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장에서 새 신부가 짙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축하객들은 너도나도 웅성거리게 되어 있다. 신부의 복장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적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죽은 자를 추모하려는 자가 꽃다발이 아닌 권총을 들고 있어도 문제가 된다. 이 역시 보편적 개념에서 한참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때로 제복으로 갈아입은 젊은이들이 일제히「받들어 총~!」해가며 영웅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할 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게 공포탄이 아닌 실탄이 장착된 권총이면 누가 봐도 애도와는 거리가 멀게끔 되어 있다. 묘비라도 쏘아대겠다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죽은 자의 머리로 총알을 쑤셔박겠다는 건가. 그런 무식한 짓이.

택시에서 부랴부랴 내리는 리나를 보고 제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무기라는 건 묘지 방문시 집에 얌전히 두고 와야 할 물건임은 분명하다. 그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그러지 말고 맥주라도 같이 마시는게 어떻겠습니까. 당신이 오면 같이 마시려고 미리 사둔 것이 있습니다.』
『닥쳐!』

성큼 걸음으로 걸어오면서 정확히 이마를 조준한다. 다리도 아니고, 심장도 아닌, 머리다. FBI 사격시 준수 조항 위배 여부를 논하기 이전에 입안이 씁쓸해졌다. 제로스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병 맥주의 마개를 비틀어 땄다. 그리고는 한 모금 원 샷.
제로스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냉장고에서 꺼낸지 제법 되어 냉기를 잃은 맥주는 솔직히 맛이 없었다. 인상을 찡그리고 다시 한 모금 더 마셨다. 역시 미적지근한게 기분 나쁘다. 이런- 하는 표정으로 맥주 상표를 노려봤다. 언제 어디서나 갈증을 풀어줄 거라고? 광고는 역시 믿을게 못 된다. 순 공갈 같으니라구.
갈등 된다. 이걸 같이 먹자고 그녀에게 한 번 더 권하는 건 실례일까, 아닐까.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쪽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는 돌로 만들어 놓은 묘비에 친근한 투로 말을 걸었다. 마치 묘비가 사람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응? 가우리 가브리에프씨.』

결혼도 못해보고 젊어서 비명횡사한 사람의 무덤이 대다수 그러하듯 가우리의 무덤은 쓸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찾아오는 손길도 적고, 가꾸는 이도 없다. 오래 전에 누군가 놓고 간 것이 분명한 꽃은 잎사귀 하나 안 남고 사라졌다. 대신 썩지 않는 비닐 포장만 남아 지저분한 느낌만 주었다. 제로스는 허리를 굽혀 이젠 쓰레기가 되어버린 색바랜 분홍 포장지를 손수 치웠다.

《꽃은 시들고, 풀은 마르나, 그대와의 추억은 영원할 것이다》

포장지를 치우자 이사야 40장 8절의 성경 말씀을 패러디한 것이 분명한 추도문이 눈에 드러났다. 상담 사무실에서 훔쳐낸 녹음 테이프에 의하면 이 문구를 만든 사람은 Dr.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다. 척 봐서 무신론자처럼 생긴 그가 실상은 정통 기독교인이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여기선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제로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깊게 음각한 글자 틈새로 말라버린 국화 꽃잎이 들러붙어 문구는 극적인 생동감을 더했다. 정말로 꽃은 시들었다. 그렇다면 추억은 과연 영원할 것인가.
손톱 끝으로 마른 국화를 잡았다. 바삭- 하면서 갈색이 되어버린 찌꺼기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버렸다.

