향을 틀어 직진한다. 여기가 지름길인데 외지인들은 잘 모르는 길이다. 지도에도 안 나오니까. 거기다 경사가 가파라서 그 별칭이 짐승 통로다. 사람이 오작가작 하기엔 염통의 안부가 다소 염려된다. 조금만 올라가도 숨이 꼭대기까지 차오른다. 비가 내리거나 해서 바닥이 미끄럽기라도 하면 이건 재앙이다. 넘어지면 곧바로 목이 부러지니까.
하지만 이건 대단한 지름길이다. 녀석들이 아침나절에 출발했다고 해도 이쪽에서 부지런히 발품만 팔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 큰 길로만 내려가면 산 둘레를 빙빙 돌아가게 되어 있다. 하늘에서 보면 8자 모양의 길이다. 그걸 나는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가는 거다. 파이팅. 난 따라잡을 수 있다.
깍아지른 듯한 언덕 한 가운데서 나뭇가지를 하나 부여잡고 한참을 씩씩거렸다. 쉬면 안돼. 계속 걸어.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위를 밟고 올라섰다. 긁힌 자국이 쓰라렸다. 소금기가 닿은 눈이 따갑다. 등산을 시작한지 이제 막 10여분. 다리가 후둘거렸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샛길이 있다는 걸 무슨 재주로 알고 있는 걸까.

『이건 녀석의 기억이야. 이건 녀석의 기억이야! 으아아~ 동조하고 있다구, 있다구~!』
솔직히 나는 이런 류의 마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드래곤 슬레이브 같은 흑마법과는 다르다. 몸과 몸을 바꿔버린다라. 이런 건 저주나 주술에 가깝다. 난 저주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런 거야 못생기고 음습한 계집애들이나 좋아하는 거잖아. 난 아니라구. 미소녀 천재 마도사가 뭐가 아쉽다고 적에게 설사병과 치질을 내리는 주문을 연구하겠어.

그렇다고 해도 풍월로 들은 것은 있다.
예를 들자면..........
저주를 푸는 일엔 시간적 한계라는게 있다. 공소시효가 넘으면 범인을 체포할 수 없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원래 시간이 흐르면 저주의 위력이라는 건 줄어들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고 믿어 기다려선 코가 깨진다. 악취나는 양말도 3년을 묵혀봐라. 악취는 분해된다. 그러나 5년이 넘도록 계속해서 세탁을 미뤄봐라. 찌든 때는 절대 안 빠진다. 비슷하다. 그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 할지언정 되돌릴 수가 없다. 양말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누가 그걸 재활용하냐.

목이 졸리는 기분을 만끽하며 땀투성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 남자.
시간이 지나면 나 자신이 되어버린다.
동조. 내지는 흡수.
과거에 내가 마도사 리나 인버스였다는 건 어디에도 남지 않을 거다.
점점 더 물들어 간다. 상태가 나빠진다.
나는 누구지? 내가 누구지? 내가 누구였지? 정말은 나는 누구였지?

