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로스가 나오는 부분까지 한시라도 빨리 도달하기 위해 미친듯이 두다다다 한 탓에 내용이 엉망진창입니다. ^^ 문제는 제로스가 예고한 타임 아웃 시간인데요. 중대한 오류가 여기서 발생합니다. 우화화화~ 넘어가요, 넘어가. 아울러 엘로고 스타인 = 엘로고스가 맞습니다. 이미지 깨죠?


여차하면 철야라는게 있다. 닥쳤느냐, 그럼 날밤 샌다.
그러나 다년간에 걸친 반복학습으로 인하여「차라리 잠시 눈 붙인 뒤, 말짱한 정신으로 새롭게 다시!」라는게 훨씬 더 낫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일선 경찰들은 미치도록 피곤한 날엔 휴게실 한편에 쪼그라져 눈치껏 눈을 붙이는게 습관화 되어 있었다. 단 1시간을 자도 능률은 오른다. 근대 영웅 전설편에 의하자면 나폴레옹도 짧은 잠 자기 선수였다고 하지 않더냐. 그러니 장소가 어디든 좋으니까 대충 쓰러져 굴러다니는 신문지로 몸을 감싸는 거다. 억지로 참기만 하면 궁극적으로 조기 과로사 한다.
하물며 황제도 잤다는데야.
핏기 하나 없는 새파란 얼굴로 새우잠을 청하는 경관들더러 월급 도둑이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시라도 욕을 해도 체포하면 그만이다.

- 삐빗, 삐빗

미리 맞춰놓은 핸드폰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까칠한 얼굴로 겨우 눈만 뜬 부르무 오토스는 잠시나마 여기가 어디더라 하고 어리둥절해 했다. 시퍼렇게 불을 밝히고 있는 천장 형광등에, 잘 씻지 않은 짐승 수컷 냄새가 가득한 공간... 간혹가다 F자로 시작되는 욕설이 벽 너머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맞다. 사무실이다. 그렇게 깨달은 순간 상체를 덮고 있었던 양복 상의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어, 내 옷...』
욕심이 과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뻣뻣하게 굳은 관절이 뇌로부터 하달된 노동 명령을 거부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팔을 아래로 내려 옷을 주우려다 말고 부르무는 울상을 지었다. 아프다. 그것도 말도 못하게 아팠다. 얼마나 아팠느냐 하면 체력 검사시 팔굽혀 펴기 100회를 채우고 뻗었을 때의 통증이었다.
이렇게 되면 먼지 투성이가 되어버린 양복 재킷의 안부는 나중이다. 아래로 내린 팔을 도로 가슴 안쪽으로 걷어들였다. 옷을 줍기 이전에 굳어버린 관절에 기름 칠을 하는게 먼저다.

『여어- 꿈틀거리는 걸 보니 정신 차렸군. 깨어났나, 파트너.』
『정...글스?』
『목소리 봐라. 팍 잠겨서 무지 섹시하구먼. 커피 마시겠나. 설탕 잔뜩 넣어서.』
『커피는 둘째야. 허리가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파서 못 일어나겠어.』
『이 친구, 나 모르는 사이에 나이 제법 잡수셨군. 뭔가, 그 꼬락서니가. 기합을 넣어, 기합을. 그리고 벌떡 일어나라고.』

기합이라. 부르무는 머릿속으로 동양의 유명 액션 영화배우 재키 찬(성룡)을 떠올렸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와이어 장치 없이 붕붕 날아다니고, 가벼운 발동작 하나만으로 덤벼드는 악당들을 땅바닥에 깔아버린다. 어쩌다 의자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도 곧바로 주먹을 쥔 채 발딱 일어서서는 그 보복으로 의자보다 부피가 훨씬 큰 책상을 날린다. 그러면서 중국어로 있는 힘껏 기합을 넣으면서...
『《Bullgogi》~!!』
라고 외쳤지, 아마?

정글스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불고기? 생전 처음 들어보는데... 아니, 그걸 떠나 그게 중국어 맞아?
부르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몰라. 어쩌면 일본어일 수도 있겠지.』
『일본어? 재키 찬이 가라데를 했던가.』
『잘 모른다니까, 정글스. 난 비디오든 영화든 그런 건 즐기는 타입이 아니야. 거기다 소름사 - 아니면 소림사던가 - 절 나오는 동양권 영화는 더더욱 안 봐.』
『그렇다면 평범하게 해, 파트너. 하압! 으쌰! 파워 레인저! 뭐 이런 거 많잖는가.』 

