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 모양은 어쨌거나 데이트.
젊은 여자와 남자가 만나 한 테이블에 앉아 저녁 식사를 같이 즐기고 있다.
그런데 대략 눈치로 보자면 그게 꼭 기분 좋은 데이트인 건 아닌 듯 싶다. 예쁜 여성을 앞에 둔 남자의 표정이 지나치게 차갑다. 아니, 지옥의 문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최후의 참회에 사로잡힌 로댕의 전신 조각처럼 엄숙하기조차 하다. 당장 헤어지자 선언이라도 할 건가, 분위기가 절대 위기에 처한 남녀가 벌이는 최후의 만찬이다. 그들이 부부라면 내일 모레 이혼 수속은 확실하겠다.
한참만에 여자가 한 마디 했다.
여보, 변호사가 그러는데 내 이혼 위자료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음? 아닌가?

『젓가락질... 힘들어 보이네.』
『음. 잡는 것보다 놓치는게 더 많군.』
기를 쓰고 튀김 옷을 입힌 고기 하나를 잡았다. 주홍빛이 도는 단 맛의 소스가 묻어 그놈의 낚시질은 영 쉽지가 않다. 젓가락을 쥔 손가락에 쥐가 날 것만 같다. 아니, 이미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최대한 조심해가며 그걸 입으로 가져가려고 노력을 해본다. 순간 미끄러지면서 고기는 다시 접시로 추락한다. 들어오는 건 공기밖에 없는데 악어처럼 크게 벌려진 입이 한심스럽다.
아이구야. 닥터는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이 한심한 짓을 30분 내내 반복하고 있다. 이게 과연 식사이긴 한 건지. 먹자고 별 고생을 다 한다.

『익숙해지면 소스에 들어간 완두콩도 젓가락으로 집어 올릴 수 있다던데.』
『그거 기예단 이야기지? 리나.』
닥터는 멎적음을 감추며 뭐 묻은 거 하나 없는 깨끗한 입가를 네프킨으로 닦았다.
『아니. LA 코리안 타운에서 귓동냥으로 들은 이야기야. 그 동네 사람들은 완두콩은 물론이고 머리카락처럼 생긴 콩나물도 젓가락으로 집어올릴 줄 안다더군.』
『진짜?』
『시범을 보여준 사람도 있는 걸. 이름이「김」이었지. 게다가 그 사람이 쓴 젓가락은 스테인레스로 만들어진 거였고, 이것보다 두께가 훨씬 더 얇았어.』
『이것보다 더 얇다고? 그 사람 직업이 뭐였는데. 서커스단 출신이냐?』
『김은 세탁소를 운영해.』
『컥-』

좋다, 이거야. 닥터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세상은 넓고 인간은 우주와 같다. 기예단 출신도 아니면서 그런 놀라운 기술을 가진 인간도 있다고 치자. 이골이 나면 퍼스런 물벼룩 알에다 좁쌀도 집어올릴 수 있겠지. 하지만 이쪽은 생 초보다. 두툼한 고기조차 입으로 가져갈 수가 없다. 닥터는 눈을 천정으로 돌렸다. 그놈의 탈출극을 뻔질나게 시도하는 튀긴 (망할) 고기! 음식 이름을 탕수육이라 하지 말고 아예 탈출 마술의 대가 후디니라고 바꿔라.
젓가락을 잠시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쥐가 난 손가락에 입김을 호호 불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다음엔 차라리 맨손으로 밥알을 줍는 인도식 식당으로 날 초대해줘. 매운 맛이 싫다며 징얼거리지 않으마. 비위생적이네 뭐네 해가며 반항도 하지 않고. 젓가락만 쓰지 않는다면 날 생선이든 대마왕 오징어든 맛있게 먹어줄게.』
닥터의 불만에 리나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변했다.
『왜? 재밌다고 생각은 안 들어? 그리고 손가락을 많이 움직이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해.』
『그래? 하지만 넌 이미 머리가 좋잖아. 거기서 더 좋아져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기네스북에라도 올라가고 싶은 거냐?』
『내 머리가 좋다고? 아냐! 난 원주율의 소수점 뒷자리를 50자리 넘어선 외우지도 못해.』
『어이. 일반인들은 파이 값 3.14159 뒤로 뭐가 붙는지도 모르고 산다.』
아예 파이(π)라는게 뭔지 모르고 사는 사람은 그보다 곱의 곱절은 더 많고. 그런 걸 몰라도 세상을 살아가는데엔 큰 지장이 없으니 천만 다행이라고나 할까.

