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글스 리나 커플링이냐] 라는 질문엔 땅 파고 헤엄이나 치렵니다. 헐헐. 생각보다 정글스 비중이 커지긴 커졌어요.


잠시나마 그들은 서로 미리 약속을 주고 받기라도 한 것처럼 침묵했다.
아니, 다시 정정하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로스는 이쪽의 대답을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었고, 그동안 리나는 필사적으로 숨을 골랐다.
《리나씨?》
계속되는 불편한 침묵에 오히려 되물은 쪽은 제로스였다.

이 상황에서... 리나는 반사적으로 정글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S자를 그리며 서커스 곡예 운전 중이던 정글스가「뭐요! 뭐 때문에 그러쇼!」라며 고함을 쳤다.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이긴 한데, 아쉽게도 어림 없다. 당나귀처럼 귀를 쫑긋거린다고 해도 이 수라장 속에서는 남의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말 소리를 알아듣기란 사실상 무리에 가깝다. 600만불을 주고 고친 인공지능 생체공학적 소머즈의 귀가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놈이오? 녀석인 거요?』
정글스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리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는 쥐고 있던 핸드폰을 한층 더 귀로 바짝 가져갔다. 동요했다는 걸 들켜서는 안된다. 흥분해서도 안된다. 이런 때일 수록 더욱 침착해야 할 것이다. 리나는 마음 속으로 물결 잔잔한 따뜻한 남쪽 해안가와,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시계 추, 그리고 아름다운 반복 무늬를 그리는 소라 고동을 연상했다. 이런 이미지들은 격앙된 감정을 진정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제로스?』
《내 목소리를 기억해 주는군요. 기쁩니다.》
『왜 네가 거기서 전화를 받는 거지.』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고 계신 건가요.》
『좋아, 그럼 다시 질문을 바꾸겠어. 마르티나 조아멜은 어디에 있지?』
《그거야 당연히 내 옆에 있지요. 하지만 그녀와 직접 통화하실 순 없습니다.》
『그녀를 벌써 죽인 건 아니겠지, 제로스. 아직 타임 아웃 전이라구.』
《그거야 당연하죠, 리나씨. 아직 숨은 붙어 있어요.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라고는 장담 못하겠군요.》
『어째서지.』
곤란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저편에서 잠시 당혹스러워하는 짧은 숨소리를 뱉었다.
《아. 그게 말예요. 깔끔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성격이 보통이 아닌 여자더군요. 반항을 심하게 했어요. 진공 청소기를 들어 날 때리려고 하더군요. 저어... 미안해요. 그냥 진공 청소기를 빼앗기만 했어야 했는데 평소보다 힘이 더 들어가서 말이죠. 덕분에 그녀는 쇼크 상태예요. 지금에 와서야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어쨌건 내가 의도했던 건 아니라는 걸 미리 말해두고 싶어요. 정말 미안하게 되었어요, 리나.》

지금 그런 걸 나한테 사과할 때야?! 눈에서 불이 튀어나가는 것 같았다.
쇼크? 쇼크 상태?! 진공 청소기로 뭘 어떻게 맞았기에 쇼크 상태라는 건가. 그렇다는 건 의식이 없다는 건가. 기절했나. 아니면 단순히 얼이 빠져 있다는 건가? 맙소사. 그 많고 많은 것 중에서... 하필이면 진공 청소기?!

배관공인줄로만 알았던 친절한 남자가 갑자기 얼굴색을 달리하고 덤벼든다. 손에는 밧줄이 들려 있다. 놀란 여자는 비명을 질러대며 뒷걸음으로 달아난다. 당황하여 무기로 삼을 만한 것을 필사적으로 찾지만 의외로 손에 잡히는 물건은 죄다 구질구질한 소품들이다. 휴지와 액자, 신문지와 커피잔을 던져봤자 하나도 위협적이지가 않다. 그렇다고 부엌까지 달려가 식칼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그러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 그리로 뛰어가는 도중에 머리채를 잡혀 험한 꼴 - 이를테면 강간 같은 - 을 당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결국 여자는 다시 주변으로 눈을 돌리고 가상의 몽둥이, 진공 청소기를 손에 쥔다. 무게도 제법 되겠다, 이걸 야구 몽둥이라고 생각하고 휘둘러 보는 것이다. 어쩌다 남자의 머리를 가격할 수 있다면 최소한 윽 소리는 나오게 만들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은 사실상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 연속 타격까지 가능하다면 이론적으로는 상대의 머리에 구멍을 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여자는 진공 청소기를 힘차게 휘두른다.
단, 여기서 주의할 점.
이걸 빼앗겨 정작 얻어맞는 사람이 본인이 되면 꽤나 볼썽사나워진다.