핀잔을 들어가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시계는 새벽 5시 반을 좀 넘고 있었다. 손목 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확인한 뒤, 부르무는 파트너가 내어민 종이컵을 선뜻 받아쥐었다. 뜨거운 커피가 들어간 종이컵의 온기 탓에 손바닥이 맵게 따끔거렸다. 아뜨뜨 소리내며 허겁지겁 다른 손으로 컵을 옮겨 쥐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파트너. 맛은 별로야.』
그 건너편에서 정글스가 후루룩 소리를 내며 진한 블랙 커피를 마셨다. 샤워를 끝마치고 옷도 갈아입어 전반적으로 산뜻한 분위기를 내고 있던 그도 표정 만큼은 안 좋았다. 갗 내린 커피라 할지라도 싸구려 티는 벗을 수 없었다. 재정이 빡빡한 서에서는 항상 제일 값이 싼 커피만 골라 용케 가져다 놓았다. 상표 구리고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커피다. 그래서 다수의 경관들은 건너편 도너츠 가게에서 아예 돈 주고 사먹는 편을 선호했다.
그깟 커피, 몇 푼이나 한다고... 맛 없어 환장하신다. 아낄 걸 아껴라. 정글스는 그놈의 커피 포트부터 몽땅 다 갈아치워야 한다며 대놓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걸레 국물 수준은 아니잖아? 정글스.』
부르무는 한쪽 눈썹만 치켜 올렸다. 어쨌거나 정글스 브라운이 내는 후루룩 소리는 제법 맛있게 들리고 있었다. 눈 감고 귀로만 듣자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메리칸 커피다.
『그려? 맛있게 들린다고?』
심술이 발동했나 보다. 씨익 웃더니만 정글스가 내는 후루룩 소리가 곱절로 더 커졌다.
하여간 저 성질머리는... 쯧쯧. 부르무는 손사레를 치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하러 자리를 떠났다. 정신이 번쩍 들게 양치질이나 하자.

새벽 시간대에도 경찰서는 늘 북적거린다. 원래 사건은 대낮보다는 밤에 주로 터지는 법이고, 밤새 폭력 사건을 일으키고 잡혀들어온 인간들과 한바탕 씨름하며 조서 꾸미는 일을 마무리 짓는 시간대도 바로 새벽이다. 상대적으로 쌩쌩한 야간 근무조들은 건들건들 어깨까지 흔들어대며 매서운 속도로 컴퓨터 자판을 두둘겨댔다. 살인적인 초과 근무에 지쳐 떨어진 주간 근무조와는 달리 그들에게 있어 새벽은 작업 능률이 한창 올라가는 시간대인 것이다. 저 눈빛 초롱거리는 거 봐라. 진짜 부럽다.
『여어~ 지미.』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
『좋은 아침. 그나저나 남은 도너츠 있나. 배가 고픈데 대충 씻고 나와서 뭐 좀 삼킬 만한 거 있을까.』
『냉장고 뒤져봐요.』
야간 근무조의 지미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류 작업에 계속해서 몰두했다.
그려? 그럼 수고.

부르무는 마치 유령과도 같은 걸음걸이로 복도를 돌았다. 하품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다리도 무거웠다. 덕분에 구두 뒷굽이 질질 끌렸다.
복도 반대편 의자로 엘로고 스타인이 이교도를 수십 명 참살하고 가까스로 귀환한 십자군 병사처럼 늘어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절반은 자고 절반은 죽어 있는 상태이다. 너무 지쳐서 자기가 잠에 취해 있는 것인지조차 헷갈려 하는 수준으로 보였다. 눈꺼풀이 살짝 벌어져 있는데, 진짜 무섭게도 얼핏 드러난 그 눈에 초점은 없었다.
『가엾게도. 완전히 뻗었군.』
부르무는 질질 끄는 발자국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해서 걸었다. 부근을 지나가자 푸우- 푸- 하는 고른 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리도 아니야 - 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굳은 어깨를 토닥토닥 주물렀다. 그들이 전날 소화해낸 전화 통화량은 각 사람당 무려 3백통이 넘었으니까 말이다. 예전에 엔트리 공립 고교 여고생 실종 사건 때가 평균 150여통이었던 걸 감안하자면 아마도 신기록이었을 거다.

