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손님.

작은 구멍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실피르는 그녀를 가리켜 그렇게 호칭하고 했다.
그다지 특징 있는 손님은 아니다.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에 작은 키, 이목구비는 뚜렷한 편으로 화장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약간은 초췌한 분위기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머리가 너무 좋은 나머지 맛이 간 과학자처럼 말이다.
『안녕.』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인사를 한다. 그녀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가까이 다가오면 몸에서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나곤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실피르는 그러한 그녀의 쓴 맛의 체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냄새는 삶에 지쳐 자살을 결심한 퇴물 록큰롤 가수의 인생처럼 처량맞았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체크 밀크봉봉 카라멜 한 봉지. 그리고 담배 한 갑... 해열 진통제 하나.』

금요일 저녁 손님은 늘 별 생각 없이 주문을 내뱉곤 했다. 정말로 필요한 물건을 사러 왔다는 식이 아니라 무작정 머릿속에 떠오른 것 중에서 아무거나 부르는 것 같았다. 물품 선택은 즉흥적이었다. 어느 날은 유리창 닦는 세척제와 편지 봉투를, 어느 날은 생리용품과 아이스크림을 사갔다. 때로는 건전지를, 때로는 양말과 칫솔을 달라고 했다. 하나같이 자질구레한 물건들이었고 아울러 분위기상 당장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용품들이었다.

실피르는 정말로 그것들을 가져갈 거냐고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강렬히 느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정말은 그러질 못했다. 그런 질문을 던지면 그녀는 분명 머뭇거릴 것이고, 곤란하다는 듯이 지갑을 움켜쥔 채 도로 가게 밖으로 나가버릴 것이다. 대형마트의 번창으로 한 푼의 수입이 아쉬운 판국이다. 이곳과 비슷한 작은 구멍가게는 줄줄이 도산해 나가는 형편이었다. 그런 마당에 바보짓은 할 수 없었다. 정말로 필요한 물건만 골라 알뜰 구매를 하라 훈계를 해? 차라리 낭비는 미덕이라며 마이크로 한바탕 떠들고 만다. 그래서 오늘도 실피르는 뒤편의 진열장 속에서 대형 포장의 해열 진통제와 캔디, 담배를 찾아내어 계산대 위로 올려놓았다.

『종이 포장을 원하신다면 미리 말씀하세요.』
실피르는 금요일 손님이 밤새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몰두했을 것 같다는 추측을 늘 하곤 했다. 그러니까 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마약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여자 손님은 유별나게 집중력이 없었다. 지갑을 열어 돈을 꺼내놓고서도 자기가 뭘 사러 왔는지조차 잊어먹기 일수였다. 그녀는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담배를 가장 먼저 챙겼고, 오른손으로 캔디를 집어든 다음, 엉뚱하게도 해열 진통제는 그대로 계산대 위에 놔둔 채 가게 문을 나섰다.

짤랑.

금요일마다 편의점을 찾는 그녀는 매번 이런 식으로 실피르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저렇게 정신을 놓고 다녀서야... 쯧쯧. 저러다 길 한복판에서 강도에게 당하지.』
귀신에게 홀린 여자.
그것이 금요일 손님의 또 다른 별명이었다.

그러나 실피르의 걱정과 달리 귀신에게 홀렸다던 이 여자는 이제껏 강도에게 머리를 얻어맞은 적은 없었다. 그게... 단순히 운이 좋아서였다고 단정이어 말하기는 조금 이를지도 모르겠다. 보면 볼수록 묘한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으슥한 밤길을 혼자 걷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는 식이어서 세 블록을 걸어가는 내내 주변을 힐끔거리는 법도 없었다. 발목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걸었다. 그 동작만 보자면 물건을 흘리고 돌아다니는 칠칠맞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투로 앞을 응시했고, 누군가 덮치기라도 하면 그 즉각 반격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본인 스스로는 인식을 못하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겉만 보자면 핸드백 속에 한 다스의 수류탄이 들어가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펑 터진다. 이런 여자의 지갑을 노릴 수 있는 건달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

『후우, 조금 춥네.』 
여자는 그렇게 20분 정도 길을 걸어 자신의 아파트에 도착했으며, 평소와는 달리 시끄럽게 윙잉거리는 거리의 사이렌 소음을 뒤로한 채 거침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창문 밖으로 경광등이 반짝이고 있었다. 복도에서 서너명의 경찰들이 잔뜩 경직되어 있는 아파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곁눈질로 제복의 사람들을 흘깃 바라보고는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이? 잠깐만. 기다리시오, 숙녀님.』
『무슨?』
『노란 테이프가 안보이쇼? 거긴 출입 금지라구. 접근 금지라고 써놓은 거 못봤소?』
『난 집에 가는 길이예요.』

