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있어 이보다 더 힘들었던 날은 없었... 여기까지 생각한 닥터는 곧 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없었어? 설마.

온 몸에 멍이 들었다. 단순한 타박상이라고 얕보면 큰 코 다칠 거라는 의사의 으름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로 들어나, 한숨 푹 자고 개운한 마음으로 일어난다는 원래의 계획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를 고스란히 증명했다. 거의 기다시피 욕실로 가서 아스피린 두 알을 먹었다. 거기서 거울을 보고는 덤으로 쇼크라는 것도 같이 먹었다. 약간의 화상은 그렇다치고 죽죽 그어진 빨간 오선지가「끝내주는 싸움 있었음」을 훌륭하게 광고를 하고 있었다. 언제 술집에 가서 주먹질이라는 걸 했었던가. 그게 아니라면 술에 취한 나머지 실수로 2층 베란다에서 추락했다.

당황해서 일회용 반창고를 꺼내 뺨에 붙였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차라리 그냥 냅두는게 보기가 훨 나았다. 그놈의 망할 반창고를 붙이자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가다 발라당 넘어진 철부지 10대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눈물을 글썽이며 - 무지 아팠음이다 - 반창고를 떼어냈다. 덩달아 딱지가 같이 떨어져 나가면서 멎었던 피가 다시 나왔다.

면도는 생략했다. 젖은 수건으로 어린애 엉덩이 토닥거리듯 뺨을 두둘기는 것으로 세수를 대신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 입었다. 싫든 좋든 출근을 해야 할 터인데... 어쩜. 애차 클레어 4세를 수리소가 아닌 폐차장으로 직행시켰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하늘이 누렇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창고에서 자전거를 꺼내와? 아서라. 바퀴에 바람 빠진지가 5년이다.

그렇다면 지하철이다!
팬츠 가랑이에 다리를 꿰기가 무섭게 인터넷으로 시카고 지하철 구간을 확인했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제기랄!』
무리라는 걸 인정하곤 쥐고 있던 볼 마우스를 고양이에게 던져 주었다. 장화를 신은 고양이는 닥터의 소원대로「쥐」를 잡아가고, 대신 공손한 자세로 택시를 부르라며 전화번호부 책을 가져왔다.

『울라, 울라~ 빼르도나 메-』
금방 온다고 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40분 넘어서야 도착한 택시 운전사는 영어를 잘 못했다. 대신 유창한 스페인어로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았다. 이걸 믿어야 하나, 아님 말아야 하나.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목적지의 주소를 일러주었다. 운전사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하지만 미리 염려했던 바 그대로 택시는 곧 엉뚱한 길로 달리기 시작했고, 닥터는 미터기와 도로 표지판, 그리고 운전 기사를 번갈아 손가락질하며 분노에 가득찬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야 했다. 결국 그들은 시카고 시내 어딘가에서 미아가 되었다. 택시 기사는 유창한 스페인어로「모든 건 주님의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마무리로「그러니까 태양처럼 활짝 웃어봐요, 선생님」라고 말했다.
웃음이 나와? 태양처럼? 농담이겠지.

잔뜩 지쳐서 겨우 사무실 앞에 도착했더니만.
망할 놈의 건물주가 엘리베이터를 수리한답시고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1시간동안 운행을 전면 금지시켰다.

닥터는 옆구리로 손을 올렸다.
이 모든 것에 불구하고.
오늘이 그의 인생에 있어 사상 최악의 날은 아니라고 믿기로 했다.
이 정도로 죽는 소리가 나온다는 건 정신 상태가 영 글러 먹었다는 신호다.

6층까지 도달했다. 숨이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후욱- 하고 숨을 토하면서 계단 난간을 움켜 잡았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8층, 8층... 이러다간 기절하겠네.』
믿는 거다. 오늘은 최악이었던 여러 날들 중 그저 하나일 뿐,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다.

