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 열쇠를 꽂아넣고 이리저리 돌리다 말고 제로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이 순간 만큼은 마음이 그리 좋지가 않았다. 십대 철부지 시절로 되돌아가 몰래 아버지 지갑을 열어 신용 카드를 훔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뭔가 한심스럽다.

그렇다고 해도 서둘지는 않는다. 서둘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니까.
이중 스프링 구조의 단순형 걸쇠는 제법 뻑뻑한 저항을 해가며 생각 밖으로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최첨단 장비도 아닌 주제에 꽤나 짜증나게 굴고 있다. 한 번 더 힘주어 열쇠를 돌려봤다. 반항하는 덩달아 커져 덜걱 소리만 더 커졌다.
그렇다면... 이번엔 살짝 뒤로 뺀다는 기분으로 살살 흔들어 봤다. 오, 효과 있다. 그렇게도 저항하던 걸쇠는 맥없이 손을 늘어뜨리고 매우 부드러운 찰칵 소리를 내었다.
당겨서 되지 않으면 밀어라. 아가씨들을 꼬시는 방법을 이럴 적에도 써먹을 수 있음이다.

좌우를 살펴, 혹시라도 보고 있는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하고.
제 집인양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일반 좀도둑들은 가택 침입을 시도함과 동시에 침착함을 잃는다고 한다. 특히 경험이 부족한 뜨내기들은 동전통을 찾는답시고 화병을 깨뜨리고, 서랍장을 털려다 아예 서랍장 자체를 거꾸로 뒤집는 실수를 종종 저지른다. 초조한 나머지 실수가 많아지고, 쓸데없이 동작이 커진다. 덕분에「나, 이곳에 왔다 갔소」라는 아주 멋진 흔적들을 곳곳에 남기기에 이르는데 이건 결코 농담이 아닌 수준이다. 맨 손바닥으로 거울을 만지고, 흙투성이 발도장을 부엌 바닥에 콩콩 찍고. 완전히「경찰 아저씨, 나 잡아주세요」다.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극악의 실수 - 이를테면 자기 신분증을 남의 집 침실에 흘리고 다니는 또라이 같은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 아드레날린의 과다 분비가 사람을 얼마나 바보 멍청이로 만들어 버리는지, 빈집털이범을 TV 브라운관에서나 본 보통 사람들은 아마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전문 빈집 털이범으로 랭킹 수위가 오르면 실수는 잦아들고 대신 요령이라는 것이 붙게 된다. 필요한 곳만 뒤지는 방법에서부터 수 틀리면 잽싸게 튀는 방법까지 착착 손에 붙는다. 감옥에 두어 번 들락날락 하고 나면 익숙해지는 건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기 시작한다. 왕왕한 선배들에게 기술을 전수받고 다시 그걸로 후배들을 양육, 점점 더 자신이 붙는다. 이제는 아예 [언제, 무슨 도구를 가지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 DNA에 입력된다.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어지고, 경보기의 전선을 끊는 동작조차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 털이범일지라도 언제 집 주인이 돌아올지 몰라 초조해하는 것 만큼은 좀도둑 시절과 비교해서 그리 많은 변화가 없다.

바로 여기서 제로스와 빈집 털이범간의 결정적 차이점이 발생한다.
초조감? 불안감?
그는 바로 자기 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기에 옷깃의 여밈을 풀고 소파에 가서 털푸덕 앉는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

나의 소파, 그리고 나의 사무실.
상체를 뒤로 해서 등받이에 기댔다가 다시 앞으로 숙였다. 손가락을 깍지끼고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참으로 이상하다. 편안한 건 그렇다치고 햇빛 아래서 봤던 사무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후궁들이 천 하룻밤에 걸쳐 술탄에게 묘사했던 세계처럼 밤이 다르고, 낮 또한 다르다. 이 둘은 서로 공존하되, 흡사 기름과 물처럼 결코 융화하지 않는 각각의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가죽 소파만 해도 그렇다. 어둠 속에서 색이 달아보이는 건 당연한 거겠으나... 째깍거리는 시계촛침의 소리만이 들려오는 밤의 공간에서의 소파는 사람을 한층 더 잡아끄는 흡인력이 있었다. 한 번 앉으면 그걸로 인생은 끝. 보이지 않는 족쇄로 사람의 몸통을 붙들어놓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혼잣말을 중얼거릴 것만 같다.