『제기랄! 빨리 내 몸을 돌려달란 말이야~!!』
짐승이 표효하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 나는 봇짐을 지고 장삿길에 나선 용감한 상인 한명을 만났다.
남자는 불시에 강도를 만난줄 알고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물론 나는 강도가 아니며 사람을 헤할 만한 무기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강도가 아니라고? 그럼 어쩔건데. 만난 건 야생 곰이었다. 바지는 찢어졌고, 셔츠는 진흙 투성이었으며, 머리엔 벌레와 거미줄이 잔뜩이었다.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바짝 마른 입술로 염불을 외고 있다. 내 몸을 돌려줘, 내 몸을 돌려줘... 상인은 재빨리 합장하며 눈을 감았다.
『무슨 원한인지 모르겠지만 그만 성불하시오!』
『성불? 그런 건 생각나면 나중에 하리다. 이봐요. 이 근방에서 여자 마도사와 검사 두 명 못봤소. 빨강머리 마도사요. 게다가 빨간 바지. 눈에 잘 띌텐데.』
사내는 야비한 성격이었다. 원하는게 다른 사람이었어? 그럼 팔아야지. 남자가 손뼉을 쳤다.
『빨간 바지! 그 마도사요? 알다마다요. 나한테서 감자와 버터를 샀어요. 호두알보다 큰 황금색 귀걸이를 달았죠?』
『잘 됐어. 따라 잡았어! 나이스. 그래, 그 사람들은 어느쪽으로 갔소?』
덤비듯 달겨드는 날 슬슬 피하며 상인이 대답했다.
『이 근방엔 인가가 없어서 계곡 아래에서 적당한 장소를 골라 노숙하겠다고 했습니다. 장소가 그리 좋지 않으니까 차라리 나처럼 계속 걷는게 낫지 않겠느냐고 물어봤더니 연약한 숙녀에겐 그런 강행군은 무리라면서 웃더군요. 그리고는 먹을게 있으면 팔라고 했소. 나눠줄만한 건 감자와 버터가 전부라고 했죠. 그 여잔 그것으로도 괜찮다며 가격을 쳐주고 가져갔소. 같이 있는 친구가 토끼를 잡을 거라나, 뭐라나... 하여간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요.』

나는 뛸 듯 좋아했다. 그 정도면 충분한 정보였다.
『고마워요.』
그놈의 장사치는 별다른 말은 삼갔다. 그저 허리를 굽혀 합장할 뿐이었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빨리 성불하시오.』
뭐냐고, 정말!

미리 말해두는데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온이 내려가면서 풀들이 축축해졌다. 필연적으로 발이 미끌어졌다. 필사적으로 뭔가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나뭇가지들은 잡는 족족 부러져 나갔다. 엉겹결에 바위 틈새로 손톱을 박아 넣었다. 괜한 고생이었다. 피만 봤다. 나중엔 살갗이 너무 쓰라려서 감히 뭔가를 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냥 구르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쑤시는 무릎과 팔이 나를 너무나 불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목 놓아 울지도 못했다. 지금 내 입장에선 최대한으로 인기척을 줄여야 한다는 핸디캡이라는게 존재한다. 무조건 입은 다물었다. 끙끙 소리도 생략한 채 절반은 미친 것처럼 해서 중력이 이끄는 그대로 미끌어지고 자빠라지고 할 뿐이었다.
토기가 올라왔다. 그러고보니 여관방에서 뛰쳐나오고 난 뒤부터 먹은게 하나도 없다.
욱.
억지로 입을 막았다. 신물을 게워내는 소리 탓에 내 몸을 빼앗은 녀석이 나라는 존재를 눈치채고 달아나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니까. 녀석의 목덜미를 움켜잡기 전까지는 기절하는 것도 참는다. 근성으로 못할 일이 뭐가 있을까. 뼈가 부러져도 참겠다.
냄새가 나고 있다. 놈의 냄새를 나는 맡는다. 가까이 있다. 휘어잡을 수 있다.
몸 도둑놈. 내 몸을 어서 돌려줘.
덤불을 헤쳤다. 불빛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자세를 한껏 낮췄다.
저기 있다. 녀석이 누워 있다. 망토를 이불삼아 뒤집어쓰고 있다.
조금만 더. 한 걸음만 더.
내 몸. 돌려줘. 그건 내꺼야.
기진맥진해서 팔을 뻗었다.

『이봐. 거기까지다.』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정말로 많이 놀랐다. 이 녀석, 평소에도 이런 목소리로 말을 했던가. 냉소와 경멸감, 그리고 금방에라도 때려죽이겠다는 흉폭성까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제르가디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한층 더 놀랐다. 그 표정이라는 건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거다. 살기라는 걸 드러낸 녀석의 얼굴... 대단했다. 예전에 녀석은 날 죽이겠다고 입으로 소리내어 말한 적도 있다. 그래도 표정만큼은 묘하게 죄책감을 드러내며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지금처럼「정말 죽일테다」식은 아니었다.
녀석은 칼자루로 정확히 내 목을 겨눈 채 광적으로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허튼 짓을 하면 그 즉시 칼을 뽑을 기세다. 허풍의 위협이 아니다. 나는 이대로 죽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서있었다.
이런 너의 얼굴,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다급해서 소리 질렀다.

