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른다. 정시 퇴근 10분 전은 흡사 천년의 세월처럼 느껴지고, 연인과의 달콤한 데이트 1시간은 찰나에 불과한 것처럼 다가온다. 때와 장소, 그리고 같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시간은 고무줄처럼 맘대로 늘어났다 다시 줄어든다.
『...』
느낌 같아서는 운전대를 잡은지 3시간은 족히 흘렀다. 그러나 태양 광선의 기울기로 추정하면 아무리 길어봤자 40여분에 불과할 거다. 리나는 막연한 초조감을 느끼며 자동차 계기판에 부착된 시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바로 그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딸각 하고 숫자가 바뀌었다. 하지만 시계는 그리 많은 도움은 되어주지 않았다. 디지털 숫자로 표시된 시각은 저녁 5시 12분을 이제 막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이건 말도 안된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떨어진지가 언제인데. 아무래도 차를 랜트해주는 회사에선 아무래도 차량의 청결도 및 트렌스 오일의 교체 유무에만 신경을 쓰는 듯했다. 타지에서 날아온 향수병자가 자동차의 시각을 시카고 표준시각이 아닌 시애틀 표준시각, 아니면 마이애미, 그것도 아니면 사이판으로 바꾸어 놓고 만족감에 찬 미소를 지어도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 봐선 말이다.
계기판을 망치로 펄펄 때리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며 운전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주변에 차량이 많은 것도 아니겠다, 교차로의 신호등이 도중에 빨간색으로 바뀐 것도 아니었지만 야간 운전시 감속은 아무래도 상식이다. 

『계속 직진입니다, 리나.』
그런데 제로스에겐 상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왜 속도를 줄이느냐며 옆구리를 찔러대며 저리 말하는 걸 봐선 말이다. 리나는 힐난의 표정을 짓고자 눈에 힘을 주었다. 자동차 보험 회사에서 안전 운전에 대한 카달로그를 무료로 배포한다고 하던데 그는 그 흔한 걸 한 번도 안 읽어본 모양이다. 리나는「운전시 정면 주시」의 규범을 잠시 무시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조수석에 앉은 제로스를 야무지게 쳐다봤다.
『왜... 왜요?』
『지금껏 무면허는 아닐 터이고... 그동안 운전하다 사고를 낸 적 있지 않아?』
『저어, 실은 맞은편으로 달려오는 사슴을 치어본 적이 있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리나는 혀를 끌끌 차며 속도를 조금 더 늦추었다.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제로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나씨.』
『음? 다음 표지판 나오면 우회전 하라고?』
『능청 떨긴. 제가 하려는 말이 그런게 아니라는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죠?』
분명 정면을 주시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 알맹이나 마찬가지인 눈동자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좌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녀가 가진 놀라운 재능인「통째로 암기하기」가 진행 중이라는 걸 그래서 제로스는 알 수 있었다. 도로의 기울기라던가, 이정표, 교차로에서의 직진 여부 등등을 고스란히 뇌세포 속에 입력한다. 간혹 등장하는 슈퍼마켓의 간판을 기억한다. 방향을 돌려 왔던 길로 고스란히 되돌아 가자고 해도 지금의 그녀라면 곤란함 같은 건 하나도 못 느낄 거다.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을 때부터의 모든 정보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단단히 움켜쥐고 있으니까 말이다.

단, 여기서의 문제 한 가지.
주변이 어두워지면 아무래도 암기 이전에 사물을 관찰하는 시간이 보다 더 절실해진다. 「전방 급커브, 주의」이라는 안내판이 나타나도 시야가 어두우면 제대로 읽어낼 재간이 없다. 눈에 글자가 안 보이는데 그걸 외울 수 있으면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온 외계인이다.

『그래서 속도를 늦춘 거죠? 리나.』
『아니.』
『거짓말쟁이.』
『매번 속고만 살았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뜨끔했던게 있었던 것 같다. 운전 속도가 다시금 빨라졌다.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도로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맞은 차선에서 오는 차가 하나도 없다. 인기척은 더욱 더 뜸해졌다. 아울러 희미하게나마 물 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북쪽으로 계속해서 달려왔다. 그리고 강이 가깝다. 그렇다면 현재 위치가...
『디어본 노들랜드 재개발지역.』
제로스가 속 보인다며 선수를 쳤다.
『이봐요. 난 당신에게 감추는 거 없어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반응하면 불쾌해집니다.』
『미안.』
리나는 순순히 사과하며 이른바「급속 안구 운동」을 그만두었다.

