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곰 제이슨이 앞발을 들고 일어서 당장에라도 나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다.
낮게 떠는 위협적인 목 울림, 그리고 살갗을 찢고도 남을 훌륭한 손톱.
부르무는 생각했다. 이럴 적에 서바이벌 교관이 추천하는, 지상 최대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행동 지침은...
1번, 나무 위로 올라간다. 2번, 재빨리 드러누워 죽은 척 한다.

정글스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누구야, 그 형편 없는 서바이벌 교관은. 그런 방법을 써도 곰은 옳타꾸나 잡아 먹을 걸.
턱을 괴고 앉아 부르무의 소소한 망상 극장에 작은 돌을 던졌다.
『그리고 살인곰이 아니라 상어떼야, 파트너.』
『음? 지금 뭐라고?』
『상어! 곰이 아니라.』
눈 뜨고 졸고 있는게 분명한 부르무는 정확히 1분 2초만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맞어. 그랬지.』
그제야 아, 소리를 내며 손바닥 위로 주먹을 내리쳤다.

그렇다면 다시 정리해 보도록 하자.
저 바다 위로 식인 상어떼가 출현, 날카로운 이빨 가득한 커다란 아구를 벌려 당장에라도 나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다. 자연 다큐멘터리 비디오에 곧잘 나오는 바다의 킬러 백상어다.
이럴 적에 올바른 행동 지침이라는 것은...
1번, 육지를 향해 죽어라 헤엄친다. 2번, 더욱 빨리 헤엄친다. 3번, 더더욱 빨리 헤엄친다.

『크아앗- 헤엄치는 것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거냐?』
머리를 쥐어잡는 정글스를 향해 부르무는 어딘지 모르게 맥이 풀린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은 실수로 접시를 깬 아이를 나무라는 어머니를 닮아 있기도 했다.
『상어는 위대한 자연의 포식자라네, 정글스. 위 아래로 쩍 벌어지는 그 턱뼈의 힘은 1톤이 넘어서 웬만한 뼈는 가루를 내고 심지어 철판에도 구멍을 낼 수 있지. 3,000개가 넘는 삼각형의 톱니 모양 이빨로 한 번 물어서 좌우로 툭툭 흔들기만 하면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국보급 장딴지도 중국산 싸구려 장난감처럼 몸에서 뚝- 떨어져 나간다 이걸세. 거기다 체력도 좋아 몇 주일을 굶어도 안 죽지.』
『몇 주일을 굶어도?』
『녀석의 간은 엄청난 에너지 저장 탱크로리야. 태워도 태워도 끝이 없어. 몇 주일 굶는 건 아무 것도 아니지. 놈들은 내부 에너지원을 훨훨 불사르며 깊은 바다속을 언제까지고 유유히 헤엄칠 수 있다네.』

그러니까 상어.
후속 뉴스가 없어도 계속해서 같은 주제로 씹어댄다. 몇 주일은 가뿐하다. 결코 굶어 죽는 일 없다. 환장하게스리 대신 배고픔에 질려 흉폭해지기만 한다. 고래든, 바위든 뭐든 먹어치울 기세로 쭉쭉 헤엄치며 자신의 풍성한 탐욕스러움과 식욕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부르무가 리모컨 버튼을 눌러 TV를 켰다. 그러자 가슴 선이 살짝 드러난 선정적 느낌의 빨간 옷을 입은 여성 뉴스 리포터가 화면 가득히 나타나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지금 시카고 시민들은 누구랄 것 없이 저와 마찬가지로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오, 베이 베- 정글스는 눈을 뒤집었다. 공포에 떤다는 여자가 어떻게 신나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사이즈가 D컵일 것이 분명한 가슴을 흔들어댈 수 있는 건가.
《독신의 젊은 여성만을 골라 연쇄 살인하는 살인범이 나타나 시 당국은 바짝 긴장하는 눈치입니다. 시카고 경찰은 예의 공개적으로 신원 파악에 협조를 요청했던 마르티나 조아멜 양이 연쇄 살인범에게 희생당했다고 5월 2일, 공식 발표했습니다.》

순간 리포터로부터 카메라가 옆으로 이동, 위산과다로 한창 고생하는 듯한 밥 테일러 시카고 경찰국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떠밀려 본청 계단을 걸어나가면서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속임수가 얕아 그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렸다. 정치적 수완이 부족하다는 평을 그래서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자신의 진심을 잘 감추지 못하는 편이었다. 거짓말을 잘 못해 불이익을 받는 사람... 현장 근무자들은 그런 그를 밥이라는 이름 대신 바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매우 좋아했지만 말이다.