『선생님!』
도중에 말을 바꿔서 대단히 미안한데 어쩌면 정말로 오늘이「사상 최악」일지도 모르겠다.
Dr.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는 알아서 뒷걸음질 쳤다. 마스카라가 좌우로 번진 형편 없는 얼굴로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그의 비서가 말 그대로 암사자처럼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동작이 너무나 재빨라서 닥터는 그녀가 주먹을 들고 덤비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이건 평소 들국화 같은 그녀가 이성을 잃기라도 하는 날엔 빗자루를 쥔 미세스 다웃파이어가 된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더 말하자면 미세스 다웃파이어로 변신한 아멜리아 테슬라는 닥터를 무슨 껌 붙은 세발 자전거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정시 출근이라는 걸 평생 어긴 법이 없으신 분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무리 미리 예약한 상담 환자가 없었다고 해도... 무진장 걱정 했잖아요! 세상에. 지금이 몇 시야!』
그러더니만 곧 감정이 격해져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말도 없이 어디를 갔다 온 거예요! 이 인간이 어디 가서 죽기라도 했나, 납치라도 당했나, 테러를 당했나, 다리라도 부러졌나... 안 해본 생각이 없었단 말예요. 전화라도 해줬으면 이런 맘 고생도 안 하잖아요!』
닥터는 진땀을 뺐다.
『저기, 테슬라씨? 전화를 안 하다니. 어제 했잖아. 사정이 생겨 오늘은 좀 늦을 거라...』
어라. 가만 있자. 생각만 하고 정말은 전화 안 했다. 이런.
병원에서 간단한 진찰을 끝마친 시간이 새벽 1시. 집으로 돌아와선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는 다음날 오전 9시가 되도록 세상 모르고 잠에 취해 있었다. 전화 다이얼 버튼을 누룰 짬이라는 건 아예 없었다. 사무실에 연락 했겠거니 생각한 건 모두가 착각.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피가 아래로 쏠렸다. 큰일이다. 이대로라면 악을 쓰고 표효하는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강림은 확실하다!

아멜리아 테슬라는 쩔쩔매는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경찰에 실종자 신고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고요.』
『잘못했습니다.』
『그나저나 얼굴은 또 왜 그래요.』
『아, 이거. 그게... 넘어져서...』
『세상에나! 피멍이 들었잖아요! 선생님, 혹시 누구랑 싸웠어요?!』
『그런게 아니라 단순한 사고야. 싸우긴.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혹도 생겼네?! 이런 몸으로 운전은 제대로 할 수 있었어요?』
『저어... 차는 폐차했어. 오늘은 그냥 택시를 타고 왔지.』
『네에?! 페차?! 그렇다는 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거잖아요!』

아픈 사람은 어디까지나 이쪽인데 기절은 저쪽이 하려고 했다. 닥터는 재빨리 아멜리아를 의자에 앉혔다. 필요하다면 부채질도 하자. 테이블에 놓여져 있던 주간 시사지를 들고 위 아래로 흔들 준비를 끝마쳤다. 아니다, 이런 어줍잖은 부채질 말고 차라리 차가운 냉수를 가져오는게... 시사 주간지를 멀리 던졌다.
『지금 물 같은 거 마실 때가 아니잖아요!』
대신 그녀는 몸을 발딱 일으키고는 F자 선명한 성적표를 발견한 우리네 어머니처럼 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었는지를 설명해봐요.』

설명이라 하셨습니까. 음, 먼저 FBI 친구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고, 둘이서 데이트 흉내를 내가며 싸구려 중국 음식점에서 탕수육을 먹었고, 그러다 차를 타고 연쇄 살인범 용의자를 추격했고... 신나게 도로를 달리다가 차가 짜부라졌고... 주유소가 폭발했고...
『그냥.』
닥터는 깔끔하게 전후사정 다 잘라버리고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했다.
『굴렀어.』
아멜리아가 경악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던 말든, 어쨌든 간결하게.
『불에 좀 타기도 했지만... 여하간 굴렀어.』
요점은 그가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두 다리로 멀쩡하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거다. 닥터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비서와 조용히 눈을 맞췄다. 친 누이처럼 그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아멜리아가 고맙지 않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이다. 허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심적인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설명하라고? 죄다? 대관절 당신이 누구라고. 내 엄마도 아니지 않는가.