『당신이 연고도 없는 시카고로 왜 왔는지가 항상 궁금했었습니다.』
먼지 묻은 손을 털면서 제로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이 친구... 이 무덤 때문이었던 건가요.』
그게 정말이라면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제로스는 미지근하게 식은 맥주병을 치우면서 잘못을 나무라듯 무어라 한마디 했다.
『나도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리나 당신은 나보다 더 심한 중증이예요. 봐요, 이 남잔 지금 썩고 있다고요. 흙으로 돌아가고 있다구. 그런 남자를 위해 LA에서의 삶을 모조리 포기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은둔생활에 들어가다니, 이건 정상이 아니예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었는지를 따져 묻는 건 나중이다. 듣고 있던 리나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지금 누가 누구더러 정상이네 아니네 떠드는 건가. 방아쇠에 건 검지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상황 파악이 영 안되나본데 분명히 말하지. 지금 내가 널 쏴도 그만이야.』
『그래요? 그럼 쏴요.』
제로스는 시위하듯 가슴을 활짝 펼쳤다.
총을 쏘겠다면 기꺼이 맞아주겠다. 대신 닥터의 생명도 같이 끝난다.
이를 증명하듯, 제로스는 리나의 눈앞으로 익숙한 물건 하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새벽 3시에도 통화 가능한 전화번호가 인쇄된 닥터의 명함이었다. 그것도 뒷면으로 검붉은 얼룩이 튀어 리나의 혼을 절반은 빼먹었다. 만약 그게 사람의 피라면 명함 주인의 상태가 어떠할 건지는 상상하기가 무척이나 끔찍했다.

닥터의 안부를 묻는 리나의 목소리는 덕분에 꼴사납게 잔뜩 쉬어 있었다. 
『서, 설마... 죽인 거야?』
『그럴 리가. 아직도 나를 그렇게 몰라요?』
제로스는 골이 난 표정으로 명함을 앞으로 더 내밀었다. 몸짓만으로 보자면 그녀더러 명함을 받아 확인을 해보라 그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리나는 차마 그걸 받아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뒷걸음질치고 소리소리 질러댔다.
알게 뭐냔 말이다. 점쟁이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닌데.

『모른다! 내가 널 어떻게 아냐!』
『리나...』
『그러는 넌 알고 있어? 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냐구!』

지금 그가 한 짓은 달이 로슈 한계 안쪽으로 접근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그래서 분노 이전에 공포감이 엄습했다.
다른 천체가 로슈 한계까지 침입하면 공격당하는 입장에 처한 행성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는다. 스스로를 보로하기 위해 침입자에게 무시무시한 인력과 중력의 힘을 행사하게 되어 있다. 그 힘에 의해 달이 튕겨져 나간다면야 다행이다. 허나 십중팔구 행성은 달을 박살내게 되어 있다. 우주적 대 재앙의 시작이다.
『이 일로 나는 반드시 너를 죽이게 될 거다, 제로스.』
달은 수천, 수만의 조각으로 깨어지고, 제 모습을 잃는다. 그런데 단순히 깨지기만 하던가. 그 중에 가장 크고 무거운 조각이 행성을 향해 돌진해 들어간다. 곧 엄청난 섬광과 충격파가 별을 덮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세 번째 조각이 연이어 대기권을 진입한다. 땅이 흔들리고 버섯구름이 솟구친다. 이어지는 건 그 끝이 언제라고 짐작도 되지 않는 불바다의 행렬이다.
『그리고 그 탓에 나 역시 죽게 되겠지.』
로슈 한계를 넘는 그 순간, 필연적으로 달과 행성은 공멸한다.
리나는 눈을 감았다. 권총의 총구가 맥을 못추고 흔들렸다.

『저어... 리나. 당신에게 죽게 된다면 적어도 난 후회는 없는데요.』
그렇게 된다면 세상의 모든 아침은 태초의 그때처럼 평온할 것이다.
제로스는 멎적음을 감추고저 비싯 웃었다.
『그리고 이게 과연 위로가 될지 모르겠는데... 당신의 걱정대로 그렇게까지 깨지지도, 박살나지도 않았습니다. 얼굴과 팔을 조금 다쳤지만요.』