이른바 티저 광고 효과.
이유는 묻지 말고 이 사람이 누구인지만 우리에게 말해줘 - 이러니 그놈의 잘난 호기심에 아무런 연관 없는 사람들까지 전화통으로 손을 가져가게끔 되어 있었다. 제약된 정보가 아이러니컬하게 정보의 과다 피드백 현상을 불러 일으킨다고나 할까. 쓸데없는 정보들이 정리정돈 없이 일시에 한 곳으로 집중되어 버리는 거다. 그 결과 모호한 사실들이 저마다 한데 뒤엉켜 맥주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는다. 나중엔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판단조차 서지 않는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달에 착륙했던가? 아님 로큰롤 가수였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양쪽 다인가.
순간 부르무는 짜증이 치솟은 나머지 곤히 잠에 빠져든 엘로고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그런데 말이다.
충동에 못이겨 엘로고를 막 흔들기 바로 직전,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부르무는 제 자리에 따악 멈추어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 친구는 그 많고 많은 자리 중에서 하필이면 복도 의자를「침소」로 사용한 걸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복도라는 곳은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그만큼 시끄럽고, 그만큼 분위기가 안정적이지 않다. 아무리 잠시 눈만 붙이는 새우잠이라고 해도 휴식을 취하기에는 최악의 장소라 할 수 있다. 저렇게 누워있다가 마약에 찌든 한 미치광이가 겁 없이 난동을 부리는 날엔 그야말로 끝장 아니겠는가. 지나가던 누군가가 발로 걷어차는 날엔 고스란히 피멍이다. 완전히 바보 짓이다. 자신이라면 보다 아늑하고, 보다 조용하고, 보다 편안한 장소를 고르고 본다. 예를 들자면 비어 있는 취조실 같은...

『아, 선객이 있었구나.』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적에 부르무는 빈 취조실 의자에 사람이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필름막 처리가 된 유리창 너머로 선명하게 키 작은 여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취조 중에 경관들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았다고 고소하는 피의자가 얄름얄름 늘면서 시카고 당국은 골머리를 앓다 못해 그 예방 차원으로 취조실에 아예 커다란 유리 구멍을 뚫어놓았다. 외부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방안에서 누가 때리고 누가 맞을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덕분에 취조실은 예의 감옥 비슷한 분위기에서 산뜻한 찻집 분위기로 업그레이드 된 상태였다. 담배를 피우면서 음료수를 홀짝거리는 취조관 - 그리고 그 건너편으로 자리한 용의자의 모습은 웃기게도 안락해 보이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너무나 편안해서 긴장감은 제로로 곤두박질치고, 우스개 소리와 잡담, 그리고 범인의 자백이 모호하게 융합되어 버리는... 시카고 당국이 바로 그 점을 노렸다면 그야말로 100% 효과 만점이었다.
깔깔 웃어대며「용케 알아냈네~ 맞아, 내가 죽였어」이러는 거다. 그러면 취조관도 덩달아 웃어가며「국선 변호사 필요하지?」맞장구 친다. 너도 나도 하하하. 분위기 베리 굳.

필름막으로 처리된 유리창 앞으로 슬그머니 가서 섰다. 처음 생각과는 달리 리나 인버스 요원은 의자에 기대어 졸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멍한 얼굴로 왼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설마하니 혹시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온 건가. 부르무 오토스는 바짝 긴장해서 한층 더 벽에 가까이 달라붙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끔 몸을 사렸다.
그러다 퍼득 깨달았다. 거꾸로다. 그녀가 폴더로 귀를 가까이 가져간 채 신호음을 기다리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전화가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걸고 있었다.
내가 졸려서 드디어 머리가 마비되었구나. 부르무는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져서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 뚜루루루, 뚜루루루

그렇게 수 차례의 대기음이 울린 뒤, 마침내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방이 마침내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허겁지겁 핸드폰을 왼쪽에서 오른쪽 귀로 옮겼다. 짐작도 못했는데 상대방이 전화를 받아 매우 놀란 듯한 눈치다. 자기가 걸어놓고 참 잘 하는 짓이다.
『여, 여보세요?』
《네. 누구시죠.》
미스 FBI는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저어... 가우리 가브리에프씨 핸드폰... 이죠?』
《누구요? 아녜요. 잘못 걸으셨습니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훔쳐 보고 - 듣고 있던 부르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영문을 모르겠다. 어쨌든 침착함을 잃어버리고 감정이 격앙되어 목소리까지 갈라졌다. 그녀가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알고 있다. 저건 울음을 참기 위한 동작이다. 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매번 저런 식으로 눈가를 손으로 눌러대곤 한다. 여기서 누군가 손수건만 들이대면 그 즉시 화산 폭발 = 오열하며 통곡한다.

『미,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럼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나, 나는... 이런.』
《여보세요? 당신, 괜찮아요?》
수화기 저편의 사람도 이쪽의 감정이 영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것 같았다.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는 여자, 그리고 남자의 이름을 찾는 여자.
선한 사마리아인은 측은함을 교묘하게 감춘 채 최대한 밝게 말을 이었다.
《아, 혹시 그건가. 제가 최근에 번호를 바꿨거든요. 아무래도 예전 번호로 잘못 걸으신 것 같습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번호를 확인한 뒤에 다시 걸어보시지 그래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어, 어쨌거나 친절하게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별 거 아닙니다. 그럼.》

죽을 힘을 다하여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칼 바람에 꽃 봉오리 잘려나가듯 고개를 떨궜다.
미쳤어. 정말 미쳤어. 그가 받을 리가 없잖아. 무얼 기대한 거야.
모든게 다 변해버린다구. 나만 빼고 모든게 다 변해가...
어제까지 결번이던 전화번호도 이젠 다른 사람이 쓰고 있잖아.
순간 짠맛 섞인 맑은 액체가 눈가에 방울방울 맺혀 아래로 흘러내렸다.

