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배달 경력 이제 2년하고 3개월 반.
그만하면 이 업계에선 본 궤도에 진입했다고 자신하는 바였다. 아무래도 시카고의 분위기는 번잡한 상업 도시의 뉴욕 같지는 않아 일감이 썩 많지는 않았지만, 어떠한 도시라도 연인들은 살고 있는 법이고, 따라서 꽃배달과 러브레터만 전문으로 해도 밥은 굶지 않는다. 여기다 중요 파일을 잊어먹고 출근한 샐러리맨을 위한 급송 우편을 한 달에 서너 건만 무사히 해치우면 그럭저럭 집세가 떨어졌다. 긴급을 요하는 특별 우편물은 평상 우편물의 약 두 배 내지는 세 배의 비싼 배달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도 되고 썩 괜찮은 직업이다. 크리스는 콧노래를 중얼거리다 말고 끼익 소리를 내며 자전거를 세웠다.
『401호실의 리나 인버스 귀하.』

오늘의 배달은 카드.
슬쩍 쳐다보니 보낸 사람의 이름은 겉봉엔 적혀져 있지 않았다. 크리스는 짓궂은 웃음을 짓고 엉덩이를 털었다. 비밀이라 이건가. 흰 봉투에 들어간 카드를 햇빛에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그러자 알록달록하게 인쇄된 꽃무늬가 희미하게 비춰보였다.
오호라, 꽃이구나. 연애 편지, 아니면 생일 축하 카드? 어쩌면 본인의 결혼식에 꼭 와주십사 초청하는, 이혼한 전 남편의 살기 가득한 심술일 수도 있다.
오만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크리스는 재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총총 올라갔다.

『리나 인버스씨, 리나 인버스씨- 편지 왔습니다- 여보세요~ 편지요~』
한참동안 문을 두둘겼다. 그런데 인기척이 없다. 응? 해가며 다시 두둘겼다. 손목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50분. 퇴근 전 시각이라 사람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문 틈새로 살짝 집어 넣는 것으로... 잠깐만. 이게 지난 저녁에 있었던 말다툼을 사과하고 화해를 요청하는 남자 친구의 편지라면 어쩌려고? 크리스는 잠시 머뭇거리며 골치를 썩혔다. 커플이 완전히 깨지게 된 원인이 우편물 배달 실수여선 곤란하지 않을까. 프로의 자존심이 그런 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확인차 전화를 걸어보자. 사무실에서 적어온 수취인의 연락처가 어디에 있었는데...

핸드폰을 쥐고 막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였다. 찰칵 소리를 내고 문이 열렸다.
어랍쇼, 그런데 이것 좀 보게. 한참만에 나타난 여자는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있었다.
크리스의 눈이 왕방울처럼 벌어졌다.
세상에. 이 여자의 정체는 마피아의 애인이라도 되나?

『펴, 편지요. 이봐요? 나, 나는 강도가 아닌데... 저기요?』
퀭한 눈의 젊은 여자는 별 말이 없었다. 대신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는 들고 있는 물건을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놓으라는 시늉만 했다. 정제된 탄저균이 들어가 있는 생화학 폭탄물을 배달한 것도 아닌데 진짜 심하다. 어쨌거나 새파랗게 질려 두 손을 번쩍 든 크리스는 시키는대로 했다. 두 눈을 총구로 단단히 고정시키고서 말이다.
허튼 짓 하면 당장 갈기겠다는 기세다. 농담이 아니다. 이 거리에서 발사되는 9mm 총탄은 무엇보다 확실한 저승행 티켓이다. 등허리로 땀이 흘러내렸다.