상어떼가 달려들어 너도 나도 후레쉬를 터뜨려댔다. 눈이 부신지 경찰국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로 그때 보좌관임이 분명한 감색 양복의 여러 명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이빨을 드러내는 기자들을 멀리 밀쳐냈다. 그러나 배고픈 상어들은 그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더, 더!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상어들은 어떻게든 씹어 삼키려 들었다.

나 좀 살려주라.
경찰국장이 짧은 탄식을 토해냈다.

《지금은 말씀드릴게 없소. 어쨌거나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듣자하니 이 연쇄 살인범이 LA에서 왔다던데요. 사실입니까?》
《노 코멘트.》
《시카고에서의 범행이 이것으로 두 번째라는 것은요?》
《노 코멘트... 자, 이제 그만 지나갑시다. 기자 양반.》
《잠깐만요, 밥 테일러 국장님! 공포에 떨고 있는 저 같은 시민을 향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곤란해졌다. 정글스는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이것으로 저 빨강 가슴 괴물 리포터가 일종의 금지어나 마찬가지인「기피 단어 = 공포」라는 말을 언급한 것이 두 번째다.

- 저런, 저런. 어디다 불 지르려고 단단히 작정한게지.

50대 초반이면서도 대학을 갗 졸업한 청년 같은 청량감 넘치는 외모를 가진 경찰국장이 이를 가는게 고스란히 보였다. 뺨에 경련 이는 것 봐라. 휘발유 같은 사내가 머리 위로 성냥불 닿았음에도 화를 참느라 고생 좀 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정글스의 염려대로 국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미스...》
《프라우니. 채널 31의 프라우니 로터입니다.》
《프라우니 양. 만약 범인이 당신을 지목하여 사진을 보낸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보호할 거요. 약속합니다. 그러니 제발 무서워하지 마시오.》

그런데 워째 그 말이 보호해 줄테니 안심하라는 뉘앙스가 아니라「너 같은 재수 없는 여자는 살인 예고나 얼른 받아버려라」로 들리는 건 순전히 귀가 이상해서인 것? 정글스는 휘유~ 하고 휘파람을 길게 뽑았다. 하여간에 저 한 가닥 하는 성질은 알아주어야 했다.

리포터도 기가 막혔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입을 쩍 벌리는 것과 동시였다. 국장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돌아와 산뜻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자신에게로 쏟아지고 있는 마이크에 대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꼭 녀석을 체포할 겁니다.》
이어 카메라는 아수라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경찰국장의 뒷통수를 클로즈업 했다.

그려, 어서 체포해야지. 지당하신 말씀.