『...』
부르무는 세면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사무실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발바닥 아파 죽는다는 정글스를 살살 구슬려 다시 커피 한 잔을 얻어냈다. 누군가가 냉장고에 고이 모셔둔 도너츠도 두 개 꺼냈다. 이어 예의 무표정의 얼굴로 취조실의 문을 노크했다.
FBI 선생은 먹거리를 들고 나타난 부르무의 존재에 깜짝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부르무를 보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치 10대 불량 청소년이 몰래 대마초를 피우다 걸렸다는 식이어서 되려 이쪽이 무안해질 지경이었다.
『왜 놀라는 거요. 내 배가 고프니 당신 배도 고플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오. 그냥 의자에 계속해서 앉아 있으시오. 일어날 필요 없소. 난 나갈 거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퉁명스럽게 말한 뒤, 부르무는 그제서야 세수를 하러 떠났다.

파일 속의 내용이 하나 생각났다.
제로스의 10번째 살인 예고 대상이었던 에리스 리건은 무척이나 운 좋은 케이스였다. 록 그룹「적법사」의 열렬한 팬이었던 에리스는 오른쪽 목덜미에 깨어진 두 개의 빨간 하트와 「LOVE ♡ 레죠님」이라는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이 두 가지가 훌륭한 단서가 되어 타임 아웃 7분 전에 경찰은 그녀를 찾아냈다. 에리스 리건은 제로스가 일으킨 다수의 연쇄 살인사건 중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두 명 중 하나였다.
제로스는 그녀의 아파트에까지 침입, 에리스의 눈을 가린 뒤에 밧줄로 꽁꽁 묶어놓고 천장에 무슨 대롱벌레짝처럼 매달아 놓았지만 살인 예고 시간 전에 들이닥친 경찰들을 존중하여 그녀를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2층에서 쓰레기통 밑으로 뛰어내려 왔던 길로 되돌아 신나게 달아났다.

즉시 검거에 나섰으나 체포에는 실패.
여기까지만 보자면 절반은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무고한 시민을 안전하게 보호했으니까.

그런데 당시 사건 담당관이었던 리나 인버스는 이 일 이후 제로스 사건에서 완전히 손을 놓아버린다. 위험에 처한 시민을 성공적으로 구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스스로에게 강등 처분을 내리듯 은퇴를 선언했다.

부르무 오토스는 가만히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분명히... 죽은 사람이 하나 있었지?』
범인을 추적하던 중, 신출내기 경관 한 명이 사고를 당했다. 앞 뒤 가리지 않고 뛰어가다 맞은편에 달려오던 승용차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혀버린 것이다.
현장으로부터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1시간여 뒤 사망.
우리의 FBI 선생은 그의 임종을 지켰던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 불운했던 젊은 경관의 이름은 분명히 가우리 가브리에프였다.

『설마... 저 여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뭐, 책임감을 느끼는 모습 치고는 지나치게 감정적이긴 하다만.
어깨를 으쓱이고는 개수대의 물을 세차게 틀었다. 알게 뭐람. 그다지 알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푸파푸파 소리를 내며 세수를 시작했다. 비누를 꺼내 거품을 냈다. 뜨거운 김이 닿아 거울이 흐려졌다. 일부러 까닭을 캐물을 만큼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지대한 그도 아니고... 밤새 자란 털을 면도기로 밀었다. 탁탁- 하고 아주 가끔씩 면도기를 세면대에 털었다.
거울 속의 그는 매우 피곤해 하는 얼굴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던 부르무는 물기 묻은 손바닥을 들어 김 서린 세면대의 거울을 북북 닦았다.
뭐, 묻어두자.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이야기라는 건 하나씩은 있는 법이 아니더냐.

『오전 10시가 되면 사진 현상소란 현상소는 모두 체크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월요일 오전 교감 선생님의 훈시다. 일동 차렷.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글스는 바로 코앞에서 턱받침을 하고 앉아「어디서 개가 짖고 있으십니다?」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전직 FBI 여사님이 재수 원단이었다면 이쪽 지라스 레던폭스 요원은「더럽게」재수 원단으로, 반드시「더럽게」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했다.
넌더리가 날 지경이다. 어쩜 저렇게 남들 다 아는 이야기를 마치 새로운 교황 성하께서 선출되었다는 식으로 거창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불편한 듯 다리를 꼬았다. 그쪽에서 일부러 말 안 해도 현상소 주소 리스트는 가게 문 열리자마자 체크에 들어간다.
『전단지를 뿌려 시민들의 협조를 구하고...』
어제부터 하고 있었다, 임마.
『방송을 보고 제보 전화가 걸려 오면 즉각 확인 절차에 들어가 주시오.』
그럼 나중에 껌 씹어가며 느긋하게 확인하리? 당연히 즉시 달려간다.
『이거다 싶으면 상황 본부로 알리고.』
저 혼자 정보를 독식하는 건 FBI나 하는 짓이지. 일선 경찰들은 그런 짓 안 해.
『해산.』
오냐, 간다. 시간만 낭비했다, 이 얼간아.