성인 남자를 제압하는 일은 여자의 목을 조르는 것과는 달리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상대의 키가 이쪽보다 작고, 살이 붙지 않은 호리호리한 체구라고 해도 그렇다. 주먹이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도 빨갛게 피부가 붓고 실핏줄이 터졌다. 죽을 힘을 다해 제압하려 하지 않았다면 거꾸로 이쪽이 당했을지도 모른다. 제로스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우고 고춧가루가 뿌려진 것처럼 변한 귀 옆 피부를 보여주었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진짜 치명적이었을 거다. 다행히 운이 좋아 비켜서 맞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얘기가 180° 달라졌다.
『그 친구, 보통이 아니더군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친구라고 솔직히 얕잡아보고 있었는데 사과하고 싶어졌습니다. 하마터면 이쪽이 죽을 뻔했거든요. 혹시나 해서 준비한 전기 충격기가 없었다면 더 심하게 몸싸움을 했을 것이고... 음, 둘 다 지금보다 많이 다쳤겠죠.』
제로스는 천천히 몸을 돌려 막 울음을 터뜨리려 하는 리나의 앞으로 걸어왔다. 우아하면서도 살기등등한 움직임이었다. 호흡을 한 번 멈추고 닥터의 명함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람을 타고 명함이 팔랑팔랑 춤추며 날아갔다.

『아직 안 죽었어요.』
「아직」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제로스는 말했다.

『좋아.』
이쯤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나는 방아쇠에서 손을 떼고 권총을 그에게 내밀었다.
『네가 이겼어. 이 총을 가져가. 그리고 닥터가 있는 곳으로 날 데려가.』
『그러지 말고 그 전에 우리 잠깐 앉아서 얘기나...』
『얘기는 닥터의 생사를 먼저 확인한 뒤에 해도 되잖아.』
『에에- 뭐가 그리 급해요.』
『생사 확인이 먼저다. 그리고 난 너와 그렇게 할 얘기도 없어.』
『그거, 저에겐 무지 섭섭한 말씀입니다. 뭐, 어쨌든...』
권총을 받아쥐고 제로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대로 가죠.』

그는 흡사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우리, 인사도 생략했다는 거 알아요?』
제로스는 리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면서 같이 걷자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리나.』
『하나도 안 반가워, 제로스. 그리고 너... 언젠가 날 따라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었지? 그러니까 그게... 닥터의 사무실에 들리던 날이었지.』
알아차린 것이 매우 기뻤던 것 같다. 제로스는 리나의 어깨를 와락 감싸 안았다.
『역시 기억을 해주는군요. 그랬었죠. 당신을 열심히 미행했었... 어라.』
순간 귀청을 울리는 탕- 소리가 온 묘지를 뒤흔들었다. 리나는 물론이거나와 제로스도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다른 곳에서 발사된 것이 아니다. 신나게 팔을 흔들다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실수다. 리나는「이런 바보를 다 봤나」식으로 그를 쳐다봤다. 제로스는 쪼로록 혀를 내밀고는 야구공으로 학교 유리창을 깨먹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아이구 죄송. 무의식중에 손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나저나 장전되었잖아요.』
『당연히 장전되어 있지! 나에게 다시 그 총을 돌려줄 것이 아니라면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거다. 아니면 네 발잔등에 스스로 구멍을 내는 바보 짓을 할 거야?』
『미안해요. 앞으론 조심할게요.』
약속하겠다며 그가 검지손가락을 내밀었다.
물론 리나는 덩달아 손가락을 걸고 흔드는 바보 짓은 하지 않았다.

『자, 갑시다.』
그녀로부터 무시당했지만 별 상관 없는 듯했다. 제로스는 한 번 더 리나의 어깨를 툭 쳤다.

『운전은 내가 해야겠지?』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리나. 총을 내가 들고 있으니까요.』
그녀가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한 뒤에 시동 키를 건내주었다. 열쇠를 받아든 리나는 착잡한 심정이 되어 핸들을 잡았다. 운전석은 차 주인인 제로스의 앉은 키와 다리 길이에 맞춰 조절이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의 리나는 정상 위치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이래가지고 브레이크에 발이 닿기는 할련지. 시험삼아 발을 뻗어봤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발가락이 겨우 닿으려 하고 있다. 이소룡식 액션 운전 -  아뵤오~ 기합을 넣으며 엑셀레이터를 향해 킥을 날리려는게 아닌 이상 무리다. 거기다 핸들도 너무 멀리 있다.