짧은 치마에 부츠를 신은 젊은 멋쟁이 여성을 카메라로 찍은 여행객이 살인범으로 오인당해 시민들로부터 공격당했다. 여행자는 윗도리가 갈가리 찢긴 상태로 무려 500미터나 달아났다. 경찰은 현장에서 주동자 셋을 붙잡았다.
「우린 그 뭐시다냐, 여자를 노리는 살인마인줄만 알았어요... 저어, 단순한 여행객이라는 건 생각 못했어요.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네요. 그 사람, 괜찮답니까?」
「턱뼈가 나가고 갈비뼈에 금이 갔다고 들었소. 전치 10주랍니다.」
「아이쿠! 이걸 어쩌나.」
「어쩌긴, 선생. 당분간 철창 신세를 좀 지셔야지.」
정글스가 알기만 이와 비슷한 사례가 다섯 번 정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것보다 더 곤란한 일은 따로 있었다.
방송이나 신문으로 사건의 내용을 접한 사람들 중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장난으로 집에 있는 사진을 보내오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할 짓이 없길래... 정글스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어떤 남자는 자신의 대학 시절 애인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에 찍힌 날짜가 무려 8년 전의 것이여서 허탈하다 못해 분노가 치솟을 지경이었다. 어떤 사람은 서른 여섯장짜리 필름을 몽땅 뽑아서 택배로 부쳤다. 그것도 찍은 대상이 각기 제각각인 채로 말이다.
한숨이 튀어나왔다. 왜 이렇게 세상엔 미친 놈들이 차고 넘치는 것인지?
아직까지 언론에「사진은 셋」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가지 않은 탓에 달랑 한 장만 보낸 이들이 가장 많았다. 흑백에 칼라에... 여권에서 방금 뜯어낸 것이 분명한 사진에... 정글스는 온갖 사진이 잔뜩 들어간 상자 속을 로또 복권 추첨하듯 뒤적거렸다.
범인의 취향이 독신 여성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젊은 남자 사진을 보낸 이상한 작자들도 나왔다. 코웃음이 나왔다. 뭐냐, 그렇다는 건 범인은 게이라는 거냐? 아님 앞으로는 게이가 되라는 거냐.
뭐니뭐니해도 이중에서 가장 독보적이었던 건 파란 봉투에 넣어져 보내진, 치마를 입은 푸들 강아지 사진이었다.

『이 개가 앞으로 나흘 뒤에 죽임을 당할 거란다. 어쩌지? 파트너.』
개 사진을 흔들면서 정글스는 몸을 연탄불 위의 오징어처럼 비틀어댔다.
『브리짓드 바르도에게 연락해보지. 그럼 구해주자고 할 지도 몰라.』
『뭐야, 그 발언은. 시카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위기에 처한 개」를 찾자고?』
『사람 찾는 것보단 쉬울 수 있어. 황공하옵게도「애완동물 등록법」이라는게 있지. 해당 동물 마지막 구매자의 주소, 전화번호 정보는 데이터화 되어 있다네. 게다가 모든 개들은 때마다 예방 접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동물 병원에 기록이 남아. 어디 그뿐인가? 사진 속의 이 푸들은 매우 특별해 보이는 목걸이를 하고 있군. 보여? 이니셜이 있어. P. K라고 말일세. 아주 훌륭한 단서야. 이걸 들고 수의사들에 보이면 아무개씨네 애완견 똘똘인데요~ 하고 금방 가르쳐줄 걸?』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부르무의 장황한 설명에 정글스는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와우. 당장 해보고 싶어지는데.』
개만 찾아내면 그 다음에는「따끔한 맛」이라는게 있다. 맹세코 눈물 쏙 빠지게 만들테다. 이걸 보낸 작자의 집에 쳐들어가 경찰 뱃지를 들이미는 것이다. 그리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당당히 외친다.
살인, 아니. 살견(殺犬) 모의를 한 혐의로 당신을 체포할 거요.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도 있소. 그치만 그 전에 나에게 엉덩이 좀 맞아야겠소.
상상만 해도 신난다! 정글스는 얼씨구나 해서는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볐다. 캘리포니아에서 살았던 대니얼 윌리엄스는 개를 벌목용 칼로 죽이고 4년형의 옥살이를 선고받기도 했다. 사진을 보내온 이는 실제로 대니얼 윌리엄스처럼 개를 죽인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공공연히 죽이겠다고 떠들어댄 걸 배심원들이 어떻게 판단할지 그것이 매우 궁금하다.