『이걸 보낸 사람은?』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회사 서비스 센터에 직접 문의하시지요. 그것까지는 몰라요. 난 배달만 합니다.』
『진짜 배달원임을 증명할 명함이나 회사 연락처를 가지고 있나.』
『세상에 가짜 배달원도 있답니까? 하여간 지갑에 명함이 있어요.』
『수작 부릴 생각일랑 하지 말고 지갑을 천천히 꺼내. 그리고 명함을 한 장 바닥에 내려놔. 천천히! 두 손을 모두 내가 볼 수 있게끔 앞으로 돌려!』
『아, 알았어요. 그러니 제발 쏘지 말아요! 여기요, 명함! 됐어요?』
『됐어. 그럼 이제 가버려.』
명함을 내려놓은 남자는 그 길로 죽어라 하고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과민반응이다. 모르는 바 아니다. 리나는 권총 손잡이로 이마를 콩콩 때렸다.
그치만 말이다. 어쩌다 가는 차이니스 레스토랑까지 꿰고 있는 제로스가 배달원을 가장하고 그녀의 집 현관 벨을 누르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주의해서 나쁠 건 없다. 알게 뭐람. 어쩌면 그는 이미 몰래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와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 혀를 끌끌 찼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이 여잔 냉동 가열 식품 전문이군」하고 중얼거리는 거다. 마무리로 피자집에서 준 오이 피클을 기념품 삼고자 꺼내 간다. 언니는 덕분에 환장하신다.

리나는 스토커에게 쫓기는 가엾은 여느 여자들과 비슷한 반응 -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러가며 바닥에 놓여진 배달물을 죽어라 쏘아 보았다. 저것이 주소지가 잘못 적혀져 엉뚱한 곳으로 도착한 우편물이면 오죽 좋으랴만은.
『미치겠네!』
보내는 사람의 이름도 적지 않고 허옇게 해서 보낸 걸 봐선 그럴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짜증이 난 나머지 배달원이 놓고 간 명함을 발로 짓밟았다.
자, 그럼 그쪽 접수계로 전화를 걸어 누가 문제의 우편 요금을 지불했는지를 알아보도록 할까. 관두자. 전화비만 아깝다. 리나는 고개를 흔들어댔다.
범죄자들의 생활 신조는 다음과 같다. 서비스 신청은 익명으로, 요금은 현금으로.
눈에 훤히 보인다. 조급한 나머지 친절하신 금자씨를 추궁해 기억나는거 뭐 없느냐고 다그쳐 볼까. 그러면「우리가 하루에 모두 몇 건의 우편물을 취급할 거라 생각하시죠.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내 머리가 슈퍼 컴퓨터 수준일 거라 짐작하시는 건가요-」라고 냉소적으로 이죽거릴 것이 뻔하다.
넌더리를 내며 배달원이 흘리고 간 명함을 계단 아래로 뻐엉 걷어찼다.

원래대로라면 개봉은 증거물 분석실에서 안전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치만 이걸 들고 분석실까지 한가롭게 걸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 당장 봉투를 뜯어봐야 했다. 리나는 1회용 라텍스 장갑을 찾는답시고 서랍장을 모조리 뒤집어 엎었다.
『에잇, 이놈의 망할 장갑이!』
정작 필요하게 되니까 영 나타나주질 않는다. 쾅 소리를 내가며 애꿎은 서랍장을 주먹으로 쳤다.
혀를 깨물고 잠시 생각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동물! 그렇다면 핀셋이다!
눈썹을 정리하는 용도의 핀셋이 욕실에 하나 있었다. 허겁지겁 욕실로 뛰어가 그걸 무슨 외과 수술하듯 손에 들었다. 아무렴, 외과 수술이고 말고. 다시 거실로 달려나왔다. 아랫 입술에 침을 바르고는 총상 구멍에서 반토막난 탄환 뽑아내듯 신중을 다했다. 가위로 흰 봉투를 절개하고, 그 틈새를 기술적으로 벌려, 내용물을 조심해가며 끄집어냈다.

카드는 전국 선물가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였다. 분홍과 연초록으로 꽃무늬가 그려졌고, 리본 그림 위로 For You 라는 예쁜 이텔릭체 글자가 은박으로 반짝였다. 전반적으로 수수했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을 게다. 지독하게 평범해서 눈물이 다 나왔다. 리나는 숨을 멈춘 채 핀셋을 이용해서 반으로 접혀져 있던 카드를 펼쳤다.

