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중에 나오는 애차 [클레어] 는 영화배우 이름이 아니죠. 그리고 [투명 인간] 소설의 한줄짜리 독후감은 사실 제 이야기랍니다...;;


따로 국밥 세트 메뉴 3인조.
사람들은 고등학교 시절의 그들을 일컬어 그렇게 불렀다.
공통점이라고는 눈 씻고 쳐다봐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붙이처럼 사이가 좋아 늘 셋이서 붙어다녔다. 수업도 같이 들었고, 점심도 같이 먹었다. 말썽 피우는 것도 함께, 반성문 쓰는 것까지 함께. 심지어 주말 데이트는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붙어다녀서「정도껏 해라」는 질타를 많이 들었다.

「너희들, 전생에 한 날 한 시에 죽은 쌍둥이 형제들이냐? 앙?!」
셋이서 자전거 하나에 올라타고 신나게 시내를 누비는 광경을 목격한 교장 선생님은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있던 가우리와, 그 등에 어부바 한 리나, 아울러 뒷바퀴에 재주도 좋게 매달려 가던 제르가디스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이리 답했다.
「설마요, 선생님. 이 녀석과 형제라는 건 전생이라 해도 싫다고요!」
「인석들아!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서 대답하는 걸 보면 전생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쌍둥이구먼. 그나저나 위험하니까 당장 자건거에서 내려오지 못해! 그러다 넘어지면 머리통 작살난단 말이닷!」
쌔앵- 하고 도망치는 세 명을 향해 교장 선생님은 허무한 주먹만 휘둘러댔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닮지 않았는데도 닮았다. 똑같이 않게 생겼는데도 똑같았다. 셋이서 하나였다.
본인들은 극구 아니라고 했지만 말이다.

「실례라고, 그런 말. 뭐가 똑같다는 거냐. 저 바보와 내가 어디가 닮았다는 거지?」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는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놓고 가우리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곤 했다.
잠재적 문제아였던 그레이워즈는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유명한 의학 박사의 사생아 - 그의 아버지가 두 번째 부인과 이혼하기 전에 세 번째 재혼 상대였던 여성이 속도를 위반하고 출산한 아이 - 였다. 집안 문제가 상당히 복잡해서 어려서부터 부모와는 같이 살지 못하고 할아버지 손에 키워졌다고 했다. 당연한 결과로 성격은 비꼬일대로 꼬여서 잘못 건드리면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재현이 가능했다. 말투가 워낙에 신랄한지라 그와 제 정신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가우리 가브리에프와 리나 인버스가 전부였다고 할 수 있었다. 나머지 사람은 사정이 어땠느냐고? 교장 선생님을 향해 평상심으로「대머리」운운했던 주둥이다. 여차하면 바보 취급에, 차가운 말투로 이죽거리는 건 기본이었다. 울컥하여 그게 무슨 싸가지 없는 태도냐고 혼내면 피식- 하고 비웃었다. 눈빛이 살기등등한 모양이 대책 없는 반항아였다. 4학년 2학기 시절, 그의 담당 교사는 신경 안정제를 상습 복용했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닮긴 닮았지. 너희들, 턱 밑 똑같은 위치에 점 하나씩 박혀 있다는 거 알고는 있냐?」
그 제임스 딘조차 밟을 수 없었던 소녀 리나 인버스는 교내에서 늘 톱을 다투는 우등생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월반을 두 번이나 해서 제르가디스나 가우리보다 두 살이 어렸다. 차가운 말투로 이죽거린다? 어림 없었다. 올 A+의 멋진 성적표로 상대를 가차없이 찍어 눌렀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 하나.
주변에선 아무도 그런 그녀를 천재라며 추켜세우지 않았다.

