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정단체 및 인명은 일절 상관이 없습니다. 모두가 픽션~ 죄다 가짜입니다. 모 단체에선 원래 이런 일을 하지 않아 - 라고 지적하셔도 답변은「당연하지!」하나입니다. 아울러 왓쳐스 뒤로 이어지는 이 글의 정식 후속편은 작성 예정이 없습니다. 



『미세스 인버스? 꽃다발이 도착해 있습니다.』

복도를 지나치는 자신을 손짓하며 불러세운 친절한 사무원을 향해 리나는 한쪽 눈썹을 크게 휘어보였다.
뭐시다냐. 내가 지금 아줌마로 보인다는 거냐?
물론 20대 중반으로 접어든 그녀는 오래 전에 틴 에이저의 발랄한 이미지와 작별을 고했다. 게다가 몸에 걸친 어두운 감청 빛깔의 멍키 슈트는 지나치게 딱딱하다못해 고리타분해 보였다. 커다란 황금 빛 방울 귀걸이로 포인트를 주고 있어도 전반적인 느낌은「나 늙었수다」. 여기다 건조해 보이는 눈동자와 다소 피곤해 보이는 표정이 인생이라는 표지판 위에 어두운 회색의 물감을 덧칠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고질라가 업화의 불꽃을 뿜겠다. 미세스라니.
가락지도 끼지 않고 있는 처녀에게 그 무슨 망발이...

그러나 리나는 성인답게 불만과 불평을 고스란히 마음에만 담아두고 담담히 반문했다.
『꽃다발이오?』
『아주 예쁘네요. 자, 이걸 봐요. 이런 멋진 걸 받다니, 무척 기쁘시겠어요.』
『하나도 안 기쁜데. 폴락? 혹시 누가 보냈다는 메시지가 있나요.』

붉은 장미가 한아름 포장된 꽃다발을 받아들 생각은 않고 리나는 계속해서 탐문했다. 오히려 그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무원이 꺼내든 장미꽃이 무슨 인체에 치명적인 박테리아가 묻은 오염물이라도 되는양 신중하게 쳐다보았다. 일말의 따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장고에서 갗 절단된 피해자의 엄지손가락을 찾아내기라도 했다는 식의 차갑고 냉정한 시선이었다.

이러니 미스터 스마일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메세지는... 왜요.』
사무원은 굳은 표정이 되어 화사한 꽃다발을 테이블에 도로 내려놓았다. 폴락은 미래의 용사 코난이라는 별명과는 안 어울리게 겁이 많은 사내였다. 평소 즐기는 햄버거에 꼼꼼하게 겨자를 바르는 모습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몸무게가 100kg이 넘으면 뭘 하나. 마음이 연약한 두부인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당장에라도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정 할 수 없다면 차선책으로 티슈로라도 닦고 싶었다. 그치만 그토록이나 원하는 티슈는 컴퓨터 모니터 옆으로 해서 지금의 그로부터 꽤 멀직히 떨어져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폴락의 얼굴이 절망감을 가득 담아 일그러졌다.

『작은 카드 하나가 봉투에 넣어져 있군요. 보낸 사람 이름은 봉투에 안 적혀 있고요.』
『카드는 봉해져 있나요, 아님 펼쳐져 있나요.』
『그건... 저어... 이런 제길. 저기요? 직접 확인을 해보시는게 좋겠어요, 미세스 인버스.』
『그렇게 하죠. 고마워요.』
그렇게 대답한 리나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1회용 라텍스 장갑을 꺼내들어 손에 끼었다.