『이 멍청아! 나야. 나란 말이야. 모르겠어?!』
『모르겠다.』

그거 참 딱 부러지는 대답일세.
이래선 화도 치밀지 않는다. 망연자실하여 나는 그저 원래의 내 몸과 제르가디스 쪽을 번갈아 쳐다보았을 뿐이다. 이걸 무슨 재주로 납득시키느냔 말이다.

『딱 한번만 묻겠다. 넌 누구냐.』
『당신 동료야. 모르겠어? 리나 인버스야. 나라고.』
비웃음이 답변으로 돌아왔다.
『호오. 지금까지 들어본 대답 중에서 가장 깜찍하다. 그거 참 획기적인 주장이군. 그럼 저기 누워있는 숙녀분은 누구일까나.』
『도둑놈이지.』

믿어줘 하며 다시 팔을 뻗었다. 순간 제르가디스의 눈에서 서슬 퍼런 불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하늘과 땅이 역전되었다. 멱살을 붙든 힘이 느껴졌다. 아울러 두 다리가 부웅 떠올랐다.
어라라. 나, 지금..........
돌려 메치기 당한 거니? 그것도 있는 힘껏 땅바닥에 던져진 거야?

『이 자식.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서툰 짓 하면 베어버리겠다.』
『정말 심하잖아, 제르! 나에게 이런 식으로 나와도 괜찮은 거니?!』
『괜찮다고 생각해. 아울러 경고하는데...』
제르가디스의 표정이 더 나빠졌다.
『섣불리 제르라는 애칭으로 부르지 말아. 불쾌하니까. 그나저나 도대체 누구야, 너.』

누구긴. 나는 리나 인버스야. 너의 동료. 희대의 대 마도사!

『누구라고?』
근방에서 토끼를 사냥하던 가우리까지 달려왔다. 그 또한 무기를 들었다. 대놓고 겨누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난 안다. 검집에서 칼을 꺼내는데 0.2초도 채 안 걸린다. 빼는 순간 벤다. 표정은 온화하지만 저 어깨를 봐라. 긴장하고 있다. 녀석도 날 적대시하고 있다. 수상쩍은 행동을 한다 싶으면 공격해 들어올 거다. 그럼 난 반격 한번 못해보고 쓰러지겠지. 아아. 그게 내 최후인가. 갑자기 기운이 빠진다. 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맹렬히 고개를 흔들어댔다. 동료에게 배반당해 목이 베이다. 천재 마도사 사망하시다.

『정말이야? 아저씨 이름이 리나야? 그거 참 별난 센스일세. 남자 이름이 리나?』
『그게 아니야, 가우리. 정말 모르겠어?! 내가 리나 인버스야. 오늘 오후에 여관방에서 정신을 차렸는데 영문도 모르게 갑자기 이런 몸이 되어 있었단 말이야!』
『에?』
『너희들! 그렇게 날 못 알아 본다니... 실망을 넘어 충격이다. 내가 진짜야. 저쪽이 가짜고! 보란 듯이 내 몸을 훔쳤단 말이야.』

그래. 그 증거를 멋지게 보여주지.
가우리. 너와는 아틀라스 시티로 가던 길에 만났어. 내가 수십명의 도둑들에게 둘러싸여 위협당하고 있을 적에 멋지게 나타나 악당 녀석들을 일망타진했지. 그리고 말했어. 임시로나마 보호자가 되어주겠다고 말이야. 아울러 듣기 싫게 투덜거렸지. 막상 구해놓고 보니 이게 멋진 아가씨가 아니라 어린애였다, 꿩인줄 알았는데 병아리였다...