「말도 안된다, 리나. 점 하나 때문에 닮았다는 이야길 들어야 한단 말이야?!」
「사실 그건 아니지. 이건 어디까지나 소문인데... 공개할 수 없는 뉴스 소스에 의하자면 너희들 고추가 얼핏 보기에도 똑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두 살이 어리면 뭐 하나. 천재면 또 뭐하고. 책만 파는 공부벌레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어서 야구공을 날려 학교 유리창을 깨먹는 등의 사고를 곧잘 저질렀다. 말괄량이에다 사고뭉치, 남자도 울고 가는 박력의 소유자. 아울러 그 입으로「고추」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을 정도의 뻔뻔한 성격이었다. 싸움도 잘 해서 얼굴엔 늘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그래? 고추가 비슷하게 생겼대? 어이, 제르가디스. 리나 얘기가 닮았다는데?」
「뭘 좋아하는 거냐, 너는!」

이들 셋 중에서 보통 인간에 가장 가까웠던 가우리 가브리에프는 아쉽게도 살짝 맛이 간 바보였다. 13살 되던 해에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시카고에서 LA로 이주한 그는 멋있고 훤출한 외모와는 반비례하는 IQ로「신은 공평하시다」라는 걸 아낌없이 증명하였다. 기본적으로 성실한 성격 탓에 꼴찌는 가까스로 면했다지만... 1815년 워털루 전투에 나오는 중요 인물이 나폴레옹인지, 아니면 워싱턴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넬슨 제독인지 전혀 구분을 하지 못했다. H.G. 웰슨의 공상과학 소설「투명 인간」에 대한 독후감을 작성하면서 단 한 줄로「이 소설은 어떤 인간이 투명 인간이 되었다가 온갖 난동은 다 부리고 죽기까지의 이야깁니다」라고 적어 모든 선생님들로 하여금 자살 충동에 사로잡히게 만든 적도 있었다.

- 우리가 이 학생을 계속하여 가르쳐야 한단 말입니까! 신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기본 됨됨이 하나는 괜찮은 녀석이었다. 모든 여자 아이에게 친절했고, 환하게 잘 웃었으며, 파란 눈동자가 아름다웠고, 상냥한 성품이었다. 운동도 뛰어나게 잘 하는 그를 대놓고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르가디스? 너두 바지 벗어봐라. 내친 김에 리나가 확인을 해보자고 하잖아.」
가끔 이상한 방향으로 튀지만 않았으면 더더욱 좋았으련만.
「이이잇! 넌 리나가 시키면 접시 국물에다 코도 박을테냐?!」
제르가디스가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고함을 질러대도 가우리는 그 이유를 몰랐다. 그는 정색하며 바지 지퍼를 내렸다. 벗으라니까 벗는다. 그게 뭐 잘못 되었나?
「쟤가 하라는대로 하는 건 뭐든지 좋아, 제르가디스. 왜냐면 리나는 머리가 엄청 좋다고. 나보단 아마 곱의 곱절은 좋을 걸? 그런 아이가 틀린 소리를 할 리가 없잖아.」
그러면서 자기 바지는 물론이거니와 뻣뻣하게 굳은 친구의 팬티까지 아무런 감정 없이 훌렁 내리고 보았다.

「이 밥통들아! 앞으로 너희들이 내 친구라고 하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흘러내린 팬티를 주워 올리며 이렇게 큰소리 떵떵 쳤어도.
생애 최초로 자가용이란 놈을 구입했을 적에 제르가디스는 교내 방송까지 (불법) 동원, 그 두 사람을 불러내 뒷좌석에 태우는 것으로 요란한「시승식」을 치러냈다.

「어이. 친구 안 한다며.」
「응. 친구는 관두고 웬수 하기로 결정했지.」
「좋아. 그럼 웬수된 기념으로 거나하게 한 턱 쏴라.」
「피자... 로는 안될까, 리나 인버스? 이 자동차, 무려 12개월 할부라고.」
「쫀쫀한 자식. 죽을 일 났냐? 얼굴 구기는 거 봐라. 아무리 뼈 빠지게 가난하다 할지라도 사나이로 태어난 이상 칼을 뽑았으면 베어야지! 자! 지갑 내놔!」
「이 날강도! 그나저나 여자애가 어디다 손을 집어넣는 거냐! 아, 안돼! 그건 지갑이 아냐! 치, 치웟! 가우리! 제발 이 녀석을 말려줘!!」
「말려? 왜? 쟤가 하라는대로 하는 건 뭐든지 좋다니까, 제르가디스.」