『어이~ 인버스? 꽃다발 받는 방법이 상당히 창의적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군.』
43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동안인 레이 마그너스는 산더미처럼 쌓인 전문서적들 앞에서 하와이안 비치 모델이라도 되는양 포즈를 취하면서 웃었다. 가장 나이 어린 요원인 리나 앞에서는「누가 뭐래도 DNA는 수컷」답게 평소보다 곱절로 한층 더 팔팔한 청춘의 뉘앙스를 풍기는 그다. 하얀 백사장에서 비키니 수영복을 뽐낼지어다. 레이는 자신의 남성스러움을 과시하며 아랫배를 최대한 들이밀었다.
아니, 앞서 한 표현을 정정하겠다. 엉덩이를 8자로 돌리며 춤추는 알로하 언니들을 뒤로 하고 선 모델이 아니라 알프스 산맥 앞에서 신체 건강함을 뽐내는 스포츠 용품 광고 모델이었다. 때마침 눈사태라는 재앙이 닥쳤고, 15단 높이로 올린 책더미가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져 앉았다. 하여 겨울 스포츠 하면 생각나는 필수용품 -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들고 있던 레이는 허무한 아~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런 황망한 일이.
레이는 예기치 못한 재난에 펄쩍 뛰었다.

『이 뭡니까.』
리나는 직속 상관인 레이를 향해 손사레를 쳤다.
『알면서 왜 그래요. 댄 미르씨가 정리정돈과 담 쌓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면 그가 쌓아놓은 책더미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바보 짓은 하지 말아야지요.』
『미르가지아, 이 친구... 으이그!』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고 한탄해도 늦었다. 일단 무너진 책은 절대로 저 혼자서는 원상복구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몸소 허리를 굽혀 무너진 바벨탑에서 떨어져나온 커다란 벽돌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건데... 그 먼 옛날에도 하느님이 무너뜨린 탑의 잔해를 치워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 인간들은 모든 작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각 세계로 퍼져나가는 쪽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그게 아니라고? 에이. 대충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거나 흩어진 건 맞잖는가. 하여 레이는 이걸 죽여 말어 하는 얼굴이 되어 하늘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땅을 쳐다봤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댄 미르는 컴퓨터 전문가로 FBI 행동과학부 센터에서 사용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 전반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갑작스런 시스템 오류 같은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 이를 우선적으로 복구하는 일이 그의 주된 업무다. 아무래도 센터에서 다루어지는 자료들 전부가 (다수가 아닌 전부다) 공개될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보니 컴퓨터가 말썽을 부린다고 외부에서 전문가를 불러오기가 좀 그렇다. 그래서 댄 같은 이들이 센터에 늘 상주하고 있다. 연쇄살인범의「연」자는 물론이거니와 범죄의「범」자도 모르지만, 그런 관계로 그도 어엿한 행동과학부 직원이다.

리나는 이쯤해서 슬그머니 웃었다.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에 대한 일반인들의 선입관에 딱 맞게 댄 미르는 지저분하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새는 예사고 가끔은 양말도 신지 않는다. 머리도 길러서 사자 갈기 느낌의 금발이 치렁치렁 어깨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매일 청결한 샴푸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 우연히 옆 좌석에 앉는다고 해도 큰 불만은 없다. 허나 주변을 정돈하는 일에 서툴다는 점에서 같은 공간에서 같이 일하기 힘든 타입임은 분명하다. 내일 모레 제출해야 할 중요한 서류가 격주간 여성잡지 틈새에 단단히 박혀 있어서야 환한 웃음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YNT 방송 리포터 출신의 사라 덩이 쓴「샘 아더스는 왜 연쇄 살인을 저질렀나」라는 선정적 제목의 책이 활짝 벌어지면서 임시방편으로 끼워둔 것이 분명한 작업 메모지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게중엔 비상금으로 숨겨둔 것이 분명한 1달러짜리 현금도 있었다.
돈을 발견한 리나는 짐짓 발을 들었다 내려 지폐를 감췄다. 레이가 이 모든 걸 제대로 보지 못했길 빌어보자.

