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해보니 사실상의 주인공은 제로스여야 맞는데요... 이대로는 등장하는 횟수가 기록적으로 적은 주인공이 되겠군요. 정글스가 주인공이라고 하면 자살한다...;;


사무실 안은 선지자 요나를 한 입에 먹어치운 고래의 뱃속처럼 조용했다. 그렇다고 모두가 퇴근하고 비어있다는 건 아니고... 때마침 슬라이드식 철제 서랍장을 열고 닫는 철그덩 소리가 들렸다.
리나는 겉옷을 벗어 손에 걸치고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갈색의 가죽 소파로 가 앉았다. 오래된 물건이었음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소파는 작고 아담한 체구의 그녀를 부드럽게 보듬어 껴안았다. 만족스러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금 있는 그대로도 편안했다. 하지만 리나는 다리를 꼬고 엉덩이의 무게 중심을 옆으로 살짝 옮겼다. 낡은 가죽이 얼음을 이로 물어 깨뜨릴 적에 나는 시원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청각적으로 매우 즐거웠다.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칸막이로 나뉘어진 작은 방 저편에서 이쪽의 인기척을 깨닫고 화답했다.

의사라는 직업이라는게 워낙에 불규칙한 근무 형태의 대명사이다보니 닥터는 늦은 시간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편이었다. 직원인 아멜리아 테슬라가 정시에 퇴근을 하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사무실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칼에 찔리고, 맹장이 뒤틀리고, 뼈가 부러진 응급 환자가 실려오는 것도 아닌데 뭣 하러 죽치고 있느냐고? 뭘 모르는 말씀. 벼랑에 몰린 나머지「이젠 그만 살고 싶어요!」라고 울음을 터뜨리는 환자가 대낮에만 찾아오라는 법 있나. 어쩌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유언이라도 남기고 보자는 심보로 전화를 걸어올 수도 있다. 이때 야박하게「난 지금부터 퇴근을 해야 하니까 내일 다시 하십시다」라고는 말 못한다.
정신의 문제는 때로 육체의 문제를 상회할 수 있다 - 배에 식칼이 박히는 것만 급한게 아니다. 이것이 닥터의 주장이었고, 그래서 그는 늘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24시간 유지되는 병원 응급실인양 가급적 오랫동안 사무실 문을 열어두고자 애썼다.

「젊은 사람이 일 중독중에 걸린 거 아냐?」
「그럼 어때. 집에 돌아가도 뾰족이 할 일도 없는데, 뭐. 난 재미 없는 사람이잖아.」
왜 그리 청승맞게 사느냐는 핀잔에 닥터는 변명이랍시고 그렇게 주장하곤 했다.

사생활이라곤 거의 없다시피 한 인간.
정말로 그는 무 감동의 재미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비상 전화 메모를 한 장 끄집어 들고 손톱으로 딱 하고 튕겼다. 명함에는 새벽이고 야간에고 통화 가능한 번호가 굵은 헤드라인체로 적혀 있었다.
리나는 생각했다.
최선을 다하여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겠다는 뜻은 갸륵하고 좋지만 말이다.
밤이 지루해진 마담이 명함을 보곤 음란한 내용으로 전화를 걸면 그땐 어쩌고?
맞장 뜨자는 식으로 서로 하아- 하아- 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 엇? 리나?』
오른손 하나를 들고 여어- 하는 그녀를 향해 반색하며 좋아했다. 보는 사람이 절로 기분 좋아지는 환한 미소였다. 평소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그가 이런 식으로 환하게 웃는 건 결코 흔치 않다. 비서인 아멜리아 테슬라가 이런 그를 봤다면 다음과 같이 딱 한 마디 했을 거다.
거짓말.

