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모쪼록 훌륭한 공연을 부탁드립니다.
제로스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짐짓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준비된 무대로 올라선 두 주연 배우들은 통나무처럼 굳어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감정을 넣어 대사를 한 마디라도 읊조리면 이쪽에선 좌석에서 벌떡 일어서 감동의 박수를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건만... 뭐,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선 그녀다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로스는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여 기를 쓰고 있는 리나에게 야유의 팝콘을 던지는 대신 따뜻한 마음으로 모든 걸 지켜보는 편을 선택했다.

그치만 상황이 매우 지루하다는 점에서 진지하게「환불 요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된 훈련을 거친 테러진압 특수부대원도 당장 폭발하게 생긴 시한폭탄 앞에서는 부득이 손을 떠는 법이다. 하물며 일반인임에랴. 화재가 발생한 건물 옥상에서 태연하게 뒷짐을 지고 서고 있으면 그건 쇠로 만든 동상이지 사람이 아니다.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면 급한 나머지 개나 돼지처럼 정신 없이 뛰게끔 되어 있다. 폭발성 위험물에 겹겹이 포위당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빨리 이리로 와서 묶은 걸 풀어달라 발악을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뭐? 개나 돼지처럼 뛴다고? 최소한 눈물이라도 질질 흘릴 줄 알았더니만 웬 걸,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숨 죽이고「어떻게 하는게 최선일까」궁리부터 하고 있어서 제로스 입장에선 그다지 보는 재미가 없었다. 흙바닥에 엎드려 알라 신에게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광신도 이슬람교도처럼 굴면 차라리 귀여워 보였을 터인데...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입에다 테이프를 붙여놓을 걸 그랬다. 어차피 조용히 있을 거라면 시각적으로나마 재미를 추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후회막급이다.

『거기 그냥 서 있어! 섣불리 가까이 오려고 하지 마. 위험한 거 같으니까.』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그래서 이제는 인질이 구해주러 온 사람을 만류하고 자빠졌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닥터. 괜찮으니까... 곧 그리로 갈게.』
『내 말 들어! 귀 먹었냐! 오지 말라면 오지 마!』
『아, 알았어, 알았다구!』

위험이라.
리나는 고개를 들어 빨간색 전선이 어지럽게 얽힌 천장과 벽면을 응시했다. 각각의 기름통에 선들이 거미줄처럼 달려 있다. 실수로라도 잘못 건드리면 미친 듯이 흔들어댄 콜라병의 뚜껑을 겁 없이 따는 식이 될 거다. 거기다 기름통 주변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성당 안처럼 온통 촛불 투성이다. 향과 종을 든 사제가 나타나 축성을 해도 하나도 안 어색할 지경이었다. 입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그놈의 초가 일단 쓰러지면 그 파급 효과는 1908년 퉁구스 대폭발과 거의 비슷할지 모른다. 아니면 제우스에 의해 추락하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이 꼴이 될 수도 있다.
그치만 의외라고나 할까. 닥터가 결박되어져 있는 의자 주변으론 빨간 선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으로 그가 포박을 풀고 일어나도 그에 따른 연속 효과는 없을 거라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 있었다. 물론 보이지 않게끔 꼭꼭 숨겨놓은 별도의 장치가 있다면 또 달라지겠지만...
리나는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에라, 모른다. 그건 그때 가서 할 일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수갑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 이리 줘, 제로스.』
『음?』
명령조의 리나의 말에 제로스의 눈썹이 초승달 모양으로 구부러졌다. 그의 얼굴 위로 놀라움과 짜증이 겹쳐져 드리워졌다. 애원하며 엎드려 빌어도 고개를 가로저을 판국에 이 여자는 흡사「넌 오늘부로 해고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악덕 사업주처럼 굴고 있다.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얄밉기 그지 없고, 모르고 그러는 거라면 그 천성이 대단히 의심스럽다.
제로스는 그녀의 작은 머리를 붙잡고 마구 흔들어 뇌를 샴페인처럼 만들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 넘기고 잠시 생각했다.
내가 악당인 건가, 아님 그녀가 악당인가.

이 와중에도 리나는 재차 어서 열쇠를 넘기라는 투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한숨에 버무려 바지춤에서 작고 빛나는 열쇠 하나를 꺼내 주먹에 쥐었다.
그렇다고 하라는 대로 다 하면 그건 미친 짓이다.
도루하는 주자를 잡고자 기를 쓰는 투수처럼 반대편을 향해 열쇠를 힘껏 집어 던졌다.
『아앗!』
입을 벌리며 황당해하는 리나를 보고 제로스는 싱긋 웃었다.
속았지롱.
쨘- 하고 펼친 그의 손아귀엔 마술처럼 고스란히 열쇠가 들어가 있었다.

『이봐! 지금 장난하고픈 생각은 없어.』
『장난은 댁이 먼저 시작했죠. 내가 왜 열쇠를 순순히 내어줄 거라 생각하는 거죠?』
제로스는 그리 말하고는 수갑의 열쇠를 무슨 행운의 부적인양 리나의 얼굴 거까이에서 흔들어 보였다. 증오를 담아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적갈색의 눈동자가 열쇠에 못박혔다. 시험삼아 열쇠를 왼쪽으로 움직여봤다. 리나의 고개가 왼쪽으로 따라왔다. 다시 반대로 움직였다. 리나의 고개가 따라서 돌아갔다.