『미르는 오늘 출장 차 외근이라고 들었어요.』
『나도 알아요. 그치만 전화를 해서 다시 불러와야지.』
『돌아와 이 책더미들을 치우라고요? 아서요. 나는 모른다 하면서 고무 튜브 하나 들고 대서양 건너로 냉큼 도망갈 걸요.』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이면 사법부는 태초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어.』
『레이? 태초에 하느님은 빛부터 만드셨지 사법부는 안 만드셨어요.』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소, 인버스. 그러니까 세상이 이 지경 이 꼬라지겠지.』
그리 투덜거린 뒤, 레이는 허리를 굽혀 부피가 작은 책들부터 줍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흡사 밀레의「이삭 줍는 사람들」을 연상시켜 리나는 다시 한 번 더 웃었다.

『꽃다발을 받았을 적에도 그렇게 좀 웃어줄 것이지.』
뒷통수에도 눈이 달렸다. 레이는 굽힌 허리를 펴지도 않고 그리 말했다.
『표정을 딱딱하게 하고 긴장하니까 폴락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잖소. 거기다 라텍스 장갑을 끼고 메시지 봉투를 열었다고? 그래선 완전히 오렌지 코드 발동이지.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물건입니다, 손을 대면 폭발합니다. 어서 멀리 도망가 주십시오.』
『아서요. 센터로 들어오는 모든 우편물은 완벽한 검색 및 보안 과정을 거친 뒤에야 접수가 되어요. 테러범이 폭탄을 소포에 숨겨 보내와도 이 안으로까지 들어올 일은 없죠. 오렌지 코드 발동이라뇨. 그건 오버예요.』
『그렇게나 잘 알면서 왜 메시지 카드를 증거 보존용 투명 봉투에 넣어두는 거지?』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에서 이삭 줍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레이 마그너스는 침착한 표정으로 리나가 무어라 말을 해주길 얌전히 기다렸다.
왜 그녀는 화사한 꽃다발을 무슨 징그러운 지렁이 보듯 한 것일까?

답변은 쉽지 않았다. 리나는 음, 소리를 내며 턱을 어루만졌다. 머릿속에서 여러 단어를 조합을 해보는데 그 결과물이 영 신통치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것은... 1분이 다 되어가는데 거기까지만 문장이 완성되었다. 나머지는? 드라이 아이스 연기처럼 허공으로 흔적도 없이 호르륵.
리나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채 감추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의 실수를 그만 용서 해달라는 남자 친구로부터의 애원의 메시지? 아니면 주말 데이트의 동의를 구하는 구애의 큐피트? 그것도 아니라면 나랑 결혼해줘 최후 통첩?』
레이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다. 그러나 눈빛은 아까와 달라 장수풍뎅이를 발견한 어린 소년처럼 반짝거렸다.

『평범하다 못해 교과서적인 가정이군요, 레이. 심드렁해요.』
『나도 인정해. 그런 평범한 내용이었다면 우리의 인버스는 화병을 가져다가 그 안에 물을 가득 채워넣고, 눈알 튀어나오도록 비싼 품종인 장미들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예쁘게 꽂아두었겠지. 그런데 우리의 인버스는 손에 라텍스 장갑을 끼고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단 말이야? 이는 즉...』
『잠깐만요. 우리의 인버스, 인버스 하지 마세요. 내가 무슨 귀염둥이 또치라도 되나.』
『이는 즉,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보내는 일반론적인 호의가 아닌, 명확하게 그려지는 어떠한 복수의 이미지를 짐작했기 때문이겠지.』
레이는 리나의 불평은 가볍게 뒤로 넘기고 자신의 할 말을 끝마쳤다.

『자! 그렇다면 말해봐요. 그 발밑에 깔린 1달러짜리 지폐는 그만 신경 끄고! 도대체 누굴, 어떻게, 어떤 앙심으로 걷어찬 거야?』

차긴 뭘 차나. 리나는 샐쭉거렸다. (에이. 1달러가 날아갔다.) 그 잘난 축구공도 안 찼는데 레이는 그녀가 무슨 폭력 전과 3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 하고 있다. 이름이 적혀진 큼직한 팻말을 들고, 피트 눈금이 촘촘히 그려진 하얀 벽면을 배경삼아 얼굴의 앞 면, 뒷 면, 옆 면 사진을 찍어야 한다.

