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리지널 공동 소유권자 엑토플라즘과의 상호 합의에 의해 공개. 아울러 이 글의 전반적 권한은 미야가 가집니다.


텅그렁.
소년의 발 앞으로 커다란 나무 물통 하나가 굴러왔다. 아이는 가만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는 그 자신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웅크리고 드러누워도 될 법한 크기의 큼지막한 물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짚단을 깔고 그 위로 천을 덮으면 더도 말고 딱이다.
라고 해도... 오늘 저녁부터 저걸 침대 대용품으로 쓰라는 이야긴 설마 아닐 테고.
제르가디스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뭘 보고 있는거냐. 이 형편없는 빈대야! 냉큼 나가서 물 길어 와! 딸꾹.』
오늘도 여전히 술에 찌든 뷜터스는 바락바락 소리부터 질러댔다. 그의 두 눈도 토끼처럼 새빨갰다. 머리 꼭대기까지 술이 차올랐다는 증거다. 커다란 술병이 이젠 아예 자기 마누라로 보이는지 양 옆구리에 하나씩 꿰찼다. 오전부터 내내 술타령을 한 탓에 얼굴이 벌거죽죽한 것이 동짓날 단팥죽 같다. 벌렁벌렁 움직이는 코로는 시궁창 썩은 냄새가 풀풀 풍겨 나왔다. 멀직히 떨어져 있어도 내장이 썩어 나가는 악취로 눈이 따가웠다.

그러나... 제르가디스는 일찌감치 눈치챘다. 아직 그는 정신 못차릴 지경으로 엉망으로 취해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다. 낮은 수풀에 납작 엎드린 맹수처럼 속으로 발톱을 갈고 있다고나 할까, 때문에 아이는 한층 더 바짝 긴장해서 눈치를 살살 살펴야만 했다.

분명히 그는 몹쓸 흉계를 꾸미고 있다.
흉칙한 예감이 드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제르가디스는 고개를 움추린 채 본능적으로 바람이 어디로 불어오는지부터 신중하게 살폈다. 썩은 고기가 잔뜩 낀 맹수의 누런 이빨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고로 바람을 등지고 재주껏 달아나야만 하는 법이다.

『너 귀 먹었냐?! 한 번 말했으면 냉큼 알아들어! 이 병신 같은 놈아! 빨리 가!』
『하지만 지금 물 길러 나가기엔 바깥이 제법 어둑어둑해요. 너무 늦었...』

쾅쾅쾅.
도깨비처럼 인상을 구긴 그는 절반 정도 술이 남아있는 술병으로 테이블을 세차게 두둘겼다. 그 정도 굉음을 내고도 유리병이 박살 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었다. 제르가디스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추렸다.

『그동안 오냐오냐 해줬더니 이젠 마구 기어오르기까지 하는구나. 주절주절 떠들지 말고 냉큼 갔다 오지 못하겠냐?! 그렇지 않으면 저기 굴러다니는 밥 버러지 이지스 놈의 갈비뼈를 죄다 분질러버릴테다. 알겠어? 1시간 내로 다녀오는 거야. 그렇지 못하면 너 때문에 이지스 자식이 대신 맞아 죽게 될 거다. 알갔냐?! 그러니까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아암! 이 빌어먹을 놈아.』
뷜터스는 더할나위 없이 징그럽게 웃으며 짐짓 목소리를 낮추었다.

순간 소름이 쫘악 돋았다.
이거였나. 속셈이 그거였나.

핏기 하나없이 새파랗게 질린 제르가디스는 구석으로 흘끔 시선을 던졌다.
이지스는 주방 구석에서 뭉툭한 숟가락을 들고 감자 껍질을 벗기던 중이었다. 최근 들어 잘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는 이지스는 촛불에 흔들리는 창백한 유령처럼 보이고 있었다. 앙상한 몸엔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왔다. 살갗마저 핏기 하나 없이 투명해서 금방에라도 사라질 것만 같다.
그런 소년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간... 갈비뼈가 부러지긴 커녕 황천행은 기본이다.

제르가디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댔다.
그의 시선을 느꼈던 걸까? 이지스가 희미하게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파리하다. 금방에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제르가디스는 울상을 지으며 마른 침을 삼켰다.
이지스는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외면하며 고개를 벽쪽으로 돌려 버렸다.
기쁨도, 슬픔도 포기해버린. 체념의 눈빛으로 그저 벽만 보았다.
순간 말도 못하게 불길한 생각이 제르가디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지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 따악 1시간이다. 거기서 1초라도 늦으면 이지스 놈은 맞아 죽게 될 거다. 알겠냐.