얇은 기름 종이 위로 프린터로 뽑아낸 한 줄짜리 짤막한 메시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 다치신 곳 없길 바랍니다.
분한 마음에 발을 한 번 쿵 굴렀다.
캬아~ 나쁜 자식. 지금 병 주고 약 주냐?! 주제에 안녕을 기원한다 이거야? 설사 다친 곳이 있다 해도 병문안 올 것도 아니면서. 그런데 왜 상해 보험사 직원처럼 물어보느냐구!
리나는 메시지를 손톱으로 북 뜯어버리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아니, 아니... 잠시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참고 자시고 하기 이전에 확인할게 하나 더 있다. 스스로에게 흥분하지 말 것을 주의시키고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개구리 해부 중인 학생처럼 여전히 핀셋을 흔들고 있던 리나의 표정이 돌연 괴상해졌다.
카드 속에 또 하나의 보너스 카드가 겹으로 들어가 있다. 왜 있잖는가. 여러 겹의 상자 속에 직접 짠 머플러를 넣어 가까운 친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는 식의 유치한 애들 장난... 내용물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 심호흡하고 인내심부터 길러야 한다. 포장지를 뜯으면 또 포장지, 상자 열면 또 상자다. 환경보호 운동가들이「범죄」라고 못박은, 바로 그 과대포장 행위다.

이해가 안 간다. 이 마당에 웃자고 그런 건 아닌 듯 싶고.
리나는 근심으로 키를 석 자를 더하고는 핀셋으로 속 카드를 들어냈다. 두 번째 카드는 보라색 하트 모양의 스티커로 봉인이 되어 있었다. 스티커의 접착 부분을 떼어내는 손가락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 사진이다.

눈으로 보지 않았음에도 그냥 알 수 있었다. 놈이 사진을 보내왔다.
그런데 무슨 까닭일까. 이번엔 여느 때처럼 세 장이 아니라 딱 한 장만 넣어 보내왔다.
바짝 긴장해서 천천히 겉봉을 열었다.
마침내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우욱!』
사진을 보자마자 헛구역질부터 했다. 이러한 신체적 반응은 차마 예상치 못했던 거라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음에도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리나는 휴지를 찾고자 허겁지겁 고개를 돌렸다.
『게에엑---!!』
휴지는 결국 못 찾았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다리 힘이 풀려버린 탓이다. 그녀는 몇 걸음 못 가서 허리를 90°로 숙이고는 카펫트 위로 식초처럼 신 맛이 도는 침을 한웅큼이나 뱉어냈다.

세 명의 젊은이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한 가운데의 빨간 머리카락의 여자가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그 양편으로 푸른 눈동자를 가진 멋쟁이 청년 둘이 이예이~ 하고 포즈를 취했다. 세 명 모두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다. 살짝 술에 취해 뺨이 빨갛다.
학창 시절의 닥터, 리나, 그리고 가우리다.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어, 어떻게? 녀석이 어떻게 이걸?!』
추억처럼 낡았고, 잊혀지는 기억처럼 변색된 옛날 사진이다. 그러면 안된다는 걸 잊어버렸다. 리나는 손을 뻗어 사진을 쥐었다. 왁스로 잘 코팅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표면이 미끌거렸다. 복사기에 대고 찍어낸 것이 아니라 필름을 가지고 사진관에서 뽑아낸 진짜 사진이었다.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아 손가락으로 표면을 지긋이 눌렀다가 떼어냈다. 그러자 지문이 선명하게 묻어나왔다. 충격이 재차 몰려왔다. 촉감이 현실감을 더해 머릿속에서 붉은 경고를 울려댔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비명이 터져나오려 했다. 리나는 다시 한 번 손바닥을 들어 쇳가루 섞인 목소리를 토해내려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세 명이서 하나씩 뽑아 나눠가졌다. 이 사진은 모두 세 장 존재한다. 아니, 지금에 이르러선 정확하게는 존재했었다는 과거형으로 말해야 옳을 것이다.
리나가 가지고 있는 사진은 현재 행방 불명이다. LA 부모님 집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거라 짐작이 가고 있지만... 그걸 다시 찾아내려면 박물관의 고대 유적지 발굴단이 삽을 들고 출동해야 가능하다. 리나는 사진에 대한 애착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고, 사진첩 정리 같은 일은 귀찮아서라도 일부러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오래 전에 잡다한 물건과 섞여 쓰레기통에 버려졌을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서 대왕 물오징어와 세트로 헤엄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제로스가 리나의 부모님 집을 뒤져 이 사진을 찾아내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문제의 사진이 가우리의 소지품일 확률은 그보다 훨씬 더 낮았다. 가우리의 개인 소지품은 장례식 이후 모두 정리되었다. 옷가지는 카톨릭 계열의 자원봉사 시설에 기부, 사진이나 일기장, 졸업 앨범 및 편지 같은 물건들은 한꺼번에 모아놓고 소각했노라고 그의 이모 되는 여자가 나중에 말해 주었다. 보고 있는게 너무 괴로워서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손수건 한 장 남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딱 하나.
리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전화기를 향해 점프했다.

