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그다지 재미 있었다고는... 다만 특이했던 건 범인과 FBI의 끈적거림이라고나 할까. 므흣하기조차 했던 범인의 짝사랑(?)이 동인녀의 심금을 울렸달까. 하지만 영화 자체는 꽥 수준임이 분명해요. 찾아서 일부러 보려는 분 있으면 말리고 싶네요. 그리고 이번 글에서의 정글스 이미지는 애니보다는 라디오 드라마 이미지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어요. ^^ 노점에서 식칼을 팔던 그 정글스요.


《알로하- 정글스 브라운이오. 지금부터 사진 이야기를 또 꺼내려는 거라면 얌전히 주둥이 닥치고 발이나 닦으쇼. 미스 월드 아가씨와의 맞선 사진이라도 사절하겠소. 어린애 생일잔치 사진도 그만 보리다. 도대체가 말이지. 언제부터 내가 사진 감정사가 되었다고 한 트럭으로 가져다 안기는 거요. 안약도 떨어져 환장하겠구먼. 난 형사라구, 형사. 이제부턴 범인만 잡을 거니까 나는 그만 괴롭히고...》
『정글스 형사!』
전화를 받자마자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도 안한 채 졸린 목소리로 투덜거리면 어쩌자는 건지. 다급한 탓에 리나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정도 올라갔다.
『잠 깨요! 확! 어서!』
《어? 누구... 미스 FBI?》
『그럼 댁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단 말예요?!』
《아이구, 어머니. 안녕하셨습니까.》
『으이그! 빨리 잠 깨라니까!』

순간 몸이 오른편으로 확 쏠렸다. 리나는 꽥 하고 비명을 질렀다. 급커브였다. 이른바 슈퍼 하이테크 파워 메가 턴이라고 하는 환상의 기술이었다. 불가항력적으로 그녀는 한 마리 찌그러진 개구리가 되어 유리창에 선명한 입술 도장을 찍었다. 도장만 찍었던가, 마무리로 이마 박치기라는 것도 있다. 순식간에 피부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운전만 하면 쓸데없이 난폭해지는 사람이 있다. 평화주의자 팻말은 잠시 옆으로, 욕설을 퍼붓곤 차선 변경을 밥 먹듯이 한다. 차에서 내리면 넥타이 차림새가 반듯한 회사원인데 운전대만 잡으면 어찌된 영문인지 닭 들고 람보다.
그런데 리나가 알기론 Dr.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는 그런 부류의 인종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부터 그가 운전하는 차에 곧잘 올라타서 잘 알고 있다. 그의 운전 스타일은 지극히 점잖아서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졸곤 했었다. 목적지에 다 도착했다며 그가 어깨를 흔들어 깨운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물 흐르듯 차를 몬다. 부드럽고 우아하다. 급 발진에 급 커브, 급 브레이크가 다 뭐시라냐.
그랬던 인간이...
입술을 꽉 다물고는 무슨 자동 추적 장치 달린 미사일 날리듯 핸들을 조작했다. 현란하다 못해 보고 있기가 무서울 정도의 손놀림이었다. 그러면서 가속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거의 따라 잡았다구, 리나!』

가까스로 팔을 휘적거려 다시 좌석으로 돌아온 리나는 애써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전화가 끊어지지 않았어야 할 터인데. 혀를 차며 성가시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정글스?』
《거, 뭐요. 무슨 일 났소? 방금 쾅 하고 수박 깨지는 엄청난 소리가 들리던데.》
『제로스로 생각되는 용의자 차량을 추적하고 있어요! 지원 부탁해요!』
《에? 어디요!》
『지금 링컨가로 내려가는 중이예요!』
《용의자 차량의 번호는?》
『Hl 5236.』
《알았소. 이 전화, 끊지 마시오.》