그리하여 이미 어둑어둑해진 깊은 산속을 소년은 의지할 횃불도 없이 정신없이 달음박질해 나갔다. 해가 산중턱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간지는 이미 오래였다. 땅거미가 와들와들 이빨 흔드는 소리를 내며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건 어디까지나 거짓말이겠지만 솔직히 발 밑으로 나무 뿌리가 굴러다니고 있는지 돌멩이가 처박혀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숲은 잔인했고 음험했다. 나무 뿌리는 뱀처럼 슉슉거리며 발 아래로 휘감아 들었다. 교묘하게 얽힌 그들의 함정에 걸려 비틀거리기라도 할려치면 잔뜩 뒤틀린 숲의 망자들은 자기네들끼리 킬킬 대며 소리 죽여 웃기만 했다.

아이는 절망감에 가득차 울부짖었다.
『빌어먹을! 난 바빠! 그러니 저리로 가란 말이야!』
제르가디스는 터져나가는 가슴을 주먹으로 두둘겨가며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참나무로 만든 물통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물을 담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팔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어떻게든 여기까지 질질 끌고 오긴 했지만 벌써부터 앞날이 암담했다.
시간은 또 얼마나 흘러갔을까, 갑자기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무들이 그를 에워싸고 빙빙 돌았다. 짖궂게 장난치며 가지를 흔들어댔다.
아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꽉 다문 이 틈새로 오열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흠칫 놀라 주먹쥔 손을 얼른 목구멍 안으로 틀어넣었다. 이지스는 그렇게 해서 울음을 참으라고 가르쳐왔다.
강해지자. 그들은 서로 약속했다. 절대로 소리 내어 울지 말자고 맹세했다.
손등으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래도 효과는 제법 있어 더 이상 아이의 코로 흉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되었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눈을 가늘게 뜨고 열심히 길을 찾고 또 찾았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게임은 처참한 양상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술주정뱅이 뷜터스는 이미 언급했던 그대로 이지스를 주먹으로 때려서 죽여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는 뼈마디가 부러진 작은 몸뚱이를 셔츠 다루듯 네모 반듯하게 대충 접어서는 지하실이나 헛간 뒤켠으로 묻어버릴 것이다. 화환도 없고 장례식도, 비석도 없이... 그의 존재는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다는 식으로 하얗게 말살될 것이다.

미칠 지경이었다. 마음이 조급한 나머지 개울이 어디에 있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오솔길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작정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같은 자리에서 하염없이 빙글빙글 맴돌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결국 제르가디스는 분노에 가득차 마구 발버둥쳤고, 덕분에 발목을 접질렀다.
눈앞으로 찬란하게 흘러 넘치는 밤 하늘의 별이 펼쳐지면서 시야가 둥글게 회전했다. 단단한 땅바닥이 그를 안아주었다. 커다란 물통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 돌조각에 부딕친 이마가 심상치 않은 통증을 호소했다. 뜨뜻미지근한 것이 콧잔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픔으로 인해 투명한 눈물이 쏟아지긴 했다.
그래도 아이는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것은 신성한 약속이었다.
울지 않았다.

『저런, 괜찮습니까. 정말이지 씩씩하게도 넘어지는군요.』
갑작스런 인기척이었다.
제르가디스는 후둘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울 생각도 못하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눈동자만 힘끔 던졌다.

불길해 보이는 한 가닥 어둠 속으로 무척이나 키가 큰 남자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서있었다.
사내는 바닥을 덮고도 남는 기다란 옷자락을 솜씨 좋게 끌어당기며 아이에게로 한 걸음 더 걸어왔다.
바스락 하고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여전히 숲이 내던지는 엄숙한 그림자에 흠뻑 젖어 코가 어디로 붙었고 입이 몇 개인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사내가 풍성하게 주름을 넣은 사제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복잡한 모양으로 조각된 석장을 오른손에 들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제르가디스는 여전히 바닥에 배를 깔고 드러누운 자세에서 무덤덤한 말투로 이렇게 질문했다.
『뭐야. 저승 사자야?』