리나는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문질렀다. 수면부족 탓에 안구가 건조해져서인지 깔깔한 통증이 머릿속까지 헤집고 있었다. 한층 더 힘을 주어 눈자위를 눌렀다.
망할 놈의 진공 청소기는 그만 생각하자. 이럴 수록 강제로라도 평상심을 지켜야 한다.
그녀는 일부러 낮고 차분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넌 항상 이걸 일컬어「게임」이라는 말을 사용했지. 솔직히 난 게임이라는 표현이 싫지만... 그래도 네 식으로 말하자면 이번 게임에선 네가 졌어, 제로스. 우리가 시간 안에 마르티나 조아멜을 찾아냈으니까. 그러니 이제와서 그녀를 죽이면 이건 게임 규칙 위반이야. 따라서 그녀에게 더 이상 손을 대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어.』
《말도 안됩니다, 리나씨. 당신은 겨우 전화만 걸었을 뿐입니다. 이까짓 전화 한 통화에 그녀를 찾았노라 할 수 있습니까? 봐요, 지금 여기엔 나와 이 여자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당신의 어두컴컴한 동굴 같은 침실처럼 조용하기 그지 없다고요. 모든게 내 손아귀 속에 있다 이겁니다.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이곳에 없어요. 당신은 날 막을 수 없고, 이 여자는「내 것」입니다.》

내 것? 리나는 일부러 두 번 반복하여 부정했다.
『그렇지 않아! 결코 그렇지 않아!』
원한다면 백만 번도 부정해줄 수 있다.
『결코 그렇지 않아!』
사람은 그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다.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다는 건 억지에 불과하다.
인간은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 무척이나 고귀하며 무척이나 외로운 생물이니까.

《이런, 이런.》
제로스는 정말로 곤란하다며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아니라고 우기니 어쩔 수 없군. 좋아요. 내 100번 양보하죠, 리나씨.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그럼 여기서 새로운 제안을 하겠습니다. 먼저의 게임 룰은 잊어버려요. 새로운 게임을 해봅시다. 이 여자를 살리고 싶어요? 2분... 아니, 서비스로 1분 더 잡고 정확히 3분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이리로 직접 와요. 당신이 직접! 그렇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어요.》

도대체 누가 너그럽다는 거냐! 리나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3분?! 이래서는 컵라면 익는 시간동안 발가벗고 달까지 뛰어갔다 오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남의 자동차 안이라는 건 새까맣게 잊어먹고 조수석 앞 선반을 주먹으로 쳐서 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 시내 지도를 집어넣고 다닌다. 다행스럽게도 정글스 브라운도 그「대부분의 사람」범주에 속해 있었다. 박하 캔디와 휴대용 손전등 등의 나머지 불필요한 잡동사니들을 와르르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치워버렸다. 그놈의 손전등이 하필이면 발잔등 위로 수직낙하한 탓에 제법 눈물이 나왔지만... 여하간 여섯 번 반듯하게 접혀진 종이를 꺼내 테이블보 펼치듯 무릎에 깔았다. 차창 밖으로 노스트 웨스트 8번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지나갔다. 좋다. 그럼 계산한다. 속도와 거리, 그리고 지금의 교통 상황으로 추정하여 보자면... 리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으로 앞 유리창을 세게 찼다. 망할!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 곧 죽어도 그 시간까지는 도착할 수 없다.

『정글스 형사! 발진해요! 빨리!』
정글스의 안색이 노랗게 변했다. 발진하라고? 농담도 심하다.
『이보쇼! 지금 내가 운전하고 있는 건 자가용이지 모빌슈트 건담도, 우주선도 아니오!』
누가 그걸 모르나. 리나의 목소리가 곱절로 커졌다.
『바퀴 달린 우주선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아무튼 끝까지 밟아요! 3분 안으로 도착하지 못하면 마르티나 조아멜은 못 구해요!』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가슴으로 상상했던 따뜻한 남쪽의 바다로 A급 태풍이 불어닥쳤다. 파도가 집채만하게 일어 바다는 밑바닥부터 거꾸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모두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시오- 야자 나무가 바람에 꺾였다. 그녀는 핸드폰이 무슨 군인 무전기라도 되는 양, 입에 직접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 나쁜 놈! 썩을 놈! 여유를 부리는 것도 지금 뿐이다! 반드시 교수형이다! 교수형! 그것도 아니라면 전기 의자! 달려가서 네 목을 손수 비틀어주마! 왜 그렇게 여자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거지?! 어째서야, 어째서!』
《하아... 이봐요, 리나씨. 내 말 들어요. 난 여유를 부리고 있는게 아녜요. 그리고 이 여자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알아주셔야지? 이 모든 건 그저 당신을 위해서다.