빠앙- 하고 경적을 울리며 옆 차선으로 끼어들었다. 머리가 스프링 달린 인형처럼 훼까닥 움직였다. 아이고, 죽겠다. 이러다간 의자 채 밖으로 튕겨나가게 생겼다. 리나는 눈에 보이는 것들 중 아무거나 잡고 보았다. 그런데 그게 영 쓸모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뭔가를 잡고는 있었는데 쌩뚱맞게도 그건 손가락 길이 정도의 미니 도널드 덕 인형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인형이 닥터의 차에 있는 거래?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노라니 정글스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순찰자 수배 중이오. 제일 가까이 있는 순찰자부터 호출하고 있소. 일단 42호차와 17호차가 금방 그리로 날아갈 겁니다.》
『그것도 좋지만 이 앞쪽 도로를 봉쇄하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그 짓을 성공적으로 해내려면 공중 헬기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데... 후우. 이 야밤에 쉽지는 않을 터인데 어쩔꼬. 잠시만요. 알아보겠소. 지금 시카고 상공에 경찰 헬기를 띄울 수 있는지 확인해 보리다.》
『서둘러줘요, 정글스 형사.』
《전화나 끊지 마요, 요원.》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상황이 도와줄 것 같진 않네요.』

계기판의 바늘이 끝을 모르고 치솟는 중이었다. 우주선에 올라타도 심장 박동수 상태는 거뜬할 거라 자신하던 리나도 이번 만큼은 가슴의 심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80마일?! (=128km) 지금 그들은 플로리다 하이웨이를 쌩쌩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내에서 - 그것도 대도시에서 이런 기록적인 속도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느리게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차량들이 파도에 휩쓸린 거북이처럼 물러났다. 빠앙- 하고 다시 경적이 울렸다. 또 다시 액션 메가 바이트 오버 턴. 속이 다 울렁거린다.

『저, 정글스?』
《츠츠... 그러니까... 츠츠... 여보시오! 츠츠...》
역시나 전파 수신이 엉망이다. 하는 수 없다. 전화는 포기하자. 종료 버튼은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 핸드폰을 뒷자석으로 던졌다. 알아서 하던가 말던가. 끊어지지 않으면 다행이고, 설사 끊어졌다 해도 리다이얼을 누를 정신은 없다.

추적 중인 차량의 꽁무니가 보였다. 이쪽도 각오를 단단히 한 상태지만 제로스 또한 필사적이다. 탱크처럼 밀어 붙인다는 박력으로 가뿐하게 빨간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내질렀다. 덕분에 신호를 받아 좌회전에 들어가려던 탑차가 혼비백산하여 브레이트를 밟았다. 그런데 워낙에 덩치가 있는 차량이다보니 브레이크를 밟고도 수십미터는 그대로 미끌어졌다. 아스팔트 위로 오렌지 빛깔의 불똥이 튀어올랐다. 영문도 모르고 뒤만 따라오던 다른 차량들은 갑작스런 재앙에 정신을 못 차렸다. 쾅 소리와 함께 두 서너대가 그대로 뒤엉켰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해 그 무거운게 멈추지를 못하고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조심해, 닥터! 이대론 부딪치겠어!』
『빠져 나간다!』
리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추렸다. 그들도 제로스 뒤를 따라 슝 소리를 내며 교차로를 지나쳤다. 메아리로 들려오는 꽹과리 두둘기는 소리가 영 심상치 않았다만, 어쨌거나 이럴 적엔 돌아볼 짬이 없다는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봤다면 엄청난 보험료가 청구될 것이 뻔한 사태에 양심이 찔려 한동안 괴로웠을테니까.

『순찰자다!』
때 맞추어 구원 투수 등장. 왼편과 오른편에서 두 대의 순찰자가 등장했다. 정글스가 앞서 말했던 42호차와 17호차인 듯 싶었다. 제르가디스는 약간은 안도한 기색으로 순찰자 후면으로 붙었다. 번쩍이는 경광등이 현란하다. 그렇다면 대표 선수를 교체해 보도록 할...
『뭐야, 저건!』
다가오는 순찰자를 발견한 제로스가 오른편으로 핸들을 과격하게 꺾었다. 갑작스럽게 측면 몸통 박치기를 당한 17호차가 거짓말처럼 단번에 나가 떨어졌다. 시작과 동시에 장외 아웃. 작동 불능은 아마 확실한 듯 싶다. 그렇게 요란하던 비상 경고음 소리가 뚝 꺼졌다.
멈춰선 순찰자에서 비틀대며 경관 둘이 기어나오는게 보였다. 다행히 피가 났다거나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만... 날아가는 슈퍼맨이 실수로 엠파이어 빌딩에 머리를 박아대는 광경을 목격했을 적의 허탈감이 엄습했다. 닥터는 리나에게 항의했다.
『왜 저렇게 약한 거야!』
『저기, 나에게 아무리 그래봤자... 내가 순찰차를 직접 제작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저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겠다...』
『약하잖아, 리나!』
『그러니까 나더러 어쩌라고.』