부르무는 까칠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제발 그건 참아줘.』
그런 시시껄렁한 일에 에너지를 낭비했다간 금방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다구.』

여러 장난임이 분명한 사진과 달리 그들은 긴장시키게 만든 것들도 몇 나왔다. 이를테면 지금 부르무가 시큰둥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3컷의 여자 사진과 같은 거 말이다.
『라라 오코너. 27세의 회사원.』
그럴 듯 했다. 정말 그럴 듯 했다! 제3의 범행 대상이라면서 얼마나 긴장했던가! 대형 건물 휴게실인 듯한 장소에서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낯선 그녀의 모습을 보고 부르무는 전율감에 몸을 떨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쓸어 넘기는 그녀, 수상한 인기척을 느끼곤 불안한 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그녀, 별 일 아니었다는 식으로 다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 시간이 촉박했다. 정말로 제로스가 보내온 사진이 맞다면 범행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21시간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문제의 사진에서 지문이 나왔다. 더욱이 그놈의 지문이 너무나 선명해서 한동안 이게 뭐냐 어리둥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제로스의 지능이 원숭이 수준으로 내려간 것도 아닐 터이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AFIS(자동 지문 인식 시스템)를 돌려봤다. 컴퓨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안경을 쓴, 덥수룩한 더벅머리의 한 사내를 토해냈다. 그 결과를 보고 부르무는 기운이 쭉 빠졌다.

쓸모 없어진 카드 패나 마찬가지가 된 사진을 바닥에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이 남자, 3년 전에 여자를 폭행한 죄로 체포된 적이 있었어. 이 사진 속의 여자 라라 오코너도 말다툼 끝에 몇 번 얻어맞았던 것 같아. 이가 부러지고 광대뼈가 주저 앉았지. 최근엔 법원에다 접근 금지 명령 신청을 내놓고 있었어.』
『그래서 앙심을 품었구먼.』
『응. 제로스가 아니었네. 단순한 악의적 장난이었어.』
『썩을. 고자나 되어버려라.』

그들은 투덜대며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그들 못지 않게 바짝 약이 오른 것처럼 보이는 프라우니 로터가 꼬리에 불 붙은 강아지처럼 왔다갔다 했다. 마침 카메라 맨이 지라스 레던폭스 요원과 리나 인버스 요원이 스치듯이 해서 지나가는걸 잡았다. 빨간 상어 프라우니는 다시 마이크를 고쳐잡았고 열심히 돌격했다.
《레던폭스씨. 그리고 인버스씨.》
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미소는 밀납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레던폭스 요원은 LA에서 연쇄 살인범 제로스 사건을 담당하고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보가 빠르다. 이러니까 ABC 방송에서 거금을 들여 첩보 위성 하나를 우주에 쏘아 올렸다는 루머가 나도는 거다. 우주에서도 마이클 잭슨네 집을 찍을 수가 있는 최첨단 위성이라지? 어쩌면 대통령 저격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정글스는 혀를 내둘렀다.
《레던폭스 요원이 왜 시카고에까지 오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소문으로는 이곳 시카고에 나타난 연쇄 살인범이 2년 전에 LA를 주름잡던 강간마 제로스라고 하던데요.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메여? 강간마? 그건 또 어디서 들은 소리여?
정글스와 부르무는 쓸모 없어진 사진을 폐기처분하다 말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의 눈은 사이 좋게 벌어져 있었다.

왜소한 체격의 지라스 레던폭스 요원이 난처한 듯이 윗 입술을 빨았다. 음, 그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진지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저으면서 드디어...
『거기서 한 마디만 떠들기만 해봐! 넌 영원히 얼간이다!』
정글스가 눈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래서는 축구 경기에서 상대방 팀이 골을 막 터뜨리려는 참이다. 정글스는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며 아우성을 쳤다. 제발! 나가라, 골키퍼~!!
《우리는...》
안돼! 정글스가 좌절감에 고개를 흔들어댔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의 구세주 리나 인버스가 칼처럼 빠른 걸음으로 카메라 앞을 가로막았다. 막 무어라 말을 하려던 지라스는 완전히 당황해서 카메라와 빨간 상어, 그리고 리나 인버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퍼득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도로 굳게 다물고 리나의 꽁무니를 따라 총총 걸음으로 퇴장했다.
《실례하겠소이다. 좀 지나가지요.》
다 된 밥에 코가 빠졌다. 상어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바짝 추격해 갔다.
《잠시만요! 가지 말아요! 레던폭스씨?》
《나중에 정식으로 기자 회견을 가지겠소.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만 돌아가 주시...》

뚝-
『바보들의 생쇼라니까.』
여기까지만 보고 부르무는 TV를 꺼버렸다. 영양가 하나 없고 성질만 돋군다.
자, 그럼 다시 사진 분류 작업으로 눈을 돌려보자.
얼간이, 거짓말, 두고 볼 것도 없이 장난질... 바닥으로 버려지는 사진들이 꼭 낙엽 같았다. 약간의 한숨과 함께 5분 전에 새로 도착한 택배 봉투를 개봉했다. 따끈따끈한 미녀 사진 다섯 장. 쭉쭉빵빵을 그냥 버렸다.