나중에 정글스 형사는 파트너인 부르무에게 이「괴상한 여자」에 대해 말하길, 「재수 없다」는 간결한 말 한마디로 모든 걸 설명했다.
일단 반응이 냉정했다. 이건 말도 안되는 거였다. 추악한 강력사건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긴 하다. 입에 담지도 못할 일들이 거리에선 일상 다반사로 벌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익숙해질 수는 없다. 발가벗겨져 목이 졸려 죽은 시체가 나왔다고 「또 죽었어?」하고 심드렁하게 말할 수 있던가. 범죄는 늘 혐오스러운 것이고... 그렇기에 사람들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든다. 지금 그가 눈앞에 두고 있는 처자처럼 「이웃이 죽은 건 죽은 것이고, 나는 나예요」라고 말하면 할 말이 궁진해진다. 정글스는 머리를 긁어대며 잠시 생각했다. 20세기가 무사히 끝났다고 좋아해서는 안되는 거였다. 이다지도 말세의 징조가 뚜렷할 줄이야.

『그러니까 댁이...』
『3층 105호. 집에 갈 수 있게 출입 허가나 내줘요.』

여자는 이런 류의 일의 절차를 훤히 꿰고 있다는 식으로 나왔다. 정글스 형사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보통의 경우 팔짱을 끼고 몸을 사린다. 그리고 몇 번을 다짐하며 물어본다. 무슨 일 있어요? 이제 안전한 거예요? 집으로 들어가도 괜찮은 거예요?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문밖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더러는 가방을 들고 가까운 호텔로 줄행랑 친다. 지금처럼 노란 테이프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허가증부터 달라며 심드렁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봐도 된다. 경찰 뱃지의 등장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게 오히려 평범한 거다. 

정글스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두 눈을 깜빡였다. 
『출입 허가라... 곧 준비를 해드리지요. 그나저나 약간 질문을 해도 괜찮겠지요?』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는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도 못한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글스 형사는 수첩부터 끄집어 들었다.
『실례지만 댁의 아래층에 사는 여자에 대해 좀 압니까.』
『이름은 몰라요. 그저 지나가면서 얼굴만 좀... 그 여자가 죽었나요.』
『저런. 난 죽었다고 아직 안 말했소. 그런데 뭘 보고 그런 결론을 내렸나요?』
여자는 피식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비닐 쇼핑봉지가 덜렁 하고 흔들렸다.
『접근 금지 노란 테이프. 윙윙대는 사이렌. 경찰이 한 가득. 그 가여운 여자가 욕조에서 미끌어져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거나, 단순히 집에 도둑이 들었다면 이 정도로 소란이 벌어지진 않았겠죠.』
타당한 추측이었다. 정글스 형사는 한걸음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제 명함을 드리죠. 뭔가 생각나는게 있으면 꼭 연락을 주십시오. 그런데 성함이...?』
『리나. 리나 인버스.』
『그럼 조심해서 올라가십시오, 인버스씨.』
『고마워요.』
정글스 형사의 형식적인 인사를 받아가며 여자는 층계로 사라졌다.

이웃의 불행은 나와는 결코 관계 없나니.
뻔하다. 생각하는게 그러니 경찰관의 명함 같은 건 아마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정글스는 그렇게 짐작했기에 다음날 아침 - 사실상 꼭두새벽부터 리나 인버스가 경찰서로 한걸음에 달음박질해 나온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어젯밤 내내 전화기의 음성 메시지 착신음이 울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계속되는 야근에 주의력이 산만해지고 있었다. 몰약보다 더 지독하게 쓰다는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어루만졌다. 모래가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깔깔했다.

『그래서요, 전직 FBI 선생?』
『나에 대해 조사를 했군요. 정글스 형사.』
『특별한 조사는 아니오. 아시다피시 주변 인물 탐색은 기본이니까.』
물론 그럴 것이다. 살인 사건이니까. 기초 조사는 착실하게 들어가야 마땅하다. 희생자 주변 인물은 모조리 용의자다. 그걸 걸러내고 걸러내어 한 조각의 작고 작은 사금을 찾아낸다. 사건 발생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정글스 형사에 수첩으로는 아파트 관리인 및 세입자 리스트가 이미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피스에는 사생활 침해가 아닐까 우려될 수준의 개인 정보가 산더미처럼 쌓여져 올라갔다. 당연히 그 속으로 리나 인버스의 이름도 들어가 있었다. 아울러 고백하는데 그 많고 많은 기록들 중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는 여느 TV 토크쇼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병아리 눈물 만큼이나 짧막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글스는 그녀의 파일만을 따로 골라 열쇠가 달린 서랍 속에 잘 보관시켰다.