『차는 새로 샀어? 먼젓번 것은 아무래도 망가졌을 거 아냐.』
『랜트했습니다.』
『누구 이름으로? 톰 리들이라는 이름으로?』
리나는 닥터가 톰 리들이라는 자의 전화를 받고 나갔다는 아멜리아의 말을 기억해냈다. 톰 리들의 전화를 받고 사무실을 나선 닥터를 제로스가 도중에 납치했을 수도 있지만, 이 자가 톰 리들 본인일 가능성은 그보다 훨씬 높았다.
한숨과 함께 조작 버튼을 눌러 시트를 앞으로 끌어 당기면서 - 죽었다 깨어나도 팔이나 다리의 길이를 일시적으로 늘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리나는 제로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흐응. 톰 리들이라는 이름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은 하지만...』
제로스는 흥미진진하다는 투로 손가락 하나를 턱으로 가져갔다.
『이 차는 그 이름으로 빌리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당신이 지금 정말로 궁금해 하는 건 내가 톰 리들이라는 이름으로 차를 대여했는지의 여부가 아니죠. 그렇죠?』

슬슬 땅거미가 내려오고 하고 있었다. 푸른 덤불과 키 큰 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흔들어댔다. 오늘따라 참배객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있다. 하긴, 그러기엔 지금이 너무 늦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리나는 말라붙은 눈으로 이미 죽어 있으며, 아울러 죽어가는 그것들을 보았다. 보기 좋게 초록의 이끼가 피어난 오래된 묘석들 사이로 보이는 건 시대마저 초월하여 전능의 힘을 발휘하는 죽음의 재앙밖에 없었다. 꼿꼿하게 몸을 펴고 있는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마치 절망의 기념비처럼 다가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리나는 이윽고 반대편으로 눈을 돌렸고, 느린 속도로 센트럴 공동묘지를 빠져 나가면서 잠시 침묵했다.

찰칵, 하고 그녀 옆에서 제로스가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물론 담배를 피우려는 건 아니었다. 자비로운 천수관음은 팔이 천 개나 되지만 인간에겐 딱 두 개 밖엔 없다. 총, 라이터, 담배를 각각 쥐기엔 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제로스는 순전히 손장난을 하고 싶었다는 투로 다시 찰칵 소리를 내어 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가 닫았다. 
어쩐지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리나는 잠시 인상을 썼다. 그러다 퍼득 깨달았다. 추적전이 있었던 날에 그가 주유소에 불을 지르면서 꺼낸 지포 라이터였다.

『맞아요, 그때 사용했던 라이터입니다. 당신도 그 못지않게 눈썰미 하나는 끝내주는군요.』
『그? 누구. 닥터?』
『예. 제가 혹시나 하고 장난삼아 꺼낸 이 라이터만 보고도 그는 내가 누군지를 알아차렸습니다. 솔직히 그건 계산 밖의 일이었어요. 밤의 어둠 속에서, 제법 떨어진 먼 거리에서, 그것도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한 내 라이터를 단번에 알아볼 거라곤 생각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는 그렇게 했어요. 그리고 가차없이 주먹부터 날리더군요.』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한 가상의 톰 리들이라는 자는 그리하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닥터는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엄청난 노성을 질러댔고, 그야말로 성난 사자처럼 덤벼들었다. 가방을 던졌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 했고, 박치기를 시도했다.

《네 놈 때문에! 네 놈 때문에!》

내가 뭐. 돈 떼어먹은 적도 없는데 천하의 몹쓸 강도 취급이라니.
제로스는 불만에 가득차 투덜거렸다. 그런 막가파 공격은 반칙이나 다를 바 없다. 가방으로 머리를 얻어 맞으면 아무래도 아픔 이전에 기분이 상하게 되어 있다. 라이터를 다시 호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면서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 양반의 눈치가 빠르다는 건 칭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성급해서야 원... 이쪽에서 준비해 가지고 간 카드를 모두 꺼내보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주는 성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대놓고 발차기에 박치기라니. 심했다고요.』

준비한 카드라. 아! 혹시 그건가.
『그거「시체 놀이를 하는 리나 인버스」사진 얘기야? 폴로로이드 즉석 사진.』
『맞아요. 바로 그거요. 난 그 친구 반응이 보고 싶었다고요. 그런데 속상하게스리 주머니에서 꺼내보지도 못했습니다.』
『꺼내봤어도 생각처럼 별 재미 못 봤을 걸. 닥터는 여간해선 속아 넘어가지 않아. 눈이 좋거든. 보너스로 머리도 좋고.』