가우리가 뒷통수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여러번 사과했잖아. 그때 꼬마 아가씨라고 불러 미안했다고.』
바로 그거야. 이제 똑바로 깨달았지? 내가 리나 인버스라고.
한층 더 신나 쫑알거렸다.

그래. 난 다 알고 있어. 너는 전설에도 등장하는 빛의 검을 가지고 있었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보라고 했잖아. 내가 빛의 검을 500원에 사겠다고 했을 적에 넌 그걸 품에 안고 10리를 도망갔었다. 연구 좀 하게 빌려달라고 했어도 짜게 굴었지. 참 아까운 노릇이야. 그 멋진 검이 사일라그에서 마수 자나파와 싸울 적에 아깝게 파괴되어 버렸으니... 그래도 넌 여전히 뛰어난 검사야. 빛의 검이 없으면 뭐 어때. 네가 세상 최고의 검사라는 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걸.

『미안한데 말이지.』
제르가디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쉬지 않고 더 말했다.
『뭐라고 말하려는지 다 알아, 제르. 하지만 가우리가 너보다 더 실력 좋은 검사라는 건 사실이잖아.』
『아니, 아니. 진정하고 좀 기다려봐. 난 검술 실력의 우위를 놓고 당신과 말다툼 하자는게 아니야. 내가 세상에서 일백하고 스물 다섯 번째 실력가라고 해도 큰 불만은 없어. 순위 다툼은 이웃집 개에게나 줘버려. 다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빛의 검이 마수 자나파와 싸웠을 적에 파괴되었다는 당신의 발언 그 자체야.』
『에?』
『그 내용... 우리가 어제 저녁을 먹을 적에 신나게 떠들어낸 거짓 이야기잖아.』
그리고는 가우리 쪽을 돌아다 보았다. 가우리는 아직도 뒷통수를 긁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동안 우리들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2분여 뒤에 가우리가 먼저 입을 떼었다.

『저기... 우리집 가보는 말이지. 단 한번도 검날이 부러지거나 이빨이 빠진 적이 없어. 파괴되다니? 빛의 검은 머리 삐죽삐죽한 녀석이 자기네 동네 물건이라고 하길래 그냥 줬어.』
그 발언에 제르가디스가 가볍게 풋 숨을 내쉬었다.
『그 머리 삐죽삐죽한 놈의 이름은 시리우스다, 가우리. 이계에서 온 녀석.』
『그랬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네 기억력이 어디로 가겠나. 그럴 거라 짐작은 했지. 그리고 녀석은 네 검을 자기네 동네로 가져간게 아니라 자기들 세계로 가져갔잖아.』
『동네나 세계나.』
『우길 걸 우겨라.』

적대감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민망한 웃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제르가디스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가볍게 도리질했다.
『당신 옷차림이 엉망이라 미처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 소설가 양반. 누더기 옷에 땟국에 절은 몰골이라 지나가는 미친 놈이나 배고픈 강도인줄 알았어. 그러고보니 어제 저녁 내내 우리들이랑 같이 식탁에 합석해서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더랬지? 이름이 왈렛 레이몬드였고. 대표작이... 문어와 예쁜 공주. 아니, 마법사였나.』

나는 왈렛 레이몬드가 아니다. 그거야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무척이나 짜증을 내고 있는 도둑놈의 이름이지!
다시 한 번 강조하겠는데 저 놈은 무서운 마법사이자 지능범이야. 우리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만들어서 자기가 리나 인버스인양 행세하는데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해갔다 이거야. 그리고는 몰래 내 몸을 훔쳐갔어. 너희들을 속였어!
다시 증거를 말해주지. 내가 리나 인버스라는 증거.