『그건 또 무슨 개 같은 소리야?!』
《하루종일 방안에 틀여박혀 움직이지 않죠. 밤새 내려진 커튼은 오후가 되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요. 그러다 모처럼 큰 맘을 먹고 외출을 해도 바퀴벌레가 떼거리로 굴러다닐 것 같은 싸구려 중국 식당에서 맛 없는 얼굴로 저녁을 먹고... 외모엔 관심을 잃어 화장도 안해, 머리를 손질하지도 않아... 그런 당신이야. 흡사 멕시코 사막 선인장처럼 바짝 건조해져서는 미소를 짓는 일도, 화를 내는 일도 없지.》
『그거야 너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일이잖아!』
《아뇨. 상관 있지요.》
제로스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상관이 왜 없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둘도 없는 나의 이해자인데.
《내가 뭐하러 시카고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죠. 단순히 그냥 놀고 싶어서? 설마.》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해서.
이 고생을 하는 것도 모두 당신을 위해서.

한 마리 미끄러운 남미산 비단 뱀이 새까만 빛깔의 대리석 바닥을 기어갔다.
《난 지금 백미러를 곁눈질로 들여다 보는 당신을 상상하고 있어요. 그 입술에... 루즈를 발랐을까. 아마도 발랐겠죠. 당신은 보수적인 사람이니까 아마도 짙은 색은 아닐 거예요. 엷은 갈색... 아니면 가벼운 주홍.》
『그래! 발랐다! 오늘은 오렌지 색이다!』
울컥해서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머리도 단정하게 빗었겠죠.》
『그럼 내가 까치집을 하고 거리를 나돌아 다녔을 거라는 거냣?!』
《옛날에 늘 걸던 금빛 방울 귀걸이도 다시 찾아 달았고요.》
『신경 끄셔!』
리나는 인상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이 내용이 다 뭐시다냐!

그러든 말든 제로스의 어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가 없었다.
《어제 밤에도 당신은... 악몽을 꾸었습니까?》
쓰윽 하고 혀로 입술을 축이는 소리.
리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가락 마디에서 핏기가 사라져갔다.
《내 장담하지. 꿈이란 꿈은 꾸지도 않았어. 시카고에 와서 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은 밤을 보냈지. 1년하고 4개월만에... 내 말이 틀립니까?》
그리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건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야.》

더 이상은 같이 못 놀아준다.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 어차피 손해볼 거 없다. 나라에서 지급한 공짜 핸드폰이다 - 정글스를 향해 귀신처럼 고함 질렀다.
『가요! 어서! 가서 끝장을 내보자구!』

글세올시다. 정글스는 과연 누가 먼저「끝장」이 날 것인지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고 싶어졌다. 여기서 더 밟으면 차가 뒤집힌다. 덜덜거리는 차내의 진동이 한계 상황까지 속도를 올리고 있음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글스는 브레이크 패달 위로 올린 발의 힘을 뺐다.
안전벨트는 이미 단단히 묶었고... 비록 종교는 없지만 성호를 그었다. 듣자하니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부지는 무지하게 자비로워 자신의 이름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 경관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비는 베풀어 주신다고 하였다. 자! 아멘을 외쳐라. 날아오는 총알마저 휘게 만드는 분이시여! 어쩌다 전복 사고가 나도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게 하사, 보험료가 걱정이니 이왕이면 내 차도 안 찌그러지게 하여 주시오~

등을 둥굴게 하는 것으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는 것과 동시에 엑셀레이터를 있는 힘껏 밟았다. 부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조수석에 앉은 리나의 머리가 관성의 법칙에 의거하야 뒤로 확 젖혀졌다.
『으윽!』
이때 입을 벌리고 무어라 떠들면 자칫하다 혀를 깨물 수 있다. 이를 악물고 그냥 참는 것이 요령이다. 눈도 감으면 안된다. 겁에 질려 눈을 감는 건 일종의 자살 행위다.