그렇게 17호차가 쓰러지자 42호차는 알아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거리를 좁혀 바짝 추격하는 대신 거리를 두려는게 눈에 보였다. 그런데 이게 실수였다. 약점을 보였으니 공격당한다. 제로스는 옳다꾸나 해가며 42호차를 향해 돌진했다. 또다시 옆구리 치기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뱃살 치기를 감행하는 스모 선수가 따로 없다. 리나는 신음했다. 저돌적인 그 행동에 겁을 먹은게 분명하다. 42호차는 부딪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알아서 핸들을 틀어버렸다. 그리고는 사정권 밖으로 도망가 눈치만 살살 살폈다!
『저런 겁쟁이!』
시작도 안 해보고 기권이다.

작전이 통한다는 판단이 들자 제로스는 한 술 더 뜨고 나왔다. 웬 일로 속도를 늦춘다 싶었던 제로스가 그들이 탄 차량 옆으로 해서 바짝 붙었다. 그렇다면... 아이구야. 앞날이 훤히 보였음이다. 리나와 닥터는 단단히 이를 악물었다. 부딪친다!
손을 꽉 쥐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굉장한 충격이 머리카락까지 꿰뚫었다. 얼굴색이 하얗게 변한 닥터가 두 손으로 핸들을 죽어라 움켜잡았다. 타이어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 전에 문짝이 날아가는게 먼저일지도 모른다. 표면이 긁히는 건 어디까지나 둘째다. 고속 회전하는 쇠톱의 톱날로 만사 절단낼 적의 노란 불똥이 꽃불처럼 튕겨올랐다. 이래서는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분노다. 서로의 어깨를 밀어내며 두 차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힘차게 전진했다.

밀릴 것인가, 아님 밀어낼 것인가.
어쩜 이딴 식으로 운전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닥터는 경악의 표정으로 건너편 차량을 쳐다 보았다. 특수 코팅을 한 유리창 덕분에 운전대를 잡고 있을 제로스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대신 억 하고 있는 자신의 얼굴만 거울인양 고스란히 반사되었다. 열 받는 일이다. 침이라도 확 뱉어버려? 다시 정면을 응시한 닥터는 우거지상을 지으며 더욱 힘주어 핸들을 잡았다.

오늘의 도박사가 내거는 승률은 50대 50.
이기면 살아남고, 지면 국물도 없다.

『제, 제르...!!』
『괜찮을 거다, 리나.』
닥터는 자신했다. 왜냐하면 이런 류의 몸통 박치기는 까놓고 말해 속도와 무게의 승부인데, 제로스가 운전하는 차와 이쪽의 속도가 둘 다 똑같다고 가정을 하면 -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나란히 달리는 걸 봐선 속도는 동일한게 맞다 - 중량에서는 이쪽의 승리임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닥터는 곁눈질로 리나를 쳐다보며 나름대로 미소지으려 애썼다.
『우리네 조수석에는 방금 전의 식사로 포만감을 느끼고 있는 여성이 앉아 있거든. 확실히 말해 이쪽이 더 무거워. 따라서 이 승부에선 우리가 약간 더 유리하지.』
『뭔 소리야, 그게!』
듣고 있던 리나의 눈초리가 살벌해졌다.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고 앉았냐! 좀 더 그럴 듯한 이론을 대야 쉽게 납득할 거 아닌가. 예를 들자면 이 차의 엔진은 최신 튜닝이 되어 있어 성능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일 거라던가... 겸연쩍은 얼굴을 해봐야 이미 늦다! 배불리 먹은 여자의 몸무게로 승률을 올린다는 계획 자체가 애시당초 글러먹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브레이크 페달이나 밟앗!』
그녀가 시키는대로 했다. 끼익 소리가 더 커졌다. 사이드 미러가 한순간에 반토막났다. 문 손잡이도 그대로 떨어져 나간 것 같다. 정체 불명의 쇠 부스러기가 헨델과 그레텔이 숲속으로 떨군 과자 부스러기인양 길바닥에 흐트러졌다. 두어번 덜컹거리고 나서 최종적으로 타이어 휠도 옆으로 튕겨 나갔다.
어쨌든 - 장렬하게 몸 망가지는 것도 사양하지 않은 애차 클레어 4세에게 박수를 보내며 - 제로스를 앞으로 보내는 일은 성공했다.