그 질문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낯선 사내는 허리를 잡으며 웃었다.
『하하하, 너무 하군요. 이렇게 현실감 나는 저승사자도 있답니까.』
『내가 보기에 당신은 썩은 나무들이 만든 시커먼 그림자 같아. 그러니 알게 뭐람.』
『호오, 그래요? 이것 참 실례... 아무래도 제가 어두운 곳에 서있는 모양이군요.』

사제는 얼른 사과했다. 사락 소리를 내며 풀을 헤치고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어스름하게 대기를 떠돌던 별빛을 받아 창백한 안색이 드러났다.
하얀 대리석같은 얼굴... 핏기는 하나도 없고 표정은 지나치게 단아했다. 약간 삐친 옆 머리카락이 그나마 인간다운 느낌을 주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얼핏 보면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파리한 뺨 위로 푸른 빛의 혈관이 고스란히 다 들여다 보인다. 100년 정도 햇빛을 보지 않고 살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얼룩 하나 묻지 않은 대리석 조각이 정교한 마법에 걸려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 했다. 게다가 눈꺼풀을 뜨지도 않은 채 이 복잡한 함정 투성이의 숲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가뿐하게 돌아다니는 걸 보니 맹세하건데 결단코 사람이 아니다.

『끙, 저승 사자가 맞군.』
제르가디스는 지친 얼굴을 도로 땅바닥에 처박았다.

저승 사자로 불리워진 사제는 약간 눈썹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분명 나뭇가지가 던지는 그림자 밖으로 걸어 나왔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이라 짐작된다면 좀 억울했다.

산기슭 너머로 떠오르고 있을 조각달의 빛을 받아 사제의 가뜩이나 하이얀 얼굴이 투명하게 빛났다. 그는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허나 팔을 내밀어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가만히 손바닥을 들었다. 그리고는 내려쳤다.
『예끼!』
찰싹.

장난스런 손길이 정수리를 가격했다. 순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팔에 힘이 쫙 빠져나갔다.
뭡니까, 이건. 기운을 잃은 아이의 얼굴이 땅속으로 도로 파묻혔다.

『사제에게 그런 무례한 말을 하다니. 그 벌로 까진 이마를 치료해 드리지요. 자, 어쨌거나 그만 일어나세요. 제가 팔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으니 저리 가요. 이런 건 침 바르면 금방 나아.』

자신의 팔꿈치를 붙잡은 커다란 어른의 손을 얼른 뿌리쳤다.
도대체가... 도깨비처럼 나타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쩍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어두컴컴한 숲속을 저 혼자 걸어다니는 사제라는 것이 가당키나 하더냐, 차라리 좀비라고 해라. 숲에서 늑대를 만나면 그런가보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석장을 든 사제를 저만치 밀어버리며 제르가디스는 옆으로 게걸음질 했다. 겉 모습은 그럴 듯 하다고 해도 신용할 수는 없었다. 아이는 충분히 주의해가며 저만치 굴러가버린 참나무 물통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아무도 믿지 마라. 타인 앞에서 함부로 등을 보이지 마라.
제르가디스는 이지스에게 배운 그대로 잽싸게 달아날 채비부터 갖추었다.
비밀스런 미소를 띈 그 자의 얼굴이 어쩐지 싫었다. 모든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식의 부드러운 표정... 신을 받드는 자들은 모두 저런 식으로 웃을까. 눈을 감고도 남의 뱃가죽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모양이다. 그 앞에서 떨떠름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병신이었다.