한숨을 내쉬면서 젓가락을 다시 잡았다. 그런데 아까와는 공기가 달랐다. 그 느낌이라는게 포크나 나이프 같은 식기 도구를 들었다라기 보다는 꼭 흉기를 든 강도처럼 보였다. 닥터는 - 터프하게 - 주먹으로 쥔 젓가락을 튀긴 고기를 향해 세차게 휘둘렀다. 식칼도 아닌 것이 푹 소리를 내며 고기 속에 들어가 박혔다. 되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에티켓이고 뭐고 알아서 생략하자. 만족스러워하며 꼬챙이에 꿰어진 형상이 된 고기를 입에 넣었다. 음, 드디어 제대로 된 식사다. 진작부터 이렇게 할 걸.

『맛은 괜찮네.』
『야만인.』
『일단은 환경 적응이라고 해줘. 나로선 많이 노력한 거다.』

그런데 말이다.
육즙 고소한 고기를 목구멍 너머로 삼키다 말고 불현듯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유나 알자.』
『음?』
『왜 나를 이리로 데려온 거지?』
『데이트 하러.』
『입에 침은 발랐나. 그게 아니라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어디서 거짓말을!』
『아하하!』

리나는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대면서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길 한 3초? 맛있어 뵈는 오이 피클 하나를 입에 넣고 아작 소리를 내어 씹었다.
『저기 말이지. 이 가게, 닥터가 보기에 어때?』

아침엔 네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짐승이 뭐게.
사자의 몸통을 가진 지혜의 수호자 스핑크스가 여행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곤란함에 처해선 카이로로 돌아가는 길을 물었는데 망할 놈의 스핑크스는 사람이 던진 질문에 같지도 않은 수수께끼로 답을 한다. 그것도 수수께끼의 답을 맞추지 못하면 뼈도 추리지 못할 거랜다. 이런 미친 놈이.

닥터는 불편한 듯 앉은 자세를 뒤척였다.
『뭐야, 그건. 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통째로 씹어 삼키리라?』
『설마.』
『정말이냐?』
『매번 속고만 살았나.』

튀긴 고기에 대한 명백한 학대 행위 - 젓가락으로 꾹꾹 찔러대기를 잠시 멈추고 생각을 해봤다. 음식에 대한 견해라면... 수준은 그렇고 그렇다. 물론 기름진 중국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편견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전반적으로 이 가게의 음식은 지나치게 달짝지근했다. 과일 향이 들어간 소스는 높은 당도로 인해 끈적거리다 못해 깔깔했다. 손으로 만질 생각은 감히 해보지도 않았지만, 만약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만진다면 파리 끈끈이 저리가라의 접착력을 자랑할 것 같았다. 그런 까닭으로... 닥터는 심호흡 한 번 했다. 케이크나 초코렛을 밝히는 여자들은 좋아할 수 있겠다. 허나 그는 아니다.
리나의 눈이 새초롬하게 변했다.
『매운 맛도 싫어, 짠 맛도 싫어, 단 맛도 싫어... 도대체 뭐가 좋아?』
『싱거운 맛.』
『그럼 물이나 실컷 드시지요. 자, 여기.』

하지만 눈치로 보아 리나가 원하는 건 맛에 대한 평가가 아님은 분명하다. 닥터는 리나가 건내준 물 한모금을 마시고 눈동자를 빙글 돌렸다.
맛이 아니라면... 그렇담 가게 분위기?