앉은 자세를 바꿔보았다. 삐그덕- 하고 악령의 중얼거림이 한층 더 커졌다. 제로스는 만족스러워하며 장갑을 착용한 손으로 의자의 쿠션을 탁 하고 내리쳤다.
『당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여러 각도로 대화를 나눠보게 됩니다. 그리고 해결 방법 및 치료 과정에 대해 서로 상의하게 되죠.』
닥터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그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흉내내어 보았다. 말투만 흉내낸 것이 아니다. 표정까지 고스란히 카피했다. 뿐만 아니다. 연필을 쥐고 있는 손 모양새까지 그대로 베꼈다. 다른 사람인 척 하는 게임은 그에겐 늘 흥미로웠다. 참지 못하고 입가로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르려 했다.
『톰 리들? 아시다시피 심리 치료라는 건 발가락의 때를 벗겨내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려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더욱...』
여기까지 말하곤 정말로 큭큭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그러고보니 발가락의 때를 벗기는게 아니라 티눈을 제거한다고 했던가. 상관 없다. 때를 열심히 벗기다보면 티눈도 자연스레 떨어져 나갈 터이니.

여전히 미소의 잔향이 남은 편안한 얼굴로 소파 반대편을 가만히 응시했다. 몇 시간 전에 바로 자신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바로 그 장소로 말이다.
그렇다면 조금 바꿔보자. 환자로의 역할 전환이다. 제로스는 코감기에 걸린 환자인양 거짓으로 우는 소리를 냈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선생님. 항상 심장이 뛰어요.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이 안 와요. 제발 도와주세요.』
가볍게 상상을 해봤다. 옆으로 살짝 삐친 머리가 인상적이었던 파란 눈동자의 그 남자는 무어라 대답할까.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라 권할까? 이를테면 가벼운 조깅 같은 거 말이다.
근엄한 표정을 하고는 정말로 눈앞에 환자를 대하고 있듯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몸이 곤죽이 되도록 뛰어보세요. 그러면 옆에서 자지 말라고 해도 졸음이 마구 쏟아질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루에 1시간씩 동네를 죽어라 뛰는 거예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에이, 틀렸다. 이건 너무 장난 같다. 차라리... 손가락을 가만히 입술에 가져갔다. 의사다운 느낌을 풀풀 풍겨가면서, 라틴어인지 독일어인지 모를 이상한 글자를 적어서 주는게 훨씬 느낌이 좋을 듯 싶다. 그러니까 수면제를 먹으라고 처방전을 써주는 거다.
『사흘치만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계속해서 먹으면 습관성이 되니까 더 이상은 안 되요.』

여기까지 즐기고 다시 손깍지를 꼈다.
이제 건너편 의자에 앉은 환자 - 상상 속의 파트너는「삶지 않은 맨 달걀의 얼굴을 한,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은 30대의 회사원」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젊은 여성으로 바뀌었다.
지치고 여윈 그녀는 무릎을 다소곳이 붙이고 앉아 피곤한 듯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눈자위는 어둡고 뺨은 꺼져 있다. 구제불능에 가까운 무기력증에 빠져 오늘이 몇일이고 무슨 요일인지조차 모른다. 다시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는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엉킨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그런 그녀의 무심에 가까운 손동작을 그는 뚫어져라 응시한다.
근본부터 망가져버린 가엾은 여자.
조금은 제로스의 표정이 슬퍼졌다.

「언제까지고 자고 싶을 뿐이야. 그런데 잠이 안 와. 하는 수 없이 거실 의자에 누워 심야 영화 프로그램을 한도 끝도 없이 보고 있지. 그런데 그게 뭔 내용인지도 몰라. 주인공 배우가 누구인지도 기억이 안나. 그렇지만 달리 할 일이라는게 없어. 시끄럽고... 어수선해. 완전히 망할이야. 수십 번 채널을 돌리는 것도 지겨워. 차라리 TV를 치워버릴까. 그쪽은 어떻게 생각해?」
제로스는 성심을 다하여 설득하려 했다.
『그러지 말고, 리나. TV 리모컨을 보이지 않는 장소로 치워두세요.』
그리고 침실에 가서 양 한 마리, 두 마리 하고 세는 거예요.