고교를 졸업하고 제르가디스는 시카고 쪽의 대학으로 진학했다. 문란한 사생활로 밑도 끝도 없이 말썽을 피워대던 구제불능 아버지가 열 세섯 연하의 모델 출신 여자와 다섯 번째 재혼을 하면서부터는 완전히 집과 인연을 끊은 것 같았다. 하긴, 애시당초 그런 아버지는 거져 줘도 싫었다. 제르가디스는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던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는 LA로 돌아오고 싶지 않아. 그런 놈 아들 역할은 이제 정리할 거야. 끝이라구.」
가우리는 걱정했다.
「우리 관계도... 끝인 거냐?」
「설마.」
그때 제르가디스는 조금 웃었다. 평소보다 살이 5kg 정도 빠져 그는 매우 여위어 보였었다.
「기뻐해라, 가우리. 비행기란 문명의 이기는 이럴 때 사용하라고 발명한 거란다.」
「뭐야?! 그럼 우리더러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까지 날아오라는 거냐?!」
「싫으면 운전을 하고 와. 고속도로는 뭣 하러 깔아놓았다든?」
「어휴. 큰일났네. 난 장거리 운전은 잘 못하는데.」

결과만 말하자면 그들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관계를 지속시켰다. 부활절 황금 휴가 때에 가족은 안 만나도 친구는 만났다. 불평을 퍼붓긴 했어도 가우리는 기꺼이 시카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쪽 사정이 영 안되겠다 싶으면 제르가디스가 100번 양보하여 애차「클레어」- 포드 토러스 세단을 몰고 다시는 오고 싶은 맘 없다던 LA에 나타났다.
「꽤액! 차에다 이름을 붙였어?! 그것도 하필이면 클레어?!」
「응. 클레어. 리나, 넌 데보라 윙이나 매릴 스트립이 더 괜찮다고 생각해?」
「어느 쪽이든 다 싫어! 하여간 네 놈의 센스라니. 끔찍해!」
그런데 정작 리나는 자기 차에 영화 더티 하리의 주인공「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있었다. 누구의 센스가 더 고약한지는 줄자를 들고 대봐야 알 수 있을 듯 싶었다.

아무튼 각자 결혼을 하고 나서도 이 우정이 지속되리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만나자. 결혼식장에서 주례자가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문구를 이들은 우정에 주입시켰다.

가우리가 경찰이 된다고 했다. 그가 기적처럼 폴리스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했을 적에 누구보다 기뻐하며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던 건 제르가디스였다.
답례로 가우리는 제르가디스에게 번쩍이는 총알 하나를 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과녁에 명중시킨 총알이야. 부적이지.」
그 옆에서 리나 인버스는 퉁퉁 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똑같이 꽃다발을 가지고 갔는데 누구에겐 귀한 총알을 주고 누구는 국물 - 탄피 하나 없느냐는 거였다.

가우리는 일부러 권위적인 모습으로 그녀를 대했다.
「리나. 우린 아직 냉전 중이다. 잊었니?」
「어떻게 그걸 잊어먹을 수가 있겠니. 덕분에 내 순정은 한순간에 박살이 났는데!」
리나가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 남자가 기혼남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었을 적에 누구보다 난리를 쳐댔던 이는 회계사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가우리였다.
「이보게! 자네 딸이 아니라 내 딸일세! 자네가 왜 흥분하나?」
「아저씨 말씀이 옳긴 해요. 하지만 리나는 내 친 딸처럼 소중하단 말예요!」
그렇다는데야. 가우리의 기백에 눌린 인버스 씨는 주눅이 든 표정으로 얌전히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나 대신 자네가 내 딸의 다리 몽둥이를 분지르게. 난 옆에서 접착 테이프를 들고 얌전히 기다리겠네. 부러졌다 싶으면 불러. 그럼 테이프로 그 다리 몽둥이를 붙이러 가지.」
리나는 내가 뭘 하든, 내 마음대로다- 라며 펄펄 뛰었다. 기혼이면 뭐가 어떻다는 거냐. 아직 손도 못 잡아봤다. 결정적으로 그 상대방이 리나의 호- 하는 감정을 전혀 모른다!
허나 소용 없었다. 애시당초 이론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엉덩이라도 팰 기세인 가우리에게 질려 그녀는「깨끗이 정리하겠습니다」라고 반 강제적으로 맹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거 혹시... 질투 아니었나.」
제르가디스의 할아버지가 아흔 일곱 살에 노환으로 세상을 뜨자 가우리와 리나는 시카고까지 한 걸음에 달려가 장례를 같이 치뤘다. 어려서 그를 키워주던 할아버지였다. 하나뿐인 가족을 잃었다는 속상함에 제르가디스는 많이 울었다. 정말로 슬프게 울어서 한 성질머리 하는 차가운 녀석인 원래의 그를 짐작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응?」
가우리가 반문하자 너무 풀어대서 빨갛게 헐어버린 코를 붙잡고 다시 물었다.
「질투가 아니었느냐고 묻고 있는 거다, 가우리.」
가우리는 손사레쳤다.
「질투? 그럴 리가 없잖아, 제르가디스. 난 여자 친구가 따로 있다? 그리고 너라도 아마 그렇게 했을 걸? 세상에, 유부남 교수라니. 그것도 나이가 스물 다섯이나 많은! 아무리 학식이 풍부하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사람이 좋아 죽겠다고 졸졸 따라다닐 수 있지?」
「난 알 거 같은데. 아마 그건 사랑이 아니라 팬의 감정이었겠지.」
「팬?! 그럼 연애인을 따라 다녀야 할 거 아니야! 가수나, 배우! 하여간 그런 거. 아무튼 이젠 다 정리 되었으니까 천만 다행이지. 그러니까 너도 엉뚱한 생각은 관두고 맘 편하게 울기나 해. 내 품에 안겨 펑펑 울라구.」
「사양하겠다. 가슴 근육 불거진 남자 품에 안기긴 죽어도 싫어.」
「리나아- 여기 좀 봐라. 제르가디스가 사람 차별한다. 어떻게 하지?」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체포해, 자랑스런 슈퍼 캅. 그 다음엔 남자가 아닌 친구의 가슴입니다, 하고 어깨를 빌려줘.」
백합을 들고 있던 아름다운 여인은 잔뜩 토라져서는 그렇게 대답했다.

