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검색해보니 2000년 영화더군요. 기억은 이미 가물거리고, 내용이 뭐였더라 이런 수준에 이르고 있지만 가뿐하게 무시. 유일한 자료라고는 모나리오 사이트에서 내려받은 자막이 전부입니다. 음핫핫...;;
스틸 컷을 보니 키아누 리브스, 당시엔 살이 제법 쪄서 오히려 오늘날보다 나이가 많아 보입디다. 구세사 네오 역할을 하면서 다이어트를 했던 거였군요.
어쨌거나 두다다다 제 2탄. 내키는대로 Go.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슬레이어즈 식이 아닌 건 어디까지나 내 탓이 아님.

아침에 비가 한차례 내리면서 칼날 같은 바람이 불었다. 일기예보에서 말하는 오늘의 날씨는 최저 기온 9도, 최고 기온 영상 19도. 그런데 체감온도는 그보다 5도쯤 낮아 마르티나 조아멜은 가게 안에서도 핑크색의 짧은 쉐터를 걸쳐야 했다. 덕분에 거리는 늦은 오후에 접어들었어도 제법 한산한 편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매운 겨자소스 핫도그를 팔던 더그씨가 장사가 안된다며 얼굴을 찡그리는게 보였다. 점성술사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칙칙한 회색의 별이 붙은 날이라 할 수 있었다.

『무지 조용하네...』
조아멜은 멍하니 쇼 윈도우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천지개벽하는 듯한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서 주방 일을 했었더랬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주방에서 격렬한 칼질로 감자를 암살하고 있노라면「왜 이렇게 주문한 음식이 늦어~!」라고 이 시대의 장군님께서 노성을 질러대곤 했다. 기절하기 일보 직전에서 냄비를 씻고, 접시를 깨고... 그 수라장 속에서 조아멜은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곤 하였다.
가볍게 기침하며 여러 기계적 도구가 전시된 선반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음에 익숙해져 있는 탓에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공간은 숨 막혔다. 그녀는 깨달았다. 소음도 무섭지만 조용한 것 역시 그 이상으로 무섭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남의 핸드백을 응시하는 건달의 시선을 깨달았을 적의 기분이었다. 얼른 구석진 선반 모퉁이에 놓여져 있던 휴대용 스테레오 라디오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치익- 하는 약간의 잡음이 사라지고 곧바로 귀 째지는 컨트리풍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와. 엄청난 촌닭의 소리!
펄쩍 뛰며 라디오의 조절 스위치를 힘주어 돌려버렸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침묵이 낫겠다. 구수하다못해 궁둥내 나는 음악이라니. 하여간 이곳 사진관 주인 죠르프의 음악 취향은 알아줘야만 했다. 조아멜의 귀에는 달빛 아래서 당나귀가 목놓아 우는 듯한 절묘한 꺽기일 뿐인데도 죠르프는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예술이라 주장했으니까 말이다.
- 예술이지! 이거야말로 미국인의, 미국인에 의한, 미국인을 위한 것이다!
2:5 가르마의 죠르프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열변을 토하던 걸 생각해낸 마르티나 조아멜은 킥 소리를 내어 웃어버렸다.
『맙소사, 음악 취향만 아니라면 참 좋은 분인데 말이야.』

게으름은 천성에 맞지 않는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유리창 세제와 마른걸레를 찾아 들었다. 플라스틱 판넬과 유리 진열장은 더할나위없이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닦고 보자. 종업원이 손님 없다고 무작정 졸기만 해서야 쓰나. 월급 도둑년이라는 오명을 받지 않으려면 그에 합당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조아멜은 기분 좋게 진열대 위로 세제액을 뿌렸고, 이어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손걸레질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 짤랑.