돌연 궁금해졌다.
그 남자는 불면증을 호소하던 리나 인버스에게도 수면제를 처방해 주었을까?
뺨에 손가락 하나를 가져간 채 한참을 생각해봤다.
이건 그냥 느낌일 뿐이지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맨 처음엔 시험삼아 항 우울제 같은 약품을 처방했을 수 있다. 그러나 똑똑한 이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을 거다. 그녀가 약에 의존하려 하지 않으리라는 걸 말이다.
「나는 내 영혼에게 최대한 정직하고 싶어. 그러니까 약물 효과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난 죽고 싶도록 우울해. 그런데 괜사리 기분이 좋아지는 약을 먹고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광대처럼 가짜로 웃으라는 건 정말로 지독한 짓 아니야?」
헛수작 하지 말라는 듯, 눈에 힘주고 있는 그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미안해요, 리나.』
제로스는 마른 침을 삼킨 뒤, 자신의 = 그의 실책을 최대한 정중하게 사과했다.

『사과한다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상으로 그려낸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지금은 여기에 있지 않은 여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을 따름이다.

손바닥을 비비고 어색하게 웃었다.
『리나. 뭐라도 좋으니까 나에게 말해봐요. 괜찮으니까. 이제 크게 숨 쉬고...』

닥터가 말했던 식으로 리나에게 말해보았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뭐죠.
이번에도 역시 여자는 이쪽을 외면하고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푸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피곤했다.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눈가를 어루만졌다. 안구 건조증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쏘고 아파왔다.
『왜 가만히 있어요? 대답하기 곤란해요?』
똑딱거리는 시계침 소리가 더욱 커졌다.
제로스는 손바닥을 기도하듯 모아 입술로 가졌다.
갑자기 바보 멍청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고 한숨 쉬었다.
『하긴, 나도 잘 모르는 걸요. 그러니 당신이라고 대답하긴 쉽진 않겠죠. 내가 원하는게 과연 무엇일지... 그게 뭘까요, 리나. 당신은 그게 뭐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알고 있나요.』
하하하... 도대체 누구에게 우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거람.
제로스는 가벼운 절망감을 느끼고 신음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서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심호흡했다.

「정리가 잘 된 사무실」이라는 건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내가 봐서 정리가 잘 된 사무실이다. 남들이 보면 제리코의 그림 - 바다 한 가운데서 비극적 조난을 당한 메듀스의 뗏목이다. 허나 그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도 내가 필요로 하는 서류를 단 30초 안에 멋지게 끄집어낼 수 있으면「정리가 잘 된」장소다. 얼핏 보면 더러운 돼지 우리. 그러나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물건들은 나열해 있다. 서랍이란 서랍을 다 열어보지 않아도 가위에 어디에 들어가 있는지가 훤히 눈에 보인다. 그렇다면 잘 정리된게 맞지 않을까.
『A, B, C, D... I. 인버스. 리나 인버스.』 
다른 하나는 남들이 봐도 정리가 잘 된 사무실로, 1분 전에 처음 들어온 사람도 원하는 걸 손쉽게 찾아낼 수 있는 질서 정연함을 자랑한다. 차트를 읽고, 해당 서랍장의 번호만 확인하면 끝. 다음으로는 입맛을 다셔가며 그냥 나꿔채면 된다.
Dr.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의 사무실은 기분 좋은 후자 쪽으로, 배반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미니 맥 라이트 손전등을 입에 물고 파일들의 영문 이니셜을 확인하던 제로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I 항목의 열 다섯번째에서 리나 인버스의 카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들을 착착 넘겨가며 손전등을 더욱 가까이 가져갔다.
카드에는 손으로 직접 기입한 날짜들이 나열되어져 있었다. 제일 윗줄에는 A 캐비넷 3이라는 문구가, 하단부에는 RAW DATA. 라는 짤퉁한 메모가 붙었다. 아마도 닥터는 비싼 컴퓨터를 들여다 놓고 현대화 = 전산화를 시도하고 있는 듯 하다. 다만 이 메모대로라면 리나의 정보는 아직 하드 드라이브엔 입력이 되질 못했다. 제로스에겐 천만 다행이다. 그랬다면 하드 드라이브를 통째로 뜯어냈어야 했으니까.