『미리 연락을 하고 오지 그랬냐. 내가 자리에 없었으면 어쩌려고.』
리나는 손가락으로 자기 이마를 가리켰다.
『뭐 하러? 텔레파시가 통하잖아. 퇴근 아직 안 하고 있을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그렇습니까. 훌륭하십니다.』
저것은 진심으로 감탄하여 내뱉는 말이 아니다. 닥터는 리나가 자신을「바퀴당당」이라 놀리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고, 예의 텔레파시 운운한 것 역시「네가 이 시간에 어딜 간다는 거냐. 사무실에 매일 엉덩이 깔고 있는 주제에」라는 뉘앙스로 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닥터는 심호흡 한 번 하고 허리로 손을 얹었다. 열 받는 건 저 놀리는 말에 무어라 반박을 할 수 없다는 거다. 실제로 그는 백과사전에 기재될 훌륭한 바퀴당당이었고, 저녁 6시 반이 좀 넘은 이 시간대엔 퇴근하는 일이 결코 없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ET...』
리나가 자기 이마를 눌러댔던 손가락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일순간 닥터의 한쪽 눈썹이 당혹감을 담아 활처럼 휘었다. 지금 뭐라고?
『이봐, 리나 인버스. 그러기엔 우리 나이가...』
『ET 안할 거야?』
졌다. 닥터는 - 지렁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 ET의 빛나는 손가락에 닿았던 소년 엘리엇을 흉내내며 검지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어 그녀와 도장을 찍었다.
『ET. (젠장)』
이것이 악수를 대신하는 미래지향적 스필버그식 인사법으로, 외계인과 지구인 사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FBI와 정신과 의사 사이에서도 훌륭히 통용되고 있다. 지난 8년 간 훌륭히 써먹었으니 앞으로 8년간도 괜찮을 거다. 다른 인사법이 개발된다면 그때는 고려를 좀 해보고... 어쨌든 무척이나 먼 과거, 그러니까 천지창조 시절에 하느님과 아담도 이 인사법을 써먹었으니 큰 문제는 없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을 하고 싶은 사람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참조하도록. 혹자는 이걸 보고 스필버그가 하느님과 아담의 인사법을 표절했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녹차 마시겠어? 리나.』
쑥스러움에 손바닥을 바지춤에 쓱쓱 문지르면서 그렇게 질문했다.
『그 녹차라는 것이 맛은 쓰고, 외계인 코딱지 빛깔이 나는 거 맞지? 그럼 난 싫다.』
『입맛 하고는... 알았어. 녹색의 구정물 말고 오렌지 빛깔의 구정물을 가져다 주지.』
『홍차? 좋지. 우유는 넣지 마.』
『접수.』

심리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차를 대접하는 취미는 없다. 그치만 리나는 특별하다.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는 손수 차를 준비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동안 리나는 다리를 쭉 뻗고는 직업상 몸에 벤 습관화된 동작 - 사물 관찰을 시작했다.

제법 오랜만에 들렸음에도 그의 사무실은 그리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벽에 걸린 협회 등록증 액자의 모서리가 살짝 깨졌다. 먼지를 털다 떨어뜨렸나. 리나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굴러갔다. 글쎄올시다. 이렇다 할, 눈에 띄는 변화라면... 옳커니. 버찌 문양이 프린트된 커튼을 새로 빨아 걸었다.
다른 사무실에서 금속성 재질의 블라인드를 설치하는 것과는 달리 이곳 심리 상담실에서는 면 재질의 주름 커튼을 일반 가정집처럼 해서 걸고 있었다. 그러는 편이 불안한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닥터의 의견이었다.
확실히... 미풍에 살짝 흔들리는 커튼을 보고 리나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절반 정도 드리워진 버찌 무늬 커튼은 고향 집의 엄마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재봉틀로 손수 커튼을 만들어서, 계절이 바뀔 적마다 그걸 세탁하고, 하나하나 다림질, 고리를 꿰서는 창문에 건다. 그것은 무척이나 청결한 느낌이었고, 궁극적으로 사람이 언젠가는 돌아가 최후의 안식을 얻을 장소라는 가슴 뭉클한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안식처.
리나는 가볍게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닥터가 다른 사람들처럼「어머니, 아버지, 남동생과 누나」와의 평범한 가정 생활을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이미지 완성은 실로 놀라운「사기극」이기도 했다.