《Dr.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의 심리 상담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확히 벨이 두 번 울린 뒤, 아멜리아 테슬라가 사무적인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제발 별 일 없기를. 리나는 기를 써가며 침착함을 유지했다.
『리나 인버스입니다. 닥터와 통화하고 싶습니다만. 자리에 계신가요.』
《아, 인버스씨. 안녕하셨어요.》
그녀가 닥터와 오랜 친구라는 건 아멜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하는 아멜리아의 목소리엔 그래서 친근함이 포푸리 향기처럼 살짝 베어 있었다.
하지만 리나는 금방 눈치챘다. 평소와 달리 이 소녀적인 여성의 목소리는 쾌활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풀 죽은 어린애마냥 기운이 없는 듯 했다.
《선생님은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오전 무렵에 상담 손님의 긴급 전화를 받고 나가셔서는 아직까지 연락이 없으시네요.》
『긴급 전화? 그게 누구였죠, 테슬라.』
《음... 가만 있자. 그게 누구더라.》
메모지를 부스럭대며 넘기는 기척이 들려왔다.
《아! 톰 리들씨요.》
톰 리들? 모르는 이름이었다. 리나는 가렵지도 않은 이마를 북북 긁었다.
『나가기 전에 닥터가 무어라 하진 않던가요.』
《별 말씀 없으셨어요. 그냥... 잠시 만나고 오겠다고만 했거든요. 점심 무렵까진 꼭 돌아올테니 서류 정리 해놓고 있으라고 하셨고... 그게 전부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늦으시네요. 도중에 연락도 없으시고. 하여간에 내가 못 살아. 이럴 분이 아닌데 최근들어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하실 때가 간혹 있더라고요. 그게 혹시... 리나씨? 오후에 선생님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신 건가요?》
아멜리아의 말투가 묘하게 예리하다. 간혹가다 보이는 닥터의 이상 행동의 원인이 리나 아니냐는 식이다. 리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도망칠 궁리부터 했다.
『그건 아니예요, 테슬라. 음, 그냥 물어볼게 생겨서 전화한 거니까... 약속 같은 거 아녜요.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요.』
《좋도록 하세요. 그럼 메모를 남겨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나가 이제껏 연락이 없다라...
불안감은 배가 되었다. 리나는 수화기를 들고 재차 전화 버튼을 맹렬하게 눌러대기 시작했다. 닥터에겐 긴급 연락용 핸드폰 번호라는게 있었다. 새벽 3시에 눌러도 반드시 통화가 되는 번호다.
『제발 좀 받아라, 이놈아.』
신호는 간다. 그런데 받질 않는다. 지하 10층짜리 지하 주차장에서 지상으로 올라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건 상당히 안 좋은 신호다.
『제기랄!』
방안을 정신없이 서성이다 말고 벽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까.
대책 없는 막막함에 거실 소파를 향해 무작정 발길질했다.

- 뚜루루루

깜짝 놀라 제 자리에 가만 멈추어 섰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누군가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 뚜루루루

상대가 제로스일 수도 있다.
리나는 숨을 잔뜩 죽인 채 전화를 받았다. 일부러 말은 하지 않았다.