『그런데 말이야, 파트너.』
『응.』
『이거, 생각보다 엄청 고약하더라고.』
『뭐가. 내 방구 냄새가? 아님 자네 입 냄새가.』
움찔 하고 정글스가 몸을 경직시켰다. 앗, 화났다.

쓰읍 하고 숨을 들이마신 뒤, 정글스는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 언성을 높였다.
『내가 지금 똥 얘기 하는 줄 아나! 제로스 말일세, 제로스!』
『고약하고 말고가 어디에 있나. 갈아 먹어도 시원찮겠구먼. 어차피 살인범이잖나.』
『아냐! 더 나빠. 다 같은 살인범 같은게 아니라구. 흔해빠진 말 뼈다귀완 다르단 말이세!』
『그래?』
부르무가 두 손을 무릎 위로 얌전히 올려 놓았다. 저것은 집중해서 들을 터이니 이야길 계속 해보라는 신호이다.

『살인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야. 그렇지? 우리는 그 남겨진 흔적을 가지고 범인을 추적하지. 그러니까 뭐랄까...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고나 할까. 아무튼 범죄는 교황께서 아니라고 부정한다 해도 발생한게 맞고, 그건 전적으로 범인 탓이지. 그런데 이놈은 달라. 살인을 예고해. 이 좇 같은 사진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범죄야. 앞으로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범죄이지. 시간 안에 여자를 찾으면 그녀는 살 수 있어. 반대로 찾지 못하면 여자는 죽고 말고. 여기서의 문제가 뭔지 아나.』

책임 회피다.

『죽지 않을 수도 있던 여자였다. 왜 이 여자가 죽었느냐, 그건 무능한 경찰이 시간 안에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탓이 아니다. 경찰 탓이다. 그러니 경찰을 욕해라.. 이 녀석, 진짜 악질이야! 열 받아! 나쁜 자식!』

그날 이후로 의문은 반복되고 있다.
내가 좀 더 엑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더라면... 마르티나는 살 수 있었을까.
후회가 된다. 전단지를 더 많이 돌려야 했다. 좀 더 부지런했다면... 더 빨리... 1분이라도 더 빠르게 그녀를 찾아서... 젠장.
정글스는 죽어가는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르무 오터스가 이런 정글스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자네 탓이 아니야.』
자책감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범인이 노리는 것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다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파트너? 힘 내자구.』
『아아.』

좌절은 금지.
피곤에 쩔어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일으켜 다시금 사진들로 눈을 돌렸다.
죄다 거짓말인게 분명한 사진들을 그래도 확인하는 것이 지금의 그들이 해야할 일이다. 그러니 눈을 비비고 열심히 사진을 보자.

라이터를 찾아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정글스가 중얼거렸다.
『진작부터 느꼈던 거지만 참 대단한 여자야.』
『응?』
『리나 인버스 요원 말이야, 파트너. 나라면 한 시도 못 견뎠을 것 같아. 이 사건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너무 커.』

어쩌면 그래서 맛이 간 것일 수도 있겠지.
황량한 눈빛의 그녀를 떠올렸다. 메마르고, 건조하고, 푸석푸석하게 갈라져 있다. 땡기면 확 하고 불타올라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 거다. 지난 500년간 금식하며 고행한 흡혈귀처럼 안색은 창백하게 생겨 먹은 것이... 후- 하고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그러다 생각났다. 정글스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어제부터 그녀를 본 기억이 없다. 마지막으로 본 기억은... 몸을 45°로 돌리고 뒤를 쳐다봤다. 정상 성인 남자의 몸무게조차 버거운 싸구려 의자가 찌푸드 하고 녹 쓸은 소리를 냈다.