순간적으로 리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떠올렸다. 내가 타고 있는 세발 자전거가 빛의 속도로 달린다고 가정을 하였을 적에, 주변을 달리는 모든 쌩쌩이 자동차는 붙박이 장롱처럼 정지해 있거나 아니면 뒤로 천천히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과연! 유리창 너머에서의 차량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이 타고 있는 차량을 피하여 멀직이 물러서고 있었다.
정글스는 한층 더 열중하여 박력으로 마구 밀어 붙였다. 끼익 소리와 함께 가까스로 추돌 상황을 면한 파란 빛깔의 티뷰익 차량이 도로에서 벗어났다.
『이 미친 년놈들아! 똑바로 운전하지 못해?!』 
정글스는 대답 대신 창문 밖으로 수갑을 내걸었다.
리나는 신음했다. 경광등은 어쩌고 수갑?
『어디다 처박아 놨는지 지금은 못 찾아요. 시말서 쓰라면 쓰는 거지, 뭐.』

시말서 작성은 아마도 확실하다. 정글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환장할 정도로 느릿하게 운전하는 미니 밴 차량이 갑자기 그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상대방 운전자는 60대의 노인으로 보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운전자의 뒷통수가 하얗게 눈 내린 백발이었다. 빠앙- 하고 경적을 울려봤다. 그렇다고 해도 반사신경이 둔한 노인 양반이 알아서 피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에라, 모르겠다. 정글스는 칵 소리를 내며 핸들을 꺾었다. 잠시만 인도로 달리자.
『꺄아아악!』
리나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핫도그 판매대를 스치듯 해서 단방에 날려버리고 토마토 페이스트 통을 환상적으로 뒤집어썼다. 피 느낌의 오물이 뚝뚝 흘렀다. 벌거적적하고도 끈적이는 액체 위로는 방금 썰어낸 것이 분명한 양배추가 고스란히 들러붙어 있었다. 리나는 고개를 숙이고 웩 하고 구역질했다. 잘고도 꼬불거리는 그 질감이... 뭐랄까, 그 느낌이라는 것이... 정글스가 흘끔 곁눈질했다.
『사람을 친 건 아니오, 요원. 저건 뇌수가 아니라 양배추라구!』
읏샤 해가며 다시 차도로 내려갔다.
『보기보단 비위가 약하시구먼.』
『조금 놀란 것 뿐이예요.』
리나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손등으로 시어 꼬부라진 침이 묻은 입가를 닦았다. 그러나 그게 단순한 허세라는 걸 정글스는 한 눈에 알아차렸다. 리나가 또 욱- 하고 토기 올라온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던 것이다. 설마, 멀미하는 건 아니겠고. 정글스는 인상을 쓰며 윈도우에 묻은 토마토 페이스트를 치우고저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안 토해요! 난 괜찮으니까 속도를 줄이지 말아요!』
『댁이 속도를 줄이라고 해도 난 못해요. 그러니까 그 걱정이랑 접어두시오.』
리나는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총은 쏴본 적 있으시오? 요원.』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가면서 정글스는 그렇게 질문했다.
FBI는 거저 먹었다고 생각하나. 리나는 대답 대신 권총을 꺼내어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일정 수준의 테스트에 합격하기 위해 사격 연습으로 날린 총알의 숫자만 해도 한 트럭이다. 물론 총기 사용이 밥 먹는 것 만큼이나 익숙하다고 말한다면야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는 권총 매니아도, 대 테러 진압 부대원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 사용법과 마음가짐은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날「화분」취급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난 바보가 아녜요.』
가끔 신문에도 나온다. 소방 호스 한 번 잡지 않고 은퇴하는 소방관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거 말이다. 마찬가지로 FBI 중에서도 현장 출동 경험 없이 서류만 작성하는 부류도 꽤나 있다. 일선에서 발바닥으로 뛰는 정글스 같은 사람들은 그런 부류를 일컬어 농담조로「화분」이라 불렀다. 총만 들면 뭐 하나. 빳빳하고, 얼어붙어 있고, 화분에 심어져 있는 제라늄처럼 움직이질 못한다. 그래서 화분이다.