『약속이 틀리잖아!』 
『무슨 약속이오?』
『네가 시키는대로 뭐든지 할테니 대신 닥터는 풀어달라고 했잖아!』
『그거야 당신이 제안한 거고. 난 그러마 하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그쪽에서 착각한 거예요 - 하고 제로스는 애교 만점의 포즈로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내가 언제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한 적 있던가요.』
『이 사기꾼!』
『네, 네. 이 몸이 살인만 하는게 아니라 연방 수사관에게 같잖은 사기까지 쳤다고 나중에 검사 앞에 추가로 기소하시구랴.』
『오냐! 덤으로 밥 맛이었다는 죄목도 추가할 거다!』
『못 생겼다는 이유로 30년 형을 언도할 수 있다면야... 좋으실대로.』
제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수갑의 열쇠를 흡사 은으로 만들어진 펜듈럼이라도 되는 것인양 가만히 들고 있는 제로스는 무시하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혹시라도 바닥면으로 얇은 피아노 선이 깔려 있지는 않은가 주의하면서 말이다.
에이, 짜증난다. 그러지 말고 진짜로 수갑 열쇠를 펜듈럼처럼 사용해서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 이 앞에 함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로 방향으로 움직이면 긍정이고, 세로 방향으로 움직이면 부정의 의미로 생각하겠습니다. 부탁이니 예, 아니오로 짧게 답해주세요.

『허어, 리나씨. 내가 그리 하라 가만히 보고 있을 거라 생각을 하는 겁니까?』
제로스는 팔을 들었고, 있는 힘을 다하여 깍지 낀 주먹으로 리나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그만한 힘이면 두개골이 깨지고도 남는다. 리나는 악 소리 한 번 못내보고 바닥에 엎드렸다. 아프다는 감각 이전에 정신이 흐릿해졌다. 넘어진 자세 그대로에서 무릎을 오그렸다. 시야로 불이 번쩍번쩍하는데 그게 허깨비인지, 아님 어지럽게 난반사되는 촛불의 그림자인지 구분할 재주가 없었다. 천천히 두 눈을 깜빡였다. 눈물로 추정되는 맑은 액체가 밖으로 한 웅큼이나 밀려나면서 시야가 한층 더 뿌옇게 변해갔다. 때문에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제로스의 얼굴이 얼룩덜룩한 초현실주의적 허연 반점으로밖엔 안 보였다.

『아파!! 여자를... 때리다니...』
『하지만 당신은 여자가 아니죠.』
『이봐. 그럼 내가... 어휴! 남자라도 된다는 거야?』
『그것도 아니죠. 당신은 내 분신이잖습니까.』

그렇게 말한 뒤, 제로스는 리나의 잡아 끌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짐짝처럼 던져놓고는? 손전등을 들어 어지럽게 눈앞에서 마구 흔들어댔다. 그가 순수하게 의도한 바는 엄살은 그만 부리고 어서 정신을 차리라는 것 같다만, 돌팔이 의사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으로 방법이 영 틀려먹었다. 가까이 왔다 멀어졌다는 반복하는 불빛 때문에 되려 간질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았다. 리나는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귀찮은 날파리를 쫓는 듯한 손짓을 해보였다.
뒷통수엔 혹이 났고, 눈앞으로는 에일리언 발광체가 발악을 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목소리가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그만둬!』
『정중히 부탁하시죠.』
『치웟!』
『그게 정중히 부탁하는 태도인가요, 리나. 당신은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어요. 이럴 적엔 구차하게 목숨만이라도 살려달라 손바닥을 싹싹 문질러가며 빌기라도 해야죠. 저 친구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이번엔 손전등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닥터의 얼굴을 비췄다. 눈이 부신지 Dr.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손전등의 불빛이 닿기 훨씬 전부터 그의 표정은 지금과 똑같이「어금니가 아픈 나머지 살기 등등하게 인상 쓰는 숫사자」그 자체였다는 점에서 일시적인 조명 효과는 부질 없었다.

닥터가 악을 쓰며 저주의 글월을 읊었다.
『나쁜 놈! 리나에게 손가락 하나 대기라도 해봐! 죽여 버린다!』
『죽여요? 나를? 아이쿠, 댁 걱정이나 하시지. 응? 박사님.』
손전등은 아래로 내렸다. 대신 총구를 들어 그의 머리를 조준했다. 탄실엔 여섯 발의 탄약이 장전되어 있었다. 거리도 그리 멀지 않겠다, 그렇게 하겠다 마음만 먹는다면야 당장에라도 그의 잘나게 생긴 얼굴 절반을 공중으로 날려버릴 수 있다. 거리도 가깝다. 조준만 잘 하면 끝이다. 아주 쉽다. 이대로 손가락에 힘만 주면 된다.

『아니, 넌 쏘지 않을 거야, 제로스.』
머리를 쥐고 끙끙대다 말고 리나가 냉소적으로 단정지어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리나.』
총구가 방향을 바꿔 이쪽으로 되돌아왔다. 리나는 코 앞으로 다가온 검은 구멍 - 크기가 콩알처럼 작아도 충분히 재앙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휠체어에 앉은 스티븐 호킹 박사가 늘 이야기하던 우주의 검은 벌레 구멍이나 마찬가지였다 - 을 응시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그야 뻔하잖는가.
어차피 한 번밖에 죽일 수 없으니까.