노들랜드 재개발지역은 12년 전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예전에는 운하와 강을 따라 수많은 공장들이 거친 엔진 소음을 내뿜어가며 산업 발달 만세가를 불러댔었으나 달러화의 하락과 오일 쇼크에 맞추어 서서히 빈 공장들이 늘기 시작했다. 여기에 확실한 죽음의 선고를 내린 것은 단체로 초록색 셔츠를 맞춰 입은 환경 운동가들이었다. 당국에서 발표한 수질 오염 리포트를 들먹거리며 셔츠자락을 목 윗부분까지 걷어 올려 무참한 똥배를 드러내는 것으로 공장들의 폐업을 더욱 부추겼던 것이다. 하여 황금 시대는 화려한 종말을 고했고, 지금은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폐 공장들이 주변에 득시글하게 되었다.
사람이 떠나자 쥐들도 가방을 꾸렸다.
대신 범죄자들이 마약을 들고 찾아왔다.
주차장으로 자라난 잡풀 속으로 출처가 매우 의심스러운 기관총이 굴러다녔다. 간혹가다 피 묻은 여성의 속옷, 심지어 미라가 된 시체가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빈 공장들이 범죄의 소굴이 되어버리자 그 처리에 골머리를 앓아온 시 당국은 약 2년 전부터 재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본격적인 토지 매입에 들어갔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예산이었다.

리나는 전등 하나 켜있지 않은 공장 앞에 차를 세우면서 꿀꺽 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사람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둘러놓은 쇠사슬과 자물쇠는 오랫동안 돌보지를 않아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마음만 먹는다면 굳이 마약 거래상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들락날락할 수 있게 생겼다. 반토막난 자물쇠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 힘을 주어 뜯어버렸다고 하기엔 새빨갛게 녹물이 우러난 것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절단기로 억지로 부셨다고 가정해도 최소 5년 전에 부숴뜨린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진흙에 그 머릿부분이 푹 파묻힐 리가 없다.

굳은 얼굴을 하고 제로스를 쳐다봤다.
『여기야?』
『아니오. 여기서 조금 더 가야 합니다. 하지만 잠시 들렸다 가십시다.』
리나가 맨 안전밸트를 신사답게 직접 풀어주면서 제로스는 그리 말했다.

『어째서? 여긴 편의점도 아니잖아. 아님 구석에서 소변이라도 보려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진 것도 아니고, 콜라가 먹고 싶어진 것도 아녜요. 그저 준비할게 있어서 그럽니다. 자, 그러니까 리나씨? 이리 주시죠.』
『뭘? 껌? 사탕? 난 그런 거 안 가지고 있는데.』
『리나... 난 어린애가 아니니까 껌은 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가 요구한 건 핸드폰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던 리나의 안색이 즐거운 나들이 길에 소나기를 만난 가여운 관광객처럼 그 빛깔이 싹 바뀌었다.
『핸드폰은 왜?!』
『그야 전화를 걸려고요. 핸드폰의 용도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요? 아님 나 모르게 다른 용도라는게 있었던 걸까? 응?』
제로스는 시치미를 뚝 잡아떼고 반 강제로 리나의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리나 쪽에서는 어떻게든 빼앗기지 않으려고 바둥거렸지만 쓸데 없는 노력이었다. 선생님은 답안지를 놓지 않으려 하는 학생의 손등을 경고를 담아 찰싹 후려갈겼고, 그 단순한 위협의 동작만으로 학생을 주눅들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손가락 힘이 맥 없이 풀려버렸고, 그러자 핸드폰은 포도주 병의 코르크 마개처럼 퐁- 소리를 내곤 빠져나갔다.

『리나씨 입장에선 아까울 거 없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지요? 이거, 공짜 핸드폰 아니던가요?』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그건 주 정부의 재산이라구.』
『잘 되었군요. 주 정부의 재산이라면 더더욱 아까울 거 없죠. 내가 낸 세금을 돌려받는다는 기분으로 요긴히 써먹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절차가 까다로워 세금을 과다 납부하고도 환급도 못 받는 마당에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면 쓰나. 제로스의 표정이 희극적으로 변했다.
뭐? 세금을 낸 적이 과연 있긴 있었느냐고? 알게 뭐람. 어쨌든 누구처럼 탈루 혐의를 받은 적도, 추징금이 부과된 적도 없다.