정신이 번쩍 든다. 조아멜은 후다닥 걸레를 치웠다.
『안녕하세요.』
손님이다~! 손님~ 이야, 이게 얼마 만이냐.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검정색의 가죽 재킷을 걸친 손님이 지나치게 반색하는 그녀의 태도에 주저했다.
『음. 저... 그게, 그러니까...』
『네, 우리 가게에선 사진을 1시간 내에 현상해가실 수 있어요.』

자동 카메라를 들고 와서 우물거리는 사람이 원하는 거야 거기서 거기다. 조아멜은 진열대 뒤에서 걸어나와 가게 주인 죠르프가 벽면에 붙여놓은 가격 안내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안내문에는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여성의 사진이 각각의 크기 별로 부착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장당 얼마라는 식의 메모가 붙여져 사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한 눈에 필요한 정보를 알아보기가 쉬웠다.
「고마워요, 죠르프 아저씨.」
솔직히 말해「사진을 잘 모르는 사람」편에 속하는 조아멜은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인 그녀가 당황하지 않고 손님에게 정확한 안내를 해줄 수 있었던 건 모두 죠르프의 꼼꼼한 성격과 보이지 않은 노력 탓이었다.
조아멜은 어딘지 모르게 안경점에서의「시력 검사표」뉘앙스를 풍기는 안내판을 위 아래 방향으로 가리켰다. 큰 사이즈? 아님 작은 사이즈? 그러면 손님은 1미터 저편에서 고개만 끄덕이면 되었다.

『저어. 손님?』
그런데 정작 손님은 죠르프의 인생 역작이나 마찬가지인 안내판에 그리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차분한 자세로 - 마치 최고급 와인을 구경하듯 걸음을 옮겨 여러 가지 자동 카메라가 전시된 유리 진열장으로 시선을 주었다.
조아멜은 조금이나마 당황했다. 잘못 찔렀나. 그가 원하는 건 사진 현상이 아니었던 걸까.

마르티나 조아멜의 표정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남자가 기분 좋게 웃었다.
『아뇨, 아뇨. 여기에 좋아 보이는 사진기가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구경을 해도 괜찮죠?』
미소가 아름다운 젊은 남자였다. 조아멜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따라 웃었다.
『물론이죠!』
사진만 주문받은게 아니라 아예 카메라를 팔았다고 하면 죠르프가 무척 기뻐할 거다. 이거 신난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마구 주워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요즘엔 카메라들이 엄청 좋아졌어요. 이 크기들을 봐요. 깜찍하죠? 그뿐만이 아녜요. 하나같이 기능도 뛰어나요. 이쪽의 제품을 보여드릴까요? 여섯배 줌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선명하게 찍을 수 있죠. 무게도 가벼워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딱이랍니다. 다음으로는 그저 치즈- 라고만 외치기만 하면 되어요.』
『흐응...』
이렇다 할 대꾸 없이 남자가 살포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최근에는 디지털 카메라로 눈을 돌리는 분도 많아요. 필름이 필요 없으니까 그편이 훨씬 편하다고 하더군요. 가격도 많이 내려갔고요, 조작 기능도 생각보다 그리 어렵진 않아요. 여기요. 카다로그를 드릴게요. 이걸 보면 마음에 드시는 걸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잠깐, 잠깐. 난 그렇게 사진을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건 아니예요.』
『불안해 하실 거 하나 없어요, 손님. 여기에 실린 것들은 전문가용이 아니예요.』
『그치만 나에겐 무척 어려워 보이는걸요. 모양도 번쩍번쩍하고... 이걸 봐요, 무얼 눌러야할지 짐작도 안 가요. 조작 기능에 대한 설명만 한 페이지가 넘어가네요. 무리예요, 무리.』
남자는 피식- 하고 손사레를 치며 웃었다.
조아멜은 그런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런 남자와 데이트를 하면 기분이 어떨까? 점잖고 매력적이다.

『이해해요. 사실 저도 고백하자면 카메라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그치만 당신은 카메라를 판매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늘 혼나죠. 사장님에게.』
『저런, 그렇다면 이 필름에 대한 걸 당신에게 물어봐도 소용이 없다는 건가요.』
가죽 재킷의 남자는 필름 판매대 한 편을 손가락질하며 희극적인 표정을 지었다. 미키 마우스가 허드슨 강에서 멱을 감다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식이었다.
『외광용 필름이라 적혀져 있군요. 이걸 형광등 아래서 사용해도 되는지 알고 싶었는데.』
살려주세요. 조아멜은 장난스레 두 손을 모으고 비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전 심부름만 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엔 꽝이랍니다.』
『전문적 지식이라... 하하하. 그래도 저보다는 괜찮으실 거예요. 전 부끄럽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자동 카메라에서 필름을 어떻게 빼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도와주시겠어요? 난 이게 고장이 난 건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해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정말로 곤란하다며 가지고 있던 자동 카메라를 앞으로 내어밀었다. 순간 마르티나 조아멜은 이 남자가 자신보다도 훨씬 더 카메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일단 카메라의 전원 스위치를 올리고 뒷면의 패널을 주의깊게 살폈다.
『음, 이거요. 아직 필름을 다 사용하지 않으셨군요. 자동 카메라는 필름이 끝까지 돌아가게 되면 윙- 소음을 내고 저절로 필름이 감기죠. 그러면 뚜껑을 열고 살짝 꺼내기만 하면 되어요. 어디 보자. 넣어져 있는 필름이 24컷 짜리니까 앞으로 세 장 정도는 더 찍으셔야 필름을 꺼낼 수 있겠군요. 여기 숫자가 보이죠? 21컷까지 찍으셨어요, 손님께서는.』
『그렇습니까. 그럼 몇 컷 더 찍어야겠군요.』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치즈- 라고 말했다.