『누가 사타구니를 걷어찼다고 했어? 이 하트 브레이커 양반아.』
그녀는 젊다. 머리도 좋다. 참 예쁘게 생겼다. 삼박자가 딱딱 맞아 인기도 좋다. 호감을 드러내며 주말 데이트 신청을 청하는 사내들은 덕분에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단, 허락을 도통 안 해준다는 점에서 함락 불가능의 요라다 우주 요새였지만 말이다.
아니, 어디 허락만 안 해주던가. 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페로몬 향수를 한통이나 뿌린 뒤 은밀하게 저녁 식사를 청해도 콧방귀는커녕 상대도 안 해준다. 바빠요, 다음으로 하죠,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어서. 답변은 이 세가지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았다. 동료이자 친구로 사귀면 사람이 참 좋은데 여자와 남자로는 도무지 인연이 닿질 않는다. 오죽하면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악질적인 유언비어까지 유포되었겠느냔 말이다.

『레~즈비언?』

리나의 눈초리가 사나운 살쾡이의 그것으로 바뀌는 걸 두려운 눈초리로 곁눈질하며 레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번에 그 갈색 머리... 이름이 뭐였더라. 하여간 안경 쓴 그 친구와는 어땠지?』
『내사과의 로버트?』
『식사도 두어번 같이 했었잖아. 복도에서 만나면 자판기 커피 뽑아들고 느긋하게 잡담도 하고 말이야.』

어이쿠, 아주 사생활을 꿰고 계시는구먼.
리나는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밑으로 넘기면서 의미 불명의 흐응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내사과의 솜털 애송이가 실은 데이트엔 일절 관심이 없고 레이의 뒷조사에만 정신이 팔렸다는 걸 알면 이 남자의 반응은 어떨까.

『요즘은 안 만나지?』
『안 만나요.』
『싸웠어?』
『누가 어린애예요? 싸우게.』
다만 레이 마그너스에 대한 뒷 정보 제공을 정중히 거절한 탓에 사이가 틀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로버트는 장미가 뭔지, 꽃다발이 뭔지 구분도 못할 걸요. 그 인간, 으스대며 점심 한 턱 낸다면서 겨우 싸구려 가판대 소시지를 샀다고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주워든 책을 한아름이나 안고 있던 레이 마그너스가 눈썹을 찡그리는 것으로 싫은 얼굴을 했다.
『차별 발언이야. 소시지가 뭐가 어때서. 난 그거 좋아해. 맛있으면 그만이지.』
『맛이 없었으니까 문제죠.』
거기다 실수로 바지에 흘린 찰리 소스는 빨아도 빨아도 색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흘 내내 씨름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고가품인 바지를 성질을 부려가며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후 그녀는 뾰족한 턱을 가진 로버트를 먼 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날아간 바지 생각에 애꿎은 분통을 터뜨리기 일수였다.

『좋아, 좋아. 로버트는 용의자가 아니라는 거지.』
어느새 범인 찾기가 되어 버렸다. 가볍게 항복 표시를 해보인 레이는 머릿속에서 로버트의 신분증 사진 위로 빨간 색의 X자를 그었다.
『알겠어. 그렇담 가끔 전화하던 닥터 그레이워즈 어쩌고 하는 젊은 친구는 어때.』