《어? 이거 왜 이래. 하나도 안 들리네. 여보세요?》
이쪽에서 한참동안 말을 않자 상대방이 투덜거렸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리나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정글스? 당신이예요?』
《뭡니까, 정말. 잘 들리기는 하는 거요? 끊고 다시 할까요?》
『아뇨, 문제 없어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죠.』

순간 수화기 저편에 자리하고 있던 정글스는 속으로 어랍쇼, 하고 혀를 찼다.
뭐냐, 이 쌀쌀맞은 반응은. 10년 교제 연인도 싸늘하게 식어 돌아서게 만들고도 남겠다.
물론 이해는 한다. 그 기분이야 좋지 않을 거다. 약간의 언쟁 - 그걸 언쟁이라 할 수 있다면 - 이 있었으니까.
지난 주유소 폭발 사건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밥 테일러 경찰국장은 만장하신 가운데 리나 인버스를 향해 주먹을 날리기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밥의 주먹은 요원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신문 스크랩이 가득한 게시판에 꽂혔지만 말이다.
「당신이 여자라서 때리지 않은 것이 아니야! FBI와 시카고PD가 전쟁을 할 까닭이 없으니까 억지로 참은 거 뿐이야. 잘 알아 들었어?!」
리나 인버스 역시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은 채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잘 알고 있으니까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밥. 저도 동료를 잃었다는게 뭔지 압니다.」
안전 장치 고장난 화염 방사기. 시도 때도 없이 열기가 풀풀 솟구친다.
정글스가 보기엔 형님, 아우다. 두 사람 모두 비슷한 부류의 인종이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죄가 없나니, 가서 손 씻을 대야를 가져와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로마인 빌라도의 위장 쓰림을 몸소 경험하며 정글스는 쥐고 있던 볼펜으로 책상 모서리를 꾹꾹 찔렀다. 이래선 엉뚱한 곳에 화풀이다. 신경질을 부릴 상대가 영 틀려먹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전화질 했느냐고? 어이, 어이.

『실은 여기로 사진이 왔어요, 요원. 그걸로 상의를 하고 싶어서 말이죠.』
《사진?》
『그렇소, 사진이라오. 보낸 사람의 이름이 없어 제로스가 보낸 거라 내 장담은 못하겠소만, 그리고 예전에 봐왔던 여자들 사진과는 거리가 멀고 말이오. 하지만 누가 봐도 장난이 아닌게 분명한 사진이 석 장 도착했어요.』
《왜 제로스가 보낸 거라 장담을 못 한다는 거죠, 정글스. 예전과 틀리다고요? 혹시 사진 속의 인물이 여자가 아닌 남자인가요.》
『음?』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건데? 남자냐고? 정글스는 당황해서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아뇨, 아뇨. 이번에도 여자 사진 세 장입니다.』
『후우-』

이거 진짜 이상하다. 후우? 지금 짧은 숨 몰아쉰 거 맞아? 이걸 뭔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거야? 실망했다는 거야, 아님 그럴 줄 알았다는 거야.
정글스는 영문을 모른 채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이 여자는 흡사 화장실 변기에 빠져 어디가 고장난 시계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치만 내 장담하는데 직접 눈으로 사진을 봤다면 그런 나사 빠진 반응은 절대 못 보일 걸.

『요원?』
『계속해요, 정글스.』
정글스는 흠흠 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적당한 단어도 같이 골랐다. 사진의 이미지를 말로만 전달한다는 건 아무래도 쉽지가 않다. 무어라 해야 적당할꼬? 그는 계속해서 음, 소리만 냈다.
『그러니까... 뭐랄까, 간략하게 요점만 뽑아 표현하자면 바로 이겁니다. 시체 놀이를 하는 리나 인버스.』
얘기만 들어선 아주 재미있을 거 같지 않은가? 다른 것도 아닌, 시체 놀이다.
《시체... 놀이?》
『하지만 결코 재미 없수다. 그러니까 당신이 직접 와서 이걸 봤으면 해요.』