카드를 잡아당겨 제자리에서 뜯어냈다. 갑자기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최고로 멋진 야구 카드를 뽑아들고 신나게 만세를 불러대던 일곱 살 여름날이 떠올랐다. 제로스는 그때처럼 카드를 손에 쥐곤 호호- 하고 입김을 불어 먼지를 털어냈다. 가슴에 대어보고 뺨에도 대어보았다. 만족감이 혈관을 타고 흘러갔다.
나의 보물.
대단한 수집품을 손에 넣었다.

다만 한 가지 의아스러운 건 이것들이다. 제로스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졌다. 날짜 옆으로 의미를 알 길이 없는 기호들이 주욱 붙었다. 지난 2월 4일에는 ●½ 표시가, 3월 21일에는 하얀 삼각형, 그리고 일주일 뒤에는 삼각형에 검정 색이 입혀져 모양이 ▲가 되었다.
그러고보니... 제로스는 쥐고 있던 손전등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와 상담하던 닥터가 메모지에 검정색의 삼각형을 낙서하던게 생각났다. 전화를 들고 수다를 떠는 여자들이 무심결에 돼지 꼬리를 반복해서 그려대는 것처럼 단순한 손동작이려니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뚜렷한 메시지가 들어가 있는, 일종의 개인 에니그마였던 것 같다.

확인차 다른 사람의 기록 카드를 꺼내봤다. 사뮤엘 시스. 나이 34세. 직업은 치과 의사로 기혼이라 적혀져 있었다. 상담 날짜 옆으로 역시 여러 무늬의 기호들이 그려져 있는게 보였다. 6월 13일자 날짜 옆으로 그려진 기호는 검정색이 칠해진 사각형, ■이다.
『뭐지, 이 표식은.』
인상을 쓰고 잠시 고민해봤다. 그 날의 환자들의 기분을 암시하는 걸까, 캔디스 화이트 아드레이가 이라이자에게 골탕을 먹은 날에 검은 별 다섯을 달력에 그려댔던 것처럼?
톡톡- 하고 손가락으로 건드려봤다. 나중에 꼭 확인을 해두어야 할 듯 싶다.
차트를 탁 소리나도록 튕기고는 치과 의사의 것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녀와의 대화를 녹음한 소형 테이프는 바닥으로부터 세 번째 서랍장에 고이 들어가 있었다. 분량은 꽤 많아서 상자로 하나 가득이었다. 봉인된 뚜껑을 열고 짐짓 손을 집어넣고 휘저어 보았다. 손가락에 닿는 네모난 플라스틱 덩어리들의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제로스는 혀를 차며 그 중의 하나를 골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스티커로 라벨을 붙이고 손으로 녹음 날짜와 시간을 가지런히 적어놓았다. 라벨에도 예의 기호가 표시되어 있는게 눈에 띄었다. 1월의 마지막 화요일 오후 4시 30분. 기호는 ▲.
테이프를 위로 슬그머니 던졌다가 주사위마냥 재빨리 낚아챘다.
하느님의 지상 명령이다. 모두 압수다.
상자 뚜껑을 도로 닫고 통째로 캐비넷에서 꺼냈다.

내가 원하는게 뭐냐고? 그렇게 질문했던가, 의사 선생?
당장 말할 수 있는 건 이거 하나이다.
녹음기를 준비해서 밤새도록 이 테이프를 듣는 것.
이건 내 것이다. 남에겐 절대 못 준다.

마지막으로 문을 도로 걸어잠구기 전, 그는 사무실을 휭 하고 둘러보았다.
그가 다녀갔다는 흔적이라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있다. 제로스는 입술을 얇게 다물고 도어 손잡이를 돌렸다.
찰칵-
차라리 싸그리 불질러 버렸으면 속이 시원할 거 같다.