『서장하고 한 판 붙던 것 같던데.』
『자네 말이 맞네, 정글스. 언론 플레이를 놓고 의견이 충돌하는 것 같았어. 제로스가 왜 LA에서 시카고로 왔느냐를 어떻게 설명할 건가... 난감은 하지. 사실대로「제로스가 그러는데 도중에 그만 둔 전임자가 그리워서 이리로 달려왔답니다. 지금의 담당자는 얼간이라 싫대요.」라곤 말 못 하잖아? 입을 짼다고 해도 말일세.』
『못 하지!』
『그 미스 FBI씨, 덕분에 사방에서 공격당하고 무척 곤란해 하는 것 같았어.』
『흐음. 그래서 잠깐 쉬는 건가?』
『자네 말대로... 스트레스가 너무 큰 거겠지.』

그렇게 말한 부르무는 또 하나의 봉투를 추가로 개봉했다. 이번엔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콧구멍 두 개에 볼펜을 나란히 꽂고 장난을 치고 있는 고등학교 남학생의 사진이었다. 하여간 못 말린다. 부르무는 마이클 조던을 연상시키는 매끄러운 동작으로 장난꾸러기가 분명한 남학생의 사진을 쓰레기통에 날려 보냈다. 슛- 골인.

LA는 말 그대로 천사의 도시이다. 상쾌한 원기가 느껴지는 곳, 햇살로 충만하여 태양에 바랜 넓은 몸짓을 자랑한다. 반면 시카고는... 리나는 가뜩이나 좁은 어깨를 한층 더 웅크렸다. LA가 천사라면 시카고는 웅장한 쇳덩어리였다. 에제키엘서에서 묘사한 바퀴 달린 금속의 좌천사 같다 - 라는 것이 그녀의 감상이었다.
1871년에 있었던 시카고 대화재로 도시의 북쪽 대부분이 소실되자 유명한 건축 설계사들이 이때다 하고 현대 건축의 신기술이란 신기술은 모조리 쏟아부어 재건에 몰입했다. 보다 높고, 보다 크게!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콘크리트, 유리, 철근의 삼위일체께서 위대한 미국을 합창하신다. 솟구쳐라, 공업이여. 바벨의 후계자 만만세. 이러한 네모반듯한 건설자의 탑들은 높이는 뒤지지 않지만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을 지닌 뉴욕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야말로 장엄한 기념비 - 오벨리스크였다.
그 속에서 인간은...
너무나 왜소해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누구 하나 돌아봐줄 것 같지가 않다.
리나는 누가 따라오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걸음을 한층 더 빨리해서 코너를 돌았다.

닥터의 사무실은 이들「콘크리트 기념비」들 군단에서 용케 비켜서 있다. 대화재에서 살아남은 오래된 건물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리모델링에 성공, 오래된 회색의 외벽엔 부드러운 나뭇잎 모양의 장식도 여전히 달려 있었다. 그러면서 색이 입혀진 창 유리로 재치 있는 외부 선을 만들어냈다. 위트가 있는 재즈 음악의 느낌이라면 이해가 빠를까.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리나는 걷는 속도를 약간 늦추면서 윗도리 주머니 속에 손을 꾸셔 넣었다. 늦은 퇴근 시간을 맞이하여 각자 돌아갈 장소를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런 그녀를 무심히 스치고 지나갔다. 빠앙- 하고 택시 하나가 경적을 울려댔다. 손을 흔들면서 그 택시를 잡으려고 멋진 신사복의 남자가 바쁘게 차도 아래로 내려갔다. 행인들은 그런 남자를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외로움.
절대 군중 속에서의 절대 고독.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또각또각 발자국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퍼졌다. 로비는 전반적으로 고풍스러웠지만 크림 색의 대리석은 화재 이후에 다시 깔은 것이다. 아무래도 대리석은 열에 약한 소재였다. 화재 당시부터 굳건히 살아 남은 거라면... 글세. 건물의 준공일자가 적혀진 화강암의 머릿돌 정도가 아닐까 싶다. 리나는 할아버지 뻐꾸기 시계를 지나쳐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돌렸다.
내부 공기는 쾌적하게 순환되고 있었다. 약간의 바람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미풍에 흔들렸다. 그녀는 흐트러진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진 뒤, 내친 김에 어깨 뒤로 지저분하게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매만졌다. 거울이 있었으면 좋았을 법 했다. 그러나 단순히 거울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가지는 않기로 했다. 그런 건 귀찮았다.