그는 표정을 살짝 바꾸고 정색했다.
『저기, 테슬라씨. 걱정을 끼쳐서 그건 대단히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다음달부터 내 월급을 10% 인상해줘요.』
멋지게 뒷통수 치는 발언이었다. 닥터는 펄쩍 뛰었다.
『말도 안돼!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서 월급 이야기가?!』
『음, 됐어. 보기보단 괜찮군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멜리아는 긴장을 풀고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손사레를 치며 여전히 어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를 향해 그런 바보 같은 표정 짓지 말라고 부탁했다.
『월급 이야긴 농담이었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지금「그렇게 하도록 해」라고 건성으로 대답했다면 난 로마 황제가 검투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려보이는 것과 비슷한 짓을 저질렀을 거예요.』

좋게 말해 엄지손가락을 내리는 거고.
실제로는 골방으로 데려가 윽박지른다, 살살 구슬려 몽땅 실토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든다, 내지는 양말을 벗겨 발바닥을 마구 때린다, 기타 물리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한다 등등의 어휘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말썽쟁이 쌍둥이 남동생들도 한 방에 휘어잡은 그녀다. 다루어야 할 대상이 그녀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성인 남자라는게 뭐 대수인가. 한다면 한다. 이 모든 건 정의다.

그러고도 남을 여자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공포감은 배가 되었다.
『지, 지금은 엄지손가락이 위로 올라간 거 맞고?』
닥터는 말을 더듬거렸다.
『간당간당했지만요.』
그렇게 대꾸한 아멜리아는 실제로도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렸다.
저 위대한 검투사를 살려주도록 하여라.
그렇게 남의 생사를 판단하옵신 황제께서는 이어 커피라도 마시겠느냐 물어왔다.
커피.
나쁠 것 없다. 설탕을 듬뿍 넣어 베네치아의 호사가처럼 마셔보도록 하자.

『오늘은 사무실 문을 일찍 닫고 병원에 다시 가보시는게 좋겠어요.』
아멜리아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스케쥴 조절에 들어갔다. 다행히 오늘과 내일은 바쁜 일정이 없다. 긴급 상황이라는게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틀 연속으로 임시 휴가를 가져도 큰 무리가 없을 거다. 그녀는 체온계를 입에 물고 주님의 귀한 어린양인양 침대에 누운 닥터를 상상했다. 흐음, 썩 괜찮은 생각 같다. 그렇다면 파리채를 들고「미저리」를 연기하자. 아멜리아는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며 무기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파리채는... 테슬라!』
하마터면 머그잔을 통째로 뒤집을 뻔한 닥터는 움찔해선 커피잔으로부터 손가락을 도로 거두어 들였다.
어쩌다 저런 여성을 비서랍시고 채용한 걸까. 마가 꼈나. 그것도 아니라면 팔자인가.

『진짜라니까요, 선생님. 지금 거울을 보지 않으셔서 그러나본데 대단히 흉악해요.』
그 얼굴로는 심리 상담을 하러 온 손님들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고도 남는다. 피멍과 생채기 투성이의 살갗을 한 선생님이「자, 뭐가 문젭니까」하고 물어오면 돌아올 답은 딱 하나.「나보단 댁이 더 문제겠는데요」
그래서 아멜리아는 다시 허리로 손을 올리고 자신의 고용주를 지긋이 내려다 보았다.

망치를 들고 불쌍한 소설가의 발목을 들입다 부러뜨린 그녀의 이름이 바로 미저리.
닥터는 마음이「대.단.히」불편해졌다.
『협박하는 건가.』
『설득을 하는 거예요.』
『설마. 설득의 탈을 쓴 으름장이겠지.』
『하여간 병원에 가셔야 해요.』

정말로 발목을 부러뜨릴 기세다. 닥터는 잔뜩 주눅이 들어 끽 소리도 못 냈다. 그동안 아멜리아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수첩을 펼치곤 세 곳 정도에 급히 전화를 걸어 잔잔한 목소리로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큰 문제는 없었던 모양이다. 통화는 금방 끝났다. 그녀는 다시 열쇠를 챙겨 서랍장을 잠궜고, 일어나 사무실 창문의 커튼을 내렸다.
『알았죠? 오늘은 집에 일찍 귀가하셔서 침대에 눕는 거예요.』
『약속하지.』
『병원에도 들리고요.』
『착한 아이처럼.』
『분명히 약속했어요.』