『게다가 넌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느긋하게 구경하는 걸 좋아하잖아. 총을 쏴서 죽이는 건 너무 쉬워서 싫지.』
『음... 맞는 말씀. 하지만 요컨대 단번에 죽지 않게끔 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해가 잘 안 가나본데... 그렇다면 실제로 해보죠. 이를 꽉 다무세요, 리나.』
제로스는 천사와도 같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인두로 지지는 듯한 화끈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가 바로 귓속에서 펑 하고 터졌다. 리나는 왼쪽 다리를 부여잡고 뒹굴었다. 총알은 살갗을 찢고 지나가 바닥에 틀어박혔고 곧바로 바지가 붉게 물들어갔다.
제기랄, 진짜로 쏘다니. 땀이 비오듯 솟아났다.

『이 개 자식!』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리나씨. 그 정도론 절대로 안 죽어요.』
다만 움직임이 봉쇄될 뿐이다. 제로스는 영화에서 많이 나왔을법한 포즈로 권총 총구를 입으로 후후 불면서 출혈 상태를 다시금 눈으로 확인했다. 바지가 흠뻑 젖다 못해 바닥으로 피가 고일 정도면 그건 진짜 위험하다. 그치만 근육만 살짝 다친 정도로는 피로 웅덩이를 만들 일은 결코 없다. 다시 말해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걷거나 뛰는 일은 힘들테지만 의식은 멀쩡할 게다. 충분히 주의해서 쐈으니 그 점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까 얌전히 있으라고요. 뭐가 그리 급해요. 네? 즐기라고요.』
그렇다. 즐겨야 한다. 희극적으로 두 팔을 번쩍 펼치고 제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우아한 죽음과 싱싱한 장미처럼 화려한 폭력... 당신의 미적 센스에 점수를 매겨라. 일부러 눈에 잘 띄는 빨간색 전선만을 골라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빨간색 줄이 모자라 하는 수 없이 페인트로 하나하나 칠도 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드럼통도 비슷한 크기의 것만 골라 가져다 놓았다. 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더러운 바닥에 엎드려 싹싹 청소까지 했다. 그때 마신 상당량의 가루 세제가 아직도 목에 걸려 가슴이 답답하다.
『그런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내가 곧 풀어줄게」여선 여기가 아파온단 말입니다.』
제로스는 허리를 굽히고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툭툭 쳤다.
『마음이 아프다고요.』

왜 그리도 서두르나.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바로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가스 탱크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리나는 엉겁결에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충격을 받아 몇 개의 유리창이 깨져나가면서 바닥이 흔들렸다. 제로스는 넘어지지 않고자 몸의 균형을 잡으며 두 팔을 접었다 폈다. 재차 두 번째로 덩치 큰 티라노사우루스 세 마리가 험머 자동차를 두 발로 짓밟는 듯한 쿠웅- 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니면 간당간당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피사의 사탑이 보란 듯이 옆으로 쓰러지는 소리 같았다. 이어 어딘가에서 자동차의 경보기가 제멋대로 요란하게 앵앵대기 시작했다.
짐작가는게 있는지라 리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설마... 저 소리는?

『아하.』
제로스는 짐짓 윙크하며 즐거워했다.
바로 이거다. 보고, 듣고, 깨닫고, 마음으로 느끼는 거다.
『제기랄... 정글스... 젠장! 젠장!』
『글쎄요, 리나. 그들에게 운이 있었을까요, 아님 없었을까요. 운이 좋았다면 폭발물만 용케 터뜨렸을 것이고, 나빴다면 다 같이 가루가 되어버렸겠죠. 자, 그렇다면 당신들 운은 어떨까나?』

촛불이 누렇게 반사된 제로스의 얼굴은 마치 초현실주의 할로윈 가면 같아서 닥터는 그런 그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씨익 하고 다시 웃었다.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모양새가 불길한 혜성의 꼬리가 하늘을 가로로 찢는 모양을 연상시켰다.
제르가디스는 급한 마음에 뒤로 돌려져 묶여진 손을 온 힘을 다하여 좌우로 비틀어봤다. 피부만 상했을 뿐, 조금의 틈도 없었다. 수갑은 그렇다치고 밧줄을 푸는 일조차 버겁게 생겼다. 훅- 하고 숨을 토했다.

『이미 알고 있겠죠, 의사 나으리. 천성적으로 나는 남의 걸 빼앗는 걸 아주 좋아합니다.』
그의 미소가「이제는 희망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어」라고 주장하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미래를, 목숨을, 아울러 저 작은 여자를 마음속 깊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까지도 빼앗아 버릴 생각입니다.』

하아, 그러셔.
이번에는 손가락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감은 줄이 몇 개인지 세어보았다. 다섯에서... 여섯? 일곱 가닥? 오버다 싶을 정도로 잘도 감아놨다. 그렇다면... 한 번 해보자.