좋아, 좋아. 리나는 혼잣말하며 제로스가 운전하는 차량의 엉덩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운전석의 친구에게 신호했다.
『박아.』
『뭐?』
『그냥 밀어버리라고.』
무리한 주문이었다! 이쪽의 의도를 간파한 제로스는 벌써 속도를 최대치로 올리고 있었다. 리나와 닥터는 사이좋게 앗, 하고 짧은 비명을 질러댔다. 아까의 장점이 이번엔 처치 곤란한 단점으로 다가왔다.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못했다. 그들의 차량에는 방금 전에 끝마친 식사로 포만감에 사로잡힌 여성이... 이런. 무게가 있으니 속도를 올리는데 시간이 걸린다.

『잘 있어, 닥터. 난 여기서 그냥 뛰어내릴련다.』
『이 자식이 꼭 농담을 해도!』
무게를 줄인답시고 뛰어내리기만 해봐라.
닥터는 오른손을 들어 리나의 머리를 퍽 때렸다.

뒤쪽이 무진장 시끄러웠다. 도시를 맴돌던 순찰자들이 상부로부터 긴급 명령을 받고 떼로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닥터는 백미러로 뒤를 확인하고는 잠시 숨을 멈췄다. 떠오르는 반짝이 라이징 선. 그다지 믿음직스럽진 않아도 대단한 장관임은 분명했다. 최소 열 대는 되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 동안 제법 많이 끌어다 모았다. 애썼을 정글스에게 키스를 보내자.

그런데 말이다. 리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보통은 이런 경우 뒤에서부터의 등장이 아닌, 전면에서 자기 과시를 해주어야 훨씬 효과적인게 아니었던가. 뒤에서 줄줄이 나타나봤자 하나도 안 반갑다.
『안 좋아, 안 좋다구...』
이런 상태가 계속 된다면 최악의 경우엔 고속도로로 빠져나가 캐나다 국경까지 일직선으로 달려가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기름이 바닥날 때까지 달리는 거다. 사정이 허락되면 대륙을 벗어나 태평양으로... 그녀는 예의 미니 도널드 덕 인형을 아직까지도 주먹에 무슨 부적인양 꾹 쥐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다. 앙칼진 목소리가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이러단 일을 망치겠어!』
『아직은 아니야. 잘 보라구, 리나.』

그랬다. 앞편에서 순찰차가 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나 구경할 수 있는 빨간 전구의 불빛이 나타났다. 그들의 시야로 도로 보수 작업을 설명하는 팻말이 보였다. 옳거니! 리나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차량의 출입을 통제하는 사선 줄무늬의 가로막이 도로의 삼분지 일 가량에 세워져 있었다. 하얀색의 안전모를 쓰고 작업에 열중하는 인부들의 실루엣도 두서넛 보였다.
《긴급 도로 보수 공사 중. 다른 길로 돌아가시오.》
신난다! 리나는 닥터와 하이 파이브를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운이 좋아 막다른 골목에 몰아 넣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즉각 체포다!