에?
마르티나 조아멜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순간 플래쉬가 번쩍였다.
『바, 반칙이예요! 자, 잠깐만요!』
『왜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웃어요. 자, 한 장 더 찍을 거예요.』
다시 번쩍.
들었던 카메라를 살금 아래로 내리고 그는 말했다.
『찡그린 것보다 웃는게 표정이 더 좋아요. 자아, 어서 치즈- 라고 나에게 말해줘요.』

졌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마르티나 조아멜은 어깨를 으쓱이고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알았어요, 그럼 찍어요. 치즈-』
마지막의 프래쉬가 터졌다.
『좋아요. 그럼 현상 부탁해요.』
윙- 소음을 내며 필름을 감기 시작한 자동 카메라를 남자가 내어밀었다.

『성함이?』
『존 스미스.』
『존 스미스씨. 그럼 1시간 뒤에 찾으러 오세요. 준비해놓고 기다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좀 있다 다시 오겠어요. 아참!』
『뭐 잊으신 거라도?』
『근처에 근사한 꽃집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겠어요. 이 근방 지리는 아직 잘 몰라서요.』

저으런. 여자 친구가 이미 있으셨구먼.
마르티나 조아멜은 대단한 실망감을 느끼며 매출 전표에 마침표를 찍었다. 어버이 날도 아닌데 꽃을 사려는 젊은 남자가 있다. 그렇다는 건 자신에게 기회가 없다는 얘기렸다. 괜사리 이 남자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엉뚱하게 착각했잖아-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턱짓으로 오른편을 가리켰다. 15분 정도 걸어야 하지만 그곳 데이지 화원에선 장미 꽃다발 포장을 아주 근사하게 할 줄 알았다. 선물을 받을 그의 여자 친구는 물론이거니와 꽃을 구입하려는 남자 또한 대단히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

- 짤랑

가죽 재킷의 손님이 가게 문을 나섰다.
『칫. 일장춘몽이었어.』
마르티나 조아멜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쥐고 있던 볼펜으로 유리 진열장을 콕콕 찔러댔다. 지루한 하루이다. 하아- 하고 그녀의 어깨가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문제의 젊은 손님이 가게에 들어와서 나가면서까지 도어의 손잡이는 물론이거니와 손으로 그 어떠한 것도 만지지 않았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유리 진열장에 몸을 기울였어도 팔꿈치로만 체중을 의지했지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건 까마득히 몰랐다. 아울러 매출 전표에 남긴 이름 - 존 스미스의 뜻이 경찰 관계자들 사이에선「신원불명」이라는 것 또한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런 것들을 깨닫기엔 지독하게 무려한 4월의 어느 날이었고, 지루함 때문에 마르티나 조아멜은 머리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누가 또 안 지나가나.』
짜증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다시 쇼 윈도우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음 날의「그레이워즈 심리 상담소」에서 그 누군가씨가 이런 그녀를 봤더라면「제발 부탁이니 나랑 자리를 바꿔줘~!」라며 울부짖었겠지만... 한적함에 사로잡힌 나머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초 엉뚱한 생각을 품고 만 마르티나는「이럴 바엔 차라리 예의 햄버거 가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라고 진심으로 빌고 있었다.