리나에게는 시카고에 사는 남자 친구가 하나 있다. 학창시절부터 꼭 붙어다니던 친구라고 한다. 본인의 말 그대로라면 애인 단계까지는 올라가지 않은 듯 하다만, 남녀 문제는 하느님뿐 아니라 엄마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리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카고에서 살았다. 하나 더하기 둘은 셋이라지? 아마. 그러니 혹시 또 아느냔 말이다.
레이는「혼전 동거」라는 1960년대 최고의 인기 단어 한가지를 머릿속에 떠올렸고, 나아가「손톱이 길~게 할퀴고 간」이라는 흘러간 노랫말 가사 하나도 같이 떠올렸다.
모양이 그려진다. 커다란 짐 가방을 꿰차고 로스엔젤레스로 떠나는 여자를 향해 남자가 씩씩거린다. 간다, 못 간다, 안 보낸다, 가지 마라. 신경전 끝에 둥그런 전구가 끼워진 침실용 스탠드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닥터를 직접 만나본 적 있죠?』
『있지. 한 4개월 전인가 해서 한 번 소개 받았었잖아.』
진회색의 최고급 슈트에다 롤렉스 진품 시계.
시카고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남자는 영화배우 뺨치도록 꽤나 미남이었다. 목소리도 좋았고 악수를 청하는 손은 침착했다. 햇빛 구경을 못해 다소 창백한 안색이었다는 것만 빼면 군더더기 일절 없는 완벽 그 자체. 매너 굳, 첫 인상 베리 베리 굳. 레이가 여자였더라면 소개를 받으면서 선망의 눈초리를 던지며 부끄러움으로 뺨이 빨개졌을 것이다.

『그런 남자가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스탠드를 던져요?』
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저울질 했다. 던질 것인가, 안 던질 것인가.
『음. 잘 모르긴 해도 그 남자라면 던지지 않았겠지. 대신 당신이 던졌잖아.』
『텔레비전이나 DVD 플레이어를 집어던지는 거라면 모를까, 스탠드는 안 던져요.』
『하여간 던질 거잖아.』
『스탠드는 아니라니까. 싼 물건을 부숴봤자 가슴이 안 아프니까.』
『에구머니, 무서워라. 뭡니까, 그 발언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로 던진 것 같잖아.』
『그럼 가짜로 던집니까? 던져요, 비싼 물건은. 감정적으로 못 견딜 지경으로 화가 나면.』
레이는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던진다고? 텔레비전을? 그건 무섭다.
『.......... 앞으로 당신과 감정적으로 싸울 일이 없기를 빌어야 할 것 같군. 내 사무실에 있는 DVD는 제법 비싼 물건이거든.』

어쨌거나 용의자 선상에 닥터 그레이워즈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는 손가락으로 팔뚝을 톡톡 치며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이마를 접었다.
『스탠드는 안 던졌다고 치고... 장미꽃은 보낼 수 있잖아. 그지?』
『뭐 하러? 내 생일도 아닌데.』
『생일날에만 꼭 꽃을 보내라는 법은 없잖아. 이를테면 결혼 기념일이라던가, 다이어트 성공 축하라던가, 아폴로 11호 달 착륙 기념이라던가... 아님 이혼 기념일.』
『답답한 사람. 결혼부터 해야 이혼을 하죠.』
『그만 만나자고 선언하고 헤어진지 100일째 되는 날 아냐?』
같지도 않은 추측이었다. 리나가 핀잔을 주었다.
『소설을 써요.』
『아니야?』
『그 친구가 나에게 꽃다발을 보냈다면 카드의 내용이 이럴 리는 없죠.』

리나는 투명 비닐 봉투에 든 카드를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카드에는 컴퓨터 프린터기로 인쇄한 짤막한 메시지가 접착 풀로 붙어 있었다.