순 고.짓.말.쟁.이.
집에서 쉬겠다는 인간이, 여전히 겉옷을 입은 상태로,「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중얼거리면서, 사무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 쓰나.
아멜리아가 눈에 쌍심지를 곤두세웠음에도「착한 어린이」는 계속해서 손가락에 볼펜을 끼고 있었다. 누가 저 인간을 말리랴. 하여 아멜리아, 아니. 전직 간호사 미저리는 언제 저 고집스런 소설가 폴의 발목을 부러뜨릴 건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퇴근을 일찍 하려고 한 건 맞습니다만, 상관하실 것 없어요.』
망치를 든 미저리가 눈을 흘기는 걸 애써 무시하고 소설가 폴 = 닥터는 말했다.
『저어... 다음에 찾아오는게 아무래도 나을 것 같은데요.』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긁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잘못 들어온 가게에서, 잘못 주문된 계산서를 들고, 까닭을 몰라하는 테이블 메니저와 한 판 붙었다. 곁눈질로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그런데「오늘은 영업 끝났습니다」라는 분위기다. 남자는 때문에 의자에 편히 앉으라는 닥터의 말에도 계속해서 망설이는 눈치였다. 다리 하나는 밖에, 몸통 일부는 사무실 안쪽에. 문 손잡이를 계속해서 잡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했다.

남자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바쁘신 일이 있는 것 같군요. 방해를 하고 싶진 않아요.』
『아, 그런게 아녜요. 실은 어제 저녁 무렵에 자동차 접촉 사고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좀 다쳤죠. 병원에 가볼 생각이었습니다. 그치만 병원에 조금 늦게 간다고 건물 지붕이 무너지는 건 아니죠. 그쪽에서 부담스러워 하실 건 없습니다.』
닥터는 생채기가 난 자기 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멎적게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어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연이네요. 실은 저도 어제 저녁에 가볍게 접촉 사고를 냈죠.』
『저런. 다치신 곳은 없고요?』
『등이랑 다리에 멍이 좀... 그리고 손등을 몇 바늘 꿰맸어요.』
가죽 재킷의 남자는 아직까지도 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닥터는 흘깃 하고 그런 남자의 손을 쳐다보았다. 상처를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 그런가? 계절에 맞지 않은 얇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뭐, 그 기분은 십분 이해하지만 말이다. - 그도 아침에 뺨에 난 상처를 가린답시고 반창고를 찾았음이다 - 의학적 상식에 의거하여 그건 말리고 싶었다. 상처를 꽁꽁 싸두기만 하면 잘 낫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저런 종류의 장갑엔 나쁜 세균이 득실거린다. 상처를 감추고 싶다면 차라리 멸균 처리된 거즈나 제대로 소독된 붕대로 감싸는 방법을 추천해주고 싶다. 저래서는 상처가 쉬이 덧난다.

시선을 깨달은 것 같다. 가죽 재킷의 남자는 찰칵 소리를 내어 문을 닫은 뒤, 장갑을 낀 양손을 가슴 위로 들어보이며 웃었다.
『허영이죠. 아니, 허세라고 해야 맞겠군요. 그것도 아니라면 위장이라 해야 할까요?』
『허영이든 허세든,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치만 거즈로 감싼 손을 사람들이 죄다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요. 뭐랄까, 마치 전날 밤에 술집에서 주먹질을 하며 한 판 붙었거니 하고 다들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더군요. 덧붙여 이러는 겁니다.「젊은 남자가 싸움? 그렇다면 아마도 여자가 문제였겠지」이렇게 되면 통속 소설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질 시트콤이 되어버리죠. 난 그런게 싫었어요.』
상상이 간다. 상처가 난 닥터의 뺨을 본 아멜리아도 어디서 불량배와 붙었느냐며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가. 닥터는 묘한 동질감에 따라 웃었다.

『자, 그나저나 앉으시지요.』
그치만 남자는 쉬이 앉으려 하지 않고 대신 소파 주위를 서성였다.
닥터는 가만히 손깍지를 꼈다. 지금껏 저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의외로 많이 봐왔음이다.
『이런 종류의 상담은 처음이신가 보군요.』
『네. 처음입니다.』
남자는 그 사실을 쉽게 인정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그래서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생각하세요. 일단 제일 먼저 하실 일은 긴장을 푸는 겁니다.』

그렇게 일차적으로 대꾸했다가... 닥터는 가만히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지금 뭐라고 말했지? 긴장을 풀라고? 하지만 저 젊은 친구는 바짝 긴장하고 있는 눈치가 아니잖는가. 그런게 아니라 흡사 왕성한 지식 탐구력을 갖추고 붉은 자갈 바닥을 탐색하는 화성 탐사선 패스파인더처럼 보이고 있다. 사진을 찍고, 레이더로 주변을 관찰하고, 전파를 쏘아올린다. 나사의 과학자가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저 똑똑한 기계는 알아서 100년은 거뜬히 작동할 것 같았다.