『자, 잠깐! 우와앗?!』
제로스도 빨간 전구를 발견한 것이 틀림 없다. 이 돌아버린 녀석은 -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로 그렇게 행동할 리가 없다 - 예고도 없이 차체를 그냥 회전시키더니만 무식하게 역주행으로 이쪽을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닥터는 펄쩍 뛰며 핸들을 비틀었다. 말이 그렇지 역주행이다. 정면 충돌은 사절이다. 포진하여 달려오던 순찰차 대부분이 깜짝 놀라 양편으로 비켜서고 말았다. 급 브레이크를 밟고 아예 도로 밖으로 튕겨나간 차량도 제법 되었다.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로스는 유유히 파도를 가르며 - 여전히 역주행으로 - 달아나기 시작했다.

인도 남부의 방갈로드에서는 내키는 차선으로 택시나 트럭이 달려도 경찰관이 제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좌측통행이니 우측통행이니 하는 개념 자체가 없다나. 달릴 수 있는 길로 달리면 그만이랜다. 시대와 세월을 초월하여 사는 그들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생활 습관이 아닐 수 없다. 네팔의 운전자들은 어느 쪽이든 막히지 않는 차선을 선택하며, 케냐에선 도로에 파인 구덩이가 없는 곳으로 요리조리 달린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곳은 인도도, 네팔도, 케냐도 아니다.

한 방 먹었다.
닥터는 으흐흐 하고 괴기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저 녀석, 도대체 정체가 뭐냐. 자살 특공대라도 되는 거냐?』
『그걸 내가 뭔 재주로 알겠어. 어쨌든 우리도 간닷!』
『역주행으로?』
『왜 이래, 닥터. 당연히 우린 제대로 된 차선으로 들어가야지!』
『그, 그렇지.』
입술에 침 한 번 축이고 새로운 각오로 다시 핸들을 잡았다. 그럼 다시 발진한다.

『그런데, 리나. 총을 쏠 수는 없는 거냐? 타이어를 맞추면...』
별천지 시카고. 밤의 제왕 알 카포네와 그 똘마니들이 상대편을 제압하고저 모의를 꾸민다. 달리는 차량의 창문을 내리고 몸을 절반쯤 내어민 프렌치 코트의 암흑 신사들... 기관총을 들고 드르륵 갈긴다.
『그건 1940년대 느와르 영화 이미지잖아!』
『실제로는... 안돼?』
『쏘고 싶어도 지금처럼 자세 고정이 되지 않아서는 발포가 불가능하지, 닥터. 엉뚱한 가로수나 가드레일을 맞출 생각이라면야 또 모르지만.』
『덤으로 엉덩이에 총알 구멍 생겼다며 소송을 거는 일반 시민이라는 것도 있고?』
『잘 알고 있구먼.』

그러니까 일렬로 줄지어 달리는 순찰차 중 그 어느 누구도 총을 꺼내어 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나름대로의 작전에 돌입한 것 같았다. 이쪽에 무전기가 없으니 그들이 무어라 떠들고 있을지는 순전히 짐작에 불과하겠으나... 일사불란하게 이동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그 시끄러움과, 퍼부어질 욕설, 저주의 굿판 등등을 읽어낼 수는 있었다.
순찰차 중 셋이 옆 길로 빠져나갔다. 이어 두 대가 우회전 하여 사라졌다. 나머지 여섯은 계속해서 추적 개시, 리나는 그들이「옆에서 예고 없이 발길질하기」를 하려는 걸 눈치챘다. 지리에 밝은 잇점을 최대한 살려, 샛길로 해서 앞질러가 저 앞에서부터 제로스의 진로를 방해하겠다는 얘기다.
나머지 여섯도 포위 작전에 돌입했다. 다시 제 차선으로 돌아와 달리기 시작한 제로스를 학이 날개를 펼치듯 둥글게 에워싸서 목표물이 좌회전이니 우회전이니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계속해서 직선 코스로만 달리도록 유도하는 것인데, 샛길로 달렸다 옆으로 치고 나올 동료들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처이기도 하다.「우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랐지? 이눔아!」라고 하려 했더니만 정작 제로스는 두 블록 옆으로 장소를 옮겨 나름대로 잘 달리고 있었다 - 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가면서, 무전기로 각자의 위치를 계속해서 알리고, 제로스를 압박해가며, 포위망을 서서히 좁혀나가는 것이다.