다만 한가지 의아스러웠던 것은 그의 콧대 높으신 여왕님(?)께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얌전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는 거였다. 물론 그녀는 지라스 요원이 나타남과 동시에 지휘권을 그쪽에다 넘길 거라고 사전에 선언한 바 있다. 어디까지나 옵저버로서, 라고...
하지만 그게 가능하긴 하냐구. 정글스의 눈매가 찌그러졌다. 말이야 그렇게 했다지만 지휘권의 이동이라는 건 문자 그대로 단순한 건 아니다. 인간이라는 건 애시당초 권력지향적인 동물인데다 자기중심적 사고뭉치다. 마음을 빈 수레로 만든 성직자면 또 모를까, 오늘부턴 내가 아닌 당신이 왕이오 하면서 손 털고 나가는 사람은 흔치 않다. 게다가 그 성직자가 왕위를 쉬이 사양했다 해도 다음으로는 이양 절차라는게 또 남아 있다.
그런데 그걸 하루 아침에 몽땅 다 뒤집어 엎었어? 결코 자연스럽지가 않다.

정글스는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지분거렸다.
『리나 인버스 요원.』
『왜요, 정글스 형사.』
『오늘은 나더러「댁이 운전해요」라고 명령하지는 않을 거요?』
요컨대 살금 부딪치면서 그 속 사정이라는 놈을 떠보도록 하자.

속 보인다며 리나가 눈을 부릅떴다. 눈만 부릅떴던가, 팔짱도 꼈다.
『명령이라뇨. 그건 부탁이였어요.』
『결과적으론 내가 핸들을 잡았잖소. 그러니까 그게 그거지.』
『하여간 그 입버릇은... 알았어요, 그게 그렇게까지 억울했다면 이번엔 내가 운전하지요.』
『어라. 오늘도 현장에서 발로 뛸 건가요. 당신은 상황 본부를 지켜야 하는 거 아니오?』
『본부는 지라스 요원이 지키고 있잖아요.』
리나는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되려 반문했다. 그리고는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걸음걸이는 당당하다라기 보다는 다소 불안해 보였는데 정글스는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까닭은 간단했다. 미치도록 쑤시고 아픈 것이다. 복사뼈고 뭐고 죄다 가루가 되어 소복히 주저앉았는데 워케 똑바로 걷누.
그녀를 따라 잡으려 발걸음을 빨리 하면서 - 마음만 앞서 슬프게도 포즈는 고릴라였다. 그 또한 다리가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 정글스는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말이오. 이건 내 파트너씨의 주장인데 시간이 슬슬 촉박해지고 있으니 방송에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리는 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제인 도우 양이 살인범에게 쫓기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더 자세히 봐줄 것 같다는 거죠.』
『검토 중입니다. 나는 이미 그게 좋겠다고 건의했고, 판단은 지라스 요원이 내릴 겁니다.』
에구야- 그 친구는 솔직히 못 믿겠는데. 정글스는 불평했다.
『얼굴 펴요. 그쪽은 그쪽이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리나 인버스는 별안간 몸을 빙글 돌려 세웠다.

까딱하면 충돌할 뻔 했다. 정글스는 갑작스런 장애물 출현에 기겁하고 펄쩍 뛰었다.

『여기서 제가 제안할 건 한 가지. 사진 현상소를 탐문하면서 주변에 핑크색 네온 싸인이 있는지 없는지를 일차적으로 체크하라고 해요. 기억 나지요? 사진 속의 핑크색 얼룩.』
『기억이야 하오만, 사진 속 장소가 현상소일 거라고는 장담 못 하잖소.』
『손님이 많지 않다, 남녀가 모두 이용하는 가게이다... 사진 현상소도 그 중 하나예요.』
『듣고 보니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정글스는 즉시 핸드폰 폴더를 열어 어딘가로 전화했다.
플라멩고 빛깔의 네온 싸인을 추적할 것.
상대방의 짤퉁한 Yes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그럼 이제부턴 어쩌지요? 인버스 요원.』
『어쩌긴요. 어제보다 두 배로 바쁘게 뛰어야지요. 이제 9시간밖엔 안 남았어요.』
리나는 단순하게 대답하곤 승용차의 보조석 자리로 기어 들어갔다.
사람들에게 나눠줄 전단지는 이미 뒤쪽 좌석에 한 트럭 실려 있었다.