고급 상점가에 자리한 레스토랑도 아니겠다, 굳이 레벨을 따지자면 중 하.
전면에 일부러 걸어놓은 중국풍의 먹 그림은 어린애 낙서처럼도 보였다. 동양의 무천 도사를 묘사한 듯한 인물화는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광고하는 배불뚝이 할아버지와 너무도 닮았고... 표정이 찰리 채플린처럼 희극적이라 그림에 문외한인 이가 봐도 조잡하다 싶은 느낌이다.
다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딸각 소리를 내어 요란하게 식사하는 한 무리의 멍키 슈트가 보였다. 회사원은 아닌 듯하고... 아파트니, 땅이니, 세금이니 하는 얘기가 간혹 들려오고 있다. 부동산 중개인일까? 그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려보이는 사람이 저질스런 농담에 반응해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면서 그는 입가에 묻은 소스를 슬쩍 손가락으로 닦아서는 그걸 테이블보에 대충 뭉기적... 으윽.

Dr.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는 진지한 얼굴로 손가락 네 개를 들었다가 다시 하나를 접었다. 이 수신호는 포 볼로 주자를 1루로 내보내기까지 공이 딱 하나 남았다는 것으로, 이른바「목이 잘리기 바로 직전의 간당간당한 수준」이라는 뜻이다.
차이나 레스토랑 특유의 붉은 조명과 집기들은 앤틱이 아닌 괴기 쪽에 더 근접해 있다. 멋있어 보이라고 가져다 놓은 오래된 서랍장은 일부러 쑤세미로 밀어 기스를 낸 것처럼도 보이고 있다. 붉은 칠을 한 카운터 앞의 내부 기둥은 사이비 종교의 제단을 연상시켰다. 거기서 돼지를 잡아 피를 뿌리면 이미지가 딱 맞아 떨어질 것 같다. 더욱이 그 붉은 색은 거부감마져 드는 번득이는 애너멜 페인트다.
위생 등급은 어떻게든 합격했을지 몰라도 인테리어는 최악. 실내 디자인 수준에 따라 영업 허가를 제안하는 법령이 마련되었다면 이 가게는 당장 폐업이다.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상체를 앞으로 바짝 내밀고 작게 속삭였다.
『어떻게 이런 가게를 다 찾았니? 인터넷 보고 고른 거야? 엽기적 식당이라는 제목의...』
『그렇진 않아. 난 그저 혼자 식사를 해도 구애받지 않을 장소를 찾았을 뿐이야.』
창피함을 느꼈던지 뻘쭘해가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가게엔 데이트 중인 남녀가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거든. 저어, 그래서...』

젠장.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는 피지도 않는 담배 생각이 간절해짐을 느꼈다.
이 푼수야.
나라는 인간을 가끔은 써 먹어라. 왜 혼자서 청승이냐.

그러나 당장 베어 죽인다 해도 입 밖으로 그 소리는 못 한다. 대신 그녀가 큰 부담감 느끼는 일 없도록 밋밋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확실히 데이트 코스로는 어울리지 않겠군.』
다시 고개를 든 리나의 표정은 살짝 밝아져 있었다. 역시 그는 이쪽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네가 봐도 그렇지?』
『어지간히 악취미가 아닌 이상에야.』
『처음엔 나도 적응을 잘 못했어.』
『오호라. 지금은 잘 적응해서 단골이 되셨고?』
『고백하자면 지금도 단골은 아니야. 횟수도 손가락에 꼽는다구.』
리나는 손가락 여덟 개를 들어 보였다. 지금까지 여덟 번 찾아왔다는 뜻이리라.
『어디까지나 겨우 익숙해졌다 싶은 수준이지. 지금도 흠칫거릴 때가 있는 걸. 혹시 봤어? 여기 카운터 위로 올려놓은 사기 인형.』
『응, 봤어. 그거 사자야, 아님 사자 어금니를 가진 공룡이야?』
『몰라. 아마 둘 다인 거 같아. 하여간 엄청나. 도대체 그런 걸 어디서 구했을까?』
둘은 킥킥 소리를 내어 웃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계단대 위로 놓여진 문제의 장식 인형은 춘절 날 차이나 타운을 누비며 돌아다니는 사자춤의 민속 가면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날카롭게 자란 어금니의 모양은 분명 사자다. 그런데 왜 안킬로사우르스처럼 등가죽이 뾰족거리는 거래? 아니, 그걸 떠나... 브론토사우르스처럼 목을 하릴 없이 길게 빼고 있는 건 반칙 아니야? 주제에 사자 갈기는 왜 달고 있고. 거기다 정말 안 어울리는 둥그런 양의 눈을 붙인 건 넌센스 아닐까? 뭐니뭐니해도... 몸통과 다리에 칠한 분홍 얼룩말 무늬는 진짜 심하다.