제로스는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미닫이 식으로 되어 있는 철문을 힘 주어 열었다. 쇠 긁히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래도 주먹이 하나 들어갈 정도의 틈은 벌어졌다. 다시 눈 먼 삼손이 다곤 신상 무너뜨리듯 어깨의 근육을 부풀리고 힘을 더 주었다. 그러자 쾅 하고 쇠판 휘어지는 소리와 함께 성인 남자 한 사람 지나갈 정도로 틈이 더 벌어졌다.
『콜록...』
전등이 있는 것도 아니겠다, 주변으로 가로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공장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름대로 애썼지만 뗄감으로 쓰면 아주 훌륭할 것 같은 나무판 몇 개와 춤추며 날아다니는 먼지들 빼곤 제대로 보이는 건 없었다.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조명은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전부인데 이런 류의 불빛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물을 하얗게 표백시킨 유령처럼 보이게끔 해 오히려 방해만 주었다. 

대신 코로 들어오는 냄새는 눈으로 본 것 외에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뭐랄까, 상당히 기분 나쁜 냄새였다. 리나는 재빨리 소매춤으로 입가를 막았다. 오랫동안 환기가 되지 않은 밀폐된 공간 특유의 냄새에다 역겨운 기름 냄새, 거기다 썩어가기 시작한 돼지고기와 박테리아의 맹렬한 공격을 받기 시작한 과일의 냄새가 교묘하게 버무려졌다.
이런 냄새는 한 번 맡으면 절대로 안 잊혀진다.
문득 가슴이 메스꺼울 정도로 징그러운 광경이 머리속에 그려졌다.
구역질나도록 들큰한 냄새.
리나는 전율했다.
저 안에서 커다란 동물 - 인간임이 분명한 - 의 사체가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떨림을 눈치채고 가볍게 한 마디 던졌다.
『안심하세요. 당신의 친구가 저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건 아니니까. 먼저 온 손님입니다. 친애하는 우리의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고요.』
그렇게 대꾸하고는 뚝-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물론 전화를 하겠다는 건 아니다. 요즘은 기계가 하도 좋아져 핸드폰의 용도가 단순히 전화를 걸고 받는 것으로는 절대 안 끝난다. 최신형 핸드폰으로는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심지어 카메라처럼 사진을 찍어댈 수도 있댄다. 뿐만 아니다. 위치 인식 추적 시스템을 사용해서 실수로 잃어버린 핸드폰이 지금 어디에 굴러다니고 있는지를 찾아낼 수도 있다. 어찌나 좋은 세상인지. 정말 살아볼만 하지 않은가. 
열 발자국 정도 안으로 들어가서는 불 켜진 리나의 전화기를 멀찍이 던져 넣었다. 와그작 하고 박살나는 소리가 나지 않은 걸로 봐선 운 좋게 맨 바닥에 떨어지진 않은 것 같다. 제로스는 혼잣말로「좋아」라고 말했고, 가뿐하다는 식으로 손을 털었다. 이것으로 대략의 준비는 모두 끝마쳤다.

『잠깐만요, 리나. 지금 어딜 가려고?』
『내 핸드폰을 도로 가지고 나오려고 그런다.』
『어라.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데.』
『왜?』
『어린애가 들고 있는 성냥, 아슬아슬하게 타오르고 있는 촛불, 두 여자 사이로 양 다리를 걸친 남자 하면 뭐가 떠오르지요?』

리나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수수께끼의 답은... 불장난?

제로스가 손뼉을 짝 쳤다.
『정답입니다. 그럼 내친 김에 연상 게임을 하나 더 해봅시다. 전화벨이 아무리 울려도 받지 않는 FBI 요원의 핸드폰, 꼭꼭 감춰진 시체, 통속에 담겨진 막대한 량의 가솔린, 숨겨진 점화장치, 눈에는 안 보이는 철사줄... 이건 그럼 무엇일까요.』
식은땀이 솟아나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설마... 너!』
『상당히 재미 있을 거 같죠? 바로 여기다 하고 안으로 무작정 돌입하는 순간...』
제로스는 입 모양으로「펑」소리를 흉내내며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장담하는데 먼젓번의 주유소 폭발 못지 않을 겁니다.』

리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놔! 이 손 당장 놓지 못해?!』
『이런... 이해를 영 못하시네.』
『비겁한 자식! 함정을 팠어? 모두를 죽이려고? 경찰서에 죽은 여자의 사진을 보낸 진짜 목적이 바로 이거였어? 못된 놈! 어쩜 이럴 수가!』
『뭘 그리 흥분하는 겁니까, 리나. 운이 좋으면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철사줄을 발견하고 안전하게 폭발물을 제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반대로 운이 나쁘면 모양이 상당히 보기 안 좋게 되겠지만... 뭐, 조각난 걸레가 되든 말든, 그야 그 사람들 사정이죠. 나랑은 하등의 관계가 없... 워, 워.』