『좋아, 어디 네 맘대로 해봐, 까마귀씨.』
『에? 까마귀?』
영문을 모르겠다는 제로스를 향해 닥터는 비아냥 가득한 콧소리를 내었다.
『옛날 우화 모르나. 남의 깃털로 자신의 몸뚱이를 장식하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새들의 왕 삼아달라 우쭐거리던 어리석은 새가 바로 까마귀였지. 하지만 바람이 크게 한 번 불고 나니까 장식으로 꽂아두었던 깃털이 모조리 날아가 버렸고, 원래의 볼품 없는 새카만 모습으로 되돌아간 까마귀는 모두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얘기... 몰라?』 
닥터의 목소리 톤이 계산을 담아 조금 더 올라갔다.
『빼앗는게 취미라고? 지금 당장은 빼앗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겠지. 그치만 결국 깨닫게 될 거다. 결국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깃털을 부지런히 모아봐라. 바람만 후- 불면 도로아미 타불이다. 네 손에 뭐가 있지? 말해볼까. 하나도 없어. 네 주위에 누가 남았지? 말해볼까. 아무도 없어.』
『어이! 이봐요,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씨. 지금 뭘 모르시나본데... 이 상황에서 나를 분석하는 겁니까? 그 잘난 직업 의식으로?』
『흥이다. 이래뵈도 난 잘 나가는 정신과 의사라구. 이 정도의 걸 가지고 분석했다고 할 수 있겠어? 지금의 건 이죽거린 거야, 이 친구야. 잘 구분 했어야지.』
『호오, 그거 멋지군요.』 
『뭐, 지금의 건 맛보기에 불과하니까 너무 칭찬할 건 없고...』

닥터는 돌연 표정을 바꿔 제로스를 맹렬하게 쏘아보았다. 얼굴만 보자면 살인자는 그쪽이 아닌 이쪽이다. 과거, 그를 가르치던 교사로 하여금 상습적으로 진정제를 복용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비릿하게 웃어가며 이를 드러냈다.
분석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나노 분자까지 분석해 주겠다. 그것도 공짜다. 황송하게도.

『너에게 거울을 보여주고 싶군. 제로스.』
『거울이라뇨.』
『그게 참 흥미롭단 말이다. 나는 이렇게 의자에 묶여 있고, 리나는 다리를 다쳐 바닥에 쓰러져 있어. 총은 당신이 들고 있고, 너는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당장에라도 이 망할 기름통으로 모든 걸 날려버릴 수도 있지. 그런데도 이렇게 주도권을 잡고 있는 주제에 어째서 초조해 미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그게 아주 궁금해. 뭐? 그럴 리 없다고? 여유만만이라고? 거짓말. 지금 우리 셋 중에서 가장 꼴불견으로 인상 쓰고 있는게 누구게.』
닥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단숨에 쏘아붙였다.
『이쯤해서 진실을 말해볼까? 여전히 넌 분한 거야. 뭐가 분하냐고? 그야 너에게 있어 최고의 존재는 리나인데, 반면에 리나에게 있어 너는 하찮은 껌이거든. 널리고 널린 범죄자... 잡히면 그만일 뿐이야. 어떻게 보면 안 잡혀도 그만일 것 같기도 해. 다른 중요한 일이 생기면 넌 금방 리나의 관심사에서 멀어져 버리거든. 나 잡아봐라- 하고 엉덩이를 흔들어도 그녀는 본 척도 안하지. 하다못해 넌 나보다도 레벨이 더 아래야. 나는 리나에게 소중한 존재인데 넌 그렇지가 않아. 그래서 보다 못해 나에게 화풀이나 하고 있지. 빼앗는게 취미입니다? 목숨을 가져 갈게요? 좀 더 솔직해지는게 어떻겠나, 제로스. 그냥「질투가 나서 못 살겠습니다」라고 말해. 그게 내가 보기엔 더 신빙성 가는 말이야.』 

이제 닥터는 몸을 묶은 밧줄을 풀어보고자 바둥거리는 대신 오히려 그걸 결코 놓쳐서는 안될 물건인양 꽉 움켜쥐었다.
자, 그럼 최후의 한 방을 먹여보도록 하자.

『아까 리나에게 말했지?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이럴 적엔 구차하게 빌기라도 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지? 그 말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오고 있다는 걸 말이다. 빌고 싶지? 나를 최고로 생각을 해달라고. 내가 당신의 첫 번째라고. 정말 웃긴 일이야. 얼마나 초라해? 거기다 넌 돌아올 답도 이미 알고 있어. 아무리 빌어봤자 1초도 되지 않아 차일 거라는 걸 말이야. 슬프지만... 넌 꽝이야. 차일 거야. 핫핫핫!』
 
먹혀 들어갔다! 분을 삭이지 못해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처음 볼 때부터 싫었어.』
『동감이다. 나도 네가 뼛속부터 싫어.』
『곱게 죽여줄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만두겠습니다.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어 드리죠.』
『말로만 떠들지 말고 실천에 옮겨봐라. 하나도 안 무섭다.』
『허풍 떠는 것도 지금 뿐입니다.』
『가까이 와서 떠들기나 해. 너무 멀리 있어서 잘 들리지도 않는다. 아님 겁이 나서 못 오는 건가? 응? 제로스.』
『겁이 날 리가 없잖아요, 닥터. 난 겁쟁이가 아닙니다.』
『그럼 증명을 해보시지. 이리 오라구.』

못할 것도 없다. 제로스는 혐오에 가득차서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기꺼이 닥터의 앞으로 가서 손등으로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닥터의 뺨 위로 붉은 손자국이 떠올랐다.