이들의 웃음 소리가 점차 커졌다. 리나는 눈물을 찔끔거리기 시작했고, 닥터는 다른 손님들의 따가운 시선에 당황해 헛기침을 터뜨렸다. 그런데도 좀처럼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었다. 제어가 안 되는데 뭐. 끝장을 보자는 식으로 그냥 웃고 봤다. 리나와 닥터 두 사람 모두 뱃가죽이 당겨지도록 깔깔 웃었다.

『아이구 배야. 어쨌거나 이곳 사장님 취향이 끝장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말이지, 리나. 네가 지금 나에게 말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니지?』
『응.』
손가락으로 흘러나온 눈물을 대충 닦아내면서 리나는 긍정했다.
『하하하. 맞아... 여기서의 포인트는「유리창」이야.』

유리창이라.
닥터는 턱받침을 하고 전면을 응시했다. 커다랗게 뻥 뚫린 대형 유리창은 이른바 뉴욕 스타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양식이다. 가게가 한 눈에 보여 그 착시 효과로 내부가 넓어 보이는데다, 호기심을 자극해 행인들을 끌어당기는데 효과적이라서 때때로 유명 디스플레이어들은 입구 프레임을 죄다 뜯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온통 유리, 그리고 알루미늄. 거기다 색색의 전구로 장식까지 하면 1년 365일이 화사한 크리스마스다.

『뉴욕식 만행 수준까진 가지 않았지만 이 가게는 다른 곳과 달리 유리창이 매우 넓군.』
『맞아. 덕분에 밖에서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지. 지금처럼 저녁 시간대면 50미터 밖에서도 누가 메뉴판 들고 돌아다니는지 확인이 가능할 걸.』
오이 피클 하나를 하나 더 입에 집어 넣으면서 리나는 장난스레 눈을 치켜 떴다.
『이쯤해서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닥터.』
『하지 마. 내 짐작엔 하나도 재미 없을 거 같으니까.』
『아냐, 들어봐. 무지 재미있을 거야.』

《모처럼 큰 맘을 먹고 외출을 해도 바퀴벌레가 떼거리로 굴러다닐 것 같은 싸구려 중국 식당에서 맛 없는 얼굴로 저녁을 먹고...》

닥터는 진정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표정만 지었던가. 손등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꾹꾹 찔렀다. 목소리는 콱 잠겨 있었다.
『그자가 여길... 알고 있단 말이야? 제로스가 그런 소릴 떠들었다고?』
『내 전화번호랑 아파트 주소까지 추적해서 알아낸 자야. 이 식당까지 따라잡은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거야. 미행이라도 했겠지.』
커다란 유리창이 있다. 그리고 실내는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고. 어두워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건 식은 죽 먹기. 저 밖은 모습을 감추고 숨어 있기 딱인 가로수와 가로등, 큼지막한 우체통 등등이 널리고 널렸다. 하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둠 속에 숨 죽이고 서서 새장 속 카나리아 감상하듯 가게 안을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젓가락을 사용해 탕수육을 힘겹게 먹고 있는 이쪽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도 가능하다. 비록 피사체의 모습은 부족한 광선 탓에 흐릿하게 나오겠지만.