「예레미야 41 : 4」

밥풀 묻은 밥 주걱으로 뺨 치는 메시지나 다름 없었다.
레이는 뜻 모를 메시지에 진땀을 흘렸다.
예레미야? 그러니까... 성경?
맙소사. 교회에 나가본지가 어연 15년이다. 요즘에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부활절 달걀은 그 맛을 잊어버렸다. 아멘이 뭐고 할렐루야가 다 뭐란 말이다. 레이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지금은 불가피하게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지만 대신 격렬한 하느님 증오자가 되어 버렸다. 예수님? 싫다. 하느님? 죽으라고 해라. 일요일마다 곱게 옷을 차려입고 교회에 나갔던 건 레이 마그너스가 아닌, 자궁암으로 세상을 뜬 전처 에밀리다.

하얀 모자를 눌러쓰고 고운 입으로 찬송가를 부르던 그녀가 생각난다. 교회 행사에 쓸 거라며 맛나는 호두 파이를 굽던 그녀가 그립다. 착하고, 아름답고, 상냥했던 천사님... 하느님은 지상으로부터 천사를 강제로 불러들여 자신의 오른편에 세워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참 못된 양반이다. 주변에 천사가 좀 많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욕심을 부려 에밀리까지 데리고 갔다. 돌려 달라 애원해도 들은 척도 안 한다. 그야말로 상종 못할, 각박한 신이다.

- 여보

여전히 생생하다. 에밀리가 그 사랑스런 목소리로 그를 침대로 유혹하며 곧잘 써먹던 성경 구절이... 그러니까 그 내용은...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그건 전도서 4장 11절. 예레미야 41장 4절은 남녀의 성 생활과는 거리가 멉니다.』
『내용이 뭔대.』
『그다랴가 죽은지 이틀이 되었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
『뭣?』
『다시 반복하여 말씀드리죠. 그다랴가 죽은지 이틀이 되었어도 아무도 모른댑니다.』 
※ 개역성경 원문은 좀 다릅니다. 뉘앙스를 본문에 맞게 살짝 고쳤습니다.

하여 심드렁한 이삭 줍기 = 책 줍기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레이는 얼굴 근육을 완전히 굳히고 리나를 쳐다보았다. 불가항력적으로 목소리가 커졌다. 심장이 불뚝불뚝 경련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살인이라고?! 그, 그러니까 그게「시체 찾아가세요-」라는 내용이라는 거야?!』
『글쎄요. 표면적으로 보자면 내용은 그렇게 되겠군요.』
『표면적으로 보자며언~?! 이봐! 이 심각한 상황에서 자네는 왜 그리 담담하게 구는 거야.』
흥분한 나머지 당장에라도 덤벼들어 목을 조를 기색인 남자를 향해 리나는 눈을 흘겼다.
『그렇담 발가벗고「살인이야~!」하고 소리라도 질러야 한단 말인가요.』
『그렇게까진 바라진 않아! 하지만 최소한 놀란 표정이라도 지어줘!』
놀란 표정? 어떻게. 이렇게?
잠시 생각한 리나는 아- 하고 입만 벌렸다. 그런데 그건 놀란 표정이라기 보다는 금붕어가 먹이를 달라며 입을 뻥긋거리는 것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탈진하게 만들었다.

『지금 장난 해?!』
『그다랴가 죽은지 이미 몇 천년이 지났다고요, 레이. 시신의 뼛가루도 안 남았을 오래된 살인 사건이니 게임 오버잖아요. 지금에 와서 호들갑을 떨 까닭이 없죠.』

레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충분히 호들갑을 떨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여기는 듯 했다. 그는 자신의 소유인 노트북을 (벌컥) 열었고, 다다닥 소리가 나도록 해서 자판을 두둘겨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다랴가 누군데.』
『바벨론 국왕이 총독으로 세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천천히 말해. 누가 누구의 아들이고, 손자라고? 다시, 다시.』
『바빌론 국왕이 총독으로 세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만찬장에서 이스마엘에게 정치적 암살을 당했죠.』
『됐어, 넘어 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레이건 대통령이라는 거지?』
『아마... 흐음. 케네디 의원 정도? 비슷할 걸요.』
『그럼 들어봐. 지금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그다랴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니잖아. 어느 미치광이가「아주 먼 옛날 옛적에 바빌로니아에서 정치적 암살 사건이 있었답니다-」하고 꽃과 함께 카드를 보냈겠느냐고.』
『바빌로니아가 아니라 유다.』
『에이잇! 그 잘난 이스라엘 역사 따윈 관심 없고!』
레이는 손바닥으로 쩍- 소리나게 자기 이마를 때렸다. 나중에 꽤나 아플 성 싶다.
『단순하게 말하자면「여기, 남자가 죽었는데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영 몰라주네요」라는 거 아냐!』