『어째서, 왜 이렇게 바쁜 거야! 빌어먹을~!!』
반면 이쪽은 더도 말고「쉴 시간이 있었으면」이라고 지나의 램프에 빌고 또 빌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불공평한지라 마르티나 조아멜에게 허락된 풍요로운 한가로움이 Dr.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에게는 단 1분도 할애가 되지 않았다.
뭐가 이리 좇 같은 일이 다 있다냐. 닥터는 울부짖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킹콩의 비명이 들렸음이다. 문을 열고 검정 머리카락의 여비서가 소리를 질러댔다.
『그레이워즈 선생님! 앞으로 5분 뒤에 다음 예약자가 오실 거예요! 가방 들고 어디 도망가시려 하면 저 화낼 거예요!』
『도망은 가지 않을 거야, 테슬라씨. 하지만 나에게 전화를 달라구.』
『전화도 안되요, 이제 4분 남았다구요!』
닥터 그레이워즈는 10대 청소년의 애띈 모습과는 달리 한 치의 빈틈없이 자신을 몰아대고 있는 비서 아멜리아 테슬라를 죽어라 쏘아봤다. 믿어지지 않았다. 한 없는 정의로움에 가까운 소녀 - 나이는 비록 20대 중반이었지만 외모는 어디까지나 소녀가 맞은 그녀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윽박지를 수 있는 것이다냐. 닥터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녀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닥터 본인이었다. 이래서는 주객이 전도되었다.

아멜리아 테슬라는 그의 지적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정의롭게 말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선생님. 그렇지만 제가 지금 선생님을 자유롭게 놓아드리면 선생님의 수입에 막대한 지장이 생길 것이고, 따라서 제 월급 역시 위험하게 되겠지요. 다음 달에 집세 인상이 예정으로 잡혀 있는 제가 이런 사정으로 이번 달 급여를 놓치게 되면, 전 홈리스 신세로 추락하게 될 것이고, 그 때의 전 누가 뭐래도 잡동사니가 가득한 가방들을 사무실 한편에 쌓아두고 컵라면을 끓여댈 거예요. 결과적으로 사무실이 치명적 피해를 입게 된다는 걸 어쩔 수 없이 설명드릴 수밖에 없군요.』
『설명하지 말아, 상상이 되어버리니까. 그런데 왜 하필... 컵라면?』
닥터는「가방 들고 그냥 튄다」라는 계획은 깨끗이 포기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번 달부터 만나기 시작한 제 친구가 일본계 회사에 다니거든요. 니폰. 제팬. 소니 혼다! 맛있으니까 하나 먹어보라 권했는데... 젓가락질이 힘들어서 그랬지 맛은 정말로 끝내줬어요. 뭐, 냄새가 진동한다는 약점이 있긴 하지만요.』
『보이 프렌드라. 이름이 뭐였지? 테슬라.』
『보이 프렌드가 아녜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이름이 피리아 윌콥트라고, 금발에다 엄청난 미인이라고요. 그쪽 일본인 상무가 어연 패션 모델이냐면서 놀라서 뒤집어지고...』

이봐, 테슬라씨. 그 친구가 미인이든 아니든 나하곤 일절 상관 없다구.
닥터는 울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감추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라면과 소니 혼다 이야기에 시계는 정각 오후 3시를 가리켰다. 타임 오버. 예약 손님들의 스케쥴로 일정은 빡빡했다. 한숨이 터져나오려 했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저녁 8시까지는 꼼짝도 못할 거라 이건가. 그렇게 되면 너무 늦다. 닥터는 안절부절해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이 틈새로 가져갔다.

소방서 앞에서는「호떡집에 불난 것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심리 상담소에선「당신, 미쳤어요?」라는 말을 쓰면 안된다. 그게 불문율이다.
그치만 아멜리아 테슬라는 이번만큼은 예외로 삼기로 했다. 하여 외쳤다.
『선생님! 손톱을 깨물면 어떻게 해요. 미쳤어요?!』
『그러니까 말했잖아. 나 좀 봐달라구.』

신문에 살인 사건에 대한 뉴스가 실렸다.
닥터는 대놓고 엄지 손가락을 깨물어댔다.
이놈의 망할 거리에서 테러가 얼마나 자주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테러리스트들은 가엾은 노인네들의 다리를 후렸고, 부인들의 지갑을 빼앗았고, 젊은 처녀들을 강간했으며, 또래의 남자들에게 의미 없는 주먹을 휘둘러댔다. 미친 정신병자가 지하철 플랫폼으로 생판 모르는 남의 등을 떠밀어, 막 주가가 오르려던 한 소설가를 천국으로 보내버린 일도 있었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이를 굶겨서 죽인 부모도 있었다. 이웃집 강아지가 시끄럽게 짖어댄다고 총질을 한 선한 사마리아 인들도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처럼 시끄러웠다. 그래서 뉴스는 늘 지겨웠고, 짜증스러웠다.
여기에 대응할 방법은 딱 하나. 바로 무관심이었다.