『찌, 찍힌 거냐!』
『그야 모르지. 놈의 콜렉션 앨범을 누가 본 적이 있어야지.』
리나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흘리듯 가볍게 대꾸하곤 의자를 뒤로 끌었다.
『왜. 뭐, 뭐야.』
『박사님? 그럼 수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설마, 너!』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다. 어쩌면 그는 오늘도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리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 식사를 하면서 떠들고, 웃고, 인상을 찡그리는 그녀를 TV 연속극 쳐다보는 듯한 기분으로 바라보는 거다. 저 밖, 어딘가에서, 숨 죽인 채 조용히.

『하지만 난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어줄 생각은 결코 없다구.』
겉옷자락을 들추자 허리춤에 찬 권총집이 드러났다. 든든한 그녀의 아군이었다.
『난 이제부터 화장을 고치러 화장실에 다녀올 거야, 닥터.』
『맙소사. 그 화장실에 간다는 여자가 권총부터 챙기냐?』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미국을 살아가는 현대 여성의 센스이지.』

여기서 중요한 건 그녀가 잠시 잠깐만 자리를 비운다는 내용의 연막이 필요하다는 거다. 식사대를 지불하러 카운터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 그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TV 연속극은 끝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제로스는 리모컨을 집어 하품과 함께 TV의 전원을 꺼버릴 것이고 - 자리를 떠나갈 것이고, 그제야 호들갑 떨어가며 주변을 수색하는 건 너무 늦다.

『내가 곧 돌아올 것처럼 행동해줘, 닥터. 필요하다 싶으면 음식도 더 주문하고. 알았지? 대신 30분이 넘어도 내가 자리로 돌아오지 않거든 그때는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이대로 혼자 집으로 돌...』
알았다고 대답하는 대신 리나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이때 그는 화가 난 것처럼도 보였고, 다르게는 두려움에 질려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잡힌 손이 끊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그러나 리나는 차마 그의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알고 있다. 그가 하고픈 말이라는게 어떠한 것인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은 끔찍하다.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동안 어떤 기분이 될지... 못 돌아오면? 어쩌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면? 생각만 하는 것으로도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얌전히 집에 돌아가라고? 돌아가서 무작정 손톱만 씹어대라고? 그건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그러라고 말한다.

잔인하다, 이런 건.

『미안. 제르가디스.』
불리워진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는 가까스로 침착함을 되찾는 듯 싶었다.
크게 숨 쉬고 잡았던 손을 얼른 놓았다.
『나야말로 미안. 내가 좀 흥분했어.』
후우- 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답지 않다.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럽고 싶었는데. 꼴 사납게 흥분이라. 완전히 어린애처럼 뭐 하는 짓이었담.
후회하며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표정을 바꾸자.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먹은 밥 값은 누가 내는 거지?』
『얼씨구? 숙녀의 지갑을 털어 얻어먹을 심보였단 말이야? 큰일이네, 에티켓 빵점씨.』
『알았어, 알았다구. 내가 지불할게. 자! 다녀와. 그동안 난 오스카 남우 주연상에 빛나는 연기로 모두의 혼을 빼놓을테니. 넌 길이나 잃어버리지 마.』
『두말하면 잔소리.』

무대 개막!
리나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화장실은 어디? 만국 공용의 화장실 위치 안내 스티커 표지판을 확인한 뒤, 서스럼 없이 식당 가장자리 쪽으로 해서 걸었다. 식사 중인 다른 사람들은 그런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뭐가 그리 급한지 총총 걸음으로 빨간색 화살표를 따라 걷는 여자가 있다. 이럴 적에 빤히 쳐다보는 사람이 오히려 무례하다. 당연히 아무도 안 쳐다봤다.
그치만 눈썰미 좋은 사람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즉각 알아차렸을 것이다. 최종 목적지가 화장실이라면서 슬그머니 게걸음을 친다? 충분히 수상쩍지 않은가.
『콜록...』
살짝 주먹쥔 손을 입가에 가져가고 헛기침했다. 동시에 빙글 돌아 엉뚱하게도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보시오! 여긴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니오! 당장 나가요!』
커다란 냄비를 쥐고 불타는 지옥의 화덕에서 양파를 볶던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 위생적인 문제는 별도로 치고 요리사들은 프라이드가 높아 제3자의 주방 출입을 대단히 꺼리는 법이다. 당연히 이들은 반발했다. 주방 보조인 듯한 청년이 칼을 들고 뒤돌아섰다. 그 표정엔 적개심이 가득했다. 무찌르기 위해서라면 주걱이라도 기꺼이 휘두르겠다는 기세였다.
그려? 그럼 이거나 먹어라. 리나는 이런 때엔 만능 패스워드나 다름 없는 신분증을 꺼내 코 앞으로 해서 들이밀었다.