제르가디스. 처음 우리는 저주에 걸린 여신상을 놓고 적대시하던 사이였어. 넌 한밤중에 현자로 칭송받는 레죠와 같이 나타나 흥정을 요구했어. 난 그 여신상의 가격으로 4천 3백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을 요구했고... 넌 그대로 엎어졌잖아. 근방에 살던 몰락 영주가 내놓은 토지, 성, 하인들에 가재도구까지 합한 가격도 그보단 덜하다면서 말이야. 하지만 나중 일을 떠올려보면 그 정도의 가격은 껌이었지. 저주받은 여신상이란게 마왕을 봉인한 열쇠였잖아? 넌 내가 그 마왕을 다시 되살리려는게 아닐까 싶어 무척이나 걱정했었고, 레죠와 같이 설득에 들어갔지. 허나 또한 네가 그걸 이용하여 세계를 정복하려던 건 아닐까 싶어...

『그러니까 당신은 리나 인버스가 되지 못한다는 거다.』
안타까울 정도의 냉정한 어투로 말을 잘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들에게도 사정이라는게 있어서 말이야.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내용과 원래의 진실 사이엔 갭이 있다는 거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내용... 밤 늦게까지 우리가 떠들어댄 내용 그대로이자, 결코 사실이 아닌 그런 내용들이야.』
『뭐? 사실이 아닌 내용이라고?』

저만치에서 버터에 구운 감자가 날아왔다. 감자는 아슬아슬하게 내 머리통을 비켜서 지나갔다. 조준 사격이었다.
돌아다 보니 한 여자가 주먹쥔 팔을 들어보이고 있었다. 리나 인버스였다.
『훔치긴 뭘 훔쳐! 보자보자 하니까 어이가 없어서. 이봐, 소설가 아저씨. 그러니까 당신은 어제 우리가 떠들어낸 내용을 고스란히 읊고 있는 것이고...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를 사실인양 주장하고 있는 거라고. 사일라그에서 우리들이 적법사 레죠와 힘을 합쳐 부활한 마수 자나파를 무찔렀다? 세일룬 공주님이 성스러운 노래로 마수신관이란 자를 무찔렀다? 그거야 대외적인 거짓말이지! 정말은 레죠가 악당이었고, 빛의 검에다 기가 슬레이브를 불어넣었다던가 하는 이야긴 공개 못해! 명왕 피브리죠와 한판 붙어서 세계를 멋지게 말아먹을 뻔했다던가, 명색이 고위마족이라는 놈이랑 같이 태평스럽게 유명 B사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다녔다는가 하는 얘길 어떻게 공개적으로 떠들고 나닐 수 있겠어. 우리에겐 사정이라는게 있단 말이다. 따라서 적당한 거짓말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우린 그 꾸며낸 이야기 여럿을 적당한 가락을 섞어 당신에게 말해주었지. 소설에 써먹으라고!』
그 자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더 올라갔다.

『생각을 해봐. 당신이 리나 인버스 본인이 맞다면 보다 더 자세한 걸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최초로 생리를 터뜨린게 몇 살이었지?』
모른다.
『기념비적인 날. 최초로 드래곤 슬레이브를 날린 날.』
생각 안난다.
『내가 목욕탕에 들어갈 적마다 노란 오리인형을 늘 꿰차고 다닌다는 거 알아?』
금시초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게 뭐게.』
바퀴벌레 아닐까.
『바퀴벌레야 슬리퍼로 때려죽이면 그만이고! 난 괄태충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랬나.
『그것봐, 하나도 모르잖아. 그런데 정말 당신이 리나 인버스 본인이라고?』

할 말이 궁진해졌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손가락만 튕겼다.
안색이 퍽이나 나빠보였던 것 같다. 제르가디스가 그러다 쓰러질 것 같으니 일단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얌전히 시키는대로 했다.
『경악해 하는 걸 봐서는 진짜로 자신이 리나 인버스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의 그 증상은 인격 동조라고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의 신상 이야기에 열중한 나머지 그 사람 본인이라고 착각을 일으키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병이지. 성품이 예민한 예술가들이 잘 걸리는 병이라더군. 자신이 환생한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해. 원래의「나」는 잃어버리고「엘비스 프레슬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혹자들은 이걸 가리켜 스위치가 바뀐다고도 해. 한 번 바뀌면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지. 성격, 말버릇, 대인관계, 좋아하는 음식... 심지어 목소리까지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어.』
앵무새처럼 따라 말했다.
『인격 동조?』
『하지만 당신처럼 성별까지 초월하는 건 처음 본다. 당신... 좀 심각해.』