아니, 잠깐만. 리나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어쩌면 이건 놀라운 사기극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리얼(진짜)일 수도 있다.
이것은 버찌 문양 프린트가 닥터의 취향이 아니라서 하는 얘기다. 닥터는 네모 반듯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모던 양식의 추종자였다. 입고 있는 옷들은 - 속옷까지 포함하여 죄다 모노톤이었고, 소지한 손수건이나 넥타이에 무늬가 들어간 걸 본 기억이 없다. 그런 남자가 여자들이 선호하는 과일 무늬 커튼을 골라 자기 사무실에 척- 하고 달았다고라? 연결이 안 된다.
반면 그의 비서인 아멜리아 테슬라씨는 꽃무늬를 좋아하는, 대단히 소녀 취향적인 사람이었다. 작은 키에 통통한 몸집, 뺨은 복숭아 빛깔이고, 약간의 주근깨가 있다. 프릴이 달린 분홍 빛깔의 원피스를 즐겨 입었으며, 검은 빛깔의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컬을 주어 어깨에 살짝 닿게끔 손질했다.
리나는 꾸밈 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까르르 웃는 그녀를 기억해냈다.

「맞아. 저것들은 모두 여자의 손길이야.」
그래서 리얼.
폭신한 쿠션과 유리컵에 꽃혀져 창가에 놓여진 작은 들국화가 사랑스럽다. 어린애들을 위한 걸까, 아님 동심으로 돌아가고픈 어른들을 위한 걸까. 손때 묻은 테디베어가 목에 리본을 매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안아주고 뽀뽀를 해주면 참 좋을 것 같다. 장식장 한켠에 세워진 강아지 모양 액자는 분명 그녀의 소지품이다. 이것들 모두는 벽에 걸린 칸딘스키의 발랄한 느낌의 추상화 모조품과 한 세트를 이루어「세상은 정말 아름다워」를 합창했다.
좋은 가정에서 자랐을 거다. 그녀가 내뿜는 에너지는 건강하고 밝았다.
리나는 사무실 커튼을 직접 세탁하여 손질하는 아멜리아 테슬라를 상상했다.
그녀는 닥터가 그토록이나 그리워한 이상적인 어머니 상에 매우 가까웠다.

성큼 걸음으로 찻잔을 들고 오는 닥터를 올려다보던 리나의 표정은 그래서 의미심장했다.
『왜?』
닥터는 까닭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눈치다만.
『아니, 별 거 아니야.』
기왕이면 그 테슬라씨가 닥터의 일상 생활까지 잘 보듬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혹시라도 모를, 언젠가의 웨딩마치를 꿈꿔본다. 리나는 손깍지를 끼고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별 거 아냐. 그저 쟁반을 들고 있는 네 모습이 엄청 어울린다 싶어서.』
준비된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닥터는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그거... 칭찬 맞지?』
『하모! 기왕이면 요리 실력도 구색을 맞춰주었음 참 좋았을 것을... 티백이냐.』
『난 내 주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찻잎을 직접 우려내는 바보 짓은 안 해.』
『쳇. 이럴 줄 알았다면 아멜리아 테슬라씨가 퇴근하기 전에 오는 건데. 그럼 근사하게 우려낸 레이디 그레이를 한 잔 멋지게 얻어 마실 수 있었을 거야. 이렇게 팔팔 끓는 물에 티백을 무식하게 풍덩 담가서 주는 오렌지빛 구정물 말고 말이지.』
『불...만이냐.』
『당연히 불만이지! 섬세함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남자 같으니라구. 카아~ 정말이지 백만불 미스테리라니까. 어떻게 이런 무덤덤한 남자가 실력 좋은 정신과 의사가 되어 돈을 갈퀴로 긁어대고 있는 거지?』

미안하다. 무덤덤해서.
닥터는 욱 하는 표정이 되어 티백으로 우려낸 자기 몫의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맛만 좋구먼! 티백이 뭐가 어때서.