정글스의 표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늘했다.
『사람을 향해 발포한 적이 있느냐는 얘기였소, 내 말인 즉.』
『필요하면 쏩니다.』

지금 그 말을 했다는 걸 결코 잊지 마시지. 주저라도 하는 날엔 나무아미타불이다.
3층까지 일시에 달려 올라가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신호하고 외쳤다.
『시카고 경찰이다!』
마르티나 조아멜의 아파트 문은 굳게 잠궈져 있었다. 정글스는 손잡이 부분으로 총을 두 번 발사한 뒤, 발로 문을 걷어찼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측면으로 붙어 몸부터 사렸다. 무기를 가진 범인이 아직 실내에 있을 경우, 돌진하는 경관을 향해 공격을 시도하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때문에 최대한 몸을 낮추고, 흘끔 하고 안쪽을 확인하는 것으로 날아오는 총알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을 하고 본다.
『마르티나 조아멜 양?』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벽에 붙어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왼쪽 팔목으로 받쳐든 시그사우어 시리즈 220으로 각 벽면의 모서리 부분을 겨누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뭔가가 튀어나오면 대응 사격할 수 있도록 바짝 긴장한 채로 말이다.

『이런 젠장!』
마르티나 조아멜의 아파트는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협소했다. 거기다 독신의, 변변찮은 직업에다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한 푼 없는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침실 하나에, 욕실 하나, 그리고 주방 겸 거실인 공간에 온갖 잡동사니를 잔뜩 쌓아두고 있었다. 물에 젖은 카펫까지 둘둘 말려져 있어 그 혼란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추측하자면 그녀는 애시당초 정리 정돈에는 재주가 없었던 것 같다. 거꾸로 뒤집힌 테이블 근방으로 오래된 잡지와 존 그리샴의 최신판 소설 포켓북, 그리고 화장을 지워낸 것으로 보이는 더러운 휴지가 그득했다. 벗어놓은 옷가지들은 옷걸이가 아닌 소파 팔걸이에 산떠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청소를 게을리 했다고 눈썹을 찌푸릴 정글스는 아니었다. 그 또한 자기 방을 돼지 우리처럼 하고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시간 때우기 용이 분명한 로빈 쿡의 의학 스릴러 소설을 지긋이 밟고 정글스는 다시 한 걸음 앞으로 전진했다. 그 좁고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거실에 마르티나 조아멜이 웅크린 태아 자세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손은 묶여 있었고 눈은 부릅 뜬 상태였다. 그 목에는 굵은 철사가 고스 스타일의 목걸이처럼 칭칭 감겨 있었다. 힘껏 죄어든 철사줄이 살갗을 파고들어 목의 피부는 예리하게 찢긴 상태였다. 둔기로 맞은 건지 머리에도 피가 제법 묻어 있었다. 흘러나온 피는 살짝 굳어 있었다.

『한 발 늦었어!』
그렇다면 범인은?
죽은 것이 뻔한 희생자의 목덜미에 손가락을 가져가 맥을 확인하는 바보 짓은 하지 않는다. 가엾다고 생각하여 목에 감긴 철사줄을 풀어주는 멍청한 짓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런 거야 감식반 요원들이 알아서 할 것이고... 정글스는 마르티나의 몸에는 손을 대지 않은 채 곧바로 출구 확인부터 들어갔다. 이런 류의 아파트에 뒷문이 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창문으로? 저기로 나갔나? 정글스는 주방 쪽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성인 남자가 충분히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사이즈의 창문이 주방 쪽에 있었다. 그 옆으로 빗물받이 배관이 달려 있으니 운동 신경이 좋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아직은 멀리 못 갔다.

『거기가 아녜요! 정글스 형사!』
『응?』
목소리는 들리는데 사람은 안 보인다. 뒤를 돌아다 봤는데 아무도 없다. 정글스는 당황하여 외쳤다.
『리나 인버스 요원?! 어디 있소?!』
틀렸다! 창문이 아니다. 계단이다! 리나는 현관 밖으로 뛰쳐 나갔다.
『여기 현관 문은 자동 록 도어라고요! 그냥 문을 닫기만 해도 걸리는! 범인은 실내에 있다 우리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놀라 창문으로 급히 빠져나간 것이 아녜요! 당신은 가장 단순한 심리 트릭에 걸려 들었어요!』
올라오는 도중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위?