『마을을 찾는다면 산 아래로 내려가요, 여긴 인가가 없으니까.』
『그런가요. 하지만 이 부근으로 인가가 없다면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타당한 질문이었다.
제르가디스는 잠시 얼빵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어디서부터 왔더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덕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열심히 뛰어 내려온 길이다.
눈을 감았어도 그 동작이 훤히 보인다는 식으로 사제 역시 아이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굳게 닫겨진 눈꺼풀일지언정 보이는 건 보인다. 미소와 함께 사제는 고개 너머를 향해 얼굴을 고정시켰다.
어디서 왔습니까...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사제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삐친 머리카락의 사제가 다시 편안하게 자세를 바꾸었다.
『그래요, 무척이나 궁금하군요. 당신은 어디로부터 왔죠?』
『내가 어디에 살든 당신은 상관 없잖아. 그런 걸 알아서 무엇에 쓰겠어.』
말대꾸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렸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진흙 투성이의 손을 바지자락에 반복해서 문질렀다. 그런다고 나아질 마음도 아니었지만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장님 사제는 그런 아이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숨에 휘어잡기라도 할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눈이라도 멀쩡하게 뜨고 있었으면 괜찮았을 것을.
어딘가에서 눅눅한 바람이 불어왔다.
얇은 비단으로 만든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울려퍼졌다.
저승사자다. 아무리 본인이 저승 사자가 아니라고 주장해도 설득력이 없다. 저 사내의 등뒤로 당장 커다란 박쥐 날개가 돋아난다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제르가디스는 후둘거리는 무릎에 힘을 줘가며 개울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섭다고 생각되면 보지 말자. 악몽이라 할지언정 무시하면 그만이다.
삐끗한 발목 관절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젠 물을 퍼다가 그 지옥같은 곳으로 서둘러 돌아가자. 더 이상 이 사내와 상관하고 싶지가 않았다. 사실 그럴 시간도 없지 않던가.
그래서 아이는 무거운 물통을 질질 끌어당기며 사제를 지나쳐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엷은 박하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르가디스는 우뚝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사제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르가디스의 그림자를 사뿐히 즈려밟고 선 사제의 희미한 웃음 소리가...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목구멍 안으로 삼켜지고 있는 큭큭 소리가 하나의 올무처럼 발목을 잡았다.
조롱하는 웃음.
제르가디스는 고개를 들어 키 큰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아, 너무나도 아름다운 악마였다.
제르가디스는 커다란 물통을 방패인양 끌어 안았다.

『내가 그녀에게 장난 삼아 준 단 한 방울의 피... 말해봐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어진 것은 엄청난 무게의 침묵이었다.
사제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아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르가디스의 뺨으로 따뜻한 호흡이 닿았다. 징그러웠다.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러댔다. 따뜻한 온기에도 불구하고 참을 수 없도록 소름이 돋았다.

『아클루즈 그녀는 왜 이런 기괴한 것을 남겼을까. 하나도 달갑지가 않건만.』

후후후.

거짓말처럼 사제가 표정을 다시 바꿨다. 제르가디스는 눈을 떼지 못하고 사제가 입술을 움이는 것을 보았다. 가지런하고 하얀 이가 보였고 분홍빛 혓바닥이 보였다.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기를 진동시켰고 그게 아이의 고막을 두둘겼다.

『혹시 말입니다. 당신은 저 윗쪽에 자리잡은 허름한 오두막에 살고 있습니까? 그 비명 소리 요란한 오두막 말입니다. 전 그곳을 지나치다가 이런 곳에 어연 구제불능의 마물 소굴이 다 있느냐며 쯧쯧 혀를 찼었거든요. 뭐, 자기들끼리 싸우는 중인지 안에서 시끌벅적하게 투닥거리더군요. 가만 내버려두면 자기들끼리 잡아먹게 생긴지라 그래서 일단은 무시하고 내려왔는데... 정작 알고 보니 사람이 사는 곳이었나 보군요. 가까운 근처로 인가가 없다면 분명 당신은 그곳에서부터 내려왔을테니 말입니다... 그렇죠?』
『마, 마물? 비, 비명 소리...? 설마... 이지스!』

그 즉시 천근만근 무겁기만 한 물통을 옆으로 내다 던졌다.
이럴 수가! 애초부터 일이 그렇게 되는 거였나!
절룩거리는 다리로 뛰어가고자 했다. 두 팔을 허우적대며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 했다. 만약 사제가 아이의 어깨를 와락 붙잡지 않았더라면 넘어져 구르는 한이 있더라도 허겁지겁 달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사제는 아이가 자신을 지나쳐 가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악다귀 같은 힘으로 제르가디스를 억눌렀다.

『뭐 하는 거야, 이거 놔줘요!!』
『놔 주면... 당신은 그리로 돌아가는 겁니까? 왜요. 뭐 하러요.』
『내 친구가 죽게 될 거란 말예요! 가서 말려야만 해, 막아야만 한다고요!!』
『막아?』
사제는 느긋한 어조로 아무렇지도 않게 되묻기나 했다.
『그래요. 우린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렇게 약속했어! 살아서 복수라는 걸 할 테야! 우린 안 죽어! 살아남아 보일테다! 우릴 죽이고 싶어한다 해도 죽지 않을 거야! 살아서... 살아서! 그러니까 날 가게 해줘, 이 망할 자식아! 급하다고!』