순간 리나의 주먹이 허공을 재빠르게 가르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그걸 피하고 본 제로스는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쿠. 참으로 난폭하신 양반이라니까. 이게 무슨 짓이죠.』
『안으로 들어가겠어.』
『관둬요, 리나.』
열 발자국 넘게 안으로 들어가면 그 다음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 역시 장담 못 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게 중요한게 아니지 않나요.』
리나의 팔꿈치를 다시금 세게 힘주어 잡았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고, 살아 있는 자와 죽어 있는 자가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엔 이미 죽어버린 여자와, 손을 쓰지 않으면 앞으로 죽어갈 남자가 있다.
제로스의 목소리는 냉정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행동은 매우 어리석은 겁니다. 우선 순위가 뭔지를 생각해봐요. 배가 아파 죽을 거 같은데 병원에 갈 생각은 않고 방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으면 그게 정상일까요. 큰 비가 내려 집이 떠내려 가는데 남편 저녁 준비를 하는 주부가 과연 현명한 여자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리나. 그러고도 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좋아요. 가요. 난 안 말리겠습니다.』
그는 창고 안을 손가락질 했다.
『갈테면 가요.』
선택은 그녀가 하면 된다.
『동료들을 대신해 폭사하거나, 아님 뒤돌아 소중한 친구를 구하러 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요. 이 모든 건 당신 마음대로입니다.』

재차 분노에 가득찬 주먹이 제로스의 가슴 정 중앙을 향해 날아왔다.
이번에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휘청- 하고 제로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치만 장담할 수 있다. 얻어맞은 사람보다 리나 쪽이 훨씬 더 아프고 쓰라릴 것이다.
그녀는 주먹을 들고 절망에 가득차 울부짖었다. 내장이 아팠다. 심장이 울렁였고, 창자가 길게 잡아당겨졌다. 그래서 다시금 팔을 들어 자신을 아프게 만든 제로스를 원망을 가득 담아 때렸다.

『자아. 들어가요. 가라구.』
『못 해! 못 들어가! 그렇게 못 한다는 걸 넌 알고 있잖아!』
『물론 압니다. 그런데 왜 우는 건데요. 당신은 원래부터 그런 여자였잖습니까.』
코 앞으로 범인이 있다. 그런데도 뒤돌아 자동차에 치인 동료를 살피러 간다.
제로스의 팔이 리나의 양 어깨를 격렬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똑바로 쏘아보았다.
『난 일부러 가만히 서서 당신을 기다렸단 말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날 보지 않았어요.』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안은 마리아는 슬픔에 가득차 땅에 이마를 조아릴 뿐이다. 가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눈물로 인해 젖은 손가락으로 그 뺨을 쓰다듬는다.
『내가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는데도!』
비난을 담아 그녀를 훌쩍 떠밀었다.
『범인 추적은 뒷전이었지.』
그러니 지금에 이르러 서럽게 울음을 터뜨릴 까닭이 없는 것이다.
『당신은 원래 그런 여자였다고요. 그러니 당장 뚝 그쳐요.』

10분 정도를 더 걸었다. 최종 목적지인 듯 싶었다. 제로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리나는「66037」이라 적혀진 푯말을 읽고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접근 금지 바리케이트가 있었고 바닥에 물기가 있었다. 앞서 찾아갔던 장소와는 달리 그곳은 아직까지 전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단, 외부로부터 전력 공급을 받고 있다라기 보다는 저 밑에서부터 비상 발전기를 가동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위잉- 하는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꽤 먼 곳으로부터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철컹 소리와 함께 덧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에 매어달린 둥근 전구가 뽀얀 불빛을 내뿜으며 발밑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용도 불명의 전선이 많이 널려 있어서 발이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제로스가 공주님을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었다. 리나는 이를 무시한 채 스스로의 힘으로 문턱을 넘었다. 제로스는 그럴 줄 알았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계단으로 걸어서 가긴 그러니까 화물용 승강기를 이용할까요.』 
『작동은 돼?』
『흔들거리고, 소음이 심하고, 가끔가다 멈춰서는 일도 있지만... 일단은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계단으로 올라가지 그래.』
『6층인데요.』
『운동도 되고 좋잖겠어?』
『운동이야 확실하죠. 타워링 내지는 포세이돈 어드벤처* 수준이니까요. 도중에 무너진 계단이 나오면 밧줄을 걸고 원숭이처럼 허공을 날아다녀야 합니다.』
(* 재난 영화의 대표격인 올드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1972)는 좌초된 호화 여객선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는 승객들의 모습을 그렸고, 타워링(1974)은 초고층 빌딩에서 발생한 화재를 다뤘다. 무너진 복도나 계단으로의 생존자들의 이동씬은 별다른 특수효과 없이도 지금도 박진감 넘친다)
농담인지 모를 그의 말에 리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화물용 승강기로 올라가도록 하지.』