분명히.
당시만 해도 연애 감정은 서로 없었다.
거기엔 리나도 동의했다. 그들은 여자와 남자가 아닌, 그저 둘도 없는 친구와 친구였다.

그랬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던 걸까.
그에게로부터 전화가 오길 기다리면서 두근대며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워 가슴이 아파왔다.
첫 키스는... 언제 했더라. 둘이서 섹스한 것은 또 언제?

『이봐요, 언니?』
리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퍼득 고개를 들었다. 바리톤 음성의 주인은 정글스였다. 지저분한 수염에 흰색의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말아올린 그가 엄지손가락 하나를 들고 있었다. 저것은「최고」라는 뜻이 아니다. 저 엄지손가락은 뒤편을 가리키는 제스츄어였다.

『감식반이 1차 조사 끝냈답니다. 범죄 현장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고 허락 떨어졌어요. 하지만 혹시라는게 있으니까 푹 퍼져 오래 있지는 말랍니다. 시체를 포.장.하기 전까지만 잠시 둘러볼 수 있대요.』
리나는 바짓단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길바닥에서 구른 탓에 모양이 엉망이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가볼까요.』
『같이 가죠. 그런데 잠깐만요, 요원. 그 전에 라텍스 장갑을 착용하시오.』
『물론이지요. 발에다「덧신」신는 것도 잊으면 안되고요.』
리나는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자리를 이동했다. 다리가 아픈 것이 분명한 그 움직임에 정글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듣자하니 보기 좋게 자빠지고, 뒹굴고, 넘어졌다고 했다. 가엾기도 해라. 그 탓에 발목 근육에 탈이 난 거라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아픔은 한층 더 심각해질 거다. 고집은 제법 있어서 만사 때려치우고 병원에 들릴 것 같지는 않고... 절룩대며 걷는 리나를 향해 우거지상을 지으며 팔 하나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이 팔이 다 무엇이다냐. 리나가 놀라 쳐다봤다.
정글스의 얼굴은 쑥스러움을 담아 더 찌그러졌다.
『힘들어 보여서 말이오.』
『그래서, 지팡이 대신 쓰라고요?』
리나가 장난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르티나의 아파트 안에는 정전기 지문 채취 장비를 들고 있는 감식반 요원들이 아직도 몇 남아 엉망으로 어질러진 거실에서 마무리 작업에 한창 들어가 있었다. 이 와중에 손 붙잡고 나란히 입장? 커다란 성인 남자와 여자가?

깨달은 바가 있다. 정글스가 팔을 치웠다.
『얼굴 벌개졌네요, 정글스 형사.』
『남이사!』
그러기에 누가「아메리카 최고 친절 남」흉내를 내래? 리나는 흥 하고 콧소리를 냈다.