바로 그때 거짓말처럼 저 위로부터 금속성의「퉁-」하는 짧은 소리가 울렸다.
『거기냐!』
확신이 들자 리나는 죽을 힘을 다해 꼭대기까지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생겨 먹기를 다리가 짧아「한 번에 계단 세 개씩」이라는 재주는 부릴 수 없다. 그러니 남들보다 더욱 부지런히 다리를 접었다 펼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얼굴 빛이 누래졌다. 폐가 압력을 받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아, 그동안 운동 부족이었다.
『빌어먹을. 담배라도 끊던가 해야지, 원.』

옥상!
매뉴얼은 무시했다. 리나는 문을 열기가 무섭게 그대로 뛰어나갔다. 상대방이 총을 쏠지 모른다고? 괜찮다. 그럼 나도 쏘면 된다. 리나는 두손으로 권총을 움켜쥐었다.
『멈추지 않으면 쏘겠다! 서라!』
쥐색의 점퍼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건너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게 눈에 보였다. 총을 사용하겠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뛰는 속도는 변함이 없었다.
혹시, 건너편 건물 옥상으로 뛰어 넘으려는 것? 그 거리가 2미터 남짓이니 아주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다. 거기다 옆 건물의 높이가 아파트보다 낮았다. 고소 공포증을 극복하고 도움닫기만 제대로만 하면 충분히 건너갈 수 있다. 닭처럼 날개짓 하지 않아도 된다.

이대로 그를 달아나게 할 수는 없다.
리나는 조준하고 침착하게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타앙- 타앙-
몇 cm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총알이 비껴갔다. 노란 섬광과 함께 콘크리트 파편이 튀었다.
운동 부족인 것만 아니라 사격 연습도 부족?! 만사가 안 도와주고 있다. 리나는 비탄의 고함을 질렀고, 제로스는 그대로 점프했다.

『제기랄!』
여기서 문제.
돌아서서 계단으로 아래까지 단숨에 뛰어내려가 옆 건물로 무사히 이동한다.
제로스를 따라 반대편 옥상으로 점프한다.
머리를 쥐어뜯어도 답은 하나다.
『이래선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준비 운동으로 바지를 힘껏 잡아 올렸다. 이를 악 다물었다. 그럼 따라 달린다. 아자자자~
다행스러운 거라면 리나에겐 딱히 고소 공포증이라는게 없다는 거였다. 다리가 짧다는 핸디캡은「잘못해서 아래로 추락하여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다」로 극복했다. 그럼 날도록 하자.
『으아아아~!!』
허공에서 두어번 다리를 휘젖고 맞은편으로 무사히 착지, 낙법은 여러번 연습한 적이 없는데도 몸은 제대로 굴러갔다. 바람 빠진 배구공처럼 여러번 구른 뒤, 손바닥으로 몸을 일으켰다. 다친 곳은? 좀 있으면 어때. 리나는 우거지상을 지으며 충격을 받은 옆구리와 무릎의 엄청난 통증을 애써 참았다. 지금은 고통에 겨워 움찔거릴 때가 아니다.
제로스는 이미 철제로 만들어진 비상 계단 쪽으로 다리를 내리고 있었다. 캡이 있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그의 머리가 곧 리나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놓칠 줄 알고!』
생각처럼 몸이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한쪽 다리를 질질 끌어가며 - 아마도 삔 것 같았다. 리나는 제로스가 내려간 비상 계단 쪽으로 따라갔다. 이대로 녀석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거다. 계단으로 내려가기에 앞서 다시 조준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쏜다!』
제로스는 멈추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거나 하지 않았다. 고개를 위로 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동작은 신속하고 주저함이 없었다.

『뭐가 이리 시끄러워?』
바로 그때 런닝 셔츠의 한 사내가 창문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이크크! 하마터면 애꿎은 사람의 머리를 날릴 뻔했다. 리나는 얼른 총구를 내렸다.
『위험하니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요! FBI입니다!』
리나가 든 총을 봤음이다. 놀란 사내가 쾅 소리를 내며 창문을 닫았다.