쨍- 하고 기계음이 들리면서 맞은편에서부터 한 여자가 성큼 걸음으로 다가왔다.
『호텔 예약은... 네, 좋아요. 직접 그래준다면 마음 든든하죠.』
퇴근은 했어도 여전히 업무에서 벗어나지 못한 커리어 우먼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무어라 종알거렸다. 여자의 시선은 로비로 고정이 되어 있었다. 리나의 존재는 아예 안 보인다는 식이다. 리나 역시 그런 그녀를 스치듯 지나쳐 엘리베이터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두 손을 아래로 내리고 기다렸다. 짝수층 전용인 2번 승강기는 지하 1층에 머물고 있었다.

쨍-
잠시 후, 1층으로 올라온 승강기 내부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퇴근 시간이다. 내려오는 사람은 많지만 올라가는 사람은 적다. 리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옮겼다. 그럼 닫힘 버튼을 누르자. 올라가는 층은 8층...
바로 그때 누군가가 쓱 하고 팔을 내밀어 닫기려던 엘리베이터의 문을 제지했다. 리나는 반사적으로 열림 버튼을 눌렀고, 검정의 가죽 재킷을 걸친 젊은 사내는 노아의 방주가 열렸다는 식으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안으로 뛰어들었다.

쨍-
짧은 신호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윙 하고 거북스런 기계음이 내부를 감쌌다. 승강기가 위로 올라가는 동안, 리나의 시선은 층수 번호가 적힌 계기판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뛰어온 것이 분명한 남자는 친절에 감사한다며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런 거야 늘 하던 버릇 아니더냐. 여기서 무어라 말을 하는게 더 이상할 거다. 리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를 세우고 구석으로 한 걸음 더 기어들어갔다. 몸이고 뭐고 매우 피곤했다.

오히려 그 덕분에 호기심이 동한 것 같다. 정면을 응시하던 남자가 장난스럽게 흘깃 눈동자를 굴렸다. 여전히 그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리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더 사렸다. 그녀가 보인 적개적인 반응에 놀랐는지 검정 가죽 재킷의 남자는 움찔해선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러길 한 2초? 그놈의 호기심이 대관절 무엇인지, 이번에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는 노골적으로 리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게 마치 재미있는 동작을 연출하는 어린 치어리더를 구경하는 식이어서 응시당하는 입장에선 영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얼굴이 벌개졌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느냐 짜증내며 물어보려던 차였다.
쨍- 신호음이 다시 울렸다. 8층이다. 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에서 서둘러 내렸다. 그런데 훌죽한 몸매의 남자도 뭐가 그리 급한지 성큼 걸음으로 리나를 따라 내렸다. 실수로 몸이 부딪쳤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자신의 부주의를 사과하며 발걸음을 늦추었다.
먼저 가시지요. 가죽 재킷의 남자가 애교 있는 동작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러든 말든 - 여전히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리나는 옆구리에 맨 가방을 꽉 쥐었다. 대도시에서는 모르는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는게 안전하다. 비록 그 상대방이 매너 있고, 친절하며, 교육 수준이 높을 것 같아도 말이다.

802호. Dr. 그레이워드 심리상담소.

가죽 재킷의 남자가 리나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무실 번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리나는 손잡이를 돌렸고, 남자는 곧 흥미를 잃었다는 표정으로 리나를 지나쳐 복도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순간적으로 그의 입매가 화가 단단히 난 듯이 굳었지만... 리나는 어차피 보지 못했다.

두어 명의 신사복 차림의 남자들이 스치듯 해서 더 지나갔다.
퇴근 시간.
건물은 곧 다가올 밤을 고대하며 나릇한 활력에 사로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