리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울컥할 적에 뺨에 바람을 집어넣는 버릇까지도 여전하니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과 비교하여 달라진 거라면 입가에 희미한 잔영을 남기는 얇은 세로 주름 정도일 거다.
『어이, 닥터? 얼굴 풀어, 얼굴. 사실 너의 그 무덤덤함이 단점이 아닌 대단히 훌륭한 장점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니까.』

직장에서 어이 없는 이유로 쫓겨난 남자들, 배우자가 바람을 피워대는 걸 늦게서야 깨달은 아내들, 성폭행을 당한 소녀들,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고 피멍이 든 어린 아이들... 이곳은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인간들이 최후로 찾아오는 피난처다. 
이때 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건 어줍잖은 동정심이 아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당신은 참 가엾군요」라고 말하는 건 오히려 환부에 소금을 뿌리다 못해 문지르는 짓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객관적인 관찰과 분석, 그리고 자기 극복을 위한 냉정한 조언이다.

닥터의 성격은 이럴 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환자들은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사연을 들어주는 그에게서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그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는다. 찢어진 상처 속으로 하얀 뼈가 보여도 무덤덤하게 관찰을 시작한다. 그리고 차분한 얼굴로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안전하게 꿰맬 궁리를 한다.
『넌 좋은 의사야.』
그들의 아픈 기억은 곪은 상처의 딱지처럼 서서히 피부에서 떨어져 나간다. 비록 흉터는 남을지언정. 환부에서 피와 고름이 흐르는 일은 더 이상 없다.
『모두로부터 존경 받는 훌륭한 의사.』
이것이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럴까, 난 네 생각처럼 그리 괜찮은 인간이 아니라서 말이지.』
후룩- 하고 그는 자신의 몫의 차를 마셨다. 눈은 아래로 내리깔은 상태였다.
그녀는「넌 좋은 의미로 냉정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닥터는 무심결에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는 리나를 곁눈질로 훔쳐봤다.

저 배에.
한때나마 작은 생명이 깃들어서...

가우리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리나는 임신 6주째였다.
본인도 임신 여부를 몰랐던 것 같다. 아마 힘든 일정 탓에 월경이 불규칙하거니 하고 대충 넘어갔던 모양이었다.

쇼크가 심해 태아는 유산되었다.
의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혈의 의미를 그제서야 깨달은 리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 울지도 못했다.

「병원 옥상에서 세 시간 동안 가만히 서있는 걸 겨우 찾아냈소.」
담당 의사는 이것이 업무 비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닥터에게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저어... 잠깐만. 나는 가족이 아니오만.」
「알아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길 할 수 있는 거지. 잘 들어요, 박사님. 그녀는 이 일에 대해 누구에게 입을 열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이번 일을 혼자서 삭히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잘 돌봐주어야 할 거요. 솔직히 그녀가 거기서「점프」하지 않은게 기적이오. 무슨 맘으로 세 시간이나 갈등하며 거기서 버텼는지 나로선 감히 짐작도 안 가니까... 댁이 시카고에서 LA까지 단숨에 날아와준 걸 보고 환자와의 사이를 멋대로 짐작해 보았소. 내 짐작이 틀린 거라면 대단히 미안하고... 부담스럽다고 생각한다면 잊어버리시오. 그치만 인간적으로 간곡히 부탁하지 않을 수가 없구려. 그녀가 또 이상한 맘 먹는 일 없도록 누군가는 주의를 기울여야 해요.」

그날 밤, 그는 야구 배트를 하나 구입해서 호텔 주차장에 세워놓은 렌터카 - 임시 클레어 2세를 철저히 때려부셨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때려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신 자가용을 부셨다. 허탈감과 분노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신을 저주했다. 사람을 원망했다. 차 지붕을 내리쳤고, 그 다음엔 앞 유리창, 다음엔 본네트...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할 지경으로 지쳐 마침내 자리에 주저앉았을 적에 모두로부터 공포의 대상이 되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창백한 얼굴로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야구 배트를 바닥에 내려놓고 꼼짝 마!」
「차라리 쏴. 그냥 쏘라구.」
그는 창피하다는 것도 잊고 목 놓아 울었다.