지문 채취 작업은 일종의「콘크리트 바닥에서 헤엄치기」다. 범인의 지문이라는 것을 힘들게 찾았다고 해도 그걸 근거로 제로스를 잡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연방정부 컴퓨터에 제로스의 지문이 사전에 등록이 되어 있지 않는 한 추척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범죄자, 사법권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 그리고 비자 면제국이 아닌 나라에서 입국하는 외국인 등에 한해 부분적으로만 지문을 채취하고 있다. 빈 틈이 널리고 널린 것이다. 현장에서 지문을 찾아도 대조할 샘플이 없으면 도루묵 꽝. 약 5만 건에 이르는 방대한 데이터 베이스 속에서 정작 범인에 대한 이야기만 쏙 빠져 있다고 해봐라. 환장할 노릇이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래도 위안을 얻자면 범인을 잡고 나면 그걸 증거로 들이밀 수는 있을테니... 내일을 기약하며 작은 파편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다. 뭐가 나오면 즉시 증거물로 확보한다.

『수고하십니다.』
검정색의 네모난 장비 가방을 든 뚱뚱한 남자가 가볍게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리나 역시 가볍게 인사했다.
『나온게 좀 있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흔들며 멋적게 웃었다. 여러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미소였다. 리나는 그걸「건더기 하나 없었어요」라고 마음대로 해석하곤 남자가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몸을 살짝 비켰다. 뚱뚱한 남자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몸이 커서 리나가 비켜주지 않으면 밀치고 나가야 할 판국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정글스에게도 차분히 인사를 하고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집 안에는 세 명의 감식반 요원과 두 명의 제복 경찰, 그리고 한 명의 사복 형사가 있었다. 제복 경관은 모르겠다만, 사복 형사는 정글스와는 이미 안면이 있는 자 같았다. 갈색 구레나룻의 사내는 이 안에선 볼 일이 다 끝났다는 식으로 메모지를 들어 신호했다. 이제부턴 주변 탐문이라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무척이나 지루하고도 긴 작업이 될 것이다. 리나는 후우- 하고 숨을 크게 내쉬고는 정글스와 눈을 맞췄다.

『코드 넘버 419.』
정글스가 불편한 기색으로 마르티나의 시신을 가리켰다.
『바디(시체)로 돌아온 사진 속의 그녀군요.』
리나는 대꾸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대신 희생자의 목 부분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흉기인 철사는 이미 감식반 요원들이 잘라서 증거물로 채취해 가져가고 없었다. 엄청난 압력을 받아 찢긴 살가죽과 멍든 자국이 흡사 잔존 사념처럼 남아 그녀에게 닥쳐온 죽음의 처절함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짤막한 관찰을 끝마친 뒤, 리나는 장갑을 착용한 손으로 희생자의 몸을 직접 만졌다. 어차피 검시관이 확인차 그녀의 몸을 절반쯤 돌려놓은 상태이니 여기서 리나가 살짝 만졌다고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거다.
그동안 정글스가 눈 크게 뜨고 가까이 다가와 같이 좀 보자며 상체를 숙였다.

『봐요. 그녀는 앞으로 해서 밧줄로 팔이 묶여 있었어요. 그렇다는 건 등 뒤로 묶였을 적과는 달리 여러 움직임이 가능했다는 얘기인데... 이렇게 팔을 안으로 구부려 몸을 방어할 수도 있고요, 반대로 앞으로 뻗어 상대를 밀쳐낼 수도 있죠.』
『어쨌거나 그 상황이 마르티나에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던 것 같군요.』
『예, 그래요. 여기 목 부분을 봐요. 살갗의 상태로 봐선 교살이 맞긴 맞는데, 일반적 교살과는 틀린 부분이 있어요.』
『방어흔이 안 보이네요, 요원 말이 맞아요.』
목에 줄이 감겼다고 치자. 줄이 감기면 사람은 방어를 하기 위해 자기 손을 밧줄과 목 사이에 집어넣고 발버둥을 치게 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피해자의 손은 말 그대로 걸레짝이 된다. 심각해지면 손가락이 거의 절단 상태로 발견되기도 한다. 줄이 목을 조임과 동시에 사이에 낀 손가락을 썰어대서 그렇다.
『그렇다는 건 철사가 마르티나 조아멜의 목을 조일 적에...』
『맞아요, 정글스. 그녀는 이미 의식이 없었어요. 앞으로 묶여진 손을 목 부위로 가져가 철사를 풀려는 동작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도 하지 않았죠.』
『머리에 입은 이 상처 때문일까요?』
『아마 그 때문이 맞을 거예요.』
제로스가 전화로 말했다. 그녀가 진공 청소기를 휘둘러대서 그걸 빼앗았는데 힘 조절을 미처 하지 못했다고. 부검을 해봐야 확실하겠지만 진공 청소기에 얻아맞아 뇌진탕을 일으킨 건 아마 확실할 것 같다.