아하, 아하하하... 뭐야. 그렇다는 건 내가 왈렛 레이몬드 본인 맞다는 것?
그러고보니 여관집 주인이 나에게 이런 소릴 했지.
자네, 또.
그건 이걸 두고 말하던 거였던가.

제르가디스가 자세를 달리하고 다시 질문했다.
『당신, 내 패밀리 네임이 뭔지 알아?』
생각 안난다.
『그럴 거야. 어제 광란의 식탁에선 쏙 뻬먹고 그 얘길 안해줬거든. 내 풀 네임은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라고 한다.』
『그렇군.』
『자네 어머니 이름을 대봐.』
『로제타.』
『아버지 이름.』
『피터.』
『잘 나가고 있어. 머리가 점점 맑아지는 것 같지? 그렇다면 당신 이름.』
.......... 왈렛이다. 맞군. 내가 왈렛 레이몬드이다.

감자가 하나 더 날아왔다. 이번엔 내 머리를 겨낭하지 않고 바로 내 무릎 위로 떨어졌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구. 하지만 당신의 지금 모습으로 보자면 필사적으로 우릴 뒤따라온 것 같으니까 더 이상 화는 내지 않을게. 보아하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못한 것 같은데... 배가 차면 한층 더 머리가 맑아지겠지. 토끼를 구울테니까 당신도 좀 먹도록 해. 스프도 있어.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도움을 될 거다.』
마지막으로 포크 겸용 기능성 수저가 날아왔다.
『당신과 같은 증상 말이야... 인격 동조. 여러가지 인생을 살 수 있으니 꼭 병이라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다음부터는 성별 정도는 좀 가려주기 바라. 당신 같은 남자가 나 같은 미소녀 행세를 하는 건 윤리적으로나 도의적으로 무리가 있어.』

그럴지도.
묵묵히 감자를 입에 넣고 씹었다.
배가 고팠더래서 그럴까. 감자는 꿀송이보다 달았다.
흐르는 콧물을 훔치며 한입 더 베어물었다.

『미안하게 됐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것 같소. 그나저나 감자 남은 거 더 있소?』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몸이 아프다.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뭐지. 근육에 경련까지 일어나고 있다. 아니, 그 이전에... 여긴 산속이잖아. 내가 왜 이런 한심한 곳으로 뒹굴고 있는 거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기분이 매우 나쁘다. 토기가 올라온다. 고개를 돌려 올라온 신물을 뱉었다. 얼굴과 손이 매우 더럽다.

강도를 만났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짐이 보이지 않는다.
내 지팡이! 비싼 보석이 박혀 있는, 그런 마혈옥이 박힌 지팡이는 도둑들이 보고 군침 흘리기 딱이지. 거기다 드래곤 가죽으로 만든 내 가방! 안 보인다.
당황하여 몸을 일으켰다. 맙소사. 녀석들이 옷까지 벗겨갔다. 검정 망토도 없다.

아니, 아니.
그 이전에.

도대체 나, 나! 내가 뭔 짓을 당한 거야!!
허겁지겁 머리와 팔을 만졌다. 자랑거리인 단발머리가 깡동하니 잘려있다. 아래쪽은 더 심각하다. 배가 튀어나왔다. 팔이 두껍다. 곱디 고운 손은 갈퀴로 변해 있다.

『내 몸을 도둑맞았다?! 이건 내 몸이 아니잖아! 내 몸~~!!』
절망 섞인 비명이 계곡을 타고 멀리까지 흘러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