그런 그가 냉정하다고? 닥터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설마.

『닥터?』
리나가 흠칫하고 아랫배에서 손을 치웠다.
닥터는 숨 한 번 고르고 이렇게 말했다.
『너.. 똥배 나왔다.』
『이잇! 여, 여자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하하하, 하고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어쨌든 이 얘기는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자물쇠를 채워두었다가 기꺼이 무덤으로 가지고 들어갈 생각이다. 그 무덤을 다시 파헤치라는 법원 명령서가 코앞에서 흔들거려도 맹세코 그 자락에 삽 날이 꽂힐 일은 영원히 없다.
닥터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표정을 바꿨다.

『얼굴색이 나빠, 리나. 피곤한 것 같아 보여.』
『그야... 요즘 제법 바빴으니까. 뉴스 봤지?』
오렌지 빛깔의 구정물이라고 욕은 했지만 그녀 또한 맛있게 차를 마셨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나.』
『아아. 밥은 그렇저럭 챙겨서 먹고는 있는데 대신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있어, 닥터. 아무래도... 스스로 과신했던 것 만큼 철사줄의 신경은 아니었던 것 같아. 눈을 감아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더군.』
딸각 하고 쥐었던 찻잔을 차받침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가까스로 잠이 들어도 곧 깨어버려. 뭔가에 흠칫하고 놀라서 말이야.』
『긴장해서 그런 모양이군.』
『내 생각에도 그래.』

그러다 리나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불현듯 생각났다는 투로 질문했다.
『저기 말이야.「그립다」라는 걸 넌 어떻게 생각해?』
『그거야 좋았던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회귀 욕망 아닐까.』
거기까지 대답한 뒤, 닥터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휴대용 녹음기를 꺼내 셋팅했다. 원칙적으로 환자와 상담을 시작할 적엔 늘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상대가 친구라고 해도 예외는 두지 않았다. 케비넷 속에 들어가 있는「리나 인버스」라는 카테고리 속으로는 상자 하나 분량으로 소형 테이프가 하나 가득 보관되어 있었다. 물론 직업 윤리상 이 테이프는 외부로의 공개가 절대 불가다.

버튼을 누르고 닥터가 질문했다.
『너, 옛날이 그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
『아, 잠깐만.』
리나는 서둘러 부정하며 손을 흔들어댔다.
『나는 현실주의자야, 닥터. 과거는 어떻게 해도 불변이고...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을 해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차라리 타임머신을 만드는데 골머리를 앓는게 유익이지. 난 에너지 낭비는 난 싫어. 여기서 그립다고 말한 건 내가 아니고...「녀석」이야. 자기 입으로 그러더라고.』
그녀가 말하는 녀석이 제로스라는 걸 깨달았다. 닥터는 서둘러 빨간색 점으로 표시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것은 그녀 자신의 대한 것이 아닌 업무에 대한 이야기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닥터의 푸른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졌다.
『확인부터 하자, 리나. 지금부터의 이야긴 오프 더 레코드?』
『에이- 상관 없어. 어차피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길 신난다 하고 떠벌리고 다닐 너도 아니고... 영장을 가지고 와서 내가 여기서 뭔 이야길 지껄었느냐며 묻는 괴짜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걱정 관두시고 녹음을 계속하세요, 선생님.』
말 그대로다. 리나는 그레이워즈를 대신해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어디까지 했더라... 맞아. 그립다 라는 거. 저기, 미안한데 담배 피워도 괜찮아?』
닥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건강을 위해서 금연 좀 해라. 뭐, 그치만 말리진 않으마. 그러는게 좋을 거 같으면 피워. 긴장을 풀면서 몸에다 오만가지 고약한 화학 성분을 집어 넣어. 내 사정은 신경쓸 것 없어. 간접 흡연으로 내가 폐암에 걸리면 넌 나에게 거금의 손해 배상만 하라구. 한 20만 달러 정도로 싸게 합의 해줄게.』
『하이고~ 금액이 엄청 저렴하군요. 무척이나 친절하십니다?』
『그걸 지금 깨달았나.』
『흥.』
코웃음과 함께 리나는 소파 등받이로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쿠션 하나를 들어 옆구리에 꿰찼다. 가방에서 꺼낸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그녀는 한쪽 발의 구두를 벗어 옆으로 슬쩍 치워두었다. 발 냄새 난다고 타박을 하면 즉각 미사일 구두를 날려주마. 후우- 하고 희뿌연 연기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럼 계속해보자.