제르가디스의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동시에 사제는 윽 소리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아이가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을 덥썩 깨문 것이다. 송곳니가 피부를 꿰뚫었다. 사제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장난감을 선사하마, 레조. 그대의 피 한 방울로 엄청나게 재미있는 것을 하나 만들어주지.》
아주 오랜 옛날.
수은의 여왕 아클루즈는 도도한 자세로 그렇게 말을 했었다.
사제는 눈썹을 접으며 뒤늦은 동감을 표시했다.
『으윽!! 재미있는 것이라 하였습니까? 과연. 확실히 지루하진 않겠습니다.』

사제는 자신의 손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는 아이를 나무기둥 쪽으로 냅다 밀어 붙였다.
힘으로라면 이길 재주가 없었다. 제르가디스는 멧돼지 뿔에 가슴을 걷어 차였다는 통증을 맛보며 딱딱한 나무에 얼굴을 박았다.
일그러진 사제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맞는다! 그렇게 생각하곤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물론 사제는 그런 아이를 향해 주먹을 휘둘러대는 무식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만 표정과는 정 반대의 엄청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아이를 쿠욱 찔러댔을 뿐이었다.

『좋습니다, 제르가디스. 저는 묻겠습니다. 당신은 살고 싶습니까?』
그가 가르쳐주지도 않은 아이의 이름을 불러댔다.
『강해지고 싶습니까? 제르가디스.』
그리고 몰아 부치듯 유혹했다.
『강해져서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손에 쥐어보고 싶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
그들 사이로 은밀한 비밀이 흘러갔다.

갈망...

아이가 홀린 듯이 사제를 바라보았다.
살고 싶다는 것이 죄인가? 강해지고 싶다는 것이 잘못인가? 운명을 바꿔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에 대한 반역이던가?
파르르 떨리는 제르가디스의 손이 사제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살고 싶다. 강해지고 싶다. 그래서 행복해지고 싶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가!

『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운명을 바꿔보는 겁니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사제는 가만히 아이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는 소매 춤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무엇인가를 아이의 손으로 넘겨주었다.
제르가디스는 덜덜 떨다 못해 펄쩍 뛰었다. 죽음의 사신이... 그의 생존을 희망한다고 말해주었다.
미지의 에너지가 파앙 폭발했다.
사제는 잔인하게 미소지으며 언덕 너머를 손가락질했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자, 가시죠. 제르가디스, 바야흐로 사냥의 계절입니다.』

다 헤어진 레이스 커튼이 거미줄처럼 더러운 모습으로 드리워졌다. 덕분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대신 상황을 짐작케 하는 요란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숨을 헐떡이며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도록 닳아버린 손잡이를 잡았다.
집 안은 렛셔 데몬이 모여 앉아 달밤에 족장 회의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소년의 목소리로 유리창이 흔들렸다. 팔을 꺽고 다리를 비틀어대는 익숙한 소음이 뒤틀린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땀에 절어 진득거리는 체취... 두려움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잡이를 잡은 팔이 돌덩이 같다. 순간 마음 속에서 모든 것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납덩이의 무게를 가진, 자신의 심장이 비명을 질러댔다. 손가락 마디마디로 거대한 코끼리가 각기 한 마리씩 매달렸다. 깊은 바다 속으로 몸이 가라앉고 있다. 등 위로 바위가 눌러대고 있다. 
또다시 유리창이 흔들렸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선반에서 떨어지면서 와장창 깨져나갔다.
손가락을 오무려야 하는데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무섭다.

『안돼. 물러서지 마. 나는 강하다... 나는 강하다... 흐읍, 흐읍, 흐읍.』
심호흡을 해보았다. 각오하며 손잡이를 돌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며 뛰어 들었다.

방안은 촛불하나 없어 어두웠다. 식탁 아래로 의자란 의자는 죄다 뒤로 넘어가 있었고 빈 술병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널렸다. 먹다가 접시 채 집어 던진 음식 찌꺼기가 벽에서부터 천장까지 튀었다. 진한 갈색으로 보이는 토마토 소스가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처럼 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 전쟁을 치루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지스!』
요사스러운 빛깔의 어둠이 심판관처럼 멀찍이 물러나 팔을 벌렸다. 고약한 짐승 하나가 씩씩 대며 이를 번득였다. 그, 짐승의 발 아래로 목이 졸린 나머지 꺽꺽 힘들게 기침하는 기척이 들려왔다.
괴물은 등뼈를 가로로 분질러 버리겠다며 자그마한 소년을 타고 눌렀다. 올라가 앉기만 했던가. 눈을 뒤집고 혀를 앞으로 내어민 아이의 얼굴을 깍지 낀 두 주먹으로 쿵쿵 내리 찍었다.
얻어맞은 눈은 너무 부어서 떠지지도 않는다. 이지스의 코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고통이 너무 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애꿎은 손톱을 긁어댔다.