『나왔다!』
샛길로 사라졌던 순찰자 둘이 급습하는 마약 단속반인양 골목길에서 튀어나왔다. 캬아~ 아쉽다! 간발의 차이로 앞지르기는 성공하지 못하고 대신 제로스가 탄 차량의 트렁크에 가서 세게 부딪쳤다. 쾅 소리가 나면서 두 대의 차량이 어지럽게 엉켰다.

『괜찮아! 나쁘지 않아! 저러면 절반의 성공이야!』
접촉 사고에 불과했어도 충격이 대단했음이다. 순간적으로 제로스는 핸들을 놓치고 비틀대며 옆으로 밀려났다.
다음으로는 영 아찔한 상황.
반대편 차선으로 지나치던 대형 트럭이 1센치 틈으로 해서 술 취한 행인처럼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그를 튕겨냈다. 차체는 몬스터 쿠키인양 찌그러졌고 앞 타이어 하나가 펑크났다. 지그재그 운전의 연속이었다. 보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하다. 불가항략적으로 차체가 회전했고, 도로가 아닌 셀프 주유소 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속도는 여전히 붙어있는 상황. 커다란 비석처럼 솟은 급유대 셋을 일시에 날려버렸고 - 그곳에서 주유 중인 사람이 없어 천만다행이었다 - 그런 뒤에도 20미터를 더 미끌어지고 나서야 차량이 가까스로 멈추어 섰다.

『잡았다!』
『아냐! 아직은!』
닥터의 표정이 달라졌다. 반토막난 급유대에서 여름철 분수대인양 휘발유가 세 줄기로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유소 전체가 기름으로 범벅이 되었다. 휘발성 악취가 코를 찌르면서 도로 표면이 미끄럽게 변했다.
바로 그때 제로스가 자동차 창문을 열어 팔을 내밀었다. 보고 있던 리나의 눈도 크게 벌어졌다. 남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하얗고 가느다란 손, 그리고 쥐어진 은빛의 지포 라이터. 그 의미하는 것의 흉폭함에 닥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큰일났다! 전속력으로 후진! 후진!』
그들이 미친 듯이 후진하는 것과 동시였다. 제로스가 찰칵, 하고 지포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는 곡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갔고, 슉- 하는 느낌으로 불길은 바닥을 적신 기름을 따라 빠르게 번져나갔다.

리나는 놀라운 속도로 땅바닥을 기는 파란 뱀을 보았다. 뱀은 당장에라도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보였다. 피를 들끓게 하는 달빛을 보았음인가, 뱀은 또아리를 틀었고, 그 커다란 입을 벌려 포효했다.

『폭발한다!』
주유소 자체가 온통 화염에 휩쓸렸다. 이에 멈추지 않고 불길은 달려오던 순찰차에까지 이르렀다. 푸른 불꽃의 뱀이 차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텅 소리와 함께 갗 튀긴 팝콘인양 차체가 위로 솟구쳤다. 거인의 어깨가 이들을 멀직이 던져 버리는 것 같았다. 또 다른 뱀이 다른 차의 바퀴 아래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탈출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재앙이 닥쳤다.
『안돼~!!』
열기 덕분에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순찰차는 수직으로 10미터는 족히 날아올랐다가 비스듬한 각도로 추락했다. 운이 나빴다고 한 문장으로 말하기엔 상황이 너무나 처참했다. 2차 폭발이 뒤를 이었다. 오렌지 빛깔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리나, 눈 감앗!』
닥터는 재빨리 리나의 머리를 감싸안고 허리를 숙였다. 순간 그들이 찬 차량의 유리창이 압력에 못이겨 깨졌다.

제로스는...
이 모든 광경을 무심히 쳐다보고 있다가.
한쪽 바퀴가 펑크가 나 덜덜거리는 차량을 끌고 천천히 장소를 빠져나갔다. 

사상자가 모두 다섯. 이중에서 사망자가 한 명이었다.

아비규환으로 변한 병원 한 구석에서 리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 남자는 누구죠.》
리나는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그저 떨리는 손가락으로 바늘로 막 꿰맨 이마를 어루만졌을 뿐이다.
《알아요.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오늘은 매우 힘든 밤이죠. 그러니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죠. 잘 자요, 리나.》
전화는 곧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