정글스의 한쪽 눈썹이 구부러졌다.
『힘 조절을 못 했다라. 미스터 헤라클레스 선생이셨군.』
이번에도 리나는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줍잖게 쭈그리고 앉은 상태에서 얼굴을 들어 방안을 대충 둘러보았다.
잔뜩 어질러진 집기들. 깨어진 유리. 오물. 말라붙은 물 찌꺼기... 혼란스럽다.
푸세식 화장실에서 똥 누는 폼을 잡고 있던 정글스도 그 점을 깨달은 것 같다.

『저기... 요원. 언젠가 말하길, 당신은 범인이 유희적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랬었죠.』
『나, 지금에 이르러 무지 궁금해지는데 말이오. 이게「재미있게 놀았다」는 거 맞아요?』
『댁이 보기엔 어때요.』
『나? 내가 봤을 적에?』

정글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이건 논다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폭력적인데요. 때리고, 부수고, 어퍼컷. 거기다 정신을 잃은 여자를 일부러 힘을 줘서 목 졸라 죽였어요. 그가 당신 말대로「비뚤어진 이상 심리의 쾌락범」이라면 죽어가는 여자가 공포에 질려 발버둥치는 걸 즐겨야 하는 거 아니오? 그런데 뭔가에 쫓기듯이... 강박관념이라고 할까. 서둘러 종결 짓고는 뒤도 안 돌아본 것 같소. 느긋하게 즐기다가 다 끝나면 손 털고 나가버렸다는 식이 절대 아니예요.』

리나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키워드가 바뀌었다.
이건 냉정한 분노다.

『제로스가... 맞긴 맞는 거요?』
『하아. 모방 범죄냐는 질문인가요. 아니오. 슬프게도 본인 맞아요. 그리고...』
발목이 욱씬거렸다. 리나는 힘들게 몸을 일으키면서 신음했다.
『이건 헌정 살인이예요. 그래서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거죠.』

헌정? 그러니까 그 뭐시다냐. 작곡가가 자기가 쓴 곡을 귀부인이나 왕에게 바치는 거 같은... 그런 거?
정글스는 꽥- 하는 표정을 짓고는 죽은 여자와 리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말문이 막혔다. 누군가에게 바쳐지기 위한... 이게 그런 살인이라고?

한참만에 그는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소름이 죽죽 돋고 있었다.
『저기, 요원.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거 같은데요...』

아쉽게도 그의 질문은 채 이루어지지 못했다. 예의 구레나룻 형사가 바깥에서부터 헐레벌떡 달려와 정글스를 찾았다. 그는 입으로「빠밤, 빠밤, 빠밤빠밤~」하는 가락의 죠스 주제가를 흉내내면서 넘실대는 파도 위로 삼각형의 상어 지느러미가 둥실 떠오르는 듯한 손짓을 해보였다.

리나가 저게 무슨 뜻이냐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정글스는 목 놓아 울려고 했다.
『상어떼요. 그러니까... LA에선 하이에나라고 부르는 자식들이죠. 언론이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나타났다는 겁니다. 아아, 진짜 빠르네. 재주도 좋은 놈들.』
노란 접금 금지 테이프 저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글스는 황급히 도망갈 준비를 갖췄다. 그들의 엉덩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기자들이 후레쉬를 펑펑 터뜨리기 시작하면 진짜 골치 아파진다.
『일단 여기서 달아납시다!』
『우린 범인이 아니잖아요. 형사.』
『물론 그거야 그렇지만, 저 상어떼들은 우리를 범인으로 조작하고도 남아요.』
양복 재킷을 찾아들기가 무섭게 그는 리나의 등을 훌쩍 떠다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