제르가디스는 맹렬하게 분노했다.
『거짓말쟁이! 아직 약속한 1시간은 절반도 지나지 않았단 말이야!』
뷜터스는 이미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원숭이 같기도, 황소 같기도 한 얼굴을 하고는 초록색의 끈적거리는 콧물을 흘렸다. 썩은 이끼 색의 콧물이 바닥에 고여 초록색의 늪을 만들었다. 대지를 더럽히는 그 늪에서 징그러운 느낌의 빨간 풀이 돋아났다. 빨간 풀에선 숨막히는 쇠비린내가 났다.
제르가디스는 코를 막았다. 어둠 속에선 흩뿌려진 피는 그저 검게만 보였다.

『그만두지 못해!!』
떨리는 손으로 의자를 아무렇게나 들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그걸 뷜터스의 정수리 위로 내리찍었다.
팔과 손바닥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무척이나 아팠다. 낡아빠진 의자가 후두둑 무너져 내렸다. 이지스의 목을 죽어라 눌러대던 뷜터스가 으악 비명 지르며 자기 머리를 감싸쥐었다.
짐승의 눈이 부러진 의자를 노려보았다. 이어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이놈의 새끼!! 감히 어딜!!』
피로 물든 늪을 가로지르며 괴물은 엄청난 속도로 제르가디스를 향해 덤벼들었다. 누렇게 번들거리는 눈동자 속으로 광기가 보였다. 제르가디스는 뻣뻣하게 얼어붙은 자세에서 꼼짝도 못했다.

『제르...가디...스, 도망가!』
그 순간 괴물이 주춤거렸다. 엉망으로 얻어터진 이지스가 젖 먹던 힘을 다해 뷜터스의 장딴지를 잡고 늘어진 탓이다. 뷜터스는 노성을 질러가며 다리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이지스는 끈끈이 풀처럼 달라붙어 그의 바지에 붉은 물감을 마구 발라댔다. 터진 입술과 부러진 코가 스칠 적마다 얼룩은 커져갔다. 뷜터스의 분노는 하늘을 찔러댔다. 그는 화가 난 만큼 아지스를 세차게 걷어찼다.
가차없이 퍼붓는 구둣발에 소년의 이마는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이 나쁜 놈!』
나머지 장딴지로 제르가디스가 달라붙었다. 덕분에 뷜터스가 비틀거렸다. 이때다. 부러진 의자 부스러기를 주워 힘껏 찔렀다. 우왓 비명 지르며 그가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왜소한 체구의 아이의 힘으로 건장한 남자 근육을 상처 입히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간의 생채기 자국만 생겼을 뿐, 오히려 그는 더욱 흥분해서 제르가디스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뒤틀었다.
『죽여버리겠다!』
갈기갈기 찢어 발기겠노라며 마음 속으로 맹세한지라 추호도 봐주는 것이 없었다. 제르가디스는 눈이 튀어나오는 고통을 맛보며 주저앉았다. 마른 장작을 분지르는 소리가 났다. 뼈가 두동강이 났다.

『안돼!!』
이지스의 눈빛이 변했다. 내일이라도 틀니를 끼겠다는 각오로 뷜터스의 가랭이 사이를 물어 뜯었다.
급소를 당한지라 뷜터스는 버티지 못하고 붙잡은 제르가디스를 놓아버렸다.
『오냐! 너 죽고 나 죽자!』
부러진 팔이 흔들릴 적마다 머리가 울리도록 아팠다. 그래도 참고 온몸으로 박치기해 들어갔다.