그로부터 한동안 링컨 공원에선 이어폰을 꽂고 열심히 뭔가를 듣고 있는 젊은 남자가 종종 목격되었다. 남자는 천천히 걷거나, 벤치에 앉거나, 아니면 풀밭에 앉아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늦은 오후를 보냈다. 운동에는 취미가 없는지 복장은 늘 평상복에 검정 구두였다.
그는 늘 조용했다. 그리고 혼자였다. 어린 아이들과 산책나온 젊은 여성들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를 보내는 적은 많았지만 그들과 길게 잡담을 주고받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구걸하는 거지가 손 벌리고 다가오면 빨리 내쫓고 싶어서 그러는지 늘 동전 하나 정도를 집어주었다. 그런 거라도 있으니까 사람처럼 보였지, 대부분을 벤치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넋 놓고 바라보다 간간히 카세트 플레이어의 버튼을 조작하는게 전부였다. 도통 움직임이라는게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도 그런 그의 모습이 마젠다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참 말쑥하게 생긴 남자였다. 거기다 독특한 분위기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으로 공원에서 세 번째 그와 마주쳤다. 어디까지나 모양만 조깅 중이던 그녀는 뛰는 - 사실은 걷는 속도를 줄이고 그에게 다가갔다.

『날씨가 무척 맑네요.』
『그렇군요.』
『조금 더운 것 같긴 하지만... 기분 좋네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남자는 조용한 시간을 방해받은게 매우 귀찮은 듯 표정을 구겼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여성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게끔 잘 교육받았는지 카세트 플레이어의 버튼을 만져 볼륨을 줄였다.

그런데 말이다. 조깅 중인 여자인 건 맞나. 외모만 본다면 정말로 그 목적이 운동이라고 짐작하긴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새빨간 입술에 마스카라까지 완벽하게 구비한 화장, 깊게 파인 스포츠 넥에 다리선이 돋보이는 반바지... 운동이 목적이라면서 주렁주렁 구슬이 달린 샹들리에식 귀걸이까지 달았으니 농담도 진짜 심하다. 결정적으로 땀이 안 났다.
벤치에 앉아 있던 남자는 불편한 흠흠 소리를 내가며 마젠다의 풍만한 D컵 가슴을 쓰윽 흝어봤다. 늘씬한 몸매와 탄력적인 엉덩이. 눈은 즐겁다만 장소와는 잘 안 맞는다는 느낌이었다.

때맞춰 땀 흘리며「진짜」운동 중인 한 사내가 늘씬한 그녀의 몸매에 아낌 없는 찬사를 보내며 지나갔다. 빠른 속도로 앞서가면서도 남자의 휘파람 소리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으쓱이며「하여간에 수컷들이라니」식의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모양새가 그런 식의 희롱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하긴, 내가 어느 정도껏 예뻐야지.
탐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눈부시다.
마젠다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하얗게 손질한 치아를 멋지게 자랑하며 웃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들은 이런 그녀의 행동이 필연적으로 불행을 부르게 될, 아주 위험한 장난이라며 하지 말라 말리곤 했다. 특히 부서가 같은 피리아 윌콥트는 일종의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며 손사레를 치곤 했다. 미국의 치안 상태는 대낮이라 해도 엉망진창이다. 후추가루 스프레이와 전기 충격기로 무장을 하고 돌아다녀도 머리카락이 쭈삣거리는 참에 되려 노출광인양 가슴이 파인 옷을 입고 공원을 어슬렁거린다라. 제발 나를 강간해주세요- 라고 광고할 일 있느냐는 것이 피리아의 주장이었다.

그럼 아랍권 여자들처럼 차도르를 입고 수녀처럼 살라는 거냐.
마젠다는 목이 꽉 끼는 드레스 셔츠 차림새의 피리아를 떠올리곤 피식 웃고 말았다. 금발의 푸른눈을 지닌 대단한 미인이면서도 덕분에 점수를 팍팍 잃고 있다 - 라는 것이 마젠다의 판단이었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망사 스타킹만 신으면 남자들이 기꺼이 그 발 아래 밟히려고 아우성을 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꽉 막힌 듯한 정장 바지를 고집하다니. 완전히 바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보가 맞다니까. 아님 세상 사는 즐거움을 하나도 모른다거나. 둘 중의 하나이겠지.」
한층 더 요염하게 엉덩이를 실룩거리면서 마젠다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자신의 장점이라는 건 자고로 과시하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구. 나처럼 말이지.」
뭐, 자신에게 노출증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건 결코 병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선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 아니겠어? 젊음을 만끽할 수 있을 때 하고 보는 거야. 몸매도 과시하고? 괜찮은 남자도 낚고.」
그녀는 자타가 공인하는 헌팅의 귀재이기도 했다.