『젠장, 젠장!』
덕분에 제로스는 2층 아래로 더 내려가 있었다. 리나는 울분에 겨워 하늘 한 번 쳐다보곤 따라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러다간 놓친다. 절대적으로 놓친다. 아무리 그녀가 최선을 다 한다 하여도 그는 도망칠 것이다. 상대는 남자이고 이쪽은 여자다. 헌법은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걸 금지하였지만 신체적 능력에 차이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남자의 키는 여자보다 평균 11.6cm 크다. 여자의 근육은 남자보다 4분의 3 정도 힘이 약하다. 팔과 가슴, 그리고 어깨 근육의 발달도 엄청나게 다르다. 그 결과, 단거리 및 중거리 달리기에서 남자와 여자는 10% 정도의 차이가 나게끔 되어 있다.
뭐, 제로스가 뱃살 늘어진 게으른 중년 아저씨라면야 승부를 걸어볼 수도 있겠다만. 리나는 알았다. 펑퍼짐한 느낌의 큼직한 작업용 점퍼를 입었어도 그는 살이 찐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큰게 아니라 옷이 크다. 데님 바지 위로 드러난 다리 선은 곧고도 탄력 있어 보였다. 그렇다는 건... 어우야다.

비상 계단은 지상에서부터 3미터 부분에서 끝나 있었다. 방범 문제를 고려하여 건물 주인이 계단의 끝 부분을 톱으로 잘라놓은 탓이었다. 만약 어린이였더라면, 아니면 몸이 굼뜬 노인이었다면 대단히 곤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로스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계단 끝 부분에 두 팔로 매달린 다음, 훌쩍 하고 뛰어내렸다. 아래로는 쓰레기를 담은 봉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냄새는 비록 지독했지만 훌륭한 쿠션 역할을 해주었다. 봉투 두 개를 터뜨린 뒤, 제로스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보아하니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오물이 묻은 바지를 툭툭 털고는 - 보고 있던 리나는 그 새침스런 동작에 혀를 내둘렀다 - 여기가 어디라는 건 훤히 꿰고 있다는 식으로 골목길로 쏙 하고 빠져나갔다.

『망할!』
키가 작은 편인 리나에겐 비상 계단 아래로 뛰어내리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높았다! 제로스가 했던 것처럼 계단 끝을 잡고 허공에 매달린 뒤에 아래를 내려다 보니 지면과의 거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발목 하나쯤은 부러뜨릴 각오가 필요했다. 어쩌면 엉덩이 뼈가 나갈 수도 있었다. 리나는 쓰레기 봉투의 위치들을 눈여겨 보고 - 죽으면 죽는 것이다 - 철제 계단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환청처럼 우둑 소리가 들렸다. 발을 분질렀나? 꼴사납게 쓰레기 봉투 사이에 빠져 허우적대며 그 걱정부터 했다.

『아냐, 아냐. 아직까지는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구. 일어나, 리나 인버스!』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린 뒤,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혹시라는게 있다. 어쩌면 골목길 저 반대편을 도둑 고양이에 골머리를 앓은 주민들이 철망으로 막아놓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제로스는 자기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셈이 된다.
『반드시 널 잡아서...』
숨이 턱에 닿았다.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헐떡거리며 아픈 옆구리를 움켜 잡았다.
『반드시...』

골목길이 끝나자 2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좁은 차도로 승용차가 두어 대 지나갔다. 교통량이 많지는 않은 곳이었다. 리나는 가파른 숨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도로 건너편으로 그가 있었다.
『제로...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등을 보이고 서서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달아나지... 않아? 어째서?
뭐야. 나더러 지금 빨리 따라 오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모자를 눌러쓴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남자의 코와 입술 선이 일부 드러났다.
리나는 그의 입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선명하게 보았다.

- 그날 밤 당신은 날 계속해서 따라오지 않았지. 되돌아 뛰어가 그 사내를 안았어요.

빠앙- 하고 경적을 울리면서 그녀의 코 앞으로 승용차가 지나갔다.
눈이 휘둥글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리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도 한 복판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 당신은 계속해서 날 따라왔어야만 했어요. 그런데 그러질 않았죠.

주먹으로 머리를 쥐었다. 리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가우리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고!』

뻥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두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뒤틀린다. 몸이 허공으로 2미터 이상 들여올려져 솟구친다. 그 커다란 몸이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다.

『내가 사랑했던 단 한 명의 남자란 말이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왈칵 하고 눈물이 솟구쳤다.
왜 따라오지 않았느냐고?
너도 봤잖아. 두 눈으로 다 봤잖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두 사람 모두 봤다고.
왜 뒤돌아 뛰어갔느냐고?
도대체 그게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얘기야?!

제로스는 모자를 고쳐썼다. 그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아직 멀었어요, 당신.

리나가 손바닥을 치우고 앞을 쳐다봤을 적엔 이미 건너편으로는 인기척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