세 명은 한 덩이가 되어 마룻바닥을 뒹굴었다.
고얀 놈, 씹어 죽일 놈, 뒈질 놈... 욕이란 욕은 있는대로 퍼붓던 뷜터스는 바닥을 더듬어 깨어진 접시 조각 하나를 찾았다. 그리고 그걸로 주욱 그었다.
뺨이 찢기는 바로 그 순간엔 그저 차갑다는 감촉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지스는 비명을 지를 절묘한 타이밍을 놓치고는 멀뚱거리며 자기 얼굴을 감싸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맑은 핏방울이 솟구쳤다.
제르가디스는 몸을 던져 재빨리 이지스를 가슴에 껴안았다. 1초의 어긋남도 없이 이지스의 상처를 노리고 힘찬 발길질이 날아갔다.
『욱!』
벽에 부딪친 등뼈가 살벌한 비명을 질러댔다. 시야 가득히 황홀한 빛깔의 별이 보였다. 틀렸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가슴은 형편없이 욱씬거렸고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며 찌릿찌릿 저려왔다.
위기였다. 제르가디스는 옆으로 추욱 늘어지려는 이지스를 부둥켜 안은 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죽일 놈. 둘이서 짜고 나에게 감히 반항이란 걸 해?!』
네발로 기어서 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르가디스의 다리를 움켜잡고 지옥이라는 곳으로 사정없이 끌어당기려 했다.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었는데 전류에 감전된 듯한 무릎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안돼!』
끌려가지 않기 위해 마룻바닥으로 손톱을 틀어박았다.
뒤돌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 아래로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먹이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사제는 친절하기조차 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공정하다고요? 그는 강하고 당신은 약하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억지로 상황을 조절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죠. 모두가 사이 좋게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겁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수면 위로 내밀 수 있는 건 머리통과 어깨 정도가 겨우죠. 누구나 할 것 없이 말입니다. 아주 공평하지 않습니까? 그 다음 일은 순전히 집념에 달린 문제이지요.》

인형의 그것처럼 대롱거리는 부러진 팔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신음하며 고개를 숙여 옷자락을 입으로 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등가죽이 꿰였다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팔이 안으로 구부러졌다. 땀이 바가지로 흘러내렸다. 옷가지를 물고 또 당겼다. 손등이 바지춤을 때렸다. 할 수 있다. 한 번만 더 하자. 아이는 이빨로 단단히 문 소매자락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조심하세요. 이건 살짝 충격만 줘도 깨져버린답니다. 아주 예민하지요.》

기절하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부러진 팔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기분 나쁜 사제로부터 건네받은 구슬이 호주머니에서 빠져나왔다! 체온으로 덥혀진 구슬은 엉망으로 어지럽혀진 방바닥을 세차게 튕겨 나갔고, 깨지기 쉽다던 사제의 경고대로 따앙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어지럽게 유리 파편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동시에 구슬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파랗게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제작자가 의도했던 그대로 기분 나쁜 초록색의 안개를 풀풀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으아아악!』
다 함께 앞 구르기를 해보자며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갈고리 발톱에 등가죽이 걸렸다. 아니다. 누군가 쇠고랑으로 목을 꿰뚫은 다음 돼지고기 저장고에 발가벗겨 매달아 놓았다. 죽음과도 같은 통증이었다. 위장이 엉망으로 뒤틀리면서 죽을 난리가 났다. 좁쌀보다 더 작은 체격의 누군가가 배꼽으로 기어들어가 내장을 갈아대고 있는게 분명했다. 장이 토막나고, 간장은 행주처럼 비틀려 짜지고, 대장은 꽈리염주가 되어 차곡차곡 접혔다.
비명은 3중창으로 터져 나와 온 집안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뷜터스가 바닥을 설설 기어갔다. 소름끼치는 흐느낌은 채 끝맺지도 못했다. 엉거주춤 엉덩이를 하늘로 들어올리기가 무섭게 불가항력적으로 입과 항문에서 힘차게 오물이 터져 나왔다.
입이 더욱 크게 벌려졌다. 지난 나흘동안 집어삼켰던 음식을 먹었던 순서와 정 반대로 벌컥벌컥 게워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몸속에 든 위장까지 토했다.
뷜터스는 살려 달라 애원하며 눈물을 펑펑 뿌려댔다.

오물과 피냄새가 진동했다.
악마가 머리 위에서 낫을 갈아댔다.