입 안쪽이 찢어졌는지 피 맛이 났다.
그치만 아픔을 만끽하는 건 나중이다.
닥터는 바로 이때닷 하고 의자 채 일어섰다.
쉽다. 관점을 바꾸어 보면 된다. 의자에 사람이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람의 등에다 의자를 붙들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러니까 거북이 등딱지처럼 말이다. 생각지도 않은 튼튼한 무기다. 똑바로 허리를 펴는 것은 신체구조상 무리지만, 어쨌든 온 몸을 비틀며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것으로 등에 매달린 의자를 흡사 몽둥이인양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거기다 절대로 안 떨어질 것처럼 튼튼하게 묶여 있으니 사람이 펄펄 뛰며 움직여도 괜찮다.
이까짓 의자가 망가질까봐 염려할 필요도 없겠다, 마구 날뛰고 보자.

『이야압~!!』
속도를 내어 허리를 180도 왼쪽으로 돌렸다. 바로 그 순간, 묵직한 것과 충돌하는 느낌이 있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해서 허리를 또 돌렸다.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의자의 다리 모서리로 사람을 쳤다는 감각이 분명 있었다.
『아흑!』
제로스가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충격을 제법 받았는지 피가 흐르는게 보였다. 되었어! 닥터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가빠지려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었다.

『이 인간이! 날 때렸겠다!』
『미안한 얘기지만 청소년 시절의 난 범생과는 거리가 꽤 멀었거든. 깨진 맥주병으로 내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라.』
『후회하게 해드리겠습니다!』
『후회는 아마 그쪽에서 해야 할 걸. 전직 불량배의 무차별 공격이라는 걸 맛 좀 보시지.』

다시금 의자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체중을 엉덩이에 모두 싣고 두 다리를 허공으로 번쩍 들었다. 조준 완료! 이른바 캥거루 킥이라고 하는 거였다. 의자를 지렛대 삼아 하체를 들고는 두 다리로 총을 쥔 제로스의 손목을 가차없이 걷어찼다.
체중이 온전히 실린 발차기니 정통으로 맞으면 무사하기 어렵다.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제로스는 악 소리를 내며 뒤로 벌렁 쓰러졌다. 아마도 손목 뼈가 부러졌을 거다. 그가 놓친 총이 바닥을 굴러갔다.
좋았어! 닥터는 멈추지 않고 기꺼이 인간 폭탄이 되어 넘어진 제로스를 향해 몸통 박치기를 시도했다. 와작 소리를 내며 등받이 나무판이 부러졌다.

『리나! 총을 집어!』 
오징어처럼 다리를 버둥거리던 닥터가 악을 쓰며 고함을 질러댔다.
『총을 집으라고!』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다. 머리통을 망치처럼 사용해 제로스의 이마를 때렸다. 다급해진 제로스가 한 손으로 죽을 힘을 다해 닥터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숨이 제법 막혔던지 닥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래도 오기는 있어 자신의 몸무게로 제로스를 그대로 깔아뭉갰다.
『비켜요! 이 자식아!』
『켁!』
『목이 분질러지고 싶은 겁니까? 그럼 어디 해봅시다!』
닥터의 목을 잡은 제로스의 손가락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팔꿈치를 들어 닥터의 옆구리를 마구 팼다. 꺽꺽 소리가 한층 더 커져갔다. 그래도 닥터는 여전히 비키려 하지 않았다.
『리나! 자... 잡! 잡아!』

총! 리나는 기다시피 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총만 잡을 수 있다면...
『우와아아아!』
두 사내가 레슬링 하듯 데굴데굴 굴러갔다. 수십 개의 초가 덕분에 옆으로 쓰러졌다. 두 사람의 팔과 다리에 엉켜붙어 빨간색 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순간 불꽃이 살아있는 것처럼 튀었고, 드럼통 하나가 푸른 화염에 싸여 굉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순간 작은 금속 조각이 바로 머리 위를 스치고 날아갔다. 열기는 허파를 통째로 구워버릴 지경인데도 등줄기는 얼음을 얹기라도 한 것처럼 서늘했다. 커다란 파편이 다시 팽- 하고 벽으로 날아가 꽂혔다. 함석판 위에서 어린애가 덤블링을 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리나는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펼쳐 필사적으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총! 망할 놈의 총!

휘리릭 하면서 비둘기의 머리통이 반으로 꺾이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빨간색 줄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연쇄 반응으로 두 번째 드럼통이 바닥으로 말간 액체를 콸콸 토해냈다. 역겨운 기름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과 동시에 악마도 뜨겁다고 펄쩍 뛰도록 화염이 일어났다. 쇳조각인지 나무조각인지 모를 것이 리나의 머리 바로 위를 뚫었다. 리나는 바퀴벌레처럼 바닥을 재빨리 기어가면서 욕이란 욕은 모조리 퍼부어댔다.

『빌어먹을~!! 이놈의 총!』
죽을 힘을 다해야 했다. 마침내 손가락에 두툼한 금속성의 덩어리가 닿았다.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집어 올렸다. 단순히 기분 탓일까, 고압 전류가 몸안을 팽글팽글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가쁘고 다리는 끊어져라 아팠다.
끙 소리를 내고 일어나 숨을 멈췄다.