오전 11시 정각.
전단지를 추가로 3,000장 복사하여 길거리에 뿌렸다.

오후 1시 19분.
점심을 먹고 회사로 급히 들어가던 직장인 하나가 받아쥔 전단지를 그냥 바닥에 버렸다.
보고 있던 리나 인버스가 귀신같이 달려들어 가엾은 사내를 위협했다.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총살 감이다. 우리의 FBI 여왕은 하여 죄에 젖은 시민을 죽어라 쏘아보았다.
『이 전단지를 똑바로 봐요. 본 적 있어요, 아님 없어요.』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시나. 난 모르는 일이오! 왜, 왜 이래요?』
『한번 더 봐요,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난 모른다니까아~!!』
『그렇게 대충 보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 거예요. 자! 잘 봐요!』
무려 5분을 붙잡고 으르렁댔다.
남자는 전단지를 회사 사람들에게도 모두 보여주겠노라 약속을 한 뒤에야 겨우 풀려났다. 풀려나면서 회사원은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

3시 7분.
순찰하던 경관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은 엘로고 스타인이 손을 번쩍 들고 보이지 않는 밧줄을 빙빙 돌리는 시늉을 했다. 야구장에서 흥분한 감독들이 2루에 나간 주자를 향해「멈추지 말고 홈으로 뛰어!」라고 신호할 적에 하는 동작 바로 그거였다.
일시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모두가 숨 죽이고 엘로고를 쳐다봤다. 근방에서 제보 전화를 받고 있던 부르무는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내던지고 - 상대방이 당황하여 여보세요를 외쳤으나 무시되었다 - 그런 그 옆으로 바짝 다가가 섰다. 손에는 메모지와 연필이 들려 있었다.
『알았어. 분명 그렇게 말했다는 거지? 일주일 전까지 햄버거 가게에서 일 하는 거 봤다고? 이름이 뭐래. 마르티나 조아멜? 사진은 보여줬나. 맞다고 했어? 좋아! 주소 불러. 골드 커스트 30번지. 알았네, 당장 사람 보낼테니 그 제보자더러 어디 가지 말고 있으라고 그래.』
바로 이거야! 다시금 왁자지껄 모두가 떠들기 시작한 가운데 부르무는 미친 듯이 정글스의 핸드폰 번호를 눌러댔다.

오후 3시 50분.
골드 코스트 거리로 한 걸음에 달려온 리나와 정글스가 음식점 매니저를 불러냈다. 매니저는 무척이나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바쁜 시간대가 아니라도 여전히 할 일은 많았다. 그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 리나 일행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건 정글스도 마찬가지였다. 매니저 한 번 쳐다보고, 시계 한 번 쳐다보고. 피차 시간은 금이었다.

리나는 짤막하게 인사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이 사람 맞습니까.』
매니저는 리나가 내어민 사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티나 조아멜. 옛날에 하고 있던 머리띠를 아직도 하고 있군요. 이곳에서 약 7개월가량 아르바이트를 했었죠. 성격은 싹싹하고 움직임도 재빨라서 적응이 빨랐지만... 성격이 뭐랄까, 싫은 소리를 하는 손님이 있으면 그 매출 전표를 인형에 붙여놓고는 바늘로 꾹꾹 찔러대곤 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사탄의 인형, 고스트 바스터즈, 엑소시스트, 블레어 위치.』
『블레어 위치...』
『네. 저주 받아라~ 하는 부두교의 주술 같은 거요. 참을성이 없는 편이었어요. 손님들이 엉덩이 만지는 날엔 접시가 날아갔으니까. 결국 그게 원인이 되어 사장님과 한 판 붙고는 여기를 그만 두었죠.』
『연락처는 있습니까.』
『아까 경관님에게 미리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우린 아르바이트 직원들의 주소지를 메모해두지 않아요. 연락처만 가지고 있죠. 거기다 이 번호가 맞는다고도 장담 못해요.』

정글스가 옆에서 드러내놓고 으르릉댔다.
『뭐요. 여기선 불법 이민자만 고용합니까? 뭐가 이리 엉성하슈.』
매니저는 질세라 노려봤다.
『여기서 한 달에 몇 명이나 일을 그만두는지 당신은 몰라서 그래요.』
그리고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 하나를 내어밀었다. 이어 썩 꺼지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4시 49분.
『미치도록 운이 영 안 따라주는군. 여자 하나 찾아내는게 뭐 이리 힘드냐.』
정글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집 주소는 아직 모르고, 어렵게 알아낸 전화번호는 결번이다. 젠장! 하고 욕하고는 상황실로 다시 연락을 취해봤다.
『이름으로 주소 검색해 봐. 마르티나 조아멜. 골드 커스트 30번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거야. 제기랄. 이 여자가 과속 딱지라도 끊은 적이 있으면 이 고생 안 하는 건데... 너무 착실하게 살아도 큰 문제로군.』