「물론 저런 태도 또한 그 나름대로 긴장했다는 뜻일 수 있지.」
위장에 천재적인 어떤 아이들은 부모가 이혼을 해도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그래서 부모들은 착각을 하기 쉽다. 저 아이들이 우리 문제를 잘 받아들여 줬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겉보기만 멀쩡할 뿐이라서 메스를 가져가는 순간 썩은 내가 확 풍긴다. 속은 곪을대로 곪아 처치 곤란일 때가 많다. 몰래 마약을 하거나,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동물을 무섭게 학대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사기꾼은 집과 학교에서는 착한 아이로 행세한다. 완전히 지킬 박사와 하이드다. 지킬의 모습만 보고 있던 부모들은 교묘하게 숨어 있는 하이드를 깨닫는데 제법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상상도 못해봤어요. 도대체 저 아이가 누구인 거죠. 내 아이가 맞는 건가요.」
글쎄다. 어찌되었든 깜찍하기까지 한 위장술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어른들이 바보다.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은 SOS를 보내고 있다. 그걸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 잘못이 더 크다.

「그리고 약 먹은 하이드는 어른들 속에도 곧잘 숨어 있는 법이라서 말이야.」
어린애만 그러는게 아니다. 때로 다 자란 어른들도 굴절된 SOS 신호를 보낸다. 그러니 섣불리 판단하면 안된다. 더욱이 어른들은 애들과 달리 거짓말에 능숙하기 때문에 마음이 빨간색임에도 파란색이 맞다며 우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때문에 성공적인 심리 상담을 위해서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어떻게든 살펴야 한다. 상대방이 화성 탐사선 패스파인더처럼 보인다고 해서「지구인에게 침공당했다!」라며 호들갑을 떠는 화성인이 되어서는 반드시 실패한다. 전문가답게 행동하자. 다소 불편한 기분이 되는 것 정도는 감수하고...
그치만 왜 저 친구는 사람은 안 보고 캐비넷이니 서랍장이니 하는 걸 대신 열심히 쳐다보는 거지.

『긴장을 풀고 나서는요? 그 다음엔 어떻게 하죠?』
가죽 재킷의 남자는 뭐가 불만인지 그때까지도 소파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똑바로 서서 건너편 의자에 앉은 닥터를 가늘게 뜬 눈으로 짐짓 내려다 보았다.

좀 앉아라, 앉아.
덕분에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는 닥터의 결심이 자꾸만 흔들렸다.
저 눈빛... 거슬렸다. 속을 알 길 없는 깊은 눈동자가 어쩐지 싫었다. 까닭은 모르겠다만 적의마저 느껴졌다. 입이 웃고는 있는데 묘한 살얼음이 졌다.
본 적이 있다. 저건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을 가식으로 대할 적에 나오는 표정이다. 그의 어머니가 이혼한 친부와 다투면서 저런 식으로 입술을 슬쩍 움직이곤 했다. 위자료는 듬뿍 받아내야 하겠는데, 생각 같아서는 칼이라도 박았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고. 샹들리에처럼 흔들리던 다이아몬드 귀걸이 너머로 위장된 살기가 우아함을 가장하여 흐른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은 불타는 활화산, 내지는 고구마다.

「소설 쓴다. 이래선 상상력 과잉이야,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 누구랑 누구를 비교하자는 거냐. 지금 몸 아프다고 티 내고 있는 거야?」
닥터는 머리를 흔들며 억지로 한 박자 쉬어갔다. 넥타이를 한 번 만지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자, 무어라 질문했던가, 그대여. 긴장을 풀고 나선 다음으로 뭘 하느냐고? 원칙론에 입각하여 차분히 설명했다.

『당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여러 각도로 대화를 나눠보게 됩니다. 그리고 해결 방법 및 치료 과정에 대해 서로 상의하게 되죠.』
『녹음도 하나요? 그러니까 그 녹음기가...』
『녹음하는게 싫으신가요. 성함이... 미스터?』
『톰 리들. 톰이라고 불러줘요.』
『톰.』

닥터는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소형 녹음기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세팅은 되어 있지 않았다. 닥터는 매번 상담을 요청한 손님들에게 녹음기의 필요성을 충분히 주지시킨 뒤에야 비로소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야기 중에 민감한 주제나 내용이 언제라도 나올 확률이 꽤나 높기 때문에 녹음 건에 대해서만큼은 닥터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강간이나 과실치사처럼 기록으로 남아서는 곤란한 내용들이 나오면 서로가 곤란해진다.