정글스는 비릿하게 미소지으며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숙녀에게도 같은 담배를 권했다. 숙녀분은 거절하지 않고 침착하게 불을 붙였다.

담배를 끊을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말해 그 인간이 구순기의 답습을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Dr.그레이워즈는 웃으면서... 여기까지 생각하고 리나 인버스는 폐 깊숙이 들어온 담배 연기를 그야말로 토해내듯 몸 밖으로 일시에 몰아냈다.
사물의 빨고 무는 동작에서의 쾌락이라.
그런데 닥터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는게 바로 문제이다. 오히려 끈적끈적한 불쾌감이 머리를 자극한다. 코와 입으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오줌이나 땀, 기타 여러 분비물과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몸으로 흡수되었다가 (소화), 다시 몸 밖으로 빠져나온다. (배설) 결국 저 허공 위로 둥둥 날아다니는 하얀 연기는 극단적으로 말해 더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배설물이다. 리나는 부르르 떨며 팔을 감싸쥐었다. 입으로 오줌이랑 동격의 것이 나오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는다. 썩어가는 내장을 훑고, 기억과, 잡념과, 무너져가는 자아가 한꺼번에 버무려져 일시에 입밖으로 튕겨나간다? 우와, 싫다, 싫어.
그런데 정작 우스웠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못 말리는 골초 중의 골초라는 사실이었다. 리나는 다음과 같은 동작의 반복 - 빨고, 뱉고 - 를 계속하면서 구순기가 어쩌고 하는 프로이드적 이론이 아닌 새로운 다른 가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단순히 니코틴에 중독되어서 그렇다는 설명은 낭만이 없으니까 기각하고...
정말은 왜 담배를 끊지 못하는 걸까.
후- 소리를 내며 다시금 혐오스러움의 극치인 배설의 동작을 반복했다.

『아세요? 난 정말로 자동응답기 전화가 가지고 싶었더랬어요.』
마치 혼잣말하듯 내뱉은 리나의 이 한마디의 정글스 형사는 한 겨울에 꽁꽁 얼어 죽어버린 노숙자가 되었다.
자동응답기... 전화?
그래도 정글스는「웬 뚱딴지 같은 소리요. 당신, 감자 먹고 취했소?」하고 되묻는 바보 짓은 하지 않았다. 다년간 반복된 현장 경험으로 이런 경우 대부분 뒤로 이어지는 내용이 아주 중요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이 없다는 투로 눈동자를 굴리는 대신 부근을 굴러다니고 있던 테이크아웃 종이컵을 집어 앞으로 내밀었다. 컵은 이미 비어 있었다. 밑바닥에 커피 찌꺼기가 말라붙은 이 컵을 재떨이로 쓰면 아주 유용할 것이다.
리나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정글스의 친절에 감사를 표했다.

『그건 진짜 끔찍하죠. 최대치로 볼륨을 울린 전화벨이 서른 번, 마흔 번 계속 울려대는 건 말예요. 머리를 누군가 망치로 두둘겨대는 건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곤 해요.』
그렇다면 전화를 빨리 받으면 될 거 아닌가. 누가 벨소리가 마흔 번 울리도록 내버려 두나.
정글스는 짐짓 호주머니를 뒤지는 척 하는 것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녜요. 난 전화라는 물건 자체를 싫어해요.』
그러면 전화기를 아예 곁에 두지 말던지. 그냥 원시의 세계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쯤해서 리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규칙이예요. 전화, 반드시 가지고 있을 것. 응답기 작동은 안됨. 벨 소리는 최대치로 조절.』
이것이 닥터 그레이워즈가 리나 인버스에게 구두로 약속시킨 첫 번째 규칙이었다.