그 반대편에서는 리나 인버스가 다른 사람과 한창 전화 통화 중이었다.
『그쪽 현상소 주소 리스트 검토는 어떻게 되어가지요?』
《분홍색 네온 싸인이라고 했지요? 아쉽지만 플라멩고 색은 아직까진 건진 거 없습... 잠깐만요, 요원? 끊지 말고 기다리세요.》
뭔가 부산하게 음직이는 잡음이 들려왔다. 상대방의 응답을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리나는 거칠어진 머리카락을 뚝뚝 잡아 끊었다.
1분 정도 지나고 상대방이 다시 돌아왔다. 말투가 아까와 달리 빨라져 있었다.
《막 노스트 웨스턴 스테이션 근방으로 하나 찾았다는 연락입니다. 대로변이 아니라 약간 그 안쪽이라고 하는군요. 분홍색으로 PHOTO라고 번쩍거린답니다. 문제는 지금 주인장이 출타 중이라서 안으로 들어가볼 수가 없다는군요.》
『뭐예요?! 사람이 없어?!』
《옆 가게에 물어봤는데 아침엔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밥을 먹으러 나간 건지, 아니면 다른 일이 있어 자리를 뜬 건지는 아직 모르고요. 주인은 40대의 남성입니다.》
『좋아요. 그럼 그 가게에 고용된 여직원이 있는지를 한 번 물어봐줘요.』
《에... 잠깐만요... 있다네요. 여직원 하나. 그런데 오늘은 이 여직원이 자리에 없다는군요. 자세한 건 아직 모릅니다. 역시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려야 하겠는데요.》
『알았어요. 그럼 그 가게 주인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를 빨리 찾아봐줘요. 직접 가보겠습니다. 노스트 웨스턴 스테이션 부근이라고 했죠?』

느낌이 딱 꽃혔다. 이거다 싶었다. 리나는 이미 정글스의 차속에 들어가 안전밸트를 매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전화 통화 중이던 정글스가 짤막하게 소리지르며 허겁지겁 뛰어왔다.
이어 그의 잔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어쨌건 이건 내 차요, 내 차!』
『입 닥치고 운전이나 해요.』
『으이그!』

오후 5시 31분.
방향을 잘못 틀어 길거리에서 10분을 허비했다.
교통 위반 딱지를 두어 개 확실하게 끊고 불법 유턴, 문제의 사진 현상소로 쳐들어갔다.
사진 가방을 정리하다 말고 죠르프는 기절하려 했다. 가엾은 사장님은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두 사람의 기백에 놀라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돈은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으니까 제발 총은 쏘지 말아요!』
정글스와 리나는 동시에 신분증을 제시했다.
『빨리 말씀을 해주셔야겠습니다. 마르티나 조아멜이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까?』
『마르티나?』
『그녀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급히 필요합니다.』
『뭡니까. 영문이나 좀 압시다. 그 아이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거요?』
역시 이곳이군. 리나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보니 정면으로 풍경 사진도 걸려져 있다. 리나는 턱짓으로 사진을 가리켰다. 정글스는 자기에게도 두 눈이 달려있다며 대놓고 짜증을 부렸다.
『이봐요, 주인장. 댁은 TV도 보지 않소?』
『그 무슨 섭섭한 소리! 난 시카고 화이트삭스 팬이라오!』
제기랄. 야구만 보지 말고 뉴스도 보란 말이다! 정글스는 사내를 발로 걷어차고픈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가며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쾅 내리쳤다.
『이젠 끝내자구. 주소! 전화 번호!』
죠르프는 머뭇거렸다. 그래도 귓동냥으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살살 눈치를 살피면서 모기 기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영장... 필요한 거 아니오?』
『우라질! 차라리 그냥 다 죽으라고 할까?』

5시 37분.
달려오는 차들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곡예 운전 중인 정글스는 핸들 조작에 집중하게끔 내버려두자. 리나는 상황실로 전화를 다시 걸었다.
『순찰 중인 대원을 모두 이리 불러요!』
타임 아웃까지 앞으로 11분.
입술을 지긋 깨물었다. 이래선 안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정글스가 잔소리했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으로 고정된 채였다.
『시계 같은 건 보지 마요, 요원. 재수 없어 지니까.』
『앞으로 9분 20초 남았어요.』
『시계 치우라니까요!』
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얘기다. 그녀는 더 두고 볼 것 없다며 시계를 끌러 차창 밖으로 냅다 던져버렸다. 와그작 소리와 함께 타이어에 밟혀 그 비싼 시계가 한순간에 콩가루가 되었다.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그걸 쳐다보지 않을 자신은 없었어요.』
이 속도에선 고개를 옆으로 돌릴 순 없다. 핸들을 잡은 손이 살짝 삐긋하는 순간 빠앙- 하고 옆 차선에서 승용차 하나가 옆구리를 바짝 스치고 지나갔다. 일순간의 실수는 곧장 죽음으로 직결된다. 카 레이서도 아닌데 이게 뭐람. 입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정글스는 질렸다는 투로 말했다.
『당신 참 독한 사람이구려.』
『운전이나 해요.』