얌전히 듣고만 있던 제로스의 눈매가 순간 심술을 담아 가늘어졌다.
『눈도 좋고 머리도 좋다... 잠자리 테크닉도 좋던가요?』
『뭐어?』
리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잠자리 테크닉?
잠시 콜록- 헛기침하곤 이어 정색했다.
『이봐. 그러니까 지금 닥터와 내가 같이 잤느냐고 묻고 있는 거야? 어이가 없으려니까. 별 게 다 궁금하구나, 너는.』
『대답은?』
『끈질긴 녀석. 말해줘야 해?』
『같이 잤어요?』
『어이, 어이! 우린 친구야! 지킬 건 지키고 있다구!』
『친구라... 가우리 가브리에프씨도 처음엔 친구였잖습니까.』
『그래서 뭐! 성인 남자와 여자가 일일이 허락을 구하고 섹스를 해야 하는 거라고 법으로 못 박았다든?』
『젠장. 잤군...』
『아니라니까!』

뭔 놈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거래? 리나는 핸들에 어금니를 박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가며 운전에 집중했다. 그러다 불현듯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총구가 옆구리에 겨누어진 상황에서 남자와 잤네, 자지 않았네 하는 주제로 떠든다는 것 자체가 기가 막히지 않은가.
잔뜩 토라진 제로스는 그런 그녀가 무척 못마땅한 듯 했지만... 웃긴 건 웃긴 거다.

『뭐가 우습죠, 리나.』
『그럼 이게 안 웃겨? 난 지금 생명의 위협을 받아가며 운전을 하고 있는데, 이 심각한 상황에서 마치 외박하다 부모에게 들킨 10대처럼 애써 결백을 주장하고 있잖아. 원래대로라면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할 거 같은데... 맙소사.「그 남자랑은 절대 안 잤어」라니. 한심한 것 같기도 하고, 엉뚱한 거 같기도 하고... 하여간 이건 아니야.』
『왜요. 난 오랜 친구 사이가 된 거 같아 기분 좋은데. 아니, 형제라고 할까.』
『형제?』
『그래요, 형제. 피를 나눈 형제.』
『흐응... 진짜로 피를 나눈 형제가 있긴 있어?』
순간 옆구리로 차가운 금속이 다가와 피부를 매섭게 찔러댔다. 리나는 아픔에 펄쩍 뛰었다.
『아프다구! 이러다 삐긋하고 핸들을 놓치면 책임질 거야?』
『나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 이죽거리지 마세요.』
『알았으니 그만 찔러! 사람 옆구리가 급소라는 걸 알고는 있냐?!』
『다음 교차로에서 좌회전 해요.』
『...』

제로스가 시키는대로 했다. 그러면서 리나는 왼손을 내려 따끔거리는 허벅지를 긁는 척하고 호주머니 부근을 지긋 눌렀다. 핸드폰은 집에서 나올 적에 미리 무음으로 조작해놨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정글스. 제대로 통화 버튼만 누른다면... 제발, 걸려라. 그리고 부탁이니까 우리의 대화를 듣고 누구라도 좋으니까 이 상황을 알아차려 줘!

『자, 말해봐. 제로스.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지?』
『음?』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어.』
『웬일로 순종적으로 나오시는 겁니까? 리나.』
『대신 닥터의 목숨은 살려줘.』
고개를 돌리고 제로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부탁이야...』

원하는 건 뭐든지?
제로스의 얼굴에서 가식적인 미소가 슬그머니 지워졌다.
『내가 원하는 건...』
심기가 불편한 듯 그가 목을 좌우로 두어 번 움직였다.
『당신이예요.』

오랫동안 내 생각을 해주고, 나를 너무나 잘 알아주었던 당신.
제로스는 손을 뻗어 리나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리나는 움찔했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제로스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그녀의 피부를 만졌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 밖엔 없어요.』
오랫동안 생각해봤다.
그리고 그렇게 결론지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래요. 당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