『여어... 리나씨.』
『제로스.』
그들은 정면으로 똑바로 마주하고 섰다.
『나를 봐요.』
『보고 있어.』
철사줄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은색의 줄은 이미 닥터의 목을 두 서너번 휘감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었군요. 네?』
제로스가 팽 소리를 내며 철사줄이 당겨졌다. 리나는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고 그의 입언저리로 독버섯과도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조금이었는데도 그 때문에 입술 주위의 부기와 상처가 눈에 띄었다.

『닥터를 놓아줘. 그렇지 않으면 쏘겠다.』
『쏴요. 그 전에 이 친구가 저승길에 먼저 들어가겠지만 난 상관 없으니까.』
철사줄을 잡은 제로스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목이 잔뜩 졸린 닥터의 입에서 혀가 빠져나오려 했다. 이미 그 얼굴에 핏기는 없었다. 제로스는 흡- 하고 기합을 넣었다. 한 조각의 공기를 애원하던 닥터가 순간 정신을 놓았는지 턱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보고 있던 리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결국은 이런 겁니다, 리나. 불가사의한 운명이라는 거죠. 운명의 신에 의해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 오는 겁니다. 나는 이 친구를 죽일 것이고, 당신은 그런 나를 따라 오겠죠... 이것이 나를 발바닥의 때처럼 여긴 댓가입니다. 나의 가치를 몰라주고! 나만을 생각해주지 않고!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리나씨?』
『머, 멈춰!』
『내가 진작에 뭐라 그랬습니까. 애원해요. 나에게 빌어요. 잘못했다고.』
『잘못했...어.』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아서 기각.』
『제발 부탁이니까, 그만둬!』
『당신 친구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나 해요. 지금 곧 숨통을 잘라버릴테니.』
『안돼~!!』

총을 들었다. 그러다 놓았다.
눈물을 삼켰다.
결심했다.
그녀는 다시 총을 들었다.

『넌 내가 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네가 닥터를 방패처럼 세워두고 있다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내가 아니야. 넌 여전히 나라는 여자에 대해 절반도 알지 못하고 있어.』
『아뇨,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쏘지 못 합니다.』
『농담 아냐.』

제르가디스가 맞을 확률은 50%. 맞추지 않을 확률도 50%다. 리나는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제로스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보았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두 번째의 방아쇠를 다시 당겼다. 두 번째 총알은 닥터의 어깨를 관통했다. 울음이 나오려 했지만 용기를 내어 세 번 째 총알을 발사했다. 제로스는 철사줄을 떨어뜨렸고 망연자실하여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았다. 목덜미를 움켜쥔 그의 손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리나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안심해. 마지막 총알은 네가 아닌 나를 위해 남겨둘테니.』
그러고는 서스럼 없이 제로스의 심장을 향해 네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몸이 격렬하게 한 번 튀어올랐고, 이어 기절하여 넘어지듯 뒤로 쓰러졌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피부색이 회색이 되었다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열기에 못이겨 유리창이 깨졌다. 리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파편을 사방에 날리고 있는 천장을 응시했다. 커다란 유리 조각 하나가 발 아래로 떨어졌다. 뜨거운 바람과 노란색 불꽃이 위에서 아래로 넘실거렸다. 눈이 부셨음에도 주변이 어둡게 느껴졌다. 그 속에서 지축을 흔들어대는 우레가 계속해서 들렸다.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닥터의 어깨를 부축하며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아래로 맥없이 축 늘어졌다. 통곡하며 그의 창백한 뺨을 쓸어내렸다. 콧물이 흘러내렸다. 그걸 난폭하게 손등으로 닦았다.

『미안... 정말 미안해. 제르. 미안... 미안... 이제 모든 걸 끝낼게.』
관자놀이로 총구를 가져갔다.
그럼 작별이다.

바로 그때, 다 죽어가는 작은 목소리가 불평을 내뱉으며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 멋대로 뭘 끝낸다는 거야... 콜록, 이 망할 계집애.』
『어...?』
『위자료를 듬뿍... 받아낼테다. 콜록. 이 엉터리 FBI 같으니라구.』
『제르?』
『쿨럭! 뭐야... 뭘 질질 울고 자빠졌어.』
다 죽다가 겨우 살아난 사람답게 그의 안색은 납빛이었다. 
약간은 멍해 보이는 파란 눈동자가 권총을 쥔 리나의 손으로 향했다.
『인질로 잡힌 시민을 쐈으니... 콜록! 거금의 손해 배상을 해주셔야지. 한 20만 달러 정도로 싸게 합의 해줄게. 그러니까 자살은... 나한테 돈 갚고 나서 해, 돈 갚고 나서. 콜록!』
리나는 눈물을 훔치면서 베싯 웃었다.
『금액이... 엄청 저렴하군요. 무척이나 친절하십니다?』
『그걸 지금 깨달았나. 난 시카고 최고의 친절 남이라구.』
그렇게 말하면서 닥터는 억지로 몸을 일으리켜 애썼다.
『빨리 여기서 나가자, 리나. 난 더운 건... 콜록! 질색이야.』
『응!』

총구의 방향이 반대편으로 바뀌었다.
탕- 하고 단발의 총성이 하늘을 찔렀다.
강가로 향한 대형 유리창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박살나면서 이어 사람으로 추정되는 검은 그림자 둘이 6층에서 강물을 향해 뛰어내렸다.
동시에 건물 자체가 분해되듯 폭발했다.