아침엔 정상 출근을 했단다. 그런데 점심 무렵에 아파트 관리인이 무척이나 화가 난 목소리로 난리를 치면서 직장으로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그 아래층으로 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나. 실수로 욕조 수도꼭지를 잠구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 아파트 관리인의 주장이었다. 마르티나 조아멜은 사장인 죠르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조퇴했다.

『그건 아마 그녀의 실수가 아니었을 거예요. 녀석이오. 제로스 녀석이 물을 틀은 거지.』
『상상은 하지 말아요, 정글스 형사. 그거야말로 불길함을 끌어당기는 거니까.』
『난들 그러고 싶어 그러겠소? 머리 속으로 그림이 그냥 그려지니까 이러는 거지!』
바로 그 순간, 또 핸들 잡은 손을 삐긋했다. 빠앙- 하고 옆 차량이 경적을 울려댔다. 자기가 실수해놓고 정글스는 악 소리 질렀다. 덩달아 놀란 리나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손잡이를 잡았다.

조심해가며 화장실 창문을 연다. 물론 그리로 사람이 들어갈 순 없다. 오로지 환기만을 위한 창문이니까. 그러나 기다란 막대는 충분히 들이밀 수 있다. 막대를 넣고 그걸로 수도꼭지를 툭툭 민다. 아주 조심해서 살짝... 낡은 아파트의 시설은 그리 튼튼하지 않다. 약간의 자극에도 수도꼭지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드디어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때 물이 세게 틀어지는 일 없도록 주의한다. 그저 아래로 흘러넘친 물로 카펫트가 촉촉이 젖게끔만 만드는 거다.
『신경질적인 아파트 관리인이 빨리 어떻게 좀 해달라며 마르티나 조아멜에게 전화를 거는 겁니다. 이 문제를 당장 해결해주지 않으면 이번 달 말엔 여기서 나가줘야 할 거라고 딱 한 마디만 하면 누구든지 한 걸음에 달려오게 되죠. 안 그렇소?』
마르티나는 긴 한숨과 함께 가게를 빠져나온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터넷으로 부두교의 인형을 하나 주문하도록 하자. 그리고 [아파트 관리인] 이라 적은 쪽지를 인형에 부착하자. 다음으로는 심심할 적마다 바늘로 콕콕콕...
집에 도착해보니 바닥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다. 그녀는 젖은 카페트를 힘겹게 걷어 구석에 세워놓고, 전화기를 들어 배관공을 부른다.
- 우리집 욕조가 아무래도 망가진 거 같아요.
혼자 사는 여자의 몸으로는 이런 일은 박차다. 후우- 하고 숨을 내뱉고 그대로 의자에 주저 앉는다. 배관공은 언제나 오려나.

『간단해요. 이때 시치미 뚝 잡아떼고 벨을 누르는 거죠.「배관공입니다, 부르셨지요-」하고 말이오. 그럼 마르티나는 별 의심 없이 문을 열어줄 것이고, 제로스 녀석은 첼라나 몽키 같은 연장이 아닌 밧줄과 수갑을 꺼내 자기만의 작업에 들어가는 겁니다. 진짜 배관공은 그럼 어떻게 하느냐고요? 더 간단해요. 전화기를 들고 리다이얼 버튼만 누르면 끝이니까.「미안하지만 안 오셔도 되겠습니다. 취소할게요.」이 말 한 마디면 그녀의 집은 완벽한 밀실로 변신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소? 요원. 저기... 요원?』

정글스 자신이 생각해도 끝내주는 가설이었다만.
이 일을 워쩐다야. 리나는 처음부터 그의 말을 안 듣고 있었다.
대신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마르티나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 뚜루루루, 뚜루루루

10번 이상 대기음이 울렸다.
『받질 않아.』
리나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 뚜루루루, 뚜루루루

통화를 마악 포기하려던 찰나.
기적처럼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마르티나 조아멜 양? FBI입니다. 여보세요? 마르티나 양?』
저편으로부터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다쳐서 쓰러진 건가. 리나는 귀를 바짝 세웠다. 쉬지 않고 말하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마르티나 조아멜 양? 지금은 길게 설명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당신은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은 장난 전화가 아니오니 어서 집 밖으로...』

그때 저편에서 부드러운 어조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나? 이제야 전화를 주면 어떻게 해요. 늦었잖아요.》

순간 리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