《이 독은 생명에는 지장 없습니다. 하지만 무섭도록 고통스럽죠.》

제르가디스는 입안 가득히 차오른 혼탁한 액체를 뱉었다.
정신이 흐릿했지만 이까짓 아픔은 항상 당해왔다. 그러니까 이대로 멍청하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
기회를 만들었다. 운명이란 걸 사냥해야만 했다.
벽에다 붉은 손바닥 도장을 찍어대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뷜터스는 더 이상 그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물 먹은 돼지처럼 엎드려 쥐약 먹은 개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고통이 그들을 평등하게 만들었다.
제르가디스는 생전 처음으로 뷜터스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흐믓하게 미소라는 걸 지어 보였다.
검정색 휘광으로 몸을 감싼 어둠의 천사가 그 영광 가득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죽을 수 없어. 매일... 매일... 나를 때렸지?』

악령이 춤을 추었다. 아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야말로 반 미치광이처럼 반복하여 발길질했다. 오물의 바다 속으로 고개를 처박은 뷜터스가 그때마다 움찔거렸다.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희열에 들떠 더욱 발길질했다.
죽여야 한다. 살기 위해 이것을 죽여야 한다. 녹색의 괴물은 하염없이 거품을 토해냈다. 아니, 몸 자체가 거품으로 변해갔다. 처음에는 귀가 눈 녹듯이 사라졌고, 다음으로는 얼굴이 녹아 내렸다.
하얀 구더기가 썩은 돼지고기를 향해 달겨든다.
더럽다. 더럽다. 이것들은 어서 검은 먼지가 되어 사라져야 한다.
최후의 힘을 담아 뷜터스의 머리를 세차게 걷어찼다.

『이 나쁜 자식아! 난 살아야 한다고. 살아서, 살아서! 네놈 따위...!』

어지러웠다. 그러면서도 기분은 끝장 나게 좋았다.
우엑... 사내의 머리통 위로 누런 신물을 토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장소와는 전혀 걸맞지 않은 우아한 동작으로 누군가 현관문을 열었다.
키가 큰 그 남자는 차렷 자세로 한참동안 미동조차 하질 않았다. 그저 살짝 입술을 움직여 웃었을 뿐이다. 달빛을 등지고 서선 은밀하게 속눈썹을 흔들었다.
숨막히는 악취 속에서 사제는 한 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조용히 움직였다. 신발 아래로 끈쩍거리는 무엇인가가 달라붙었건만 옷자락을 우아하게 잡아 올리며 더러운 오물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쳐나갔다.

달빛이 피빛이었다.

『어땠습니까. 사냥은...』

아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식탁 밑에서 숨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흐느낀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닐텐데 그저 물기 가득한 눈만 조용히 반짝였다.

순간 술병을 쌓아두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흔들렸다.
사제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파른 계단 아래로 고깃덩어리가 누워있었다. 푹 곪은 냄새가 났다. 팔 다리를 벌리고 갈지 자로 드러누운 채 그는 그곳에 버려져 있었다. 양말이 벗겨진 한쪽 다리는 계단 손잡이 사이로 튀어나왔다. 토사물과 오물로 범벅이 된 머리 위로 한가롭게 파리가 날았다. 엎지른 술과 음식 찌거기가 묻어 입고 있는 옷은 매우 더러웠다. 바지는 피투성이였다.
계단을 구른 탓에 반쯤 뭉개져버린 눈동자엔 아직 내지르지 못한 비명이 남아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맹인의 눈이 한참동안 계단을 향했다.
파리가 앵앵대는 소리가 귀찮았다.
레죠는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열려진 지하실 문을 달각 소리 내어 닫아버렸다.

『식중독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사제의 말에 아이들은 뜨거운 물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 뛰었다.
식중독?

사제는 손가락 하나를 턱으로 가져간 자세에서 동화책 읽듯이 줄줄 읊어댔다.
『제임스 뷜터스씨와 그의 피보호 아이들 이지스와 제르가디스는 썩은 고기를 먹고 식중독을 일으켰습니다. 아이들은 괴로워했고 뷜터스씨 역시 악몽같은 고통에 사로 잡혔습니다만 천성이 상냥한 그는 아이들을 위해 약을 가지러 지하실로 저 혼자 내려가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급작스런 탈수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그는 경사진 계단에서 실족, 실수로 자기 목을 분질러뜨리고 말았습니다...』

달빛 아래서 빨갛게 빛나는 사제는 그렇게 말하곤 어깨를 으쓱였다.
광기에 찬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맴돌았다.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적국의 왕을 참수한 장군처럼 사제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 아직은 살려두겠습니다, 제르가디스. 당신은 절 즐겁게 만들어 주었거든요.