그치만 어떠한 경우에라도 녹음은 필수다. 1차적으로는 환자의 치료가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 및 증거로써 필요하다.
2차적으로는 불미스러운 소송에 휘말렸을 때를 대비한 자구책으로써 반드시 녹음된 카셋트 테이프가 필요했다. 심각해지면 어릴 적에 경험했던 성희롱으로 늘 마음이 괴롭다며 상담을 신청한 환자가 무슨 맘에서 그런 건지「의사가 내 허벅지를 쓰다듬었어요」라고 고발하는 경우도 있다. 정말로 쓰다듬었다면야 쇠고랑을 차야 하겠으나, 아닐 때는 황당하다. 이럴 적에 상담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가 큰 구세주가 된다.
매번 최악의 사태를 예상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궁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기는 하다만. 미국은 소송의 천국이다. 한술 더 떠서 전자렌지에 살아있는 고양이를 넣고 on 버튼을 올린 할머니가 전자렌지 제조회사와 붙어 승소하는 나라다.

『하지만 난 녹음을 원하지 않아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반드시 해야 하나요.』
『톰? 아시다시피 심리 치료라는 건 발가락에 생긴 티눈을 도려내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려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록이라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저처럼 녹음을 거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까?』
『설마요. 단 한 명도 없다곤 할 수 없죠. 법으로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정 녹음이 싫다면 대신 이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닥터는 방금 깎은 연필을 꺼내 제임스 본드의 최신식 무기인양 좌우로 휘둘러 보였다.
그는 속기를 할 줄 알았다. 연필과 노트만 있어준다면 녹음기는 불필요하다. 다소의 노동으로 손가락과 팔마디가 쑤신다는 단점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선 여자들이 매우 싫어했을 테지요, 선생.』
『예?』
닥터는 톰이 말하고자 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들이 싫어해? 연필을?
깜짝 놀라 곰돌이 푸우의 캐릭터가 그려진 분홍색 연필을 지긋이 내려다 보았다. 여자들이 싫어한다면 왜 이걸 아멜리아 테슬라가 직접 사가지고 왔단 말인가. 설마, 여자들 취향은 이게 아닌데 나 좋아하라고 일부러 골랐나. 그치만 닥터의 취향으로 보자면 이건 미취학 아동들에게나 어울렸지 성인 남자와는 매치가 잘 되지 않았다. 더욱이 색상도 화사한 분홍이지 않은가. 분홍은 어디까지나 여성들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색이었다.

『내 말은 그런게 아닙니다.』
톰의 표정이 다소 심술궂게 변했다.
『속기를 하려면 고개를 숙여야 하잖습니까. 당신을 좋아할 여성 고객들은 그런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곤 정말로 실례되는 발언을 했다.
『이곳... 남자들 보다는 여자들이 많이 찾아오지요? 당신은 미남이니까. 때문에 엉뚱한 마음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을 거 같군요. 혹시나 해가면서, 가슴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입술에 붉은 루즈를 바르고... 당신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말입니다. 그런 여자들이 당신이 고개를 숙여 노트에 기록하는 걸 좋아할 리 없잖소. 한 번이라도 더 많이 자신의 얼굴을 봐주기 원할 터이니.』
『톰.』

불쾌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
닥터는 불편한 기색을 채 감추지 않고 연필로 테이블을 툭툭 건드렸다.
이곳에 찾아와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원한다. 마음의 안식, 그리고 평화. 내지는 진정한 휴식과 구원 같은 거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이성간 교제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여자 손님들이 우굴거린다고? 그것도 내 얼굴 때문에? 아서라. 저 밖에서 턱받침을 하고 있을 아멜리아가 이 이야길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매우 궁금하다. 아마도 웃을까? 아니, 그녀라면 어쩐지 화낼 거 같다.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는 생전 처음이라면서 말이다.

『일단 절 매우 잘 생긴 사람으로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런 부적절한 비판을 생으로 씹어 삼키고 싶은 맘은 일절 없다.
『나를 남자로 보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심리 상담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여기가 무슨 데이트 주선의 장소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아프지도 않은 맹장을 제거할 봇장과 무모함이 필요하죠.』
즉, 환자가 아닌 사람을 환자 취급 하는 분별없는 행동이 선행되어야 한다.