『솔직히 처음엔 납득이 가지 않았지.』
『음?』
『제로스의 행동 말이야.』
이쪽은 수사관이고 그쪽은 범인이다. 범인은 죽어라 도망을 쳐야 하고, 수사관은 권총 들고 그 뒤를 따라가야 모양이 맞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거꾸로다. LA에서 시카고까지 수사관 뒤를 따라와 살인을 저지른다? 입장의 반전이다. 이젠 그녀가 도망치고 있고, 녀석이 그 뒤를 따라 오고 있다.

어서 와서 나를 잡아.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이러니 시카고 경찰관들이 등 뒤에서 입방아를 찧어대는 건 당연하다. 쥐가 고양이 코를 베어먹겠다고 하는데 신기해 하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다.

닥터가 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다.
『TV 뉴스는 이야기가 좀 다르던데. 녀석이 시카고로 무대를 옮겨서 LA쪽의 수사관이 급히 이곳으로 급파되어 달려왔다고...』
『언론 플레이는 모양상 그렇게 하고 있는 거고. 원래는 순서가 거꾸로야.』
닥터가 입을 쩍 벌렸다.
『환장하겠군.』
누가 뭐래? 그녀는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좋다 이거야. 기왕 버린 몸, 범인에게 추격당하는 바보 수사관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그런데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다.
쥐에게 쫓기는 고양이가 되었음을 인정하자 이번엔 소름끼치는 진실이 그녀의 코 앞으로 해서 떨어졌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인데... 녀석이 말한 그립다 라는 감정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었어. 정말로 한참을 생각했지. 그러자 의문이 생기는 거야. 도대체 녀석은 뭐가 그립다는 거지?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기를 쓰던 수사관이 왜 그리워지는 거지?』
리나는 심야 직통 전화번호가 적힌 닥터의 명함을 들어 척 하고 눈앞으로 들어보였다.
『매일같이 트럭 분량으로 범죄 분석 보고서가 쏟아져 들어와. FBI 소속의 행동 과학 연구소에서는 각 사건들의 연관성을 추적하는 것으로 이것이 동일범의 소행인지 아닌지를 가려내지. 누군가가「유레카!」라고 외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아직 체포되지 않은 연쇄 살인범에게 고유의 넘버와 별칭을 부여해. 제로스도 그 중의 하나야. 우리의 밥인 거지.』
리나는 다시 명함을 뒤집었다.
『현장의 모습, 희생자를 고르는 취향, 살인의 스타일... 녀석이 범죄를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축적된 데이터는 늘어. 그걸 토대로 이쪽은 녀석의 모습을 더욱 자세하게 추정하게 되지. 희생된 여자는 모두 백인의 여성이야. 그렇다는 건 범인도 백인일 가능성이 월등히 높아지지. 여기서 희생자가 살던 장소는 모두 제각각. 이는 범인이 특정한 거주 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해. 그렇지만 노숙자 같은 차림새의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희생자 사진을 찍고 돌아다녔다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들어. 다시 말해 범인은 직업이 일정하지 않음에도 이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의 생활력이 있다는 얘기가 돼. 자연스럽게 희생자에게 접근하는 걸 봐선 남성적 매력이 풍부한 사람이지. 교육 수준이 높을 거라는 추측도 그래서 할 수 있어. 게다가 경찰을 따돌리는 실력으로 보아 깡통인 자는 절대 아니야. 이런 식으로... 제로스의 모습을 퍼즐 맞추듯 완성해 나갈 수 있어. 자! 그렇다면 말이야.』
명함을 도로 뒤집어 글자가 적혀진 면이 앞으로 보이게끔 놓았다.
『이젠 이걸 뒤집어서 다시 보자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손바닥 들여다보듯 그를 훤히 꿰뚫고 있는 내가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런!』
이제야 알겠다며 닥터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쪽에서 제로스를 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로스는 자신을 알아주는 리나를 서서히 인식하게 된다.
리나는 그가 뭘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다며 닥터의 명함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댔다.
『쌍방 커뮤니케이션. 이른바 물결 효과.』
주먹을 쥐고 사람을 때리면 맞는 사람은 당연히 아프다. 하지만 때린 사람의 주먹에도 상처는 생기게 되어 있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생긴다. 개체와 개체가 접촉하면 그 파장은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향은 공평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게끔 되어있다.
『심리학 전공자인 주제에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지.』