하지만 그놈의 사건이 바로「그녀」가 살고 있는 집 아래층에서 벌어졌다고 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언제나처럼 늘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혼자 사는 젊은 여자가 목 졸려 죽은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금품을 노린 사건이 아니라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경찰 당국에선 질문을 던져대는 기자들을 상대로 노 코멘트 태도를 일관했다.

신문을 보기가 무섭게 리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으되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다음 날엔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섭게 양치질만 대충 하고 전화를 걸어봤다.
이번엔 아예 신호 자체가 가지 않았다. 뚜- 뚜- 하고 전화는 먹통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직접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둘겨 보도록 하자.
닥터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다구, 아멜리아 테슬라씨. 홈 리스가 되면 즉시 연락해줘. 차라리 내 안방을 내어주지. 아울러 집세는 두 달간 받지 않겠어.』
그리고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표정 - 너무나 슬퍼보여서 껴안고 싶어지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테슬라. 그렇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신과 의사인 내가 미칠 것 같아서 말이야.』

이렇게 되면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멜리아 테슬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스케쥴 리스트를 흔들어댔다. 이제부터는 캔슬의 폭풍이었다. 밥줄들의 (혹자는 환자라 한다) 아우성이 환청처럼 들려왔지만 어쩌겠는가.
뭐,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하도록 하자.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다. 솔직히 저 상태의 닥터를 상대로 환자들이 어디 마음 놓고 심리 상담을 청해올 수 있겠는가. 골똘히 생각에 사로잡혀 엄지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사람에게? 농담이겠지. 차라리 톰 크루즈를 교황으로 선출한다.

『알겠습니다. 선생님을 계속 일하게 만든다는 계획은 포기하도록 하죠. 그럼 전 오늘자 예약 손님들에게 모조리 전화를 걸어 선생님께서「급한 세미나 일정」으로 어쩔 수 없이 비행기를 타고 아틀란타로 날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우~ 부탁해요, 아멜리아. 신세를 지는군.』
『너무하시네. 이럴 적에만 이름을 불러주시기예요?』
문을 닫고 나가면서 아멜리아 테슬라가 눈을 부라렸다.

『아참! 깜빡했다.』
문을 닫으려다 말고 아멜리아 테슬라가 몸을 빙글 돌렸다.
『응?』
저편에서 아멜리아 테슬라가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가방을 들고 외투를 챙기던 닥터 그레이워즈는「왜?」하고 물어보았다. 설마. 공짜 집세를 두 달이 아닌 다섯 달로 늘려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보니 선생님에게 메시지가 하나 있었어요. 오늘 점심 시간이었죠. 리나 인버스씨가 그러시는데 본인의 연락처가 바뀌었으니 선생님께 전해달라면서 새 전화번호를...』
『뭐얏?! 그 중요한 걸 왜 지금에야 말해주는 거얏!!』
목 졸려 죽이려는 듯한 닥터의 노성에 아멜리아 테슬라는 입을 쩍 벌렸다.
『죄, 죄송해...』
『당장 내놔! 메모! 전화번호!』
『미안해요, 선생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예요. 난 정말...』
『메모!』

변명하자면 화가 미처 가라앉지 않은 탓이었다.
전화가 연결되기가 무섭게 닥터는 리나 인버스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 나쁜 계집애!』
답지 않은 과격한 발언에 놀라 수화기 저편에서 훅-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달까, 닥터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빼고 숫자를 마음 속으로 천천히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

한참만에 수화기 저편에서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다행히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쁜 계집애? 어이. 그건 프로답지 않은 발언이었어, 닥터.》
『아아, 그건 인정해. 하지만 걱정 많이 했었다, 리나.』
《걱정은 무슨...》
『뉴스를 봤어. 그것이... 네가 살던 곳에서 사건이 있었더군.』
《응. 그래서 집을 옮겼어. 그래서 네게 알려주려고.》
『그랬군. 무작정 찾아갔으면 낭패당했겠어. 집을 옮겼구나. 저어... 있지. 나는...』
《네가 걱정할만한 일은 있지 않아. 난 괜찮아, 닥터.》