책임자인 듯한 자가 흠칫해서 칼은 든 주방 보조 청년을 만류하며 뒤로 잡아 당겼다. 남자의 시선은 리나가 꺼낸 신분증에 가서 단단히 못박혀 있었다. 땀이 나는지 시원하게 벗겨진 이마가 번들거렸다. 사내의 목소리는 매우 불안했다.
『우린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아요. 마약도, 무기밀매도, 불법 이민자 고용도 안 합니다.』
『누가 뭐랬나요. 비상구는 어디에 있죠.』
『저, 저리로 나갈 수는 있소이다만, 이 시간엔 덧문에 자물쇠를 걸어놓습니다. 요리 재료를 실은 트럭이 도착할 때만 사용하고 있는데요. 여긴 잔도둑이 들끓어서요. 물론 그런 것이 소방법에 어긋난다는 건 잘 알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가게는 영세하고...』
뒷 얘기는 채 듣지 않고 권총집의 똑닥 단추를 끌렀다.
『지나가겠습니다.』

건물 뒤편에는 트럭이 두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다만 테니스 코트장처럼 철제 펜스를 빙 둘러 뒷문에서 주차 공간까지의 직접 왕래는 불가능했다. 펜스에는 사람 출입을 위한 용도의 덧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소용 없었다. 아까 사내가 말한 그대로 자재를 실은 트럭이 도착할 때만 잠시 열어놓는 듯 싶었다. 리나는 시험삼아 자물쇠를 위 아래로 잡아당겨 보았다. 틀렸다. 묵직한 무게도 무게거니와 발로 걷어차는 정도로는 쉽게 망가질 것 같진 않았다.
뭐, 그렇다고 못 빠져나갈 것도 없다. 리나는 감자를 담아두었을 것 같은 나무 궤짝을 하나 주워다가 그걸 밟고 위로 올라갔다. 손을 위로 뻗자 펜스의 끝 부분이 닿았다. 하나, 둘, 셋. 발목에 힘을 주고 탄력을 이용해 재빨리 펜스 꼭대기로 오른쪽 다리를 걸쳤다. 자! 월담이다. 출렁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반대편으로 무사히 착지했다.

어린애 키만한 쓰레기통이 줄줄이 서있는 부분을 지나쳐 자가용이 여럿 주차된 갓길로 낮은 자세로 뛰어갔다. 부근은 어두운 편으로 멀직히 떨어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사람 얼굴을 알아보는 일은 쉽지 않을 성 싶었다. 리나는 바짝 긴장한 채 도로로 내려갔다. 솔직히 뭘 찾아야할지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본능은 외치고 있었다. 뭔가가 있다. 좌측? 아니면 우측? 허리를 낮추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쳤다.

순간 번쩍 하고 주차되어 있던 차량 중 하나가 헤드라이트의 불을 밝혔다.
『...!!』
반사적으로 총구를 들어 겨냥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잘못 찝었다. 운전석은 물론이고 조수석으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앉아 있었다. 제로스가 여자를 데리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결정적으로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나이가 많았다.
조수석의 여자가 총을 든 리나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놀란 나머지 옆에 앉은 남자를 손바닥으로 마구 때리며 난리를 쳤다. 슬프게도 남자는 꼿꼿하게 얼어 빨리 출발하라는 여자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거의 없었다. 리나는 쳇 소리를 내며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그게 신호가 되었는지 차가 도망치듯 굴러갔다.