조명 없는 어두운 공간이다. 아마도 폐 공장이나 사무실이 아닐까 싶다. 오만가지 쓰레기가 지저분하게 널린 실내에 한 여자가 몸을 구기고 이상한 포즈로 널부러져 있는 걸 폴로로이드 즉석 카메라로 멀리서 찍었다. 운동복 차림새의 젊은 여성인데 공교롭게도 리나와 똑같이 머리가 붉은 색이다. 길이도 비슷하고 굵게 웨이브 진 것도 흡사해서 처음에 이걸 보고 정글스가 얼마나 자지러지게 놀랐는지는 설명을 생략하겠다.
『그치만 당신처럼 숏다리가 아니었소. 당신보다 다리 길이가 최소한 한 뼘은 더 길더군요. 무릎을 세우고 비스듬히 앉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영 쉽진 않았지만 하여간 사진 속의 여성은 당신처럼 난쟁이 똥자루가 아니라 더 늘씬해요. 가슴도 더 크고.』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돌연 차가워졌다.
《지금 내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무지 헷갈리네요, 정글스.》
『왜 화를 낸다는 거죠? 인버스 요원. 죽은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는데.』
시치미를 뚝 떼고 정글스는 사진을 넘겼다.

다음 사진에선 인물을 보는 각도가 바뀌었다. 카메라를 든 사람 = 범인은 여자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 플래쉬를 터뜨렸다. 이제 여자의 얼굴이 한층 더 또렷하게 보인다. 먼지로 윤곽이 다소 뭉개졌지만 대단한 미인임은 분명하다. 짙은 화장에... 마스카라. 창백한 혈색. 사진으로는 상처가 안 보인다. 그런 까닭에 얼핏 봐선 정신을 잃고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직업 관계상 오랫동안 시체를 보아온 경험으로 그는 직감했다. 빳빳한 근육의 상태를 보아 피사체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경직이 이미 시작된 시체다.

《뭐라고요? 이미 죽은 사람을 사진으로 찍었다고요?》
『그래서 이 사진을 보낸 이가 제로스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친구가 잃어버린 시체를 찾으러 오라고 우리에게 사진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긴 좀 그렇잖아요? 납치된 여자가 겁에 질려 울부짖고 있는 사진이라면 또 모를까, 처음부터 죽었으니 시작하기도 전에 게임 오버죠.』
《그런데 왜 내가 그 사진들을 보았으면 하는 거죠, 정글스.》
『그게... 아까도 말했잖소. 이 사진의 주제는 시체 놀이를 하는 리나 인버스라고.』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정글스는「우연이 아니다」라는 쪽으로 1달러를 걸었다.
음, 너무 적은 액수인가. 그럼 10달러.
『피해자 여성은 당신의 머리카락 색으로 붉게 염색했습니다. 눈썹과 머리카락의 색이 미묘하게 다르더군요. 그런데 그게 미용 전문가의 솜씨가 아니예요. 전체적으로 염색 상태가 고르지 않거든요. 먼지가 잔뜩 묻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지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 생각은 그 때문인 건 아닌 것 같아요. 어설프게 컬러 헤어 스프레이 같은 걸 쓴게 아닐까 하는...』
여기서 의문이 시작된다. 정글스는 불편한 듯 인상을 썼다.
미인에 몸매 좋은 여성이 염색을 개떡처럼 하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하긴 힘들다. 그렇다면 범인이 염색약을 들고 힘 꽤나 썼다는 얘기가 되는데... 어떤 멍청이가 뭐하러 시체 머리카락에 컬러 헤어 스프레이를 뿌려 공들여 치장을 하느냔 말이다. 시체 애호가가 아닌 이상에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정글스가 다시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건 연출입니다, 요원.』
그것도 질이 나쁜 쪽이다.
『당신을 꼭 이렇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예고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아요.』
예의 주유소 폭발 사고 이후, 제로스는 단단히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경고를 보내는 것이다. 
정글스는 걱정을 담아 질문했다.
『혹시 당신에게도 수상한 메시지가 따로 도착하진 않았나요?』
『...』

리나는 힘주어 주먹을 쥐곤 대답을 회피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문제는... 그 사진이 경고용이 아니라는데 있다.

리나가 계속해서 머뭇거리자 정글스가 재차 물어왔다.
《곧 이리로 와줄 수 있지요? 요원.》
리나는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피부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미안하지만... 그러지 못할 거 같아요.』
《에?》
『나중에 전화할게요.』
《뭐? 어이, 요원!》
『행운이나 빌어줘요.』

그녀는 즉시 택시를 불러 센트럴 공동묘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