예전에는 포장된 대형 화물들을 운반하는 승강기였을 것이다. 웬만한 승용차 한 대 정도는 충분히 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제로스는 조작 판넬을 열고는 별 망설임 없이 가스 밸브처럼 생긴 작동 레버를 위로 당겨 올렸다. 숫자가 적혀진 동그란 단추를 누르게끔 되어 있는 일반 엘리베이터와는 그 생긴 모양이 완전히 달라 당황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러질 않는 걸 보면 그동안 여러번 들락거리면서 그 작동법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리나가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찰카당 소리가 나면서 쇠창살 모양의 덮개가 내려왔다.
『진동이 심합니다. 조심해 주세요.』
『...』
여느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그러하듯 속도는 굼벵이가 댄스 추는 수준이었다.
2층, 3층, 4층...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하나로 얽혀 들어갔다.
『이렇게 둘이서 있으니까 그.때. 생각이 나네요, 리나.』
그때가 언제를 가르키는 건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리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6층 다 왔습니다.』
쿵- 소음을 내고 화물용 승강기가 크게 위 아래로 흔들렸다. 제로스는 다시금 조작 레버를 아래로 내렸다. 죄인을 포박한 사슬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듯한 음침한 쇳소리를 내고 통로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안전 덮개가 다시 위로 올라갔다. 마치 악어가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제로스는 발돋음을 하면서 양손을 내밀어 리나의 팔을 잡았다.
『내려요.』

칠이 벗겨진 좁은 복도 한 가운데로 빨간 페인트로 누군가가 6이라는 숫자를 그려놨다. 건물 철거에 앞서 시설 안전 검사팀이 한차례 다녀갔던 모양이었다. 색색의 스프레이로 흡사 마법사가 남긴 주문 같은 이상한 기호들과 숫자들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었다. 리나는 노란색 십자 표시를 발로 밟으면서 잠시 위를 올려다 보았다. 지금은 사용이 전면 금지된 석면이 천장에서 빠져나와 을씨년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더러는 일부 마감재가 무너져 내려 괴물의 주둥이 같은 구멍이 뻐엉 뚫려 있기도 했다. 그보다 한참 위로는 시뻘겋게 녹슨 배관 파이프가 제 위치를 잃어버린 채 제멋대로 엉켜 있었다.

『쉿- 잠깐만요.』
마침내 그들은 막다른 곳에 자리한 두툼한 철문 앞에 이르렀다. 제로스는 손가락을 하나 입술로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암만 봐도 저건 상황에 맞지 않는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게 정답 아니었던가? 어쨌든 왼편으로 치우친 뒤편으로 자리한 리나는 손을 깍지낀 채 제로스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밖으로 밀게끔 되어 있는 문을 더도 말고 딱 4cm만 벌렸다. 그 이상은 안된다. 여기서 더 열었다간 모두가 가루가 되어 날아간다. 오직 팔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틈만 허용된다. 제로스는 단단히 긴장해서는 소매춤을 위로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닫김 장치 바로 위로 자신이 미리 걸어놓은 빨간색 줄의 매듭을 슬쩍 잡아 올렸다. 줄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이걸 강제로 잡아 당기면 곧바로 가솔린을 하나 가득 담아놓은 드럼통 속으로 촛불이 올림픽 선수의 포즈로 다이빙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조심하고 보는 것이다.
『됐습니다.』
매듭이 안전하게 풀려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와요, 리나. 바로 여기예요. 이곳이 목적지입니다.』

그녀는 뭔가 죽어있는 것의 힘 - 이를테면 피해갈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내부는 밝았다. 전등이 켜져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로맨틱(?) 하게도 수십 개의 양초가 어둠을 내쫓고 있었다. 양초 심지가 타는 특유의 냄새 탓에 무거운 불쾌감을 느꼈다. 리나는 흡사 악몽의 연극 무대를 쳐다보는 기분으로 흔들리는 촛불들을 쳐다 보았다.
『제르가디스...』
확실히 무대가 맞다. 리나는 현실성을 잃어버렸다. 촛불 한 가운데로 의자에 결박된 닥터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앉아 있었다. 그런 그는 더도 말고 잔혹극에 출현하는 연극배우 같아서 종이 울리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관객을 향해 한바탕 인사의 절을 올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리나는 울음을 터뜨리기 이전에 손을 모아 얼굴을 가렸으며, 피날레를 장식할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를 기다리며 귀를 세웠다. 물론 환청으로나마 그런 박수 소리가 들려올 리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