죽어라 벨은 울린다. 참을성이 고갈되기 시작하면서 당신은 베개를 붙들고 마구 친다. 따르릉, 따르릉... 머리가 울린다. 미칠 것 같다. 망치로 저놈의 망할 기계를 후려갈겼으면 소원이 없겠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유혹이 시작된다. 환청이 들려온다. 이 도망가고픈 소음의 폭력 앞에서 당신은 그저 수화기만 들고「여보세요?」라고 말만 하면 된다고... 그러면 곧바로 천국이 다가온다고.

- 포기하지 말고 수화기를 들어, 리나 인버스.
닥터는 거듭해서 말했다.
- 넌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야. 화성도 아니고 목성도 아닌, 바로 이곳이야!
닥터는 끔찍하다며 몸서리를 치고 있는 리나를 짐짓 무시한 채 손수 전화기를 들고왔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아예 공구상자를 펼쳐 베드 테이블 위에 전화기를 못으로 고정시켜 버렸다. 단순하게 생긴 문제의 검정색 구식 전화기는 100층 높이에서 떨어뜨려도 절대로 고장이라고는 날 것 같지 않은 튼튼한 녀석이었다.
- 도망가지마. 아직 넌 살아 있고,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 다시 말하는데 넌 살아 있어!
백년 전에 이미 죽어 미이라로 변해버린 듯한 여자를 두고 닥터는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 벨이 울리면 전화를 받아!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깊숙이 빨면서 리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때의 닥터는 붉게 물든 자신의 눈가를 손등으로 훔친 뒤 자기 멋대로 전화벨의 음량을 최대치로 올려버렸다. 그녀가 울컥하자 그는 확고한 태도로 리나의 등을 툭- 하고 한 번 쳤다. 그때 닥터의 눈빛을 읽어낸 리나는「이 남자가 떠나면 즉시 전화기를 내다 버린다」라는 계획 자체를 아예 포기했다.
『나쁜 놈. 누굴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게지.』
그러나 그녀의 불평과는 달리 의외로 전화벨이 울리는 일은 그리 많이 있지는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리나는 심지어 부모님들에게조차 새로운 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친한 친구, 예전의 직장 동료, 학교 선후배... 모조리 끊어버렸다. 하여 어쩌다 전화가 걸려와도 십중팔구 엉뚱한 사람을 찾는 잘못 걸려온 전화이거나, 아니면 물건을 선전하느라 바쁜 통신판매 업자의 그렇고 그런 전화들 뿐이었다. 그래서 리나는 버릇처럼「당신이 원하는 건 이곳에 없어요」라고 딱 한마디만 하고는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곤 했다. 아무도, 그 어느 누구도 리나 인버스를 찾는 일을 없었다.

『그치만 그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더군요.「내가 원하는 건 바로 거기에 있고, 나는 지금 그걸 찾았어요」라고.』
그것이 마흔 번 이상의 벨 울림 끝에 잡아먹듯이 수화기를 들었을 적의 일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전화기 너머에서 조용히 말을 이었다.
-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리나.

이쯤해서 리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마닐라 봉투 하나를 정글스 앞으로 훌쩍 던졌다.
테이블 위로 부드럽게 미끌어지는 마닐라 봉투를 보고 정글스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죠, 리나 인버스씨.』
『내 앞으로 발송된 우편물입니다. 나흘 전에 도착한 건데 알기는 어제 밤에 알았죠.』
나흘 전에나 도착한 걸 어제서야?
봉투를 집어들 생각은 않고 정글스는 두 눈만 꿈뻑거렸다.
변명하듯 리나가 말했다.
『2주일동안 우편함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도 있어요. 난...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아요.』
『그러시구랴.』

순전히 반복 학습에 의한 버릇이었다. 마닐라 봉투를 만지기 전, 정글스는 책상 서랍을 열어 1회용 장갑을 찾았다. 리나는 그런 쓸데없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참견을 해왔지만... 혹시라도 이게 증거물이라면 곤란하다. 신중해서 나쁠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이 그의 철학이자 신념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인 한 번만 더 하자. 개인 우편물이니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인버스씨. 제가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보시라고 가져온 겁니다, 정글스씨.』
『알겠습니다.』

내용물은 별 거 없었다. 12×17인치 사이즈의 사진 석 장이 전부였다. 그것도 한 여자를 다른 각도에서만 찍은 평범한 사진이었다.
정글스는 문제의 사진이 마치 피투성이 현장 사진이라도 되는 것처럼 집중하여 쳐다봤다. 한참 뒤, 카지노 딜러가 카드를 배열하듯 테이블 위로 나란히 깔아보았다. 그러고 5분여의 시간이 흐르도록 그는 숨이 막히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관찰의 시간.
리나는 그런 그의 태도가 당연하다는 투였다. 방해는 하지 않는다. 리나는 피우던 담배를 테이크아웃 종이컵 속으로 넣어 비벼 껐다.