울컥- 하는 이쪽의 분위기를 감지했음이다. 장갑의 사내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살살 약 올리고 있다.
『저런.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화 나셨나요.』
그 질문에 닥터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조금은요.』
그리고는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어쨌든... 그런 멍청한 까닭으로 속기가 아닌 녹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이어 질문했다.
『톰. 당신이 원하는 건 뭐죠.』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문장이 약간 잘못되었다. 원래는「당신은 녹음과 속기, 둘 중에 뭘 하길 원하는 거죠」라고 하려고 했는데 머릿속에서 글자들이 서로 뒤섞였다. 이래서는 어딘지 모르게 직접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죽 재킷의 남자가 놀라 흠칫하고 몸을 사리는게 보였다.
내가 원하는게 뭐냐고?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닥터는 가식을 벗어던진 그의 맨 얼굴을 처음 보았다. 더 이상의 웃음은 없었다. 대신 굳은 입술을 하곤 닥터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
『미안합니다.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 좀 헛 나왔...』
『당신은 사랑받지 못함에 괴로워한 적 있나요.』

음? 그거야 그의 인생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그렇게 된다.
어릴 적 생각이 잠시 났다.
「저게 내 진짜 자식이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느냔 말이다, 이 창녀야!」
그게 이혼을 결심한 그의 아버지가 생모와 말다툼을 벌이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것도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어린 아들을 대놓고 삿대질하며 말이다.
「난 어느 누구랑 자든 콘돔을 꼭 낀단 말이야.」
여기서 그의 생모가 대꾸한 말이 더욱 걸작이었다.
「하! 그 콘돔에 구멍이라도 뚫렸던 모양이지! 당신이 무정자증의 고자가 아닌 이상 당신 자식이 맞아. 그러니까 엉뚱한 수작은 관두고 나한테 양육비는 확실하게 줘야 할 거야!」
졸지에 콘돔에 구멍 뚫려서 태어난 자식이 되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예 태어나게 만들지나 말 것이지.

닥터는 불편한 듯 다리를 꼬았다.
『질문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 해야 하는 건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은 그의 말을 짐짓 못 들은 척했다.
『당신은 사랑을 얻어보려고 애쓴 적 있는지요, 선생.』

글쎄다... 어쨌든 가우리는 말했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거라고.
「하지만 난 이해가 안 간다, 가우리. 배고픈 사람이 남에게 먼저 떡을 베풀어야 한다는 건 넌센스 아냐?」
「그렇지 않아. 배고프다고 남의 밥을 빼앗아 먹으면 어떻게 될 거 같아?」
「글세. 감옥에 가던가... 치졸한 짓 한다며 리나에게 맞아 죽겠지.」
「거 봐.」

가만히 듣고 있던 가죽 재킷의 남자는 정말로 궁금하다며 질문했다.
『빼앗으면 안되는 겁니까?』
저 친구... 말하는 것으로 봐선 빼앗아봤군.
닥터는 가만히 공책 위에다 검정의 삼각형 기호를 그렸다.

『빼앗는다고 만족스러워지더이까? 톰.』
『...』
『오히려 점점 더 (애정에) 배고파지지 않았소?』

이름이 톰 리들이라고 한 이 남자는 이후 불편한 침묵만 지켰다. 처음과 달리 그 얼굴엔 여유라는게 없었다. 그러더니 나중에 다시 보자는 딱 한 마디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수는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닥터의 마음이 뒤숭숭했고, 그 남자의 꿰맨 상처에도 별로 좋지 않을 듯 해서였다.

『그런데 이 사람, 정말로 이름이 톰 리들이라고 해요?』
드디어 퇴근하기에 앞서 아멜리아 테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응, 맞아. 톰이라고 하던데. 왜?』
『소설 해리포터에서 나쁜 마법사 볼드모트의 이름이 바로 그거였잖아요.』
사무실 출입구를 열쇠로 걸어 잠구다 말고 닥터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봐, 테슬라? 세상엔 톰 리들이라는 이름도 있고, 톰 크루즈, 톰 소여라는 이름도 있는 거야. 세상에서 딱 한 명만이 톰 리들이라는 법 있어?』
『없죠.』
『바로 그거야.』

그리고 닥터와 테슬라는 쓰라린 하루를 마감하고 퇴근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