『여어, 알로하. 안녕들 하신지요.』
이마에 붕대를 퉁퉁 감은 사내가 병실에 들어가 장난스레 팔을 올렸다.
그렇다고 해도 간호사의 허락도 없이 과일을 깎아먹느라 정신이 없는 남녀 혼성 2인조는 영감님처럼 인사하는 정글스의 존재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잠깐! 그 2인조에서 난 빼주시오. 이 몸은 과일을 먹느라 환장하지 않았으니까.』
『엇? 닥터. 혼자서만 얌체처럼 뻐져 나가기냐.』
접시에 올리는 것보다 입안에 털어넣는 량이 거의 세 배에 육박하는 가운데, 아삭 하고 또 한 조각의 사과가 씹혀서 아작났다. 입이 바빠졌으니 이번엔 손이 바빠질 차례다. 리나는 잘 익은 사과를 손으로 덥썩 잡아서는 흥얼 콧노래와 함께 그 껍질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정글스의 표정이 희극적으로 변해갔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칼날을 사과에 푹- 꽂아서는 무식하게 썩둑 잘라대고 있으니 도륙이 맞다. 한 가닥 하게 생긴 것처럼 저 FBI 여자는 부엌 일이나 살림과는 담 쌓은게 분명하다. 동그란 사과의 껍질을 깎아냈는데 그 결과물로 찌그러진 정육면체가 나온다는 건 문제가 제법 있는 거 아닐까. 

『실력이... 형편 없구려. 어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차라리 믹서에 갈아먹는게 낫겠다.』
『신경들 꺼요.』

리나는 손가락에 묻은 과즙을 쪽쪽 빨아대면서 두 남자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과일 좀 먹겠다는데 뭔 타박이 그리도 많은지. 짜증을 담아 살점이 제법 붙어 있는 사과 껍질을 집어 닥터에게 던졌다. 사과 부스러기는 누런 얼룩을 만들고는 절묘하게 그의 다리 가랑이 사이로 떨어졌다.
으이그, 못 말려. 성인 여성이 하는 짓거리가 어쩜 코흘리개 애들이 심술을 부려가며 지우개를 던지는 거랑 패턴이 똑같을 수가 있냐.
닥터는 투덜대며 부스러기를 치웠다.

『타박할 수밖에 없잖아, 리나 인버스. 여긴 내 병실이고, 그 과일들은 내 문병품이고, 이렇게 바닥을 어지럽히면 간호사에게 혼나는 건 나란 말이야.』
『오렌지 먹을래? 닥터. 이것도 아멜리아 테슬라씨가 보내온 건데.』
『딴청 부리지 말고.』
『나중에 치우면 되잖아. 됐지? 괜찮지? 그럼 바나나 먹을 사람?』

정글스의 따지듯 묻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닥터는 헛기침했다.
『원래부터 저랬수? 그간 못 먹어서 실성한 사람 같군. 아님 공짜라고 저러는 거요?』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는 대답을 회피하고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여기, 바나나 하나.

자기 앞으로 보내어진 과일들이 하나같이 초전박살 나고 있다는 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다만 방금 전에 간호사 둘이 도끼 눈을 부라리며 지나갔다는게 마음에 걸렸다. 아윽! 분명히 야단 맞을 거다. 허리에 손을 얹은 진한 커피색의 피부를 가진 수석 간호사가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릴 걸 상상하니 위가 꼬여왔다. 한 덩치값 하는 그녀는 환자복만 입었다 싶으면 뉴욕 시장이라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쪽은 뉴욕 시장도 아니고 일개 정신과 의사다. 엉덩이를 쥐어패거나, 아니면 알밤을 먹이거나... 어쩌면 전기 충격기로 할렐루야.
「그레이워즈씨, 또 병실을 어지럽혔군요. 이게 뭐예요, 이게!」
「아니 그것이... 그러니까 저기...」
「자꾸 이러시면 아파서 눈물 쏙 빠지는 주사를 놓아버리겠어요!」
이때 리나 인버스는 자신의 병실로 안락하게 도주하고 난 다음일 게다.

『다행입니다. 건강해 보이는군요. 두 분 다.』
『나는 안 건강하오, 정글스 형사님. 급성 위궤양이라는게 방금 생겼으니까. 대신 이 친구는 펄펄 날고 있죠.』
그리 대꾸하고 닥터는 침대에 몸을 깊숙이 뉘였다.
사실 아직까지도 움직이는 건 쉽지가 않다. 전신 타박상에 목에는 피멍이 하나 가득. 보너스로 어깨엔 총상에 좌측 발목뼈가 탈골되었다. 그 상황에서 안 죽고 살아난 것만 해도 기적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별 불평 없이 참고는 있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것이고, 피곤한 건 피곤한 거다. 어쨌든 완치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고, 매일 적당 량의 진통제를 맞아가며 상처가 빨리 아물기를 기원하고 있다. 고스 족의 검정 가죽 목걸이 모양이 되어버린 목의 멍 자국을 살짝 어루만졌다. 손가락이 닿기만 했을 뿐인데도 미치도록 쓰라렸다. 의사 말로는 목이 졸리면서 설골이 부러지지 않은게 기적이라 한다.