하루라도 빨리 화상 전화기가 일반화 되었으면 좋겠다. 목소리로는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괜찮다고? 정말인가. 마음이 영 진정이 되질 않는다.
닥터는 지갑을 열어 몰래 숨겨둔 사진 한 장을 꺼내들었다. 새파랗게 젊은 세 사람이 맥주를 마시다 말고 어깨동무를 나란히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한 가운데서 빨간 머리카락의 여자가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있었다. 그 양편으로 학창시절의 닥터와 그의 절친했던 친구 가우리 가브리에프가 이예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세 명 모두 건강하고 패기에 넘쳐서 뉴욕 타임지가 선정한「오늘의 스마일 상」을 줘도 하나도 아깝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술에 살짝 취해 눈빛이 맛이 간 청년 시절의 그들은 정말로 세상에서 둘째라면 서럽다 싶을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닥터는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문질렀다.

이런 시절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오늘날에 이 세 사람은.
완전히 망해서...
한 명은 사고로 죽어버렸고.
한 명은 그 쇼크로 심장이 박살났고.
또 다른 한 명은 필사적으로 그 조각난 심장을 주워 접착제로 도로 붙여보려 기를 쓰고 있다.

《닥터?》
『미안, 조금 피곤해서... 계속 말해봐. 듣고 있어.』
《예전에 네가 준 전화기 말이야.》
『응.』
《네가 망치질해서 테이블에 붙여놓은 걸 나로선 도저히 떼어낼 길이 없었어. 그래서 이사올 적에 가져오지 못했어. 미안해.》
『버려, 버려. 그런 싸구려. 신경 쓰지 마. 뭣 하면 내가 새 걸로 하나 더 사주지.』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아. 이미 샀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 통화하는 거잖아?》
『하긴, 그렇군.』
《...》

약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닥터 그레이워즈는 반사적으로 귀를 곤두세웠다.
『리나?』
《나... 있잖아. 묻고 싶은게 하나 있는데.》
『응.』
《그러니까 나 있잖아. 운전하다 종종 표지판을 놓치고 길을 잃어버려. 당황해서 좌우를 살펴보지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길이 없더라고. 나중에 깨닫고 보면 바보처럼 우회전을 해야 하는데 좌회전을 하고 한참을 달려간 거지. 매번 이런 식이야. 어디 그뿐인줄 알아?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는데 잔돈만 손에 쥐어져 있고 정작 필요한 진통제는 계산대 위에 놓고 오는 거야. 아득해 정신이 멍해져서... 정말로 바보처럼 멍해져서...》
『그래도 넌 화요일마다 나에게 심리 상담하러 오는 일은 놓치지 않고 있어.』
《맞아. 그건 까먹은 일 없지...》

재차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닥터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수화기를 옮겼다.
『리나?』
《만약에 말이야... 네 소중한 딸이 납치를 당했어. 너무나 소중한 딸이 위험에 쳐한 거야.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때 넌 나에게 도움을 청할까?》
『저기, 난 아직 결혼도 안했다. 난 총각이라구?』
《만약이라고 했잖아.》
『아아, 여하간에 말이지.』
닥터는 눈을 감았다.
『딸이든 누구든 상관 없어. 우리 어머니가 납치를 당해도 난 제일 먼저 널 찾아갈 거다.』
《하하하... 나사가 하나 빠진, 정신 나간 전직 FBI를?》
『응.』

주저 없는 그의 대답에 대단한 위로를 얻었던 것 같다.
수화기 저편의 그녀가 히죽 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마워. 도움이 되었어.》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은 뒤, 리나 인버스는 얼음물처럼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이삿짐이 채 풀어지지 않은 그녀의 방으로 이미 세 가지 물건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

하나는 시카고 경찰국장의 친전.
살인사건 수사에서 그녀의 도움을 요청하는 정중한 부탁이었다.

다른 하나는 메모가 붙어있지 않은 화려한 장미 꽃다발.
마지막으로 젊은 여자의 사진이 세 장 들어가 있는 새로운 마닐라 봉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