다시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정글스는 짤막하게 끙 소리를 내뱉었다.
『리사 엔든. 나이는 28세. 직업은 일정치 않고 편의점이나 서점, 은반판매점 등등에서 판매원으로 아르바이트. 독신으로 혼자서 살았고, 당신네 아파트에서 죽은 바로 그 여자죠.』
평범한 여자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부모로부터 독립,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며 남자 친구를 사귀고, 주말에는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는 것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몇 번의 과속 적발 기록이 전부인 보통의 시민. 집세는 밀린 적이 없고 취미는 책 읽기. 최근에는 애완동물 숍에서 애견 미용을 공부하려던 것 같았다. 그녀가 죽은 시체로 발견된 집에선 포장도 뜯지 않은 애견 잡지책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한켠으로는 연습용임이 분명한 미용 가위도 나왔다.

『그렇다고 미용 가위가 흉기였던 건 아니죠. 그렇죠?』
정글스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
『당신이 전직 FBI라고 해도 그건 무어라 말을 하기가...』
리나는 그의 발언을 무시했다.
『흉기는 철사줄이지요. 그는 늘 그렇게 해왔어요. 피해자가 다가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가 재빨리 뒤에서부터 덮치죠. 그리고는 철사줄로 목을 조여요.』

이런 젠장.
정글스는 짜증을 감추지도 않은 채 리나를 응시했다.
『철사로 피해자의 목을 노린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이게 그의 방식이라니까요.』

사진을 찍는다. 이것이 그만의 독특한 살인 예고이다.
『사진을 보면 날짜가 보이죠. 여기 오른쪽 상단부... 4월 12일 오후 4시 25분. 그리고 그는 이 사진을 봉투에 넣어 나에게 보내요. 일종의 게임이죠. 사진을 찍은지 일주일이 되는 19일 오후 4시 25분까지 사진속의 인물을 찾아내서 무사히 신변 확보에 성공하면 그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요. 하지만 찾지 못하면... 그는 이 인물을 맘대로「소유」하게 되는 거죠.』
『소유?』
『죽인다는 뜻이예요.』
정글스는 다 죽어가는 환자인양 끔찍한 신음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가만 있자. 리사 엔든의 사망 추정 시각은...』
『법의학자의 의견은 이럴 적엔 필요 없어요. 19일 오후 4시 25분에 그녀는 죽었어요.』
리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사진 속의 리사 엔든을 지긋이 내려다 보았다.

『골치아프게 되었군요, 정글스 형사. LA 연쇄살인마 제로스가 돌아왔어요.』
『뭐요?! LA 연쇄살인마?! 제기랄! 여기는 시카고요!』
『나도 그 점을 지적했죠. 여기는 LA이가 아니라 시카고이고, 나는 이미 FBI를 사직했으니 앞으로는 나한테 전화하지 말라고요. 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더군요. LA에서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후임자의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가르쳐주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더니만 10초도 되지 않아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서는 다시 이런 짓을 하면 그때는 나를 죽여버리겠다고 펄펄 뛰던데요.』

- 당신이 그리웠어요.
수화기 저편에서 그가 속삭인다.
- 당신 후임자는 정말이지 형편 없어요.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린다.
- 그래서 고민하다 여기까지 쫓아왔어요.
약간은 즐겁다는 목소리다.
- 뭐, LA에서 시카고는 거리도 그리 멀지 않고.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설득한다.
- 당신이 힘들다는 거 잘 알아요... 그러니 천천히 시작해봐요. 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정글스를 대신하여 리나는 세 장의 사진을 도로 집어 올렸다.
장갑을 착용하지 않고 만져도 상관 없다. 어차피 이 물건들 속에는 제로스가 남긴 흔적이라는 건 없다. 지문이 나와봤자 집배원, 배관공, 기타등등의 쓰잘데기 하나 없는...

마지막으로 리나는 말했다.
『오늘 아침부로 전화번호는 물론이거니와 살던 방을 바꿨어요. 혹시라도 저에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이쪽 번호로 연락을 주세요.』

죽도록 벨이 울리면 아마도 난 피곤에 지쳐 수화기를 집어들고 이렇게 말할 거예요.
여기엔 당신이 원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 글세. 정말로?


*** 예전 1, 2화 통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