『그러는 형사님도 상처는 괜찮은 거요? 그 이마 상처요.』
『이거요? 아하하. 보기보단 가벼운 겁니다. 하여간 불타는 건물 6층 높이에서 강물로 뛰어내린 쪽은 제가 아니니까요. 창고 수색 작업을 지켜보다 칠칠맞게 폭발물 파편이 스쳤습니다. 몇 바늘 꿰맸죠.』
리나에게 들을 글월도 있고, TV로도 봤던 얘기다. 닥터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되물었다.
『그때 다친 사람이 제법 나왔다지요?』
『아뇨. 처음부터 충분히 주의하고 있던 탓에 큰 인명 피해는 없었어요. 우린 운이 좋았어요.』
정글스는 그렇게 대꾸한 뒤, 짐짓 의자를 가져와 멋대로 앉아버렸다.
그렇다고 오렌지를 주나 봐라. 리나는 방어적으로 과일 바구니를 챙겼다.

『거 참 야박하네.』
『야박?! 빈손으로 온 주제에 누구더러 야박하다 그러는 거예요?!』
『빈손? 누가 빈손으로 왔다는 거요, 요원.』
다소 쌀쌀맞게 반박하며 정글스는 파일을 흔들어 보였다.
『이렇게 과일 부스러기보다 더 중요한 걸 가져왔건만.』

입맛이 떨어졌던 것 같다. 리나는 과일을 옆으로 치우고는 새침한 표정으로 파일을 집어 올렸다. 이제 조금은 정글스가 익히 알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피곤하고, 건조하고, 사무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서 새빨간 불꽃 나오는 여자... 정글스는 가볍게 주먹을 쥐고 콜록- 하고 기침했다.

『정식 보고서는 아닌 것 같군요, 정글스.』
『그래도 중요한 내용은 전부 들어가 있으니 천천히 감상들 해보쇼.』

불타고 남은 잔해 사진들이 하나 가득이었다. 빨간색 전선, 쓰러진 드럼통, 무너진 천장, 그리고 몇 개의 탄피... 리나는 별 관심 없다는 투로 재빨리 사진들을 넘겼다.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다. 다시 봐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놈은?』
『총알 구멍이 여럿 뚫린 남성용 가죽 재킷을 강에서 건져 올렸습니다. 그것도 절반은 탔더군요. 현장에서 남자로 추정되는 시체도 찾아냈죠. 너무 불타서 신원 파악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지만.』
『그래서요?』
『그래서 뭐...』
정글스는 본인도 막막하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거죠.』
『그렇담 현장에서 찾아낸 시체가 제로스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는 거네요.』
『그 시체가 제로스가 아니라는 증거 또한 없고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살아 남기란 아무래도 힘들겠죠.「범인으로 추정되는 시체를 발견했다」라고 잠정 결론지어질 겁니다.』
『만약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발견된 시체가 다른 사람이라면?』
『1년쯤 지나 당신에게 전화를 또 걸겠죠. 당신이 그리웠어요- 이러면서.』

리나는 피식 웃으면서 파일을 닫았다.
그렇다면 그때 나는 무어라 대답할까.
저번처럼 여기엔 네가 원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답할까?
아님 나도 네가 그리웠다고 말할까.

별안간 닥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매우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이해가 가능한 제스츄어였다. 리나는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의 손등을 톡톡 치고 리나는 밝게 웃었다.

『어쨌든 시카고 당국으로서는 한시름 덜었군요.』
『어째서요? 요원.』
『혹시라도 그가 돌아온다고 해도 난 LA로 돌아갈테니까. 녀석이 살아 있다면 그도 그리로 따라오겠죠.』
『얼레. LA로 돌아간다고요?』
『네. 퇴원하면 LA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거기서 NCAVC의 연구원으로 일할 거예요.』

모든게 정상으로 돌아간다. 마치 마법에 걸려 멈춰져 있던 기계의 톱날이 다시금 미지의 힘을 받아 움직이기 시작한 거 같다.
찢어지는 듯한 아픔은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지만... 이제는 참을 수 있게 되었다.
리나는 구름 모양의 하얀 풍선을 떠올렸다. 순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이제 영구히 변할 것이다. 차갑던 것이 따스하게, 그리고 송곳처럼 날카롭던 것이 고양이의 털처럼 보드랍게 변할 것이다.

『자! 그러니까, 정글스?』
『음? 뭐요. 그 흉악한 손가락은?』
『ET...』
『뭣?』
지켜보던 닥터는 이 앓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저래뵈도 친구가 되자는 신호요, 정글스 형사. 만나서 반갑소, 지구인... 이라는 뜻이니까 대충 맞장구 쳐요.』
『당신네들은 평소에도 이러고 작별 인사를 합니까?! 보통은 악수를 하거나, 뺨에 키스하거나... 아니면 포응을 하거나!』
『내 충고하는데 자꾸 피하면 저 외계인은 뿔따구가 난 나머지 사정 안 봐주고 지구를 침공할 거요. 톰 크루즈처럼 미친 듯이 뛰기 싫으면 손가락을 들어 화답하시구려. 처음엔 쪽팔리지만 자꾸 하다보면 익숙해지니까 염려할 건 없어요.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ET.』
『알았소! 하면 될 거 아뇨! 하면!』

리나는 닥터 쪽으로 눈을 빙글빙글 돌렸다.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도 그것에 대답해 눈을 돌려보이고 싱긋 웃었다.

자, 그럼 시작해보자. 검지손가락 들고...
ET... 당신이 무척 그리울 거예요, 지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