자!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닥터. 서랍 속에 뭘 숨겼는지 눈빛만 보고도 알아맞추는 거야. 어제 저녁에 뭘 먹었는지를 족집게처럼 찝어낸다고 생각을 해봐.』
『엄청난 혐오감을 느끼거나, 대단한 호의를 갖게 되거나. 둘 중 하나지.』
제로스는 후자 쪽이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이해자.

『열렬한 팬을 확보한 셈이랄까, 내가 있음으로 해서 그의 행위는 한층 더 완벽에 가까워지는 거였어.』
그래서 그립다.
『내가 도중에 없어졌다는 걸 그는 용납하지 않아.』
하여 시카고까지 따라와 다시 살인한다.
『범죄자들이 수사관들을 피해 다닌다고? 그거야 알 수 없지.』
범인도 분석을 하거나, 적어도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수사관을 추적한다.
『내가 그를 아는 것처럼.』
그도 나를 알려고 한다.

그리워서, 그리워서... 미칠 것만 같은 당신.

리나는 눈을 감고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잠시 그녀는 말을 잊었다. 생각에 지나치게 빠져들면 나오는 그녀만의 독특한 버릇으로, 멍한 표정으로 주변 사물을 망각하기에 이른다. 담뱃재가 제 무게에 못이겨 무릎으로 떨어져도 그걸 모른다. 이미 다 마신 차를 다시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입으로 흘러 들어오는 액체가 없는데도 입술을 조물거리기까지 한다. 이럴 때의 그녀는 육체의 고통마저 인식을 잘 못한다. 의자 건너편에 사람이 앉아있다는 것 정도는 그래서 가뿐하게 잊어버린다.
닥터는 조용히 녹음기의 버튼을 일시 정지시켰다.
어쩌면 3분, 길게는 40분 정도.
숨 쉬는 소리만 녹음하는 건 바보 같지 않겠는가.

『그래서 말인데, 닥터.』
정확히 20분만에 리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음?』
덩달아 반쯤 졸고 있었던 닥터가 흠칫해서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뭔대.』
『오늘 저녁, 나에게 잠시만 시간을 빌려주지 않겠어?』
『에엑?』
『데이트 하자.』

영문이나 좀 압시다?
철렁- 하고 닥터의 심장이 몸통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굴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