『젠장.』
까치발을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인도로 걸어가는 사람이 둘. 귀가를 서두르는 장사꾼으로 보였다. 이들 중 하나가 무인 주차요금 기계로 다가가 짤랑 소리를 내어 동전을 넣었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끄지도 않고 하수구에 던지고는 낮동안 세워둔 차에 올라탔다.
성질 나는데 쓰레기 무단 투기로 체포해버려?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곤 다시 허리를 낮추었다.

무인 주차장에 세워진 차량의 수는 여전히 많았다. 어쩌면 야간에도 이 상태일 수도 있었다. 장기간 세워둔 차량 덕분에 시 당국에선 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것들 중 몇은 버려진 도난 차량이고, 몇은 범죄에 개입된 차량이다.
곁눈질로 차량 내부를 일일이 확인하며 걸었다. 온몸의 털이 긴장 탓에 솟구쳤다. 혹시라도 누가 앉아있는 건 아닐까 하고 주의를 기울였다.

텅!
바로 그때, 주차되어 있던 차량 중 하나가 성급히 요동치며 움직였다! 은청색의 렉서스 차량이 후진하면서 뒷면에 주차된 포드 미니밴을 후려쳤다. 와작 소리를 내며 미니밴의 앞 범퍼가 찌그러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이번엔 앞으로 돌진, 그대로 앞 차량을 찍었다.
바로 저거다! 리나는 숨을 멈추고 뛰어갔다.
『멈춰! 차에서 내려!』
내리라고 해서 내리면 그게 더 이상할게다. 렉서스 차량은 급하게 핸들을 돌려 일렬로 주차된 차량들 틈바구니를 빠져나왔다. 끼익 하고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났다. 재빨리 달아날 기세다.
『차에서 내려!』
바보 같다는 생각은 안한 건 아니다.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 뛰면서 연신 경고의 문구를 읊었다. 게 섯거라, 아니면 구멍 내버린다.
『당장 멈추지 못해?!』

문제는 저쪽이 미래의 지도자 동지인 존 코너가 아니며, 이쪽 역시 두 다리로 멋진 추적을 개시하는 T-1000 모델의 터미네이터가 아니라는 거였다. T-1000 터미네이터를 연기했던 로버트 패트릭은 단순히 뛰는 것으로도 거의 존 코너를 잡을 뻔했다. 그치만 인간에겐 그런 일은 무리다. 전력질주를 해봐야 순식간에 거리가 멀어진다. 안타까움에 발악을 해보지만 네 바퀴 달린 금속 덩어리는 매연을 내뿜으며 금방 휭하니 사라져간다.

이런 어둠 속에서 총을 쏘아봤자 맞는다는 보증도 없고.
어쩌다 행인이 대신 맞기라도 하는 날엔「재수가 없었다」라는 말로는 절대 안 끝난다.
미칠 노릇이다. 바로 코 앞으로 해서 제로스가 달아나고 있는데!
숨을 들이쉬고 권총을 눈 높이로 들어 올렸다. 에라 모르겠다. 쏘고 볼까.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에 힘을 가져갔다.

『리나!』
순간 눈에 익숙한 감청색 차량 한 대가 앞으로 끼어들었다.
『헉헉헉, 닥터...?』
『빨리 올라 타!』
역시 그는 얌전히 기다려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달리면서 - 죽을 맛이었다 - 리나는 닥터를 매섭게 쏘아봤다. 입을 열자 앙칼진 소리가 튀어 나왔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잖아!』
『네가 화장실 간다면서 나간지 정확히 30분이 되었다구.』
『그럼 집으로 갔어야지! 이 멍텅구리야!』
『멍텅구리? 어이. 이대로 잔소리 할래, 아님 나랑 같이 저 자식을 쫓아갈래.』
『제기랄! 알았다구, 알았어. 빨리 밟앗!』

그녀가 차량 문을 닫기도 전에 감청색 오토 세단이 부앙 소리를 내며 급발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