레이는 노트북의 푸른 화면으로 눈을 내리 깔았다. 그렇다면 실종자 데이터 검색 프로그램부터 돌려야 할 것이다.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실종 신고로만 접수된 상태일 것이고... 성별은 남자. 그다랴는 바빌론 총독의 혈육이니 아마도 이 가상의 피해자는 상류층 사람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검색 범위는 어디까지로 지정을 해야 할까. 일단은 로스엔젤레스 전역으로 확대를 시켜...

『레이?』
리나는 어딘가 콱 막힌 듯한 답답한 적갈색의 눈동자로 그런 레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팔을 앞으로 해서 레이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정말로 그런 내용이라면 꽃다발과 함께 나에게 보내졌을 리가 없잖아요.』
노트북을 신나게 두둘겨대던 레이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그것이 범인이 남긴 서명이라면... 생각을 해봐요. 유명 방송국이나 신문사, 아니면 경찰서로 그걸 보내지 FBI 행동과학부의 이름도 알 길이 없는 여자에게 그런 걸 보내겠어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당신 이름은 지금까지도 일반 대중에게 꽤나 알려져 있다고. 제로스란 이름의 연쇄살인범이 시카고까지 당신을 따라가 살인을 저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친구를 납치...』
『시카고* 사건까지 얘기할 필요는 없어요, 레이. 이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게 아녜요.』
말꼬리를 자르며 리나는 그의 동의 없이 검색 작업 취소 키를 눌렀다.
『나는 그다랴가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이미 알고 있어요.』

올해는 그의 무덤을 찾아가지 않았다.
휴가를 내고 시카고까지 가볼까 생각은 안 해본 건 아니다.
그치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선 다리가 무거워졌다.

『레이는 에밀리의 무덤에 매년 찾아가지요?』
『여기서 왜 에밀리가 왜 나와.』
『그런데 나는 찾아가지 않았어요.』
『그야 당연하잖아. 당신이 왜 나의 에밀리를 애도하러 오나.』
『지금의 건 에밀리 이야기가 아녜요.』

결코 잊지 않았다.
허나 껍데기만 남은 그의 흔적에 입 맞추고 슬퍼하는 일은 어쩐지 바보처럼 느껴졌다.
형식적인 애도가 없어도 그녀가 가우리를 사랑했다는 사실 - 그리고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시카고행 비행기표를 취소시키고 여느때처럼 일에 몰두했다.

리나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어깨 너머로 넘겼다.
『변명하자면... 그래요, 나는 극복했어요.』
『인버스? 잠깐만. 난 지금 무슨 내용인지...』
『지금도 가끔은 그 못 말릴 불면증으로 고생을 하긴 하지만 말이지요.』
레이 마그너스가 이해를 하든 말든, 먼 이국의 마법 주문처럼 그리 중얼거리면서 리나는 빙글 돌아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가우리가 불의의 사고로 무덤에 갇힌 날의 날짜로부터 이틀.
시카고에서 친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어, 리나.」
엉뚱하게도 그는 화부터 냈다.
「어렵게 시카고까지 와서 나는 안 보고 그냥 가기냐.」
그러면서 덧붙이길,
「나도 봤어. 무덤에 놓인 꽃다발이 아주 멋지더군. 가우리도 기뻐했겠어.」
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