『무슨 음악인데 그렇게 열심히 듣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남자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음악이 아닙니다. 이거 실은 어학 테이프예요.』
『아항.』
스미마쉥. 오야스미니 라이트. 간바라떼*. 그녀도 일본계 회사에서 일하면서 부지런히 일본어를 공부하는 중이었다. 라고 해도 간단한 인사말조차 죄다 틀려먹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어쨌거나 마젠다는 잘난 척하며 손뼉을 쳤다.
『제가 한 번 맞춰볼까요. 중국어?』
남자는 모호하게 웃었다. 그럼 아니군.
『저어... 스페인어? 아님 불어?』
『틀렸네요.』
『독일어?』
『사실은 말이죠... 이거 외계인어랍니다. 안드로메다 성운 R-78 행성 라다의 언어죠. 찌꼴레메떼? 그랑부리다 말꽁. 번역하면 안녕하세요, 아가씨 라는 거예요.』

폭소가 터졌다. 마젠다는 배를 쥐고 그야말로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재치 있으시네요. 반가워요, 전 마젠다 워치라고 합니다.』
『저도 반가워요, 워치. 악수를 청해도 될까요. 제 이름은 톰 인버스입니다.』
『인버스씨. 반가워요.』

가벼운 악수를 나누면서 마젠다는 속으로「하이 파이브!」를 외쳤다.
그녀의 부모들은 데이트 신청은 남성 고유의 권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만 시대는 이미 바뀌었다. 여자가 먼저 데이트를 신청하면 하늘에 구멍이라도 뻥뻥 뚫린대? 설사 뚫린다 한들 그럼 또 어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가볍게 만나 즐기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젠다는 공원 오른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제안했다.

『날씨도 덥고 하니 저쪽 햄버거 가게로 가서 콜라라도 먹지 않겠어요? 제가 살게요.』
『탄산 음료는 다이어트에 좋지 않다고 하던데요. 괜찮겠습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난 다이어트 중이 아니거든요.』
『멋지군요. 그래도 콜라는 나빠요. 차라리 커피로 하는게 어때요.』
『그렇담 커피로 하죠. 얼음을 넣은 프렌치 커피요.』
의견 일치다. 남자는 벤치에서 일어났고, 여자는 신나라 하고 그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나란히 걷다 말고 둘은 동시에 깨달았다. 조깅복과 양복바지의 절묘한 부조화라니. 상당히 안 어울린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들이 보면 보디가드와 사교계의 유명 인사로 보겠는데요.』
『그게 아니라 납치당하는 젊은 아가씨와 악당이예요.』
남자가 눈썹을 휘게 만들며 장난스레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럼 정말로 납치당하는 젊은 아가씨와 악당으로 해버릴까요?』
『에이, 농담도.』
『어? 농담 아녜요? 누가 농담이래요?』
마젠다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허락하노니 날 잡아가라.
『좋아요, 좋아. 그럼 납치해줘요, 악당씨.』
『알았습니다, 아가씨. 그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둘을 작정하고 팔짱을 낀 채 걸었다.

『이렇게 납치당하는 것도 그리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요?』
그래요? 그럼 아예 죽여줄게요.
제로스는 빙긋 웃으면서 여자의 매끄러운 팔을 감싸안았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은 퇴근 후 미팅을 즐기는 젊은 연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남들로부터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목 졸려 죽은 조깅 복의 여자를 차 트렁크에 싣고 제로스는 잠시 야간 드라이브를 즐겼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흘러간 옛 유행가를 중얼거리면서 신호를 기다렸다가 좌회전 했다.
도로 사정은 아주 좋았다. 전면을 주시하다 말고 찰칵- 하고 카세트 테이프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립다 라는 걸 넌 어떻게 생각해?」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버렸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망설이면서... 무슨 고성능 폭탄 스위치 조작하듯 다시 플레이 버튼을 작동시켰다.
이미 익숙해진 그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립다 라는 걸 넌 어떻게 생각해?」

이번엔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플레이 버튼.
한 번 더 리나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그립다 라는 걸 넌 어떻게 생각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나의 이해자.

제로스는 카셋트 플레이어를 쓰다듬었다.
찰칵 소리를 내어 다시 반복 버튼을 눌렀다.

「그립다 라는 걸 넌 어떻게 생각해?」

제로스는 테이프를 껐다. 그리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운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